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아닌 길을 걷다

 


  처음에는 첫째를 걸리고 둘째를 안으며 마을 언저리를 한 바퀴 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마실을 하기로 한다. 두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면소재지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봄비 갠 이듬날 저녁 멧등성이 너머로 해가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걷는다. 좀 늦게 나왔나 싶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도 해 기운 뒤에 걸어 돌아오더라도 좋으리라 느낀다. 날이 퍽 포근하다.


  자동차 거의 볼 수 없는 시골길을 걷자니, 들새 지저귀는 소리뿐 아니라, 바람이 부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풀잎 서걱거리는 소리, 구름 없는 하늘에 해 지고 달 뜨는 소리, 옆지기 노랫소리, 아이들 조잘조잘 소리 찬찬히 들을 수 있다. 더 귀를 기울인다면 지구별이 돌아가는 소리와 우리들 발자국이 찬찬히 울려퍼지는 소리까지 듣겠지. 봄비를 머금은 마늘이 한결 싱그러이 풀포기 빛깔을 뽐내는 소리를 들을 만하고, 일찌감치 갈아엎은 밭뙈기 흙이 거름을 머금으며 잘 익는 소리 또한 들을 만하다.


  면소재지까지 2.1킬로미터, 다시 집으로 2.1킬로미터. 나가는 데 34분, 들어오는 데 42분.


  우리 네 식구 오늘 걸은 길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다. 우리 네 식구는 길그림, 곧 지도를 걷지 않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걸은 겨를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걸은 나날이다. 저녁을 보고 해거름을 보며 차츰 까무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본다. 집에 닿으니 초롱초롱 빛나는 별이 하나둘 또렷하다. 밤하늘 별을 가리켜 초롱초롱이라는 이름 말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이들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밤하늘 별빛이 초롱초롱하며, 새 아침 햇살 머금는 꽃잎과 풀잎이 초롱초롱하다. (4345.4.1.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흙에서 뒹굴기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흙밭에서 아이들이 뒹군다. 나는 괭이로 쩍쩍 땅을 쪼아 엎는다. 괭이자루를 잡고 내리찍기 앞서 아이들을 흘끗 바라본다. 괭이로 땅을 쿡 찍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나는 이 아이들만 하던 어린 나날 흙밭에서 얼마나 뒹굴 수 있었을까. 나는 흙밭이든 흙마당이든 흙길이든 하나도 못 누리며 시멘트 바닥만 누렸을까. 아니면 집에서 조그마한 방바닥만 이리저리 오가며 뒹굴 수 있었을까. 나는 우리 아이들처럼 온통 흙투성이가 되도록 개구지게 놀던 어린이가 아니었을까. 날마다 온몸이 흙투성이에 모래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들어온다고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듣던 어린이가 아니었을까. 머리카락까지 온통 모래와 흙이 스며들어 또 새로 씻어야 한다고, 아침에 갈아입은 옷을 저녁에 벗어 새로 빨아야 한다고, 이런저런 푸념을 빚던 어린이가 아니었을까.


  흙놀이를 하고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한테 하루는 얼마쯤 되는 겨를일까. 흙놀이를 하고 모래놀이를 하던 내 어린 나날, 하루를 얼마쯤 되는 겨를로 맞아들였을까. 아이들이 노는 흙밭은 그리 넓지 않다. 내가 뛰놀던 옛 국민학교 흙운동장 귀퉁이는 아주 조그맣다. 한 사람이 일구어 곡식과 먹을거리를 얻을 땅뙈기는 그리 넓지 않아도 된다. 한 아이가 뒹굴며 마음껏 온누리를 느끼며 놀 터, 곧 아이들 흙놀이터는 얼마 넓지 않아도 넉넉하다. 우리 어른들이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아파트 평수를 한두 평이나 서너 평 줄이면, 아이들이 마음껏 뒹굴 흙밭과 흙마당 깃든 자리를 장만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어른들이 자가용 크기를 줄이거나 자가용을 덜 타거나 아예 자가용을 버릴 수 있다면, 아이들이 신나게 얼크러질 흙놀이터를 예쁘게 마련할 수 있을 텐데.


