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이야기


 예부터 아이가 잠들 때까지 어머니(또는 아버지)들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데, 우리 아이는 스스로 잠들 때까지 아빠 손을 꼬옥 잡고는 종알종알 제 얘기를 들려주다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러나 아빠는 아이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아이하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는 아빠가 눈을 감으면 잡은 손을 흔들며 아빠 눈 뜨라 했고, 눈을 뜨면 다시금 이야기를 이었다.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고 한참 동안 두 손을 살며시 잡은 채 누웠다가 볼과 등을 토닥이고는 아빠도 비로소 눈을 감고 잠이 든다. (4343.11.2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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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길로 어떻게 다닐는지를 찬찬히 헤아리지 않으면서, 충주 산골집에서 길을 나섰다. 비행기표를 끊을 때에도 비행기표 삯이 얼마나 드는지 몰랐고, 목포에서 제주로 배를 타거나 제주에서 목포로 배를 탈 때에 얼마를 치러야 하는지 몰랐다. 아무것도 미리 알아보지 않은 채, 헌책방 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만 알고는 찾아왔다. 더구나, 제주섬 헌책방 일꾼한테는 제주로 오기 하루 앞서 전화로 여쭈어 본 다음 찾아왔다. 토요일과 일요일과 월요일을 지내고 화요일을 보내는 오늘, 아이 엄마가 몹시 힘들어 한다. 잠자는 집을 제대로 못 찾은 탓이다.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배삯이 꽤 비쌀 뿐 아니라 너무 오래 걸리는데, 배 아니고는 갈 길이 없다. 목포에 사는 형은 이번에도 만나지 못하겠다. 이듬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청주로 가서 충주 집으로 갈밖에 없다.  

 며칠이라도 돌아다녔으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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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섬 물맛


 인천에서는 인천에서 나는 물로 막걸리를 빚습니다. 서울에서는 서울에서 흐르는 물로 막걸리를 빚습니다. 부안에서는 부안에서 긷는 물로 막걸리를 빚어요. 춘천은 춘천땅 물로 막걸리를 빚고, 부산은 부산 터전 물로 막걸리를 빚는답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제주는 제주섬 물로 막걸리를 빚습니다. 울릉섬에서 막걸리를 빚는다 할 때에는 울릉섬 물로 막걸리를 빚을 테며, 백령섬에서는 백령섬 물로 막걸리를 빚겠지요. 이리하여 막걸리맛은 고장마다 다릅니다. 막걸리맛은 고장에 따라 같을 수 없습니다.

 아이랑 애 엄마랑 애 아빠, 여기에 애 엄마 배속에서 자라는 둘째하고 네 식구가 처음으로 제주마실을 합니다. 제주마실을 하면서 모자반 듬뿍 넣은 국을 먹으며 제주 막걸리를 마십니다. 콸콸콸 사발에 따라 한 모금 들이키는데, 첫맛과 끝맛이 한결같이 부드럽습니다. 막걸리라는 술맛이기도 할 테지만, 이 술맛에 앞서 물맛이 다르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모자반도 좋고 막걸리도 좋으며 바람도 좋습니다. 제주섬은 시내에 있어도 물과 바람과 밥이 이와 같은 맛이라 할 때에는, 제주섬 시골은 얼마나 포근하면서 싱그러우려나요. 이 좋은 물과 바람과 밥이라 할 때에, 이 좋은 물과 바람과 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어느 만큼 싱그럽거나 애틋하려나요.

 책이란 삶이고 삶터요 삶무늬라고 느낍니다. 좋은 삶이기에 좋은 책이 태어날 수 있는데, 좋은 책이 태어나더라도 좋은 책을 좋게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삶을 좋은 삶으로 일구며 좋은 빛을 나누는 좋은 사람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좋은 삶을 모든 사람이 좋게 받아들이며 좋은 넋으로 다스리지 못할지라도, 좋은 꿈은 좋은 땅에 좋은 뿌리를 내리리라 믿습니다. 좋은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면서, 이 좋은 막걸리가 얼마나 좋은 줄 참다이 느끼지 못하며 더 알뜰하거나 알차게 삶자리를 일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좋은 빛은 곱게 드리운다고 느낍니다. (4343.11.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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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삯 기차삯 배삯 비행기삯


