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 평가’에 나 혼자 괜히 골을 부리며

 


 지난 2005년부터 내 마음에 오래도록 감도는 시집이 있다. 2005년에 이 시집 느낌글을 하나 쓰기는 했으나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이 느낌글을 썩 제대로 썼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2012년 설을 맞이해 음성까지만 다녀왔다. 음성을 거쳐 일산까지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고흥을 떠나는 새벽까지 옆지기 몸이 어떠한가를 살피느라 음성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막상 미리 끊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못 간다 하더라도 표는 미리 끊어야 하지 않았으랴 싶다. 왜냐하면, ‘간다 10% 못 간다 90%’인 채 광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표 하나는 끊었으니까.

 

 살림돈 후덜거리기에 음성에 간다 하면 음성에서 서울로 갈 기차표 끊을 돈을 걱정할 만하지만, 그래 봤자 10만 원 안팎일 텐데, 정 못 간다면 집에서 취소하면 되니까 그리 근심할 일이 아니었구나 싶은데, 늘 이렇게 때가 지나고서야 뒤늦게 땅을 친다. 아마, 표를 미리 끊었다면 우리 네 식구 음성을 거쳐 일산 옆지기 어버이까지 뵙고 돌아왔겠지.

 

 후줄근하고 초라한 살림집이라 하더라도 어여쁘며 좋은 보금자리이다. 못난 어버이는 없다. 나와 옆지기한테 우리 어버이가 못난 어버이가 아니듯,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가 못난 어버이가 아니다. 서로 꾸밈없이 어여쁜 사람들이다. 조그맣고 조그마한 이 시골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다리 뻗고 즐거이 주무시고 돌아가셔요, 하고 인사할 만하다. 한 지붕에 한 이불 덮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지, 꼭 호텔 방 같은 데에서 묵어야 보람이거나 즐거움이 아니다.

 

 아주 찌뿌둥한 몸으로 새벽에 일어난다. 오래도록 마음에 담은 시집 하나를 헤아리다가, 이 시집에 하나 달린 ‘서평’을 읽다가, 이 시를 내놓은 분 삶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괜히 골이 난다. 어느 분이 별 다섯 만점에 별 둘을 붙이면서 ‘노동시’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는다고 적은 짧은 ‘서평’을 읽다가, 울컥 하고 무언가 치민다. 노동시란 뭐지? 사랑시란 뭐지? 문학이란 뭐지? 시란 뭐지? 글이란 뭐지?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시를 읽으며 생각한다. 이 시골마을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 읽으라고 시를 쓰는 도시사람은 없다. 아무도 없다. 시골마을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예쁘게 나누려고 시를 쓰는 문학쟁이란 없다. 아무도 없다. 연필 쥐기보다 호미 쥐기를 좋아한 박경리 님이라지만, 막상 박경리 님이 쓴 시조차 시골자락 흙을 밟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읽도록 쓴 시이지는 않다.

 

 노동시라면 누가 읽으라는 시일까. 노동자라는 사람이 읽으라는 시인가. 그러면, 노동자라는 사람은 어떤 시를 읽고 어떤 ‘노동자 삶’을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즐기다가는, ‘노동자 삶을 꾸리며 낳은 아이들’한테 이 ‘노동자 일과 삶’을 물려줄 만할까.

 

 새벽바람에 찌뿌둥한 바람으로 골을 부리며 글을 쓴다. 글을 다 쓰니 기운이 폭 빠진다. 울컥 하고 치미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일은 매우 부질없다. 그런데, 찌뿌둥할 뿐 아니라 눈이 절로 감기는 마당에 울컥 하고 치밀다 보니, 없는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책상맡에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쓴다. 책상맡에 걸상을 놓고 앉아 글을 쓸 수 있는데, 옆지기하고 한살림 꾸리던 때부터는 낮은 책상 앞에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쓴다. 일부러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는데, 무릎이 시릴 때까지만 책상맡에서 무릎 꿇고 글을 쓰니 나한테 아주 좋구나 싶다.

 

 내가 즐겨읽던 시집 하나를 누군가 애틋하게 사랑하는 손길로 쓰다듬은 글을 붙여 주었다면, 나는 어떤 넋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때에도 이 시집에 느낌글 하나 쓸 만했을까. 다른 이가 고운 사랑으로 느낌글 하나 썼다면, 나는 애써 내 사랑을 담는 느낌글을 쓰려 했을까.

