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52] 사월에 내리는 비

― 봄비에 젖은 나뭇잎



  사월비가 내립니다. 봄은 비가 잦은 철은 아니나, 꼭 알맞게 비가 오는 철입니다. 겨울에 딱딱하게 굳은 땅을 봄비가 녹입니다. 녹은 땅에 알맞게 촉촉한 기운이 흐르도록 때 맞추어 비가 내립니다. 봄비가 내리면서 곳곳에 둠벙이 생기고, 논에 물이 고입니다. 이때에 개구리는 새로 깨어나고 알을 낳을 수 있습니다. 개구리한테 새 숨결을 불어넣는 봄비입니다. 풀잎도 나뭇잎도 봄비를 맞으면서 한결 싱그럽습니다. 볕만 드리우면 몇 가지 풀은 살짝 억척스레 올라옵니다. 이때에 봄비가 한 줄기 훑으면 억척스럽던 풀은 고개를 꺾습니다. 나무는 봄비를 먹으면서 줄기와 가지가 굵습니다. 이른봄에 꽃을 피웠다가 일찌감치 꽃송이를 떨군 나무는 열매가 잘 익도록 물을 듬뿍 빨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지구별 들과 숲에 싱그러우면서 새로운 빛을 베푸는 봄비입니다.


  봄비를 안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봄비는 온갖 숨결을 살리는 빗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봄 사월에 한국에 커다란 일이 터졌습니다. 바다에서 배가 한 척 가라앉았습니다. 참 많은 아이들이 바닷속에 잠겼습니다. 바닷속에 잠긴 아이들을 건져야 할 텐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가냘픈 아이들을 건지는 일이 힘겹습니다.


  이 봄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 봄비는 무엇일까요. 이 봄비는 내려야 할 때에 내리는 비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가라앉은 배는 가라앉지 말아야 하는데 가라앉은 배입니다.


  시골에서는 비를 맞으며 땅을 갑니다. 이 비와 함께 땅을 갈아야 푹푹 잘 들어가고 깊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는 이 비를 기다리며 씨앗을 심고 모를 냅니다. 고춧모를 심든 토마토 모를 심든 오이 모를 심든, 이 비가 내리기를 기다려 여러 가지 씨앗을 심고 모를 냅니다.


  봄에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사월에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이기에, 사월에 씨앗을 심지 않으면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밥을 얼마든지 굶겠다고 한다면, 밥을 안 먹고 견디겠다고 한다면 사월에 비가 안 내리기를 바랄 수 있겠지요.


  빗물은 초피꽃을 적십니다. 빗물은 느티꽃을 적십니다. 빗물은 가시나무 꽃을 적시고, 장미나무 꽃을 적십니다. 빗물은 우리 온몸을 적시고 우리들 마음을 살살 달래면서 내립니다. 온 땅에 푸른 빛이 짙도록 북돋우는 사월비입니다. 기쁜 마음에도 아픈 마음에도 푸른 숨결이 감돌 수 있기를 빕니다.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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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51] 다시 찾아온 제비

― 사월에 기다린 손님



  제비가 찾아왔습니다. 지난해와 그러께에 이어 올해에도 제비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제비가 무척 줄어들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마을 가득 온통 제비떼였는데, 올해에는 몇 마리 안 됩니다. 열 마리가 채 안 되지 싶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에 집집마다 온통 제비집이요 제비노래였으나, 올해에는 우리 마을에 제비가 몇 마리 없습니다.


  고흥에서 봄을 세 해째 맞이하면서 생각합니다. 지난해에 마을 이웃들이 농약을 그야말로 엄청나게 썼습니다. 그러께에는 이래저래 날씨가 안 맞고 태풍이 잦아 항공방제를 못 했으나, 지난해에는 항공방제까지 숱하게 했습니다. 농약바람이 불고 또 부니, 마을에 있던 제비가 눈에 띄게 줄었고, 우리 집 제비들도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지난해에는 아직 바다 건너 중국 강남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는데 하루아침에 죄 사라졌습니다.


