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문학동네 동시집 16
신현득 지음, 전미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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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2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아요

―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신현득 글

 전미화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0.12.8. 8500원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그림 그리고 싶어.” 하고 말합니다. 여느 때와 달리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감판하고 그림종이를 내줍니다. 작은아이는 물을 쓸 수 있는 부엌바닥에 종이를 펼쳐서 그림을 그립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다가 저도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종이뿐 아니라 부엌바닥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림놀이를 마친 뒤, 부엌바닥을 걸레로 훔칩니다. 부엌바닥을 더 깨끗하게 닦으라는 뜻으로 부엌바닥에 그림을 그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두 아이는 갓난쟁이였을 적에 사흘이 멀다 하고 이불이 쉬를 누거나 똥을 발랐습니다. 기저귀를 갈랴 이불을 빨랴 그야말로 손이 쉴 겨를이 없었어요. 아기를 돌보는 집은 깨끗해야 하니까 이불을 자주 빨라는 뜻으로 그렇게 쉴새없이 이불에 쉬와 똥을 발라 주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 땅에서 / 뾰족 나온 / 우리나라 // 거기에 / 점 하나 찍으면 / 우리 마을 (점 속에 내가 있다)


한 바퀴 세계를 돌고 보면 /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길 // 북극에서 오는 길도, /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도 이 길이라죠 // 우리 집 골목에서 / 끝나는 길 (우리 집 골목길은)



  신현득 님이 빚은 동시를 모은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문학동네,2010)를 읽습니다. 1950년대부터 동시를 쓴 분이 바라보는 201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1950년대에 어린이를 바라보는 눈길하고 2010년대에 어린이를 헤아리는 눈길은 어느 만큼 다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 자리에서 바라보는 어린이 삶이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서 흐른다고 할 만합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썼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나라와 아시아와 지구별을 넓게 살필 수 있도록 북돋우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그리기도 했다고 느낍니다.



이름만 듣고도 알 수 있지 / 이쁘다고 이쁜이 / 순한 아기 순단이 / 야무진 차돌이 / 힘이 센 센둥이 (이름이란 그런 것)


내 이름은 김개나리야 // 전학 서류 가지고 찾아간 / 학교 이름도 / ‘개나리초등학교’였지 (개나리초등학교)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나 어른더러 시를 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기를 바라고, 함께 놀지 않더라도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면, 함께 노는 대로 즐겁습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아 주지 않아도, 저희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새 놀이를 지어서 까르르 웃고 뒹굴고 달리고 뛰면서 지냅니다.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함께 놀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시라고 한다면, 또 동시라고 한다면, 굳이 꾸며서 쓸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노는 이야기를 쓰면 모두 동시가 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거이 바라보는 삶을 고스란히 쓰면 언제나 동시가 돼요.


  땀을 흘리면서 달리는 이야기를 씁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을 빨래터에서 함께 물이끼를 걷고 노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당이랑 뒤꼍에서 풀을 뜯는 이야기를 씁니다. 철마다 달리 부는 바람을 마시면서 꽃을 보고 열매를 얻는 이야기를 씁니다. 심부름을 하고 살림을 거드는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한테는 ‘학교’만 학교이지 않습니다. 집도 마을도 숲도 모두 학교, 곧 배움터입니다. 살아가는 터가 배우는 터요, 살아가는 터에서 사랑을 누립니다.



“어둠나라 개가 달을 먹네.” / 월식날 밤, 옛사람들이 / 달을 보며 말했지 (달을 먹는 개)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 흐르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동시를 쓰는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건네려고 하는가를 되새깁니다. 옛이야기는 먼 옛날부터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고,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면서 다시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또 아이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는 사이에 새로운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달을 먹은 개 이야기도, 제비와 흥부 이야기도, 어린 개구리와 어미 개구리 이야기도, 베짱이 이야기도,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이 들려줍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아버지로 지냅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어른으로 우뚝 서면, 이 아이들은 새롭게 아이를 낳을 테고, 그때에 나는 할아버지로 지내면서 새로운 삶과 이야기를 지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하루가 삶으로 모이고, 이러한 삶이 이야기가 되며, 이러한 이야기가 사랑이 되어 흐릅니다.



