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에 마음쓰기 - 골목길 거닐며 우리 말 생각
 (12) 투표의 즐거움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투표하는 곳으로 곧바로 가지 않습니다. 먼저 집 앞 헌책방에 찾아갑니다. 출판사에서 보도자료로 보내준 책 세 권을 드립니다. 저한테는 쓸모가 없을 테지만, 누군가한테는 재미있는 책이 될 수 있겠지요. 어제 들렀던 막걸리집으로 갑니다. 잔돈이 없어서 이천 원을 치르지 못하고 나왔기에 오늘 드리러 갑니다. 가게 문이 닫혀 있습니다. 아직 안 여시는 듯합니다. 창영초등학교 옆 분식집 앞을 지나갑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오늘은 학교가 쉬니까 학교 앞 분식집도 쉽니다. 백 해가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학교 건물 옆에 조촐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를 봅니다. 언덕배기를 지나고 나오는 골목집마다 대문 위며 울타리 앞과 위며 꽃그릇이 가득 놓여 있습니다. 꽃그릇마다 새줄기가 솟고 새잎이 돋습니다. 노란 꽃과 잇빛 꽃과 발그스레한 꽃이 올망졸망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릅니다만, 보기에 좋아서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 투표의 즐거움은 물론! 다양한 문화체험까지∼ (열여덟째 국회의원 뽑기를 하면 한 장씩 나누어 주는 ‘투표확인증’에 적힌 말)




 빈 차가 서 있지 않으니 널찍하게 느껴지는 골목을 걷습니다. 동사무소 가는 간판이 서 있습니다. 아차, 이제는 ‘동사무소’가 아니지요. ‘주민센터’이지요. 동사무소 이름에 영어를 섞어서 쓰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전국 동사무소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간판이 바뀌고 푯말이 바뀌고 길그림이 바뀝니다. 이름 하나 갑작스레 바뀌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갑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에다가! 온갖 문화를 누리기까지∼




 걷다 보니 어디선가 밥 냄새가 나는 듯. 뭔가?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살피니, 아하, 금창동 사무소 앞에 뻥튀기 차가 서 있군요. 뻥튀기 냄새가 온 골목에 퍼지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골목 안쪽 꽃그릇에 이팝나무 한 그루 조그맣게 자라고 있습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도심지 한복판에 있는 헌 꽃그릇에 자라는 이팝나무라니! 볕을 얼마 못 쐴 듯한 자리에 자라는 이팝나무.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사진 한 장에 살그머니 담습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 더하기! 듬뿍듬뿍 맛보는 문화∼

 동사무소 계단 앞입니다. 굴렁걸상을 밀어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옆으로 나 있기는 한데, 이런 계단을 왜 만들어야 했을까 잠깐 생각합니다. 계단 없이 살짝 비알을 주기만 해도 빗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을 텐데.

 계단을 하나 둘 셋 밟고 들어섭니다. 문간에 풍선으로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투표하는 곳에 풍선문이라, 국회의원 뽑기를 동네잔치로 즐기자는 소리일 테지!




 신분증을 보여주어 표를 받고, 흰종이와 푸른종이를 한 장씩 받은 다음, 6번과 13번을 꾹꾹 누릅니다. 반으로 접어서 흰상자와 푸른상자에 넣습니다. 앞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종이 한 장을 건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쓸 수 있다는 ‘투표확인증’입니다. 주차장에서도 쓸 수 있다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책방에서는 쓸 수 없군요.

 투표확인증은 주머니에 쑤셔넣습니다. 둘레를 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투표확인증을 한 손에 들고 휘저으면서 걸어다닙니다. 이분들한테 이 투표확인증을 쓸 자리가 있을는지? 차 없는 사람은 어디에 쓸는지? 아, 우리 동네에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있으니 거기서 쓸 수 있을 텐데, 그곳은 어른 한 사람이 500원인데. 뭐, 동네에 미술관이라도 있고(창영동에는 ‘스페이스 빔’이 있으나 거의 다 공짜이니 쓸 수도 없군!), 박물관이라도 있어야지. 우리 나라에 지정문화재가 얼마나 있다고, 그와 같은 곳에서 쓰나? 국립공원 들어가는 삯도 2007년부터는 사라졌는데, 차라리 극장값 깎아 주기라도 하든지.




 한낮에도 전기를 켜 놓아야 하는 동사무소를 나오니, 바로 앞은 기와집. 기와집 안쪽 마당에는 우람하게 자라난 목련나무 한 그루. 하얀 꽃이 사랑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에 길너비 50미터가 넘는 끔찍한 산업도로를 내 버리면, 이 기와집은 문화재도 뭣도 아닌 ‘낡아빠지고 지저분한 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아파트로 바뀔 테지요. (4341.4.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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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외보 한 곳에서 글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마땅한 벌이가 없이 사는 형편으로는, 조그마한 글삯이라도 주는 글 청탁이 몹시 반갑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글에다가 사진까지 보내 주어도 다리품 값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데요.

