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는 책도 엉터리로 읽지만, 글도 엉터리로 쓴다. 내가 좋아하고 더러더러 만나는 번역가 형은 알라딘서재에 글을 바지런히 올리다가 '덧없는 댓글 다툼'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고 '제대로 된 흐름을 못 잡는 샛길 빠지기'인가를 느끼며, 그동안 올렸던 모든 느낌글을 지우고, 댓글을 다 막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번역가 형처럼 그런 '덧없음'을 알면서도 '댓글 막기'는 하지 않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까닭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덧없는 댓글싸움을 벌이는 이들 스스로 부끄러운 노릇 아닌가? 왜 바보들은 스스로 바보인 줄을 깨닫지 못할까? 

 

이렇게 글을 쓰는 나는 바보이다. 나는 나대로 바보이고, 덧없는 댓글을 다는 이들은 그들대로 바보이다. 저마다 제가 꾸리는 삶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외곬로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삶에 따라 바라보는 매무새이다. 

 

자가용에 매여 있는 사람한테 자전거 이야기를 해 보아야 무엇 하리? 

국어사전 한 번 제대로 펼쳐서 꼼꼼히 읽고 새긴 적 없는 이한테 우리 말 이야기를 한들 무엇하리? 

책삶을 깊이 파헤치지 않는 사람한테 책 이야기를 들려준들 무엇하리? 

새책방과 헌책방과 도서관이 어찌 얽혔는가를 살피지 못하는 이한테 헌책방 이야기가 무슨 쓸모? 

우리가 먹는 밥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데, 무슨 생태고 환경인가? 

 

귀가 있으면 듣는다고 했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 얼마나 귀가 뚫려 있을까? 눈 안 달린 사람이 없을 텐데, 다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알라딘서재를 기웃거린다든지, 나 같은 책바보가 끄적이는 바보스런 글에 매달려서 왈왈 멍멍 컹컹 짖는 그 철없는 댓글싸움을 건다든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조선일보를 보며 스스로 멍텅구리가 되는 삶보다, 바보 최종규가 쓰는 글을 읽으며 '넌 참 바보로군' 하고 들먹이는 삶이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다. 

 

바보 최종규조차 칭찬할 만한 책을 내도록 애쓸 노릇이지, 댓글로 이러쿵저러쿵 해 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며칠째 '팔리 모왓'이 쓴 <잊혀진 미래>를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띄어쓰기 맞춤법 교정교열이 어마어마하게 엉터리이지만, 책에 담은 줄거리는 더없이 훌륭하다. 그런데, 지지난주인가 느낌글을 올린 <청춘을 읽는다>는 띄어쓰기나 맞춤법 교정교열을 놓고는 몇 군데 잘못을 빼고는 참 잘 엮었다. 그러나 줄거리에서는 몹시 안타까웠다. 

 

우리는 왜 겉꾸밈처럼 속가꾸기는 못할까? 우리는 어이하여 겉차림처럼 속다지기는 안 할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지만, 나는 보기 좋은 떡은 먹지 않는다. 속내가 좋은 떡이라야 먹는다. 보기만 좋은 떡은 빛깔과 냄새로도 엉터리인지를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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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한 해에 내 가슴에 새겨진 책
 ― 마음밥이 되고, 마음밭이 되며, 마음사랑이 되는 책



 올 2008년 1월 1일부터 마지막날 12월 31일까지 찬찬히 읽고 느낌글까지 쓴(또는 쓰려고 준비하는) 책들로 무엇이 있는가 헤아려 봅니다. 이 가운데에는 ‘돈도 버렸고 시간도 아까웠지만, 이 아까움이 무엇인가를 밝혀야겠다’는 책이 서른 권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이며 시간이며 고맙게 느껴져서, 이 고마움을 낱낱이 적어 보아야겠다’는 책이 훨씬 많았어요. 이 가운데 마음속에 깊은 기쁨을 선사한 반가운 책 이야기를 얼마쯤 썼는가 돌아봅니다.

 책이름을 갈래에 따라서 죽 적어 놓고 보니 모두 일흔세 권입니다. 이 가운데 일곱 권 이야기는 자료를 좀더 모으기도 하고 다시 읽기도 하면서 느낌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 일흔세 가지 책 가운데 ‘2008년 한 해에 처음 만나서 싱그러움과 즐거움을 듬뿍 선물받았던 책’을 꼽으라면 무엇이 있는가 헤아려 봅니다.

 음, 선뜻 하나를 뽑기란 어렵군요. 제가 좋아서 읽었고 좋아서 주머니를 털었으며 좋아서 기꺼이 이웃한테 선물하기도 한 책들이지만, 어느 하나만 뽑자니 힘듭니다. 먼저, 갈래에 따라서 한 가지씩 뽑아 봅니다.  





 첫째, 생태환경책에서는 《슬픈 미나마타》가 아주 좋았습니다. 읽으면서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라서 석 달쯤에 걸쳐서 아주 조금씩 읽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읽고 나서 다시 두 번을 더 읽었던 책입니다. 환경병인 ‘미나마타병’이 미나마타사람들한테 어떻게 생채기를 남겼고, 이 생채기를 일본 사회와 기업과 정부는 어떻게 감추려 했으며, 이 응어리는 오늘날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미나마타사람 눈높이에서 펼쳐낸 눈물겨운 작품입니다.

