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안는 마음


 스물한 달째 살아가는 아이를 가슴으로 안으며 다닐 때에는 팔이 떨어질 듯하다. 더욱이 애 아빠가 하는 일이란 책방마실이나 골목마실인 터라, 바깥에 한 번 나오면 예닐곱 시간은 우습게 돌아다닌다. 아이는 너덧 시간을 아주 신나게 놀더라도 지쳐 걸음이 더디거나 졸음에 겨워 하기 마련이다. 이때에는 애 아빠가 아이를 안고 다녀야 하고, 아이를 품에 안으며 재워야 한다. 아이 옷가지며 책이며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등에 메고 사진기를 목에 건 채 아이를 안고 걷자면 다리통이 퉁퉁 붓고 발바닥이 후끈거리며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내가 더위를 타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날이 쌀쌀하다며 나보고 왜 긴옷을 안 입느냐고 물을 때면 그저 빙긋 웃는다. 아이를 키워 본 분들조차 아이를 안고 다니면 얼마나 힘들고 더운 줄을 잊었을까. 아이를 수레에 태워 밀고 다니면 나처럼 땀 뻘뻘 흘리며 온몸이 뻑적지근할 일은 없겠지. 하루하루 아이 몸무게가 차츰차츰 늘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팔이 빠지고 고되리라 본다. 오늘은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가 넘을 때까지 아이하고 돌아다니며 똥 싼 바지를 빨고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품에 안아 낮잠을 재우고 아이 손에 붙잡혀 여기저기 다니고 계단 오르내리기 도와주고 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힘에 부친다고 느낀다. 함께 골목마실을 하던 분들이 아이를 한동안 안아 주었기에 지쳐 쓰러지지는 않았는데, 배고프고 졸린 아이를 혼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래도 콩물 두 잔을 마시고 밥 조금 먹은 아이가 속이 든든해졌는지 투정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아빠하고 있어 주어 고맙게 달래면서 토닥토닥 재웠다. 팔이 저린 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아이를 수레에 싣고 걷는 다른 애 엄마나 애 아빠를 보며 오늘 하루만큼은 슬며시 부러웠는데, 부러우면서도 저이들은 팔 빠지고 팔 저리고 온몸 쑤신 어버이로 지내는 괴로운 기쁨을 모르겠구나 싶어, 나는 앞으로도 아이수레는 쓰고 싶지 않다. 힘에 겨우니까 이렇게 힘에 겨운 대로 살고 싶다고 할까. 힘에 겨우니까 힘에 겨운 짐을 내려놓는다기보다 힘에 겨운 짐을 더 단단히 붙잡으며 내 삶을 다스리고 싶다고 할까. (4343.5.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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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맞는 마음


 퍽 모처럼 식구들과 함께 읍내 마실을 한다. 읍내 마실을 하면서 생각한다. 예전 사람들은 사일장이든 오일장이든 장날에 맞추어 읍내에 마실을 한다고 했다지만, 이런 읍내 마실조차 매우 드문 일이었으리라고. 한 달에 한 번쯤 마실을 했으려나. 두어 달에 한 번쯤 마실을 했을까.

 아이 엄마랑 아이랑 나란히 읍내 마실을 한 지 한 달쯤 되지 않았나 싶다. 이래저래 딱히 읍내로 마실을 할 일이 없었다. 모처럼 읍내에 나가서 중국집에 들러도 그닥 맛있지 않다고 한다.

 아이를 걸리다가 안다가 하면서 시골버스 타는 데로 간다. 집을 나서며 시골길을 조금 걷는데, 집 둘레 멧자락에서 보던 느낌하고 사뭇 다르다. 시골자락 가을은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버스 타는 때를 맞추어야 하지만 살짝살짝 가을맛을 보면서 걷는다. 이러다가 어쩌면 늦을까 걱정스럽다. 저 앞 시골버스역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보며 걷다가 아이고, 내리막을 따라 시골버스가 탈탈탈 내려오는 모습을 본다. 큰일이다. 어, 아직 버스역까지 가려면 더 걸어야 하는데. 아이를 안고 헐레벌떡 달린다. 손이라도 흔들어야 하나 싶어 손을 흔들며 달린다. 아이도 아빠 품에 안긴 채 손을 흔들며 함께 소리를 질러 준다. 버스기사는 못 보고 못 들은 듯. 버스가 탈탈 움직이려 한다. 다시 부르고 자꾸 부르니 버스가 가려다 멈추고, 또 가려다 멈춘다. 아예 멈추어 주거나 뒤로 와 주어도 좋으련만. 왜 자꾸 갈 듯 말 듯 그러나.

 버스기사는 차갑게 떠나지 않았다. 버스에는 여고생 두 사람이 먼저 타고 있다. 어, 어느 마을에 사는 학생들이지? 탈탈 느릿느릿 달리는 버스는 손님을 한 사람 더 태우고 읍내로 들어선다. 모두 다섯 사람이 탔다. 여느 때에는 우리 식구들만 타기 일쑤이다. 장날이 아니라면, 또 주말이 아니라면 우리 식구들만 타는 널따란 택시와 같달까.

