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을 깎는 마음


 뒷간 똥이 차곡차곡 쌓인다. 날이 달포째 얼어붙으니 자꾸 쌓인다. 한낮에 삽으로 콱콱 찍어 깎는다. 삽날이 부러지겠구나 싶어 겨우 조금 깎았다. 무너뜨리기는커녕 참말 조금 깎고 만다. 날마다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깎아야 하는가 보다. (4344.1.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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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을 먹는 마음


 일곱 살부터 열대여섯 살 아이들이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들려주던 ‘말을 살리는 글쓰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오덕 선생님 제자가 아니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어서 꾸린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글쓰기회) 회원도 아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 당신 글을 갈무리한 사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오덕 선생님보다 이오덕 선생님 글을 훨씬 많이 꼼꼼히 읽어야 한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님이 손으로 원고지나 공책이나 수첩에 꾹꾹 눌러쓴 글을 하나하나 새겨 읽으며 타자로 옮겨야 한 사람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살았을 때 당신이 손수 적바림한 걸그림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정갈하게 글씨를 쓸 수 있다니 놀라우며 아름답습니다. ‘선생님 손글씨’는 어느 분 언제 글씨라 할지라도 이렇게 흔들리거나 치우치거나 날리지 않아야 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차분하면서 따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깨닫습니다.

 나이가 열 살씩 벌어진 아이들을 한 자리에 앉히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터넷게임이나 막놀이나 막밥에 익숙한 아이들한테 삶과 말과 꿈과 일과 땀과 흙과 밥과 책이 살가이 얼크러진 글쓰기를 이야기하기란 참 까마득합니다.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른아침부터 낮까지 집일로 쉴 틈이 없습니다. 쌀을 씻어 불리고, 쌀을 냄비에 담아 불을 넣고, 반찬을 마련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먹은 밥그릇 치우고, 이불을 걷어 털고,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제자리에 놓고, 아이 쉬를 누이고, 아이하고 복닥이고 하다 보니 빨래할 겨를마저 없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깨어나서 저녁에 아이가 잠들 때까지 집일 하는 사람은 책 한 권 한 줄이나마 훑을 말미를 얻지 못합니다.

 아이들 앞에 서서 말문을 엽니다. 한 시간 동안 말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문득, ‘아줌마들 수다’가 떠오릅니다. 아줌마들치고 할 말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할 말이 잔뜩 있을 아줌마들한테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말뜻을 살피면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을 ‘수다’라 합니다. 아줌마들이 쓸데없이 말수가 많나 하고 갸우뚱갸우뚱하는데, 아줌마들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이 엉뚱하게 이런 말을 짓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다는 수다입니다. 쓸데없이 늘어놓는 말이란 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줌마들이 터뜨리는 말물결이란 ‘이야기꽃’이라 이름을 붙여야 옳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줌마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들어 주고 제대로 말해 주는 이야기동무를 사귀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밥을 한껏 맛나게 차리고, 어찌해야 집 일손을 조금 줄이며, 어찌해야 말썽쟁이 아이들이 착하고 참다이 크도록 돌보면서 어버이로서 더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란 자리에 선 사람치고 집일에 마음쓰거나 몸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그야말로 아주아주아주아주 드뭅니다. 집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는 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온 식구 먹을거리를 홀로 맡으며 날마다 차리는 가운데 도시락을 싸고 주전부리를 마련할 줄 아는 아버지란 몇이나 될는지요.

 밥 하나를 놓고도 아버지가 집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빨래는 어떨까요. 청소는 어떻지요? 아이키우기는 어떠한가요?

 아픈 옆지기가 깊은 밤에 혼자 보던 영국연속극 하나를 함께 봅니다. 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얘기입니다. 아이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경찰차가 들이받아 그만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사진찍기)에만 마음을 썼을 뿐, 네 아이들이 어떤 동무하고 사귀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떻게 지내는지를 거의 알아채거나 헤아리지 못해 왔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보다 큰 날벼락이 없겠지요. 아이들한테 밥을 먹인다든지 집안을 쓸고닦는다든지 옷을 빨아 입힌다든지 하는 일거리 가운데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란 없어요.

 날마다 밥을 차리고 치우며 먹이면서 생각합니다. 아니,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옆지기가 몸이 안 아픈 사람이라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끔찍합니다. 이럭저럭 집일을 거든다고 깝죽거리지 않았나 싶고, 이냥저냥 집일을 거들기는 할 테지만 ‘내 좁은 속알머리’에서 허덕이는 주제에 잘난 척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니, 깝죽거림이나 잘난 척은 아닐 테지요. 내 깜냥껏 참말 힘을 쓸 텐데, 막상 ‘아이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힘들거나 힘겹거나 슬프거나 아픈지를 하나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받아들이기는커녕 느끼지조차 못하겠지요.

