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가 같이 놀 때에

 


  둘째 아이가 씩씩하게 잘 걷는다. 돌이 되도록 걸을 생각을 안 하던 둘째였기에, 이 아이가 언제쯤 걸으려나 싶었다. 하도 안 걷고 기기만 하니까, 함께 마실을 다니면서도 늘 안아야 해서 팔이 빠지도록 고단했다. 그런데, 돌을 지나니 하루가 다르게 잘 걷는다. 참 몰라보도록 잘 걸어, 언제 기기만 했느냐 싶기도 하다. 다리에 힘이 붙고 누나랑 함께 노는 재미에 빠졌을까. 마당에서 누나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빙빙 도니, 둘째 아이는 누나 뒤를 좇는다. 누나 꽁무니만 좇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누나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저랑 함께 놀아 주면 이렇게 잘 걷는다.


  그러고 보니,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보행기’나 ‘유모차’를 쓰지 않았다. 자전거에 붙이는 수레에 작은 바퀴를 앞에 붙여 가끔 태우기는 했지만, 으레 안고 다녔으며, 땅바닥이든 흙바닥이든 스스로 기어다니도록 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천천히 제 힘을 키웠을까. 아이는 아니 결대로 하루하루 제 삶을 누릴까.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잔잔히 불 적에 아이들뿐 아니라 두 어버이도 마당이나 들길에서 마음껏 지낼 수 있다. 우리는 다 함께 해를 바라보며 흙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4345.7.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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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어버이가 아플 때

 


  둘째가 몸앓이를 하던 날부터 아이 아버지 몸이 차츰 안 좋아지더니, 어제와 오늘 아이 아버지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아리송하기까지 하다. 이제 깊은 밤이 되어 아이들 모두 새근새근 잔다. 아이들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나서 겨우 몸을 일으켜 쉬를 누고 코를 푼다. 몸이 후끈 달지는 않으나 언제 다시 후끈 달는지 모를 노릇이다. 오늘 아침에는 퍽 늦게까지 자고 나서 일어나니 몸이 나아지는가 싶었으나, 이른아침부터 온 집안을 쓸고 닦은 다음, 아이들 씻기고 빨래하며 밥을 차리느라 여러모로 움직이고 보니 도로 몸이 달면서 기운이 쪽 빠진다. 이제 나는 어찌할 수 없다며 자리에 드러누워 한 시간 반쯤 허리를 펴려 하지만 기운이 도로 살아나지는 않는다. 아이들 부산한 소리가 귀에 쟁쟁거려 그만 벌떡 일어난다. 어지러운 몸으로 집일을 건사한다. 눈알이 핑 돌고 골이 쑤시니 스스로 생각을 빚지 못한다. 그래도 생각을 잊고 싶지 않아 자꾸자꾸 생각한다. 나 스스로 내 몸이 아프다고 여기니 자꾸 아픈지, 나 스스로 내 몸이 아플 까닭 없다고 생각하며 내 몸을 낫게 돌릴 수 있는지, 끝없이 생각한다. 식구들 굶길 수 없기에 밥은 차리지만, 밥술을 들기란 참 벅차다. 저녁 밥상은 도무지 차릴 기운이 없으나, 어찌저찌 감자 두 알 썰어 감자국을 끓여 아이 앞에 내놓는다. 첫째 아이가 밥을 제대로 뜨는지 마는지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며 그냥 뻗는다. 둘째 아이는 오늘 네 차례 똥을 누면서 몸속 나쁜 기운을 이럭저럭 빼낸 듯하다. 그래도 저녁에 가슴에 누여 재우며 보니, 몸이 아직 뜨겁고 눈곱과 콧물은 자꾸 나온다. 이 아이들이 하루 더 달게 자고 나서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빈다. 나 또한 신나게 기운을 차릴 수 있기를 빈다. 눈이 아프고 목이 따갑다. 안 아픈 데가 한 군데도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내가 내 몸 구석구석 아프기를 바라기에 이토록 괴로울 만큼 아픈지, 참말 내가 스스로 맡는 일이 너무 무거워 아플밖에 없는지, 차근차근 생각한다. 몸이 무겁거나 아프기 때문에 입에서 퉁명스런 말이 튀어나오는지, 스스로 더 슬기로우며 착하게 살아가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니까 스스로 망가지고 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온몸이 찌뿌둥한 나머지, 낮과 밤과 아침과 새벽을 보듬는 아름다운 소리를 한 가지도 듣지 못한다. 햇살도 바람도 물도 흙도 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내 어버이는 나한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우리 아이와 옆지기한테 무엇을 남기는가. 밖에서 보기에는 고단하다지만, 안에서 누리기에는 즐거운 삶이 있다. 밖에서 보기에는 멀쩡하다지만, 안에서 느끼기에는 고단한 삶이 있다. 우리 아이들과 옆지기와 내가 모두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운 나날을 누리면서 마음 가득 흐뭇한 물결이 넘실거릴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본다. 좋은 생각을 품으면서 흐트러진 몸을 다스리고 싶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고단한 몸으로 밥을 차리든 개운한 몸으로 밥을 차리든 맛나게 숟가락 들지 않는가. (4345.6.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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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6-22 05:43   좋아요 0 | URL
몸이 아플땐 몸이 내게 할말이 있는거라 생각해요.
그럴땐 무리하지 마시고 좀 쉬세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니 무책임한 말을 쉽게 하고 있네요.
산들보라가 좀 나은 것 같다니 다행인데, 사름벼리랑 된장님이 어서 나으셔야할텐데요.

