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식탁 5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09 ― “먹기 전에 진부한 아수라장 좀 벌여도 될까?”
 :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5권


- 책이름 : 여자의 식탁 (5)
- 글ㆍ그림 : 시무라 시호코
- 옮긴이 : 김현정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9.6.15.)
- 책값 : 4200원



 (1) 밥하기와


 엊저녁에 불려놓은 누런쌀로 아침에 밥을 합니다. 옆지기는 당근을 썰어 밥에 얹습니다. 다시마도 굵직하게 잘라 함께 얹습니다. 아주 여린 불로 밥을 끓입니다. 몇 분쯤 지나 보글보글 소리가 나고 밥 익는 냄새가 온 집에 퍼집니다.

 요사이 우리처럼 가스불로 냄비에 밥을 해먹는 분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마는,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 밥보다 냄비밥이 훨씬 맛이 있으면서 영양소도 부서지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곰곰이 떠올리면,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 3학년인가 4학년 때에 학교에서 실과 시간에 밥하기를 가르쳤고, 그무렵에는 한 달에 한 번쯤 학교에서 밥잔치나 먹기잔치라고 해서 우리가 손수 밥하고 반찬하고 하면서 서로 돌려먹기를 하곤 했습니다. 김수정 님 만화 《오달자의 봄》에는 주인공 달자와 펑순이네가 학교에서 밥해서 대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즈음도 학교에서 이런 실과 수업이 있는가 궁금한데, 초등학교에서는 초등학생 나이에 맞추고 중학교에서는 중학생 나이에 맞추며 고등학교에서는 고등학생 나이에 맞추어 밥하기와 반찬하기를 가르치면서, 어버이 손을 빌지 않고도 살림을 꾸리도록 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또한, 밥하기를 넘어 청소하기와 빨래하기도 가르치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몸과 마음이 오롯이 튼튼한 사람으로 커야 아름다우며, 어느 누구도 밥을 안 먹고 못 살며 옷을 안 입고 못 사는 한편 잠을 안 자고 못 사니까요.


.. ‘왜 (내가 만든) 이 케이크에 대해 말하지 못했을까? … 그 애 (엄마가 만든) 케이크가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준 케이크를 먹는 평범한 어린애가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짠맛이 섞인 케이크를 먹으면서 ‘엄마, 빨리 와’라고 중얼거렸다’ ..  (16∼18쪽)


 어릴 적 일을 되새기면 학교에서 밥하기를 가르치기 앞서, 누구나 집에서 밥하기를 배웠습니다. 밥하기를 배운 다음에는 어머니 일을 거든다며 밥하기를 손수 해 보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밥물을 안치고 끓이지는 못하고, 조리로 돌 고르기를 여느 때에 꾸준하게 하고 나서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밥을 끓였습니다. 우리 집은 압력밥솥을 썼는데, 압력밥솥 추가 치치치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내내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다렸고, 다 되어 뜸을 들이고 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 때 느낌이란!

 그때 학교에서 선생님이 ‘밥할 줄 모르는 사람?’ 하고 물어 보았다고 떠오르는데, 이렇게 물을 때 손을 든 아이는 두엇쯤?

 요즈음 아이들도 밥하기를 어느 만큼은 할 수 있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전기밥솥은 단추만 누르면 되거든요. 그렇지만 밥물을 맞출 줄 모르는 아이도 많고, 고작 단추 한 번 누르면 되는 밥하기조차 못하는 아이도 많을지 모릅니다. 세탁기도 단추 하나면 끝이지만 단추 한 번 못 누르는 사람이 제법 되거든요.
 





.. “저기, 왜냐고 해도, 일단은 설날 요리의 기본이고, 게다가 오빠도 엄청 좋아하는 거고.” “그래, 남편도 아이도 아버님도 어머님도 다들 좋아해. 근데 난 안 좋아하거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난 평소 때 식사도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가족들이 좋아할 만한 것만 만들고 있어.” “그거야 다들 그런.” “그런 거야?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난 애가 생기는 바람에 일찍 결혼해 그대로 주부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잖아. 대체 나란 인간은 뭔가란 생각이 들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주체성 없는 여자라니.” ..  (24쪽)


 낮에 생협에 가서 인절미를 삽니다. 집에서 홀로 아이를 보고 있을 옆지기가 인절미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저도 배가 고파 몇 점 먹을 생각입니다. 옆지기는 인절미를 반참 삼아 함께 밥을 먹자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한 밥에다가 인절미를 반찬으로 삼아 늦은낮밥을 먹습니다. 옆지기는 인절미를 조금씩 끊어 잘근잘근 씹은 다음 아기한테 먹이고 당근 섞은 누런밥 또한 잘근잘근 씹어서 아기한테 먹입니다. 아기는 날름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저와 옆지기도 인절미 조금에다가 밥을 먹으니 배가 부릅니다.

 생협 인절미는 2600원이었는데, 생협 아닌 여느 떡집에서는 2000원쯤 받습니다. 적어도 600원은 비싸게 사먹는 셈이라 하겠습니다만, 허튼 쌀로 짓지 않은 떡이요, 농사지은 사람이며 다루어 파는 사람이며 고르게 도움이 되니까 600원을 더 썼다고 해서 아쉽지 않을 뿐더러 즐겁습니다. 게다가 세 식구가 2600원으로 한 끼니 배부를 수 있습니다.

 세 식구가 떡과 밥으로 늦은낮밥 먹는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남깁니다. 아기는 열 달째로 접어든다면서 어엿하게 걸상에 앉아 손바닥 장난을 치면서 밥술을 낼름낼름 받아먹는데, 아직은 이런 어린 날을 떠올릴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커서 제 어릴 적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 새삼스럽다고 느낄 테지요. 밥자리 사진을 찍으면서 괜히 웃음이 납니다.


.. “이 집, 후르츠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어. 여기저기 먹으러 다녀 본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최고일 거야. 봐, 저 두 사람(나를 차고 딴 여자 만나는 놈하고 짝꿍)도 먹고 있잖아. 훗, 내가 알려준 가겐데.” “언니, 진정해.”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왔어, 언니. 일단 먹고.” “음, 먹기 전에, 후타바, 나, 진부한 아수라장 좀 벌이고 와도 될까?”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자기를 차고 다른 여자랑 재미있게 노는 녀석한테 아무 말 없이 따귀를 한 대 때리고 다시 아무 말 없이 제자리로 돌아와서 후르츠 샌드위치를 맛나게 먹는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생은 여태까지 후르츠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거나 맛있다고 느껴 보지 않았지만, 바로 이때부터 자기도 맛있게 먹고 싶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  (75∼78쪽)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적에는 밥먹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일이 없습니다. 다른 동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삿날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고, 밥먹을 때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으며, 골목에서 놀 때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때는 입학식과 졸업식과 ‘좋다는’ 데 놀러간 날입니다. 여느 자리 여느 때에는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여느 자리 여느 때 이야기는 그날그날 잊어버린 삶이 아니었을까 싶고, 여느 우리 삶은 굳이 돌아볼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된 분들로서는 아이와 함께 ‘좋다는’ 데로 데리고 가서 비싼 바깥밥을 사먹이면 ‘당신들로서도 뿌듯하고 아이들로서도 좋아하겠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는데, 또 이렇게 생각할 아이도 많을 텐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형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돈 잘 버는 작은아버지가 제 국민학교 3학년 때(1984년) ‘뷔페’에 데려간다며 오늘은 아침부터(또는 낮밥부터) 굶고 있으라 했지만, 형과 저는 배가 너무 고파 라면 세 봉지 끓여 형이 두 봉지 제가 한 봉지 먹고 국물에 밥까지 잔뜩 말아 먹었어요(‘뷔페’가 어떤 곳인지 이날 처음 알았고, ‘뷔페’라는 이름도 이날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니 라면국물에 밥까지 말아 배 띵띵 부르도록 먹었습니다). 그러고 저녁에 작은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는데 ‘라면에다가 밥까지 말아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촌놈들!’ 하면서 웃었습니다. ‘뷔페집에 가면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데 그런 걸 먹어!’ 했고, 뷔페집에 가서도 ‘고기 많이 먹으라!’고 했지만, 우리 눈에는 고기보다는 여느 때에는 구경할 수 없던 바나나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눈이 왕방울처럼 동그래져서 바나나만 한 접시 가득 채워 여러 번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작은아버지는 또다시 혀를 끌끌 찼지만, 그런 혀끌끌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나나와 배와 능금만 다섯 접시쯤 먹었던가?

 생일 때라고 뭐 으리으리한 집을 바란 적이 없었고, 저는 크림 들어간 케익은 몸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한데다가, 잡채 한 접시와 약밥 몇 점이 있으면 좋았습니다. 혀가 짧아 매운 반찬이나 김치는 잘 삭이지 못하면서도, 늘 먹는 밥이면 다 좋았습니다.
 





 (2) 밥먹이기와


 1995년에 부모님 집을 나와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먹고살며 일한 뒤로는 언제나 밥을 했습니다. 딱히 밥을 잘하지 않았으면서도 밥당번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니 형들이 귀찮은 일을 시킨 셈일 텐데, 군대에 갔다 온 다음에는 호텔조리학과를 다니고 군 취사병으로 있었던 선배가 여러모로 가르쳐 주어 하나씩 익히면서 함께 밥당번을 맡았습니다. 신문사지국을 그만두고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던 때에는 한 해 동안 함께 살던 형들을 먹이려고 밥을 했고, 형들이 장가가며 따로 나가면서는 혼자 먹을 밥을 혼자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집에 냉장고를 들였습니다만, 냉장고가 있다고 해 보아야 냉장고에 넣어둘 만한 먹을거리란 딱히 없었습니다. 그 뒤 첫 혼인을 하고 나서도 밥하기는 제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혼인살이를 접고 충주 산골마을에서 일할 때에는 밥을 내처 얻어먹었는데, 오랜만에 남이 해 준 밥을 얻어먹어서 그런지 바늘방석에 앉아서 먹는다는 느낌이었고, 제가 먹고픈 대로 조금 모자라게 먹을 수 없었으니 속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먹여 주는 분으로서는 더 먹여 주고플는지 모르지만, 먹는 저로서는 덜 먹고 덜 쓰면서 몸을 다스리고 싶었습니다. 고향마을로 돌아와 새 혼인을 살아가는 그러께부터는 다시 제 밥을 제가 합니다. 얻어먹기가 끝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를 노릇이었으며, 가깝든 멀든 누군가와 함께 먹을 밥을 마련하는 일은 날마다 새로우면서 즐겁습니다. 똑같은 밥차림이라 하여도 날마다 새로운 밥차림이요 언제나 따뜻하게 새로 하는 밥입니다. 똑같이 밥상을 받아도 날마다 고맙게 새로 먹는 밥이요, 이 고마움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언니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 그것은 2월의 쌀쌀한 아침. 난방도 켜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 아빠 모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어, 아아, 잠깐 어디 갔어?. 아마 곧 돌아오겠지.” “거짓말.”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언니가 중얼거렸습니다. 아빠 손 밑에 있는 종이가 이혼신고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도 이제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역시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역시 우린 글렀습니다. 엄마한테 버림받은 구제불능 우리들.’ “풉, 아하하하하하, 왠지 한심해. 기껏 잡아 온 모시조개가 전부 모래투성이라니. 우린 정말 바보야.” ..  (52∼53, 61∼63쪽)


