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3.11.29.
 : 동백꽃 보려다가 안장 빠져

 


- 늦가을 흐드러지는 숲빛과 들빛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날이 퍽 쌀쌀하지만, 아이들 데리고 자전거를 타기로 한다. 한겨울에도 자전거를 타는데 늦가을쯤이야 뭐. 서재도서관에 갖다 둘 책이 한 짐 있기에, 먼저 혼자서 도서관에 짐을 갖다 놓는다. 이동안 아이들더러 양말 신고 두꺼운 겉옷 입으며 장갑 끼라고 얘기한다. 부리나케 도서관에 다녀오니,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콩콩 뛰면서 아버지를 기다린다. “자전거 어디 있어요?” “자전거는 저 앞에 있어.” “그래요?” 대문을 닫을 즈음 아이들은 저 아래에 둔 자전거를 알아보고는 “야, 자전거다!” 하면서 달려 내려간다. 큰아이가 자전거를 붙들어 준다. 작은아이를 수레에 태운다. 조금만 달려도 작은아이는 잠들 낌새로구나. 옷을 단단히 여미고 모자를 씌운다.

 

- 어제 혼자 우체국 다녀오는 길에 본 면소재지 서오치마을 동백꽃 있는 데로 간다. 빗돌 세운 둘레에 동백나무 여러 그루 있는데, 무척 일찍, 늦가을부터 꽃송이를 터뜨린다. 드문드문 한 송이씩 피기에 눈여겨보지 않으면 쉬 지나치곤 한다. 자전거를 멈추고 큰아이하고 가까이에서 꽃을 바라보고 꽃내음을 맡으며 꽃잎을 살살 쓰다듬는다.

 

- 면소재지 가게에서 쌀을 산다. 천천히 가을바람과 가을구름과 가을숲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자전거를 달리며 오늘 따라 ‘샛자전거가 많이 흔들린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큰아이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놀지는 않는데, 왜 이렇게 흔들리는 느낌일까. 동호덕마을 지나 오르막 끝나고 내리막이 될 즈음, 어어 뭔가 스르르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안장이 톡 빠지려 한다. 자전거를 살살 세워 논도랑 앞에서 겨우 멈춘다.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는 살짝 놀란다. 오르막 자리에서 천천히 달렸기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수레에 앉아 잠든 아이는 실눈조차 안 뜨고 잘 잔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고 살피니, 내 안장대에 붙인 샛자전거 조임쇠가 아래로 자꾸 내려가면서 안장대가 위로 뽑히도록 했구나 싶다. 샛자전거를 안장대에 조일 적에 살짝 느슨하게 풀어야겠다고 느낀다. 너무 단단히 조이니 샛자전거 붙인 자전거로 왼구비나 오른구비 돌 적에 아주 천천히 조금씩 안장대를 끌어올리면서 이렇게 자전거가 흔들리는 느낌이 되었고, 이내 안장대가 스르르 뽑히고 마는구나 싶다.

 

- 읍내 자전거집에서 가장 긴 안장대를 장만해서 붙였지만, 이 안장대로는 안 되겠구나 싶기도 하다. 서울이나 큰도시 자전거집에서 더 긴 안장대를 장만해야겠다. 그러나, 안장대 못지않게 내가 타는 자전거는 내 몸크기에 안 맞는 작은 치수이다. 나는 16인치나 17인치 크기 자전거를 타야 하는데, 이 자전거는 15인치 크기이다. 아이들과 느긋하게 잘 다니려면 앞으로는 16인치나 17인치 자전거를 새로 장만해야겠다고 느낀다.

