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아이 127. 2014.3.26. 나무조각 놀이

 


  우리 도서관에 책꽂이를 새로 박으면서 쓰다가 남은 나무토막을 큰아이가 어디에선가 찾아낸다. 집으로 가져가서 놀고 싶단다. 아니야, 아니야, 이 나무토막은 우리 도서관에 올 적에 이곳에서 놀자. 집에는 집에서 만지는 다른 놀잇감이 있잖니. 도서관에 있던 것을 집으로 가져가면 도서관에 와서 무엇을 갖고 놀겠니. 두 아이가 책상맡에 걸상을 끌어다가 앉더니 나무토막으로 세우고 맞추며 논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한가득 퍼진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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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부르는 책 (사진책도서관 2014.3.26.)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따순 볕은 얼음을 녹인다. 차가운 바람은 얼음을 못 녹인다. 따순 햇살이 내리쬐면서 풀이 돋고 겨울눈이 깨어난다. 차가운 바람에는 풀이 돋지 못하며 겨울눈은 더 옹크릴 뿐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는 책을 가까이에 두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마음을 녹이지 못하는 책을 지식이나 정보로 삼아 붙잡으면 삶은 어디로 나아갈까.


  도서관에 새로운 책을 갖다 놓는다. 책을 꾸준히 장만하니 도서관에 두는 책은 꾸준히 늘어난다. 처음 도서관 문을 열던 때를 돌아보면 책이 퍽 많이 늘었다. 책꽂이도 많이 늘었고 책도 많이 늘었다.


  도서관이 할 몫은 두 가지라고 느낀다. 첫째, 책을 잘 건사할 것. 둘째, 건사한 책을 언제나 손으로 만지면서 읽을 수 있을 것. 이 다음으로 생각한다면, 겨울에 안 춥고 여름에 안 더우면 좋겠지. 조용하면서 푸른 바람이 싱그러이 스며들면 좋겠지. 풀벌레와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책을 사귈 수 있으면 좋겠지. 앞으로도 우리 도서관은 책꽂이와 책이 더 늘어나리라 생각한다. 새로 나오는 책을 장만하고, 잊히거나 사라진 책을 마련할 테니까.


  엊그제 비가 제법 내렸더니, 도서관 한쪽으로 빗물이 스몄다. 밀걸레로 빗물을 바지런히 훔친다. 창문을 모두 열고 도서관 바닥을 모두 닦는다. 바닥에 고인 빗물로 도서관 바닥을 닦는 동안 큰아이는 얌전히 책을 읽고 작은아이는 작은 걸상을 이리저리 밀면서 내 꽁무니를 좇는다.


  오늘은 우체국에 가서 도서관 소식지를 부쳐야 하는 만큼 바삐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수선화하고 동백꽃한테 인사한다. 집에서는 큰아이가 봉투질을 거든다. 큰아이가 일을 거들었기에 한결 빨리 끝났다. 앞으로 큰아이가 봉투에 주소도 적어 줄 수 있을까? 따사롭게 내리쬐는 봄볕을 가슴에 담아서, 우리 도서관과 보금자리에 봄내음이 깃들도록 하자. 스스로 봄노래를 부르면 봄살이가 되리라.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0.5341.7125.) *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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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내놓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놓고 느낌글을 써 준 분이 있다. 알라딘서재에 올라온 글에서, 한 가지 바로잡을 대목을 보았고, 다른 대목은 더 붙임말을 적어야겠다고 느낀다. 바로잡을 대목을 알려주셔서 고맙다.

 

..

 

 139쪽에서는 사람이 밭에 씨앗을 심어 배추나 무나 양파나 상추 따위를 얻은 것을 "푸성귀"라 하고, 나물과 푸성귀를 아울러 "남새"라 한다고 설명해 놓고, 201쪽과 202쪽에서는 밭에 심어서 거두는 풀을 "남새"라 하고, 사람이 가꾼 남새와 들과 숲에서 난 나물을 아울러 "푸성귀"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어느 한 쪽은 틀렸음이 분명하다. 어린이가 읽을 책을 이렇게 엉터리로 기술하는 건 용서받기 어렵다.
→ 139쪽에서 잘못 썼습니다. 139쪽 5∼7줄에 나오는 글은 “사람들이 따로 밭에 씨앗을 심어 배추나 무나 양파나 파나 상추를 얻을 때에는 이들 풀을 가리켜 ‘남새’라 해요. 그리고 나물과 남새를 아울러 ‘푸성귀’라 하지요.”로 바로잡아야 올바릅니다. 고맙습니다.