  올해에도 봄에 농약바람이 곳곳에 붑니다. 마늘밭에 농약을 뿌리고, 논둑에 농약을 뿌리며, 고추를 심기 앞서 또 농약을 뿌립니다. 우리 마을은 ‘친환경농업단지’라고 하지만, 정작 ‘친환경’이 되도록 흙을 가꾸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농협과 군청에서 꾀하는 ‘친환경농업’이란 ‘친환경농약’을 쓰는 ‘산업’일 뿐이기도 합니다.


  마을에서 제비를 반기거나 기다리는 이웃이 없습니다. 마을에서 나비를 반기거나 기다리는 이웃이 없습니다. 제비도 여느 새처럼 곡식을 쪼아먹으리라 여기며 싫어합니다. 나비는 얼른 잡아서 알을 못 까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제비가 있어 날벌레를 잡고, 나비가 있어 꽃가루받이가 됩니다. 새가 없고 풀벌레와 나비가 없으면 시골은 얼마나 시골스러울 수 있을까요.


  해마다 사월에 한국을 찾아오고 팔월 끝무렵에 바다 건너 중국으로 돌아가는 제비입니다. 온몸이 반짝반짝 빛나며, 고운 노래를 하루 내내 들려주는 제비입니다. 올해에도 알을 까서 새끼들을 잘 건사하겠지요? 우리 집에서 느긋하게 머물면서 예쁜 새끼 여럿 낳아 팔월 끝무렵에 즐겁게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빕니다. 4347.4.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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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50] 새봄을 마신다
― 네 식구가 걷는 길

 


  자가용이 있으면 읍내로 나갈 적에 군내버스 때를 살피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가용이 있으면 먼 데로 마실을 갈 적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땀을 빼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가용이 있기에 더 낫거나 덜 낫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자가용이 없이 지내면서 네 식구가 함께 들길을 걸어갈 적에 두 다리를 더 잘 느낍니다. 땅과 흙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풀잎을 스치는 바람을 고즈넉하게 맞이합니다.


  자가용으로 빠르게 달릴 적에는 둘레를 살피지 못합니다. 두 다리로 걸을 적에는 언제나 우뚝 서서 한참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빨리 가야 하지 않습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두 우리 삶자리입니다.


  네 식구가 나란히 걷다가 들꽃을 보려고 혼자 살그마니 걸음을 멈춘 뒤에 천천히 좇아가는데, 곁님과 큰아이와 작은아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결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큰아이는 씩씩하게 가방까지 메면서 잘 걸어요. 작은아이도 웬만한 길은 콩콩 뛰듯 걷습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큽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햇볕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생각을 키웁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노래를 합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웃습니다.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풀이 살찌우는 숨결이 감도는 길을 네 식구가 함께 걷습니다. 아이들이 걸으면서 크듯이, 어른도 걸으면서 커요. 어른도 걸으면서 풀내음을 맡고, 햇볕이 어떤 맛인가 헤아리며, 생각을 넓힙니다. 어른도 씩씩하게 걷는 동안 새롭게 노래를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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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49] 꽃빛을 담는 하루
― 시골에서는 누구나 꽃사람

 


  읍내에 저자마실 가는 길입니다. 마을 어귀에서 군내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이리 달리고 저리 뜁니다. 사월로 접어든 시골마을은 온통 유채물결입니다. 옛날부터 유채물결은 아니었을 텐데, 시골에서는 경관사업을 한다며 늦가을논에 유채씨를 뿌려요. 늦가을에 유채씨를 뿌리면 겨울부터 조금씩 싹을 틔우면서 잎을 내놓고, 봄에는 노란 꽃물결이 찰랑입니다.


  집에서도 늘 꽃빛을 누리지만, 집 바깥으로 나와서 조금만 걸어도 어디에서나 꽃내음이요 꽃잔치입니다. 아이들은 이리 보아도 꽃이고 저리 보아도 꽃인 마을에서 꽃아이가 됩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면, 읍내도 도시와 똑같습니다. 시골 읍내도 아스팔트 찻길입니다. 시골 읍내는 도시와 견주면 자동차가 적으나, 도시처럼 자동차 때문에 둘레를 잘 살펴야 하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해요. 아이들은 자동차 때문에 즐겁게 뛰놀거나 내달리지 못합니다. 걸어서 움직일 적에도 이곳저곳에 함부로 세운 자동차 때문에 고단합니다.