 

- 안장대를 다시 꽂고 집으로 달린다. 더 천천히 달린다. 집에 닿을 무렵 안장대가 또 빠지려 한다. 가만히 살피니, 안장대 조임쇠도 많이 닳고 느슨해진 듯하다. 안장대 조임쇠도 바꾸어야 할까. 샛자전거와 수레를 안장대에 붙이고 다니다 보니, 안장대뿐 아니라 안장대 조임쇠도 무척 버거운가 보다. 얼른 두 가지를 새로 갖추어야 아이들과 겨울자전거 누리겠구나. 안장조임쇠는 한 벌 더 장만해서 수레에 늘 챙겨야겠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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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3.11.27.
 : 얼음 맞는 가을길

 


- 편지 한 통을 부치려 한다. 겨울 문턱인 터라 가장 따뜻할 때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자고 생각한다. 어느 한편으로는 읍내마실을 해서 우체국에 갈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한겨울이라면 스스럼없이 자전거를 달릴 텐데, 외려 겨울 문턱이 조금 더 춥다고 느낀다. 이래저래 밍기적거리다가 네 시가 다 되어 비로소 길을 나서기로 한다. 아침부터 찬비가 쏟아졌기에 망설였는데, 낮이 되며 해가 나왔고, 낮에 해가 따숩다 싶어 옆지기 두꺼운 겉옷을 빨아 바깥에 말렸다. 이만 한 해님이 있으면 네 시에 우체국 다녀와도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 바람이 제법 분다. 아이들은 오늘 어떻게 할까. 어제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마실 하며 바람 옴팡지게 먹었다. 큰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이부자리로 깃들었고, 두 시간 넘게 옹크리며 잤다. 오늘도 아이들 데리고 길을 나서면 좀 추우리라 생각하며 혼자 다녀오려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함께 따라나서고 싶은 눈치이다. 너희들 대단하구나. 그래, 이렇게 대단한 숨결이 바로 아이들 숨결이지. 찬바람에 지지 않고, 아니 찬바람과 놀면서, 가을을 누리고 겨울을 맞이하는, 이런 숨결이 바로 아이들 숨결이지.

 

- 문득 아이들 데리고 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제 너희 바람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아버지 혼자 우체국 다녀올게.” 하고 말한다. 아이들은 대청마루에 서서 손을 흔들어 준다. “아버지 꼭 오셔요!” 그럼 우체국만 갔다가 돌아오지 어디 가서 안 오겠니.

 

- 생각보다 바람이 드세다. 어제보다 바람이 드세다. 자전거가 휘청거린다. 그런데, 이런 바람이 불어도 나무는 꺾이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 부는 결에 따라 이리 살랑 저리 설렁 살살 움직이면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건사한다. 사람들은 으레 풀만 바람 따라 눕는다고 여기지만, 나무도 바람 따라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나무 곁에 서서 나뭇줄기에 가만히 손을 대 보면 안다. 아무리 우람한 나무라 하더라도 바람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데, 무척 크게 움직인다.

 

- 우체국에 닿는다. 편지 한 통 부친다. 저울로 다니 3150원. 택배보다 비싸게 나오네. 차라리 택배 종이 붙이면, 외려 2500원으로 해 주기도 하는데. 우체국 일꾼이 슬그머니 150원을 덜어 준다. 응? 고맙습니다.

 

- 면소재지 빵집에 들러 네모빵과 둥근빵을 산다. 우리 집 아이들은 네모낳게 구운 식빵을 ‘네모빵’이라 가리키고, 둥그렇게 구운 바게트를 ‘둥근빵(동그랑빵)’이라 가리킨다. 아이들이 붙인 이런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 아이도 어른도 이렇게 수수하며 재미나게 이름을 붙이면서 살아갈 때에 마음이 아름답게 빛나겠지.

 

- 집으로 돌아간다. 면소재지 벗어날 즈음 만나는 숲이 가을빛으로 흐드러진다. 다음에 바람 적게 불고 햇볕 좋은 날, 이곳에 마실 와야겠다. 마을 뒤쪽 천등산은 도시에서 몰려든 사냥꾼 때문에 갈 수 없다. 주말에도 여느 날에도 사냥꾼 총소리가 펑펑 울린다. 면소재지 조그마한 멧등성이에는 사냥꾼이 올 일 없다. 이곳 숲에서 아이들과 가을빛 누려야겠다.

 

- 면소재지 벗어나서 서호덕마을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얼음이 쏟아진다. 하늘에서 얼음이 퍼붓는다. 서호덕마을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달리면서 아이고 아파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갑자기 퍼붓는 얼음비는 춥기보다 아프다. 웬 난데없는 얼음비람. 오려면 눈이 오지. 눈이 와서 우리 아이들 신나게 눈놀이 하도록 해 주지.