 날이 갈수록 디지털사진기가 널리 퍼지는 가운데, 사진 저작권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번 사외보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 헌책방을 다니며 사진 찍을 때마다 필름값 나가는 소리에 주머니가 후줄근하고, 찍은 필름은 현상을 하고 필름스캐너를 돌려서 하나하나 파일을 만들어 놓느라 눈알이 빙글빙글 돌고 팔이 저립니다.

 이런 일은 돈을 벌자고 한 일이 아니기에, 헌책방 사진을 찍고 글을 남겨 놓은 대가를 딱히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사외보든 신문사든 잡지사든, 이분들이 누군가한테 글 하나 써 달라고 할 때에는, 글 한 꼭지를 놓고 원고지 장수를 헤아리며 글삯을 주는데, 이 글과 함께 쓰는 사진을 놓고도, 사진 한 장에 얼마쯤 품값을 매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어제 낮, 이번에 저한테 글을 청탁한 사외보에서 다시 연락이 옵니다. 헌책방 찾아가는 길그림을 하나 넣으면 좋겠다면서. 길그림이요? 좋지요! 길그림까지 곁들이면 ‘헌책방 이야기’는 글과 사진과 그림이 어우러져서 멋진 작품으로 태어나리라 봅니다. 더욱이, 헌책방에서 만난 책 겉그림을 스캐너로 긁어서 넣으면 한결 멋있을 테고요. 그런데, 사외보 엮어내는 곳에서 저한테 줄 수 있다는 일삯은 오로지 ‘글쓴 대가’ 한 가지.

 사진을 찍는 데에 들어가는 품과 시간, 책을 사는 데 들어간 돈, 필름과 책을 스캐너로 돌리는 데 들어가는 품과 시간, 마지막으로 헌책방 길그림을 그리는 데에 들어가는 품과 시간 ……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일삯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네 가지는 자원봉사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ㄱ방송국에서 사진 좀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무슨 사진인가 하니, 제가 있는 이곳 인천 배다리에서, 인천시 공무원들이 ‘너비 50미터가 넘는 산업도로를 동네 한복판을 꿰뚫으며 놓으려고 하는 짓’을 놓고, 이와 얽혀서 찍은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을 꾸준히 찍어 놓은 사진을 100장쯤 보내 줍니다. 지난주에는, 인천 지역 신문사들에서, ‘산업도로 반대 농성을 하고 몸싸움을 하며 공사강행을 막는 모습’ 찍은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웃으면서, “네, 보내 드리지요. 명함을 하나 주시거나 인터넷편지 주소를 적어 주셔요.” 하고 말을 합니다. 현장에는 와 보지 않고 사진만 보내 달라고 하는 기자님들은, 당신들 신문사에서 다달이 꼬박꼬박 넣어 주는 달삯을 받으실 테지요.

 요즈음 《발칙한 한국학》(이끌리오,2002)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스콧 버거슨이라고 하는 미국사람이 쓴 책입니다. 이이는 책 앞머리에 ‘어느 방송국에서 자기를 찍겠다는 연락이 와서 있었던 일’을 적어 놓습니다. 자기를 취재하겠다던 방송국 피디와 방송작가는 당신 스콧 버거슨이 펴낸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버거슨 씨는, 그 책을 읽고 다시 연락해 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방송작가는 시간이 없고 바빠서 힘들겠다고 합니다. 한참 생각하던 버거슨 씨는, 바쁘다니 어쩌겠느냐 싶어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루 내내 고달픈 취재에 시달립니다. 자기들이 촬영장비를 들고 찾아와서 찍기는 찍지만, 무엇을 찍어서 내보내야 ‘스콧 버거슨이 누구인가?’ 하는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 몰랐을 테지요. 버거슨 씨는 하루 내내 괴로웠지만, ‘공짜 밥’ 얻어먹었고, 한국땅 방송작가와 피디 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버거슨 씨 같은 일을 수없이 겪습니다. 퍽 자주 그러는데, 방송사든 신문사든 잡지사든, 저를 취재하면서 ‘제가 찍은 헌책방 사진’을 ‘그림으로 넣고 싶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그러면 저는 슬그머니 한 마디 합니다. ‘사진에는 저작권이 있을 텐데요.’ 그러면 맞은쪽에서는, ‘방송에 나가면 최종규 씨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는 ‘저희가 취재경비가 얼마 없어서 저작권료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는 대꾸. 그러면서 저녁밥이든 낮밥이든 같이 먹자고 합니다. 그러면 ‘밥은 안 사 주셔도 되니까, 다문 만 원이라도 사진값을 치러 주시면 좋을 텐데요.’ 하고 여쭙니다. 이러면 으레 ‘글쎄요.’ 하는 대꾸. 그러다가 요즘 들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명함에 웹하드나 인터넷편지 주소를 적어 주면서, ‘사진 좀 주세요!’ 하고 당차게 이야기합니다. 그래, 달라면 줘야지, 어쩌겠는가? 싶어서 ‘그러면 어떤 사진을 보내드릴까요?’ 하고 여쭙니다. 그러면 거의 ‘최종규 씨가 보기에 괜찮은 사진으로 보내 주세요.’ 다시 여쭙니다. ‘저는 제가 찍은 사진 가운데 버리는 사진이 한 장도 없어요. 필름값이 없기에 한 장 한 장 곰곰이 생각한 다음에 찍어서, 모든 사진을 스캐너로 긁어서 파일로 담아 두고 있어요. 바라는 사진이 무엇인지, 제 인터넷방에 들어와서 살펴보시고 파일번호를 알려 주셔요. 인터넷방에 올려놓은 사진만 해도 수천 장이 되거든요.’ 이런 여쭘에 돌아오는 대꾸는 하나같이 ‘그런가요? 그래도 알아서 골라 주셔요.’