 그렇다고 제가 밥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못 됩니다. 그저 저 먹을 만큼 할 뿐이요, 제 밥그릇과 옆지기하고 아기 밥그릇까지는 맡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힘이 들어 드러누워 꼼짝을 못하고 있으면 옆지기가 쌀을 불리고 밥을 합니다. 집에서 지짐이도 하고, 가끔 과자도 굽습니다. 생협에서 토막닭을 사서 집에서 몇 번 튀겨서 먹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한다는 일은 내 배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저잣거리 마실을 하며 하나둘 들여다보고 살피는 일이 바탕이 되고, 저잣거리 마실을 하는 동안 쌀이며 다른 먹을거리이며 어떻게 그곳까지 가고 나는 그곳에서 어떻게 장만하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됩니다. 돈 몇 푼 치르면 얼마든지 사다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닙니다. 돈이면 다 되는 밥차림이 아닙니다. 집에서 안 차리고 돈 주고 밖에서 사먹어도 그만인 삶은 아닙니다.

 먹는 즐거움만으로 꾸리는 삶은 아니되, 먹는 즐거움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내 삶은 부질없는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먹는 즐거움을 헤아리고 싶으니 밥하는 즐거움을 헤아리고 싶고, 밥하는 즐거움만큼 밥해 먹이는 즐거움을 헤아리고 싶으며, 내가 다루는 먹을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길러서 내 손까지 오는가를 헤아리고 싶습니다.


.. “난 말이죠, 옛날에 이거에 푹 빠져서 마구 먹어댔던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살이 쪄서 이러다간 남편이 바람 피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우리 그인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죠 … 미안해요. 사실은 괜찮아요. 좀더 먹는다고 해도. 제대로 각오가 돼 있다면.” ..  (127∼129쪽)
 





 책을 한 권 사서 읽을 때에도 늘 그렇거든요. 저하고 옆지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책이나 ‘새책방에서 잘 팔리는’ 책에는 눈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이냐 아니냐를 무엇보다 따집니다. ‘우리가 읽기 힘들어도 우리 아이나 우리 도서관에 찾아올 사람한테 도움이 될’ 책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우리 모자란 살림으로도 기쁘게 사 주어 글쓴이와 출판사한테 도움되도록 할’ 책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이런 책읽음새를 고스란히 밥하기와 밥먹기에 맞춥니다. 빨래하기와 치우기에 맞춥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사귈 때에도 똑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손을 할 때이든, 뒷간에서 똥을 눌 때에든, 아기를 씻길 때에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즐거웁고자 읽는 책이지, 우리 스스로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읽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즐거웁고자 차려서 먹는 밥이지, 우리 스스로 배만 부르면 그만으로 먹는 밥이 아닙니다.


.. “얘, 이게 뭐니?” “받았어.” “누구한테?” “스가이네 엄마.” “스가이? 친구니?” ‘아니야. 오늘 잠깐 얘기만 한 거야. 왕따당하는 애랑 엮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잊자. 잊어버리자.’ “자.” “아.” “먹을 거지? 네가 받아온 어야. 마멀레이드가 아주 맛있네.” (덥석. 오물오물오물) ‘쓰다. 이게 이런 맛이었나? 이게 이렇게 쓴맛이었나? 이렇게.’ (이튿날 학교 가는 길에서) “안녕, 스가이.” ‘우와, 하야시 패가 봤나? 노려보고 있을까? 우와, 우와, 너무 무서워. 하지만 난 그 마멀레이드를 맛있게 먹고 싶은걸. 제대로 맛있게 먹고 싶어.’ ..  (144∼148쪽)


 제 어린 날, 어머니가 늘 우리를 불러 밥상 차리기를 거들도록 하고, 수저를 놓게 하며, 반찬그릇을 놓고 치우게 했으며, 설거지라든지 여러 가지를 돕도록 한 일이 더없이 고맙다고 느낍니다. 귀찮은 심부름이 아니라, 어머니한테 얻어먹는, 또는 받아먹는 밥그릇 하나가 고마운 만큼, 얼마든지 자잘한 심부름을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찌개를 끓이시는데 뭐 하나 빠져 있다 하면 얼른 저잣거리나 가게로 달려가 후다닥 사 왔고, 옆에서 물끄러미 구경하는 일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가 저한테 칼자루를 쥐어 준 적이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어설픕니다만 제 칼질은 어머니 곁에서 빤히 지켜보던 칼질이요, 밥차림이요, 반찬 손질이요, 설거지요, 뒷마무리입니다.


 (3) 만화책 《여자의 식탁》 다섯째 이야기


 만화책 《여자의 식탁》 다섯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앞선 네 가지 이야기 못지않게 다섯째 이야기도 뭉클뭉클합니다. 아니, 앞선 네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끼면서 뭉클뭉클합니다. 어쩌면, 1권보다 2권이, 2권보다 3권이, 3권보다 4권이, 4권보다 5권이 한결 무르익은 그림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1권부터 5권까지 한결같이 애틋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조금 어리숙하면 어리숙한 대로 좋고, 아주 빈틈이 없으면 빈틈이 없는 대로 좋습니다.

 먹을거리 하나에 얽힌, 또는 먹을거리 하나마다 깃든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저 수수하게 풀어놓는 《여자의 식탁》은, 세상에 이름나지 않고 둘레에서 따로 알아주지 않는 수수한 사람들 삶자락마다 웃음과 눈물이 얼마나 넘치도록 많은가를 보여줍니다. 《서양골동 양과자점》 같은 작품은 이런 작품대로 아름답고 재미있고 뜻이 있을 텐데, 꼭 이처럼 뭔가 돋보이거나 남다르거나 톡톡 튀거나 멋스러워 보이지 않는 여느 먹을거리 하나라 하여도 ‘다 다르면서 모두 애틋하면서 언제나 가슴이 찡한 삶’임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 “응? 웬일이냐? 카나에. 이런 곳에.” “아, 아뇨, 그냥.” “조심해라. 얼마 전 이 부근에 치한이 나왔다더라.” “아, 그래요?” “훗, 하긴. 너라면 걱정할 거 없냐?” “아, 아니, 농담이야, 농담.” “핫, 아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웃지 마. 웃지 말아 줘. 제발. 웃지 마.’ “풉.” ..  (174∼176쪽)


 1권부터 4권까지 보는 동안, 그리고 이번에 나온 5권을 보는 내내, 나아가 앞으로 나올 6권부터 꾸준히 새로 그릴 작품까지, 그린이 시무라 시호코 님은 ‘아무것도 아닌 먹을거리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우리 이야기’라는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여느 사람들 흔하고 너절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사랑스럽고 눈물겹고 웃음짓는 재미난 이야기’라는 말을 건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린이가 여자요, 나오는이도 여자이니, 좀더 찬찬히 이 만화를 말하자면 “여자가 차린 밥상”이 아닌 “여자가 하루하루 꾸려 나가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열네 살 처남한테 ‘나중에 여자친구를 사귈 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한번 보라’고 건네 보기도 했는데, 온통 남자 목소리가 판을 치고 영화며 연속극이며 책이며 강의며 학문이며 정치며 오로지 남자 목소리가 넘실거리는 이 땅에서 우리 마음을 고즈넉하게 다스리면서 허물없이 어깨동무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돌아보고 싶다면, 만화책 《여자의 식탁》을 곰곰이 두어 번쯤 읽어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섹스는 상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난 날 위해서 했다. 욕망을 느껴 주길 바랐다.’ ..  (182∼184쪽)


 책을 한 번 덮고, 또 한 번 본 다음 덮고, 다시금 보고 나서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둘레에도 “또다른 ‘여자의 식탁’으로 빚어낼 이야기는 늘 넘치고 있지만, ‘여자의 식탁’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눈길이 없고 찾아보려는 손길이 없으며 귀기울여 들으려는 귓길이 없는 가운데, 머나먼 딴 나라로 넋과 얼을 팔아치우고 있다”고. 앞으로 어느 누가 되든, “내 어머니 밥상”과 “내 동생 밥상”과 “우리 아버지 밥상”과 “우리 할머니 밥상”과 “내 남편 밥상”과 “우리 오빠 밥상” 같은 이야기를 솔솔 풀어낼 수 있기를 꿈꾸고 싶다고. (4342.6.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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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 읽고, 놀고, 대학도 가고, 일석삼조 독서토론기
조원진.김양우 지음 / 삼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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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고 대학 갔다가, 책만 들고 대학 관두고
 [잠깐 읽기 37] 조원진+김양우,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이름 :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글 : 조원진, 김양우
- 펴낸곳 : 삼인 (2009.4.20.)
- 책값 : 11000원


 (1) 책읽기와 대학교 가기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는 고등학생이던 때, 학교나 학원 동무인 여러 아이들이 ‘책을 읽고 느낌을 이야기로 나누자’는 데에 뜻을 맞추면서 열다섯 차례에 걸쳐 ‘독서토론’을 해 온 발자국을 담아낸 책입니다.

 따로 학교에서 교사가 이끌지 않은 ‘책읽기모임’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든 동아리가 아닌 ‘책읽고 나누는 모임’이었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열다섯 차례뿐 아니라 서른 차례이든 쉰 차례이든 얼마든지 ‘책읽고 나누고 함께하는 모임’으로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또는 마땅하게도 ‘책읽기모임’은 ‘논술모임’으로 바뀌었고, 아이들 스스로도 이렇게 가야 한다고 그럭저럭 느끼거나 받아들였습니다. 열다섯 차례에 걸쳐 스스로 모임을 꾸려 나가던 어느 날, 아이들한테 가뭄에 단비처럼 모임을 도와준 ‘어른’이 나타났거든요.


