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집일 안 하기


 설날을 맞이해서 집을 떠나 여러 날째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닌다. 집에 머물지 않으니 집일을 안 하며 지낸다. 여러 어른들 만나뵈러 찾아다니는데, 어른들마다 아이를 귀엽게 보아 주시고 아이하고 즐거이 어울리며 놀라 주신다. 아이는 아이대로 귀엽다 해 주는 분이 많고 어울릴 사람이 많다 보니 아버지나 어머니 품에 있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주 모처럼 홀가분하게 지낸다. 게다가 손수 밥을 차려 식구들 먹이지 않으니 하루 내내 할 일이란 없다. 그저 자리에 앉아 밥상 고맙게 받아먹으며 입만 나불나불거릴 뿐.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니, 집을 치운다거나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참말 집일에 마음쓰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 아이 옷가지를 빨래하지만, 집에 머물 때처럼 이 빨래 저 빨래를 하지 않는다. 설밥은 올해에도 어머니가 혼자서 다 하고 말았으니 도울 겨를이 없이 자잘한 일만 거들며 일마무리만 조금 돕는다. 올해에는 설밥을 함께 마련하고 싶었으나, 어머니는 밤새 혼자서 다 하셨단다.

 집일을 안 하고 아이랑 놀지 않는데, 정작 조용히 책을 읽지는 못한다. 마땅한 일이겠지. 어른들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인천마실을 하면서 오랜만에 만난 동네 분이랑 사진벗이랑 이야기마당을 마련한다. 종이책은 읽지 않으나 사람책은 읽는다. 종이책을 들출 겨를이 없으나 사람책하고 내내 어우러진다.

 시골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헌책방 한두 군데쯤 들를 수 있으려나. 인천에서도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겨우 맛보기만 했는데, 서울을 거치며 헌책방마실을 해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책 구경은 못하더라도 헌책방 사진은 한두 장이라도 찍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옆지기가 둘째를 낳기 앞서 옆지기네 어르신들 만날 수 있는 일로도 고맙구나 해야지. 헌책방마실은 다음에도 할 수 있고, 아이를 낳기 앞서 첫째랑 아빠랑 둘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지.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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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헌책방


 설을 맞이해 옆지기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을 찾아왔고, 이튿날 헌책방거리 안쪽 골목집에서 잠을 얻어 잔 뒤 헌책방을 찾아가며 설 인사를 한다. 헌책방에는 책손이 가득하고, 새로 들어오는 책손도 많아 발을 디딜 틈이 없다. 아이는 사람이 많다며 좋아한다. 아이 손을 닦이던 손수건을 아이가 뺏어 들고는 낯선 사람이나 낯선 아이를 붙잡고는 손을 닦아 주겠다며 애쓴다.

 설날이 끝나고 토요일과 일요일이 잇달아 이어진 나날,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책을 찾아 읽으려는 사람들 발길로 꽤나 북적거린다. 그런데 지난날 발길하고는 좀 다르다. 지난날에는 이곳 헌책방거리로 대중교통을 타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제는 으레 자가용을 타고 찾아온다. 두 다리로 복닥복닥 오가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고, 길가에 죽 대 놓은 자가용이며, 차를 댈 곳을 찾는 사람들을 이곳저곳에서 마주한다.

 자가용을 타고 왔으니 사들인 책을 싣고 돌아가기 수월하겠지. 자가용을 타고 왔으니 책을 장만한 다음 골목을 거닐며 동네를 둘러본다든지 동네 밥집에 찾아가기는 어렵겠지.

 그래도 퍽 긴 설 쉬는날에 헌책방마실을 하는 사람들이 놀라우며 반갑다. 인천 배다리에는 이렇게 헌책방거리가 있으며, 설 쉬는날에도 씩씩하게 문을 열어 놓으며 책손을 기다리니 참으로 고마우며 즐겁다. 헌책방 일꾼은 헌책방을 지키며 책이랑 쉬고, 헌책방 책손은 책시렁 책들을 가만히 둘러보며 책이랑 논다. 부산 보수동이랑 청주 중앙동이랑 전주 홍지서림 골목은 어떠할까. 서울 시내 곳곳에 깃든 헌책방은 또 얼마나 많은 책손이 드나들까.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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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07 23:35   좋아요 0 | URL
인천 배다리 헌책방의 경우 인천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울 같은 경우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가야되서 불편하긴 하더군요.이럴때 차가 있으면 편하겠지요.그나저나 설 연휴기간에도 문을 연 헌책방도 계시네요.전 안여는줄 알고 아예 가지도 안았지만요^^