 둘째, 어린이책에서는 《눈물나무》와 《마지막 인디언》이 돋보이는데, 《마지막 인디언》은 판이 끊어져서 더는 찾아 읽기 어려운 대목을 헤아린다면 《눈물나무》를 뽑아야겠네요. 뜻과 생각이 있는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마지막 인디언》을 되살려 준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꿈을 꿉니다. 《눈물나무》는 미국이 휘두르는 경제식민지 정책 때문에 제3세계 나라들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으로 몰래 넘어가려고 하며, 이러는 동안 가난한 나라 아이들이 어떻게 바뀌고 아파하는지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셋째, 문학책에서는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뽑습니다. 삶을 삶결 그대로 적어내려간 시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시란 무엇인지를, 시란 어떻게 즐기는지를, 시란 어떤 마음일 때 속에서 터져나오면서 우리 마음으로 옮겨지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넷째, 종교책은 하나만 썼네요. 건너뜁니다.

 다섯째, 인문학책에서는 《일본군 군대위안부》를 뽑습니다. 나라안 학자도 훌륭하게 파헤친 책을 펴냈지만, 나라밖 일본에서 성노예 할머님 삶과 아픔을 꼼꼼히 좇으면서 밝혀낸 이 책은 두고두고 우리네 교과서처럼 여기면서 이 땅 아이들한테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배우는 이들을 비롯해서,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이 이런 책을 옆구리에 끼면서 고개숙여 익히면 우리 나라가 참 많이 달라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섯째, 예술책에서는 《놀라운 이야기》를 뽑아 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박정희 새마을 독재를 거치는 동안 한 아버지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았는가를 수수하게 엽서 한 장 만한 크기로 담아낸 이야기는 자못 눈물겹습니다. 우리 나라에 이런 ‘놀라운 아버지’가 드문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는데, 그예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일곱째, 그림책에서는 《청개구리》를 뽑습니다. 그림책을 엮은 재일조선인 두 분은 고향나라에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일본땅에서도 푸대접을 받으면서 컸으나, 이렇게 아름다움이 깊이 묻어난 그림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다니, 참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예술이란 그지없는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이겨낸 웃음에서 시나브로 태어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여, 제 나름대로, 제가 2008년 한 해에 만났던 반갑고 놀랍고 고마웠던 책을 여섯 권 추려 봅니다.

 (ㄱ) 슬픈 미나마타 / 달팽이,2007 - 이시무레 미치코
 (ㄴ) 눈물나무 / 양철북,2008 - 카롤린 필립스
 (ㄷ)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문학의전당,2007 - 김정희
 (ㄹ) 일본군 군대위안부 / 소화,1998 - 요시미 요시아키
 (ㅁ) 놀라운 이야기 / 새만화책,2008 - 조동환
 (ㅂ) 청개구리 / 보리,2007 - 박민의


 올해에 나온 책이 둘, 지난해에 나온 책이 셋, 1998년에 나온 책이 하나입니다. 1998년에 나온 책은 그무렵 알았다면 진작 읽고 일찌감치 좋은 마음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뒤늦게 알게 되어 뒤늦게 읽는 책이 있을 때에는 ‘세상에는 미처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책이 참 많네’ 하고 고개를 숙이는 한편, ‘왜 이런 책이 그무렵에 제대로 알려지면서 읽히기 어려웠을까’ 싶어서 안타깝습니다. 신문잡지 기자들이 눈밝게 알아차리지 못한 탓으로 돌리거나, 새책방 일꾼이 꼼꼼히 갖추어 널리 알려주지 못한 탓으로 돌릴 수 있을 테지만, 이보다는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으로서 저부터 두루 살피지 못한 탓이 가장 크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올해 나온 책을 올해에 반갑게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가슴을 적실 수 있을 때에는, ‘네가 이렇게 따끈따끈할 때 사랑을 받고 사랑을 돌려주고 또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으니 더없이 좋네’ 하고 생각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 제 자리맡에는 《북한행 엑서더스》(책과함께,2008)와 《숨어 있는 예수》(달팽이,2008)가 반쯤 읽힌 채 놓여 있습니다. 인천집으로 돌아가면 수많은 책이 덜 읽히거나 조금만 읽힌 채, 또는 한 번 읽혔으나 다시 한 번 읽히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천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책방에 잠깐 들러 아직 알아채지 못한 반가울 책을 살펴보기도 할 테고,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을 가만히 훑으면서 또 어떤 마음밥을 골라먹으면 좋을까 하고 알아보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이처럼 나이를 먹으며 새로 알아가는 책이 늘고, 기쁘게 마지막 쪽을 덮는 책이 늘어나는 즐거움이 새삼스럽습니다. 숨을 거두는 날까지 손에 쥘 수 있는 책은 기껏해야 몇 만 권 또는 몇 십만 권밖에 안 될 텐데, 이 가운데 얼마나 가리고 추리면서 제 가슴속에 또렷이 남아서 느낌글 하나를 부지런히 써내도록 이끌어 줄는지 설렙니다. 기다리게 되고 두근거립니다. 저무는 2008년을 아쉽게 떠나보내며, 다가오는 2009년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2008년 한 해에 제 깜냥껏 갈무리해 본 ‘제 눈에 걸러진 괜찮았던 책’을 하나하나 적어 봅니다. (4341.12.30.불.ㅎㄲㅅㄱ)

 



 ㄱ. 생태환경책
 《잘 먹겠습니다》(그물코,2007) 요시다 도시미찌
 《다시 야생으로》(지호,2004) 어니스트 톰슨 시튼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북센스,2006) 박경화
 《오카방고의 숲속학교》(갈라파고스,2005) 트래버스, 앵것, 메이지, 오클리
 《슬픈 미나마타》(달팽이,2007) 이시무레 미치코
 《지구 온난화를 생각한다》(소화,1997) 우자와 히로후미
 《곤충ㆍ책》(양문,2004)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2분 간의 녹색운동》(성바오로출판사,1991) M.램
 《즐거운 불편》(달팽이,2004) 후쿠오카 켄세이