 반찬 한 가지 수월하게 금세 뚝딱뚝딱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들여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아주 드뭅니다. 아이 기저귀를 눈 감고 척척 후다닥 새로 갈아 주기까지 얼마나 숱한 손길이 가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몹시 드뭅니다. 걸레 한 장으로 몇 평을 말끔히 훔칠 수 있는지 아는 아버지는 매우 드뭅니다. 한두 시간이 아닌 스물네 시간을 한 해 내내 아이랑 복닥이면서 아이랑 어떻게 놀고 아이랑 어떻게 어울리며 아이랑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좋을는지를 아는 아버지는 너무 드뭅니다. 너무 적고 너무 없으며 너무 모자랍니다.

 글쓰는 아버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는 분은 몇이나 될는지요. 방송사에서 일하거나 신문사에서 일하는 남자들 가운데 여자들 넋을 살피는 이는 몇이나 있을는지요.

 선거권이 있다 해서 남녀평등인가요. 여자도 대학생이 되고 여자도 중장비 운전을 할 수 있으니 여남평등인가요. 아빠랑 엄마 성씨를 나란히 쓰면 여성해방이 되나요.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여성해방이 이루어지나요. 여성할당제란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요. 《할아버지의 부엌》 같은 책이 아름다우면서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하기란 일본이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한국이든 꿈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부엌” 이야기를 귀기울인다든지 눈여겨본다든지 얼싸안는다든지 하면서 담아낼 일꾼 또한 없습니다. “할머니 부엌”은 그저 마땅할 뿐이니까 아예 책으로 낼 생각조차 안 합니다. 책으로 낸다 한들 읽을 사람이나 있을까 모릅니다. ‘임금님 밥상’이 아닌 ‘우리 아이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 부엌” 이야기책을 엮도록 마음을 들이고 사랑을 쏟을 책마을 남자 편집자는 있기나 하나요. 아니, 여자 편집자 가운데에도 있기나 하나요.

 집살림 도맡으며 첫딸을 서른두 달째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며 두 손바닥은 거칠다 못해 뭐에 찔려도 아픔을 못 느낄 만큼 딱딱해집니다. 아이는 아빠가 손바닥으로 제 손을 비비거나 얼굴을 쓰다듬으면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아이한테 “벼리를 먹여살리고 키우느라 아빠도 손이 아파.” 하고 말합니다. 이때 아이는 눈알을 빛내며 “아빠 손 아야 해?” 하면서 앙증맞은 손으로 아빠 손을 쥐고는 자그마한 입을 모아 호호 붑니다. 날마다 아이랑 밥을 먹으면서 자꾸 딴짓을 한다고 골을 부리는 아버지입니다만, 날마다 새롭게 기쁜 마음으로 밥을 차립니다. 애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 애 아빠가 삶을 비로소 배우며 더없이 고맙다고 느낀다고 말할 때에 내 둘레에서 이 얘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아직 세 사람만 보았습니다. 그나마 세 사람은 모두 할머니입니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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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맞는 마음


 새눈이 내립니다. 문을 열고 내다 봅니다. 마당에 어느새 새눈이 소복소복 쌓였습니다. 밤 한 시입니다. 아이는 곱게 잠들지 않습니다. 그예 울기만 합니다. 힘들어서 그러는지, 고단해서 그러는지, 심심해서 그러는지, 더 놀고파 그러는지 좀처럼 예쁘게 잠들지 못합니다. 새근새근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어찌해야 좋을까요.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랑 꽤 자주 부대끼는 일이지만, 부대낄 때마다 슬프고 안쓰럽습니다. 악을 쓰지 말고 억지를 부리지 말며 어여삐 잠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 지나치려나요.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안습니다. 낮나절 아이를 안고 읍내를 다녀오느라, 저녁나절 빨래를 하느라, 더구나 아빠는 낮잠을 못 잔 몸이라, 아이를 안으면서 끄응 소리가 납니다.

 아이한테 밤눈 내리는 바깥 모습을 보여줍니다. 달도 자고 별도 자는 이 깊은 밤에 온누리 온통 하얀 빛깔인데 홀로 이렇게 깨어 울면 어떡하니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도 속으로는 얘가 참 울음을 못 그치는구나 싶어 밉살맞네 하고 여겼습니다만,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을 고칩니다. 나 또한 내 아이만 한 나이였을 때에 어떠했고, 또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아이라 할 때에 어떠할까 돌아보면, 아이를 다그칠 수 없습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울먹울먹하다가 찬찬히 머리를 파묻습니다. 머리를 파묻은 아이를 서서 안다가 자리에 눕습니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서서 안고 싶으나, 팔과 허리가 받쳐 주지 않습니다. 배에 올려놓다가 팔베개를 하고, 한참 소근소근 달래니 비로소 눈을 깜빡깜빡 하다가는 고이 잠듭니다.