+


ㄱ. 도시 문명이 시골살이를 누르면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국말’은 ‘한자말(중국 한자말 + 일본 한자말)’과 ‘서양말(영어를 비롯한 유럽말)’에 짓눌려서 ‘죽었다’고 할 만합니다. 해방 뒤 한동안 ‘일본말에 짓밟히던 한국말’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을 몰아내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스며든 온갖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글을 배운 지식인과 학자가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일본말을 ‘전문 용어’처럼 삼아서 씁니다. 공공기관에서는 요즈음까지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을 털어내려고 몹시 애씁니다. 공공기관은 ‘국어 순화 자료집’을 꾸준히 만들어서 공무원 스스로 배우도록 해요. 이와 달리, 다른 곳에서는 거의 애쓰지 않습니다. 그동안 길든 말투를 그대로 써요. ‘-의’하고 ‘-적’과 얽힌 말썽을 바로잡지 못하는 모습을 대표로 꼽을 만합니다.


ㄴ.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른 소설이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낱말로 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 나오는 이야기를 엮은 낱말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살아가며 쓰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말로 엮었고, 차츰 쓰임새가 잊히거나 사라지는 낱말을 모두려고 했습니다. 글(책)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라든지 예부터 한겨레가 쓰던 말이라든지, 이런 말은 여느 소설이나 책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만합니다.


ㄷ.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쓴 사람이 ‘새롭게 지은 낱말’은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글쓴이 스스로 새롭게 지은 낱말을 애써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글쓴이가 새롭게 지은 낱말은 책 뒤쪽에 붙인 ‘낱말풀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짚으면서 보여주었습니다. 누구나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도록 돕는 틀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한국말을 살리는 길이란 ‘낱말 새롭게 짓기’로만 할 수 있지 않아요. 잃어버린 쓰임새를 되찾도록, 밑바탕이 되는 말을 가꾸도록 돕는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동안 봉건 사회와 일제강점기와 현대문명 도시사회에 짓눌려 앓던 말을 다루어야 하는 만큼, ‘죽었다’고 할 만한 한국말에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고 싶다는 뜻으로 ‘살려내’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도시를 살리려면 시골이 살아야 하는 만큼, 말이 살려면 시골(숲, 자연)말이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입니다.


ㄹ. 오늘날 사람들은 ‘시시콜콜하고 수수한 여느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습니다. 가장 밑바탕(기본)이 될 낱말을 제대로 살펴서 쓰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밑바탕이 될 말부터 제대로 깨닫고 살피면서, 이러한 말에서 삶과 넋과 이야기를 살리는 한국말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껴요.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말이 살아날 길이 없겠지요.


ㅁ. “오늘과 오늘이 얼크러져 모레와 글피가 된다”란 하루(오늘)와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틀(모레)이 되고 사흘(글피)이 된다는 말입니다.


ㅂ. “무더위에 갑작스레 찾아드는 소나기는 목이 마른 나무 한 그루를 싱그럽게 적신다”에서 ‘한 그루’는 숫자 하나만 가리키지 않습니까. 때로는 나무 한 그루일 수 있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나무가 숲을 이루지 못하고,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있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뒤로 숲정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땔감을 얻느라 숲정이가 사라졌다고도 할 테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국 나무를 어마어마하게 베어서 가져갔습니다. 오늘날에서는 시골에서조차 마을마다 당산나무로 삼을 나무 한 그루 빼고는 마을나무를 찾아보기 어렵기까지 합니다.


ㅅ. “나무 한 그루”라고 일부러 적기도 했습니다. “목이 마른 나무 두 그루”라고도 말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 글은 일부러 이렇게 썼어요.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번역 말투를 함부로 쓰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쓴 글(문장)은, 요즘 사람들이 잘못 쓰는 글을 ‘애써 비판할 까닭 없이’ 예부터 바르게 쓰던 말투를 살려서 넣으려고 한 글이기도 합니다.