 ㄴ. 어린이책
 《우리와 안녕하려면》(양철북,2007) 하이타니 겐지로
 《아빠의 만세발가락》(두레아이들,2007) 리타 페르스휘르
 《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1999) 권정생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산하,2006) 고시미즈 리에코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민음사,1991) 모리스 드뤼옹
 《눈물나무》(양철북,2008) 카롤린 필립스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보물창고,2005) 구드룬 파우제방
 《마지막 인디언》(동서문화사,1982) 디오도러 크로버
 《곡쟁이 톨로키》(검둥소,2008) 자케스 음다
 《로빙화》(양철북,2003) 중자오정
 《하늘은 이어져 있다》(낮은산,2008) 일본아동문학자협회
 《지구를 구하는 경제학》(봄나무,2005) 강수돌
 《잃어버린 소년들》(현암사,2008) 벤슨 뎅, 알폰시온 뎅, 벤자민 아작
 《초딩, 자전거길을 만들다》(소나무,2008) 박남정
 《먼지야, 자니?》(산하,2006) 이상교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양철북,2008) 이하영


 ㄷ. 문학책 (소설,수필,수기,시)
 《부심이의 엄마 생각》(노나메기,2005) 백기완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열린책들,1998) 장 자끄 상뻬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그물코,2007) 박희병
 《마음의 조국, 한국》(범우사,2002) 다카노 마사오
 《금희의 여행》(민들레,2007) 최금희
 《이 여자, 이숙의》(삼인,2007) 이숙의
 《똥꽃》(그물코,2008) 전희식
 《그 골목이 말을 걸다》(넥서스,2008) 김대홍
 《사하라 이야기》(막내집게,2008) 싼마오
 《생각, 장정일 단상》(행복한책읽기,2005) 장정일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문학의전당,2007) 김정희


 ㄹ. 종교책
 《부처와 테러리스트》(달팽이,2005) 사티쉬 쿠마르


 ㅁ. 인문학 (지역,사회,역사,철학,교육)
 《황해에 부는 바람》(다인아트,2000) 최원식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사람들,2004)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소나무,2007) 편해문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 전진성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이후,2008) 마이클 예이츠
 《사라져 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삶이보이는창,2007) 박영희
 《이천동, 도시의 옛 고향》(이매진,2007) 최엄윤
 《오끼나와 이야기》(역사비평사,1998) 아라사끼 모리테루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1998) 요시미 요시아키
 《스핑크스의 코》(까치,1998) 리영희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후마니타스,2007) 송두율
 《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양철북,2008)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니사》(삼인,2008) 마저리 쇼스탁


 ㅂ. 예술책 (그림,사진,만화)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박정희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윌북,2006) 타샤 튜더
 《숲속 그늘 자리》(고인돌,2008) 이태수
 《무식하면 용감하다》(행복한만화가게,2006) 이두호
 《촬영금지》(눈빛,1990)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이란 무엇인가》(현문서가,2005) 최민식
 《도자기》(애니북스,2008) 호연
 《놀라운 이야기》(새만화책,2008) 조동환
 《ZERO》(애니북스,2008) 마츠모토 타이요
 《음주가무 연구소》(애니북스,2008) 니노미야 토모코
 《페르세폴리스 (2)》(새만화책,2008) 마르잔 사트라피


 ㅅ.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양철북,2008) 최혜영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동쪽나라,2003) 모니카 로베르트
 《시냇물 저쪽》(마루벌,1995) 엘즈비에타
 《방귀 만세》(아이세움,2001) 후쿠다 이와오
 《행복한 봉숭아》(천둥거인,2004) 박재철
 《연이네 설맞이》(책읽는곰,2007) 윤정주
 《하늘에서 달님이 뚝 떨어졌어요》(중앙출판사,2008) 제바스티안 베쉔모저
 《들꽃 아이》(길벗어린이,2008) 김동성
 《청개구리》(보리,2007) 박민의
 《우리가 바꿀 수 있어》(보림,2008) 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
 《세 엄마 이야기》(사계절,2008) 2008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미래M&B,2007) 마리 홀 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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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31 12:56   좋아요 0 | URL
좋은 추천 감사합니다.
 



 ‘아파트+자가용+돈’을 버려야 책을 읽을 수 있다
 ― 책읽기와 자꾸 멀어지는 우리 삶을



 - 1 -

 책을 읽어 버릇하는 사람이 책하고 멀어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 밴 땀과 피와 눈물과 웃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책하고 담 쌓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서 늘 배우며 고개숙이는 사람이 책이 들려주는 속깊은 이야기에 눈물짓지 않거나 웃음짓지 않는 일이란 없습니다. 새로운 책을 꾸준히 찾는 사람이 지나간 책 또한 꾸준히 안 찾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책마다 다 다르게 담아내고 있는 알뜰한 빛줄기를 놓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 길이 있다면 있고 길이 없다면 없습니다. 책에 길이 있다고 느끼면 이 길을 잘 찾아서 갈 노릇입니다. 책에 길이 없다고 느끼면 제 깜냥껏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길이 다른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이 살피며 부지런히 찾아나설 노릇입니다.

 찾아나서는 사람한테만 찾아지는 길입니다. 만나려 하는 사람한테만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느끼려 하는 사람한테만 느껴지는 길입니다. 보려고 하는 사람한테만 보여지는 길입니다.





