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는 마음


 예뻐 보이는 그림을 보여주려고 영화를 찍지 않으며, 이렇게 하려고 영화를 찍는다면 부질없습니다. 재미나 보이는 줄거리를 들려주려고 영화를 찍지 않으며, 이렇게 한다면 영화를 찍는 일이 덧없습니다. 확 잡아당기는 짜임새를 뽐내려고 영화를 찍지 않으며, 이러한 영화라면 영화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습니다. 이름난 배우를 수두룩히 받아들여 돈을 벌려고 영화를 찍지 않으며, 이리 한다면 영화는 아주 형편없이 되고 맙니다. 빼어난 감독이라든지 넉넉한 감독이 있다든지 해서 영화가 아름다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영화 하나 찍어 살뜰히 나누는 길이란, 영화 촬영기를 손에 쥔 사람들 마음밭에 땀이라는 씨앗과 사랑이라는 손길을 바쳐 맛나고 싱그러울 푸성귀나 곡식을 일구는 길입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재미 삼거나 시간 죽이기를 하거나 이름난 작품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애써 짬을 내어 영화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한다면, 이 영화 하나로 내 마음이 살찌면서 아름답게 거듭나도록 이끌고 싶기 때문입니다. 영화 보는 마음이 고스란히 살아숨쉰다면, 책을 보는 마음 또한 가지런히 살아숨쉽니다. (4343.12.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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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쥐는 마음


 책을 아끼는 마음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곧 책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책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책을 돌보는 마음은 사람을 돌보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돌보는 마음은 곧바로 책을 돌보는 마음입니다.

 나는 헌책방을 다닐 때에 비로소 책을 아끼는 마음과 책을 사랑하는 마음과 책을 돌보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새책방을 다닐 때에는 그때그때 잘 팔리는 책이라든지 눈에 뜨이는 책이라든지 읽을 만한 책이라든지 찾을 뿐이었습니다. 잘 팔리는 책을 사서 읽든 눈에 뜨이는 책을 장만하여 읽든 읽을 만한 책을 살펴 읽든 하나도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읽기는 그저 책읽기입니다. 책을 읽고 그치는 책읽기요 또다른 책읽기로 뻗는 책읽기입니다.

 나는 책읽기만 되풀이하는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읽기는 즐겼지만 또다른 책읽기로 뻗기만 하는 책읽기는 즐기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며 한 줄이 가슴에 와닿으면 이 한 줄 때문에 책을 샀고, 책을 읽다가 마지막 줄에 이르러 뒤통수를 쿵 내려치듯 엉터리 모습을 본다면 이 아까운 책을 아깝다 여기지 않고 내다 버렸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말을 하는 책이어야 읽을 만하다 여겼지만, 참말만 있고 참삶이 없다면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참말만 가득하고 참삶은 한 가지조차 없다면, 제아무리 참말이 훌륭하거나 거룩하달지라도 못마땅합니다.

 나 스스로 참삶을 일구며 길어올린 참말일 때 가장 반갑고 즐겁습니다. 나부터 참삶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가운데 얻은 참말일 때 가장 고맙고 벅찹니다.

 책을 쥘 겨를이 없이 아이하고 부대낍니다. 아이가 낮잠 없이 늦게까지 안 자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이듬날 아침이나 새벽에 아주 일찍 깨어나면 그지없이 죽을맛입니다. 아이 아빠는 하루 내내 아이한테 시달리면서 몸이 지쳤는데, 그나마 아침나절에 글조각 좀 붙든다든지 책귀퉁이 집어들 무렵부터 또다시 아이하고 복닥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이만 한 나이였을 적에 틀림없이 나 또한 우리 어머니를 이렇게 힘들도록 했을 테니까요. 나는 내 아주 어린 나날은 떠올리지 못하는데, 나도 내 아이처럼 아침잠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에 으레 새벽 여섯 시나 다섯 시 반쯤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또는 아버지 뒤에 아침을 먹고 나서 일찌감치 학교길에 올랐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에는 조금 늦게 갔으나 2학년 즈음부터는 학교에 닿은 때가 으레 아침 일곱 시 안팎이었습니다. 학교 지킴이 아저씨조차 아직 나오지 않은 때, 학교문이 잠겨 있어 으레 담을 타고 학교로 들어와서 조용히 내 자리에 앉아 하루를 열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내 아이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며 어머니가 하루일을 열기 번거롭도록 했는지 모릅니다.