숲노래 2011-02-08 08:50   좋아요 0 | URL
꽤 많은 헌책방이 명절에도 문을 연답니다~
 



 작은집 아이들


 지난 한가위에도 작은집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올 설에도 작은집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 퍽 여러 해 작은집 아이들을 못 만났다고 느낀다. 작은집 아이들 이름을 떠올리면서, 이 아이들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하고 곱씹는데, 큰애가 중학생쯤 아닐까 했으나, 작은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큰애가 고3이요 작은애가 중3이라 한다. 설에도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동네 동무를 만나서 논다는데, 이 아이들은 큰아버지 댁에 발길을 해 본 지 꽤 되었다. 올 설에는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모처럼 함께 찾아왔다. 막내 작은집 큰애는 스물여섯, 작은애는 스물넷. 못 본 지 여러 해 지났던 만큼 이렇게 숙숙 크는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막내 작은집 작은애는 고2인가 고3때 마지막으로 보고 이렇게 보았으니 얼마만인가. 제사상을 차리고 치우는 동안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일손을 제법 거든다. 이 아이들은 알까. 저희들이 그동안 제사상 차리고 치울 때에 일손을 거의 안 도왔는 줄. 이제 이렇게 알뜰히 손길을 나누어 즐거이 도와주는 줄 깨달을까. 그러나 막내 작은집 아이들도 제사밥을 큰어머니가 어떻게 마련해서 차려 놓은 줄을 알지는 못한다. 만두를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고 나물을 먹고 지짐이를 먹고 닭을 먹고 하지만, 이 모든 제사밥을 밥상에 올려놓기까지 며칠에 걸쳐 몇 시간을 들여 한 땀 두 땀 사랑을 쏟았는지를 알 수는 없다.

 작은집 아이들이 보고 싶다. 작은집 아이들이 ㅅ대학교이든 서울에 있는 대학교이든 철썩 붙는 일도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에 붙을는지 모르고 이듬해에 붙을는지 모른다. 그만 자꾸자꾸 떨어질 수도 있겠지. 대학생이 된 다음에는 명절마실을 할까. 대학생이 되고 난 다음 할 명절마실 때에는 작은집 아이들은 이 집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즐기거나 무엇을 느끼려나.

 나는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나날을 썩 좋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서 옆지기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오는 나날이면서, 이렇게 명절날 쉴새없이 씩씩하게 갖은 집일을 함께 나누어 할 수 있기에 기쁘며 신난다. 내가 여자이면서 집일을 이렇게 한다면 으레 ‘아주 마땅하다’고 여길 테지만, 내가 남자이면서 집일을 이렇게 할 때에는 참말 ‘아주 고맙다’고 여기는데, 작은집 아이들이 남자이면서 명절날 안 온다든지 명절날 아무것도 안 하며 가만히 텔레비전만 본다든지 한다면 몹시 못마땅할 터이나, 여자이면서 명절날 안 오거나 그저 텔레비전만 본다든지 하는 일은 그닥 못마땅하지 않을 뿐더러 괜찮은데, 함께 저희 어머니하고 부엌일도 하고 다른 잔일을 거들 때에는 더없이 어여쁘다고 느낀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에 앞서 사람이고, 아이이니까. 대학생이 되기 앞서 사람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고, 지식인이나 비즈니스맨이나 공무원이 되기 앞서에도 사람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니까. 작은집 아이들이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을 올린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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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팔아요?


 모를 만한 사람이 아닌 알 만한 사람이 나한테 “책 팔아요?” 하고 물을 때에는 참 갑갑하다. 모를 만한 사람이 아닌 알 만한 사람조차 내가 ‘헌책방을 열어 장사하는’ 줄 여긴다. 이들은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기나 했을까. 이들은 내가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안다고 여길까. 이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뜬소문을 퍼뜨리며 다닐까.

 묵어서 좀처럼 안 보이는 헌책이나 옛책을 사고 싶으면 인터넷 검색기를 돌려서 인터넷헌책방에서 사면 그만이다. 스스로 다리품을 팔아 헌책방마실을 하기 싫으면 집에서 인터넷 켜 놓고 또닥거리면 된다. 애써 나한테 전화할 까닭이란 없다.

 그러나 나한테 책 팔라 하는 이들은 그저 책에만 눈이 멀었기 때문이니까 어쩌는 수 없다. 이 불쌍한 넋들을 어찌할 길이 없다. 나는 내가 그동안 사서 읽고 마을 도서관을 열면서 갖춘 이 책들을 팔 까닭이 없고, 팔 수 없으며, 팔 일이 없다. 도서관을 열어서 꾸리는 사람 가운데 누가 책을 팔까? 그토록 책을 갖고 싶으면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책 좀 파셔요.” 하고 여쭐 노릇이다. 아니, 이런 책들이 묵지 않도록, 새로 나왔을 때에 부디 알뜰살뜰 제값 치르며 장만해 줄 노릇이다. 널리 팔리던 때에는 장만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없다고 수선을 피운들 이 책들이 짠하고 나타날 일이란 없다.

 사람들이 참 몰라본다 싶어 하루하루 묻히는 몇 가지 묵은 헌책 이야기를 틈틈이 느낌글 하나로 적바림해 놓으면, 내가 마치 이 책들을 경매시장 같은 데에 내놓아 팔려 하는 줄 생각하나 본데, 책을 팔려면 서지사항하고 사진하고 책값만 붙여 목록을 올리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어떻게 일군다 하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 붙이지 않는다.