 

 나는 새해 설날부터 아이한테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마음이나 다짐과 달리 잔소리를 하고야 만다. 잔소리를 하고 난 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또 속을 긁는다. 이 바보스러운 아버지는 얼마나 바보스러운 티를 풀풀 내며 철부지로 살아야 하느냐고 스스로 속을 긁는다. 나는 좀 사랑어린 손길로 우리 집식구를 보듬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살아갈 수 없을까. 자꾸자꾸 이렇게 뉘우치기만 하지 말고, 사랑어린 삶을 누려야 하지 않나.

 

 슬프구나 싶은 서평 때문에 괜히 골을 냈다. 괜히 골을 내면서, 나는, 나부터, 나야말로 골을 부리지 않는 삶을 일구며, 사랑을 돌보는 삶을 누리자고 또 다짐한다.

 

 누군가 나한테 거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달갑잖은 거울은 그야말로 달갑잖다. 아름다운 거울이 좋다. 눈물 흘리는 거울이 좋고, 웃음꽃 흐드러진 거울이 좋다. 새벽에 코피 쏟은 아이 곁으로 돌아가서 더 드러누워야겠다. 아이 손을 살며시 잡고 아이 이불을 여미고 아이 머리칼을 쓸어야겠다. (4345.1.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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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만두 빚는 할머니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왔다. 시외버스 여섯 시 반 걸린 먼길, 모두들 지치지만 어찌 되든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닿아 한 시간 지나고 두 시간 지나며 아이들은 기운을 싱그러이 되찾아 뛰고 기고 달리고 노래하고 논다.

 

 모두 잠든 깊은 밤, 둘째는 어김없이 으앵 하고 자지러지듯 운다. 옆지기가 오줌기저귀를 가는 내내 아주 서럽게 운다. 옆지기도 쉬를 누고 내가 아이를 안으며 어르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옆지기가 돌아와 안으니 비로소 울음을 그친다. 옆지기는 할머니가 혼자 만두를 빚는다고 이야기한다. 응? 이 말에 잠을 퍼뜩 깨고 일어난다.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다. 시계를 본다. 새벽 세 시. 부엌으로 가서 어머니 곁에 앉는다. 어머니는 들어가서 아이들하고 자라 말씀한다. 나는 부엌에서 어머니 곁에 쪼그려앉는다. 얇게 편 만두살을 집는다. 숟가락으로 속을 퍼서 담는다. 나란히 만두를 빚는다. 내가 빚는 만두는 어머니가 빚는 만두하고 모양이 같다. 다만, 어머니 만두가 아들 만두보다 조금 더 예쁘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아들보다 만두를 훨씬 오래 더 많이 빚었으니까.

 

 새벽 세 시 사십 분. 만두빚기를 끝낸다. 만두속은 많이 남는다. 나머지는 이듬날 더 빚기로 한다. 어머니는 잠이 오지 않아 혼자 만두를 빚으려 하셨단다. 참말일까? 참말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도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이 되기로 했다. (4345.1.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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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님과 알라딘 사이에 뭔 일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서로서로 저작권이 어떠한가를 제대로 바르게

알지는 못하는구나 싶어

이 글을 쓴다.

아무쪼록 모두한테 도움이 되길 빈다.

 


 저작권


 저작권을 제대로 알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는 2003년 9월부터 2006년 3월까지 이오덕 님 책과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비로소 저작권을 제대로 알았다. 이오덕 님이 살던 나날, 당신 책을 펴낸 출판사 모두 저작권을 어기면서 당신 책을 펴냈을 뿐 아니라, 몇 억에 이르는 글삯을 떼먹은 출판사까지 있는 줄 깨달았으며, 이 골치아픈 일을 푸느라 나 스스로 신나게 저작권 공부를 해야 했다.

 

 곰곰이 돌이키면, 나부터 그동안 저작권을 꽤나 ‘짓밟으’며 글을 썼다. 이와 함게, 내 저작권 또한 꽤나 ‘짓밟히’며 내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았다.

