[시골살이 일기 47] 대숲 곁으로
― 보고 듣고 마시고

 


  대숲 곁을 걷습니다. 큰아이가 먼저 저 앞으로 달려갑니다. 작은아이가 누나를 좇아 콩콩콩 달려갑니다. 큰아이는 언제나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작은아이는 누나가 가르는 바람을 맡으며 뒤따릅니다.


  큰아이는 대숲을 스치고 먼저 사라집니다. 작은아이는 대숲 곁에서 살짝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누나한테 갑니다. 두 아이는 대숲 곁을 지나면서 대숲인 줄 알아차릴 수 있으나, 대숲인 줄 모르고 그냥 달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려도 즐겁고 몰라도 즐겁습니다. 봄바람이 일렁이면서 댓잎을 건드리는 소리는 노래가 되어 아이들 마음으로 깃듭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난 대숲 곁을 천천히 걷습니다. 아이들은 이 길을 ‘하얀 길’이라고 가리킵니다. 아스팔트로 덮인 길은 ‘까만 길’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흙으로 된 길은 ‘누런 길’쯤 될 테고, 풀밭을 이룬 길은 ‘푸른 길’인 셈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거의 다 까만 길을 밟거나 하얀 길을 디딥니다. 누런 길이나 푸른 길을 밟거나 디디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까만 길이나 하얀 길은 사람길 아닌 찻길입니다. 누런 길이나 푸른 길은 풀길이요 숲길이며 들길입니다. 길이면서 들이고, 길이라기보다 숲입니다.


  누런 길과 푸른 길에서는 봄내음이 피어납니다. 까만 길과 하얀 길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런 길과 푸른 길에서는 봄노래가 흐릅니다. 까만 길과 하얀 길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까만 길과 하얀 길을 넓힙니다. 누런 길과 푸른 길을 갈아엎습니다.


  보고 듣고 마시는 대로 삶이 됩니다. 아이들이 대숲 곁을 달리면서 대숲바람을 마십니다. 나도 아이들 곁에서 대숲바람을 먹습니다. 4347.3.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동백마을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살이 일기 46] 풀밥을 먹자
― 얘들아 밥이 다 되었어

 


  밥을 다 차릴 무렵 풀을 뜯습니다. 풀을 미리 뜯을 수 있지만, 밥이랑 국이랑 다 될 무렵 비로소 풀을 뜯습니다. 어느 때에는 아이들이 너무 배고파 하기에 미처 풀을 못 뜯고 밥이랑 국부터 먹이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혼자 마당으로 내려서서 풀을 뜯어서 헹군 뒤 송송 썰어 올리기도 합니다. 풀을 일찌감치 뜯는 적이 없습니다.


  여러 해째 이렇게 풀을 뜯으며 생각합니다. 왜 미리 풀을 안 뜯을까? 왜 미리 풀을 뜯는 버릇을 들이지 못할까?


  새봄을 맞이해 봄풀을 뜯다가 문득 한 가지 떠오릅니다. 어떤 풀을 뜯어서 먹든, 뜯는 자리에서 바로 입에 넣으면 가장 맛있습니다. 뜯어서 밥상맡까지 가지고 올 적보다 풀밭에서 뜯어 곧바로 먹으면 가장 맛있어요.


  밥을 차려야지 하고 생각하는 ‘머리’에서는 미리 풀을 뜯으면 밥상 차리기가 한결 수월하다고 여깁니다. 밥을 차리는 ‘마음’에서는 갓 뜯은 풀이 가장 맛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머리보다 마음이 늘 앞서기에, 풀을 맨 나중에 뜯어서 차리는구나 싶어요.


  풀 뜯는 데에는 몇 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슥 한 바퀴 돌면 됩니다. 아이들은 곧잘 풀뜯기를 거듭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먹을 풀을 스스로 뜯으면 더 맛있습니다. 남이 차려서 내미는 밥도 맛나지만, 손수 차려서 먹는 밥이란 더없이 맛있어요. 손수 씨앗을 심어서 거둔 푸성귀라면 훨씬 맛있을 테지요.


  풀을 뜯으며 생각합니다. 풀은 사람이 따로 풀씨를 뿌리지 않아도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랍니다. 풀은 사람 손길을 타야 잘 자라지 않습니다. 풀은 스스로 돋고 스스로 푸릅니다. 사람이 이런 씨앗 저런 씨앗을 심어 거두어 먹어도 좋을 텐데, 스스로 돋는 풀만 뜯어서 먹으려 해도 다 못 먹습니다. 풀밥을 먹고 풀물을 마시기만 하더라도 사람은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고속도로를 늘리거나 아파트를 더 지어야 할 이 땅이 아니라, 풀밭과 숲을 가꾸고 돌보면서 누구나 풀밥을 실컷 누릴 수 있을 때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 땅이 되리라 느껴요. 논둑과 밭둑을 시멘트로 덮으려 애쓰지 말고, 논둑과 밭둑에서 자라는 풀을 즐겁게 맞이해서 기쁘게 먹으면 넉넉하리라 느껴요.