숲노래 2012-06-22 07:17   좋아요 0 | URL
제가 쉬면 집에서 일할 사람이 없거든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몸에서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기를 빌고 또 빈답니다...
 


 뜨거운 이마

 


  둘째 아이가 사흘 앞서 몸앓이를 한다. 저녁나절 마당에서 누나랑 놀며 물놀이를 하다가 옷을 흠뻑 적신 채 한참 돌아다니느라 그만 몸이 나빠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일찍 옷을 갈아입혔어야 했는데 잘못했다. 이러고 이틀이 지나면서 첫째 아이한테 둘째 아이 몸앓이가 옮는다. 첫째 아이가 아침부터 밍기적거릴 뿐 아니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더니 자꾸자꾸 바닥에 드러눕는다. 낮밥을 먹고 나서 스스로 자리에 눕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러나 둘째 아이가 놀면서 자꾸자꾸 떠드니까 그만 깬다. 잠을 더 자야 하는데 깬 아이 몸은 불덩이 같다. 내 몸도 이에 못지않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아침 일찍부터 끝방을 치우고, 풀물을 갈아서 내놓으며, 밥을 차려서 먹이고 먹는다. 이렇게 하고 빨래와 설거지, 또 둘째 똥바지 빨래까지 새로 하고 이불을 빨아서 널기까지 보내고 시계를 본다. 한 시 삼십구 분. 참 잘 견딘다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 이렇게 여러 가지 집일을 맡고자 생각하며 살아가니까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라도 이런 일 저런 일을 쉼없이 하지 않느냐 싶기도 하다. 이럭저럭 할 일을 마쳤다 싶으니, 이제 첫째 아이하고 나란히 누워서 두 시간 즈음 끙끙 앓고 싶다. 끙끙 앓고 나서 첫째 아이가 벌떡 일어날 수 있기를 빈다. 첫째 아이 몸이 찬찬히 식으면서 따순 물로 말끔히 씻고 서로 즐거이 놀 수 있기를 빈다. (4345.6.2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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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0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뜨개하는 어머니 곁에서

 


  달포 즈음 되었나 싶은데, 아이들 어머니가 깔개 하나 큼지막하게 뜨개질을 한다. 우리가 우리 깜냥껏 요모조모 꾸리는 서재도서관에서 ‘바닥에 털푸덕 앉아 책을 펼치고 읽기 좋을 만큼’ 널찍하게 깔개 하나 뜨개질을 한다. 마무리가 되려면 얼마쯤 걸릴까. 알 수 없다. 이달에 마칠 수 있을는지, 이듬달에 마칠는지 모른다. 실은 모자라지 않을는지, 더 마련해야 할는지 알 길이 없다.