 버스가 달리는 산등성이를 따라 곱게 이어진 층층논에서 누렇게 익던 벼는 모두 베어내어 텅 비다. 누렇게 익은 벼가 찰랑거리던 때에도 곱고, 모두 베어내어 볏단을 묶은 때에도 곱다. 햇볕에 반짝이는 가을 은행잎은 금빛과 닮았고, 가을 은행나무 옆에서 나란히 자라는 감나무에 대롱대롱 달린 감알 또한 금빛과 닮았다. 감알은 보는 자리에 따라, 또 아침이냐 낮이냐 저녁이냐에 따라 빛깔이 사뭇 다르게 바뀐다. 시골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빛바뀜을 날마다 즐길 수 있어 고맙다. 멧자락에 깃든 감나무랑 읍내에 깃든 감나무랑 들판에 깃든 감나무랑 모두모두 빛과 모습이 다르다. 감알을 따서 책시렁 한켠에 얹어 놓고 날마다 들여다보노라면, 날마다 차근차근 익으며 보여주는 빛깔이 참 예쁘다.

 읍내로 마실을 나서는 길에 흔하디흔하다 할 만한 빨간 나뭇잎하고 어우러지는 노란 나뭇잎이랑 아직 푸른 나뭇잎이랑 빈 들판을 살며시 사진으로 담는다. 흔하디흔한 모습이기는 한데, 해마다 새삼스러운 흔한 모습이라 좋다. 우리 아이한테는 이제 막 새롭게 보는 흔한 모습이요, 앞으로 해마다 다 달리 마주하며 맞아들일 새 가을 빛깔일 테지. 나한테 사진기가 있어 이 모습을 담으니 좋고, 사진찍기를 하며 살아가니까 이 모습을 살뜰히 옮겨 딸아이랑 앞으로도 오래오래 즐길 수 있어 좋다. (4343.1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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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을 먹는 마음


 감알을 밥상에 올려놓는다. 옆에 쟁반이 보여 쟁반으로 다시 옮긴다. 감알은 열두 알이 작은 쟁반에 꼭 찬다. 세 알을 더 놓아야 해서 두 알을 위에 얹는다. 아이는 옆에서 아빠를 지켜보며 저도 한 알을 위에 얹는다. 그러고 이듬날 아침, 아이는 아직 잠들어 있다. 새벽부터 바지런을 떨며 글쓰기를 하던 아빠는 감알을 두 알 먼저 먹는다. 한 알을 더 먹을까 하며 어느 알을 먹을까 헤아린다. 먼저 먹은 두 알은 생채기가 있던 감알. 이제부터 먹을 감알에는 생채기가 하나도 없다. 조금 큰 알? 살짝 작은 알? 아이가 한입에 먹을 작은 알을 남길까? 아이한테 큰 알을 먹으라고 할까? 음, 열세 알이 있으니 아빠가 큰 알을 먹고 열두 알을 남길까? 오늘은 아빠가 큰 알을 차지해 볼까? 아이는 으레 더 큰 알을 제가 차지한다. 아빠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에 아이 또한 이렇게 하는지 모른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도, 또 아이가 보지 않는 뒤에서도, 아빠가 조금 더 작은 알을 골라서 먹어야겠다. (4343.10.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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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보듬는 마음


 지난 열흘 동안 애 아빠는 다른 어디로 혼자 볼일 보러 먼길을 나서지 않습니다. 아이랑 옆지기랑 꼭 붙어서 지냅니다. 옆지기는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기에 아이랑 노는 몫은 으레 아빠가 맡습니다. 아빠한테는 할 일이 멧더미 같으나 멧더미 같은 일거리는 흔히 뒤로 젖혀 놓습니다. 다만, 날마다 쓸 글은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아이가 잠이 깰 무렵까지 신나게 써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하지만 고단하다는 티를 되도록 안 내려고 용을 쓰면서 아이랑 놉니다. 이러면서 이렇게 잠도 안 자는 아이랑 하루 내내 부대끼자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고, 옳게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이’들이 얼마나 힘겨운 노릇이며 이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뼛속 깊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먼저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아이를 부릅니다. 그림책을 하나 꺼냅니다. 하나 더 꺼내고 또 하나 더 꺼냅니다. 드러누워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도 함께 보자고 부릅니다. 아이가 와서 “누워! 누워?” 하면서 엉덩이를 들이밉니다. 그림책은 배에 얹고 아이를 두 손으로 안아 얌전히 눕힙니다. 팔베개를 할까 말까 하다가 아기 베개에 머리를 놓습니다. 그림책을 듭니다. 여느 때라면 누워서 책을 든다고 팔이 아플 까닭이 없지만, 아침부터 갖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랑 놀다 보면 누구나 팔이 저립니다. 그래도 꾹 참고 그림책을 넘깁니다. 새로운 그림책을 보고도 싶지만, 아주 재미나다고 느끼는 그림책만 보고 또 보고 다시 봅니다. 팔이 저리고 졸리며 고단할 때에도 언제나 새롭게 보고 즐길 만한 아주 훌륭하다 싶은 그림책이 아니면 아이를 재우면서 읽힐 수 없습니다. 그림책은 지식책이 아니에요. 그림책이란 삶책이요 사랑책입니다.