ㅇ. 하늘빛은 언제나 ‘파랗다’부터 이야기합니다. 바다빛도 언제나 ‘파랗다’가 밑바탕입니다. 바다에서 바닷말이 많이 불어날 적에는 ‘푸른 빛깔’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바다에서는 ‘녹조’와 ‘적조’가 있어요. 이때에는 바다빛이 다르지요. 다른 모습을 띨 적에 다른 빛깔을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녹조’와 ‘적조’라는 말이 따로 있어요. ‘녹조’가 끼지 않는 바다는 언제나 ‘파랗습’니다. ‘녹조’가 끼는 바다는 ‘푸른 바다’이고, ‘적조’가 끼는 바다는 ‘빨간 바다’입니다. 하늘빛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밑바탕이 되는 빛을 제대로 말하면서, 다른 때에는 다른 빛이 나기도 한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여느 때와 다른 바다빛은 그때마다 이러한 모습에 걸맞게 가리켜야 올바릅니다. 밑바탕이 되는 빛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써도 되지 않습니다. 빛깔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말하는 일이 오히려 ‘아이들 생각을 틀에 박히도록’ 하고 맙니다. 다만, ‘보리가 파랗게 올라온다’와 같는 말을 시골에서 쓰기도 합니다. ‘푸른’ 싹인데 ‘파랗다’라고 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싱그럽다’는 뜻에서 ‘푸르다’를 쓰기도 합니다. “마음이 푸르게 물들었어요”처럼 씁니다. 이러한 말투 때문에 ‘파랗다’와 ‘푸르다’를 잘못 섞어서 쓰는 일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푸르다’는 “풀 빛깔”을 가리키는 밑말이니, 하늘빛에서는 ‘파란하늘’을 기본으로 올바르게 쓰면서, ‘푸르게 물드는 하늘’이라든지 ‘푸르게 눈부신 하늘’처럼 쓰면 ‘푸르다’도 어느 모로 쓸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녹색’과 ‘초록’이란 ‘푸르다’를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녹색’은 일본 한자말이고, ‘초록’은 중국 한자말입니다. ‘푸른 하늘’은 하늘빛을 ‘녹색이나 초록’으로 가리키는 꼴이기에, 이런 말투가 알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ㅈ. ‘바지저고리’가 ‘시골뜨기’나 ‘얼뜨기’를 나타낸다는 말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잘못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국주의자가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함부로 퍼졌습니다. 이런 말 잘못이 자꾸 번져서, 도시공업사회에서 시골사람을 얕보는 말투로 더 퍼졌는데, 이처럼 잘못 퍼진 말과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 ‘한국말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로 ‘한복’을 가리켰어요. ‘한복’은 문화학자가 지은 한자말입니다. 한겨레가 쓰던 말이 아닙니다. ‘한식’와 ‘한옥’ 또한 한자가 지은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가르쳐 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런 말을 가르치면서,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을 안 가르치거나 못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한국말을 배울 수 없어요. 게다가, 잘못 쓰는 말은 바로잡아야지요. 더욱이 ‘시골사람’을 얕잡듯이 쓰는 말투는 오늘날에서는 거의 뜻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차별을 제대로 바로잡아야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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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mara7님의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 대한 의문점들 "

도시 문명이 시골살이를 누르면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국말'은 '한자말(중국 한자말 + 일본 한자말)'과 '서양말(영어를 비롯한 유럽말)'에 짓눌려서 '죽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짓눌려 앓는 말을 '살리려'고 이러한 글을 썼어요. '숲에서 살려낸'이란 시골(자연)에서 삶을 살리듯이 말을 살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잘못을 지적한다면 저로서도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고맙게 여깁니다. 그런데, 책을 쓴 듯을 살피지 않고 왜곡한다면 굳이 사과를 해야 할 까닭이 없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평범한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습니다. 가장 밑바탕(기본)이 될 낱말을 제대로 살펴서 쓰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밑바탕이 될 말부터 제대로 깨닫고 살피면서, 이러한 말에서 삶과 넋과 이야기를 살리는 한국말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껴요.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말이 살아날 길이 없겠지요.