.. 사실 《제3의 물결》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우리 모임이 수준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 책으로 토론을 하면서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려운 책만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항상 내 관점만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독서토론을 하면서는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서로 다른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법도 배웠다 ..  (32, 56쪽)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도움이 어른’은 아이들한테 더없이 좋은 길동무였을는지, 그지없이 반가운 이슬떨이였을는지.

 언제나 받아들이기 나름이므로, 아이들 스스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거이 함께하려 했다면 도움이 어른은 좋은 사람이고 고마운 길잡이입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책읽기모임’을, 티없는 마음으로 책을 사랑하는 줄기를 내 삶을 사랑하는 줄기로 잇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읽기모임’을 하면서 ‘다가오는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 대비도 잘할 수 있어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스스로 도움이 어른을 바랄밖에 없었고, 스스로 얼마든지 ‘책읽기모임’을 꾸려 나갈 수 있었고, 또 열다섯 차례 꾸려 나가기까지 했지만, 스스로 이루어 온 열매와 보람에 어떤 뜻과 값이 담겨 있는가를 더 깊이 곰삭이고 깨닫고 되뇌기보다는, 가볍게 ‘대학교 잘 붙기’ 쪽으로 갑작스레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 토론이 진행될수록 저마다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는 거다. 처음 멋모르고 독서토론을 시작할 때는 무서울 게 없었다. 어떤 개념을 모른다든지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고,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무지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토론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보다는 주제에 대한 발표 위주로 진행되었다 ..  (106쪽)


 딱하다면 딱한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쓰고 함께한 아이들만 딱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나마 이렇게 ‘책읽기모임’이라도 해 보겠다면서 ‘입시에 옴쭉달싹 못하도록 매인 껍질’을 벗어던지려고 하는 몸부림조차 안 하는 아이들이 거의 모두이니까요.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고, 그예 억누르는 틀에 맞춰 지내면서, 몰래몰래 ‘어른들 하는 짓’을 따라 담배도 태우고 술도 마시고 사랑놀이도 즐기면서 푸른날(청소년기)을 썩히고 있으니까요. 담배태우기와 술마시기와 사랑놀이가 나쁜 짓이 아니라, 왜 담배를 태우고 왜 술을 마시며 왜 사랑을 나누려 하는지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채, 그저 ‘어른 따라하기’로 치달을 뿐이니까요.

 학교에서는 시험만 잘 치르면 ‘착한 아이’가 됩니다. 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험을 잘 치르는 아이가 몹쓸 짓을 한다 해서 크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옆 짝꿍을 괴롭힌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또는 청소 땡땡이를 친다든지 겉속이 다른 말을 한다든지, 애엄마나 늙어 힘든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안 돕는다든지, 새치기를 버젓이 한다든지,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든지, 용돈이 넉넉해 군것질을 내키는 대로 한다든지, …… 타이르고 다독일 대목이 많다 하여도 ‘공부를 잘하는데요!’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거나 잠자코 지나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시험성적이 좋은 아이는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이 아이를 때리는 교사는 몽둥이 세기가 달랐습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한테는 온힘을 다해 몽둥이질을 더 많이 했고, 공부 잘하는 아이한테는 살살 몽둥이질을 하는 데다가 몇 대 때리지도 않았습니다. 웬만한 잘못은 슬쩍 못 본 체하기도 했습니다. 담배 태우다 걸리는 동무들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뺨 한 대 맞고 풀려나는데, 공부 못하는 아이는 ‘너흰 임마, 수업 안 들어도 되잖아? 어차피 잘 텐데?’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장 돌 줍기에다가 툭하면 발로 엉덩이 걷어찬다든지 하면서 갖은 모욕을 주면서 괴롭히기만 했습니다.


.. 논술공부를 한다는 것, 또는 그와 비슷하게 입시의 맥락에서 독서나 토론을 한다는 것은 사실 특정한 문화의 산물이었고, 그 문화는 정확히 말하면 중산층 가족의 것이었다 … 이렇게 ‘권력을 지닌’ 언어를 익히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들 내지 하위주체의 언어들이 추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193쪽)


 따지고 보면,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라는 책 하나까지 이루어 낸 아이들은 퍽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제법 잘 나오는 아이들인 가운데, 집안 형편도 썩 괜찮았던(그러나 아주 넉넉하지는 않은) 아이들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그럭저럭 어중간이었다면, 또 집안 형편도 그리 낫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 아빠 엄마 되는 분들께서 ‘그래, 너희가 좋은 생각을 하는구나. 잘해 보렴!’ 하면서 북돋워 주거나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지 않았겠다고 느낍니다. 하물며 학교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뭔가 ‘불량서클’을 ‘책읽기모임’이라는 이름을 입히면서 뻘짓거리 하지 않느냐고 눈을 번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되는 아이’에다가 ‘있는 아이’라는 ‘타고난 재주’가 있으니, ‘책읽기모임’을 내걸면서 입시논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대학교 가기만을 바라고 있고 내몰고 있고 밀어붙이고 있거든요. 제아무리 착하고 얌전하고 바르고 상냥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시험성적은 젬병이라면 ‘저 병신!’ 하고 깎아내리는 교사요 부모요 어른입니다. ‘그래, 좋은 사람이구나!’ 하면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맞잡아 주지 못하는 교사요 부모요 어른입니다.

 교사든 부모든 어른이든 아이들 스스로 ‘책읽기모임’을 하든 ‘야구모임’을 하든 ‘연극모임’을 하든 ‘인터넷게임모임’을 하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거들 일은 거들면서 기쁨과 슬픔을 아이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맞부딪칠 수 있게끔 부드러운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어른들부터 돈에 매이고 이름에 팔리고 힘에 끄달리는 삶이거든요. 어른들부터 옳지 않게 살아가면서 아이들한테도 옳지 않은 삶을 ‘현실은 이러하니 어쩔 수 없더라’ 하는 핑계로 감추어 놓고 있거든요.


..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과 함께 부대끼면서 배워 나가는 것임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시’가 가까워질수록 다른 삶들과 만날 기회는 점점 적어졌다 … 내가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  (210∼211쪽)


 이리하여,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는 조금도 대단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꼴이 이러하기 때문에 외려 대단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뒤죽박죽 엉키고 꼬이고 다투고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잔뜩 담긴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야말로 아이들 오늘날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힐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 삶자락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교육방송 교재’와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입시지옥 속알맹이를 더 깊이 파고들거나 파헤치는 눈썰미를 기르지 못해 겉핥기에 그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겉모습이나마 핥으면서 잘잘못을 깨닫는 눈썰미를 스스로 길러내려고 한 아이들은 얼마나 있습니까. 교사나 부모가 시키는 교과서 외우기와 논술대비를 벗어나, 스스로 ‘참답게 알고 싶다’는 마음외침을 따르면서 손수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골라드는 아이는 이 나라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빈틈없이 나올 수 없던 책이요, 처음부터 허술함 가득한 채 이루어질 수밖에 없던 ‘책읽기모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빈틈많음과 허술함이야말로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읽는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깨지고 까이고 넘어진 발자국이야말로 ‘앞으로 중고등학생인 나이에 스스로 책읽기모임을 꾸려 나가는 좋은 앞사람 보기’가 되어 주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2) 왜 관두지 못할까


.. 토론이 잘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일이 모두에게 처음일뿐더러, 어려운 책을 고르는 바람에 모두가 읽는 것조차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토론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에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60년대식 사고에 멈춰 있는 틀에 박힌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고, 모두에게 똑같은 것들을 암기시키는 식으로 수업을 한다. 우리는 그동안 10년을 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을 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 무조건 풀고 답을 적기만 강요했던 수학이, 암기만 죽어라 했던 역사가 진짜 공부일까? 아무리 흥미 있는 내용이라도 문제 풀기나 암기에 치중해 공부하면 따분하고 지루해진다. 학생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공부를 피해 수능을 준비하는 것이다 ..  (36, 109쪽)


 고등학생 아이들 네다섯이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가며 책을 읽으려고 아득바득 애쓰는 모습을 책으로 읽으면서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 나이였을 때에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봅니다.

 제가 책읽기에 눈을 뜬 때는 중학교 2년이고, 한 반에 《영웅문》을 교과서 뒤에 숨기고 읽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좋은 책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쓸데없는 시험지식 외우기 수업이 골이 난 저로서는 딱히 할 일도 없어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나 하고 있었는데, 그 교과서 밑에 책을 감추어 놓고 읽는 모습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제 뒤통수를 그지없이 후려갈겼습니다. ‘수업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구나!’ 하고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뭐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이 우리 집에 없었고, 학교에서 어디 빌려 주는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기껏 읽는답시고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300원 주고 빌려서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 중학교 3년 때에는 얇은 ‘빨간 책(시사영어사에서 펴낸 영한대역본)’을 한 권에 1000원에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고 고2로 올라선 무렵, 바야흐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제가 입시를 치를 1993년 가을부터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뀐 틀에 맞추어야 했고, 제 또래는 수능뿐 아니라 논술도 맨 처음으로 치르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나중에 논술시험은 몇몇 대학교에서만 치르는 틀로 다시 달라졌습니다). 갈팡질팡 입시제도 때문에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저로서는 한 가지 빛줄기를 보았으니, ‘외워서 잘 쓰는 시험문제 풀이에서 벗어나, 교과서 아닌 책도 읽고 생각하는 테두리를 넓힌다’고 하는 입시방침이라고 밝힌 대목입니다. 그래서, 중학교 2년 때부터 하던 ‘교과서 아닌 책’ 읽기를 마음놓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논술시험을 준비해야 했기에,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딱 두 사람만 ‘대학 독일어 논술시험’을 따로 준비해야 했는데, 학교에서는 ‘두 사람한테만 가르치자고 독일어 수업을 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 학교는 제2외국어로 버젓이 독일어를 가르쳤고, 수업도 한 주에 두 번 있었으나, 1학년 때에만 수업을 하고, 그 뒤 이태 동안은 국영수 보충수업과 다름없이 해 버렸습니다)’고 밝히며 우리 둘보고 학원에 가서 배우라고 내밀었습니다.