돋아난 / 새싹을 / 손끝으로 / 톡, / 건드려 봐 // 놀라서 / 옴싹 / 움츠리지 (새싹 간질이기)


장독대 돌봐 놓고 / 둘레에 맨드라미, 봉숭아 몇 포기도 / 만져서 피워 주고 // 해거름에 해님은 배고프다며, 휘딱 / 저녁 먹으러 가 버렸어요 (해님은 손으로 장맛을 들여요)



  해가 뜨는 아침에 해를 바라보면서 놉니다. 햇볕이 뜨거운 낮이 되면 구름이 와라, 바람아 불어라, 노래하면서 놉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이 되면 발그스름하다가 노르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놉니다. 별이 돋는 밤하늘을 그리면서 놀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크게 하품을 하고는 잠자리에 듭니다.


  즐겁게 놀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아이한테는 근심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없이 신나게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나 어른한테도 근심이나 걱정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 어버이와 어른한테는 무엇이 깃들까요? 바로 사랑이 깃들어요. 어버이와 어른은 저마다 사랑을 가슴에 담고서 아이들을 어루만집니다. 이불깃을 여미면서 가슴을 토닥입니다. 입맛을 다시면서 자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가슴속에 꿈을 품습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사랑을 헤아리면서 삶이 기쁘고, 아이는 꿈을 지으면서 삶이 재미납니다. 동시는 사랑하고 꿈이 만나는 삶자리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납니다. 4348.7.5.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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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비시선 167
이경림 지음 / 창비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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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7



시와 삶

―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이경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7.9.25.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을 적에는 잎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봅니다. 햇볕이 내리쬐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애벌레한테는 잎을 배부르게 갉아먹어서 몸을 살찌우는 일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몸집을 불리고 불린 뒤에 허물을 벗어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고, 다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며, 이윽고 밥먹기를 그치려 해요.


  밥먹기를 그치는 애벌레는 깊이 잠들고 싶습니다. 자고 또 자고 다시 자면서 고요히 꿈을 꾸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애벌레는 고치를 짓습니다. 애벌레는 고치에 깃들어 먼먼 옛날부터 ‘저(애벌레)를 낳은 어미가 했’듯이 잠이 듭니다. 잠이 들면서 꿈을 꾸고, 애벌레가 꾸는 꿈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누가 실바람으로 잔가지를 지나간다 / 지금 누가 저 황원에서 쓸쓸히 노래하고 있다 (저 깊은 강)


내 속에 궁전 하나 있네 / 사이프러스 나무 숲에 둘러싸인 궁전 (내 속의 알함브라)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는 온몸이 간지럽습니다. 온몸이 간지러울 뿐 아니라 쑤십니다. 몽툭한 다리가 사라지면서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생깁니다. 더듬이가 생기고 날개가 돋습니다. 길쭉하고 통통하던 몸은 날렵하면서 가벼운 몸으로 바뀝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데기를 벗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애벌레는 한참 동안 몸과 날개를 말립니다. 첫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를 때까지 바람이 잠들며,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로 깨어난 나비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풀밭이나 숲에 서면 온갖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눈길을 모아 풀줄기나 나뭇잎을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면서 잎을 갉아먹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비가 날고,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자라요. 한쪽에서는 풀이랑 나무가 새 잎을 내놓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풀잎이랑 나뭇잎을 갉습니다.


  그리고, 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하늘을 날고,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하늘을 가릅니다.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먹는 새가 있고, 나비나 잠자리는 안 쳐다보는 새가 있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서로 얼크러지면서 들바람이 불고 숲바람이 붑니다.



내가 사랑한 건 그 남자 / 가 아니라 담요였네 언 몸 녹여주던 담요! / 그것의 부드러움 그것의 휘감김 그 가벼움을 / 사랑했네 그 밑의 따스함 그 밑의 어두움 그 밑의 / 은밀함 그 알몸 덮어버리는 폭력! (내가 사랑한 담요)



  이경림 님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비평사,1997)를 읽습니다. 김정란 님은 시집 끝자락에 비평을 붙입니다. 김정란 님은 이경림 님 시를 놓고 “80년대에 등단했더라면, 그녀의 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경림의 시는 부서진 80년대의 대서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부활한 90년대의 소서사의 한 전형이다(113쪽).” 하고 말합니다.


