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먹이


 먹이에 따라 삶이 바뀌지만, 삶에 따라 먹이 또한 달라집니다. 산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산골에서 나는 먹이를 즐기고,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닷가에서 얻는 먹이를 즐기며, 들판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들판에서 마련하는 먹이를 즐깁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사들이는 먹이를 즐길 테며,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일구는 먹이를 즐길 테지요. 그런데 먹이에 따라 삶이 바뀌기도 하는 만큼, 도시에서 살아도 시골사람 매무새대로 텃밭을 일구거나 꽃그릇에 푸성귀를 심어 기르곤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도 도시사람 몸짓으로 바깥밥을 즐기거나 가공식품을 가까이하곤 합니다.

 좋은 삶을 바라며 좋은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뜻밖에 만난 좋은 책이 발판이 되어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처음부터 좋은 삶을 바라지 않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제아무리 좋다 하는 책이나 훌륭하다 하는 책이나 아름답다 하는 책을 읽어도 좋은 삶하고 가까워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책을 읽어도 좋은 넋과 말과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곱새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뜻밖에 만난 좋은 책이 좋은 책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누군가 좋은 책을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간밤에 꿈을 꿉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나날이 새롭게 거듭나는 삶이라 한다면 어디에서 지내며 무엇을 하든 옳고 바르며 착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며 나날이 구지레하게 쳇바퀴를 돈다면 어디에서 머물며 무슨 거룩한 뜻을 품든 하나도 옳지 않고 바르지 않으며 착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책을 읽을 겨를을 얻지 못해도 좋은 넋을 추슬러 좋은 말이 샘솟습니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 내 삶이라면 좋다는 책을 10만 권 아닌 100만 권을 읽어도 나는 바보요 하고 외치는 꼴입니다.

 꿈에서 덜컥 깨며 방 온도를 보니 17도. 더 따뜻한 방이 17도이면 자는 방은 14도나 15도였군요. 어제 드디어 큰방 책꽂이 자리를 옮기면서 좀 사람 사는 집처럼 가다듬었습니다. 살림집을 6월 30일에 옮겼으니 10월 13일에 비로소 집 갈무리를 겨우 제대로 한 셈이라면 난 얼마나 내 가까운 곳을 내버리고 바깥으로만 도는 나그네인가 싶어 부끄럽습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집안 갈무리를 생각하고, 아이가 한결 신나게 뛰어놀며 여러 가지를 배우도록 거들지 못하는 바쁜 하루를 헤아립니다. 오늘도 볼일 때문에 서울마실을 해야 하는데, 책 하나 내놓든 방송국 취재를 받아들여 몇 마디를 지껄이든 잡지 같은 데에 글을 띄우든, 알아들으려 하는 사람은 알아들으려는 고운 몸가짐과 튼튼하며 맑은 가슴으로 받아안으리라 믿습니다. 알아들을 마음이 없을 뿐더러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숱한 이야기와 풀이말이 있어도 소 귀에 대고 읽는 책입니다. 빼앗겨야 하는 내 말미라면 알뜰히 써야겠고, 처음부터 내 말미를 빼앗기지 않도록 서울 볼일은 한 달에 한 번이 아닌 한 해에 한 번만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4343.10.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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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을 맞이해서 우리 말글 이야기를 하나 더 걸쳐 놓는다. '말'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이 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헤아리리라 믿지 못한다. 말 이야기를 놓고 보면 한국사람은 모조리 엉터리이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통째로 멍텅구리이다. 바탕이 될 생각조차 서 있는 사람은 아예 없다 할 만하다.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963) -의 우려 2 : 카슨의 우려대로

.. (레이첼) 카슨의 우려대로 논은 침묵의 땅이 되었다. 귀 따갑게 울어대던 개구리도 종적을 감추었고 ‘뜸북, 뜸북’ 하며 논에서 울던 뜸부기도 〈오빠 생각〉만큼이나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38쪽

 ‘우려(憂慮)’는 ‘걱정’이나 ‘근심’으로 고쳐써야 알맞습니다만, 우리 말과 글을 옳게 가누는 분이 나날이 줄어 ‘걱정’이든 ‘근심’이든 ‘끌탕’이든 알뜰살뜰 가누어 내놓은 글을 읽기란 몹시 힘듭니다. “침묵(沈默)의 무엇”이라는 말투는 우리 말투가 아닌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다운 말투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 자리에 나오는 ‘침묵의’는 ‘소리를 잃은’이나 ‘소리가 없는’이나 ‘조용한’쯤으로 다듬습니다. ‘종적(?跡)’은 ‘자취’로 손질하고, ‘과거(過去)’는 ‘옛날’이나 ‘지난날’로 손질해 줍니다.

