땋은머리

 


  아이 어머니가 큰아이 머리를 땋는다. 아주 짧은 동안도 가만 있지 않는 큰아이는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튼다. 도무지 참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라면 누구라도 참지 못할 테지. 이리 움직이고 저리 뛰고 싶을 테니까. 머리를 다 땋은 다음 거울로 머리 모양을 보여준다. 큰아이 스스로 예쁘다고 여겨 땋은머리를 풀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땋은머리인 채 잠든다.


  너는 몇 살쯤 되면 스스로 머리를 땋을까. 아직 네 머리를 네 스스로 줄로 묶지 못하니, 머리를 땋기까지는 더 오래 걸릴까. 줄로 묶기보다 머리 땋기가 한결 수월할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네 손은 어른들한테서 배워 빛을 내기도 할 테고, 네 스스로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놀이로 환하게 빛나기도 할 테지. (4345.10.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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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케익

 


  마당 한켠에서 흙을 그러모아 도톰하게 다지던 큰아이가 ‘고양이 케익’을 만들었다며 들여다보라고 한다. 흙더미에 가랑잎을 꽂고는 고양이한테 줄 케익이라고 말한다. 고양이 케익을 함께 들여다보던 작은아이가 손으로 만지며 흐트러졌는데, 큰아이는 나중에 다시 토닥토닥 다져서 모양 좋게 만들어 놓는다. 우리 집 마당을 저희 마당처럼 여기며 날마다 수없이 돌아다니는 마을고양이들은 이 흙케익을 알아보려나. (4345.10.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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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와 다니는 아버지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를 둘이나 셋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를 만나기는 아주 힘들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들 둘이나 셋 데리고’ 다닐 뿐 아니라 너덧씩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를 만나기는 아주 쉽다. 맞벌이를 하는 집이 많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버이를 살피면 언제나 어머니일 뿐, 아버지가 아이들을 도맡에 데리고 다니면서 마실을 하는 일이란 거의 없구나 싶다. 아이들이 제법 커서 스스로 똥오줌을 누고 가게에서 먹을거리를 살 만한 나이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어버이 손길이 닿아야 하는 갓난쟁이나 많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는 참으로 보기 어렵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아버지보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느낀다. 어머니들은 ‘아기를 아끼고 아이를 사랑하는’ 유전자가 아버지들보다 훨씬 크거나 세거나 높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한테 아기와 아이를 아끼는 유전자가 있다면, 어머니 스스로 이러한 유전자를 북돋았겠지. 아버지한테 아기와 아이를 아끼는 유전자가 없거나 적다면, 아버지 스스로 이러한 유전자를 안 북돋았겠지.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반긴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다그침이나 꾸중을 안 반긴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까르르 웃으면서 뛰노는 삶을 반긴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옴쑥달싹 못하게 꽁꽁 얽매어서 시험공부만 시키는 삶을 안 반긴다.


  그런데, 어른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른이라 해서 꽁꽁 갇힌 삶을 반길까. 어른이라 해서 컨베이어벨트 부속품 같은 일을 반길까. 어른이라 해서 톱니바퀴처럼 쳇바퀴 도는 삶을 반길까. 어른들은 아이들을 먹여살리거나 집안을 꾸린다고 말하는데, 참말 삶을 일구면서 살림을 돌보자면, 어버이(어른)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터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일거리를 찾아 가장 사랑스러운 땀을 흘리면서 활짝 웃을 만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느낀다.


  아이들과 다닌다. 아이들은 웃고 춤춘다. 아이들은 노래하고 뛰논다. 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앞서, 나는 그저 내 두 다리로 온누리를 누비며 살아가는 나날을 좋아했다. 나한테 있는 돈은 온통 책을 사느라 다 썼기에 자가용 굴릴 돈은 남아나지 않기도 했으나, 두 다리를 움직여 이 골목 저 고샅 그 들판을 걸어다닐 때에 살아가는 기쁨을 누렸다. 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로서는 아이들 먹여살리는 데에 살림돈을 다 쓴다. 요사이는 책을 사서 읽는 돈은 거의 안 쓴다. 그렇다고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다. 종이책은 덜 읽지만 ‘아이책’, 곧 ‘아이 눈빛과 몸짓과 마음결로 읽는 책’은 날마다 실컷 읽는다. 이리하여, 아이들과 살아가는 아버지인 나는 자가용은 못 굴리고, 두 팔로 아이들을 안고 걷는다. 큰아이는 커서 홀로 씩씩하게 저 앞으로 멀리 내닫다가 다시 나한테 달려온다. 작은아이는 작아서 혼자 걷고 뛰다 지치면 울먹울먹거리며 안아 달라 한다. 작은아이를 안는다. 작은아이를 걷고 큰아이 손을 잡는다. 내 등줄기와 허벅지와 이마와 어깨를 타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그런데 내 낯은 찡그리지 않는다. 그저 좋다. 이렇게 아이들 살내음을 느끼고 내 땀내음을 풍긴다. 아이들은 두 다리로 이 땅을 튼튼히 디디고, 두 팔로 이 하늘을 마음껏 껴안는다.