 

- 동호덕마을로 접어드니 얼음비 그치면서 해가 쨍 하고 난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 얼음비 쏟아내던 매지구름은 벌써 저 뒤로 물러났다. 하늘이 탁 트이다가도 흰구름이 물결치고, 다시 하늘이 탁 트이고 새삼스레 흰구름 그득 찬다.

 

- 구름 누리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름을 아이들과 함께 보면 더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아이들이 이 얼음비 맞았으면 무엇을 느꼈을까 궁금하다. 어제보다 모진 바람이 불더라도 이 바람을 쐬어야 시골스러운 시골아이로 씩씩하게 자란다고 여겨야 했으려나. 바람이 드세니 길에도 마을에도 사람 그림자가 없다. 자동차도 없다. 맞바람 맞으며 낑낑거리면서 자전거를 달린다. 어제는 늦가을바람 옴팡지게 먹으며 몸이 많이 춥고 힘들더니, 오늘은 이럭저럭 괜찮다. 여러 날 잇달아 바람을 먹으면 차츰 익숙해지는 셈일까.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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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3.11.18.
 : 늦가을바람, 뱀, 재채기

 


- 서재도서관 큰봉투를 하나 만들었다. 〈시민사회신문〉이라는 곳에 ‘숲사람 이야기’라는 꼭지로 한 쪽을 통째로 채우는 글을 쓰는데, 이 글을 도서관 지킴이한테 보내려면 큰봉투가 있어야 한다. 도서관 이름과 주소를 박아 봉투를 만든다. 봉투 한 장에 86원 꼴이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봉투질을 하고, 아이들 밥을 먹인 뒤, 늦가을 찬바람 휭휭 부는 날씨에 가장 따스하다 싶은 열두 시 반 무렵 길을 나선다. 막상 길을 나서려 할 즈음 갑자기 빗방울 듣는다. 웬일이니. 아침에는 해가 나더니 웬 빗방울이니. 그런데 10분쯤 빗방울 듣다가 뚝 그치고 하늘이 멀쩡하게 갠다. 또 웬일이니.

 

- 바람이 드세다. 큰아이가 뜻밖에 “자전거 안 타고 집에 있을래.” 하고 말한다. 이러면서 “아버지, 보라하고 가서 과자 사 와요.” 하고 말한다. 쳇. 그럴 수 없지. “벼리야, 너 안 가려면 너는 과자 사 와도 먹으면 안 돼. 보라만 가니까. 아직 겨울도 아닌데 이만 한 바람 때문에 자전거 안 탄다고 하면 어쩌니. 겨울에는 자전거 어떻게 타려고 그러니.” 큰아이한테 두꺼운 겉옷 입힌다. 장갑을 끼운다. 수레에 앉은 작은아이한테는 내 두툼한 겉옷으로 감싸 준다. 바람이 싱싱 불어 추우니, 큰아이는 마을 어귀까지 달리겠다고 한다. 그래, 추울 때에는 달려야지. 큰아이는 조금 달려서 몸을 달군 뒤 샛자전거에 탄다. 작은아이는 마을 어귀부터 고개를 푹 떨구고 잠든다. 바람이 불건 어쩌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새근새근 잘 잔다.

 

- 며칠 사이에 바람이 달라졌다. 이레쯤 앞서부터 바닷바람에서 뭍바람으로 바뀌는구나 싶더니, 오늘은 그예 뭍바람이다. 면소재지 가는 길에는 이럭저럭 뒤에서 바람이 분다 할 만하지만, 우체국 들러 돌아오는 길에는 고스란히 앞바람 맞아야겠구나 싶다. 샛자전거에 탄 큰아이는 조용하다. 많이 추운 듯하다.

