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면 일어나면 돼

 


  아이가 놀다가 넘어진다. 아이가 걷다가 넘어진다. 아이가 달리다가 넘어진다. 아이는 두 살이건 네 살이건 열 살이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아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가? 어버이 스스로 바라는 대로 아이가 살아간다. 어버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에 따라 아이 매무새가 달라진다. 얘야, 괜찮아, 툭툭 털고 일어나렴, 다시 잘 뛰면서 안 넘어지면 돼. 또 넘어지면 또 일어나면 돼. 다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돼. 콩콩콩 씩씩하게 달리고 뛰면서 이 땅을 네 숨결로 가득 채우렴.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 26. 말을 가꾸면서 삶을 가꾼다
― 말과 넋과 삶

 


  러시아사람 코르네이 추콥스키 님이 쓴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양철북,2006)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두 살과 다섯 살 사이 아이들 말을 귀여겨들으며 이 아이들 말에서 얻은 슬기로운 빛을 갈무리해서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30쪽과 35쪽에서 “어린 시절에 익히는 것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단어와 문법이라는 보물이다 …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입말에 대한 지식을 익히도록 도우면서 점점 더 많은 새 단어를 알려줘 어휘력이 풍부해지도록 해 줘야 할 임무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이들의 정신 발달은 어휘 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 임무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런 뜻에서 아이들이 말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생각을 잘하도록 가르친다는 뜻도 된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 낱말과 말씨를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는 소리인 한편, 아름답고 알차게 가르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잘하도록 가르치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을 잘 가꾼다고 해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잘 가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찾고 삶을 즐겁게 가꾸며 힘껏 배울 테지요.


  그런데, 지구별 여러 나라 가운데 한국에서만큼은 한국 어린이가 한국말을 제대로 못 배웁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이녁 아이한테 한국말보다 영어와 한자를 더 많이 더 빨리 가르치려 합니다. 아직 한국말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아이한테 영어와 한자를 억지로 쑤셔넣으려 해요.


  왜냐하면, 영어와 한자를 더 이른 나이에 배우면 더 잘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더 일찍 배우면 더 잘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를 더 일찍 배워서 더 잘하면, 다른 것은 뒤로 밀리면서 제대로 못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고 올바르게 써야 할 아이들이 영어와 한자를 배우느라 한국말은 제대로 모르거나 엉터리로 쓰고 맙니다.


  영어와 한자를 학교와 집에서 일찍부터 가르친 지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영어와 한자를 너무 일찍부터 배운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이 어른들이 새롭게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른바 ‘영어·한자 조기교육’이 한 세대를 돌았어요. 어릴 적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며 자란 아이들이 어버이가 되어 아이를 낳아 돌볼 적에 예전처럼 영어와 한자를 또 너무 일찍 함부로 가르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이 아이들은 한국에서 살아가며 어떤 한국말을 쓸까요.


  우리 겨레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말과 일본 한자말과 번역투 물결에 휘둘려야 했어요.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에는 미국에서 들어온 영어와 서양 문명 소용돌이에 휘둘려야 했어요. 이런 틈바구니에서 한국말은 뿌리내리지 못하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가리키는 낱말은 으레 서양말이거나 한자말일 뿐입니다. 한국말로는 새로운 시설이나 설비를 가리키지도 못해요.


  오늘날 지식인을 돌아보면, 인문 지식이나 역사 지식이나 사회 지식은 있으나 ‘한국말 지식’이 없지 싶습니다. 인문이나 역사나 사회를 슬기롭게 바라보거나 살피는 눈썰미 있는 지식인은 있으나,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보거나 제대로 살피는 눈썰미 있는 지식인은 드물구나 싶어요. 지식인들은 ‘하여’ 같은 말투를 자꾸 씁니다. 한국말 아닌 얄궂은 말투입니다. ‘이리하여’나 ‘그리하여’라 써야 올바르지만, 지식인은 한국말을 올바로 쓰지 않습니다. 글머리에 ‘아울러’나 ‘더불어’를 외따로 쓸 수 없는데 이런 말투가 자꾸 퍼져요. ‘이와 아울러’나 ‘이와 더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하지만’이 잘못 쓰는 말투인 줄 헤아리는 국어학자나 교사는 매우 드뭅니다. ‘그러하지만(그렇지만)’처럼 적어야 올바른 줄 알아차리지 않아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를 통하다’나 ‘-에 대한’이나 ‘-에 있어서’ 같은 일본 말투나 번역 말투뿐 아니라 ‘-의’하고 ‘-적’을 함부로 붙이는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을 바로잡거나 고치려는 사람조차 퍽 드물어요. 오랫동안 길들다 보니 이러한 말투가 아니면 이녁 뜻을 나타낼 수 없는 줄 여깁니다. 지식인과 문학인이 이런 말투를 쓴 지 고작 백 해가 안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지식인과 문학인뿐 아니라 여느 어버이와 교사와 아이들까지 이런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써요. 백 해만에 이런 말투가 한국말을 잡아먹어요.