  시골이라 하더라도 읍내나 면소재지는 시골이 아니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골이라면 들과 숲과 내와 골짜기가 있어야 시골이 된다고 느낍니다. 풀이 돋을 빈터가 있어야 시골이고, 나무가 자랄 숲이 있어야 시골이며, 꽃물결을 이루는 들이 있어야 시골이지 싶어요.


  시골에서는 누구나 꽃사람이 되리라 느낍니다. 풀꽃을 보고 들꽃을 보며 나무꽃을 봅니다. 풀꽃에서 풀꽃내음을 맡고, 들꽃에서 들꽃내음을 먹으며, 나무꽃에서 나무꽃내음을 맞아들여요.


  꽃빛을 담는 하루가 흘러 삼월이고 사월이며 오월입니다. 곧 딸기꽃이 지면 딸기알이 굵겠지요. 딸기알이 굵는 늦봄부터 아이들은 손과 입이 새빨갛게 물들겠지요. 바람이 쏴아 불면서 아이들은 사월내음을 실컷 들이켭니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4347.4.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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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48] 꽃송이 떨어지는 소리
― 봄이 무르익는 사월

 


  꽃송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동백꽃은 송이가 무척 소담스럽도록 커다랗습니다. 동백꽃이 질 적에는 꽃잎이 다 말라서 지지 않습니다. 꽃잎은 아직 멀쩡하더라도 바람에 툭 떨어지고, 바람이 없어도 살그마니 툭 떨어집니다.


  오동나무에서 오동잎이 떨어질 적에도 툭툭 소리를 냅니다. 바깥에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툭 소리가 자꾸 들리면 오동잎이 지는 소리입니다. 오동나무 곁에서 지낼 적에 이런 소리를 곧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동나무뿐 아니에요. 감나무에서 감잎이 질 적에도 ‘툭’까지는 아니더라도 ‘톡’보다는 살짝 센 소리가 퍼집니다. 후박나무에서 잎이 질 적에도 ‘토옥’ 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나요. 마당 평상에 앉거나 누워서 후박나무 그늘을 누리다가 가끔 후박잎 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귀가 밝다면 제비꽃 씨주머니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귀를 연다면 부추꽃 씨주머니 터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요. 귀여겨들으면 민들레나 고들빼기 씨앗이 바람 따라 날아가는 소리를 알아챌 수 있겠지요.


  시골살이란 철 따라 다른 소리를 듣는 나날이라고 봅니다. 시골살이는 달 따라 다른 소리를 맞이하며 즐거운 하루라고 봅니다. 시골살이에서는 날마다 새로 피어나는 소리를 아름다운 노랫가락으로 맞이하는 웃음잔치라고 봅니다.


  스스로 즐거워 노래가 샘솟습니다. 스스로 기쁨에 겨워 노래를 빚습니다. 일을 하면서 일노래요, 놀면서 놀이노래입니다. 소꿉놀이를 하면 소꿉노래이고, 흙을 만지면서 놀면 흙노래가 되어요. 동무끼리 어깨를 겯으며 동무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살이를 시골노래로 즐깁니다. 봄에는 봄노래요, 꽃밭에서 꽃노래입니다. 나무와 함께 나무노래이고, 풀밭에서 풀노래예요. 나물을 뜯는 나물노래이고, 밥을 차리면서 밥노래가 됩니다. 아이들을 재우니 자장노래이고, 숲에 깃들어 숲노래일 테지요.


  삶은 노래일 적에 아름답습니다. 삶에서 노래가 빠지면 웃음이 사라집니다. 웃으며 노래하고 눈물지으며 노래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노래를 배웁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바라보며 노래를 새록새록 짓습니다. 봄이 무르익는 사월에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지는 모습을 툭툭 소리와 함께 누립니다. 4347.4.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동백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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