 글조각 하나 건사하지 못하며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이맛살을 가만히 문지릅니다. 히유 한숨을 쉽니다. 아이를 무릎에 눕히다가는 아이 사진을 몇 장 찍다가는, 그래 이렇게 일찍 깨어났으니 일찍부터 배고프겠다고 생각합니다. 얼른 아침을 차려 주어야겠습니다. 어제도 못 쓰고 오늘도 못 쓰는 글은? 글쎄, 언젠가는 쓸 수 있겠지요. 아이가 아침을 참말 일찍 먹고 나서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인형하고 놀아 주면서 제 아빠가 일하도록 도와준다면 그때에는 쓸는지 모르지요. (4343.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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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을 까는 마음


 아이가 낮잠 잘 때를 넘겼다. 낮잠 잘 때를 넘겼는데 산에 간다며 웃집 할배 뒤를 따라 엉덩이 실룩실룩 하면서 산길을 오른다. 아이는 웃집 마당이며 멧기슭에서며 신나게 뛰어논다. 이제 슬슬 배고파 할 때가 될 텐데 싶어 걱정이다. 아이는 한 시간 남짓 뛰고 엎어지며 놀다가 아빠 손을 붙잡고 집으로 내려가자며 이끈다. 집에 닿으니 아이는 사탕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배고픈 아이한테 사탕을 줄 어버이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아빠가 무슨 사탕 공장이라도 되니?

 어제 읍내 장마당에서 사 온 물고기묵으로 끓인 찌개를 내놓고 밥을 푸고 반찬을 차린다. 아이는 사탕 노래를 부르며 눈물까지 뚝뚝 떨어뜨리며 운다. 사탕이 그토록 먹고 싶니? 그러나 밥 한 술 안 뜨는 아이한테 어느 어버이가 사탕을 주겠니?

 읍내 장마당에서 함께 사 온 밤을 애 엄마가 구웠기에, 이 구운 밤을 애 아빠가 칼로 깐다. 아이는 밥은 쳐다보지 않고 울기만 한다. 밤을 세 알쯤 깠을 무렵, 드디어 아이가 밤조각 하나를 먹어 준다. 눈물은 그치고 냠냠 씹어 먹는다. 히유, 이 뒷북 돼지. 그러나 졸음이 쏟아지고 배까지 고팠던 아이는 이내 아빠 무릎에서 곯아떨어진다. 아이를 무릎에 눕힌 채 한동안 재운 다음 바닥으로 옮겨 눕힌다. 두 시간 즈음 곯아떨어져 잠든 아이는 벌떡 깨어나 다시금 사탕 노래를 부른다. 찌개를 덥혀 밥상을 차린다. 아이가 울며 사탕 노래를 부르거나 말거나 애 아빠는 또다시 밤을 깐다. 밤을 두 알쯤 까니까 이제서야 밤조각 하나를 먹어 준다. 아이가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물고기묵 한 조각을 먹어 준다. 밥도 조금 먹어 준다. 애 엄마가 달걀을 두 알 부쳐서 애 아빠보고도 하나 먹으라 했지만, 아이가 노른자만 골라서 두 알 다 파먹는다. 아빠는 모르는 척하면서 밥을 먹인다. 아이는 밥그릇을 4/5쯤 비운다. 찌개도 꽤 많이 먹어 주고 김치랑 밤도 함께 먹는다. 꽤 배가 불렀는지 더 먹지는 않고 사탕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눈물바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제 활짝 웃고 떠들면서 방과 방을 뛰어다니며 논다. 그래, 너 참 잘났어. 누가 닮았니? 아빠 닮았니?

 그러고 보면, 애 아빠는 국민학교 삼 학년 적이었나 홍역을 앓으며 여러 날째 드러누웠을 때, 어머니(아이한테는 할머니)가 무얼 해 줄까 하고 물어 보셨을 때 “조립식 사 주셔요.” 하고 노래했다. 어머니는 다른 건 다 해 주어도 그런 건 해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먹을거리라든지 옷이라든지 다른 무엇에는 예나 이제나 아무런 마음이 없다. 옷을 사 달라느니 신을 사 달라느니 사탕을 사 달라느니, 비싸고 드문 바나나를 맛보게 해 달라느니 하는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다. 뻔히 보아도 집살림이 넉넉하지 않은데 이런저런 노래를 부르며 칭얼거릴 수 없었다. 조립식 노래를 부를 때에도 어머니보고 사 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달이 받는 돈을 모아 조립식을 살 테니까 봐 달라는 소리였다.

 애 엄마는 애 아빠가 아이하고 자전거를 타고 읍내 장마당에 간다고 했을 때에 밤을 사 오라 말했다.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밤을 먹으면 아이이든 어른이든 살이 오른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아이가 하도 밥을 잘 안 먹어 밤이라도 먹이며 무럭무럭 잘 자라도록 하려는 마음이란다.