 대단히 엉뚱한 학교입니다만, 전교조도 없던(이제 막 꿈틀거리던) 때에 무슨 수업권이 있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인천에서 독일어를 어디에서 가르치느냐 알아보니 딱 한 군데 있었고, 그나마 그 학원에서도 독일어 수업은 고작 일곱 사람만 들었습니다. 학원강사는 당신 스스로도 우리를 가르치기 쉽지 않음을 느꼈을 텐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독일어를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니, 알맞춤한 교재가 딱히 없어, 당신이 예전부터 쓰던 교재를 장만해 오라 했는데, 그 교재는 인천 시내 어느 책방에서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마실을 가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도 갔으나 그곳에서조차 팔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더군요. 빈손으로 학원으로 가니, 학원강사는 우리 두 사람한테 ‘헌책방에는 갔느냐?’고 물었고, 안 가 보았다 하니, 헌책방도 안 가 보고 없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줄곧 입시에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아끼려고 발버둥쳤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공부해서 숨막히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잃는 게 많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소홀히 하면서 입시에만 매진하다 보니, 내 삶에서 내가 없어졌던 것이다 … 이 시대와 절대 발맞추지 않으려는 듯한 꽉 막힌 이야기도 (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어 공부하기가 무척 괴로웠다. 고리타분하고 뻔한 내용이어서 흥미가 일지도 않고 공부할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뛰어난 인재들을 동원하면서도, 내용을 시대에 맞춰 더 개정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교과서를 무조건 암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 교실에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금기시된 듯한 느낌이었다 ..  (47, 92∼93쪽)


 이리하여 토요일 보충수업이 끝난 세 시 반에 부리나케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골목으로 갔고, 이곳에서 세 시간 남짓 뒤진 끝에 꼭 두 권을 찾아냈습니다. ‘있구나, 있어!’ 하면서 기뻐하는 가운데 책값을 치렀고, 책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책방 뒤쪽이 궁금해 슬쩍 돌아보다가, 헌책방에 ‘교과서와 교재 아닌 책’도 많이 갖추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판이 끊어진 독일어 교재 하나 찾아낸 일은 기뻤지만, 이 기쁨을 잠재울 만큼 ‘뭐야? 헌책방은 이런 곳이었나? 난 이런 헌책방에서 고작 판끊어진 교재나부랭이나 찾는답시고 몇 시간을 헛되이 버렸나?’ 하고 생각하며 부끄러웠습니다.

 이날부터 제 책읽기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제 책읽기뿐 아니라 책을 읽는 매무새도 바뀌었고, 책을 읽으며 바라보는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여느 새책방에는 꽂혀 있지 않던 책을 헌책방에서 잔뜩 만났고, 교재와 부교재에는 대충 이름만 걸쳐 놓던 ‘시인과 소설가 작품집’이 얌전하게 꽂혀 있어 들뜬 마음으로 하나둘 장만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좋고 나쁨을 떠나, 통으로 책 하나를 살피면서 앞사람들 넋과 얼을 돌아보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ㄱ대학교 한국사학과를 꿈꾸면서, 고등학교 3년 때에는 일찌감치 그 ㄱ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교재로 삼는 역사책을 모두 읽어냈고, 그 대학교 교수들이 쓴 웬만한 역사책은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다. 어째서 우리 나라의 많은 고등학생들은 스무 살이 가까워져서야 생각하기와 글쓰기를, 그것도 ‘입시를 위해서’라는 옹색한 이유로 해야만 하는 것일까 … 동시에 우리는 글쓰기 영역에서도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닌 논술에 맞춘 글쓰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조차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수긍했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절박함은 어찌 보면 쉽게 생길 법한 고민들을 없애 버렸다 …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로부터 이를 극복할 전망을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나조차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잘했지만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늘 ‘사탕’이 주어진다 ..  (140, 147, 161쪽)


 1993년 입시에서 저는 제가 바라던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바라던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바라던 곳을 다니며, 대학교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다쳤습니다. 내 학생증은 복학생이었다가 졸업까지 했어도 일자리를 못 얻고 도서관을 헤매는 선배한테 선물로 남기고 그 대학교를 관뒀습니다. 이럴 바에는 고등학교부터 관뒀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속이 아팠으나,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교를 때려치운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일찌감치 그만두었으면 내 삶이며 생각이며 더 단단하고 슬기롭게 다스리지 않았겠느냐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더 아름다운 제가 되었겠습니다마는, 얄궂고 어줍잖은 길을 어느 만큼 걷기도 한 탓에, 얄궂고 어줍잖은 길에서도 아픈 이웃이 있으며 아픈 이웃을 돕는 길을 생각할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거꾸로, 얄궂고 어줍잖은 길을 안 걸으면서 더 크고 너른 아름다움을 나눌 길을 찾았을 수 있는데, 스스로 잘잘못하고 맨몸으로 부딪히면서 까이고 차이고 넘어지고 얻어맞고 쫓겨나고 밟히고 하던 하루이틀이 제 몸을 한결 단단하게 갈고닦는 밑거름은 아니었을까 싶으며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덮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만큼 생각밭을 일구는 매무새라 한다면, 이 아이들 스스로 제 기득권을 얼마든지 내버리면서 아이들 꿈과 뜻에 튼튼한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대안학교도 많고 뜻있는 괜찮은 대안학교 교사도 많은 요즈음은 얼마든지 “책의 바다에 빠지는 노란잠수함”이 더 즐겁고 신나게 바다밑을 넘나들고 누빌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찌감치 ‘입시를 관두지 않았’고, ‘시험성적이라는 기득권을 더 꼭 움켜쥐었’기 때문에 이렇게 책 하나로 갈무리하는 아이들 푸른날을 남길 수 있었으며, 이 푸른날을 발판으로 삼아 아이들 스스로 ‘곧바른 지식인으로 걸어갈 길’을 차근차근 다지지 않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노란잠수함’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까이지 않았거든요. 남김없이 밟히고 짓이겨지고 차이고 밀리고 쫓겨나고 들볶이지 않았거든요. 이제부터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부딪히면서 까이고 아파하고 밟히고 슬퍼하고 차이고 괴로워하며 쫓겨나고 고달픈 가운데, 세상 살아가는 보람을 저마다 다르게 붙안지 않겠느냐 믿어 봅니다.

 저한테는 ‘책읽고 대학 갔다가, 책만 들고 대학 관둔’ 삶이지만, 이 아이들한테는 ‘대학 가려고 책읽고, 책도 들고 대학도 다니는’ 삶으로 일구면서, 이 나라에서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이런 삶으로도 서로서로 반갑고 기쁠 수 있다고 믿어 봅니다. (4342.6.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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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
아베 하지메 지음, 위정현 옮김 / 계수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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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테 있는 ‘돈 석 닢’
 [그림책이 좋다 65] 아베 하지메, 《호두》



- 책이름 : 호두
- 글ㆍ그림 : 아베 하지메
- 옮긴이 : 위정현
- 펴낸곳 : 계수나무 (2006.4.25.)
- 책값 : 8500원


 (1) 돈과 콩과 나무


 한창 마음을 다잡고 글 한 줄 끄적이는데 전화통이 울립니다. 무슨 전화인가 싶어 받으니 비과세저축 하나 들라고 하는 소리가 흐릅니다. 내 살림에 무슨 비과세저축 투자를 하느냐 싶지만, 전화 거는 일을 하는 사람도 고단할 테지 하고 생각하며 조금만 듣다가 끊으려 합니다. 그런데 전화기 건너편은 좀처럼 전화를 끊어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물건을 팔겠다는 뜻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쉴 사이 없이 입을 놀리느라 지친 느낌만 물씬 받습니다.

 저 또한 하루하루 삶을 꾸리고 아기하고 복닥이면서 그리 튼튼하지 않은 몸이요, 아주 잠깐 동안 아기보기를 쉬면서 글쓰기에 품을 들이는 이맘때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나마 애를 보고 있다면 ‘저기, 지금 애보고 있어 힘드니 그만 끊을게요’라 말할 테지만, 늘 애를 보기는 해도 지금은 안 보고 있으니 거짓말로 둘러대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제 마음을 다스리고 싶을 뿐입니다. 줄줄줄 흐르는 말을 끊으며 ‘저는 그런 투자를 안 해도 됩니다.’ 하고 말을 건네지만, ‘네, 그렇지만 ……’ 하면서 다시 말을 잇습니다. 외려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하려는 낌새입니다.

 더운 날 몸이며 마음이며 그예 지칠 뿐임을 새삼 느끼는 가운데 더 버티지 못하고, ‘저는 전화 받을 겨를도 없고, 그런 데에 쓸 돈도 없습니다. 이제 그만 끊겠습니다.’ 하는 데에도 굳이 몇 마디를 더 보태며 전화기를 붙들어 매도록 합니다.

 이런 데에서는 마음이 모질어야 할까요. 아니, 이런 데에서조차 모질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서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는 느긋함을 갖추어야 할까요. 맞은편도 힘든 줄 생각한다면, 이만한 투자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게끔 돈 펑펑 벌어들여야 할까요.

 전화를 끊고 나니 기운이 쪽 빠집니다.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책상맡에 앉지만, 아까처럼 일손을 잡기 힘듭니다. 전화 걸어 물건팔기 하는 분한테는 당신 먹고사는 일일 테지만, 당신 먹고사는 일 때문에 그런 데에 아무 눈길을 안 두거나 미처 눈길을 못 둘 수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나한테 돈이 어느 만큼 넉넉하게 있다 한다면, ‘이 돈을 더 크게 불리는 데에 써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틀림없이 예전처럼 출판사에 몸을 두고 달삯을 꼬박꼬박 받고 있다면, 달삯 가운데 2/3나 3/4를 어김없이 은행에 착착 맡겼을 텐데, 요즈음 들어서는 저한테 다달이 꾸준히 들어오는 돈이 있다 하여도 은행에 착착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꺼번에 다 쓰지는 않을 테지만, 푼푼이 모였을 때마다 ‘이 돈을 알맞게 쓸 곳’을 찾아서 아낌없이 써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 유다가 아직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었어요. 엄마와 아빠는 강가에서 호두 씨 한 개를 주워 와, 집 마당에 던져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싹이 나온 거예요. ‘이렇게 단단한 껍데기를 뚫고 나오다니! 굉장히 힘이 센 나무인가 보다!’ 엄마와 아빠는 그 초록색 싹을 보고는, 아기도 이 나무처럼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더욱 더 소중하게 보살폈습니다 ..  (3쪽)


 적금이든 보험이든 ‘나 하나만 생각하는’ 일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틀림없이 먼 뒷날 내 몸을 헤아리면서 쓰든 다른 이 몸을 헤아리면서 쓰든, 큰돈이 들어갈 데가 있을 테니, 그때 흐뭇하게 쓰게끔 모아 두는 일은 값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굶주릴 걱정이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만큼이나 ‘코앞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깜냥만큼 ‘내 코앞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내 살림을 가르고 쪼개고 나누어 어깨동무를 한 다음, 이렇게 하고도 어느 만큼 남는다면 티끌만큼밖에 안 되더라도 조금씩 모아 놓아야지, 처음부터 ‘앞으로 굶주릴 걱정이 있는 사람을 도와야지!’ 생각하면서 적금을 붓는다든지 보험을 든다든지 투자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느낍니다. 나중에 목돈으로 이루어 낸 다음 환경운동 하는 모임에 척 갖다 바쳐도 좋은 일이 될 테지만, 다문 오천 원이나 만 원이라 하여도 다달이 모임 뒷배를 하는 일이 한결 뜻있고 즐거웁지 않겠느냐고 느낍니다.