  풀을 먹는 몸에서는 풀내음이 납니다. 풀을 먹는 사람은 풀내음이 나는 글을 씁니다. 풀을 먹는 사람은 풀내음이 감도는 책을 사귑니다. 풀을 먹는 사람은 풀내음으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7.3.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동백마을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살이 일기 40] 창호종이문으로 빛살
― 아침맞이

 


  시골집 아침은 소리와 빛 두 가지로 찾아듭니다. 동이 틀 무렵 창호종이문으로 빛살이 살포시 깃듭니다. 창호종이문으로 빛살이 살포시 깃들 무렵이면 집 둘레로 멧새가 찾아들어 아침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집 처마 밑 제비집에는 사월부터 팔월까지 제비가 깃들고, 제비가 집을 비우는 구월부터 이듬해 삼월까지 여러 텃새가 살짝 깃들어요. 겨우내 딱새 두 마리가 제비집에 깃들었고, 겨울이 끝나는 이월 즈음부터 참새 세 마리가 제비집에 깃듭니다. 초피열매나 후박열매를 먹으러 우리 집 마당을 찾아오는 멧새가 많은데, 이들은 열매뿐 아니라 나비 애벌레가 있으면 콕콕 집어서 먹습니다. 우리 집 풀밭이나 나무에는 풀벌레와 애벌레가 많으니 온갖 새들이 아침저녁으로 수없이 찾아들어 먹이를 찾으면서 고운 노래를 베풉니다.


  울림시계가 없어도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지만, 숱한 새들이 찾아들어 노래를 부르니, 새벽에 안 일어날 수 없기도 합니다. 몸이 고단한 날은 조금 늦게까지 이부자리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새가 얼마나 곱게 노래를 들려주는가 가만히 들으면서 창호종이문으로 빛살이 차츰 짙어지는 결을 바라보곤 합니다.


  날이 밝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날이 환하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저녁이 되어 해가 기울 무렵에는 날이 저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불을 켜야 하는 밤에는 이제 깜깜하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불을 켜는 밤에는 아이들을 재워야겠네 하고 돌아보고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곱씹습니다. 얘들아, 오늘 하루도 잘 놀았니? 얘들아, 오늘 하루도 마음껏 뛰놀면서 쑥쑥 자랐니?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고 가을을 거쳐 겨울이 되면 창호종이문으로 스미는 빛살이 줄어듭니다. 저녁이 일찍 찾아오고 아침이 더디 찾아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서 여름 문턱으로 다다르면 창호종이문으로 스미는 빛살이 늘어납니다. 저녁이 한결 길고 아침이 일찍 찾아옵니다.


  포근히 젖어드는 아침을 맞이합니다. 따사로이 감기는 아침을 누립니다. 기쁘게 여는 새 아침을 노래합니다. 4347.3.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동백마을에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착한시경 2014-03-2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지문으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나는 아이들은 참 행복할것 같아요~ 엎드려 책을 보는 아이 모습이 참 예뻐요^^

숲노래 2014-03-25 08:08   좋아요 0 | URL
옛날에는 시골집이 요런 종이 한 장으로 밖과 안을 갈랐으니, 겨우내 참 추웠겠네 싶어요. 도시 아파트와 견주면 이런 시골집은 무척 춥다고 할 만하고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빛과 볕과 살을 더 깊이 누리거나 느끼기에 철흐름을 읽고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아서 좋기도 해요~
 

[시골살이 일기 45] 봄꽃마당
― 봄까지꽃, 봄내꽃, 봄파랑꽃, 봄꽃

 


  고장마다 말씨가 다릅니다. 고을마다 말투가 다릅니다. 어디에서나 똑같이 있는 물고기라 하더라도, 고장마다 이름을 달리 붙입니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보는 풀이라 하더라도, 고을마다 이름을 새롭게 붙입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먼먼 옛날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일이 없으니,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쓰는 말이 달라요. 먼먼 옛날 평안도와 경기도를 오가는 일이 드무니,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쓰는 말이 달라요. 같은 충청도에서도 보은과 제천 사이를 오갈 일이 없습니다. 보은에서 났으면 보은에서 살고, 제천에서 났으면 제천에서 살아요. 제천에서 났어도 읍내가 있고 면소재지가 있어요. 이쪽 두멧마을이 있고 저쪽 두멧마을이 있습니다. 읍내와 면소재지마다 말투가 다를밖에 없는 한편,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이 다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고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고장에서 살아가는 대로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나눠요. 이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살아온 대로 이름을 달며 이야기를 주고받지요.


