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깨어 일어납니다. 새벽바람이 서늘해 좀더 드러누울까 싶었으나 그냥 일어납니다. 꿈에서 저는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갓 올라간 학생입니다. 얼굴에는 아무런 빛깔이 없고 그저 무뚝뚝함만 흐릅니다. 저뿐 아니라 동무들도 마찬가지. 모두들 대학교 들어가기만을 생각하고, 3학년 담임이 된 사람도 처음 교실에 들어와서 우리들한테 하는 말이 ‘너희들 어느 대학교에 가고 싶은지 손을 들어 보라’입니다.

 아이들한테 쪽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기에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세 가지 주의사항이 적혔고, 세 번째 것은 담임선생이 들어와서 말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다른 것도 하지 말고 자기만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는 것. 속으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생각하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이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니, 이야기라 할 수 없는 중얼거림을 듣습니다. “너희들이 어느 대학교에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맨 처음에는 의대를 써라. 그 다음에는 ……” 꿈에서도, 꿈을 깬 뒤로도, 이 소리가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한참 중얼중얼 떠들더니, “자, 그러면 묻자. 너희들 가운데 혹시 대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맨 앞에 앉은 녀석이 손을 듭니다. 뒤따라 저도 손을 듭니다. “하나, 그리고 둘이냐?” 하는 중얼거림을 듣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지, 또 그 뒤로 고3 교실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모르겠습니다. 꿈이기는 하지만 다시 꾸기 싫고, 꿈이 아니라면 몹시 끔찍하겠구나 싶습니다. 남자만 다니는 학교에서 1학년 2학년 3학년 내내 남자 선생만 담임으로 보내야 하는 학교. 현실에서도 제 고등학교 3학년은 남자 선생 담임뿐이었고, 학교도 남학교였습니다. 지난날 칙칙함이 꿈에서도 똑같이 살아나 진저리가 쳐지기도 합니다.

 콩물 한 잔 마시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담벼락에 책을 올려놓고 기지개를 켭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인 듯하네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립니다. 예전에는 밤하늘 별이 훨씬 많았겠지요. 이 도시에서도.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에서 고등학교 3학년 자리에 있는 아이들은 곧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겠네요. 대학교에 가려는 아이들도, 대학교에 갈 마음이 없는 아이들도.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대학교 들어가는 시험을 치를 준비를 시키고, 내신성적이라는 이름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고, 틈틈이 모의고사를 치러서 ‘교과서 지식을 얼마나 머리속에 잘 간수하고 있는가’를 살핍니다. 아이들은 머리속에 잘 간수하고 있는 교과서 지식에 따라 차례가 매겨지고, 이 차례에 따라 모범생과 문제아이가 갈립니다.

 아이들은 ‘무슨무슨 대학교에 가려 하는가’로 ‘장래희망’을 상담하게 될 뿐입니다.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을 아이라든지, 공장에서 일하려는 아이라든지,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려는 아이라든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자기 예술을 가다듬으려는 아이라든지, 온몸을 바쳐 사회봉사나 사회운동을 하고픈 아이라든지, 다 다른 생각과 몸짓을 다 다른 방법으로 펼쳐 나가고자 하는 몸짓과 매무새를 추스르려면 어떻게 하면 더 나을지를 담임 교사와 상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들이 ‘개성 넘치는 아이들 모두한테 걸맞게 세상 경험을 들려줄 만한’ 깊이나 너비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으로 살고픈 아이한테 ‘그렇구나, 네가 시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머리 맞대며 헤아릴 교사가 있을까요. 버스기사가 되고 싶은 아이한테 ‘그래, 네가 뜻있고 멋진 버스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골똘히 헤아리며 함께 길찾기에 나서 줄 교사가 있을까요.

 대학교를 바라는 아이들한테는 어떠할는지요. 지구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벌레(곤충) 한삶을 헤아리고 싶은 아이가 생물학과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 아이가 생물학과라는 곳에 가기에 알맞도록 차근차근 도와줄 만한 깊이를 갖춘 교사가 몇 사람쯤 있을까요. 잠자리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물방개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가문비나무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삵을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우리네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들은 무슨 도움말을 건네고 어떤 도움책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그림을 그리고픈 아이한테 입시미술이 아닌 생활미술을 일러 주면서, 스스로 자기 그림감을 찾아나서도록 이끌고, 학원미술이 아닌 자기 그림결을 찾는 그림그리기로 나아가도록 붙잡아 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가 있을까요. 사진을 찍고픈 아이한테, ‘오호라, 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렇다면 지금 네가 있는 이 학교에서 사진을 찍어 보지 않으련?’ 하고 먼저 나서서, 교실 풍경과 학교 삶을 두루 사진에 담도록 마음을 써 줄 만한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가 있을까요. 아니, 초중고등학교 아이들 삶과 교사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보여주는 교사는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우리들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느끼고 보았던 모습을 꾸밈과 거짓과 숨김과 감춤이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힘쓰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진 찍는 교사’란 참말 있기나 할까요. 교사 스스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부모 스스로 더 깊은 세상을 느끼려 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바라기만을 하면서 그 풋풋하고 싱그럽고 살가운 젊음을 형광등 불빛만 쬐며 허여멀건 얼굴로 늙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생각해 보니,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는 학생들도 자기들이 다니는 대학교 모습이나 대학생 삶이나 대학교 둘레 사람들 발자취를 사진으로 더듬거나 헤아리는 일은 안 하고 있네요.