.. “아빠, 뭘 하세요?” “으응, 여기에 할머니 방을 만들려고 해.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2층 방이 불편하시거든.” “네에? 여기다요?” 아빠는 자를 대고 땅 위에 표시를 했습니다 ..  (11쪽)


 일산에서 인천으로 전철을 타고 멀디먼 길을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굳힙니다. 그리 넓지 않아 그리 시원하지는 않으나 조그맣게 그늘을 드리우는 골목길 나무를 살며시 쓰다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와 같은 생각을 다집니다. 어제 하루 서울마실을 하면서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뿌리내릴 만한 땅뙈기 없이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발라 건물을 세우고 차를 대고 하는 길에서 여러 시간 걷고 다니고 하는 가운데 이 생각을 곰곰이 해 보았습니다.

 우람한 나무 몇 그루만 있는 공원보다는, 아이들 키만큼밖에 안 되는 어린나무라 할지라도 크고작은 나무가 골고루 어울리면서 숲을 이룬 공원이 한결 낫다고 생각합니다. 50층, 60층짜리 건물이 비죽비죽 솟는 도시보다는, 고만고만한 건물이 골고루 섞이면서 어느 건물에서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한편,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넉넉히 틈을 두면서 차도 다니고 자전거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고 바퀴걸상과 아기수레도 밀 수 있는 데다가 길짐승과 날짐승도 구석구석 보금자리를 틀 수 있으면 더없이 즐겁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온 산 가득 계단논과 계단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보다는, 제 식구 먹을 만큼만 계단논밭 일구고 숲이 있는 산을 살려 놓을 때가 한결 아름답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 “학교 다녀왔습니다.” 유다는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만 하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책상 위에는 호두가 놓여 있었어요. 그때 할머니가 들어왔습니다. “할머니랑 얘기 좀 할까? 나는 내일 시골로 돌아갈 거야. 아무래도 할아버지와 살던 시골에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러니 아무 걱정은 하지 말거라.” 할머니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  (17쪽)
 





 배터지게 먹는 밥차림보다는, 배터지게 먹고도 남아 버리거나 냉장고에 넣도록 하는 밥차림보다는, 좀 모자라게 마무르더라도 밥그릇과 반찬그릇 싹싹 비울 수 있는 밥차림이 한결 반갑고 고맙다고 느낍니다. 더 많은 일삯을 주는 일자리보다는 더 많은 말미를 주면서 내 삶을 돌아보도록 하면서 내 살림을 알뜰살뜰 꾸릴 수 있게끔 일삯을 나누어 주는 일자리가 훨씬 반갑고 고맙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만 ‘콩 세 알 심기’를 할 수 있지 않을 테니까요. ‘콩 세 알 심기’란 농사꾼만 보여주는 매무새는 아닐 테니까요. 하늘과 땅과 사람이 먹는(알고 보면 새와 쥐와 사람이 먹는 셈이지만) ‘콩 세 알’처럼, 내 손에 들어온 ‘콩 세 알(내 몫으로 1/3 쓰고 남아도는 2/3라는 돈. 그러니까 도시사람한테는 ‘돈 석 닢’.)’이라 한다면, 얼마든지 두 알을 내 이웃한테든 동무한테든 후배한테든 선배한테든 낯모르는 먼나라 사람한테든 시민모임한테든 가난한 둘레사람한테든 베풀 수 있습니다. 아니, 베푼다기보다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줄 수 있습니다. 아니,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히 건넬 수 있습니다.


.. 그날 아빠는 나무를 베었습니다. 유다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잘린 나무를 보고 “미안하다, 미안해……” 하며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  (25쪽)
 





 (2) 그림책 《호두》를 보면서


 그림책 《호두》를 보면서 마음을 푸근하게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더없이 보드라이 매만질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린이 스스로 어릴 적 겪은 일을 담아냈다고 하는 만큼, 좀더 살속 깊숙하게 파고듭니다.

 다만, 그림 가운데 몇 군데는 잘못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아이 앞에 서 있는 아빠 손이나 몸이 어딘가 어설프도록 그렸고, 아이가 뿔이 나서 골목을 달려나가는 뒷모습에서는 팔과 다리가 함께 움직입니다. 그림결은 아주 품을 많이 들였음이 눈에 선하지만, 이렇게 품을 많이 들인 그림임에도 자잘한 잘못을 덮어주지는 못합니다. 일본에서 이 책이 처음 나올 때, ‘일본은 그림책을 참 잘 만드는 나라인데 왜 이런 잘못을 못 잡아챘을까? 왜 못 고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말로 옮겨낼 때 일본 원작자한테 고쳐서 새로 주십시오 하고 바라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렇다 하여도 아쉬움은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그린이가 어릴 적 겪은 일이라 하여도, 이 그림책은 ‘옛날이야기를 보여주는 흐름’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어느 집에서나 겪을 만한 흐름’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빠는 마루에 있는 푹신한 걸상에 앉아 있고, 엄마는 부엌에서 차를 끓이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그립니다. 이런 대목 또한 좀더 꼼꼼히 살피면서 다룰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적어도, ‘엄마가 차를 끓인다’ 하여도, ‘엄마와 아빠가 나란히 푹신한 걸상에 앉아 차를 즐기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고, ‘아빠 엄마 둘이 부엌에서 함께 차를 끓이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 “유다야,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난 이 씨를 넓은 강가에다 심을 거예요. 이렇게 좁은 마당에서는 나무가 잘 자랄 수 없어요.” 유다는 호주머니에서 호두 씨앗을 하나 꺼냈습니다. “그럼 할머니도 도와주마.” “강가는 여기서 멀어요.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시잖아요.” “괜찮아. 천천히 가면 되지.” 두 사람은 강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  (27쪽)


 강가에서 자라던 호두가 열매를 맺어 땅으로 몇 알 톡톡 떨어뜨렸습니다. 이 호두알을 주워 집 앞 마당에 던져 보았는데 용하게 싹을 틔워 우람하게 자란 나무 한 그루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호두나무는 베어내야 했고, 베어내면서도 이 호두나무에서 떨어뜨린 열매 하나를 ‘처음 열매를 얻던 그 강가 호두나무 옆’으로 가지고 가서 새로 심습니다.

 호두씨 새로 심는 강가 뒤편으로는 높직한 공장 굴뚝에서 매연을 내뿜습니다. 강가 또는 바닷가라면 물이 많아 으레 공장 한둘은 있는 요즈음일 테니까요. 일본도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이 없이 살아갈 수없고, 자연한테 고마운 선물을 듬뿍 받아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데, 자연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있고 어찌어찌 앓고 있는지를 느끼지 않습니다.

 돈벌기에 바빠 느낄 겨를이 없고, 돈을 많이 벌어 제법 느긋하다 하여도 새로운 돈굴리기에 바빠 느끼려는 가슴을 잃었습니다.

 그림책 《호두》는 바로 이런 대목을 넌지시 짚어 주지 않느냐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내버리거나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한테 반갑고 고맙고 흐뭇한 값이요 뜻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고 느낍니다. 호두씨 한 알이 베푸는 선물을 느끼듯,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 이웃이건 동무이건 식구이건 누구한테건, 또 푸나무한테건 날짐승과 들짐승과 물짐승한테건, 또 바다와 들판과 산한테건, 어떤 사랑씨라도 함께할 수 있음을 들려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우리들 누구나 ‘콩 세 알’, ‘씨앗 세 알’, ‘돈 석 닢’을 가지고 있습니다. (4342.6.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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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아파트 시 읽는 어린이 27
김영미 지음, 심보영 그림 / 청개구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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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땀’ 없이 ‘생각’만으로 쓴 문학은 빈 껍데기
 [잠깐 읽기 36] 김영미, 《재개발 아파트》



- 책이름 : 재개발 아파트
- 글 : 김영미
- 그림 : 심보영
- 펴낸곳 : 청개구리 (2009.5.5.)
- 책값 : 8000원



 (1) 동시는 어떻게 쓰는가?


 2006년에 ‘황금펜아동문학상(동시)’을 받고, 2008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에 뽑혔으며, 광주에서 어린이집을 꾸리는 김영미 님이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를 펴냈습니다. 그무렵 신춘문예 심사를 맡은 분들은 “새로운 시적 발견인가 하는 점에서는 다소 주저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고 진지한 점이 돋보인다(한국일보 2008.1.2.)”고 적습니다. 출판사 인터넷방에 적힌 소개글을 살피면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식 위에 따뜻한 희망이 얹어 있”다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는 이제까지 나온 동시모음과 견주면 이름부터 남다릅니다. 다른 동시 작품은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식’이 있다고는 거의 느낄 수 없는 터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나라에도 무언가 빛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 선보였는가 싶어 좀더 눈길이 갑니다.

 고구마를 이야기하면서도 ‘먹기만 하는’ 고구마가 아니라, 아이가 ‘손수 호미를 쥐고 캐는’ 고구마를 이야기합니다. 재개발 아파트를 바라보면서도 여느 어른들과 달리 돈이나 싸움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눈썰미를 느낍니다.


.. 나도 반가워 / 밭이랑으로 / 달려가 / 고구마 캤지요 // 아빠 고구마를 캐니 / 엄마 고구마 / 아기 고구마 / 줄줄이 따라나와요 // 고구마 식구들은 / 땅속에서도 / 날마다 꼬옥 / 손잡고 있었나 봐요 ..  (고구마)


 그렇지만 《재개발 아파트》에 실린 여러 작품을 읽고 돌아보는 동안 마음이 답답합니다. 속시원하게 뚫는 작품은 찾아보기 수월하지 않고, 책방과 도서관 책시렁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말장난 동시’는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어느 구석인가 갑갑합니다.