 아이 엄마랑 아이랑 아이 아빠랑 이렇게 세 사람이 제주섬을 한 번쯤 밟고 싶다고 생각한 끝에 드디어 이번 토요일에 마실을 하기로 한다. 먼저 목포에 들러 아이 큰아빠를 만나려 했는데, 아이 큰아빠는 토요일에 인천으로 마실을 간단다. 하는 수 없이 제주섬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형하고 전화로 얘기를 하다가 “비행기 타고 가. 이럴 때 비행기 한번 태워 주지.” 하기에 그러마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청주공항을 알아본다. 비행기 뜨는 때가 아침이거나 저녁이다. 우리처럼 낮에 움직일 사람이 탈 비행기는 없을 뿐더러, 비행기 뜨는 때에 맞추어 기차표를 끊기 훨씬 어려운데, 기차를 타러 나가려고 시골버스를 잡아탈 때를 살피기는 훨씬 힘들다. 그래도 책상맡에서 머리 지끈지끈 앓아 가며 가까스로 기차표를 끊고 비행기표를 끊는다. 그런데 비행기표를 끊으며 표값을 치르려 하다 보니, 표값이 한 사람 앞에 칠만 원 남짓 떨어진다. 세 사람 묶어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어 참 값싸네 하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만 한 값이라면 고속철도를 탈 때보다 훨씬훨씬 비싸잖아. 세 사람 따로따로 칠만 원이 넘어 이십이만 원이나 되는 비행기삯이라니. 비행기 안 타는 사람이 비행기 한 번 탄다고 하다가 살림이 아주 거덜나겠다. 우리 집 한 달치 살림돈이 한꺼번에 나간다고 할까. 아, 이십만 원이나 되는 비행기삯을 어떻게 어디에서 벌지? 잠값이야 그럭저럭 벌면 된다지만 비행기삯이란, 에휴. 돌아오는 길은 배와 기차와 시골버스를 갈아타며 아주 천천히 돌고 돌아야겠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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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11 22:00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마실나가시니 즐겁게 놀다 오세요^^
 


 발그스름 감알


 발그스름 감을 열다섯 알 얻다. 감알은 발그스름한 빛깔인데 열다섯 알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똑같은 빛깔인 감알은 하나도 없다. 가을녘 감나무를 올려다보면 감잎 가운데 같은 빛깔인 잎새는 하나도 없다. 감잎이든 감알이든 저마다 다 다른 크기요 모양이요 빛깔이다. 더욱이, 이 발그스름 감알을 살짝 깨물어 먹노라면 감알마다 맛이나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내 삶으로 스며드는 책을 돌아볼 때에도 똑같은 줄거리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글넋 똑같은 흐름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다 다른 삶 다 다른 넋으로 다 다른 아름다움을 이루어 낸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알을 따서 맛을 볼 때하고, 일찌감치 따 놓고 저온창고에서 삭여 낸 예쁘장하고 거의 똑같이 생긴 감알을 저잣거리에서 사들여 맛을 볼 때에는 몹시 다르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감알, 그러니까 저온창고에서 삭여 낸 감알은 어느 감을 맛보든 매한가지이다. 이 감알도 감나무에서 땄고, 이 감알을 딴 감나무는 땅에 뿌리박으면서 햇살과 흙과 물을 받아먹었을 텐데, 이 감알을 먹으면서 자연을 먹는다고 느끼지 못한다. 내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책을 헤아릴 때에는 으레 어슷비슷하다고 느낀다. 한결같이 얕으며 돈내음이 물씬 난다. 나로서는 얕은 책 돈내음 책 어설픈 글치레 책은 읽을 수 없다. 이런 책까지 읽느라 내 고운 삶을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감나무에서 저절로 발갛게 익는 감을 그때그때 따서 먹을 때에는 감나무한테 고맙다는 말을 코앞에서 건네며 고개를 숙인다. 가지를 붙잡고 감알을 따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 마디씩 꼬박꼬박 한다. 나한테 고맙게 감알 하나 베풀어 주는 감나무한테 풀약을 친다거나 비료를 준다거나 항생제를 먹인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올해부터 만들고 있는 거름통에서 이듬해부터는 거름을 퍼서 줄 수 있겠지. 올해 감알 고맙게 얻어 먹었으니, 우리 식구 똥오줌을 잘 삭여서 감나무하고 흙한테 돌려주어야지. 내 삶으로 스며드는 책을 장만할 때에는 책값을 오롯이 치른다. 새책은 새책대로 제값을 꼬박꼬박 낸다. 헌책은 헌책대로 헌책방 일꾼이 흘린 땀방울에 값할 수 있도록 주머니를 턴다. 내 몸 살찌우는 밥이 고맙고, 내 마음 북돋우는 책이 반갑다. (4343.10.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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