 세 권을 내리 읽으니 참말로 팔이 후들후들. 아이보고 이제 “벼리도 코 자야지. 토끼도 코 자고 고양이도 코 자는데, 코 자자.” 하고 말합니다. “토끼 코 자? 고양이 코 자?” 하면서 도무지 곱게 잠들어 줄 낌새가 아닙니다. “응, 아빠도 코 잘게. 드르렁! 드르렁!” 일부러 코고는 소리를 내다가 실눈을 뜹니다. 아이는 잘 생각을 않으며 조그마한 손으로 살며시 아빠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아빠가 가여워 보였을까요. 아빠가 힘들어 보였을까요. 아니면 아빠를 사랑해 주려는 마음일까요. 엄마나 아빠가 저를 그렇게 살며시 쓰다듬어 주곤 하니까, 이런 손길을 떠올리며 아빠한테 돌려주는 셈일까요.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 얼마나 고마우며 사랑스러운가를 살 떨리도록 느낍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습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글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겠지요. 인문책이란 지식책이 아니랍니다. 인문책이란 사랑책이며 삶책입니다.

 지식을 주워담아서는 그림책이든 인문책이든 될 수 없으나, 책조차 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꽉꽉 들어찬 낱말을 엮어 지식을 꽃피우는 놀라운 얼거리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림책이나 인문책이 될 턱이 없어요. 이런 책은 모두 부질없는 자랑책이자 돈책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책다운 책이고자 한다면 눈물책이거나 웃음책이어야 합니다. 땀방울책만으로는 책이 되지 못합니다. 차근차근 살림책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살림책이 되려면 땀방울은 밑바탕으로 깔아 놓으니 땀방울책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햇살책 달빛책 별빛책 구름책 하늘책 흙책 배추책 보리책 바람책 냇물책 바다책 멧새책 무지개책 들이 고루고루 어우러지면서 바야흐로 살림책이 되고, 이 살림책 가운데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인문책이든 가지를 칩니다. (4343.10.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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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밥 하는 마음


 내 어머니를 뵈러 찾아가든, 옆지기 어머님을 뵈러 찾아가든, 언제나 밥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가 두 어머니한테 밥 대접을 해 드리고 싶으나 좀처럼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힘듭니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란 뒤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 딸아이가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다면 나와 옆지기는 쉰을 넘고 예순을 넘겠지요. 이때에 딸아이가 밥을 차려 주겠다 할 때에 나나 옆지기는 어떻게 마주할까 궁금합니다. 가만히 앉아 넙죽 받아먹기만 하려나요.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두 할머니가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 뒤까지 튼튼히 살아가신다 하면 어떻게 하실는지 궁금합니다. 나이를 많이 자셨으니 조용히 밥상을 받으실는지, 나이가 많으신데에도 어찌 귀여운 손녀한테 밥상을 받느냐며 당신이 차리실는지요.

 두 어머니는 두 아이한테 늘 새로 한 밥을 차리고 새로 한 반찬을 내놓습니다. 해 놓은 밥이건 식은 밥이건 도무지 내놓지 않습니다. 먹던 반찬 또한 되도록 내놓지 않습니다. 그냥 손쉽게 주셔도 되건만, 또는 우리가 알아서 차리면 되는데, 두 어머니는 당신 몸을 움직이고 당신 손을 놀립니다.

 아침마다 아이가 먹을 새밥을 합니다. 아침에 몸이 몹시 고단하여 새밥을 못한다면 낮이나 저녁에 새밥을 합니다. 하루에 한 번만 새밥을 합니다. 두 번 새밥을 하고 싶으나 아이가 아직 밥을 조금만 먹기에 밥을 두 번 하기 힘듭니다. 나중에 씩씩하게 커서 밥을 꽤 먹는다면, 아이랑 아빠가 먹을 밥을 하루에 두 번 할 날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여느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 되면 아이가 잘 안 먹어 밥이 조금 남기 일쑤입니다. 이 밥은 고스란히 이듬날로 넘어갑니다. 아이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밥상에 이 밥을 그대로 놓습니다. 이듬날이 됩니다. 새밥을 합니다. 새밥 냄새가 구수합니다(아이한테도 구수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구수하다고 느껴 주기를 빌지만 참말 모를 일입니다). 아이 밥그릇에 있던 헌밥은 아빠 밥그릇으로 옮깁니다. 아이 밥그릇은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은 다음 새밥을 담습니다. 이러면서 떠올립니다. 아하, 두 어머니가 당신 두 아이한테 새밥을 굳이 차리는 마음이란 내가 내 아이한테 노상 새밥을 해서 가장 먼저 떠서 주는 마음이랑 똑같다고. 책을 새로 써낼 때 서양사람은 으레 당신 아이라든지 옆지기라든지 어머니한테 바친다는 말을 거의 빠짐없이 적어 놓는데, 이 마음도 새밥 하는 마음이랑 고스란히 이어지겠다고.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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