 

 책마을에서 일하며 책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 가운데 저작권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으로 적힌 저작권으로 살피자면, 어느 책에서든 ‘한 줄 한 낱말’을 따서 ‘내 글에 넣어서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출판권자한테 서면으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 전화로는 안 된다. 말로는 안 된다. 법으로 이렇다.

 

 ‘이름이 없다는 개인’이든 ‘언론사’이든 똑같다. 대통령이든 흙일꾼이든 똑같다. 누구라도 ‘글을 쓰면서 책에 적힌 한 줄’을 따서 쓰려 하면, ‘저작권자와 출판권자’한테서 허락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대가를 치러야(저작권 사용료) 한다. 라디오에서 책을 읽을 때에도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할 뿐 아니라, 서면으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교실에서 시를 읽어 줄 때에도 저작권자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뿐더러,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한다. 법으로 이렇다.

 

 신문기사도 저작물이다. 출판사에서 내놓는 보도자료, 이른바 신간소개글 또한 저작물이다. 인터넷책방에 올라온 ‘출판사 신간소개글’을 따서 내 글에 넣어 느낌글(서평, 리뷰)을 쓰려 한다면, 이때에는 반드시 출판사 편집자한테서 문서로 허락을 받아야 하고,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한다. 법으로 이렇다. 더욱이, 신문사에서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더라도 출판사한테 허락을 받고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옳다. 법으로 이렇다. 신문기사를 ‘나온곳(출처)’ 밝히고, 인터넷주소를 붙인다 해서 일이 풀리지 않는다. 신문사에서 이러한 글을 내용증명으로 ‘저작권 침해한 사람(신문기사 따서 쓴 사람)’한테 한 번 보내면, 이 내용증명으로 법 문서 효력이 나서, 법원에 명예훼손이라든지 저작권침해 소송을 걸면, 100% 피해배상을 해야 한다. 법으로 이렇다. 출판사에서는 신문사에 저작권침해소송을 걸 수 있다. 그러나, 신문사에 소송을 거는 출판사는 없다. 이렇게 하다가는 미운털 박힐 테니까.

 

 거꾸로, 내가 쓴 느낌글(서평, 리뷰)을 신문사에서 ‘내 허락을 안 받고 나한테 저작권 사용료 치르지 않고’ 실었다면, 이때에도 얼마든지 내용증명과 함께 피해배상 소송을 걸어 100% 내 권리를 되살릴 수 있다. 그뿐인가. 신문 1쪽 머릿기사로 사과글을 싣도록 할 수 있다. 법으로 이렇다.

 

 내가 ‘이름 안 난’ 사람이라서 피해배상을 못 받지 않는다. 피해배상을 받거나 물어야 하는 돈은 늘 같다. 다만, 법원에서 소송을 걸고 마무리짓자면 꽤나 오래 걸린다. 이러한 소송은 으레 저작권자(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빚은 사람)가 출판권자(출판사)한테 거는데, 출판권자는 흔히 3심까지 버틴다. 3심까지 버티면 피해배상할 돈이 부쩍 줄어들 뿐 아니라, 짧아도 서너 해나 대여섯 해까지 걸리기도 하니까, 소송을 거는 저작권자만 돈과 시간과 땀과 마음으로 끔찍하게 생채기를 받는다. 이리하여, 적잖은 출판사들, 게다가 이름났을 뿐더러 훌륭하다는 소리마저 든는 출판사들까지, 저작권법을 어기면서 저작권자 권리를 짓밟곤 한다.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기도 하고, 책마을 일꾼조차 잘 모르지만, 책을 내며 굳이 계약서를 안 써도 된다. 왜냐하면, 저작권법에서 지켜 주니까. 출판사에서 마련한 계약서에 도장을 쾅쾅 찍어도, 이 계약서는 저작권법에 따라 ‘아무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출판사에서는 저작권법에서 밝히는 대로 계약서를 마련하지 않고, 출판사한테 좋도록 계약서를 요리조리 고치니까, 이렇게 고친, ‘표준계약서 틀’에서 벗어난 계약서는 나중에 법정 소송으로 가면, 아무런 효력을 내지 못한다. 이를테면, 표준계약서 틀로 밝히는 저작권법으로는, 출판계약은 ‘출판권 기간 기본 3년, 자동재계약 없음’이다. 그런데 출판사들은 출판사 편의에 따라 ‘출판 계약 5년, 자동재계약’이라는 글월을 집어넣는다. 곧, 이러한 계약서는 처음부터 출판사가 법을 어긴 채 쓴 계약서이기 때문에, 아무 효력을 내지 못한다. 저작권자가 도장을 찍었어도 법정에서는 무효로 친다. 왜냐하면, 출판권자가 처음부터 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저작권자한테 법을 옳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저작권법은 어찌 보면 무섭다.