 ┌ 카슨의 우려대로
 │
 │→ 카슨이 걱정한 대로
 │→ 카슨이 근심한 대로
 └ …


 한 번 입에 익거나 몸에 배면 쉽사리 떨치지 못하는 얄궂은 버릇입니다. 예부터 어른들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습니다. 손버릇이든 말버릇이든 어릴 적 익은 대로 어른으로 자랍니다.

 오늘 이 나라 삶터를 헤아리면,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 앞에서 말을 알맞고 바르며 옳게 가누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 앞에서 돈벌이 빼고 아름다운 삶을 일구려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돈을 많이 잘 벌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아이들 또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비손하는 어른이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착하고 참되며 고운 마음결을 건사하면서 아이들 또한 착하고 참되며 고운 마음결을 사랑하도록 돕는 어른이란 만나기 어렵습니다.

 참 마땅한 노릇입니다. 아이들 말이 엉터리라면 어른들부터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아무렇게나 망가뜨리며 쓴다면 어른들부터 말을 함부러 망가뜨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그녀’라는 말을 신나게 써대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조차 ‘그녀’라는 말을 쓸 뿐 아니라, 너덧 살짜리 어린이마저 ‘그녀’라는 말을 씁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과 꾸리는 삶을 송두리째 쏙쏙 잘 빨아들입니다.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으레 좋은 모습을 빨아들이고, 궂은 모습으로 지내는 어른이라면 궂은 모습을 빨아들입니다.

 ┌ 논은 침묵의 땅이 되었다
 │
 │→ 논은 조용한 땅이 되었다
 │→ 논은 고요한 땅이 되었다
 │→ 논은 소리없는 땅이 되었다
 │→ 논은 죽은 땅이 되었다
 └ …


 아이들을 걱정하는 어른이라면 누구보다 어른 내 삶을 걱정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겠다는 어른이라면 누구보다 어른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사랑을 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나누며 살아가는 대로 믿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고운 삶보다 돈있는 삶을 바라니까 농사짓는 이들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써댈밖에 없어요. 사람들 스스로 좋은 삶보다는 돈되는 삶을 꿈꾸니까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무늬만 국산’이면서 ‘게다가 아주 싼값으로’ 사먹어야 하는 줄 잘못 압니다.

 아름답지 못한 나라에서 아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한국사람이기에, 이와 같은 한국사람이 말이나 글을 아름답게 펼치리라고는 바랄 수 없습니다. 정치나 교육이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입방아로는 이루지 못합니다. 오로지 내가 선 자리에서 내 나름대로 내 땀을 흘리는 만큼 이루는 정치요 교육이요 사회요 경제요 문화입니다. (4343.10.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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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맞이해 우리 말 이야기를 한 꼭지 걸쳐 본다.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52) 시작 37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


.. 단원이 삼 년간 현감으로 재직한 연풍현 관아는 오래 전에 답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20쪽

 “삼 년간(三 年間)”은 “세 해 동안”이나 “세 해”나 “세 해를”로 다듬고, ‘재직(在職)한’은 ‘있던’이나 ‘일한’이나 ‘지낸’으로 다듬습니다. “오래 전(前)에 답사(踏査)한”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퍽 예전에 다녀 본”이나 “꽤 옛날에 밟아 본”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여행(旅行)’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이라 하기보다는 우리 말이라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고, ‘마실’이나 ‘나들이’나 ‘길’로 손질해 볼 수 있습니다.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x)
 └ 여행은 옥순봉부터 하기로 (o)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 해에 한 차례 ‘한글 난 날’을 맞이합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서 이날을 기리는 사람이 있으나, 이날이 한글날인지 아닌지 못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했기에 조금 더 내 말과 글을 돌아보며 아끼고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글날이건 말건 엉터리 말글을 아무렇지 않게 뇌까리는 사람이 있어요.