  오늘날은 서울부터 부산까지 두 시간이면 달린다 하고, 서울과 제주 사이를 한 시간만에 오간다 해요. 길이 아주 빠르게 열려요. 서로 멀디먼 고장이었을 적에는 저마다 쓰는 말이 사뭇 달랐어요. 서로 가까이 오갈 수 있은 뒤부터 차츰 비슷하게 말하면서 지내요. 어디에서든 똑같은 교과서를 쓰고, 똑같은 학교를 다니며, 똑같은 책을 보는 한편, 똑같은 방송을 봅니다. 사람들 말씨는 다 달랐으나 다 비슷하게 됩니다.


  봄꽃이 앙증맞게 피어나는 마당에 서며 바람노래를 듣습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봄볕을 누리면서 뛰놉니다. 시멘트로 덮인 마당 곳곳은 갈라져서 틈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틈마다 푸른 싹이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새 파릇파릇 조그마한 꽃송이가 터집니다. 조그마한 꽃송이를 바라보려고 쪼그려앉습니다. 고개를 내밀어 들여다봅니다. 이 작은 꽃을 이 고장에서는 예부터 어떤 이름으로 가리켰을까 궁금합니다. 이 예쁜 봄꽃을 이 마을에서는 예부터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나물’이나 ‘봄나물’이나 ‘봄풀’이나 ‘봄꽃’이라고만 했을 수 있어요. 겨울이 저물 무렵 피어나 봄이 끝나면 저문다고 해서 ‘봄까지꽃’이나 ‘봄내꽃’이라 했을 수 있어요. 봄날 파랗게 물드는 빛깔이 곱구나 싶어 ‘봄파랑꽃’이라 했을 수 있어요.


  꼭 한 가지 이름만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느끼는 대로 가리키고, 떠오르는 대로 붙였으리라 느껴요. 이런 느낌과 생각도 고장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달랐으리라 느껴요. 즐겁게 피어나는 사랑을 담아서 이름을 지었겠지요. 기쁘게 샘솟는 꿈을 실어서 이름을 주었겠지요. 삼월 십일을 지나면서 봄까지꽃, 또는 봄내꽃, 또는 봄파랑꽃은 활짝활짝 번집니다. 봄햇살이 기우는 흐름에 따라 마당에 조그마한 꽃그림자를 만듭니다. 한참 동안 봄꽃내음을 맡습니다. 4347.3.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살이 일기 44] 새하얀 눈밭
― 해마다 한 번 찾아오는 빛

 


  지난밤에 달무리가 지더니 이튿날 눈밭이 됩니다. 지난밤 한쪽 하늘은 별빛이 초롱초롱하고 다른 한쪽 하늘은 달무리로 뿌얬는데, 그예 이튿날 눈보라가 날립니다. 다른 고장으로 치면 눈보라란 이름을 붙이기 멋쩍지만, 고흥에서는 눈보라라 할 만한 눈발입니다. 밤부터 아침까지 눈이 그득그득 내려서 쌓입니다.


  다만, 워낙 포근한 고흥인 터라, 고무신이 폭 잠길 만큼 눈이 내리더라도, 아침 열한 시를 지나 열두 시가 되면서 거의 다 녹고, 낮 한 시가 되니 언제 눈이 내렸느냐는 듯이 모두 녹아 사라집니다.


  고흥에서 살아가며 한 해에 꼭 한 차례씩 눈밭을 만납니다. 두 차례나 세 차례도 아닌 한 해에 꼭 한 차례입니다. 그리고, 이 눈밭은 열두 시를 넘기면서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언제 눈발이 퍼부었느냐는 양, 아무 자국이 안 남습니다.


  아이들은 눈을 맞으면서 놉니다. 눈을 맞으면서 놀다가 춥다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눈이 녹고 나니 햇볕이 쨍쨍 비추고,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놉니다. 군데군데 조금 남은 얼음조각을 들고 입에 넣기도 하고 한참 손에 쥐면서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마을에 자가용 끄는 사람이 없으니, 눈이 오건 말건 아무도 안 쓸고 안 치웁니다. 쓸 까닭이나 치울 까닭조차 없도록 눈은 스스로 내려서 스스로 재빨리 녹아 사라집니다. 눈이 오면 모두들 대청마루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을 구경할 테지요. 하얗게 쌓이는 고운 빛을 바라보며 논과 밭과 숲과 들을 넉넉히 덮는 반가운 눈을 노래하겠지요.


  한 차례 내린 뒤 바로 녹은 눈은 새봄을 재촉합니다. 겨우내 딱딱하게 언 땅이 보드랍게 풀립니다. 눈 내려 녹은 자리마다 푸른 빛이 감돕니다. 4347.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