 

- 우체국에 들르고 가게에 들른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간다. 맞바람이 거세다. 자전거 발판 구르기 벅차다. 큰아이는 몸을 폭 숙인다. 바람이 제법 찬가 보다. 서호덕마을 지나 동호덕마을 가는 길목에 뱀 한 마리 본다. 어라, 넌 왜 아직 겨울잠 안 자고 예서 뭐 하나. 자전거를 세운다. “아버지, 뭐야?” “응, 뱀이야.” “뱀, 뱀 무섭잖아?” “뱀이 뭐가 무서워. 뱀이 우리를 무서워 하지.” “그래?” “자, 자, 뱀아, 너 여기 있으면 차에 치여 죽어. 얼른 저 길 가장자리로 가라.” 자전거 앞바퀴로 슬슬 민다. 뱀은 가기 싫어하는 눈치이다. 한창 따뜻하게 몸을 덥히려는데 성가시다는 눈치로구나. 이런, 녀석아. 너희들 뱀이 이렇게 늦가을에 몸을 덥히다가 자동차 바퀴에 엄청나게 밟혀 죽는 줄 모르니? 자전거 앞바퀴로 살살 밀어 길 가장자리로 보내는데, 저 앞에서 자동차 한 대 달려오는 모습 보인다. 저런. 조금 더 밀면 되는데, 자동차 거의 안 다니는 길에 웬 자동차지? 저 자동차는 굳이 이 길을 달릴 까닭 없이 큰길로 다니면 되는데, 왜 마을길로 애써 돌아서 오느라 성가시게 하나.

 

- 자전거를 옆 찻길로 얼른 돌린다. 자전거를 세운다. 자동차 지나간다. “아버지, 어떻게 해?”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그냥 잘 지나갈 테니 걱정하지 마.” 저 앞에서 자동차 오는 모습을 보고는, 자동차 바퀴 사이에서 뱀이 안 밟힐 만하다 싶은 데까지만 밀었다. 자동차 지나간 뒤 억새 한 포기 끊는다. 갑작스런 찬바람 때문에 꽁꽁 언 뱀을 억새풀로 슬슬 민다. “얘야, 얘야, 아무리 고흥이 따뜻한 곳이라도 너 겨울잠 안 자면 뭘 먹고 살려 그러니. 몸 따뜻하게 덥혔으면 얼른 구멍 파고 들어가서 겨울잠 자라.” 이동안 작은아이가 잠에서 깬다. 잘 잤니? 자전거가 굴러야 자는데, 아버지가 뱀 살린다며 자전거 세워서 잠에서 깼니?

 

-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 빈들과 억새꽃이 흐드러진다. 자전거를 살짝 세우고 아이들과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을 바라보고 누렇게 시든 들판을 본다. “벼리야, 저 구름 무엇처럼 생겼니?” “음, 고양이처럼.” “고양이? 그래, 그러면 고양이구름으로 하자.” 앞에서는 맞바람 드세지만,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낑낑대며 자전거를 달려 집에 닿는다. 얼굴이 벌개지도록 자전거를 겨우 달렸다. 태풍 오는 날 달리는 자전거 못지않게 힘을 쏟았다. 자전거를 집 벽에 붙이고, 덮개를 씌운다. 짐을 집안으로 들인다. 대문을 닫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또 빗줄기 듣는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새파랗게 열린 하늘에 흰구름 흐르더니 또 비가 오네. 그래도 아이들 집에 잘 들어오고 나서 쏟아지니 고맙다. 저 차디찬 비를 아이들이 맞았으면 고뿔에 걸릴 수도 있겠다.

 

- 아이들은 아이 추워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만, 이내 겉옷 훌훌 던지고 양말을 벗는다. 춥다며? 춥다면서 겉옷과 양말 벗어던지고 뛰어논다. 이와 달리 나는 재채기가 끊이지 않는다. 찬바람을 너무 마신 듯하다. 봄과 가을에는 날마다 들빛과 숲빛이 달라지기에, 아이들하고 이 시골빛을 누리고 싶은데, 가을은 찬바람이 날마다 더 드세게 바뀌니 바깥마실 만만하지 않다. 이튿날에도 소포를 더 부쳐야 할 텐데, 이튿날 바람은 어떠할까 모르겠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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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3.8.26.
 : 여름바다, 잘 있어라

 


- ‘여름 휴가철’이 끝난다. 드디어 ‘여름 휴가철’이 끝난다. 여름 휴가철 내내 바닷가에도 골짜기에도 도시 손님들 넘쳐서 우리 아이들 느긋하게 놀지 못했다. 외진 골짜기까지 도시에서 온 손님에다가 다른 마을에서 술병 들고 찾아드는 어르신이 있어 여러모로 고단했다. 더운 여름날, 골짝물 흐르는 시원한 숲그늘에서 술 한잔 즐기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마치 잔치판이라도 벌이듯 골짜기 한켠에서 판을 크게 벌여 놀고는 쓰레기 잔뜩 버리는 짓은 하나도 안 반갑다. 도시사람도 놀 줄 모른다지만, 시골사람도 놀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시골 바닷가나 골짜기에서는 불을 피우거나 뭘 구워먹지 말아야 할 노릇이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이란 없고 이를 키져보는 사람 또한 없다.