  김정란 님이 말하듯이, 참말 이경림 님 시는 1980년대에 살아남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똑같이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더 깊거나 넓게 알아보거나 사랑해 줄 사람이 적더라도,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아끼거나 가슴에 품을 사람은 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서사’이든 ‘소서사’이든, ‘서사(敍事)’란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삶 이야기’입니다.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뿐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들 이야기요, 권력자나 정치꾼 이야기뿐 아니라,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 이야기요, 도시에서 옹기종기 모여 어깨동무하는 골목사람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 산다는 건 / 마알간 잠의 밑바닥에는 바닥 모를 우물이 파이고 / 고통과 사랑과 그리움과 배반과……, / 진짜들은 늘 허공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토론토에서)


어머니를 속에 감춘 계집아이 하나와 / 계집아이를 속에 감춘 어머니 하나가 / 손잡고 갑니다 (숨은 모녀)



  삶은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삶은 언제나 오직 하나이기에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날’이란 하루도 없기에 삶은 늘 대단합니다. 1월 1일을 이틀쯤 누리거나 7월 1일을 안 누려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거나 열네 시간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서 자리에 눕느라 다른 일을 못 하더라도, 몹시 바빠서 쉴 겨를이 없더라도, 모든 사람은 똑같은 스물네 시간을 맞아들이고, 똑같은 삼백예순닷새를 맞이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나날을 저마다 새로운 삶으로 누리니, 누구한테나 삶은 대단합니다.


  역사책에 남을 만한 일을 했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릴 만한 자리에 서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삶이 수수하면서 대단합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삶이 투박하면서 대단합니다. 거리낌없이 뛰노는 아이들 하루가 대단하고, 신나게 웃고 노래하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 삶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을 언제나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북돋우거나 예술을 살찌우는 몸짓이 되어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쓰기에 시이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타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싣거나 이름난 작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시인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즐거웁게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이야기를 짓는 삶이 된다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가꾸고 기쁘게 일구는 삶을 노래할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덤프트럭은 시절 없이 오가고 방범대원은 골목골목 호루라기를 불어댄다네 /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고 그 사랑 가로등 아래 우울한 그늘 만드네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 사천원짜리 표를 사서 네시간을 달리면 있다 아니 / 가은으로 가는 문은 기억의 직행버스를 타고 슬쩍 / 눈 감으면 있다 거기 검은 마을을 안온하게 지키는 밝은 유리문이 있다 (加恩이라는)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에는 어떤 삶이 깃들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바로 이 시를 쓴 이경림 님 삶이 깃들었을 테지요.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삶이 깃들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는 삶이 깃듭니다. 아픈 삶이 깃들고, 설레거나 벅차는 삶이 깃듭니다.


  그늘을 바라본 삶을 시로 노래하고, 햇살을 마주한 삶을 시로 노래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하루를 시로 읊고, 시골로 마실을 가거나 이웃나라를 다녀온 하루를 시로 읊습니다.


  시집을 덮고 고요히 생각에 잠깁니다. 책상맡에 촛불을 켜고 지긋이 바라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에 느즈막하게 잠든 아이들을 가까스로 재우고서 비로소 숨을 돌리는 깊은 밤에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나는 오늘 하루 잠들고 나서 이튿날에는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시 한 줄에 흐르는 삶을 읽다가, 내 삶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시 두 줄에 감도는 사랑을 헤아리다가, 내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밤오줌을 누려고 큰아이가 잠에서 살짝 깹니다. 쉬를 누고 다시 자리에 누운 아이를 다독입니다. 이불을 여미어 주고, 작은아이도 살핍니다.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반듯하게 누인 뒤 이불을 새로 여밉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언제나 두 팔을 옆으로 뻗어 한손으로 한 아이씩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기쁜 꿈을 꾸자고 속삭입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삶이 즐거우면서 아름답겠지요. 4348.7.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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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 문학동네 동시집 33
김은영 지음, 강전희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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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1



오늘날 학교는 ‘배움집’ 구실을 하는가?

― 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

 김은영 글

 강전희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4.12.22.