 글쓴이는 머리말에서 신춘문예에 뽑힌 뒤 기자하고 만나던 이야기를 적어 놓습니다. 기자는 글쓴이한테 “아무리 봐도 재개발 아파트와는 상관없는 분 같은데요?” 하고 물었다는데, 글쓴이는 “그 말은 가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농담처럼 물었지만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나에게도 가난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풍족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 아니면 책 속에서나 가능했던 시절, 수줍고 내성적이던 나는 가난이 부끄러워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가난해서 부끄러웠고, 이제는 가난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고 생각합니다. 기자한테는 대충 얼버무리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머리말에서 글쓴이 스스로 밝힙니다만, 글쓴이는 ‘이제는 가난하지 않으나 어린 날에는 가난했던’ 분입니다. 아마, 오늘날 수많은 어른들이 글쓴이와 비슷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먹을거리 입을거리 모자라고 작은 방 한 칸에 큰식구가 끼어 살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어른은 드물리라 봅니다.

 이런 지난날은 조금도 부끄러울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을 편 오늘날 또한 하나도 부끄러울 구석이 없습니다. 가난한 지난날은 가난한 대로 좋고, 넉넉한 오늘날은 넉넉한 대로 좋습니다. 가난하니 얻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넉넉하니 베풀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얻는다고 창피할 까닭 없고 준다고 으스댈 까닭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현수네가 도시로 이사 가고 / 끝까지 남아서 / 집을 지켜 주던 할머니마저 / 돌아가신 후 / 집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어 // 있는 힘을 다해 / 기둥을 받치고 / 주춧돌에 힘을 줬지만 / 아주 조금식 / 집은 알몸으로 허물어져 갔지 ..  (현수네 빈집)


 가난해 보이지 않더라도, 아니 가난하게 살지 않더라도 가난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이 가난한 벗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는 못 보거나 못 느끼는 대목까지 살포시 잡아채면서 무척 싱그럽고 훌륭히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하여 가난한 삶을 모두 잘 그려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굴레에 갇히거나 발목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있으면 가난이건 무엇이건 어느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합니다.

 누구한테나 마찬가지입니다만, 가슴이 있느냐 없느냐로 시를 쓰지 머리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집이 크냐 작으냐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골목동네에 산다 하여 골목동네 삶자락을 사진으로 더 잘 담는다든지 소설로 잘 풀어낸다든지 하지 않아요. 골목동네에 안 살고 있어도, 골목동네 사람들과 이웃이 되고 벗이 되고 언니오빠동생이 되는 매무새라면 얼마든지 사진 잘 찍고 소설 잘 쓰고 동시 잘 엮을 수 있습니다.


.. 지하도 입구에서 / 고개를 푹 처박고 / 손만 내민 아이 / 마치 손이 얼굴 같습니다 ..  (지하도의 아이)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는, 글쓴이 스스로 겪었으며 지켜보는 ‘가난한 자리’가 조촐하게 담깁니다. 그렇지만 수수하지는 않습니다. 싱그럽지도 않습니다. 꾸밈없이 담기는구나 싶지만, 꾸밈이 없다고 해서 살갑거나 따뜻한 작품이 되지는 않아요. 내미는 손길이라고 하여 늘 따뜻하지 않습니다. 맞잡는 손길이 되어도 언제나 따스하지 않습니다. 껴안는 몸짓이라 하여도 한결같이 따사롭지 않아요.

 시 하나가, 소설 하나가, 사진 하나가, 그림 하나가, 몸그림 하나가 따뜻하거나 따스하거나 따사로우려면 다른 데에서 만나고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꽃피우려면, 기쁨을 나누려면, 웃음꽃과 눈물꽃을 일구려면, 다른 곳에서 어우러지고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 어른들은 모두 엉터리야! / 지구촌 한마을이니 / 사이좋게 살아야 한달 때는 언제고 // 우리 반의 코시안 영진이와 / 놀면 싫어하고 ..  (모두 한마음으로)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에 추천글을 쓴 문삼석이라고 하는 시인은 “아무튼 김영미 선생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있어(1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문삼석 시인이 한 말이 맞습니다. 김영미 님 동시는 ‘생각하는 동시’입니다. 아이들한테 시를 읽으며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다만, ‘생각만 하는’ 동시요, ‘생각에 머문’ 동시인데다가, 아이들 스스로 ‘생각에 갇히’게 하는 동시로 그칠 뿐입니다.

 내 삶, 그러니까 글쓴이 삶이 없습니다. 내 벗, 그러니까 글쓴이와 벗삼을 아이들 삶이 없습니다.


 (2) 어린이책은 어떻게 만드는가?


 이 책에는 그림이 무척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분은 여러 작품을 내놓았고, 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데, 이분 그림을 죽 돌아보면 ‘잘못 그린’ 그림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너무 많아 모두 들 수는 없고, 대표로 몇 가지만 들어 봅니다. 먼저 73쪽에 게 두 마리가 나오는데, 게는 ‘옆으로 걷’지 앞으로 걷지 않습니다. 게는 다리가 ‘열’이지 여덟이 아닙니다. 그 옆 72쪽 그림과 91쪽 그림에는 맛조개가 나옵니다만, 맛조개가 갯벌에서 뽀롱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이 그림과 같을까요? 이제는 거의 모든 갯벌이 땅메우기로 사라집니다만, 태안 앞바다만 해도 그럭저럭 남아 있으니(그나마 태안 앞바다는 기름으로 잔뜩 뒤덮이며 더러워지고 말았지만), 몸소 맛조개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더구나, 갯벌은 모래하고 빛깔이 아주 다르지요. 모래밭이나 ‘누런 빛’ 또는 ‘금빛’은 될지언정, 갯벌은 ‘짙은 잿빛’입니다. 때로는 ‘맑으면서 시커먼’ 빛이라 할 수 있고요. 79쪽을 보면 높자란 대나무가 나옵니다. 대나무 줄기는 잿빛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대나무가 잿빛일 수 있을까 궁금한데, 대나무가 ‘죽으면’ 잿빛이 됩니다. 대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대나무를 쓰다듬어 본 분은 누구나 알 테지만, 대나무가 높자라면서 잎을 틔우려면 ‘푸르디푸러야’ 하고, 대나무잎은 마디마다 자랍니다. 땅바닥에 잎을 박고 있지 않아요.


.. 학교 가는 길 / 흘깃 / 건너편 근로자 대기소를 본다 // 뽑히지 못한 아저씨들이 / 옹기종기 모여 앉아 / 하얀 한숨을 날린다 // 발 앞에는 / 식구들의 숟가락 수만큼 / 꽁초가 수북이 쌓이고 // 담배 연기는 / 몽글몽글 하늘로 날아가는 / 아이들의 희망 // 쪼그려 앉은 아빠의 등 / 오늘은 / 유난히 더 좁아 보인다 ..  (근로자 대기소)


 그림 이야기를 따지자면 동시모음 두께보다 더 두꺼운 책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둡니다. 다만 하나, 겉그림에 나온 자전거는 안 짚을 수 없습니다. ‘체인 없는’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 없겠지요. 이 그림 하나에 모두 다 담아낼 수 없다지만,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도 못 탈 테고요. 아이 얼굴에 주근깨도 그리고 머리카락도 한 올 두 올 그렸으며, 운동화 밑창에 금까지 그어 놓는 꼼꼼함을 생각한다면, 자전거 체인과 브레이크가 없는 자전거가, 또 뒷바퀴 축이 없는 자전거가 어떻게 구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림만이 아닙니다. ‘노동자 대기소’가 아닌 〈근로자 대기소〉라는 작품을 보면,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흘깃 건너편 근로자 대기소를 본다’가 나옵니다. 이 동시모음은 초등학생이 볼 테니, 초등학교 아이가 학교 가는 길이겠지요. 초등학교 아이는 몇 시에 학교에 갈까요? 일찍 간다 하여도 여덟 시는 넘을 테지요. 아주아주 드물게 일곱 시 반에 나서는 아이도 있을 터이나, 여덟 시가 안 되어 학교에 닿으면 학교문은 잠겨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여덟 시 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학교에 간다고 보아야 올바릅니다.

 그러면, ‘노동자 대기소’에 ‘막일 하는 아저씨들은 몇 시에 나와서 모여’ 있을는지요?


.. 섬이 / 외로워도 / 아무 불평 없이 / 저렇게 떠 있는 건 // 날마다 / 파도가 놀러 와 / 발가락 간질이며 / 놀아 주기 때문이야 ..  (섬)


 막일을 안 해 본다고 막일 이야기를 못 그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삽질을 안 해 보았다고 삽자루 쥐며 땅 파는 모습을 못 그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시이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겪어 보지 않았다고 늘 잘못 그린다고 할 수 없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는다면 잘못 그리고 맙니다. 찬찬히 돌아보지 않는다면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막일을 하는 사람들, ‘노동자 대기소’에 있는 사람들은 ‘늦어도 새벽 여섯 시까지’는 모여 있어야 하고, ‘여섯 시 반’이면 으레 일감 나누기가 끝납니다. 아니, 여섯 시 반이면 저마다 일할 자리에 차 타고 가 닿아서 연장통을 챙긴다고 해야 옳지요.

 일곱 시만 되어도 대기소는 텅 빕니다. 요즈음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 아이들 가운데에는 일곱 시가 되어도 잠들어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새벽밥 지어 먹고 나가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라고 하여도 ‘노동자 대기소 일꾼’을 보기 어렵습니다.


.. 이쪽 산이 저쪽 산에게 말했습니다 / -우리 꽃놀이 할까? / -뭐라고? / 아! 봄이 왔다고! // 둘이는 / 늘 딴말만 했습니다 // 터널이 뚫렸습니다 / 이제는 / 서로의 말이 / 잘 들렸습니다 // -민들레 홀씨, 세 개만 꿔 줄래? / -내년 봄에 꼭 갚아야 돼! // 둘은 / 이제 / 조금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  (터널)


 이렇게 잘못 쓴 작품이 어쩌다 한 번 나온다면 그러려니 넘어갑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섬이 외롭다’고 나오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람이 손질한다는 생각은 재미있기는 하나, 재미로 그칠 뿐입니다.