 - 2 -

.. 인간의 기본욕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라면 ‘어떻게’ 각자 입에 맞게 먹느냐 하는 것이 결코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교묘한 대중조종을 통한 입맛의 전체주의화는 오히려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김장을 앞두고 집집마다 신경을 쓰고 있다. 이 김장에는 규격화나 획일화를 가장 꺼려야 하지 않을까. 함흥댁의 짜릿한 김치맛, 평양댁의 찡한 동치미맛, 선산댁의 맵싸한 젓갈김치맛에서 우리는 지방의 고유한 멋을, 그리고 한 주부의 독특한 솜씨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화니 근대화니 하는 깃발 아래서는 모든 것들이―건물이니 행동양식ㆍ사고방식까지 획일화되고 규격화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원해야 할 대중사회나 전체주의사회로 말려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  《한완상-증인 없는 사회》(민음사,1976)


 집밥을 얻어먹는 일이 아주 힘들어집니다. 바깥밥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손쉽게 얻어먹을 수 있고 사먹을 수 있습니다(돈만 있다면). 그러나 바깥밥을 얻어먹든 사먹든, 우리 식구 입맛에 맞출 수 있는 바깥밥을 찾는 일은 대단히 힘듭니다. 거의 이룰 수 없는 일이 아니랴 싶기까지 합니다(우리 몸에 거스르지 않는 밥거리로 마련한 밥을 찾기 어려우니까). 그러면서도 바깥밥집은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합니다. 어쩌면, 똑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춘천이든 전주이든 제주이든 목포이든 군산이든 마산이든 대구이든 진주이든 울산이든 …… 똑같은 체인점에 똑같은 차림표에 똑같은 반찬에 똑같은 흰쌀에 똑같은 맵고 짠 양념에 똑같은 부피까지 …… 인천에서 먹기에 인천다움을 느낀다든지, 서울에서 먹기에 서울다움을 느낀다든지, 대전에서 먹기에 대전다움을 느낀다든지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밥 한 그릇도 빵 한 조각도 술 한 잔도 매한가지입니다. 도드라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밥뿐 아니라 집도 똑같습니다. 인천사람들 살림집이나 서울사람들 살림집이나 부산사람들 살림집이나 순천사람들 살림집이 다르지 않아요. 모두들 ‘건축회사 이름만 다른’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스무 해나 서른 해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서 새로 지어야 할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온갖 최첨단시설을 갖추었다는(그래 보아야 몇 해 지나면 다 낡아빠진 시설이 되고 마는) 아파트로 옮기고 있습니다.

 밥과 집이 똑같은 한편, 일거리와 놀이거리가 똑같습니다. 온나라 구석구석을 다녀 보아도 사람들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느 자리에 가 보아도 웃고 떠들고 즐기는 놀이가 ‘새롭’거나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틀에 박은 듯하고 판에 박은 듯합니다(예전에는 공기놀이를 하건 고무줄놀이를 하건 술래잡기를 하건 마을마다 달랐습니다). 하긴, 말이 사투리이지, 소리값 높낮이와 말소리 길이만 조금 다른 오늘날 사투리는 사투리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멋쩍고 남우세스럽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서울대를 나오든 인천대를 나오든 부산대를 나오든 제주대를 나오든, 사람들 지식이 똑같습니다. 지식 높낮이는 다를는지 모르나, 얼마나 다른지조차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자기 머리속에 가둔 지식을 다루는 매무새마저 어슷비슷합니다.

 지식만 똑같느냐 싶으면, 생각도 똑같고 마음도 똑같고 가슴마저 똑같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빨리 더 큰 아파트를 따내어 사들여야 하며, 더 빨리 더 잘생기고 예쁘장한 짝꿍과 사귀어야 하는데다가, 텔레비전 연예인 옷차림이 달라지는 데 따라서 제 옷차림과 몸차림을 바꾸느라 바쁩니다.

 하다 못해 라면 한 그릇 끓이면서 파나 달걀을 넘어 연뿌리나 감자나 고구마나 버섯이나 쑥이나 오징어나 당근 따위를 썰어넣을 생각을 해 보지 못합니다. 다문 밥 한 그릇을 집에서 손수 지어도, 쌀에 씨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느낀다든지, 누런쌀로 지어 본다든지, 콩이나 팥을 넣어 본다든지, 콩을 넣는다면 어떤 콩을 얼마나 넣는다든지, 수수나 보리나 기장이나 옥수수나 조나 율무를 넣어 본다든지, 보리를 넣으면 밀보리를 넣는지 찰보리를 넣는지 누른보리를 넣는지 쌀보리를 넣는지 따위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 3 -

 오늘날 우리 삶은 책하고 멀어지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는 책하고 담을 쌓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매무새는 책하고 등돌리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밭과 마음결과 마음눈은 책은 도무지 몰라도 된다고 하는 길입니다.

