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에 글을 쓰기로 하다



  지난주에 〈전라도닷컴〉 황풍년 대표님 전화를 받는다. 지난달에 내놓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즐겁게 받으셨다고 말씀한다. 그 책을 읽으면서 다음달부터 〈전라도닷컴〉에 내 글을 함께 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한다. 고마운 말씀이라고 여겨 다음달 호부터 글을 쓰겠다고 얘기한다.


  전화를 마친 뒤 곰곰이 헤아린다. 나는 강준만 님이 꽤 예전에 쓴 글을 읽고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를 알았다. 이 잡지가 갓 나올 무렵이었다고 느낀다. 서울과 인천에서 살며 〈전라도닷컴〉을 보았을 적에 참 놀랍고 대단하며 재미있는데다가 아기자기하다고 느꼈다. 이런 잡지가 전라도뿐 아니라 경상도와 충청도와 경기도와 서울과 인천에서 저마다 다른 빛으로 나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했다. 이름나거나 잘난 사람들 이야기 아닌, 수수하며 투박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예쁜 잡지가 이 나라 곳곳에서 나오면 더없이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전라도닷컴〉에서는 시골마을이 무대이고 시골사람이 주인공이다. 농협에서 펴내는 잡지조차 시골마을이나 시골사람을 한복판에 놓지 못한다. 생태와 환경을 다룬다는 단체나 기관에서 선보이는 잡지마저 시골마을이나 시골사람 눈높이에서 글과 사진과 이야기를 엮지 못한다. 한국에 꼭 하나 있는 시골빛 감도는 잡지는 〈전라도닷컴〉이다. 전라도라는 곳이 재미있고 대단하다고 새삼스레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2011년 가을에 전라남도 고흥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보금자리를 전라도로 옮기면서 〈전라도닷컴〉을 정기구독 했다. 이달로 정기구독 기간이 끝나 정기구독을 이으려 생각하는데, 마침 ‘글 부탁’을 받는다.


  우리 식구는 주민등록이 전라도이다. 마땅한 노릇이지. 우리 식구는 전라도사람이다. 아무렴. 그런데 무언가 한 가지 아쉽다고 늘 느꼈다.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언제나 한 가지 있었다. 그 무엇이 무엇이었을까. 그 무엇을 푸는 실마리를 무엇이었을까.


  〈전라도닷컴〉에 글을 쓸 수 있는 이즈음에 ‘이제부터 참말 전라도사람이네’ 하고 느낀다. 오래오래 즐겁게 쓰자. 시골을 사랑하고 전라도를 아끼는 노래를 부르자. 한국을 어루만지고 지구별을 춤추는 이야기를 엮자. 4347.4.1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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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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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1



시와 술집
― 즐거운 일기
 최승자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4.12.5.



  네 식구가 서울로 마실을 나옵니다. 람타학교 강의를 듣는 자리가 있기에 아침부터 부산하게 길을 나섭니다. 마을 어귀로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놓치고, 이웃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려고 들길을 걷습니다. 마을 어귀로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면 이십 분 남짓 걸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웃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려면 제법 걸어야 합니다.


  유채물결 일렁이는 들길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마을 어귀에서 손쉽게 버스를 타도 즐겁지만, 이웃마을까지 아이들과 천천히 걸어가면서 들빛을 누려도 즐겁습니다. 아니, 어느 모로 보면, 서울 언저리에서 배기가스 그득한 바람을 여러 날 쐬어야 할 테니, 시골 들바람을 조금 더 마시면서 바깥마실을 하면 한결 나을 만합니다.


..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 일년을 생산했고 /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서울은 낮에도 밤에도 자동차가 많습니다. 시골 읍내에서 자동차가 가장 붐비는 때에 오가는 자동차 숫자조차 서울에서 가장 한갓진 때에 오가는 자동차 숫자에 댈 수 없이 훨씬 적습니다. 하루를 묵고 이틀을 머무는 아이들 이모네 집에 있는 동안, 창밖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모두 자동차 오가는 소리입니다. 새벽에도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창밖에서는 자동차 소리만 흐릅니다.


