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백 살 느티나무

 


  팔백 살하고 마흔 살을 더 먹었으리라 보이는 읍내 느티나무 앞에 선다. 느티나무 그늘은 아주 넓다. 백 사람쯤 자리 깔고 앉아도 모두 그늘을 넉넉히 즐길 만하다. 가지는 높고 나뭇잎은 우거진다. 줄기는 매우 두껍고 딱딱해 누군가 망치를 들어 못을 박으려 하면 못이 휘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손에 망치나 못을 들지 않고서, 그예 맨바닥 맨손인 채, 가만히 팔을 벌려 굵직한 나무줄기를 껴안으며 귀를 대면, 팔백 살하고 마흔 살을 더 먹었으리라 보이는 느티나무 콩닥콩닥 뛰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섯 살 아이가 느티나무를 타고 오른다. 두 살 아이가 느티나무 앞에서 흙을 쓰다듬으며 논다. 느티나무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며 살았고, 앞으로도 수많은 아이들이 이 곁을 스치고 지나갈 테지.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짓다가 허무는 온갖 집과 다리와 학교를 바라볼 테고,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피비린내 싸움과 다툼을 고스란히 지켜볼 테지.


  누군가 느티나무 가지를 자르겠지. 누군가 느티나무 잎사귀를 따겠지. 누군가 느티나무를 사랑하겠지. 누군가 느티나무 곁에서 흙을 일구며 날마다 흐뭇하게 웃는 나날 누리겠지.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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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만 목 뒷모습

 


  이웃집 마늘밭에서 함께 놀고, 옆마을 들길을 걷다가, 멧등성이 천천히 오르내리기도 하면서, 아이들 살결은 차츰 까무잡잡하게 달라진다. 나도 아이들 따라 살결이 조금씩 까무잡잡해진다. 처음에는 까무잡잡하게 달라지는 빛깔이지만, 시나브로 우리 시골마을 빛깔인 흙빛하고 닮는다. 살결은 흙빛을 닮고, 눈빛은 풀빛을 닮는다. 마음은 햇빛을 닮고 사랑은 하늘을 닮는다. (4345.5.2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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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기맛

 


  나는 꼭 두 가지 딸기맛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어린 어느 날, 시골 외가집에서 밭딸기를 밭에서 바로 따서 먹던 맛입니다. 다음 하나는 그 뒤 어느 퍽 어린 날인데, 시골 밭둑인지 멧등성이인지 들딸기나 멧딸기를 따서 먹던 맛입니다.


  처음으로 밭딸기를 먹고 나서, 가게에서 사다 먹는 딸기는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알뜰히 거둔 유기농 딸기라 하더라도, 비닐을 안 친 밭자락에 심어 거둔 밭딸기 맛보다 짙거나 달거나 바알갛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다음으로 들딸기나 멧딸기 맛을 보고는 밭딸기조차 견줄 수 없이 오래도록 입안과 온몸을 감도는 달달하며 짙고 바알가면서 푸른 맛이 남습니다. 고픈 배를 채우거나 가벼운 입을 달싹이는 맛이 아닌, 목숨을 받아들여 내 목숨 곱게 건사한다는 삶을 느꼈어요.


  하루가 흐르고 한 해가 흐릅니다. 어린 나날 외가집에서 먹은 맨땅 밭딸기 맛은 두 번 다시 찾아보지 못합니다. 들딸기와 멧딸기는 시골로 나들이를 갈 적 곧잘 찾아봅니다. 이제 두 아이와 함께 시골자락 들판과 멧등성이 마실을 하면서 새봄 첫 들딸기와 멧딸기 맛을 봅니다. 다섯 살 아이는 스스로 딸기 알맹이를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잘 익었는가 덜 익었는가’를 깨닫습니다. 잘 익은 딸기는 손으로 살며시 잡기만 해도 톡 하고 떨어집니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건드려도 툭 하고 떨어져요.