  아침이 되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가며, 고등학교에 갑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까닭은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새롭게 배울 뿐 아니라, 또래동무를 널리 사귀면서 둘레를 더욱 넓고 깊게 바라보는 눈썰미를 키우고 싶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뜻은 졸업장이나 자격증 때문이 아닙니다. 두 어버이가 맞벌이를 하느라 바빠서 아이들을 집에서 내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배워야 한다고 여겨서 학교라고 하는 ‘배움집’을 마련합니다.



선생님이 / 내 알림장에 / 입 모양 하나 그려 주셨다. // 내가 입이 두 개인 듯 / 수업 시간마다 떠들어서 / 입 하나를 그려 준 거랬다. (입 두 개)



  학교는 ‘배움집’입니다. 배우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늘 지내는 집은 어떤 곳일까요? ‘살림집’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집은 ‘살림집’입니다. 아이들은 살림집에서 먹고 입고 자는 살림을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그리고, 저마다 배움집을 드나들면서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배웁니다.


  학교가 맡은 몫은 배움집인 만큼, 학교는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면서 아름답게 북돋우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학교는 아이들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기쁨을 저마다 새롭게 누리거나 맞아들일 수 있도록 가꾸는 곳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꽃은 벌들이 다니는 학교야. / 꿀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 우리들은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 꽃은 벌들이 노는 놀이터예요. / 꿀벌들이 신나게 놀고 있잖아요. (꽃과 꿀벌)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동시를 쓰는 김은영 님이 선보이는 《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문학동네,2014)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에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부딪히거나 겪거나 마주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교사 눈높이로 아이들을 보기 때문일 테고,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때문일 테지요. 동시를 읽을 아이들도 거의 다 학교를 다닐 테니까, 동시집에서도 학교 이야기를 크게 다룰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내가 복도에서 뛰는 건 / 발뒤꿈치를 들고 / 사뿐사뿐 걷다 보면 / 나도 모르게 /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뛰는 까닭)



  교사인 글쓴이는 “꽃은 벌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말합니다. 교사인 글쓴이를 마주하는 아이들은 “꽃은 벌들이 노는 놀이터”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복도에서 뛰는 까닭을 노래한 동시는 교사 목소리일까요, 아니면 아이들 목소리일까요? 아무래도 아이들 목소리가 되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은 참말 그렇거든요. 아이들은 참말 가볍게 뛰거나 달려요. 아이들은 무겁게 뛰거나 달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심었어요. / 씨앗이 바람 타고 날아왔으니까. / 하늘이 심은 거야. / 바람은 하늘에서 부니까. / 땅이 심은 거야. / 씨앗이 땅에서 났으니까. (하늘 농사 땅 농사)



  아이들은 마음껏 놀면서 배웁니다. 놀지 못하는 아이는 배우지 못합니다. 놀지 못하면서 배우기만 해야 한다면, 아이들로서는 이보다 크고 끔찍한 불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문제집이랑 참고서만 손에 쥐고서, 학습도서나 추천도서나 명작도서를 줄줄이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아이들로는 이보다 싫고 미운 불벼락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나마 초등학교에서라면 조금 쉬거나 뛰논다고 하지만, 중학교 문턱을 넘어서면 그예 죽어납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는 입시지옥입니다.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이 헤어날 길이 없으니, 아이들은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지 못하는 채, 이성친구 사귀는 데에 눈길이 뻗습니다. 삶도 사랑도 아닌 그저 이성친구일 뿐입니다. 또는 여린 동무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바보짓으로 휘둘립니다.


  초등학교 어린이하고는 바람이 심고 하늘이 심으며 땅이 심는 씨앗 이야기를 동시로도 나누고 그림책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푸름이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는지요? 중·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학교 텃밭’을 두는 데가 몇 군데가 될는지요?



외할머니 옆에 엄마가 누웠다. / 엄마 옆에 나도 나란히 누웠다. // 외할머니는 / 엄마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고 / 엄마는 / 외할머니 젊었을 적 이야기를 한다. (외할머니 생신날)



  어린이 나이를 지나서 푸름이 나이를 보낼 적에 입시공부만 해야 한다면, 이 어리고 푸른 넋은 삶이나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합니다. 어버이 살내음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살결을 느끼지 못한 채 학교에만 갇혀야 하는 아이들이라면, 아이들 앞날에 기쁜 삶이나 즐거운 사랑이 피어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학교는 배움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학교는 배움집으로 바로서야 합니다. 학교는 배움집답게 거듭나야 합니다.