 

 저작권법은 찬찬히 살피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는’ 모든 사람들한테 마지막 버팀나무이자 든든한 울타리이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부디 저작권법을 스스로 익힐 노릇이다.

 

 스스로 저작권리를 지키고, 스스로 저작권리를 아낄 노릇이다.

 

 참말 마땅한 노릇인데, 내 느낌글(서평, 리뷰)이든 비평글이든 무슨 글이든, 글을 쓰면서 ‘내 글에 다른 사람(저작권자)이 쓴 글’을 다른 사람 허락을 받지 않고 실을 때에는 저작권법 위반이 된다. 저작권법 위반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저작권리 침해, 둘째, 사후보고와 사후보상 침해, 셋째, 성명표시 위반, 넷째, 인신공격.

 

 논문을 쓰면서 ‘다른 사람 논문 몇 대목 따오기’를 해도 저작권 위반이 된다. 반드시 다른 논문을 쓴 사람한테서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다만,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면서 글을 쓰자니 너무 번거롭거나 힘들거나 머리가 빠개지니까 이렁저렁 넘어가고, 서로서로 이렁저렁 넘어가면서 서로서로 저작권이 뭔지를 살피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살펴보자. 내가 인터넷책방에 올린 느낌글 저작권리는 누구한테 있을까? 인터넷책방에서 이래저래 규약을 세우고 뭐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이 저작권리는 글쓴이한테 있다. 인터넷책방 관리자가 이 글(저작물)을 쓰면서 저작권자한테 제대로 연락하지 않거나 저작물 사용료를 치르지 않을 때에, 저작권법에 따라 저작권자가 내용증명을 보낸 다음 가까운 법원에 피해배상 소송을 걸면 100% 인터넷책방이 피해배상을 해야 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시간과 품과 땀이 걸리며 마음이 다칠 뿐, 100% 피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저작권법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권법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법은 법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나는 ‘카피레프트’를 외치지 않는다. 내 글은 내 땀이요 내 삶이며 내 사랑이니까.

 

 그저 나는 내 온 삶을 들인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당신들 삶자리에서 좋은 사랑씨앗 뿌려 사랑열매 거두는 좋은 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카피라이트나 카피레프트는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을 누리면서 내가 지키고 싶은 좋은 꿈과 사랑을 착하고 예쁘게 지키고 싶다. 살아가다 보니 이래저래 하면서 법을 좀 골때리도록 배워야 했을 뿐이요, 법을 곰곰이 배우다 보니, 내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가 하는 길을 천천히 찾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말잔치를 떠나, 나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꿈을 실은 글을 빚을 수 있으면 즐겁다. 나눌 만한 글을 쓸 때에 즐겁다. 돈을 버는 글을 쓰면 덧없다. (4345.1.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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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20 10:54   좋아요 0 | URL
저작권법이 뭔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된장님의 글을 읽어보니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군요. 인터넷의 발달과 블로그의 등장으로 사실상 '1인 출판'과 '1인 미디어'의 시대가 열리면서 (한편으로는) 법이 너무 뒤처져서 현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가졌었는데, 된장님의 글을 읽어보니 '법은 법'이다 싶군요. 인터넷 공간에서 한때는 '퍼나르기'가 무슨 미덕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퍼져나갈 때도 있었고, 이 곳 알라딘에서조차 '펌글'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던 기억도 새삼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이번 일을 계기로 '남의 권리를 제대로 존중하고 지켜줘야 내 권리도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된장님 글의 마지막 문장은 정말 명언이네요.)

숲노래 2012-01-20 11:55   좋아요 0 | URL
'한국저작권위원회'라는 곳이 있어요.

이곳에서 저작권법 '전문'을 꼼꼼히 읽어 보시면 여러모로 저작권법이 무엇인지 조금은 짚을 수 있어요.