 글쓴이 집이 공장하고 이웃하고 있다고 해 보십시오. 아니, 공장과 울타리를 마주한 집에서 하루쯤이라도 지내 보십시오. 저는 어릴 적 태어나서 이제까지 살아가는 집이며 동네이며, 언제나 공장이 늘 가까이 붙어 있고, 공장으로 큰짐을 실어 나르는 큰차가 언제나 싱싱 달리는 길가에서 살았으며,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폐수를 끝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는 으레 온몸에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폐수 냄새가 짙게 배어들었습니다.

 〈터널〉과 〈우리 동네〉 같은 작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느낍니다. 제 몸뚱이 한복판이 뻥 뚫린 산들이 뭐가 좋다고 즐겁게 웃으면서 ‘자동차 씽씽 달리는 구멍으로 의사소통을 할까’요? 북극이 밤낮이 따로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 / 연기가 머리카락처럼 나부낀다 // -깎아 드릴까요? / 볶아 드릴까요? / 미용사 바람이 다가와 / 친절하게 묻는다 // 굴뚝은 무뚝뚝 / 대답이 없다 // 화가 난 바람 / 굴뚝의 머리를 / 스트레이트로 쫙쫙 펴 버린다 ..  (바람은 미용사)


 동시를 읽고 사이그림을 보면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어떤 눈으로 작품을 가려냈는지 모르겠어서 한숨이 나오고, 이와 같은 작품을 신춘문예에 내놓을 수 있는가 싶어 한숨이 나오며, 이만한 작품을 애써 책으로 빚어내는 출판사 분들은 어떤 눈매인가 싶어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빈틈이 없고 어느 하나 어설픈 대목이 없어야만 ‘대상을 주’고 ‘책으로 내’고 ‘문학을 해야 한다’란 법이 없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좋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좋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잘 맞는다고 해서 좋은 작품일까요. 시를 쓰는 글감만 잘 뽑는다고 해서 훌륭한 작품일까요. 글쓴이가 드넓은 생각힘을 뽐내며 우리 삶터 이야기를 골고루 건드린다고 해서 문학이란 이름을 붙여도 될까요.


.. 우리 동네는 / 잠들지 못한다 // 24시간 pc방 / 24시간 찜질방 / 24시간 편의점까지…… // 온통 하얗게 /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 이러다 / 달님이 길 잃고 / 못 찾아오면 / 어쩌지? // 아예 / 북극처럼 / 밤낮 없어지면 / 어쩌지? ..  (우리 동네)


 이 작품을 읽을 아이들을 걱정해 봅니다. 누구보다 이 작품을 쓴 분이 바라볼 삶터를 근심합니다. 문학에는 글쓴이 생각이 깊고 너르게 담기기 마련이지만, 생각만 담는다고 하여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싣는다고 스스로 문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 몇 가지 탔다고 자랑스러운 문학인이라고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해적이에 끄적일 만한 이름조차 되지 않습니다.

 글쟁이는 제 작품으로 말하는데, 제 작품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면 제 삶을 말합니다. 글쟁이는 제 작품으로 제 삶을 말합니다. 제 생각을 말하는 제 작품이 아니라, 제 삶을 말하는 제 작품이 되어야 하는 글쟁이입니다.

 김영미 님은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에서 남다른 생각을 산뜻하고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주머니는 어디에서 나왔는가요? 그 생각주머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머리에서 태어내 머리에서 죽는 생각인가요? 글쓴이 생각은 어디에 발을 대고 있는지요? 글쓴이 발은 어느 자리에 있는지요?

 글쓴이가 오늘날은 부자로 살아가고 있으면 ‘부자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쓰면 됩니다. 부자로 살아가고 있어도 가난한 동무하고 오순도순 벗삼으며 살아간다면 ‘가난한 동무하고 벗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쓰면 됩니다.

 가장 ‘가난한’ 문학이란, 생각주머니로만 펼치는 문학입니다. 가장 ‘넉넉한(부자인)’ 문학이란, 온몸을 움직여 땀흘린 이야기를 팔다리로 드러내는 문학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글쓴이 ‘땀방울’을 흘리는 모습과 글쓴이 ‘땀방울이 떨어진 자리’ 삶자락이 고스란히 묻어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4342.5.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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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산하세계어린이 29
세실 모지코나치.클로드 퐁티 글, 조엘 졸리베 그림, 백선희 옮김 / 산하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07 ― 마오리족이 어른을 섬기고 젊은이는 튼튼했던 까닭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책이름 :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글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 그림 : 조엘 졸리베
- 옮긴이 : 백선희
- 펴낸곳 : 산하 (2009.3.16.)
- 책값 : 9000원



 (1) 옷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2001년부터 즐겨입어 온 반바지 하나가 있습니다. 그무렵은 출판사에 세 해째 몸담고 있던 때라 한 달 일삯을 백만 원 조금 넘게 받았습니다. 이만한 살림이라면 저한테는 돈이 꽤 남아 일삯 2/3를 은행에 집어넣고도 쓸 돈이 제법 남아, 그때까지 꿈으로만 꾸어 오던 ‘조금 값이 비싸더라도 오래오래 입을 질기고 튼튼한 반바지’ 하나 사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동무 한 사람을 불러(옷을 사러 옷집에 가 보기란 그때로서 아홉 해 만이었니까) 옷집에 찾아갔고, 이만천 원이었든가 만오천 원이었든가 하는 까만빛 반바지를 한 벌 장만했습니다. 웃도리 한 벌까지 해서 이만 원을 조금 더 치렀지 싶군요. 그무렵 입던 반바지는 하나같이 길에서 이삼천 원 하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 빨래하니 올이 풀리고 법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반바지 한 벌 갖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자주 입고 고이 아끼며 입었는데, 지난 2008년 여름에 허벅지 쪽 실이 닳고 닳아 세 군데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엉덩이 께도 찢어집니다. 어느덧 아홉 해째 입었으니 그럴 만하다 싶습니다. 따로 두꺼운 천을 대야 할까 싶고, 앞으로는 집에서만 입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지난날 이 반바지를 아홉 해 만에 장만했으니, 이번에도 아홉 해를 기려 새로 한 벌 장만해야 할까요.


.. 마오리족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들은 말이나 행동에 나무랄 데가 없어야 했다.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려면 그래야만 했다 ..  (44쪽)


 날이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습니다. 여름이 코앞이니 마땅한 노릇입니다. 사람들 옷차림은 가볍습니다. 아니, 사람들 옷차림이라기보다 아가씨들 옷차림이 가볍습니다. 젊은 사내나 아저씨들 옷차림은 가볍지 않습니다. 꽤나 많은 남자들은 이 여름에도 긴소매 양복을 입습니다. 속에는 와이셔츠를 받칩니다. 아마 이 양복이나 와이셔츠는 천이 얇고 바람이 잘 들 테지요.

 그러나 서울이든 시골이든 다른 데이든 어디이든 관공서이든 여느 회사이든, 젊거나 늙은 사내들이 한결같이 판에 박은 듯 맞춰서 입는 양복은 제 눈에는 낯섭니다. 양복을 입고 일터를 오가는 분한테는 익숙할 테며 자연스럽겠지만, 저로서는 아직까지 낯설기만 합니다. 더운 여름날 왜 온몸을 이리도 꽁꽁 싸매는 까만 빛 천으로 둘러대야 할는지요. 옷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어이하여 ‘서양옷(洋 + 服)’을 입어야만 회사원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사무원이 될 수 있는지요. 서양옷을 입지 않으면 영업을 하러 다니면서 버르장머리가 없는 노릇인가요. 서양옷을 갖춰입고 책상맡에 앉아야 머리가 술술 풀리고 일을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고등학교 아이들 옷차림도 ‘어른 서양옷 차림’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어릴 적부터 ‘서양옷이 다소곳함을 지키며 갖춰입는 옷’이라고 못박듯 길들이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 날씨는 해마다 뜨거워지면서 벌써부터 30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는데, 그나마 여학생은 치마길이를 줄여 시원하다(여학생들은 시원하려고 치마길이를 줄이지 않습니다만) 싶도록 옷을 입는다 하는데, 남학생은 긴바지를 싹둑 잘라 반바지로 입을 수 없고, 스스로 입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 마오리족은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자연은 생명과 풍요로운 원천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냥꾼들에게 사냥감을 주고, 사람에게 카누와 집을 만들 나무를 주며, 새들에게 멋진 깃털을 준다 ..  (67쪽)


 디제이 디오시가 부른 노래가 아니더라도, ‘청바지 입고 회사에 못 갈’ 까닭이 없고, ‘반바지 입고 동사무소에서 일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소매없는 웃도리’를 입거나 ‘아예 웃통을 벗은 채’ 공부를 하지 말란 법조차 없습니다. 회사원은 회사일을 잘해야 할 노릇이요, 공무원은 동네사람 일을 잘 다스려야 할 노릇이며,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익히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잘 삭일 노릇입니다.

 고리타분한 울타리에 갇힌 어른들은 ‘보기에 나쁘다’라든지 ‘점잖지 못하다’라든지 ‘버릇이 없다’고들 말씀하지만, 너무도 터무니없는 소리요 웃기는 소리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교사가 장님이라면 어떻습니까.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교사라면 어떻습니까.

 헤엄터에서는 헤엄옷을 입고 알몸헤엄터에서는 알몸으로 있어야 ‘올바름’이듯, 제도권학교에서는 ‘서양옷과 똑같은 학교옷’을 갖춰 입어야 올바름이라고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하며 통일과 민주가 살아숨쉬는 배움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시지옥을 코앞에 둔 ‘시험 전투원’이 ‘볼펜이라는 총칼’을 들고 ‘옆자리 짝꿍을 적군으로 삼아 무찔러 쓰러뜨리’도록 길들어 가는 감옥소하고 똑같은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런 감옥소 같은 학교라 할지라도, 아이들 앞에서 ‘창의’니 ‘창조’니 ‘상상’이니 ‘교육’이라는 겉발린 말이라도 읊조리고자 한다면, 더운 여름날에는 더위를 식힐 수 있게끔 ‘반바지 민소매 학교옷’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싶을 뿐입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들 여름옷은 한결같이 반바지인데(때로는 초등학교 여름옷도), 중고등학교부터는 긴바지만 입어야 한다면 앞뒤가 어긋날 뿐더러, 사람몸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 타네 신이 이 자리에 모인 새들에게 말했습니다. “투이야, 너는 땅으로 내려가기를 그토록 겁냈으니 비겁함의 표시로 목에 흰색 깃털 두 줄을 달아 주마. 발을 적시는 게 싫다고 한 푸케코는 평생 동안 축축한 습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다는 피피와로로아, 너는 앞으로 둥지를 지을 필요가 없을 거다. 남의 둥지에다 알을 낳게 될 테니까. 하지만 키위야, 너는 희생의 대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새가 될 것이다.” ..  (71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한테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히려는 분들 스스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대학교수이건 초중고등학교 교사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 스스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그래야만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다소곳함을 지킨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남학교 교사들은 런닝셔츠 바람에 긴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채 수업을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당신들 스스로 견디지 못하면서, 당신들 스스로를 사로잡거나 얽어매는 무시무시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끊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은 북중남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영국말, 프랑스말, 스페인말, 포르투갈말만 쓰도록 얽어 놓았으며, 뉴질랜드와 호주 또한 영국사람 문화가 스며들도록 했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구석구석 영국 문화, 그리고 영국에서 떨어져 나가며 새로 세웠다는 미국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한글과 우리 말이라는 지푸라기 하나를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마디와 글줄을 빼놓고는 온통 잡아먹혔습니다. 그나마 이 말마디와 글줄조차 아이들이 갓 태어나자마자 영어에 미쳐 버리도록 몰아세우고 있습니다만. 
 