"무더위에 갑작스레 찾아드는 소나기는 목이 마른 나무 한 그루를 싱그럽게 적신다"에서 '한 그루'가 어찌 숫자로 '하나'만 가리키겠습니까? 그러면 백만 그루나 천만 그루처럼 적어야 할까요? 나무를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자는 뜻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글을 굳이 꼬집으려고 들면, 독자가 내놓는 비판이 얼마나 비판다운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이 마른 나무 두 그루"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문장은 일부러 이렇게 쓰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번역투를 함부로 쓰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쓴 글(문장)은, 요즘 사람들이 잘못 쓰는 문장을 '애써 비판할 까닭 없이' 예부터 바르게 쓰던 말투를 살려서 넣으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늘빛은 언제나 '파랗다'가 기본입니다. 바다빛도 언제나 '파랗다'가 기본입니다. 바다에서 바닷말이 많이 불어날 적에는 '푸른 빛깔'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바다에서는 '녹조'와 '적조'가 있어요. 이때에는 바다빛이 다르지요.

그러면, 여느 때와 다른 바다빛은 그때마다 그 모습에 걸맞게 가리켜야 올바릅니다. 기본이 되는 빛을 무시하면서 아무렇게나 써도 되지 않습니다. 하늘빛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되는 빛을 제대로 말하면서, 다른 때에는 다른 빛이 나기도 한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녹색'과 '초록'이란 '푸르다'를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녹색'은 일본 한자말이고, '초록'은 중국 한자말입니다. '푸른하늘'은 하늘빛을 '녹색이나 초록'으로 가리키는 꼴이기에, 이런 말투가 알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보리가 파랗게 올라온다'라는 말을 시골에서 쓰기도 합니다. '푸른' 싹인데 '파랗다'라고 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싱그럽다'는 뜻에서 '푸르다'를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투에서 '파랗다'와 '푸르다'를 잘못 섞어서 쓰는 일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푸르다'는 "풀 빛깔"을 가리키는 밑말이니, 하늘빛에서는 '파란하늘'을 기본으로 올바르게 쓰면서, '푸르게 물드는 하늘'이라든지 '푸르게 눈부신 하늘'처럼 쓰면 '푸르다'도 어느 모로 쓸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바지저고리'가 '시골뜨기'나 '얼뜨기'를 담는다는 말은 참으로 잘못된 편견입니다. 이런 편견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국주의자가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함부로 쓰던 말입니다. 이 말뿌리가 번져서, 도시공업사회에서 시골사람은 얕보는 말투로 더 퍼졌는데, 이런 잘못 퍼진 말과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 '한국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로 '한복'을 가리켰어요. '한복'은 문화학자가 지은 한자말입니다. 한겨레가 쓰던 말이 아닙니다. '한식'와 '한옥' 또한 한자가 지은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가르쳐 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런 말을 가르치면서,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을 안 가르치거나 못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한국말을 배울 수 없어요. 게다가, 잘못 쓰는 말은 바로잡아야지요. 더욱이 '시골사람'을 얕잡듯이 쓰는 말투는 오늘날에서는 거의 뜻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차별부터 바로잡을 노릇입니다.

"오늘과 오늘이 얼크러져 모레와 글피가 된다"란 '하루(오늘)와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틀(모레)이 되고 사흘(글피)이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만 헤아리면 잘 알 수 있습니다.

+

'푸성귀'와 '남새'와 '나물'을 여러모로 섞어서 쓰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섞어서 쓴다고 하더라도, 헷갈리거나 뒤죽박죽으로 썼다면 죄송합니다. 알맞게 가다듬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지적해 주시는 말씀은 언제나 고맙습니다.

궁금하거나 더 지적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제 알라딘서재에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분이 쓴 글에 댓글을 달면 제가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책에 어느 분이 서평을 쓰셨기에 인사말을 남기고 갈 수 있는데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느니 하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차근차근 읽으면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니, 굳이 붙임말을 적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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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 뛰놀면 재미있어

 


  헌 사진기를 두 손으로 곱게 든 산들보라가 뛰논다. 빨리 내달리지는 못하고 작은 몸 작은 다리로 콩콩콩 달리면서 논다. 뒷판이 망가져서 못 쓰는 사진기인데, 아이들은 이 사진기로 수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논다. 서로 찍고 스스로 찍으면서 논다. 너희가 손에 쥔 헌 사진기로 어떤 모습을 찍었니? 너희는 헌 사진기로 어떤 빛을 담았니? 4347.3.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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