  지은 지 제법 된 아파트 옆을 걸어가면, 심은 지 제법 된 나무가 꽤 있어, 이 나무에는 참새나 직박구리가 앉아서 노래합니다. 새잎 돋는 느티나무에 앉은 직박구리가 노래합니다. 꽃이 다 떨어진 벚나무 둘레에서 참새가 먹이를 찾습니다. 이제는 온통 아파트와 찻길과 건물만 있는 이 도시라 하지만, 쉰 해쯤 앞서를 떠올리거나 백 해쯤 앞서를 헤아린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무렵에는 들길이거나 숲길이지 않았을까요.


.. 꿈 대신에 우리는 확실한 손을 갖고 싶다. / 확실한, 물질적인 손. // 아랍의 정에는 칼! 아메리카의 정의에는 총! / 한국의 정의에는 술! 수울? ..  (꿈 대신에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며 토닥토닥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 이모네 집 창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큰아이가 문득 “삐뽀차 소리다!” 하면서 창턱에 기댑니다. 작은아이는 누나가 외친 소리를 따라 함께 창턱에 기댑니다. 아이들로서는 뭔가 재미난 구경거리입니다. 술집에서 술에 절다가 툭탁거리는 사람들이 경찰한테 붙들려 경찰차에 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꽤 볼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찹니다. 한 시에 두 시에 세 시에 부시시 일어나서 이불깃을 여밉니다. 이불깃을 여미고 다시 자리에 눕는데, 창밖에서는 아직도 깔깔 호호 하하 소리가 울립니다. 오피스텔 건물 8층에 있는 이곳 둘레 다른 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씻는 소리가 들리며 콩콩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깊은 밤이기에 이웃집 소리가 이렇게 또박또박 들리는군요. 어느 집에서는 아직도 텔레비전을 볼 테고 영화를 볼 테지요. 어느 집에서는 사랑을 속삭일 테고, 어느 집에서는 전화기를 붙들고 밤 깊은 줄 모르는 수다를 떨 테지요.


.. 봄에는  속이 환히 비치는 옷을 입고 / 일곱 송이의 꽃을 머리에 꽂고 / 마지막으로 신발을 벗어 버리고서, / 청파동에서 수유리까지 손가락질하며 / 희죽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  (望祭)


  대한민국에는 술집이 아주 많습니다. 도시에도 시골에도 온통 술집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여관이 아주 많습니다. 도시에도 시골에도 온통 여관입니다. 초등학교 가까이에 술집과 여관이 많습니다. 중학교 둘레에 술집과 여관이 가득합니다. 고등학교 언저리에 술집과 여관이 줄을 섭니다.


  아이들한테 술을 가르치거나 먹이는 어른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벗어나기 무섭게 술에 절어 지냅니다. 적잖은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조용히 술을 마시곤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어른들은 놀 줄 몰라 술만 들이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놀이를 물려주지 않고 술집만 물려줍니다.


  학교 둘레에 쉼터가 없습니다. 학교 둘레에 숲이 없습니다. 학교 둘레에 냇물이 흐르지 않고, 학교 둘레에 들이 없습니다. 학교 둘레에 술집이 있고, 공장이 있으며, 널따란 찻길이 있습니다. 학교 둘레에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가 있으며, 관광단지와 골프장이 있습니다. 학교 둘레에 아파트가 있고 병원이 있으며 백화점과 할인마트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볼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아이들은 어떤 터전에 둘러싸이면서 자랄까요. 아이들은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요.