  아이들이 자연을 느끼도록 이끄는 좋은 그림책과 좋은 동화책과 좋은 다큐영화를 베푸는 일이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지만, 아이들이 온몸으로 뒹굴며 자연을 받아들일 만한 흙땅이 없다면, 자연그림책도 자연동화책도 자연다큐영화도 그예 부질없는 앎조각이나 앎부스러기로 그치지 않을까 싶다. 흙땅을 누리지 못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온 나라 물줄기에다가 막삽질을 하고 온 고을 멧줄기에다가 막구멍을 파댄다고 느낀다. (4345.3.30.쇠.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억의집 2012-03-30 20:45   좋아요 0 | URL
우리 어릴 때만해도 흙바닥이 많았지요. 동네 한복판에 개천도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시멘바닥에 길들여져서... 땅 일구시는 거 안 힘드세요?

숲노래 2012-03-30 21:43   좋아요 0 | URL
여기에 무언가 심어 먹을 생각하면
즐거워요~ ^^
 


 책꽂이 냄새

 


  도매상에서 서른 해 넘게 책을 건사하던 책꽂이를 스물쯤 얻는다. 도매상 벽을 가득 채웠을 책꽂이는 뒤판까지 단단히 붙은 채 나왔다. 책을 빽빽이 더 많이 꽂도록 책 크기에 맞추어 칸을 촘촘이 나눈 책꽂이는 자그마치 아홉열 칸씩 있고, 열한 칸짜리까지 있다. 서른 해 넘는 나날 얼마나 많은 책이 이 책꽂이를 거쳐 사람들 손으로 이어졌을까. 도매상이 문을 닫을 즈음에는 책꽂이에 책이 꽂히기만 한 채 오래도록 먼지를 먹었을 테지. 오래된 책꽂이에 꽂힌 책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말없이 나이를 먹어야 했을 테지.


  문을 닫은 도매상 벽에서 떼어낸 책꽂이는 헌 종이 가득 쌓인 창고 뒤쪽 빈터에 차곡차곡 놓인다. 커다란 책꽂이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오래된 책꽂이라지만 나무 냄새가 난다. 햇살을 보지 못하며 먼지만 먹던 나무 냄새일까. 책꽂이를 나무로 짜듯, 똑같이 나무로 빚은 책을 건사하던 결과 무늬가 고스란히 깃든 냄새일까.


  그러고 보면, 나무는 갓 잎을 틔운 아기나무일 때에도 나무 내음을 뿜고, 어른 키만큼 자란 어린나무일 때에도 나무 내음을 뿜으며, 집채보다 높직하게 자란 어른나무일 때에도 나무 내음을 뿜는다.


  책으로 바뀌는 나무도 종이에 나무 내음을 남긴다. 책꽂이로 달라진 나무도 칸마다 나무 내음을 남긴다. 작은 종이 한 장이든 두툼한 책 한 권이든 나무 내음이 짙고 얕게 남는다. 몇 시간 나무를 만진 손에도 나무 내음 살며시 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나무 내음 살몃 깃든 손으로 아이를 안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4345.3.29.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 동백꽃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마을 울타리를 살며시 넘겨다보면, 어느 집이나 동백꽃이 거의 다 떨어졌다. 우리 집 동백나무만큼 봉우리를 터뜨릴 줄 모른다. 우리 집 후박나무도 좀처럼 봉우리를 벌리지 않는다. 날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늘 그 모습 그대로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그러나, 동백꽃이든 후박꽃이든 그야말로 아주 따사로운 날씨가 이어지며 더는 찬바람에 꽃잎 떨구지 않아도 될 때까지 곱게 참으며 기다리지 않을까.