 지난밤에 《전태일 통신》(후마니타스,2006)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짤막하게 쓴 글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 가운데 민종덕이라는 분이 쓴 글을 읽으니,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는 전태일한테 명예졸업장(초등학교)을 주려고 하던 뜻깊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글 끝에 ‘졸업장 하나 없이 살아간 전태일’한테 ‘졸업장이 꼭 있어야 했을까?’라고 하면서, 우리 사회는 왜 이리 졸업장 열병에 물들어 있을까를 놓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대학교에 돈 많이 바친 어느 재벌총수한테 명예박사학위를 주려 하니 학생들이 반대하더라는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졸업장이 많다고 농사를 잘 짓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차를 얌전하게 잘 몰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사기공갈 안 친다는 법이 없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가난하고 힘겨운 이웃을 알뜰히 사랑하거나 보살피도록 마음을 더 기울이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주정뱅이가 안 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자기가 땀흘려 번 돈을 사회에 돌려주며 값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동화책을 잘 쓰지 않으며, 사진을 더 잘 찍지도 않고, 만화를 더 잘 그리지도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은 사람이 인문학 책을 더 잘 써내지 않는 한편, 종교를 다룬 책이든 문화를 다룬 책이든 철학을 다룬 책이든 경제를 다룬 책이든, 더욱 속속들이 헤아리며 짚어낼 수 있는 눈길이나 눈높이가 있지 않습니다.

 꿈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새벽까지 꾼 꿈을 깬 뒤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그때 꿈속 고3 담임 교사한테 이렇게 읊습니다. “저는 대학교에 가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사진을 찍으며 살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동무들 공부하는 데 거슬리지 않게 있고, 없는 사람인 듯 조용히 지낼 테니, 교실에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다니는 이 학교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10년쯤 뒤에 사진책 하나 내고 싶습니다.” (4340.10.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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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가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젯밤, 그리고 오늘낮, 집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16∼17도입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은 20도를 넘길까요? 오늘은 며칠 만에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부랴부랴 이불을 걷어서 담벼락에 널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감고 웃도리와 수건 빨래를 합니다. 온도계로는 가을이라 그런지 이른새벽이나 이른아침에는 머리감기 힘듭니다. 이제 막 가을 문턱을 넘어서서 그럴 텐데, 조금 지나면 익숙해지겠지요.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잘만 감아 왔으니까요.