 똑같은 아파트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손에 쥘 까닭이 없습니다. 책을 쥔다고 하여도 돈벌이를 다루는 처세(이른바 자기계발) 책입니다. 또는 텔레비전 연속극과 같은 책입니다. 시간을 죽이는 책을 읽지, 시간을 살리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열 번 백 번 되읽을 책이 아니라, 한 번 넘기고 나서 책꽂이에 꽂거나 재활용품 모을 때 폐휴지 사이에 끼워 버리는 책을 사들입니다. 책을 읽지도 못하고 보기만 하지만, 이제는 넘기거나 들추는 눈높이가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자동차를 굴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가방에 늘 넣어 놓고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굴리면서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펼쳐야 지도책이지만, 네비게이션이 나오는 만큼 길그림 담은 책마저 펼칠 일조차 없습니다. 펼쳐야 스포츠신문이었지만, 네비게이션이 텔레비전 구실까지 하고 있으니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면 곧바로 운동경기를 차를 몰면서 볼 수 있습니다. 책이란 따분하고 지루하고 지겹고 번거로운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회사원(사무직이든 영업사원이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알아보려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책을 읽어야 할 일이 있으면 인터넷을 또닥거리면서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좀더 싼 책을 알아봅니다. 자기 마음을 살찌울 만한 ‘또 다른 책이 있을까’를 알아보지 않고, ‘꼭 사야 한다고 하는 그 책을 좀더 싸게 파는 곳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데에 시간을 바칩니다. 이리하여 다문 몇 백 원부터 몇 천 원을 몇 시간(적으면 몇 분)씩 들이면서 아낀다고 할 텐데, 우리가 아끼는 그 돈 몇 푼은 우리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과 도서관에만 있는 책들은, 또 인터넷 장사를 하지 않아서 인터넷 목록에 올려지지 않는 책들은, 또 인터넷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차츰 안 찾게 되어’구태여 인터넷 목록으로 올리지 않는 책들은,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조금도 알아챌 수 없고, 알아챌 까닭마저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똑같은 대학졸업장을 가지려 하며, 똑같은 연봉을 받고, 똑같은 아파트에서, 똑같은 자가용을 굴려, 똑같은 서울이나 서울 비슷한 큰 도시에서, 똑같은 사무직 또는 영업직으로 돈만 버는 일을 하는 가운데, 예나 이제나 사회평등이나 남녀평등이나 계급평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프게 소비물질문명에 젖어들어 가는 이 나라에서는, ‘다 다른 지식과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꿈과 다 다른 길과 다 다른 사람’을 보여주는 책이란 한낱 부질없는 가을철 가랑잎 한 닢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을날 떨어져 스스로 거름이 되어 이듬해 봄에 새잎이 돋게 해 주는 힘이 되는 책 하나임을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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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스스로 책을 읽으려면, ‘똑같은 아파트’를 버리고 ‘다 다른 골목집’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려면, ‘똑같은 자가용’을 버리고 ‘다 다른 자전거와 두 다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을 사랑하자면, ‘똑같은 바깥밥’을 버리고 ‘다 다른 집밥’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마다 담긴 고운 빛줄기를 가슴으로 껴안으려면 ‘똑같은 돈’을 버리고 ‘다 다른 눈물과 웃음’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똑같은 틀에 매여도 다 다른 책을 찾아나설 수 있기도 할 테고, 똑같은 틀에 매인 가운데에도 책사랑을 이을 수 있습니다.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똑같은 틀에 매이고 있는 우리들이 보여주는 책사랑은 무엇이며, 똑같은 판에 짜여진 우리들 손에 쥐여진 책이란 무엇인가요. 지식이 아닌 지식을 다루는 마음을 담아내는 책임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요. 지식이 아닌 삶이 녹아나는 책임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요. 지식이 아닌 이야기가 서리는 책임을 얼마나 곱씹고 있는가요.

 개성이란 ‘케이에프시와 롯데리아와 버거킹과 맥도널드와 파파이스가 어떻게 다른 햄빵을 만들고 값이 얼마인가’를 알거나 즐기는 일이 아닙니다. 다양성이란 ‘아우디와 베엠베와 푸조와 오피러스와 크레도스와 그랜저가 얼마나 멋지거나 잘 빠진 차인가’를 가름하거나 누리는 일이 아닙니다. 푸르지오에 산다고 푸르게 사는 삶이겠습니까. 파밀리에에 산다고 온식구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겠습니까. 롯데캐슬에 산다고 군주가 되겠습니까.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무엇이 높아지는 삶입니까.

 손으로 만지작거려 종이 느낌을 헤아리면서 두 눈으로는 엮음새와 짜임새와 줄거리 들을 골고루 돌아보아 하나로 모두는 동안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곰삭여 펼쳐 보이는 책입니다. 글쓴이부터 책방 일꾼까지 숱한 사람들 땀방울과 피눈물이 담기는 책이기에, 우리 돈과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넋과 몸뚱이 모두를 움직여서 받아들여야 비로소 ‘책 하나로 비롯하여 책 하나로 마무리되된다’는 뜻과 값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많이 사서 읽을 수 없는 책이고, 시간이 넉넉하다고 느긋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며, 머리가 똑똑하다고 더 잘 새겨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거나 빌리거나 책방이나 도서관에 선 채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쪼개고 나누어 바지런히 읽는 책입니다. 내 마음그릇이 모자라다는 아쉬움에 힘내어 지며리 읽는 책입니다.

 돈을 얻고 싶다면, 돈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시나브로 아파트로 기울고 자가용으로 기웁니다. 사랑을 얻고 싶다면, 사랑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차츰차츰 책으로 기울고 사람으로 기울며 자연으로 기웁니다. 이름값을 높이고 싶다면, 이름값을 높여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저절로 도시에서 회사원이 되려고 하고 대학졸업장을 따려고 하며 혼인하여 낳는 아이들을 제도권입시교육에 밀어넣게 됩니다. 믿음을 얻고 싶다면, 믿음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가만가만 책으로 기울고 땀흘리는 낮은자리 일거리로 기울며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골목집으로 기웁니다.

 책이란 그렇습니다. 삶에 따라 읽게 되는 책이고, 삶에 따라 달라지는 책입니다. 삶이란 그렇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에 따라 돈으로 기울는지 사람으로 기울는지 갈리게 되며, 제 마음바탕과 생각바탕에 따라 엇갈리는 삶입니다. 돈이란 그렇습니다. 가지려고 바둥거려 보았자 가질 수 없지만, 가지게 되어도 늘 허거퍼서 더 가지려고 안달이 되고, 가지고 있어도 즐겁게 쓰거나 나누거나 펼치는 아름다움을 찾지 못합니다. 삶이나 사람이나 사랑이 마무리가 아니라 돈이 마무리였기 때문에, 돈은 많아도 돈을 나누거나 쓸거나 베풀거나 함께하는 길을 조금도 몰라요. 대학교 졸업장이 마무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누구와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느냐’를 마무리로 삼아서 대학교 졸업장을 따든 말든 해야 하는데, 맨 먼저 대학교 졸업장을 앞에 놓고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으니, 머리는 굵어지고 지식은 늘어났지만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길은 조금도 기르지 못할 뿐더러 마음씨도 비뚤어집니다.

