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사이 (사진책도서관 2016.4.24.)

 ― 전남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숲노래+한국말사전 배움터’



  낮이 차츰 길어집니다. 바야흐로 따스한 바람이 싱그러운 사월 한복판을 지나갑니다. 네 시가 가까운 때에 골짝마실을 하면서 한 시간 즈음 숲바람을 쐽니다. 숲바람을 실컷 쐬고서 서재도서관으로 갑니다. 작은아이는 자전거가 도서관에 닿으니 수레에서 안 내립니다. 아무래도 낮 네 시를 지나고 다섯 시가 될 무렵까지 낮잠을 건너뛰고 논 탓에 기운이 다 빠진 듯합니다.


  작은아이가 수레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깊이 잠든 사이에 조용히 도서관 한쪽을 새로 치우면서 꾸밉니다. 고흥에서 이 도서관을 꾸린 지 여섯 해째가 되어도 ‘아직도 치울 것이 남았나?’ 하고 여길 만한데, 빗물이 벽을 타고 새는 자리 때문에 책꽂이랑 책상을 또 옮겨야 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자리를 새로 잡거나 바꿉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책꽂이하고 책상을 옮기며 새 자리를 잡는 동안 큰아이는 얌전히 책을 읽습니다. 큰아이는 뛰놀기·그림그리기·책읽기·흙놀이·이야기, 이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다른 여러 가지 놀이를 해야 하루를 잘 보냈다고 여깁니다.


  큰아이가 얌전히 책을 읽는 모습을 문득문득 바라보다가 생각해 봅니다. 나는 하루 동안 무엇을 하면 하루를 잘 보냈다고 여길 만한가 하고.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도서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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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놀이 (사진책도서관 2016.4.15.)

 ― 전남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숲노래+한국말사전 배움터’



  도서관 어귀에 갓꽃하고 유채꽃이 어우러집니다. 갓꽃도 유채꽃도 마음껏 자랍니다. 노랗게 물들며 춤추는 이 꽃자리를 본 아이들은 노란물결에 뛰어들고 싶습니다. 어른이 노란물결이 들어가면 고개가 빼꼼 보일 테지만, 아이들이 노란물결로 들어가면 머리도 몸도 안 보입니다. 빽빽하게 돋은 꽃밭으로 뛰어든 두 아이는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놉니다.


  딸기꽃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밉니다. 사월은 딸기풀이 하얀 꽃송이를 실컷 떠뜨렸다가 저무는 달이에요. 곧 오월을 맞이하면 이때부터 딸기알이 발갛게 익어요. 이러면서도 오월에도 하얀 딸기꽃이 새로 피고, 앞서 피었다가 진 딸기꽃이 지면서 열매가 익는 동안 자꾸자꾸 꽃이랑 열매가 이어집니다.


  그 어떤 책으로도 알려줄 수 없는 재미난 놀이를 꽃밭이 알려줍니다. 그 어떤 만화나 영화도 가르칠 수 없는 신나는 놀이를 꽃밭에서 몸소 누립니다. 아이는 누구나 놀이를 하면서 자란다는 말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나는 어릴 적에 실컷 놀면서 씩씩하게 자랄 수 있었고, 오늘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실컷 놀면서 씩씩하게 자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도서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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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바람 (사진책도서관 2016.4.7.)

 ― 전남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숲노래+한국말사전 배움터’



  도서관 어귀에서 자라는 아왜나무 둘레로 갓꽃하고 유채꽃이 한껏 돋습니다. 경관사업을 하느라 논에 심은 유채씨가 바람에 날려서 깨어난 유채가 있고, 먼 옛날부터 이 고장에서 돋은 갓이 있습니다. 꽃대가 오르면서 잎이 오그라들 무렵에는 갓꽃인지 유채꽃인지 가늠하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노란 꽃송이가 한껏 흐드러질 적에는 그저 노란 물결입니다.


  갓꽃하고 유채꽃이 남실거리다가 꽃송이가 모두 떨어지고 씨앗을 맺을 무렵에는 잔바람에도 줄기가 꺾이곤 합니다. 꽃대가 설 적에는 줄기가 야무지다면, 씨앗을 맺으면서 어느덧 줄기가 마르거든요. 이러면서 갓이나 유채는 어느새 땅바닥에 쓰러져서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사람이 손을 써서 풀을 밀어내어 땅을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루아침에 한결 보기 좋게 밭이나 땅을 다스릴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밀어서 갈아엎은 자리에서 풀줄기는 좀처럼 썩지 못합니다. 사람이 밀지 않고 풀이 저 스스로 쓰러진 자리에서는 한 해가 채 가기 앞서 풀줄기가 모두 썩어서 바스러집니다.