  뜨개하는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며 생각하면 누구나 알는지 궁금한데, 이만 한 깔개를 손으로 뜨개해서 쓰는 품이나 값이나 돈을 따지자면, 참말 다른 사람이 뜬 물건을 돈을 치러 살 때에 ‘더 적은 돈’이 든다 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 깔개 하나를 뜨느라 들인 실값이나 바늘값이나 품값을 헤아리자면, 이 깔개 하나를 돈으로 어떻게 셈할 만한지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본다. 아시아 중서부에서는 가시내가 시집을 갈 때에 양탄자를 비롯해 수많은 뜨개옷과 뜨개꾸러미를 갖고 간다 한다. 가시내는 어릴 적부터 온갖 옷가지를 뜨개한단다. 어느 양탄자는 하나를 뜨느라 몇 해씩 품을 들인다고도 한다. 돈값으로 치면, 한국사람이 이런 양탄자 하나 사는 데에 들일 돈은 얼마 안 된다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양탄자이든 깔개이든 옷이든, 뜨개하는 사람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숨결이 깃들기 마련이다. 이런 뜨개꾸러미를 ‘숫자로 셈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쓴 글을 누가 ‘돈 얼마를 치러 사겠다’ 할 때에 값을 부르지 못한다. 내가 찍은 사진을 누군가 ‘돈 얼마를 치러 사겠다’ 할 때에도 값을 부르지 못한다. 나로서는 내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숨결을 담아 쓰는 글이요 찍는 사진인데, 이 같은 글과 사진에 어떤 숫자를 매길 수 있을까. 이 숫자는 마땅할까. 저 숫자는 알맞을까.


  우리 아이들이 부르는 예쁘장한 노래를 누군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아이들 웃음을 누군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온누리 어떠한 물건도 마음도 꿈도 사랑도 돈으로는 살 수 없으리라 느낀다. 돈으로는 오직 하나, 돈만 살 수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살아가며 아이가 된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랑 살아가며 어버이와 같은 목숨이 된다. 내가 쓰는 글은 온통 내 삶이요, 내가 즐기거나 누리는 사진은 언제나 내 삶이면서 내 목숨이다.


  비가 온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들썩인다. 풀잎이 팔랑거린다. 가느다란 빗줄기 사이로 나비가 춤을 춘다. 수국이 여름을 맞아 꽃잎을 활짝 벌린다. 들판에 갓 심은 모는 사름빛을 뽐내며 빗물을 맛나게 받아먹는다. 도시에서는 이 빗물이 갈 곳을 잃다가 하수구로 빠진다. 똑같은 빗물이라 하더라도 도시에서 내리기는 싫을 수 있겠지만, 도시에서 내리는 빗물은 아파트 꼭대기나 자동차 지붕이 아니라 골목동네 텃밭 한 자락 감나무 줄기에 떨어져 스르르 감나무 뿌리로 스며들다가는 바알간 감알 소담스레 익도록 거들고 싶으리라 느낀다. 오줌 아직 못 가리는 둘째가 어머니가 뜨개하는 커다란 깔개 귀퉁이에 살짝 쉬를 했다. 나는 모른 척하고 쉬를 치운다. 뜨개를 다 마무리지으면 신나게 빨아야지.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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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를 바라보는 아이들

 


  우리 집 처마 밑 새끼 제비 네 마리가 모두 날갯짓을 익혔다. 날마다 들여다보며 이 새끼들이 언제쯤 무럭무럭 자라 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날갯짓 익히기는 아주 금세 끝난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 날갯짓을 한다. 먼저 새끼 제비 한 마리만 두 어미가 갈마들며 날갯짓을 곁에서 보여주면서 익히도록 하는데, 이렇게 새끼 제비 한 마리만 여러 날 날갯짓 놀이를 새벽에만 살짝 하더니, 다른 새끼 제비 세 마리 모두 둥지에서 벗어나 날갯짓을 처음으로 하던 날, 아침이 되자 모두들 날갯죽지에 힘이 붙고, 날갯죽지에 힘이 붙은 새끼 제비 네 마리는 어미 제비 두 마리하고 둥지를 떠난다. 아침에 떠난 제비는 해거름 무렵 돌아온다. 하루 내내 먼먼 어딘가를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날갯짓을 가다듬었겠지. 이제 제비들이 다시 안 돌아오나 싶었으나, 날갯짓을 하며 부산을 떨던 새끼들은 저희가 태어난 둥지로 돌아와 새근새근 잠들고, 이듬날 새벽에 다시 깨어나 먼먼 어딘가로 다시 떠난다. 그러고 다시 돌아와 또 옛 둥지에서 잠들고. 새끼 제비가 모두 날갯짓을 익히기 앞서, 하루 앞서, 어미 숫제비는 새끼들 웅크린 둥지 곁에 새 제비집을 한 채 손질했다. 이제 새끼들 덩치가 커지니 서로 나누어 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새끼 제비 네 마리 날갯짓을 처음 익히며 우리 집 마당 전깃줄에 내려앉은 이른아침, 아이와 함께 마당으로 나와 올려다본다. 새끼 제비들은 끊임없이 노래를 하고, 노래를 한참 잇다가는 모두 폴폴폴 날아서 떠났다.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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