 책을 읽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 아름다워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훌륭해지거나 거룩해지거나 참된 멋을 가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배우면서 누리고, 믿음을 익히면서 나누며, 넉넉함을 몸에 들이는 가운데 펼치며, 따스함을 헤아리면서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목숨을 받은 기쁨을 깨닫고 싶기 때문이며, 한 사람 목숨이 얼마나 소담스러운가를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고 내 이웃을 알고 싶으며 우리 모두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길을 즐기고 싶고, 이웃사람 길을 돕고 싶으며, 뒷사람 길을 닦아 놓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고 싶어 읽는 책입니다. 내 몸을 살리고 싶어 가까이하는 책입니다. 내 넋을 북돋우고 싶어 함께하는 책입니다. 내 사랑이 아름다워지도록 거듭나고 싶어서 껴안는 책입니다. (4341.12.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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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광고와 신문 ‘한겨레’
 


 신문을 읽지 않은 지 몇 해인가 헤아려 보니, 2004년부터가 아니랴 싶습니다. 술집에서 굴러다니는 스포츠신문을 더러 넘겨서 야구와 배구 이야기를 들추곤 하며, 부산에 가면 부산에서 나오는 신문을, 춘천에 가면 강원도에서 나오는 신문을 사서 넘기곤 하지만, 따로 신문을 집에서 받아보지 않습니다.

 

 1988년에 이 땅에 태어난 〈한겨레〉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한글로 신문이름을 지을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워 했지만 딱히 들여다보지 못했고, 고등학생 때 길거리에서 몇 번 사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앞에서 신문딸배 노릇을 하면서 살 때, 다른 지국에는 들어가지 않고 〈한겨레〉 지국에 들어갔고, 1995년 4월 5일부터 1999년 8월 7일까지 일했습니다(중고등학생 때 〈중앙일보〉를 돌려 본 적이 있어서, ‘조중동 배달직원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신문딸배를 그친 날부터 〈한겨레〉 정기구독을 했고,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다가 충주로 옮길 무렵인 2004년인가 2005년부터 정기구독을 끊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느 신문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신문딸배를 하던 여러 해에 걸쳐서, 다른 지국과 신문 돌려읽기를 하면서 열 가지 일간신문을 날마다 읽기도 했습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야구와 배구와 핸드볼을 남달리 좋아해서, 이 운동경기 소식을 보고자 스포츠신문을 뒤적이기는 하지만, 〈한겨레〉에 실린 운동경기 소식은 뒤적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라도 운동경기 지식이나 소식에는 젬병이거나 뒤처지기 마련인데다가 잘못 나오는 때도 잦았습니다. 〈한겨레〉가 운동경기 이야기를 신문에 싣는다고 한다면, 다른 여느 신문과는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 텐데, 처음 운동경기 소식을 실을 때부터 햇수를 거듭하는 동안 조금씩 빛깔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비인기종목 소개가 굵직하게 나오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골프 이야기가 큼직하게 실렸고, 월드컵과 올림픽을 치를 때면 아예 다른 기사를 젖혀 두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가 뜨면 박찬호를, 김병현이 뜨면 김병현을 다루었습니다. 요사이는 아마 김연아 선수 이야기를 그득그득 채울 테지요.

 

 세상흐름에 맞춰 가는 일이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흐름에 좇아 가는 일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한겨레〉가 태어날 때 돈과 마음과 힘과 손길을 보탠 사람들은 ‘그저 그런 찌라시 하나’로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신문다운 신문이 한 가지도 없다고 할 만한 이 나라에, 신문다운 신문으로 자리매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리하여 사상과 철학으로 따지면 좌파인 분과 우파인 분이 고루 모여서 〈한겨레〉를 빚어냈습니다. 좌파 지식인과 우파 지식인 가운데 겨레와 나라를 걱정하고 꿈꾸는 분들이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리영희 님은 좌파라 할 테지만 송건호 님은 우파입니다. 당신들 마음바탕을 이루는 생각은 갈릴지라도, 당신들 마음바탕을 꾸리는 매무새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가 되는 신문으로 〈한겨레〉를 빚어냈지, 둘로 셋으로 쪼개지라는(이를테면 연대파와 고대파 따위로) 신문으로 〈한겨레〉를 빚어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겨레를 말하고 나라를 말하는 신문인 〈한겨레〉로서 이 나라 낮은자리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신문으로 퍼졌습니다. ‘조중동 반대’는 곁가지일 뿐입니다. ‘조중동 반대’란, 이 세 가지 신문이 참된 마음으로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거짓된 마음으로 겨레와 나라를 무너뜨리기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인가 2005년에 〈한겨레〉를 끊을 무렵, 아니 이에 앞서도, 참 많은 이들이 〈한겨레〉를 끊었습니다. 제가 처음 〈한겨레〉를 돌리던 1995년에도 꽤 많은 이들이 〈한겨레〉를 끊었습니다. 끊은 까닭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한겨레〉가 맛이 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소리는 〈한겨레〉 기자나 경영진한테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기자와 경영진 모두는 자랑과 보람이 넘쳤으며, 50만 독자가 곧 100만도 넘고 200만도 넘으리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이리하여, 낮은자리 독자들이 ‘왜 〈한겨레〉를 끊는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헤아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느새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 분께서는 쇠밥그릇 놀이에 젖어서 여느 대기업 월급쟁이와 다름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여느 대기업 월급쟁이와 댄다면 달삯은 반토막밖에 안 되는.