 어쨌든. 사외보에 글과 사진과 그림을 모두 보냈습니다. 마감 맞추느라고 힘들었는데, 한숨 돌립니다. 그런데 사외보 엮는 분은 ‘최종규 씨가 헌책방에서 책을 보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한 장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찾아서 보내 드려얍지요! 예전에 어느 자전거잡지 기자가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이 사진은 제가 잡지를 사서 스캐너로 손수 긁어 파일로 만들었습니다)을 보내 줍니다.

 이제 더 없겠지? 낮참을 먹으면서, 물 한 잔을 마시면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그저께부터 이곳 사외보에 보낼 글을 쓰랴 사진 추리랴 책 겉그림 긁으랴, 여기에다가 아침부터 헌책방 길그림을 손으로 그려서 스캔질 하랴 …… 손가락과 손목과 팔뚝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아침과 낮밥을 먹는데, 손이 후덜덜 떨립니다. 책읽은 느낌도 글로 끄적이고, 헌책방 나들이도 갈무리하고, 우리 말 이야기도 좀 끄적거릴까 했더니 팔이 아파서 글을 못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드러누워서 팔을 주물러 주면서 쉬어야겠습니다. 자판 두들기기도 힘듭니다. 그렇지만, 뭐, 세금 빼고 13만 얼마쯤 벌었습니다. 통장에는 다음달에나 다다음달에 일삯이 들어올 테지만. (4341.4.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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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고 어떻게 먹고사느냐 걱정해 주는 분이 있어 고마운 한편 미안합니다. 책버러지 한 마리가 뜯어먹을 잎사귀 못 찾아 헤매일까 길찾기를 해 주니 고맙고, 아무리 책버러지인들 스스로 제 먹을 잎사귀를 찾아나서서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지 이래서야 되느냐 싶어 미안합니다.

 저를 걱정해 주는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을 지난달에 만났습니다. 선배는 ‘아무리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지만 그걸 다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이 말 저 말 하고 싶어도 꾹 눌러 가면서 사는데’ 하면서, 여러 사람들 보기를 듭니다. 그대로 되치거나 받아치기를 하기보다는 살며시 삭여내면서 ‘반사!’ 하듯이 맞은편으로 건네줄 수 있다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옛말처럼 살아가는 저이기에, 개 버릇 남 주냐(그나저나 이 옛말이 맞는지? 알쏭달쏭 헷갈립니다)는 옛말처럼 살아가는 저이기에, 참으로 좋은 말을 받아먹으면서도 좀처럼 제 매무새가 나아지거나 거듭나지 못합니다. 다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저지르는 잘못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고 한다면 눈꼴시어서 보지 못합니다. 이럴 때마다 ‘그래,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니?’ 하고 되뇌입니다. 이러면서 더딘 걸음으로 모자람을 털어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엉덩이에 뿔나고 못난 버릇을 그냥 껴안고 사는 저입니다만, 얄딱구리한 책을 읽어야 하고, 게다가 그 얄딱구리한 책을 소개하는 글마저 써야 하는 형편에는 아주 기가 질리고 혀가 비죽 나오고 이마에는 밭고랑이 수두룩 쌓입니다.

 선배는 말합니다. ‘최종규 씨가 땅 파먹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혼자만 살아가는 살림도 아닌데’ 하고. 맞습니다. 이러하니 볼꼴사나운 곳에서 글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이 들어와도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으면서 절을 해야지요. 터무니없이 어설프고 덜 떨어진 책을 던져 주면서 ‘이 가운데 이달 추천책 하나 뽑아 주시오’ 하고 일을 맡겨도 ‘그러믄요 고맙습니다’ 하고 낼름 받아먹으면서 굽신굽신 해야지요.