 빨래는 집안에 널어 놓은 다음, 머리카락 물기를 조금 털어내고 마당으로 나와 해바라기를 합니다. 갈비뼈처럼 보이는 양털구름이 좋아 보여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앞집 하나 건너에 있는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요새는 전철길을 따라 길게 울타리가 놓여서 시끄러운 소리를 조금이나마 막아 줍니다. 이 울타리조차 없던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 사람들은 우예 살았을까요. 아니,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리 공해’에 시달린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겠지요. 생각해 보면, 기찻길이든 넓은 찻길이든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죽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모여살던 마을은 그예 두 동강이 나서 얼결에 남북, 또는 동서로 갈린 채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처럼 되고 맙니다. 때때로 고속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이 고속도로 왼편과 오른편으로 갈린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갈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어쩌면, 두 마을 분들은 서로 오갈 일이 없을지 모르겠고, 고속도로로 나뉜 지 오래되어서 서로 오갈 일도 사라졌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동안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데에도 머리카락 물기가 거의 다 마릅니다. 웃도리를 들고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물 한 잔 마시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4340.10.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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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방 하나를 조용히 꾸려가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적어 놓은 글을 읽고 댓글을 하나 남겨 보았습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는 ‘사교육(과외)’으로 쉽게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불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으로서 가장 쉽고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거고, 나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좀더 몸을 쓰면서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고. 이 마음을 앞으로도 고이 이어나갈 수 있다면, 나날이 추스르고 북돋우며 살뜰히 가꿀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한결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저는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희망도 없고 꿈도 없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러니? 네 곁에는 내가 있는걸.’ 하고 한 마디 해 줄 수 있겠네요. 〈한겨레〉에 시험 치고 들어가실 수 있다면, 들어가셔서 힘껏 싸워 주셔도 좋겠구나 싶습니다. 다만, 저는 〈한겨레〉가 ‘학력제한 없음’을 내걸고는 있지만, 여태까지 어느 한 사람도 학력제한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대졸자가 아니면서도 이곳에 취직한 사람이 없다는 대목에 슬프고, 학력제한이 없으면서 토익점수를 내라고 하는 입사자격제한이 슬퍼서, 예전에 특채로 뽑아 주겠다고 하는 제의를 거절하고, 토익점수 내라는 자격제한을 풀면 공채로 들어가겠다고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1998년과 1999년 사이에. 생각해 보면, 글은 길게 쓰거나 짧게 쓰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담아냈느냐, 자기 마음이 아닌 헛소리나 딴사람생각 짜깁기를 늘어놓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자기 삶을 찬찬히 담고 있다면, 짧은 글은 짧은 글대로 좋고, 긴 글은 긴 글대로 좋습니다. 지금 세상은 짧거나 길거나 제대로 자기 삶을 담아서 적바림하고 있는 글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고 느낍니다.” (4340.10.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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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ㅎ이라는 분이 쓴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 보았습니다. 문득, 나도 이 ㅎ님처럼, 누군가를 비평하거나 어느 작품을 비평할 때, 좀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미리 ‘마무리말(결론)부터 내려 놓고 밀어붙이기’를 하지 않았는가 싶어서, 또 ‘내 생각만 옳은 듯 칼부림 글을 쓰지 않았는가’ 싶어서.

 제가 적은 댓글은 이렇습니다. “어떤 작품을 이야기할 때, 그 작품을 쓴 사람이 그동안 이루어 온 다른 작품들을 함께 살피지 않고 이야기를 해야만, 올바르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규석 같은 사람 다른 작품들은 인터넷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이가 다른 작품을 어떻게 펼쳐내고 있는가를 좀더 차근차근 살피지 않고, 이 작품 하나로만 평가와 결론을 내리는 일은 적잖이 섣부르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군요. 이른바 게으름이라고 할까요. 한편, 최규석이라는 분한테는 손수 인터넷편지를 띄워서, 이 만화를 어떤 생각으로 그렸는가 하고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직접 알아보고 쓰는 글하고, 자기 생각만으로 결론을 다 내려버린 다음에 쓰는 글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4340.10.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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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


 창가로 밝은 빛이 스며든다. 늦었나 싶으면서도 몸이 고단하여 조금 더 눕는다. 그러다가 이제는 더 어기적거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일어나서 시계를 본다. 여덟 시 반. 히유. 그다지 늦은 편은 아니구나. 열 시가 넘은 줄 알았는데.

 기지개를 켜고 찬물 한 잔 마신다. 씻는방에 들어가서 낯과 손을 씻은 다음, 어제 담가 놓은 빨래를 세 가지만 한다. 닷새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다닌 탓에 몸이 많이 찌뿌둥하다. 잠도 모자라다. 다음 한 주는 집에서 멀리 나가는 일을 줄여야겠다. 밀린 일도 많고.

 빨래 두 가지는 집안에 넌다. 하나는 마당으로 들고 나와서 빨랫줄에 건다. 잠깐 해바라기를 한다. 아침햇살은 늘 따뜻하고 반갑다. 담벽에 기대어 이웃집 지붕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추잠자리 세 마리가 잰 날갯짓을 하며 내 옆쪽 담벽에 앉는다. 잠자리가 나오는 철인가. 지난달에도 잠자리 한 마리 보았는데. 가만히 잠자리를 들여다보다가 사진기를 꺼내 와 몇 장 찍는다. ‘좀더 가까이’를 생각하며 살살 다가서니 호롱 하고 날아간다. 먼곳 사물을 잡아당겨 찍는 렌즈가 없으니 아쉽다. 도서관으로 내려와 창문을 하나씩 열고 물을 반 잔 마시고 밀린 설거지를 한다. 조금 있으니 배가 살살 아파서 책 한 권 들고 살림집으로 올라가 뒷간에 들어간다. 책을 펴고 똥을 눈다. 개운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온다. 마당 담벽을 슬그머니 바라본다. 고추잠자리는 한 마리만 보인다. (4340.10.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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