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손

 


  뒤꼍에 묵히는 땅 가운데 두 평 즈음 쓰레기를 캐고 돌을 고른 자리는 갖가지 풀이 신나게 자랐다. 한동안 손을 못 대고 지내다가 어제 비로소 아픈 몸을 이끌고 풀을 뽑고 잔돌을 촘촘히 고른다. 작은 고랑을 짓고 손가락 구멍을 낸다. 첫째 아이 손바닥에 씨앗을 톡톡 올린다. 마무리 씨앗심기는 아이 몫. 씨앗을 올린 한손과 씨앗을 집는 다른 한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는 예쁜 일을 예쁜 손으로 해낸다. 땅을 일구기까지 어버이가 품을 퍽 많이 들여야 하나, 바로 이렇게 씨앗을 심는 손을 바라볼 수 있다는 보람이 있으니 즐겁다. 아이 손바닥을 거쳐 좋은 기운이 땅으로 스며들었으리라 믿는다. (4345.6.2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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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앓고 난 뒤

 


  앓은 지 엿새가 지난다. 둘째도 첫째도 나도 몸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않는다. 다만, 처음 앓던 날보다는 조금 수월하기는 하다. 처음 앓던 날과 이튿날과 다음날 또 그 이듬날까지 무엇 하나 할 수 없도록 온몸이 아파 말조차 나오지 않으며 괴로웠다면, 엿새째 되는 오늘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어지러우며 몸이 휑뎅그렁하지만, 한두 시간이나마 잠이 들기는 했다. 지난 닷새 동안 한잠조차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지난 닷새 동안 한잠도 안 자려 했는지 모른다. 스스로 왜 아파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잠자리에서까지 나 스스로와 싸우는 나날이었으리라 느낀다. 내가 심은 슬픈 미움싹이나 바보싹이랑 싸우는 나날이요, 내가 뿌린 궂은 생각싹을 맑고 밝게 다스리려고 용쓰는 나날이었다고 느낀다.


  내가 모르게 생기거나 일어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속에서 나 스스로 자꾸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움직이려 애쓴다. 내 꿈을 나 스스로 빚으려고 용쓴다. 내 꿈이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다스리려 힘쓴다.


  얼마쯤 걸릴까. 얼마쯤 걸려야 아픈 몸을 추스르면서 아픈 생각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을 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말문을 예쁘게 틀 수 있으리라. 스스로 생각을 빚을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책 한 줄 읽더라도 깊고 너른 꿈누리를 펼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은 앓고 나면 무럭무럭 자란다는데, 첫째 아이도 여러 날 앓으면서 부쩍 자라곤 했는데, 두 아이 모두 한결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나려고 앓을 테지. 나 또한 두 아이 어버이라 하지만 아직 철이 덜 든 어른이기에, 훨씬 예쁘며 한껏 푸른 빛을 뿜고자 여러 날 앓으며 새롭게 자라야 하는가 보다. (4345.6.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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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구름 지나가는 하늘

 


  비구름 지나가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비구름은 천천히 내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 왼쪽은 저 멀디먼 북녘이요,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 오른쪽은 새삼스레 멀디먼 남녘, 곧 태평양입니다. 비구름이 태평양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우리 집에서 칠 킬로미터를 나가면 맞이하는 바다가 태평양 끝자락이네 하고 느낍니다.


  새들 노랫소리 울리는 숲속 바람이 마당을 스치며 집안으로 살포시 깃듭니다. 첫째 아이가 먼저 잠을 깨어 일어납니다. 같이 마당에 내려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눈이 부시게 파랗습니다. 아침 여덟 시 햇살인데 눈을 바로 뜰 수 없습니다. 좋은 하늘이기에 햇살은 짙게 드리웁니다. 나를 살찌우는 모든 밥과 꿈과 이야기는 바로 이 햇살 한 줄기에서 비롯하겠지요. (4345.6.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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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바라는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읽으라 했기에 읽을 수도 있는데, 누군가 이녁더러 이런 책을 읽으라 말했기에 읽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읽을 만하리라 여기니까 읽지, 억지스레 읽지는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꼭 읽으라며 내민 책이기에 하는 수 없이 읽는다 하더라도, 교도소에서 살아남자는 뜻으로 읽는다면, 이러한 뜻 또한 스스로 바라는 넋입니다.


  남이 시켜서 할 수 있는 내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바라서 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도 글읽기도 스스로 마음으로 우러나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지 않을 때에는 글 한 줄 못 쓰고 글 한 줄 못 읽습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와 배가 고프다 느끼기에 밥술을 듭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지 않으면 어떠한 밥상 앞에서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삶을 읽는 사람입니다. 더 좋은 삶을 읽을 수 있으나, 더 나쁜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영부영 삶을 흘리면서 어영부영 아무 책이나 함부로 읽기도 할 테고, 다부지게 삶을 아끼면서 어느 책이든 알차게 받아들이거나 살피기도 합니다. 곧, 스스로 삶을 어떻게 아끼려 하는가에 따라 책읽기가 달라집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살피며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또한 제대로 안 살피고 제대로 안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쓰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아끼고 좋아하며 빛내고픈 삶을 글로 씁니다. 책쓰기란 언제나 삶쓰기일밖에 없습니다. 아름답다 느낄 만한 삶이든 엉터리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삶이든, 어떠한 글이든 삶을 담는 글이 됩니다.