 허허, 그렇지만, 그러하지만, 이 짓거리는 참 못할 짓거리입니다. 하루 세 끼니 밥먹고 살기가 아무리 고달프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어서. 제가 아직 덜 가난하게 살고, 덜 없이 살아서 배부른 소리를 내뱉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온삶을 바쳐서 책 하나 좋아하는 버러지로 살고 있고, 그동안 펴낸 책도 글삯을 안 받으며 출판사돕기를 한다며 살아온 몸으로서, 못 봐줄 책은 참말 못 봐주겠습니다. ‘이건 아니올시오다!’ 하고 외쳐야 할 때는 외쳐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제가 사는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미터에서 70미터에 이르는 찻길을 새로 뚫으려고 인천시장이며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장이며 또 여기 밑에 있는 도로국장이며 갖은 공무원들이 법석입니다(이 가운데 도시계획국장 ㅅ아무개씨는 건설업체 돈을 몇 억 받아먹은 죄로 엊그제 구속되었는데, 이런 막공사와 막개발 삽날은 멈출 낌새가 없습니다. 공권력을 투입해서 공사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만 울려퍼집니다). 조용하게 살아가는 동네 한복판인데, 또 이곳 주민들은 이런 찻길을 내지 말라고 반대를 하는데, 시청 공무원들은 “이 길은 주민 뜻에 따라서 낸다”는 말만 여러 해째 되풀이를 합니다. 이런 일도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요.

 오늘저녁, 어느 잡지사에서 ‘글 재촉 인터넷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곳에서 펴내는 잡지에는 ‘이달 우수추천도서’라는 꼭지가 있고, 이 꼭지에서 어린이책 추천하는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가 끼인 지 어느덧 세 해가 되고 있는데, 지난 세 해 동안 달이면 달마다 추천할 만한 책이 보이지 않아서 애를 먹습니다. 그렇다고 늘 이러하지는 않아서, 미처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훌륭한 책도 꽤 만났습니다.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이라든지, 《숲에서 크는 아이들》이라든지, 《도서관에 간 사자》라든지 《앨피의 다락방》이라든지 《나의 를리외르 선생님》 같은 책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세 해 동안 이 몇 가지를 빼놓고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고, 별 다섯을 만점으로 했을 때 별 셋을 주기도 창피하거나 쑥스럽다고 느껴진 책이, 저로서는 4/5가 넘었습니다.

 글 재촉 편지를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이달도 허둥지둥 글을 마무리지어서 보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일삯이 없는 글, 자원봉사 글입니다. 돈도 안 되는 일이긴 하나, 심사위원이라는 다섯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무 책이나 함부로 추천을 못하겠습니다’는 말을 하고 싶고, ‘이 잡지사에서는 어떤 어린이책을 후보로 내세우고 어떤 책이 훌륭한 책이라고 소개할 터인가’를 궁금하게 여기어, 아직까지 심사위원이라는 이름을 걸쳐놓고 있습니다.

 ‘이달에도 추천할 만한 책이 한 권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하나를 뽑으라 한다면 이 책을 ……’ 하는 말로 편지를 보내고 나서 길게 한숨을 쉽니다. 어찌해야 좋은가, 앞으로도 이대로 해야 하나, 세상은 뒤죽박죽이니 이런 데까지 마음을 안 기울이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아니면, 제가 보는 눈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거나 비뚤어져서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 책’인데 나 혼자서만 ‘그 책 참 구린데?’ 하고 말을 하는 셈인가요?