 

- 들빛 푸르게 맑은 여름 막바지에 바닷가로 자전거마실을 간다. 여름 내내 아이들과 바닷가와 골짜기를 돌아다닌다. 도시 손님 넘치는 바닷가 말고 고즈넉한 바닷가를 찾아보려 했지만, 끝내 못 찾았다. 자전거를 달려 알아보기에는 내 다리가 너무 힘든가. 그래도 다음해 여름에는 조용하고 홀가분한 바닷가를 다시 찾아보고 싶다.

 

- 큰아이가 샛자전거에 앉아 손잡이를 거의 안 잡는다. 문득문득 느끼기는 하지만, 참말 손잡이 안 잡고 두 팔 벌리면서 놀든지 뭔가를 한다. 아직 어리니까 이렇게 놀아야겠지. 더 나이를 먹으면 샛자전거에서 발판 함께 구르며 아버지를 도와주겠지.

 

- 면소재지를 거쳐 발포바닷가까지 가는 동안 나무그늘이 없다. 시골 분들은 찻길 가장자리까지 밭을 일구느라 나무 한 그루 자랄 손바닥만 한 땅뙈기조차 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골 분들은 들일을 하며 다리를 쉬며 땀을 들일 나무그늘이 없는 셈이다. 스스로 이렇게 만든다. 나무열매 즐기는 맛이 없고, 나무그늘에서 나무노래 들으며 한갓지게 낮잠을 자거나 쉬려는 멋이 없다. 그런데, 나무 없이 어떤 마을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무 없이 어느 집이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화덕마을 지나 상촌마을 못 닿아 발포바닷가 쪽으로 꺾는 옛길이 있다. 군내버스도 마을사람도 으레 새길로 다닌다. 나는 굳이 옛길로 달린다. 옛길에는 길가에 나무가 마주보며 자란다. 짧은 길이지만 나무를 누리며 달리는 길이다.

 

- 여름 휴가철 끝난 바닷가는 아주 조용하다. 이 바다는 온통 우리 차지가 된다. 큰아이는 헤엄옷으로 갈아입고 논다.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새근새근 잔다. 바닷가로 마실을 올 적에 작은아이는 으레 잠이 들고 만다. 큰아이가 신나게 놀고 쉴 즈음 비로소 작은아이가 깬다.

 

- 한참 놀고 나서 집으로 돌아간다. 늦여름 시골마을은 온통 푸른 물결이다. 이곳도 저곳도 푸른 물결이 싱그럽다. 그러나, 이 푸른물결을 마냥 싱그럽게만 바라보지 못한다. 어느 논이고 밭이고 죄 농약바람 맞는 들이기 때문이다. 겉보기로는 푸른물결이지만, 풀벌레 깃들지 못하고 제비와 멧새 모조리 죽이며 개구리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하는 소리없는 푸른물결이다. 사람들이 새와 벌레와 짐승하고 벗삼으며 숲노래 부르던 지난날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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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3.11.9.
 : 가을비 맞으며

 


- 도화고등학교 학생 둘이 서재도서관에 찾아왔다. 비구름 그득해서 날이 어둑어둑하기에 도서관은 슥 둘러보기만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는 저마다 돌아갈 집이 있어 마을 어귀로 나와 군내버스를 기다린다. 한 아이는 남성마을로, 한 아이는 고흥읍으로 간다. 저녁 일곱 시 오 분이 군내버스가 두 갈래로 들어온다, 읍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가 더 일찍 오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두 버스가 나란히 마을 어귀에 선다. 두 아이가 버스 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자전거를 달린다. 오늘은 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다.