이런 다음, 저작권위원회에서 '표준으로 만든' 출판계약서를 읽으면, 출판사들이 얼마나 멋대로 저작권법을 어기면서 계약서를 만드는가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출판사들이 쓴 계약서는 99% 이상 '원천무효'가 된답니다. (그런데 이건, 책을 내는 분들만 알 수 있겠네요. 이궁. 그래도 알라딘서재에는 책을 내는 분이 퍽 있으시니까, 부디 저작권위원회 표준출판계약서를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이러한 여러 법조문과 표준계약 사항 들을 보면, 온라인매체나 포털사이트에서 만드는 규정과 규약 또한 '소비자인 우리들'이 법으로 따질 때에 우리가 누릴 권리가 무엇인가를 환히 알 수 있어요.

저작권법에는 어떠한 '편의'도 봐주지 않아요. 오직 '법'에 따라 모든 사람한테 고르게 '권리 지키기'를 할 뿐이에요.

다만, 이 저작권법을 잘 써야지, 악용하면 그야말로 입에 재갈을 물리는 꼴이 되기 때문에 몹시 위험할 수 있어요. 우리 나라는 기본법을 살피면, 법으로는 꽤 잘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들 편의라든지 다들 그렇게 하니까 따라한다는 투로 하면서, 법을 어기거나 비트는 일이 너무 많기 일쑤예요.

내가 어느 매체에 쓴 글을 알라딘서재에 올리려 한다면, '매체에 실릴 때'에 신문사에서는 신문사대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바꾸니까, 매체에 보내기 앞서 '내가 쓴 원글'을 올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_-;;;;

그러니까, 로쟈 님은 굳이 어느 매체에 올린 글이라 밝히지 말고, 인터넷주소도 걸지 않으면 돼요. 그냥 로쟈 님이 쓴 원글 그대로 알라딘서재에 스스로 띄우면 저작권법이고 뭐고 아랑곳할 일이 없기도 하답니다 @.@

..

더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내 새로운 글'을 쓰면 돼요. 다른 사람 글을 인용하느라 땀흘리지 말고, 내 생각을 밝히면 되지요.

그리고, 저작권법에서 인용 예외에 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인용하는 일은 '저작권 인용'에서 예외가 돼요...

oren 2012-01-20 13:11   좋아요 0 | URL
세세한 살명을 덧붙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나의 창작글'이야 문제가 안되겠지만, 저같은 경우는 창작글을 써봐야 대체로 '잡문' 수준밖에 쓸 수가 없으니, 자꾸만 훌륭한 글과 좋은 글들을 찾아 인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템플턴경의 평생 결심 한가지가 "출판하고 싶지 않은 글은 절대 쓰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들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는데,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조용히 책이나 읽어야 하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마립간 2012-01-20 17:3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입니다.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로쟈님의 글에 대한 알라딘의 해석은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학계에서는 자신이 쓴 글이라고 해도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자기 표절'이라고 하며 저작권의 침해로 보는데,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신문사에 기고한 글이 아래*와 같은 해석이 나왔을까요. 특정 신문사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된장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쓴 원 글'을 게제해서 저작권 시비를 피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여쭙고 싶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표절 시비와 무관할까하는 의문이 남아 글을 남깁니다.
* http://blog.aladin.co.kr/mramor/5368534 ; Box안에 있는 알라딘의 답변

숲노래 2012-01-20 18:34   좋아요 0 | URL
내가 쓴 글을 놓고까지 신문사가 그렇게 따지려 들면, 이렇게 하면 그런 그물은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신문사에서는 신문에 글을 앉힌 모양새를 갖고 '편집권'이라고 따질 수 있는 노릇이니, 글을 쓴 사람은 신문에 앉혀지지 않은 원글 모습 그대로(텍스트로만) 올리면 아무런 시빗거리조차 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극한 상황을 이야기한 대목인데, 다행스럽게도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고, '내가 쓴 글은 그렇게 올려도 괜찮다'고 알라딘에서 답변해 주었으니 참 고마운(?) 셈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마립간 2012-01-21 09:06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전화기 울리는 소리 기다린다

 


 전화기 울리는 소리 기다린다. 지난주 화요일에 나온다고 하던 내 열한째 책을 우리 시골집으로 몇 부쯤 부치면 좋을까요, 하는 이야기 담은 전화를 거는 출판사 일꾼 목소리 실릴 전화기 울리는 소리 기다린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까, 싶다가도 기다리자 기다리자 하면서 하루 흐르고 이틀 지나 이레가 된다. 며칠 뒤면 설인데 설까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을까. 인쇄소에는 지난 12월에 넘겼다는데 새해 1월 17일이 되도록 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된 셈일까.