 

 1998년이라고 떠올립니다. 그무렵에도 〈한겨레〉는 위기였습니다. 제가 처음 이 신문을 돌리던 1995년에도, 이에 앞서도 늘 〈한겨레〉는 위기였고, 나중에 구독을 끊을 때에도 위기였으며 요즈음도 위기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 위기 소리는 그치지 않으면서, 위기를 딛고 일어서려는 움직임은 영 보이지 않습니다. 달라지는 움직임은 너무 굼뜹니다. 그래, 그 1998년, 저로서는 그해가 참 잊을 수 없습니다. 그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로, ‘전국 3000 〈한겨레〉 배달직원이 의견광고를 내어 실었’던 일이 있습니다. 위기를 잘 이겨내기를 바라는 한편, 〈한겨레〉가 첫마음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뜻으로, 맨 밑바닥에서 〈한겨레〉를 아끼면서 집집마다 돌리는 배달직원들이 푼푼이 모은 땀방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땀방울과 눈물겨운 목소리마저도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한테는 조금도 못 들어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맨 밑바닥에 있는 배달직원들한테 그 뒤로도 어느 한 번도 ‘〈한겨레〉라는 신문을 새벽바람에 잠도 안 자면서 돌린다’는 뿌듯함을 심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옳은 기사 똑바로 잘 써서 독자한테 부끄러울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우리들 배달직원 꿈을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자에 앞서 배달직원, 우리는 ‘딸배’라고 했습니다만, 이 배달직원은 기자보다도 신문기사 하나하나에 머리털을 곤두세웁니다. 말썽 많은 재벌기업 광고 하나가 실릴 때에도 독자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배달직원인 우리가 그 따위 놈들 광고를 받아서 싣지 않았건만, 독자들은 ‘본사로 전화를 걸어 봤자, 허구헌날 자동응답으로 넘어가거나 전화만 받는 여직원이 건성으로 들어넘기’니까, 가장 만만한 지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항의를 합니다. 그러고는 ‘신문 끊겠다’고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습니다. 골프채 광고가 나와도, 타이거 우즈인지 라이언 우즈인지 하는 사람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수놓아도, 누구보다도 우리 배달직원들 지국 전화기는 애먹습니다. 더욱이, 신문값을 걷으러 다닐 때면, ‘니들(한겨레)이 하는 꼬락서니하고 조중동하고 뭐가 달라?’ 하는 눈초리인데, 아무 잘못이 없는 배달직원인 우리들이,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 때문에 눈초리를 받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노릇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짜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키지 않았음에도, 1998년 겨울을 앞둔 쌀쌀한 밤에, 일산 어딘가로 가서 ‘한겨레 독자늘리기 캠페인 광고 모델’로 나갈 사진에 찍혀 주기도 했습니다. 1998년 한글날에 ‘신문배달 직원이면서도 없는 틈을 쪼개어 우리 말 운동을 하는 당찬 젊은이’를 기린다는 뜻에서 한글학회에서 한글공로상을 주었어요. 이 상으로 제 이름이 여러모로 알려졌는데, 늘 위기를 맞이하고 있던 〈한겨레〉로서는, 캠페인 광고를 해야겠다고 느꼈고, 이 캠페인 광고에서 저 같은 배달직원을 내세우면 좋을 듯하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이리하여 신문 〈한겨레〉와 잡지 〈한겨레21〉하고 〈씨네21〉에, 제 얼굴(신문 돌리는 모습)이 박힌 캠페인 광고가 여러 달에 걸쳐서 실렸고, 언젠가 〈한겨레〉 경영진 한 분한테, 최종규 씨가 바라면 특채로 〈한겨레〉 기자로 뽑아 준다는 귀띔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때 저는 대학교를 그만둔 몸이라 고졸 학력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신문방송사 가운데 오직 한 곳만 있는 ‘학력제한 없는’ 곳이었지만, 속내를 보면 일류대 아닌 기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토익점수 제출’이 발목을 잡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경영진 분한테, “저는 특채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험을 봐서 떳떳이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시험을 치고 싶어도 토익점수를 내라고 해서 못 보겠습니다. 영어 솜씨를 알고 싶으면 영어로 글쓰기를 시키거나 영어로 면접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고, 경영진 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해서,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한겨레〉 기자는 될 수 없겠네요.”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러고 여러 해 지나, 서울을 떠나서 충주에서 이오덕 선생님 유고를 갈무리하는 일을 맡다가,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불법으로 몰래 펴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말썽을 풀려고 이오덕 선생님 유족과 권정생 선생님 사이를 오가면서 출판사 앞으로 보낼 편지 문건을 쓰고 있었고, 밑글을 쓰면서 제 인터넷방에 고치는 과정에 있는 글을 살짝 걸쳐놓았는데, 그만 이 밑글을 〈한겨레〉 기자가 말도 없이 훔쳐서 쓰면서 ‘특종’이랍시고 기사로 큼직하게 띄운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기사 도둑질 때문에 이오덕 선생님 유족과 권정생 선생님 사이에, 또 말썽을 일으킨 출판사 한길사 사이에서 진땀을 빼야 했던 일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있기 앞서 몇 달 앞서까지 저는 〈한겨레〉에 “함초롬한 우리 말”이라는 이름으로 이태 반에 걸쳐서 연재기사를 올린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한겨레 필진’인 제가 쓴 글을 아무 말이나 허락도 없이 훔쳐서 특종이랍시고 터뜨리는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한겨레〉 문화부 기자들이 저지를 줄을 누가 알았을는지요. 이에 항의를 했지만 아무 대꾸도 뉘우침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뒤로 몇 차례 제 글 도둑질이 이어졌는데, 쓰디쓰게 혼자서 웃을 뿐, 이런 사람들하고는 앞으로 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기사 도둑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당신들로서는 ‘우리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신다면. 이리하여, 신문 〈한겨레〉를 읽는 사람들한테 도움되는 이야기를 건네준다면.