 어머니는 두 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놀리고 가르치고 보듬으며 살아오셨을까요. (4343.12.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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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는 마음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 걸음이 누구보다 빨라 가장 앞장서서 걸을 수 있지 않더라도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 걸음이 누구보다 느려 가장 뒤처져 걸을지라도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에는 사랑하는 짝꿍이랑 아이가 함께 있습니다. 짝꿍이랑 손을 잡고 걷든 어깨동무를 하며 걷든 혼자 걸을 때보다 한참 더디 걸어야 합니다. 때로는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거나 아예 며칠을 지내거나 때로는 그예 눌러살아야 합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걷든 아이를 품에 안고 걷든, 아이 빠르기와 결을 살펴야 합니다. 더욱이, 아이가 힘들면 새근새근 잠들도록 바람 안 불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아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길을 걷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길을 걷습니다. 사진을 찍는 길을 걷습니다. 집살림을 도맡으며 집식구를 돌보는 길을 걷습니다.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로 버티기란 버겁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튼튼하다지만, 알고 보면 퍽 여린 몸뚱이로 이 숱한 일을 해내자니 벅찹니다. 그런데 용케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다가올 밤에 잠든 채 다시는 못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고맙게 다시 눈을 뜨며 새날을 맞이합니다. 새날을 맞이하며 새롭게 글을 쓰고 새롭게 사진을 찍으며 새롭게 아침을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합니다. 글과 사진은 날마다 새롭게 빚는데, 빨래랑 밥 또한 날마다 새롭게 보듬어야 합니다. 아이랑 어제 하루 신나게 놀았으니 오늘은 아이 혼자 내버릴 수 없습니다. 엊저녁 옆지기 다리를 주물렀으니 오늘은 못 본 척하며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 사람이 크게 줄어 시골길을 거닐 때에 사람을 마주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드문드문 할매랑 할배를 마주칩니다. 시골길을 거니는 동안 사람보다 자동차를 훨씬 자주 마주칩니다. 그래도 도시처럼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를 부대껴야 하지 않습니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걷는 동안 바람소리를 듣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구름이 흐르는 소리와 해가 기우는 소리를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면서 느껴 봅니다.

 걷다 보면 땀이 나고, 땀이 나면서 가방을 멘 등허리가 쑤시고, 아이가 힘들어 할 때에는 아이를 안느라 팔다리가 몹시 결립니다. 때때로 도시로 마실을 나와 시내를 걸어야 하면 아이는 잠들지 못합니다. 시끄럽기도 시끄럽지만, 아이 눈을 사로잡는 가게 불빛이며 온갖 모습이 번쩍거리기 때문입니다. 시골길이나 골목길을 거닐 때에는 조용하기도 조용하지만, 시골자락과 골목자락이 보드라이 아이를 품어 줍니다. 아이는 시골길이나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 아빠 품에 안기거나 엄마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곤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더 자주 책방마실을 하고 더 많이 책을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우리처럼 가난뱅이 식구는 조그마한 집을 빌려도 달삯을 많이 치러야 합니다. 밑돈(보증금)을 거의 못 내는 살림이니까요. 도시에서는 밑돈 꾸랴 달삯 벌랴 눈썹 휘날리도록 휘둘리며 바빠야 하고, 쓰기 싫은 글이나 찍기 싫은 사진을 뽑아내려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기계처럼 글과 사진을 뽑아낼 때에도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만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착하고 참다이 내 삶을 사랑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고 싶습니다. 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 조용히 잠들면서 바람결을 볼따구니로 느끼는 삶자리에서 일하며 땀흘리고 싶습니다. 더 많이 쏟아내어 더 많이 읽힐 글도 나쁘지 않겠지요. 더 빨리 달리는 자동차로 음성 읍내가 아니라 충주 시내로 다녀오면서 더 값싼 먹을거리나 살림살이를 장만해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래도, 저랑 옆지기랑 아이로서는 읍내 조그마한 롯데리아 몇 백 원짜리 얼음과자로도 즐겁습니다. 그냥 작은 구멍가게 막대얼음과자로도 기쁩니다. 장마당 500원짜리 어묵꼬치를 우물우물 냠냠해도 신납니다. 빨래하느라, 밥하느라, 설거지하느라, 방바닥 쓸고닦느라, 이불 털고 빨고 말리느라, 아이랑 놀고 아이한테 그림책 읽어 주느라, 하루가 몇 해나 되는듯 아침부터 밤까지 등허리 펼 겨를이 없는데, 이런 삶이지만, 이런 삶밖에 안 되지만, 이냥저냥 즐거이 내 길을 걷습니다. 저녁나절 잠자리에 일찌감치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가 안 오고 놀겠다면 그냥 놀라 하고 아빠는 이동안 책이라도 몇 줄 읽으려고 합니다. 이러면 아이는 으레 “아빠 책 읽어 줘.” 하면서 달려옵니다. 그냥 너 혼자 더 놀다 오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다가는,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 하는데 안 읽어 주는 못된 어버이가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잠자리맡에 늘 놓아 두는 그림책을 집고 아이는 아빠 오른팔 베개로 눕히며 그림책을 읽습니다. 그림책에 적힌 글은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지 않게 잘못 쓴 말투와 어려운 낱말이 잔뜩 깃들었’기에, 아빠는 이 말투를 모조리 고쳐서 새로 읽습니다. 아이는 눈알을 초롱초롱 빛내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도 이렇게 나한테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안 읽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뭐, 못 읽어 주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먹고살기에 빠듯하고, 돈을 벌랴 집살림 꾸리랴 등허리가 휘셨으니까요. 출퇴근에 네 시간이 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돌아오는 평교사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뻗어서 쓰러지고 형이랑 나는 날마다 아버지 다리와 허리를 주물렀는데 아버지가 우리한테 그림책이건 동화책이건 읽어 줄 틈이 어디 있겠어요. 학교에서 학교 아이들한테는 읽어 주겠지만요.