 그나마, 저한테 고마운 도움말을 건네주는 선배가 얼마 앞서 《88만 원 세대》라는 책에서 무엇이 어떻게 왜 말썽거리인지를 낱낱이 까밝히는 글을 하나 썼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옳거니! 나 혼자만 이 책을 얄딱구리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네!’ 하면서 손뼉을 쳤습니다. 한 달 벌이가 30만 원도 채 안 되는 가운데, 달마다 도서관 달삯 40만 원을 내야 하지, 틈틈이 책 사 읽어야지, 밥먹고 살아야지, 또 헌책방 사진 찍어야지, …… 돈 들어올 구석은 없이 돈 나갈 구석만 있이 사노라면, ‘한 달 88만 원 버는 일도 기쁨 아닌가?’ 싶어서, 무엇보다도 그 책이름이 영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또한, ‘짱돌을 던지라’는 말도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문제를 푸는 법이 그 하나뿐인가 싶은데, 글쓴이로서는 빗대는 말로 그렇게 꺼냈을지 모릅니다만, 글쎄요, 빗대는 말을 그만큼밖에 못한다면, 글쎄요. 지금 우리 나라에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지만, 중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 나아가 중고등학교만 마친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노동자가 몇 천만이라고들 말합니다만, 이 노동자 몇 천만이 손쉽게 읽고 받아들이며 새길 만한 책은 얼마쯤 될까요? 참말로 노동자들 눈높이를 헤아리는 책은 얼마나 되지요? 얼마 앞서 전희식 님이 《똥꽃》(그물코)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우리 나라에 동화는 있어도 노화는 없다’는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어린이책은 돈이 된다고 하니 너도나도 나서서 펴냅니다. ‘아이들 책은 수준 낮아서 안 낸다’고 하던 그 이름난 인문학 출판사들도 슬그머니 어린이책을 펴냅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옛날에 하던 말을 뉘우치거나 바로잡지는 않아요. 바로 이들, 돈이 되니까 어린이책을 내는 출판사마다 돈이 안 되는 책, 바로 적게 배운 사람들이 읽을 책과 노동자가 읽을 책과 농사꾼이 읽을 책은 죽어도 안 펴냅니다. 여기에다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읽을 책도 죽어라 안 냅니다. 돌아가신 권정생 할아버지가 《몽실 언니》며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며 어린이책으로 써 냈지만, 가만히 읽어 보면 아이들보다는 당신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에 있는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들려주려고 쓴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러나 골칫거리는 바로 저한테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말 그대로 ‘남들은 다 좋다고 별 다섯을 꾹꾹 눌러서 주는 책’을, 저는 ‘별 하나 주기도 아깝지만 겨우 하나를 달아놓는 책’으로 받아들인다면, 서로가 너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거나, 제 눈이 삔 셈이지 싶거든요.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제가 별 다섯을 주는 책들, 더없이 좋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섬기며 좋아하는 책들치고, 둘레에 두루 읽히는 책이 드뭅니다. 《숲을 지켜낸 사람들》이 얼마나 읽히며, 《숲속의 꼬마 인디언》이 몇 사람한테 읽히며, 《수달 타카의 일생》이 읽히기나 하고 있으며, 《나의 수채화 인생》을 알아보는 사람은 얼마쯤이며, 《한국의 일상 이야기》는 팔리기나 했으며,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사람은 몇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까요. 저는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백 권 사서 선물했고, 《똥꽃》은 쉰 권을 사서 선물할 생각이며,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고 쉰 권 사서 선물하고 있습니다. 돈이 닿으면 《슬픈 미나마타》라는 책도 쉰 권 사서 선물하고 싶은데, 이제는 은행돈도 바닥이 났습니다. 제가 쓴 어느 글 하나를 놓고 ㅈ일보 기자가 명예훼손 고발을 하는 바람에 벌금 200만 원마저 물어야 해서 빚을 져야 할 판입니다. 그래도 제 마음에 콕 박히는 책들을 사는 데에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주머니가 털털 털려서 눈물이 날 판이지만,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를 사서 읽습니다. 만화책 《소년 탐구생활》을 사서 넘깁니다. 《주식회사 물》을 사 놓고 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소비사회의 탐색》이라는 책도 사서 옆지기한테 선물합니다.

 한 번 더 헤아려 보면, 누구보다도 저는 세상을 ‘다 다름’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더 나은 자리에 서 있는 듯’ 엉뚱하게 바라보면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은 ‘이 책 참으로 좋아서 별을 다섯 매기’는데, 저는 ‘고 책은 어디로 보아도 형편없어서 별 하나 주기도 아까운데’ 하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부디 이렇다면 반갑겠습니다. 제 눈이 비뚤어졌다면, 제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면, 제 매무새가 뒤뚱거린다면, 제 삶이 엉망진창이라면, 이리하여 저만 골치아픈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즐겁고 신나고 멋진 책을 알아차리는 마음그릇이 없는 책버러지가 깝죽을 떨고 있었다면 그지없이 좋겠습니다. (4341.3.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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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한 잔과 책 한 권