 

 그렇다면, 신문 〈한겨레〉에 날마다 실리는 주식시세표는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일까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새차 소식은, 겨울철 스키장 소식은, 여름철 비행기 타고 멀리멀리 떠나는 나라밖 나들이 소식은, 수십만 원이 넘는 새 손전화기 소식은, 골프채와 비싼 물건 광고들은 …… 참말 누구한테 이바지할 소식일는지 궁금합니다. 신문 〈한겨레〉가 다루는 경제 이야기라면 어떤 경제 이야기가 되어야 할까요. 신문 〈한겨레〉가 다룰 문화 이야기라면 어떤 사람들이 누리거나 즐길 문화 이야기가 되어야 할까요.

 

 어느새 신문 〈한겨레〉가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하는데, 스무 해라는 세월을 버틴 대목은 놀랍지만, 버티기만 할 노릇이 아니라, 아름답게 자라야 하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자랄 수 없는 신문이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 ‘문을 닫고’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서채원, 김달수, 이철, 강재언, 이진희, 위양복, 사토 노부유키 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펴내던 《계간 삼천리》는 1호부터 50호까지 곧은 흐름을 잃지 않고 펴냈는데, 더 호수를 이을 수 있었음에도 굳이 50호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 뒤 새로운 잡지를 다시 펴내어 50호로 또다시 마감을 했다지만, 또 신문과 잡지는 다르지만, 글을 쓰고 글을 다루고 글을 읽히는 넋과 얼은 매한가지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글이 엮이어 신문이 되고 잡지가 됩니다. 글이 여미어져서 신문 독자가 생기고 잡지 독자가 생깁니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계간 삼천리》가 힘겨우면서도 다부지게 걸어갔던 길을, 한국 사회에서 신문 〈한겨레〉는 얼마나 힘겹다고 하더라도 다부지게 걷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신문 〈한겨레〉는 이 땅 이 나라에서 다부지게 걸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문 〈한겨레〉는 조중동처럼 200만 부 넘게 찍어야 할 까닭이 따로 없는 한편, 조중동 기자만큼 일삯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출근하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얻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는 마누라한테 떠넘기고 바깥에서 술 마시고 유흥업소에서 아가씨 끼고 노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신문 〈한겨레〉는 좌파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신문이면서, 어이없게도 좌파 신문인 듯한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참 안쓰러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정작 신문 〈한겨레〉 속내인 우파 목소리라도 제대로 내느냐 하면, 아니올시다 하는 생각만 듭니다.

 

 재벌 삼성하고 사이가 틀어져서 삼성 광고를 못 받아서 삼성하고 손을 다시 못 잡게 되는 일은 슬플 수 있고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 〈한겨레〉가 먼저 삼성 광고를 끊지 못한 대목은 그지없이 안타깝습니다. 또한, 신문 〈한겨레〉가 재벌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꾸준히 실으면서도, 광고는 아무 말썽이 없이 받을 수 있게끔 영업이나 독자관리를 하면서 ‘삼성에서 광고관리 하는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도록 신문으로 말하지 못한 대목’을 읽어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비판이란 무엇이며, 비판은 어떤 마음으로 할 때가 참다울는지를 신문 〈한겨레〉는 얼마만큼 곱씹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더 깊이 헤아릴 대목을 대충 지나쳤기 때문에 오늘날 〈한겨레〉는 끝도 없는 위기가 꼬리를 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신문 〈한겨레〉를 좋아할 분도 있고, 안 좋아할 분도 있으며, 거들떠보지 않을 분이 있는 한편, 일찌감치 등돌린 분도 있을 텐데, 구태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주절주절 떠들어 봅니다. 저 또한 〈한겨레〉를 안 보는 사람이지만, 지난 한때 〈한겨레〉가 위기라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밑바닥에서 애썼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나마 한 마디 끄적거리지 않고서는 속이 답답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저 푸념 몇 마디라고 귀엽게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로서는 〈한겨레〉라는 신문이 걸어가는 길을 보면서 여러모로 많이 배웁니다. 안타깝게도 ‘일그러진 거울’이나 ‘깨진 거울’이 되어 주면서, 한 사람이 그릇된 길로 접어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안타까움을 그득그득 느끼게 해 줍니다. (4341.12.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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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 3


 볼일이 있어 옆지기와 아기까지 함께 전철을 타고 서울 외국어대 있는 데까지 나들이를 합니다. 퍽 먼길이라서 아기도 걱정이고 옆지기도 걱정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용산역에서 내려 뒷간을 갈 때부터 조금씩 불거지고, 서울역부터 땅밑으로 파고드는 전철을 타고 달리는 내내 깊어집니다. 아기도 힘들고 옆지기도 힘겨워, 같이 나들이를 하자고 이끈 아빠는 참 바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듭니다.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길기 때문에, 책을 세 권 가방에 챙겼지만, 머나먼 길을 오가는 동안 책은 겨우 두 번 펼칠 뿐입니다. 그나마 돌아오는 길에 아기며 옆지기며 고단한 잠에 깊이 빠져들었기에, 두 사람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책을 펼쳤습니다.

 갓난쟁이하고 나들이를 가야 할 때에는 책 펼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면 두 사람을 돌보면서 둘 모두 새근새근 잠들고 나서야 비로소 애 아빠는 잠을 좇으면서 그 작은 틈을 쪼개어 책을 펼쳐야 하는지. (4341.11.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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