 

 아마, 책마을 일꾼도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테지. 눈이 빠지게 기다리지만 영 깜깜해서 도무지 전화를 걸 수 없겠지. 인쇄소 일꾼은 너무 바빠 스무 날 넘도록 책을 찍을 수 없을까. 인쇄소 일꾼은 너무 바쁘니 집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땀을 뻘뻘 흘릴까.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부터 조마조마 기다리는데, 낮 네 시, 드디어 전화가 온다. 출판사 일꾼 목소리가 썩 좋지 않다. 지난 12월 끝무렵부터 올 1월 17일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을까. 반가운 책이 나와 기쁠 테지만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속이 끄응 탔겠지. 이렇게 오래 기다린 보람을 부디 예쁘며 신나게 누릴 수 있기를 빈다. (4345.1.17.불.ㅎㄲㅅㄱ)

 

..

 

 아무튼, 아직 책방에는 안 들어갔고, 이번 주말에는 책이 들어가리라 믿어요... 이궁...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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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볼 수 없는 눈

 


 나는 눈을 뜨고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나는 내 바깥이 어떠한가를 하나하나 가만가만 돌아봅니다. 그러나, 막상 내 눈이 어떠한 모습이고 빛깔이며 무늬인가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나는 내 앞이나 옆이나 둘레에 있는 무언가를 살펴볼 수 있지만, 정작 내 몸뚱아리를 찬찬히 살피거나 훑거나 가늠하지 못합니다.

 

 나는 바라봅니다. 나는 나 아닌 남을 바라보면서 내 삶을 꾸립니다. 나는 살펴봅니다. 나는 나 아닌 어딘가를 들여다보면서 내 삶을 꾸립니다. 남들을 바라보는 나는 남들을 거울처럼 비추며 나를 되새기는 삶일까요.

 

 머리에 달린 눈으로 내 눈 내 몸 내 삶을 볼 수 없다면, 마음에 깃든 눈으로 내 눈 내 몸 내 삶을 볼 수 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왼눈과 오른눈으로도 내 눈 내 몸 내 삶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온몸과 온마음으로 내 눈 내 몸 내 삶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손가락을 움직이며 바라봅니다. 내 발바닥을 움직이며 바라봅니다. 내 살갗으로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바라봅니다. 내 귀로 소리와 결을 느끼며 바라봅니다. 내 입과 혀로 맛을 느끼며 바라봅니다. 가슴이 콩콩 쿵쿵 뛰면서 느끼는 모든 이야기들을 바라봅니다.

 

 내가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는 아무런 삶도 사랑도 사람도 보지 못하는 꼴입니다. 내가 나를 볼 수 있을 때에, 내 곁에 있는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을 볼 수 있는 셈입니다.

 

 깊은 밤 달빛이 좀 여리구나 싶어 생각해 보니, 곧 설이기에 아직은 그닥 밝지 않겠구나 싶으면서, 시골마을에도 곳곳에 등불이 있어 달빛을 가리는구나 싶습니다. 그야말로 환한 보름달은 등불마저 잠재울 만큼 밝지만, 오늘은 달빛이 전기불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니, 이기지 못하는 달빛이 아니라, 전기불빛에 스러지거나 가립니다.

 

 달빛이 비추는 마당이 좋습니다. 달빛이 잠자며 캄캄한 마당이 좋습니다. 전기불빛 스미는 마당은 슬픕니다. 전기불빛이 우리 마당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까지 흘러들면 슬픕니다.

 

 목숨을 살릴 수 있을 때에 빛입니다. 햇빛과 달빛을 먹어야 닭알이든 오리알이든 튼튼하고 씩씩하게 깝니다. 햇빛과 달빛을 먹어야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튼튼하고 씩씩하게 목숨을 잇습니다. 나는 햇빛을 마시고 달빛을 먹으며 햇빛을 바라보고 달빛을 누리고 싶습니다. (4345.1.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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