  책을 읽으며 내 이웃이 어떠한 삶을 어떠한 넋으로 일구는가 하고 들여다봅니다. 글을 쓰며 나 스스로 오늘 하루를 어떠한 꿈으로 누렸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어 글을 쓰고 책을 읽습니다. 나는 사랑을 꿈으로 이루고 싶어 글을 쓰며 책을 읽습니다. 나는 사랑을 맑은 빛으로 보살피고 싶어 글을 쓰는 한편 책을 읽습니다. 좋은 삶을 좋은 넋으로 누리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좋은 말마디에 실어 글로 빛내고 싶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노래하는 제비들은 여름비 내리는 들판을 마음껏 날아다닙니다. 비오는 날 먹이를 찾느라 훨씬 부산스럽게 다녀야 할 테지요. 나는 이른새벽에 뒷간에서 똥을 누며 제비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뒷간에 앉아 한손에는 책을 들어 펼치면서도 한귀로는 제비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쓰는 글은 아무나 읽을 수 없다고 문득 깨닫습니다. 아니, 내 글은 아무한테나 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내 글을 읽히고 싶습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 삶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돌볼 때에 흐뭇할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만 내 글을 읽히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고맙게 맞이하면서 즐거이 누리고 예쁘게 마무리하고픈 꿈을 키우는 사람한테만 내 글을 읽히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내 글에 지식이나 정보를 담고프지 않습니다. 내 글을 읽을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깜냥과 슬기를 북돋아 이녁 삶을 곱게 살찌울 수 있기를 빕니다. 내 글 담긴 책을 장만하여 읽을 사람들 누구나 이녁 스스로 이녁 보금자리를 곱다시 돌보면서 온 하루 흐드러지게 밝힐 수 있기를 빕니다. 이루고 싶은 꿈을 꾸면서, 나누고 싶은 사랑을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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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84 : 전남 고흥에서 띄우는 편지

 


  이웃집 할아버지가 맨발로 경운기를 몹니다. 경운기를 길가에 대고는 길가에 펼쳐 말리던 마늘을 그러모아 그물주머니에 담습니다. 네 식구 천천히 거닐며 마실을 하는데, 이웃집 할아버지가 부릅니다. 이웃집 할아버지는 당신 딸아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니 당신 딸아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지 않겠느냐 말씀합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는 이 마을 자그마한 어느 한 사람 이야기를 듣습니다. 1960년에 태어나 1984년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만 어느 ‘시골학교 교사’ 이야기를 듣습니다. 올 2012년 5월 30일에, 면소재지에 있는 도화중학교 한켠에 ‘무명교사 예찬비’를 옮겼다며, 이 빗돌이 예전에는 당신 딸아이가 교사로 일하던 흥양초등학교 한켠에 있었다고, 아마 한국에 ‘무명교사 예찬비’가 선 곳은 여기 한 군데만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웃집 할아버지 말씀을 들은 이튿날, 자전거수레에 두 아이를 태우고 면소재지 중학교로 찾아갑니다. 학교 앞문 오른쪽에 빗돌이 있습니다. 빗돌에는 참말 ‘무명교사 예찬’이라는 글월이 새겨졌습니다. ‘핸리 반 다이크’라는 분이 쓴 글이라 하는데(맞춤법으로는 ‘헨리’가 맞으나 빗돌에는 ‘핸리’로 적혔습니다), 빗돌은 1985년 2월 24일에 새겼습니다. 이웃집 할아버지네 딸아이는 시골 초등학교를 나와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되었고, 이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는 가난한 아이들을 도우려고 이녁 월급봉투를 쪼개었으며, 딸아이가 그만 숨을 거둔 뒤로는 할아버지가 딸아이 뜻을 이어 스물일곱 해 동안 장학금 나누기를 고이 이었다고 합니다.


  이름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이 안 알려졌을 뿐인 시골 교사라 해야 맞겠는데, 시골 교사도 시골 교사이지만, 시골 교사인 딸아이 넋을 고이 이어 ‘흙을 일군 품’으로 시골 아이들한테 장학금을 마련한 시골 할아버지도 시골 할아버지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무명교사 예찬’이 있다면 ‘무명농사꾼 예찬’도, 조용히 흙을 일구는 사람을 기리는 노래도 있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다가 전남 고흥으로 시집가서 ‘흙일꾼 옆지기’로 지내다가 늦깎이로 교사가 되어 시골학교에서 가르치는 조경선 님이 쓴 교육일기입니다. 시골 교사 조경선 님은 “교사도 학부모들도 적극적으로 대학 평준화를 위한 활동을 함께 해 나갔으면 좋겠다.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끔찍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기 힘들(83쪽)”겠다고 얘기합니다. “(고흥)군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이 외부 도시로 진학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주말마다 서울의 입시학원 강사를 섭외해 소수의 아이들에게 입시 과목을 수강하도록(81쪽)” 한답니다. “농촌의 아이들은 서울이라는 도시로 가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107쪽)” 한답니다.


  군청에서 돈을 대어 ‘이름난’ 학원강사를 불러 입시교육을 시켜 준들, 이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모두 큰도시 대학교로 나아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돈이란, 꿈이란, 사랑이란, 공부란, 책이란 무엇일까요. (4345.6.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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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8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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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9 0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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