 어제까지 여드레 동안 천막농성터에서 하루를 보냈더니 몸이 파김치가 됩니다. 그러나 농성터를 떠날 수 없어서 온몸이 찌뿌둥하고 쑤셔도 꾹 참고 버티었습니다. 천막농성 아흐레가 되는 오늘은 잠깐 숨을 돌립니다. 앞으로 싸워야 할 날도 긴데, 벌써부터 나가떨어지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다른 분들이 좀더 애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늦잠도 자고 머리도 감고 책도 읽고 글도 끄적입니다. 천막농성에 앞서도 집일은 돌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온통 어지럽고 먼지가 소복히 앉았습니다. 모처럼 하루 얻은 말미에 마루를 쓸고 행주를 빨아 몇 군데나마 닦고 치우고 합니다. 아직 손이 시리니 빨래는 한 점만 해서 볕바른 마당에 내어겁니다. 고뿔 걸린 옆지기 먹을거리를 마련해 준 다음 제 먹을거리를 챙기고,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하다 쉬고 또 일하다 쉬니 어느덧 저녁 아홉 시. 오늘은 아직 땅을 못 밟았구나 싶어서 장바구니 하나 들고 길거리로 나옵니다. 어기적어기적 걷습니다. 동네 한복판 꿰뚫으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천막농성터는 불빛이 환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복닥복닥.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군요. 살짝 들어가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인사 한 번에 끌려들어가 한참 앉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마음으로만 꾸벅 절을 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천막농성터에서 15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구멍가게에 갑니다. 구멍가게 할배는 누군가와 전화를 나눕니다. 할배 자리 옆으로 맥주병이 셋 놓여 있습니다. 가게 앞에 늙수그레 아저씨 둘이 담배를 태웁니다. 세 분이서 느즈막한 때에 술 한잔 걸치시는군요. 그러면 나도 한잔 걸칠까? 맥주 한 병, 우유 작은 것 하나, 과자 하나, 라면 하나, 이렇게 해서 3300원. 구멍가게 할배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리번두리번 가게를 둘러봅니다. 종합선물세트가 보여서 요새는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어 만지작거립니다. “그래, 손님이 있어서.” 하면서 구멍가게 할배는 전화를 끊습니다. “그거 사시게? 그거 가져가면 칠천 원에 줄게. 본전치기로. 원래 만 원인데.” 하고 말씀합니다. 살 마음이 없고, 지금은 주머니에 돈도 없습니다. “아니요, 그냥 어떤 건가 구경해 보려고요.”

 주머니에 돈이 조금 있었다면, “아이구 할아버지, 본전치기 하면 뭐가 남는다고요. 그냥 만 원 받으시면 되지요.” 하고 말하면서 사들었을지 모릅니다. 요것 하나 사들고 천막에 살짝 들러서, “애 많이 쓰십니다. 종합선물세트 하나 가져왔습니다!” 하고 내놓았겠지요.

 주머니에는 돈 오천 원. 1700원이 남습니다. 맥주 한 병이 1600원이고 소주 한 병이 1100원, 막걸리는 1000원인데, 한 병 더 살까? 이래저래 망설입니다. 아니다, 한 병만 하자. 내가 술꾼도 아니고. 벌이도 없는 형편에 무슨 두 병까지. 두 병을 마시면 석 병을 마시고 싶어지고, 석 병을 마시면 넉 병 닷 병을 마시고 싶어지지 않겠나. 딱 한 병으로 끝내야지. 가볍게, 아쉬움이 남게.