 애 아빠는 아이가 칭얼거린다고만 말하거나 생각할 뿐, 이 칭얼쟁이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우거나 알뜰히 돌보아야 좋을까를 살피지 못한다. 어쩌면, 아이에 앞서 아빠부터 뒷북이 아니겠는가. 아이는 아빠를 닮아 뒷북이지 않겠나. 그러니, 애 아빠로서 사탕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밥상머리에 앉히고 천천히 밥술을 떠먹이면서 조용히 밤을 까서 한 조각 두 조각 가만히 먹일밖에. (4343.11.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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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추 꿰는 마음


 스물여덟 달을 사흘 넘긴 아이가 아침부터 속옷을 들추더니 단추를 하나하나 끌른다. 속에 입은 옷은 단추로 꿰도록 되어 있는데, 일부러 스스로 단추를 끌른다. 날이 따뜻하지 않은데 이렇게 단추를 끌르면 안 되니 “녀석아, 단추를 자꾸 끌르면 어떡해. 단추를 채워야지.” 하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신나게 단추를 끌르다가 “채워? 단추 채워?” 하더니 단추를 다시 채우려 한다. 끙끙 용을 쓰다가 드디어 맨 밑 단추 하나를 채운다. 어, 어라? 단추를 채웠네? 이 녀석, 드디어 단추를 채울 줄 알았구나.

 아이한테 나머지 단추도 채워 보라 하고는 아빠는 다른 일을 한다. 조금 뒤에 보니 아이가 나머지 단추까지 모두 채웠다. 이런, 더 대단한 일이잖아. 단추를 채우기까지 스물여덟 달이 걸린 셈이니? 아니, 첫 단추 하나를 꿰자마자 막바로 다른 단추까지 꿰어 냈구나. 아이야, 참 대단한 일을 했구나.

 아이는 용을 쓰며 채운 단추를 다시 끌른다. 뭐니? 또 왜 끌르니? 가만히 지켜본다. 옳거니. 아이는 제가 처음으로 단추 꿰기를 해낸 줄 모른다. 다만, 저 스스로 단추를 꿰었다가 끌렀다가 되풀이하는 놀이를 하는가 보다. 아빠나 엄마가 노상 해 주던 단추 꿰기랑 끌르기를 저 스스로 해 보고 싶은가 보다. 요사이는 날마다 새로운 말을 아빠한테서나 엄마한테서나 배워 곧잘 따라하는데, 손놀림이 퍽 좋아졌기에 이처럼 단추를 꿸 수 있겠지.

 스물여덟 달. 아빠로서는 참 기나긴 나날이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오며 갖은 뒤치닥거리를 도맡으며 보낸 스물여덟 달은 얼마나 긴가. 그러나 앞으로 살아낼 나날은 훨씬 길겠지. 앞으로는 스물여덟 달뿐 아니라 스물여덟 해, 또는 쉰여섯 해를 아이랑 함께 살아갈는지 모른다. 이동안 아이와 함께 살아내며 새롭게 깨닫거나 새삼스레 마주할 기쁜 눈물과 웃음은 얼마나 많을까. 아마, 날마다 새로운 눈물과 웃음이겠지. 언제나 새삼스러운 기쁨과 슬픔일 테지. 아이야, 오늘 코 자면 이듬날은 금왕읍 장날이니까, 날이 너무 춥지 않으면 함께 자전거 타고 마실을 다녀오자. (4343.11.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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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 감는 마음


 아침에 빨래를 할 때에 머리를 감는다. 겨울이니 따순 물이 나오도록 튼 다음, 찬물이 나오는 동안 머리를 감는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다가 아침을 맞이했으면 이대로 잠이 들지 않기를 바라며 찬물로 머리를 감고, 아침에 조금 눈을 붙인 다음 일어나서 빨래를 할 때에는 얼른 잠이 깨라며 찬물로 머리를 감는다.

 아이 머리를 감길 때에 지난달 즈음부터 아이를 세운 채 감길 수 있다. 아이가 머리를 푹 숙이도록 하며 머리를 감기면 애 아빠로서는 몹시 수월하다. 그러나 아이는 이런 머리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애 아빠가 쪼그려앉은 다음 허벅지에 아이를 살며시 눕힌 다음 아이 고개를 왼손으로 잘 받치면서 감겨야 좋아한다. 아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따땃한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려가는 느낌을 맛보지 않나 싶다. 눈을 지그시 감은 아이 머리에 물을 끼얹고 비누를 살짝 발라 비비면서 이마에 쪽 뽀뽀를 한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일은 거의 떠오르지 않으나,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허벅지에 눕힌 채 머리를 감겼던 일은 떠오른다. 지난날 내 어머니는 내 머리를 감겼고, 이제 나는 내 아이 머리를 감긴다. (4343.11.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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