  딸기를 쥔 손에는 딸기내음이 뱁니다. 딸기를 먹는 입에는 딸기내음이 감돕니다. 딸기를 먹은 몸에는 딸기내음이 어우러집니다.


  쌀을 밥으로 짓든 날로 씹어서 먹든, 쌀을 먹는 사람 몸에는 쌀내음이 뱁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 몸에는 술내음이 뱁니다. 보리를 먹는 사람은 보리내음이 뱁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담배내음이 뱁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플라스틱과 기름 냄새가 뱁니다. 흙에서 일하는 사람은 흙내음이 뱁니다. 회사이든 공공기관이든 시멘트 건물에서 일하고 시멘트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시멘트내음이 뱁니다. 세겹살 즐겨먹으면 세겹살 냄새가 밸 테고, 갑오징어를 먹으면 갑오징어 내음이 배겠지요. 돈을 신나게 버는 사람한테는 돈내음이 가득합니다. 사랑을 나누며 꽃피우려는 사람한테는 사랑내음이 물씬 납니다.


  이웃집 할머니가 제비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늘밭에서 마늘을 하나하나 캡니다. 아이들은 낮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다가 온 집안과 마당을 넘나들며 개구지게 놉니다. (4345.5.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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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꽃잎

 


  찔레꽃잎은 먹는다. 찔레나뭇잎은 먹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을 나고 새봄을 맞이해 처음으로 돋은 보들보들한 찔레나뭇잎도 먹을 수 있을 테지. 새봄에 막 돋은 느티나뭇잎도 먹을 수 있으니까.


  찔레꽃잎을 먹는다. 아이와 함께 천천히 씹어서 먹는다. 꽃잎 하나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으니 찔레꽃잎 내음이 입안으로 확 퍼진다. 자그마한 꽃잎은 꽃잎 맛이 난다. 배고플 때에 잔뜩 따서 먹을 수 있겠다고 느끼는데, 한 움큼이나 두 움큼 따서 먹는다고 얼마나 배고픔이 가실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몸으로 들어온 찔레꽃잎은 내가 살아가는 흙을 떠올리도록 이끌고, 내가 맞이하는 햇살을 되새기도록 이끌며, 내가 마시는 빗물을 헤아리도록 이끈다.


  저녁이 되어 들꽃 하나둘 잎을 오므리는데, 찔레꽃은 잎을 펼친 채 있다. 뉘엿뉘엿 기울어 어두워지는 들판에서 찔레꽃잎 하얀 빛깔은 더 하얗다. 봄을 부른다는 알록달록 어여쁜 꽃들 모두 지고 온 들판과 멧등성이에 푸른 빛깔 짙을 때에, 찔레꽃 작은 송이는 소담스레 저희끼리 옹크리면서 작은 무리를 이룬다. 푸른 들판에서 길을 잃지 말라며 하얗게 빛난다. (4345.5.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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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쓰고 싶은 글, 더 읽고 싶은 책

 


  두 아이 잠들었을 때, 글 한 줄이라도 더 쓰고 싶다. 두 아이 새근새근 꿈누리를 날아다닐 때,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싶다. 그러나, 색색 소리내며 깊이 잠든 아이들이 뒤척이며 아버지를 부른다. 예쁘게 잠든 아이들이 기저귀에 쉬를 하든, 자다가 쉬가 마렵다 하든, 또 곁에서 아버지 손을 잡거나 품에 안겨 자고 싶다 하든, 아버지를 부른다. 나는 모처럼 한갓지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네 하고 마음을 놓다가도, 못내 아쉬운걸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이 마음을 접는다. 아버지인 내가 쓰는 글은 너희들 손을 가만히 쥐며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는 삶인걸. 아버지인 내가 읽는 책은 너희들 작은 몸뚱이를 구석구석 주물러 뭉친 데 풀어 주면서 곱게 목소리 가다듬어 자장노래 부르는 삶인걸.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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