 사람을 읽지 않으면서 책을 어떻게 읽는지 궁금한 일이다. 사람을 읽지 못하는 눈길로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아리송한 일이다. 사람을 읽으려 하지 않으면서 책마다 다 다르며 깊고 너르게 깃든 이야기를 얼마나 껴안을는지 모를 일이다.

 제발, 책 좀 내려놓자. 책은 좀 내려놓고, 돈 있으면 어떤 책이든 다 사서 간직할 수 있다는 엉터리 생각 좀 내려놓자. 돈 있는 사람은 그저 돈 있을 뿐이니까, 이 돈냄새 나는 짓은 제발 그만두자. (434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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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03 22:22   좋아요 0 | URL
ㅎㅎ 된장님께 직접 전화를 걸어서 책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나 보군요.정성은 갸륵한데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궁금해 집니다^^

숲노래 2011-02-03 23:59   좋아요 0 | URL
출판사로도 전화를 걸고, 인터넷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오기도 하고, 그러지요 뭐... 그냥, 책에만 눈이 먼 사람들이라 더없이 딱하답니다......
 



 읽어 봐서 아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철없던 적이 있기 때문에 철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왜냐하면 손가락 끝이 다친 적 있기 때문에 손끝 한 번 다치면서도 얼마나 고달픈가를 깨달으니까, 손끝이 아닌 팔 하나 잘린다든지 다리 하나 부러진다든지 하면 어느 만큼 괴로우면서 힘든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끝이 아파 보았기 때문에 팔이 잘리는 사람 아픔과 괴로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렴풋이 헤아릴 뿐입니다. 똑같이 팔이 잘려서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팔이 잘리는 아픔을 알 수 없어요.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떠할까요. 같은 책을 읽었기에, “나, 그 책 읽어 봐서 아는데요.”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같은 영화를 보았기에, “나, 그 영화 한번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이기에, “나, 사랑 한번 해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읊을 수 있을는지요.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는데요.” 하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아이를 둘이나 셋, 넷이나 다섯, 여섯이나 일곱을 키운 어버이는 아이키우기를 한결 잘 안다 할 수 있는가요.

 야구를 일곱 해쯤 지켜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만할까요. 야구를 열일곱 해쯤 돌아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수 있나요. 야구를 스물일곱 해나 서른일곱 해, 또는 마흔일곱 해나 쉰일곱 해쯤 바라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해야 하나요.

 깊이 있게 보아서 좋을 때가 있고, 두루 보아서 나을 때가 있으며, 오래 보아서 훌륭한 때가 있습니다. 살짝 보아서 알맞을 때가 있고, 사랑스레 보아서 기쁠 때가 있으며, 따스히 보아서 즐거울 때가 있어요. 읽기에 따라 다른 삶이고, 읽는 매무새에 따라 새로운 삶이에요.

 읽어 본 사람은 틀림없이 읽었기에 아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아직 못 읽었거나 곧 읽으려 하거나 애써 읽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 나름대로 무언가 가슴으로 느끼거나 보듬으려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모든 책은 앎(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책읽기는 앎읽기(지식쌓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은 삶이고, 모든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을 읽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이한테는 여태껏 살아 봤으니 “그이가 살아온 나날”을 알겠지만, 이이한테는 “이이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참말 앞으로 살아 봐야 아니”까 어느 누구도 이이한테 ‘네 앞날이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거나’ 하고 섣불리 짚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이가 살아왔다는 나날조차 그이 스스로 얼마나 잘 안다 밝힐 수 있을는지요.

 이렇게만 살라는 법이 없는 나날처럼, 이렇게만 읽으라는 법이 없는 책입니다. 책은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대로 읽습니다. 책은 사람들마다 꾸리는 삶자락대로 엮어서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에 따라 책을 받아들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를 고이 담아 책을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삶에 따라 내 삶을 읽지, 책을 쓴 사람 삶을 읽지는 않거나 못합니다. 책을 쓴 사람 삶은 책을 쓴 사람만 압니다. 그러니까, 책을 쓴 사람 넋과 마음을 ‘책 읽는 이’가 알 수 없을 뿐더러, 어설피 비평이나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나는 이 책 하나를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어떻게 돌보겠다’ 하고만 말할 뿐입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없습니다. 좋은 내 삶이냐 나쁜 내 삶이냐만 있습니다. 아, 어쩔 수 없이 이 땅에는 나쁘다 할 만한 책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나쁘다 할 만한 책들조차, 이 책을 쥐어든 사람이 어떻게 삭여내거나 곰삭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사랑을 바꿉니다. 삶이 책을 바꾸고, 책이 삶을 바꿉니다.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는 책이란 내 삶을 사랑하는 넋이 더욱 따숩고 넉넉하도록 이끌고,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으며 꾸리는 내 삶은 내가 손에 쥔 책이 사랑씨를 고이 나눌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 줍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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