 “거기, 바구니에 담으시게?” “네, 여기에 담으면 돼요.” 이렇게 값을 치르고 물건을 바구니에 넣습니다. 밖에서 담배 태우던 어르신들은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 세 분은 무슨 일로 모였을까 모릅니다만, 틈틈이 만나는 옛동무일 수 있을 테지요. 집으로 와서야 떠오르는 생각인데, 그 어르신들한테도 인사를 하면서(서로 동네 이웃일 수 있으니), “몸 튼튼히 잘 지내셔요. 올해도 복 많이 받으시구요!” 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오늘은 쉬어 주어야 하는 날입니다. 내일 새벽에 천막농성터에 다시 나가 보려면. 또 내일뿐 아니라 모레도 있어요. 모레뿐 아니라 글피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날은 깁니다. 우리라고 해 보아야, 이곳, 조그마한 동네입니다만, 젊은이는 거의 없고 거의 모두 할매와 할배 투성이인 이곳 조그맣고 조용한 동네를 앞으로도 이 모습 이대로 간직하면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즐겁게 살아갈 터전으로 가꾸고 싶은 마음으로 싸우자면, 오늘 하루 말미에는 푹 쉬고 힘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너비 50∼70미터짜리 산업도로도 들어설 까닭이 없고, 이런 산업도로가 아닌 간선도로라도 들어설 일이 없습니다. 들어서야 한다면, 오순도순 어울릴 이웃집입니다. 이웃과 동무가 느긋하게 모여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터전입니다. 때로는 술 한 잔이 아닌 책 한 권으로 저녁나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동네 도서관을 조촐하게 마련해야 합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 아닌 간선도로’가 나더라도 동네는 두 동강이 납니다. 찻길은 24시간 뻥 뚫려 있고, 건널목 신호등은 이곳과 저곳을 남남이 되도록 합니다. 여태껏 걱정없이 걸어다니던 길을 자동차에 치이고 밀리면서 다녀야 하겠습니까. 이제껏 자전거로 넉넉히 다니던 길을 배기가스 맡으며 빵빵빵 경적질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골목길에서도 자동차는 다닙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는 누구보다도 사람이 임자입니다. 자전거가 임자입니다. 어린이와 할배 할매가 임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골목길이 찻길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640미리 보리술 한 병 값 1600원. 헌책방에서 사들이는 조그마한 책 하나 값 1500원, 또는 2000원. 조금 도톰한 책은 3000원, 또는 4000원. 하루 한 병 마음을 풀고 머리를 식히면서 마시는 술. 하루 한 권 마음을 덥히고 머리를 채우면서 읽는 책. 마음을 풀고 머리를 식히는 데에는 1600원짜리 보리술 하나도 좋고 1100원짜리 소주도 좋고 1000원짜리 막걸리도 좋습니다. 마음을 덥히고 머리를 채우는 데에는 1500원짜리 헌책 하나도 좋고, 2000원짜리 헌책 하나도 좋으며, 5000원짜리 손바닥책 새것 하나도 좋아요. 맥주 두어 병 값이면 새책 한 권 값. 맥주 한병 값이면 헌책 한 권 값. 다만, 제법 값이 나가는 헌책도 있고, 요사이(나온 지 몇 해 안 되는 책) 나온 헌책은 6000원도 하고 7000원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루에 술 한 병으로 흥얼흥얼 마음이 풀어지고, 하루에 책 한 권으로 우썩우썩 마음이 자란다면, 이 하나만으로도 하루 마무리는 쏠쏠하지 않습니까? (4341.3.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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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우리 급료 시스템이 바뀌어서 점수제가 됐단 말이야! 점수를 따면 월급이 자꾸자꾸 올라가는 시스템이라고. 지금 그 포인트를 열심히 버는 중이야.” “점수제?” “즉, 좋은 교사가 된단 말야!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나…… 아무튼 지금 열심히 버는 중이야! 전에는 등교거부하는 놈을 등교시켜 100포인트를 벌었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꼭…….”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당연 빠따지! 전에도 왕따 문제를 해결했다니까? 이대로 가면 다음 월급은 꼭 올라갈 거야!” “헤에,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월급이 올라간다? 그것 참 편리하구나.” “그치? 이건 진짜 천재 문제 해결사라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니까.” “너 정말 썩었구나.” “응?” “뭐가 포인트야, 점수에 놀아나면서? 너 언제부터 그런 월급쟁이 교사가 됐어? 그런 선생들은 우리가 옛날에 제일 싫어하던 것 아니었어?” “뭐?” “돌아가. 다신 오지 마. 너같이 썩은 녀석하고는 오늘로 절교다!” ..  《후지사와 토루/서현아 옮김-반항하지 마 (21)》(학산문화사,2002) 62∼64쪽


 만화책 《반항하지 마》를 보다가 속이 싸합니다. 주인공 영길이가 오랜 동무 용이한테 한소리 듣고 쫓겨나면서 들은 말 “너 정말 썩었구나.”에서 가슴이 찌릿합니다. 거짓부렁 교사가 아닌 참된 교사가 되겠다던 동무녀석이 점수(숫자와 돈)에 눈이 멀어서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하는 교사’와 마찬가지가 되는 꼴을 못 봐주겠다며 내뱉은 말 한 마디, 이 말마디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습니다.

 나는 얼마나 책다운 책에 내 마음과 몸을 바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책 만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합니다. 책 하나에 얽힌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 되새깁니다.