 

- 내 비옷이 작다. 그러께까지 쓰던 비옷은 워낙 오래 입은 탓에 곳곳이 찢어져 비옷 구실을 못한다. 게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면소재지에서 비옷을 새로 장만했으나, 시골 면소재지에서 가장 큰 비옷이라 하는데에도 내 몸에는 꼭 붙는다. 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 입을 만한 비옷은 큰도시로 가거나 인터넷으로 알아보아야 하려나.

 

- 가을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달린다. 오늘은 모자를 깜빡 잊고 나온다. 모자가 없으니 안경을 쓰기는 했어도 눈과 얼굴로 빗물이 들이붓는다. 가을비 가운데 첫가을이나 한가을 아닌 늦가을 내리는 비이기 때문인지 자전거를 달리는 손이 시리다. 고흥은 포근한 겨울이라 겨울눈 구경하기 어려운 만큼, 겨울에도 겨울비 맞으며 자전거를 달려야 할는지 모른다. 빗길에 쓸 만한 장갑을 한 벌 마련해야 할까 싶다.

 

- 면소재지로 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시골길을 오가는 자동차 없으니 느긋하게 달리면서 느긋하게 하늘바라기를 한다. 비 내리는 소리, 빗물이 비옷 때리는 소리, 빗방울이 논과 밭과 길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먼 멧자락마다 비구름 깊이 드리우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본다.

 

- 면소재지 가게에 들르는데, 며칠 뒤에 무슨 날인지 가게 한쪽에 빼빼로가 수북하게 쌓인다. 그렇구나, 무슨 날이 있구나. 작은 빼빼로 한 통을 골라 본다. 면소재지 빵집에 들러 네모빵을 장만한다. 하루 지난 빵이라며 500원을 에누리해 준다. 하루 안 지났어도, 이틀 지났어도, 다 괜찮은데.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빗줄기가 가늘다. 조금 더 천천히 달려 본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는 천등산 멧자락이 훨씬 잘 보인다. 입을 헤 벌리며 자전거를 달린다. 빗길 자전거란 참 그윽하구나. 이 가을에 이 빗길을 달리며 저 멋스러운 모습 누릴 수 있으니 더없이 즐겁구나. 비옷이 너무 작아 사진기는 두고 왔다. 저 아름다운 비구름과 멧자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하니 서운하고, 이 모습을 나 혼자만 누리는구나 싶어 아쉽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가을비 숲바람이 파고든다. 이 느낌을 잘 잡자. 다음에 큼지막한 비옷 장만한 뒤에 빗길 시골마을 빛살을 사진으로 담자.

 

- 신기마을 앞에서 짐차 하나가 자전거 달리는 길로 마주 달린다. 저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면서도 그대로 달리다가, 내가 옆 찻길로 꺾는다. 엉뚱한 찻길로 달리는 짐차가 제길로 들어설 생각을 않는다. 틀림없이 마을회관에서 술 퍼마시고 달리는 사람이 탔으리라. 어떻게 저리도 터무니없이 자동차를 모는가. 어느 찻길로 달려야 하는 줄조차 모르면서 자동차를 술기운으로 달려도 되는가. 시골에서 바쁜 들일 다 끝난 요즈음, 할배들은 하나같이 날이면 날마다 술이다. 바쁜 일철이 아니어도 할배들은 들일 하는 동안 소주 한두 병 가볍게 깐다. 막걸리도 잘 안 마시고 다들 소주를 들이켠다. 작은 병 아닌 큰 병으로 훌떡훌떡 마신다. 술기운으로 경운기와 짐차와 오토바이를 몬다. 시골 할매나 할배 가운데 긴긴 겨울에 책을 벗삼아 마음밥 먹는 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할매들은 여자 마을회관에서 화투를 치고, 할배들은 남자 마을회관에서 소주를 퍼붓는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짚삶이 사라진 뒤, 이제 시골마다 겨울에는 온통 화투판과 술판만 남는다. 시골마을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모조리 도시로 떠났으니, 시골에서 무언가 남다르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거나 자라지도 않는다. 가을비 뿌리는 오늘 같은 날, 들빛과 숲빛과 바다빛과 마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누리는 눈빛이 어디에도 없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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