.. 네가 나를 차 버렸으 때 / 너는 즐거웠었니, 내 사랑 내 아가야. / 어느 날 네가 병든 낙엽처럼 / 내 문간에 불려 떨어진다면 / 어느 날 네가 허깨비처럼 / 내 창가에 돌아와 선다면 ..  (너는 즐거웠었니)


  최승자 님 시집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1984)를 읽습니다. 꿈을 가르치지 않고 술을 가르치는 이 나라 얼거리를 곰곰이 헤아리면서 최승자 님 시를 읽습니다. 꿈을 노래하지 않고 입시지옥을 노래하는 이 나라 틀거리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최승자 님 시를 읽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꿈을 배우지 못합니다. 시험문제만 배웁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열두 해에 걸쳐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교과서와 학습지만 배웁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꿈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시험문제만 가르칩니다.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들은 열두 해뿐 아니라 이녁이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오직 교과서와 학습지에 얽매인 채 꿈과 동떨어진 지식조각을 머릿속에 담습니다.


..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  (즐거운 일기)


  즐겁게 쓸 적에 비로소 글입니다. 즐겁게 쓰지 않으면 글이 아닙니다. 즐겁게 할 때에 공부입니다. 대학교에 가려고 하면 공부가 아닙니다. 즐겁게 가꿀 적에 삶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삶이 아니고 살림이 아니며 사랑이 아닙니다.


  검사를 받아야 하니까 쓰는 일기는 즐겁지 않습니다. 날마다 꼬박꼬박 쓰도록 하는 일기는 즐겁지 않습니다. 어른 아닌 교사가 검사하고, 어버이 아닌 학부모가 슬그머니 들여다보는 일기는 즐겁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노래하는 이야기를 쓸 때에 즐거운 일기입니다. 사랑 담아 꿈꾸는 이야기를 적을 때에 즐거운 일기입니다. 빙그레 웃고 깔깔깔 웃음꽃 터뜨리는 빛이 흐를 무렵에 비로소 즐거운 일기입니다.


.. 어이어이 거기 계신 이 누구신가, / 평생토록 내 문 밖에서 / 날 기다리시는 이 누구신가? // 이제 그대가 내 적이 아님을 알겠으니, / 언제든 그대 원할 때 들어오라 ..  (放)


  새벽 다섯 시쯤 되니 비로소 창밖에 조용합니다. 아직까지 불빛 밝은 술집이 있을 테고, 아직도 술에 전 어른들이 있을 테지만, 새벽 다섯 시를 지나 여섯 시가 다가오니 창밖이 조용합니다. 그러나, 새벽 여섯 시가 다가오니 버스와 자동차 소리가 새롭게 울립니다. 술에 전 어른들 술투정과 술싸움은 그치지만, 다른 투정과 싸움이 일어나는군요.


  술집이 가득한 곳을 오가면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잘 모르겠습니다. 술집이 가득한 곳에 보금자리를 얻어 살아가야 한다면 어른들은 무엇을 나눌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씨앗 한 톨 심어 가꿀 수 있는 이라면, 시골숲에서 노래하든 도시 한복판 복닥거리는 술집 사이 시끄러운 아파트 한켠에서 춤추든, 이야기 한 자락 거둘 수 있겠지요. 고즈넉하거나 한갓진 곳에서 숲바람을 마셔야 아름답다 싶은 시를 쓰지 않습니다. 어지럽고 어수선한 도시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시기에 아름답다 싶은 시를 못 쓰지 않습니다. 마음밭에 사랑을 놓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즐겁게 웃으며 시를 씁니다. 4347.4.1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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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123] 너와 나는



  풀벌레와 풀포기와
  너와 나는
  다 같이 지구별 이루는 숲.



  지구별에서 쓸모없는 목숨은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쓸모없는 이는 없습니다. 논밭에서 쓸모없는 풀은 없습니다. 숲에서 쓸모없는 나무는 없습니다.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살아가는 숨결은 모두 지구별을 이루는 넋입니다. 그러면, 전쟁무기와 골프장은 얼마나 쓸모있을까요. 졸업장과 학교와 공공기관과 공장과 청와대와 법원은 얼마나 쓸모있을까요. 고속도로와 공항과 관광단지는 얼마나 쓸모있을까요. 지구별에는 어떤 이웃이 서로 어깨동무할 때에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서로 아끼는 길을 걸어갈 우리들은 저마다 어떤 숲이 될 때에 사랑스러울까 궁금합니다. 4347.4.1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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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시선 174
이상국 지음 / 창비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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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69



나무 곁에서 노래하는 시
― 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상국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8.5.15.