 책 하나를 만들 때에는 여러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맨 먼저, 책에 담긴 속살인 줄거리를 이루어내는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이들은 글을 쓰는 사람일 수 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수 있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들 글꾼-그림꾼-사진꾼 이야기를 잘 추스르고 매만지고 다듬고 보듬어서 종이에 담아내도록 엮어내는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이들을 가리켜 출판편집자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 글-그림-사진(원고)을 찍어낼 종이를 알아보는 사람(출판제작자)이 있고, 출판제작자한테 종이를 파는 지업사가 있습니다. 지업사에서 넘긴 종이를 받아서 찍는 인쇄업자가 있고, 책겉이 좀더 단단하도록 꾸미는 코팅업자와 제본업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은 배본회사 일꾼 손을 거쳐 나누어지고, 운송업자가 짐차에 실어서 책방으로 하나하나 나릅니다. 그러면 책방 일꾼은 갈래에 따라 책꽂이에 꽂아 놓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땀을 쏟는 이들이 더 있습니다. 책 몸글이나 겉그림을 꾸미는 사람(디자이너)이 있습니다. 몸글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는가 돌아보는 사람(교정/교열)이 있습니다. 주문을 받아서 책방으로 보내는 몫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출판사 살림을 꾸리는 사람(경리)이 있습니다. 책방에 진열이 잘되어 있는가 살피고, 책방에서 책을 판 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영업)이 있습니다. 새책 소식을 알리려고 바쁜 사람(홍보)이 있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글꾼-그림꾼-사진꾼이 자기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도록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사람, 볼펜을 만드는 사람, 붓과 물감을 만드는 사람, 사진기와 필름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들 글꾼-그림꾼-사진꾼과 책마을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차를 몰아 주는 사람(버스기사, 전철기사, 택시기사, 기차기사)이 있습니다. 늘 밥을 해먹을 수 없으니, 밥때 되면 밥을 해 주는 사람(밥집 일꾼)이 있어요. 밥집 일꾼은 농사꾼과 고기잡이가 거두어들인 곡식과 물고기 들을 사들여서 밥을 할 테지요. 이들 모두가 입을 옷을 만드는 일꾼이 있습니다. 이들이 마음과 몸을 쉬도록 해 주는 사람(술집이나 찻집 일꾼)이 있습니다. 이들이 손수 집을 지을 수 있으나,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일꾼도 있습니다. 겨울에는 춥지 않도록 불을 때야 하니 석탄이나 석유를 캐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하나가 나오면, 맨앞이나 맨뒤 자리 한쪽에 ‘판권’이라는 이름으로, 책 엮어내느라 애쓴 사람들 이름 몇이 함께 찍힙니다. 앞쪽 겉그림에는 글꾼-그림꾼-사진꾼 이름이 적힙니다. 틀림없이 이들은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고 품과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렇게 땀을 흘리며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애쓴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꾼-그림꾼-사진꾼으로 있는 분들이, 또 책마을사람으로 있는 분들이 이런 애씀이들 얼과 넋을 고이 헤아려 줄 때, 고이고이 읽을 책이 우리 앞에 나옵니다. 세월이 갈수록 빛을 더하는 책이 우리 앞에 놓입니다.

 그렇지만 글꾼부터 해서 책마을사람들이 애씀이들 얼과 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아예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으로서는 불티나게 팔리거나 엄청나게 사랑받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고 해도 언젠가 뽀록이 납니다. 볼장을 보지요. 좋은 책 하나 아닌 돈으로, 이름값으로, 권력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이들 껍데기에는 생명이 없거든요.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사람한테 빛을 줄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하루에 열두 끼나 이백 끼를 먹을 수 없어요. 비싼 밥을 먹는다고 몸에 더 좋지만은 않으며 병원 진료를 많이 받는다고 더 오래 살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과 매무새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조금 덜 팔리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팔리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덜 알려지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알려지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덜 읽히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읽히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책쓰기, 책엮기, 책팔기 모두 사람 사는 일입니다. 돈(숫자)을 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책 하나 쓰고 엮고 팔면서 얼마나 ‘책’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인지요. 책 하나 사서 읽으며 얼마나 ‘책’을 돌아보고 있는 우리들인지요.

 1969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끄집어내 봅니다. 이때 뒤로 두 번 다시 나왔습니다. 요새는 제대로 읽히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1977년에 처음 소개된 뒤로는 다시 못 나오는 《폴 란돌미-슈베르트》라는 책을 책상맡에서 잠깐 집어들어 넘겨 봅니다. 앞으로도 다시 나올 일이란 없을는지. 2006년에 나온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병》(한울,2006)이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잠깐 뽑아서 읽습니다. 이 책을 사 준 사람은 몇이나 될까나. 요새 사티쉬 쿠마르 님 책이 곧잘 읽히는데 《부처와 테러리스트》 같은 책도 읽히고 있나? 《아레오파지티카》라는 책을 아는 언론인은 얼마쯤 있으려나. 《항일유적답사기》 같은 책은 두루 사랑받기 힘들까. 맛집이나 멋집 따위를 이야기했다면 잘 팔릴 텐데 왜 구태여 ‘항일유적’ 같은 데를 돌아본다고. 무교회를 말하건 예배당을 말하건, 똑같이 하느님을 모시고 우리 스스로 올곧게 살자는 소리일 텐데, 어이하여 우리네 종교인들은 우찌무라 간조를 안 읽고 김교신을 못 읽을까. 글쎄.

 그러나 남 말할 형편이 아니지. 나부터 내 삶을 다스리고 내 자신을 돌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책을 얼마나 허물과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나. 스스로도 참 좋다고 한 책을 읽어낸 뒤 내 삶을 내 스스로 얼마나 가꾸거나 갈고닦거나 다스리고 있었나. 나는 남들을 보며 “너 참말 썩었구나.” 하고 읊는 입은 있되, 나를 돌아보며 “난 참말 썩었구나.” 하고 무릎꿇거나 뉘우치는 입까지 있었는지. (4341.2.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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