 (2) 삶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동네 골목집이 사라집니다. 하나둘 아파트로 바뀝니다. 아파트로 바뀌지 않더라도 동네 골목집 짜임새와 얼거리는 우리네 살림집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양도 그렇고, 속내도 아니었습니다. 껍데기는 기와 얹은 집이요 풀 얹은 집이라 할지라도 속내에는 서양 살림집 차림이었습니다.

 서양사람이 처음 만들고 이 나라 사람이 고쳐 만든 갖가지 전자제품과 살림살이가 들어차 있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쓰고 밥사발을 쓴다지만, 이런 수저와 밥그릇 어디에도 한글이 적히는 일이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만들어 한국사람한테 팔고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쓰는 한국 물건이라 하지만, 이런 한국 물건에 한국말이 한국글로 당차게 적히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마우이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형들은 물고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살점을 마구 뜯어내고, 자르고, 토막 냈지요. 가엾은 물고기는 아파서 몸을 비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 북섬의 산들이 일어서고 계곡들이 패인 것입니다. 물고기를 닮은 이 섬을 이곳 사람들은 ‘테이카 아 마우이’, 즉 ‘마우이의 물고기’라고 불렀습니다. 뉴질랜드 전체는 마오리어로 ‘아오테아로아’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  (35쪽)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한글이름이 붙지도 않지만, 한글로 적더라도 속살은 서양말입니다. 한국사람끼리 주고받는 이름쪽에 어김없이 알파벳으로도 찍는 한편, ‘손전화’까지는 바라지 않으나 ‘핸드폰’이라고 한글로 적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거의 안 씁니다만, ‘비퍼’ 아닌 ‘삐삐’라는 우리 말로 이름쪽에 글을 박는 사람을 ‘영어도 모르는 시골놈!’이라며 우습게 깎아내리던 일은 먼 옛날이 아닙니다. 회사이름이건 운동경기 선수단이건 오로지 서양말로 제 이름을 갈아치우거나 갈아입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타는 버스이니 마땅히 ‘학교버스’인데, ‘학교버스’라 말하는 학교는 없습니다. ‘스쿨버스’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참에 학교이름도 아예 ‘스쿨’로 바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만 좀 때려!” “네가 미친 듯이 빨리 하늘에서 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천천히 돌겠다고 약속하면, 너를 놓아 줄게. 하루가 길어지면,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네 친구가 되어 줄 거야.” 기운이 빠지고 상처를 입은 태양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야 마우이는 형들에게 태양을 놓아 주라고 말했습니다. 이날부터 태양은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였고, 햇빛은 따스하고 유익한 빛이 되었답니다 ..  (40쪽)


 적잖은 글쟁이와 예술가 들께서 ‘우리 말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말이라 한다면, 왜 당신들 스스로 ‘그 아름다운 말로 문학을 하건 책을 쓰건 예술을 하건’ 안 하는지 알 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돈벌이가 되는 일거리는 아니라서,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서양말로 잔뜩 뽐내면서 하고, 멋부리면서 서양차 한 잔 즐길 때 가끔 시를 읊듯 읊는 소리인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누가 쓰는 말인 줄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지식인이라든지 많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닌 줄을 못 깨달았으리라 봅니다. 요사이야, ‘김수영 시인이 느낀 저잣거리 장사꾼 아지매와 할매가 쓰는 말’마저 텔레비전 연속극과 우스갯소리에 물들고 찌들어 참맛과 참멋을 잃었습니다만,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란 바로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말입니다. 길바닥에서 오가는 말입니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넘나드는 말입니다. 바닷물결을 타고 시냇물결을 타는 말입니다. 새와 함께 지저귀고 들짐승과 함께 우짖는 말입니다.


.. 라타는 가장 좋은 연장들을 가져와서 곧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타는 기운은 넘쳤지만 인내심이 부족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했지요.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원칙을 잊었던 겁니다. 그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를 자르더라도 그 전에 식물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무나 식물의 마음이 다치지 않고, 숲이 평화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수많은 새들과 곤충들이 풀밭에 누운 나무 위로 후드득하며 구름처럼 날아올랐습니다. 이들은 숲의 신인 타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는 라타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형제를 잘라내면서 허락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이들이 한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오, 라타, 이 나무를 가만 내버려 둬. 제발 가만 놓아 둬. 나무 부스러기들이 날아오르고 뿌리들이 날아올라 다시금 모여들어 나무가 된다네 …….” ..  (59, 63쪽)


 엄마와 아빠가 살아간 대로 딸과 아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대로 딸과 아들도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엄마와 아빠는 딸과 아들한테 오래도록 제 삶을 길들여 놓습니다. 맞추어 놓습니다. 물려주고 이어주고 내려줍니다. 엄마와 아빠가 읊는 말투가 아이들 말투가 되고, 엄마와 아빠가 즐겨먹는 밥이 아이들 즐겨먹는 밥이 됩니다. 집에 갖추어 놓은 엄마와 아빠 책대로 아이들은 책을 만납니다. 자동차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자동차 타기를 아주 마땅히 받아들이며 저희들도 나중에 스스로 차를 장만하여 몰고자 합니다. 자전거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전거를 즐겨탈 뿐 아니라, 자가용 한 번 얻어탈 때 대단히 고마워할 줄 압니다. 늘 걸어다니고 때때로 버스나 전철을 타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걷기를 즐기며 걷는 동안 부대끼는 사람과 삶터를 깊이 돌아볼 줄 아는 가운데, 어쩌다가 자가용을 얻어타면 참으로 고맙게 여길 줄 압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길들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칩니다.

 저 혼자 하는 생각인지 모릅니다만, 이 나라에서 예부터 오래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돈으로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딸아들을 돈을 생각하면서 낳고 기른 어버이는 옛날에도 있기는 있었을 테지만, 오늘날처럼 갑작스레 늘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느끼고, 또 오늘날처럼 아주 미쳐날뛰듯 돈에만 눈알이 돌아가는 흐름을 키우지도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서양사람이 북중남미 대륙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땅으로 쳐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라고만 말하기는 뭣하지만, 이무렵부터 아주 크게 돈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우리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고 얼이 빠지고 있습니다.
 





 (3)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이라는 책


 어린이책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을 읽습니다. 어린이책인 만큼 글씨는 시원시원합니다. 금세 읽힙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뿌듯해진 가슴으로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마다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쥐도록 이끈 어버이들한테도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까 하고. 어버이 스스로 가슴에 무언가 뿌듯하게 남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책을 스스로 찾아 읽지는 않겠지 하고.


.. 150여 년 전,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과 영국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오리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오랜 항해를 거친 끝에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영국인들에게 난데없이 지배받게 된 마오리족 사람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 마오리족의 족장들은 속담을 이용하거나 신화와 전설을 끌어들이면서 걱정과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  (7∼8쪽)


 우리는 북미 토박이 이야기를 꽤나 찾아서 읽습니다. 중남미 토박이 이야기도 퍽 찾아서 읽고 노래도 제법 찾아서 듣습니다. 아프리카 토박이며, 인도 토박이며, 호주 토박이며, 태평양 섬나라 토박이 이야기며 줄줄이 찾아서 읽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토박이 이야기는 거의 찾아 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노래는 한 줌조차 찾아 듣지 않습니다.

 우리네 여느 이야기는, 우리네 살아온 이야기는, 우리네 삶터를 이룬 옛이야기는 조금도 찾아 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단군신화’로 두루뭉술하게 엮어낼 뿐이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에 단단히 짓눌려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라는 사슬을 차고 ‘역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습니다.

 하기는요, 이 나라에서 ‘역사’라 하면 임금님 이름 외우기하고 땅따먹기하던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가야사람이 어느 곡식을 농사지으며 밥상은 어떻게 차렸는지가 역사책에 적히지 않습니다. ‘한국문화사’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구려사람 옷차림과 신발 이야기가 ‘한국문화사’는커녕 ‘한국사’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이야기는 문화로도 예술로도 역사로도 담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북중남미 토박이와 아프리카 토박이와 인도 토박이와 태평양 토박이’ 이야기는 ‘아주 훌륭하고 거룩한’ 이야기로 떠받들면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보듬습니다.


.. 마법의 잠에서 깨어난 대제사장은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애처롭게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티니라우는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투우루우루가 좋아하는 고래인 투투누이를 죽인 사람이었으니까요. 티니라우는 그 자리에서 제사장을 때려죽인 다음, 그대로 먹어 버렸습니다. 티니라우는 이렇게 투투누이에게 복수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 사이의 전쟁과 식인 풍습이 생겨난 것이랍니다 ..  (88쪽)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가 허술하거나 모자라거나 달갑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고 눈물겹고 짠합니다. 기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쯤은 우리한테도 얼마든지 있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찾아내어 적바림하지 않았고, 애써 찾아내어 적바림한 사람들 손품은 거의 보람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아직 몇 군데 드문드문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오래된 골목동네’를 어떻게 간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살갑고 푸진’ 이야기를 캐내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고운 보배로 키울 수 있기도 하지만, 가뭇없이 사라지도록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우리 두 손으로 넉넉한 곡식을 거두어들여 기쁘게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한편, 알맹이인지 쭉정이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나라밖 사람들 뒤꽁무니만 좇다가 길잃은 사금파리 한 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4342.5.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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