  시골집에서는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하루 내내 듣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후박나무와 초피나무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뒤꼍 모과나무도 씩씩하게 자랍니다. 지난해에 심은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도 조금씩 굵어지고 뿌리를 뻗겠지요.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새들이 내려앉습니다. 초피나무 가느다란 가지에도 작은 새가 낭창낭창 내려앉아 노래합니다. 바야흐로 초피꽃이 피려는 사월이요, 후박꽃이 벌어지려 하는 봄빛이 무르익습니다.


  나무가 있으면 새가 함께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면 새가 둥지를 틀 수 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새노래가 흐릅니다. 나무가 푸른 숨결로 반짝이는 곳에 벌과 나비가 살그마니 찾아들어 날개를 쉽니다.


  나무로 짠 평상에 누워 나무그늘 밑에 누우면 나무내음이 솔솔 퍼집니다. 나무가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고, 나무가 살아갈 앞날을 그립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지냈는지 되새기고, 나무 두 그루가 얼마나 한결같이 봄노래와 여름춤과 가을꿈과 겨울사랑을 베푸는지 헤아립니다.


..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  (산속에서의 하룻밤)


  나무는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는 지나치게 많은 자동차 때문에 끙끙 앓습니다. 도시에 있는 공무원은 나무를 나무결대로 아끼지 않아, 가지를 뭉텅뭉텅 자르기 일쑤입니다. 나무가 느긋하게 뿌리를 뻗을 만한 땅이 모자랍니다. 곳곳이 시멘트 바닥이요 아스팔트 찻길입니다. 그래도 나무는 씩씩하게 하늘바라기를 해요. 도시에서도 나무는 꽃을 말갛게 피우고 잎을 푸르게 내놓습니다.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푸릅니다. 바라보거나 아끼거나 보살피는 손길이 없어도 나무는 싱그럽습니다. 나무도 따사로운 눈길을 좋아하고, 살가운 손길을 반깁니다. 나무도 보드라운 눈빛을 즐기고, 사랑스러운 손빛을 받고 싶습니다.


.. 산수유 숨어 피는 / 돌부리 산길 ..  (내원암 가는 길)


  이상국 님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1998)를 읽으며 나무를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이상국 님은 나무를 그리며 시를 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무를 노래하면서 시를 노래하고, 나무를 포근히 안으면서 싯말 한 자락을 포근히 붙안지 않았나 싶어요.


.. 어린 나는 솔밭에서 / 하늘과 꽃과 놀며 소를 먹이고 / 어머니는 밭고랑에서 내 모르는 소리를 저물도록 했지요 ..  (나의 노래)


  나무가 있기에 땔감을 얻습니다. 나무가 있으니 기둥을 세워 집을 짓습니다. 나무로 배를 무어 고기잡이를 합니다. 나무로 지게를 짜고, 나무로 젓가락과 숟가락을 만들고, 나무로 도마를 만듭니다.


  나무로 책걸상을 만들고 옷장을 짭니다. 나무로 연필 한 자루를 깎고, 나무로 종이를 빚어 책을 묶습니다. 나무에서 맺는 열매가 소담스럽기에 능금과 배와 감과 포도와 석류와 모과와 복숭아를 얻습니다.