  봉우리를 앙 다문 동백나무를 들여다본다.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새 동백꽃 한 송이가 잎을 활짝 벌린다. 손을 뻗어 살며시 만진다. 줄기에 달린 잎도 보드랍지만, 이 꽃잎은 어쩜 이리 보드라울 수 있을까. 온누리 어떤 종이라 하더라도 꽃잎처럼 보드랍고 튼튼하며 향긋하게 만들 수 없겠지. 꽃잎은 며칠 지나 꽃대에서 떨어지면 이내 시들고 만다지만, 활짝 벌렸을 때이든 가랑꽃이 되든 늘 싱그러이 빛나는 목숨이기 때문에 이토록 보드라우며 튼튼한데다가 향긋할 수 있겠지.


  새 아침을 맞이해 아이들이 잠에서 깬다. 둘째는 내 무릎에 누워 더 잔다. 첫째는 방문 한쪽을 열고 앉아 책을 읽는다. 먹이를 찾으며 날아다니는 새들 소리를 듣는다. 햇살은 차츰 밝아진다. 날은 더 따스해진다. 오늘 하루 좋은 이야기 그득 우리 곁에 찾아오리라 믿는다. (4345.3.29.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으로 보는 눈 179 : 이야기를 읽는 책

 


  나는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독일사람을 모릅니다. 이녁이 어떤 삶을 꾸렸고, 어떤 넋을 펼쳤으며, 어떤 사랑을 나누려 했는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이가 쓴 책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2012)을 읽습니다. 조그마한 책 하나를 읽으며 어느 한 사람이 걸어간 삶과 누리던 넋과 나누던 사랑을 조용히 헤아립니다.


  누군가한테 묻듯, 또는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는 듯, 혼자말로 “왜 스승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준비 작업을 경험 있는 제자에게 맡기지 않는가 … 무엇 때문에 그는 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똑같이 엄격하게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하며, 또 제자들에게 똑같이 따라하게 하는가(88쪽)?”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스승이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어머니도 이와 같아요. 아기한테 젖을 물릴 때 언제나 똑같은 몸짓입니다. 아기 기저귀를 갈며 늘 똑같은 매무새입니다. 아이들 밥을 차리며 노상 똑같은 몸가짐입니다.


  스스로 씨앗을 갈무리해서 심어 돌보아 거두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 심어 돌보아 거둔 곡식을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물로 헹구고 밥으로 짓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똑같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날마다 되풀이해요. 아이들한테 옷을 입히려 하면, 더러워진 옷을 벗겨 새로 빨래하고 말리고 개고 건사합니다. 목을 넣고 팔을 넣으며 단추를 채웁니다. 어느 때라도 어느 한 가지 어긋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가만가만 모든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합니다.


  어느 재주나 솜씨와 얽힌 자리에서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되풀이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으레 수저를 들어 밥이든 반찬이든 하나하나 집고 알맞게 입에 넣어 찬찬히 씹어서 삼켜요. 주걱으로 입에 퍼넣는대서 밥먹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밥상 앞에 멀뚱멀뚱 앉는대서 내 배가 그득 차거나 부르지 않아요. 여든 살이든 마흔 살이든 다섯 살이든, 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서 입에 넣어야 합니다. 날마다 끼니자리에서 이 일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똑같이 똥을 눕니다. 똑같이 숨을 쉽니다. 똑같이 말을 합니다.


  집안일은 늘 같은 일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집밖일이라 하는 회사일 또한 노상 같은 일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같은 출근길입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걷거나 같은 자동차나 버스를 탑니다. 언제나 같은 곳에 가서 같은 책상에 앉거나 같은 일터에 서요. 기계를 놀리든 책상맡 셈틀을 붙잡든 종이와 펜대를 붙잡든, 집밖일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날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곧, 사람이 살아가며 빚거나 누리는 새로운 생각과 꿈이란, 어디에서나 싱그럽고 슬기롭게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사진기를 들고 싸움터를 누비거나 집회 현장에 달려가야 ‘빛나거나 놀라운’ 보도사진이 태어나지는 않아요. 내 집에서 아이들 놀며 웃음짓는 모습을 마주하는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빛나거나 놀라운’ 사진이에요.


  빛나거나 놀라운 삶이기에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요.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책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똑같이 누립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