 한글날이라 해서 더 아름답거나 알차게 말글을 북돋우려는 사람이 있지만, 한글날조차 내 말글을 멍청하고 미련스레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한 아침 책을 한 권 꺼내어 읽다가 씁쓸하게 웃습니다. 굳이 한글날이기에 우리 말글을 헤아리는 책을 찾아 읽고 싶지 않을 뿐더러, 한글날이라 해서 사람들이 한결 알차며 곱게 여민 말글로 이루어진 책을 읽을 마음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날이 한글날이다 보니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글월에 자꾸 마음을 쓰고야 맙니다. 이분은 왜 이런 글로 이렇게 당신 삶을 이야기해야 하나 싶고, 이분 글을 책으로 낸 책마을 일꾼은 이분 글을 찬찬히 어루만지거나 보듬을 수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한자말 ‘시작’을 생각합니다. 이 낱말을 한자말로 여긴다거나 이 낱말을 다듬어 보고자 마음을 쏟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시작’과 같은 낱말을 알뜰살뜰 털어내거나 씻어내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이와 같은 낱말 하나 털어내지 못한들 한글이 크게 망가진다든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이 낱말 하나마저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이 나라 말글을 비롯해 이 나라 넋이 튼튼히 서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시작’과 같은 숱한 한자말이 우리 삶에 스며든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뗄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참말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떼어 보고자 애쓴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참다이 말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한국사람입니다. 착하게 말글 가꾸기를 해 보려 땀흘리지 않는 한겨레입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돌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오르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어린 날, “준비, 시이작!” 하는 말을 곧잘 듣고 으레 꺼냈습니다. 그러나 “준비, 땅!” 하는 말을 나란히 듣고 흔히 주고받았습니다. 따로 우리 말글을 더 아끼려고 하면서 ‘시작’을 ‘땅’으로 고쳐쓰지는 않았습니다. 어쩐지 ‘시작’이라는 낱말이 썩 내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4학년이나 5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은데, ‘준비’라는 낱말도 ‘시작’이라는 낱말과 함께 한자말이 아닌가 하고 느끼면서, 이 낱말들을 곰곰이 되씹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 살펴보았고, 책에는 이런 말을 꺼내야 할 자리에 어떻게 적혀 있는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자, 해 보자!”나 “하나, 둘, 셋!” 같은 말마디는 이무렵 느끼고 들으며 받아들입니다. 따로 말다듬기나 글다듬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저한테 더 알맞거나 살가울 말마디를 찾고 싶었습니다. 말을 사랑하거나 글을 아끼려는 마음까지는 아니고, 더 쉬우며 포근한 말이나 글을 맞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머나먼 옛날 농사짓던 여느 할매와 할배가 쓰던 말을 나 또한 쓰고 싶었고, 까마득한 지난날 산골과 들판과 바닷가에서 살아가며 뛰노는 아이들이 쓰던 말을 나도 함께 쓰고 싶었습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다니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보기로 했다

 시골집에서 고무신을 신고 흙을 밟으며 나무를 쓰다듬는 가운데 생각합니다. 나무를 쓰다듬어 보지 않고서야, 흙을 밟아 보지 않고서야, 텃밭에서 풀을 뽑거나 무를 뽑아 보지 않고서야, 내 삶을 어루만질 만한 말마디를 얻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릴 때에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을 할 말미를 마련하는구나 싶지만, 이만큼으로는 모자랍니다. 두 다리로 어디를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어디를 오가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무엇이며, 내 삶자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를 알아채야 합니다.

 “한글사랑 나라사랑” 같은 푯말을 아무리 드높인다 하더라도 이 나라 사람들이 두루두루 한글과 우리 말을 사랑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바꾸어야 하고, 삶터를 스스로 일구어야 하며, 삶사랑으로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을 사귀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외침말이라 할지라도 한낱 외침말에 그칩니다. 우리 말 살리기이든 우리 강 살리기이든 우리 땅 살리기이든, 입으로 할 수 없고 글쓰기로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내 하루로 할 뿐입니다.