  자동차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나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파트가 없는 삶은 꿈꿀 수 있습니다만, 나무가 없는 삶은 꿈꿀 수 없습니다. 컴퓨터나 신문이나 국회의사당이 없는 삶은 누릴 수 있습니다만, 숲이 없는 삶은 누릴 수 없습니다. 고속도로와 발전소와 군대가 없대서 나라가 무너지지 않으나, 숲이 없으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 지난날 어머니와 내가 / 나란히 앉았던 아궁이 앞에 / 오늘은 아들과 함께 / 하염없이 불꽃을 바라본다 ..  (제삿날 저녁)


  초피나무 잎에서 깨어난 애벌레가 초피잎을 갉아먹으며 범나비로 다시 태어납니다. 범나비 날갯짓을 보면서 노래가 술술 흘러나옵니다. 모시나비를 만나고 흰나비를 만나며 부전나비를 만납니다. 나비는 훨훨 날아 들빛을 밝히고, 나비 곁에서 풀을 뜯으며 봄빛 물씬 나는 밥 한 그릇을 즐깁니다.


  나무 곁에서 노래합니다. 나무를 노래하고 삶을 노래합니다. 나무에 깃든 나비를 노래하고, 나비를 콕 잡아서 먹는 제비를 노래합니다. 가랑잎을 노래하고 새잎을 노래합니다. 겨울눈을 노래하고 잎망울을 노래합니다.


.. 박정희 때 지은 슬레이트 지붕이 마분지처럼 낡아 바람에 미어질 것 같은데 삭아 테두리만 겨우 걸린 도라무깡 굴뚝 위에 새 한마리 앉아 집을 보고 있다 ..  (빈 집)


  나무로 지은 집은 오랜 나날 잇습니다. 들보가 무너지면 새 들보를 얹으면 되고, 기둥이 삭으면 새 나무를 베어 새롭게 집을 지으면 됩니다. 오랫동안 집을 버티던 나무는 땔감이 됩니다. 그동안 새로 자란 나무는 집이 됩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아파트는 새로운 집이 되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거름이 되지 못합니다. 아파트를 이루던 쇳덩이와 시멘트와 플라스틱과 유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궁금합니다. 이런 부스러기는 그예 쓰레기가 될 텐데, 앞으로 쓰레기가 될 집을 짓는 문명과 문화는 어디로 나아가려는 셈일까요. 시멘트집에서 살고 시멘트바닥을 밟으며 시멘트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꿈을 키우면서 어떤 사랑을 나눌는지요.


  나무는 해마다 씨앗을 내놓습니다. 새로운 씨앗은 큰나무 둘레에 툭툭 떨어져 이듬해에 싹이 틉니다. 큰나무 언저리에서 작은나무가 자라고, 작은나무는 머잖아 새로운 큰나무 되겠지요.


  사람은 어떤 씨앗을 내놓을까요. 사람은 어떤 삶을 가꿀까요. 사람이 내놓은 씨앗은 앞으로 어떤 꿈이나 사랑이 될까요.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고,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웃음꽃을 피울까요. 4347.4.1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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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는 벚나무를 심는다. 누가 심으라 하지 않으나 조용히 벚나무를 심는다. 할아버지가 심은 벚나무에 벚꽃이 피는 모습을 할아버지가 볼 수 있기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벚나무가 우람하게 자라는 모습까지 지켜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에 앞서 다른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는 어느새 우람하게 자랐으니, 먼먼 옛날부터 하나둘 심어서 돌보고 아낀 나무들로 숲을 이룬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꾸준히 벚나무를 심고 사랑하며 기쁘게 바라본다. 아이는 할아버지 곁에서 나무를 마주한다. 나무를 쓰다듬고 나무내음을 맡으며 나무꽃을 즐긴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아이는 눈물에 젖지만 벚나무로 이루어진 숲에서 새봄을 맞이하며 꽃잔치를 떠올린다. 그래, 꽃잔치이지. 할아버지가 물려준 고운 선물을 가슴에 담아야지. 숲을 지키고, 숲을 사랑하며, 숲을 노래해야지. 4347.4.1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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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벚꽃 산
마쓰나리 마리코 지음,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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