  현기영 님이 쓴 청소년소설 《똥깅이》(실천문학사,2008)를 읽다가 “집구렁이는 곡식을 축내는 쥐들을 없애 주는 고마운 존재이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같은 글월을 보았어요. 청소년문학에 나타나는 “고마운 존재”와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는 거의 걷잡을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 글월은 “집구렁이는 곡식을 거덜내는 쥐들을 없애 주어 고마우면서도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두렵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또는 “고마운 님”이나 “두려운 님”처럼 적어야겠지요. 집에 있는 성주인 구렁이인 터라 ‘님’이라고 가리켜야 알맞아요. ‘존재’도 ‘대상’도 아닙니다.


  청소년은 청소년문학을 읽으면서 말을 익힙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문학을 읽으면서 말을 배웁니다. 여기에 덧붙여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말을 듣습니다. 손전화나 컴퓨터를 켜면 뜨는 온갖 말을 바라봅니다. 학교와 마을에서 어른들이 읊거나 외거나 지껄이는 갖가지 거칠거나 막된 말까지 청소년과 어린이가 듣습니다. 신문에 나오고 책에 적히는 수많은 말을 청소년과 어린이가 찬찬히 마주합니다.


  알맹이만 훌륭하면 알맹이를 담은 그릇인 말이 안 훌륭해도 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알맹이를 훌륭하게 가꾸느라 알맹이를 담는 그릇인 말은 안 훌륭하게 내팽개칠 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알맹이처럼 훌륭한 그릇이어야지 싶습니다.


  말과 넋과 삶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말만 깨끗할 수 없고, 넋만 깨끗할 수 없으며, 삶만 깨끗할 수 없습니다. 말이 깨끗하기에 넋을 깨끗하게 가꾸고 삶 또한 깨끗하게 가꾸려고 해요. 넋이 깨끗하기에 말과 삶을 함께 깨끗한 길로 가꾸려 합니다. 삶이 깨끗한 사람은 아주 마땅히 말과 넋을 깨끗하게 가꾸어요. 4347.3.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로 읽는 책 125] 크기

 


  초피꽃에 붙은 진딧물은 작고
  나는 지구에서 작은 숨결이고
  지구는 온누리에 깃든 작은 별이고.

 


  작은 것은 얼마나 작고 큰 것은 얼마나 클까 싶습니다. 크기를 따지는 일은 얼마나 대수로울까 싶습니다. 작다고 여기니 작을 테고, 크다고 여기니 클 테지요. 아주 자그맣다 싶은 꽃은 사람이 바라볼 적에 아주 작고, 아주 곱다 싶은 꽃은 사람이 마주할 적에 아주 곱지 싶어요. 키가 작은 사람도 키가 큰 사람도 모두 사람입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도 나이가 많은 사람도 모두 사람입니다. 지구도 달도 해도 모두 별입니다. 개미도 진딧물도 사람도 모두 목숨입니다. 다 다른 숨결이면서 다 같은 숨결입니다.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살이 일기 50] 새봄을 마신다
― 네 식구가 걷는 길

 


  자가용이 있으면 읍내로 나갈 적에 군내버스 때를 살피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가용이 있으면 먼 데로 마실을 갈 적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땀을 빼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가용이 있기에 더 낫거나 덜 낫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자가용이 없이 지내면서 네 식구가 함께 들길을 걸어갈 적에 두 다리를 더 잘 느낍니다. 땅과 흙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풀잎을 스치는 바람을 고즈넉하게 맞이합니다.


  자가용으로 빠르게 달릴 적에는 둘레를 살피지 못합니다. 두 다리로 걸을 적에는 언제나 우뚝 서서 한참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빨리 가야 하지 않습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두 우리 삶자리입니다.


  네 식구가 나란히 걷다가 들꽃을 보려고 혼자 살그마니 걸음을 멈춘 뒤에 천천히 좇아가는데, 곁님과 큰아이와 작은아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결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큰아이는 씩씩하게 가방까지 메면서 잘 걸어요. 작은아이도 웬만한 길은 콩콩 뛰듯 걷습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큽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햇볕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생각을 키웁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노래를 합니다. 아이들은 걸으면서 웃습니다.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풀이 살찌우는 숨결이 감도는 길을 네 식구가 함께 걷습니다. 아이들이 걸으면서 크듯이, 어른도 걸으면서 커요. 어른도 걸으면서 풀내음을 맡고, 햇볕이 어떤 맛인가 헤아리며, 생각을 넓힙니다. 어른도 씩씩하게 걷는 동안 새롭게 노래를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산들보라 군내버스 타면서

 


  날마다 무럭무럭 크는 산들보라는 이제 혼자 앉아서 혼자 앞자리를 붙잡을 수 있다. 버티는 힘은 어른만큼 되지는 않으나 굽은 길에서도 흔들리는 길에서도 제법 잘 버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 누나처럼 혼자 따로 앉을 날을 맞이하겠지. 4347.4.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