 한글날을 기리며 한글과 우리 말을 다루는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살뜰히 말사랑 글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아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지식입니다. 나와 너는 머리에 담는 지식이 아닌 날마다 살아내며 나누는 이야기를 가누어 빛깔 고운 슬기를 살포시 베풀어야 합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며 오늘과 어제와 글피를 보내는 나라면, 내가 세우는 일터에 ‘무슨무슨 주니어’나 ‘무슨무슨 닷컴’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지 못하며 오늘도 어제도 글피도 달력에 적힌 날짜로 바라보는 나이기에, 내가 다니는 일터 이름이 적힌 이름쪽 하나에 갖가지 자잘한 영어나 한자를 새겨 놓습니다.

 처음 그대로 살고 처음처럼 죽습니다. ‘시작’과 끝이 아닌 ‘처음’과 끝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지만, 세 살뿐 아니라 어머니 배에 깃들어 있을 때부터 내 삶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어머니가 살아온 바탕을 내가 받아먹고, 내가 태어나 자라며 보는 그대로 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으려면 내 어머니가 당신 쓰던 말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는다면 내 아이가 쓰는 말 또한 내 아이 스스로 사랑으로 보듬습니다.

 첫머리를 옳고 착하며 곱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머리를 바르며 맑고 밝게 다잡아야 합니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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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0-09 23:3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순수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어로 바꾼 경우에 그 말을 살릴 필요도 있지만 오랜기간 사용한 한자어를 굳이 한글로 억지로 고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보다는 요즘에 10~20대 층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오히려 한글을 더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숲노래 2010-10-10 06:17   좋아요 0 | URL
어린이와 청소년이 쓰는 말은 모두 '어른이 쓰는 말'을 따라하고,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 어떤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 말은 달라집니다. 어른들이 '말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만큼' 아이들도 아무 말이나 함부로 안 쓰지요.

4대강 같은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말과 글을 '한 나라 사람 누구나(학력이 짧든 아는 것이 적든) 손쉽고 즐거이 나누는 테두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한글로 억지로 고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제자리로 가도록 바로잡는' 일입니다.
 


 내가 걷는 골목


 내 눈에만 어여삐 보일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언제나 어여쁘기 때문에 동네 골목 마실을 꾸준하게 오래오래 이어가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다른 사람은 지저분하게 바라보거나 아무것 아니라고 얕잡아 보더라도 내가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골목길 삶자락은 가없이 아름다우니까 내가 느낀 이 아름다움을 글과 사진으로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한다.

 내 마음에만 알차게 보일 수 있으나, 내가 읽기에는 노상 알차기 때문에 판이 끊어진 책이건 나라밖 책이건 거의 안 알려진 채 조용히 묻힌 책이건 기쁘게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쓴다. 다른 사람은 뭐 그런 책을 굳이 읽느냐고 묻는다. 잘 팔리거나 널리 사랑받는 책도 많은데 애써 뻘밭에 묻힌 책을 캐려 할 까닭이 있느냐고 말한다.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는 책도 좋아할 만하지만, 누구보다 내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으면서 내 눈과 마음과 손으로 고이 껴안을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 (4343.10.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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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손


 책짐을 여러 시간에 걸쳐 쉬잖고 묶어 날라 쌓고 있다 보면 두 손은 빨개진다. 그러나 책을 묶고 나르고 쌓는 동안 두 손이 빨개지는 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새책이라 하는 책을 묶고 나르고 쌓아도 두 손은 책먼지와 책때를 타면서 새까맣게 바뀌니까. 나중에 손을 씻고 보면 두 손이 바알갛게 바뀌었음을 깨닫는다.

 처음 하루이틀은 바알갛게 바뀐 손이 밤나절 잠자리에서 따갑다고 느낀다. 사흘나흘이 되면 바알갛게 바뀌던 손이 누런 빛으로 다시 달라진다. 하루하루 지나는 동안 아픔이 사라진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이어진 마디 끝자락뿐 아니라 손가락과 손바닥에 통째로 두툼하게 꾸덕살이 박인다. 누런 빛이 지나면 예전 살빛으로 돌아오는데 예전보다는 조금 거무튀튀하거나 짙어진 살빛으로 자리잡는다. 다만, 책 묶기를 더 하지 않는다면 다시 노란 빛으로 살짝 바뀌다가는 금세 하얀 손이 되어 버린다. (4343.8.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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