 참말 돈은 못 벌고, 살림을 꾸린다지만 꽤 엉터리로 꾸리는데, 이럭저럭 어설프며 어줍잖은 하루하루라지만, 짝꿍이 있고 아이가 있기에 시골집에서 내 길을 내 깜냥껏 더디더디 걷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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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쓰는 마음


 군대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눈을 쓸었습니다. 아니, 눈을 삽으로 퍼서 옮겼습니다. 말 그대로 펑펑 쏟아지며 그득그득 쌓이는 눈은 빗자루로 쓸어낸다고 치울 수 없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뒤에는 눈쓸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눈을 쓸고프지 않았습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맞이하는 눈은 ‘눈답다’고 느끼지 않기도 했고, 가뜩이나 여느 삶자리에는 눈도 거의 안 오는데 이 눈을 왜 치우는가 싶었습니다. 눈을 안 치우고 하루나 이틀만 있어도 저절로 녹기 마련입니다. 요즈음 겨울은 겨울이면서 꽁꽁 얼어붙는 겨울이 아니라, 며칠쯤 있으면 날이 풀려 눈이 다 녹습니다. 때로는 눈이 쌓인 그날 바로 다 녹아서 사라지곤 해요. 호들갑을 떨면서 화학방정식 소금을 뿌려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고들 하니까 눈을 치우려 합니다. 사람이 아닌 자동차 때문에 눈을 치웁니다. 왜냐하면 사람 발자국이 난 자리는 비질을 몇 번 하면 다 벗겨지지만, 자동차가 밟은 자리는 비질로는 벗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삽으로 긁어도 잘 안 벗겨져요.

 시골집에 보슬보슬 내리다가 소복소복 내린 눈을 바라봅니다. 눈이 다 멎은 다음 빗자루를 들고 씁니다. 멧자락 집으로 들어설 택배 짐차들이 눈 때문에 못 온다고 핑계를 댈까 싶어 눈을 씁니다. 이토록 눈이 왔어도 우체국 택배는 제때 잘 왔으나 다른 택배는 전화도 없고 오지도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눈이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핑계거리인가 봅니다.

 맨손으로 눈을 쓰니까 손이 얼어붙습니다. 아니, 손가락이 얼어붙습니다. 장갑을 낀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장갑을 끼어도 손가락 얼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한참 쓸고 나서 손가락을 녹여야 합니다. 군대에서도 그랬으니까요.

 아이는 눈을 쓸어 말끔한 자리를 밟지 않습니다. 아빠가 일부러 안 쓸어 놓은 자리만 밟습니다. 아빠는 우리 집 마당자리는 사람 걷는 길만 조금 쓸고 다른 데는 고스란히 남겼는데, 아이는 딱 요 자리만 밟습니다. 그래, 너를 생각해서라도 아빠는 눈을 쓸기 싫어. 눈이 오면 우리 집은 눈집이 되어 언제라도 눈을 즐기면서 살아간다면 좋겠지. (4343.12.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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