  왜 이렇게 되는지 아리송했는데, 땅거죽에 사는 풀벌레와 작은벌레가 풀줄기를 갉아먹으면서 없애 주기 때문이더군요. 먼저 땅거죽 풀벌레하고 작은벌레가 풀줄기를 갉고, 다음에는 땅속에 있는 지렁이를 비롯한 조그마한 목숨들이 ‘땅거죽 풀벌레가 갉은 것’을 다시 삭혀서 흙으로 바꾸어요. 사람이 맨눈으로는 이 흐름을 알아채거나 알아보기 어렵지만,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수많은 목숨붙이가 바지런을 떨면서 흙과 땅과 숲을 지키는 셈이에요.


  삼월에는 삼월 꽃바람이 불고, 사월에는 사월 꽃바람이 붑니다. 《나무수업》하고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라고 하는 책을 즐거우면서 고맙게 읽습니다. 나무하고 씨앗이 있는 곳에서 싱그러운 살림이 피어납니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도서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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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물과 선거 (사진책도서관 2016.4.13.)

 ― 전남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숲노래+한국말사전 배움터’



  국회의원을 뽑는 날입니다. 나와 곁님은 ‘미리 하는 선거날’에 한 표를 찍었습니다. 어제는 뒤꼍에 나무 한 그루를 옮겨심었고, 오늘은 어제 구덩이를 두 차례 깊게 파고 나무를 나르느라 고단한 등허리를 가만히 쉬어 줍니다. 비가 그친 저녁에 곁님 먹을 고기를 사러 면소재지에 다녀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서 빗물을 훔칩니다. 도서관이 깃든 건물은 많이 낡아서 해마다 빗물이 더 많이 샙니다. 빗물이 새는 데에 맞추어 책꽂이 자리를 바꾸거나 옮기기도 했는데, 새로운 자리에서 옴팡지게 빗물이 새니, 책꽂이를 또 옮겨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오늘 선거에 나온 분 가운데에는 우리 도서관 지킴이가 한 분 계십니다. 사진책도서관이라고 하는 책터를 열려고 할 즈음 맨 처음으로 도서관 지킴이가 되어 주신 분인데, 그무렵에 평생지킴이로 해 주셨어요. 갓 사진책도서관을 열 무렵에 목돈이 들 일이 많았는데 큰 힘이 되었지요. 인천에서 처음 도서관을 열면서 책꽂이를 더 들이고, 유리창이나 이런저런 곳을 손보면서 드는 돈을 고맙게 잘 쓸 수 있었어요. 우리 도서관 지킴이 가운데 한 분인 고운 이웃님은 서울 마포 을에 후보로 나오셨고, 씩씩하게 뽑히셨습니다.


  사월비가 지나간 자리는 사월볕이 드리우면서 한결 싱그러우면서 푸릅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심은 씨앗은 하나둘 싹이 틉니다. 우리 집 나무에도, 마을 나무에도, 조롱조롱 새싹이 트고 새잎이 돋습니다. 먼발치에서 도서관 지킴이로 지내 주시는 이웃님들 모두 이녁 보금자리와 살림자리에서 저마다 뜻하는 일을 슬기롭고 즐겁게 이루시리라 생각해요. 종이로 된 책에서도 슬기를 얻고,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으로도 기쁨을 얻으며, 밥짓기나 옷짓기나 아이키우기 같은 손길에서도 노래를 얻으리라 생각해요. 시골마을에 깃든 이 도서관에서 태어나는 따사롭고 너그러운 바람이 골골샅샅 보듬을 수 있기를 빕니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도서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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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유채꽃 (사진책도서관 2016.4.5.)

 ― 전남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숲노래+한국말사전 배움터’



  군에서 경관사업을 하며 늦가을에 유채씨를 논에 뿌리도록 합니다. 바람을 타며 논둑이나 길가에서 돋는 유채는 잎도 줄기도 꽃도 모두 크고, 들유채는 한겨울이나 늦겨울에도 피어나는데, 논유채는 사월로 접어들며 꽃물결을 이룹니다. 이제 막 터져서 가볍게 노란 물결을 이루는 유채논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도서관 어귀에서 자라는 갓꽃을 함께 바라봅니다. 나는 이제 유채꽃하고 갓꽃이 어떻게 다른가를 가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두 가지 꽃을 가르지 못합니다. 아마 꽃만 보면 알기 어렵겠지요. 여느 눈으로는 매화꽃하고 벚꽃을 가리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유채인가 갓인가는 잎을 보면 알 만해요. 잎빛이 서로 다르고, 잎결도 서로 달라요. 꽃대하고 꽃은 거의 비슷하지만요. 그리고 유채는 꽃대를 꺾어서 겉껍질을 벗겨서 씹어 보면 갓보다 한결 부드러운 맛이에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매화꽃하고 벚꽃은 냄새가 다릅니다. 매화나무하고 벚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이니까요. 유채꽃하고 갓꽃도 냄새로 가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유채잎은 물맛 같은 부드러움이라면 갓잎은 알싸하게 쏘는 맛이니,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가만히 살펴서 가릴 수 있으리라 느껴요.


  사뿐사뿐 봄나들이를 하듯이 들길을 걸어서 도서관으로 갔다가, 다시 가볍게 봄노래를 부르고 달리기를 하면서 들길을 돌아 집으로 옵니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도서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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