  내가 아버지 아닌 어머니였으면 어떠했을까. 어쩌면,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 아닌 어머니로 태어나 살아갔다면 내 옆지기일 사내는 여느 사내들처럼 집일이나 집살림하고 등을 졌을까. 나는 어머니 아닌 아버지로 태어나서 오늘날 여느 어머니가 도맡는 집일이랑 집살림을 도맡을 수 있기에, ‘어머니 아닌 한 사람으로서 맡을 사랑과 꿈’이 무엇인가를 온몸 깊숙하게 느끼는 나날이 아닐까. (4345.10.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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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를 할 때면 어릴 적 여러 가지 일이 떠오른다. 바깥에서 떡볶이를 사다 먹을 때에는 너무 맵고 너무 짜며 너무 달다던 생각. 길거리 떡볶이집은 떡만 잔뜩 있고, 손수 냄비에 끓여서 먹도록 하는 떡볶이집은 떡이 너무 적다던 생각.


  떡을 미리 헹군 다음 불린다. 호박을 썰고 무를 썰며 감자를 썰고 당근을 썬다. 불판을 달구고 기름을 두른다. 잘 달구어진 불판에 미리 썬 여러 가지를 얹어서 볶는다. 어느 만큼 익는구나 싶을 때에 가지를 썰고 양파를 썰며 양배추를 썰어서 섞는다. 이러고 나서 불린 떡을 넣고 콩나물을 넣으며 물을 붓는다. 불을 조금 키운다. 물이 끓으면 조청을 두 숟가락 넣는다. 굵은소금을 조금 넣는다. 간을 본다. 심심하다 싶으면 간장을 넣는다. 아이들 먹을 떡볶이인 만큼 고추장은 조금도 안 넣는다.


  아이들과 살아가며 다섯 해째 ‘집 떡볶이’를 이처럼 끓인다. 아이들은 매운 것을 못 먹는다. 마땅한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매운 것 잘 먹는 아이들은 아직 거의 못 보았다. 어디엔가 있을는지 모르나, ‘맵다’는 맛이 아니라 혀가 아픈 느낌이다. 어른들은 혀가 아린 느낌을 즐긴다 하지만, 아이들한테 혀가 아린 느낌을 즐기라고 할 수 없다. 아이들은 목숨을 키울 나이요 삶이지, 어른들처럼 이 맛 저 맛 따지는 나이나 삶이 아니다. 나 스스로 돌이켜보면, 내 어머니도 지난날 집에서 떡볶이를 하실 때에는 ‘하나도 안 매운’ 떡볶이를 하셨다. 바깥에서 사다 먹는 떡볶이만 혀가 알알하도록 매웠다.


  문득 생각한다. 왜 ‘가게 떡볶이’는 그토록 매워야 할까. 왜 떡볶이는 매워야 한다고 여길까. 왜 아이들한테 매운 떡볶이와 매운 맛(느낌)을 길들이려 할까. 왜 떡맛과 양념맛과 밥맛과 국물맛을 알맞고 사랑스럽게 가꾸려 하는 길하고는 멀어지려 할까. (4345.10.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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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10-08 22:38   좋아요 0 | URL
글쎄요.언제부터인지 떡볶이는 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더군요.그래선지 가면 갈수록 더 매워지는 것 같아요.
 


 작은아이 오줌가리기

 


  어제 하루 작은아이 오줌기저귀를 한 장도 내지 않는다. 한 시간에 한 차례 오줌그릇에 앉히니 이때마다 조금씩 쉬를 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도, 새벽에 칭얼거려 깨어날 적에도, 지난 열일곱 달을 돌아보건대 막 눈을 뜨거나 잠결에 이리저리 몸을 뒤틀 적에는 쉬가 마렵다는 뜻이요, 살며시 안아서 토닥이고 보면 바지나 기저귀에 으레 쉬를 누기 마련이라, 이 즈음에 오줌그릇에 앉히니, 졸린 눈으로도 쉬를 눈다.


  오늘도 낮 다섯 시 사십 분까지 아직 기저귀 한 장 내지 않는다. 틈틈이 쉬를 누였기 때문이다. 이제 깊은 낮잠에 빠진다. 깊은 낮잠을 잘 즐기다가 일어난 뒤에도 쉬를 누이면, 오늘은 밤잠을 잘 때까지 기저귀이며 바지이며 한 장도 빨래감이 안 나올 테지. 그러나, 빨래감이 있고 없고보다, 작은아이가 오줌그릇에 앉아 쉬를 누는 버릇을 들이니 반가우면서 예쁘다. 이제 너도 네 누나처럼 쉬가 마려울 때에는 쉬를 눌 자리를 찾을 수 있겠지. 쉬를 눌 자리를 찾을 수 있은 다음에는 똥을 눌 자리도 찾을 수 있겠지. 다 큰 아이가 되는구나. (4345.10.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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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5 17:58   좋아요 0 | URL
이쁘네, 이제 오줌도 가리는구나... 아이고.

숲노래 2012-10-05 18:08   좋아요 0 | URL
오줌 안 가려도 이쁘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