  대학교라는 데에 가면 어떻고, 안 가면 어떠할까요.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격증이나 저런 증명서가 없더라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배워서 삶을 가꾸고 삶을 노래하는 아이들로 자랄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배워서 사랑을 가꾸고 사랑을 노래하는 어른으로 거듭날 때에 아름답지요.



앵두 한 움큼 / 한입에 먹으면 / 입 속에서 다디단 풍선이 / 퐁! 퐁! 퐁! / 터진다. (앵두 먹기)



  앵두알은 아이한테도 맛나고 어른한테도 맛납니다. 수박이나 참외는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맛납니다. 아이들이 가야 하는 학교 이야기를 동시로 다룬다면, 학교에서 겪거나 부딪히거나 마주하는 일뿐 아니라, 학교가 배움집다운 몫을 톡톡히 하도록 이끄는 이야기도 담을 수 있기를 빕니다. 교사 눈높이나 학생 눈썰미가 아닌, 삶을 사랑하는 숨결로 꿈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동시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6.1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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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철든 날 사계절 중학년문고 31
이수경 지음, 정가애 그림 / 사계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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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0



철이 드는 어른은 동시를 노래한다

― 갑자기 철든 날

 이수경 글

 정가애 그림

 사계절 펴냄, 2014.6.18.



  고단한 아이는 갑자기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만 코피를 쏟지 않습니다. 아이도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은 몸이 힘든데 억지로 일을 하려니 코피를 쏟고, 아이는 몸이 고단한데 더 놀려고 악을 쓰다가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눌려 코피를 쏟고, 아이는 더 신나게 놀고픈 마음에 잠을 미루다가 코피를 쏟습니다.


  오늘 아침에 작은아이 코피를 봅니다. 예전에는 큰아이가 코피를 자주 흘렸습니다. 코가 안 좋기도 했지만, 저녁 늦도록 잠을 안 자고 놀려고 하면, 하루 내내 개구지게 뛰놀고는 저녁에도 잠을 미루고 놀려고 하면, 어김없이 이튿날에 코피를 쏟습니다.


  코피를 쏟은 작은아이를 일으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습니다. 작은아이는 “코피 다 닦았어?” 하고 묻더니 이부자리로 달려갑니다. 저도 몸이 힘든 줄 알 테지요. 장난감 몇 가지를 들고 이부자리에서 꼼지락꼼지락 춤추면서 놉니다.



마당에 쌓인 눈 / 다 녹던 봄날 // 왕 구슬 한 개와 / 누나 머리핀 // 햇살에 반짝반짝 / 빛나고 있더라. (술래가 찾은 것)



  이수경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갑자기 철든 날》(사계절,2014)을 읽습니다. 《갑자기 철든 날》을 읽으면 여러모로 시골살이 모습이 흐르고, 시골집에서 수수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이 흐릅니다. 눈밭이 봄볕에 스러진 뒤에 찾은 구슬이랑 머리핀을 놓고 살가운 이야기가 흐르고, 한껏 무르익은 봄에 바쁘게 일손을 놀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릅니다.



나락 담그고 / 모판 내고 / 모 숨구고 / 들깻모 붓고 / 수수 모종 내고 / 깻모 안기고 (우리 마을 사람들)


바구니 / 옆에 끼고 / 터벅터벅 / 사랫길 걷다 보면 // 풍뎅이 / 사슴벌레 / 대벌레 / 사마귀 / 방아깨비 / 주홍박각시 애벌레 / 나비 번데기 (마중)



  이제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사랫길’을 걷는 아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는 사랫길이란 없고, 고샅길도 없으며, 오솔길이라든지 냇둑길이란 없습니다. 도시에는 골목길도 많이 줄었고, 풀밭길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곤충도감이나 그림책을 들추면 풍뎅이도 사슴벌레도 대벌레도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애벌레도 번데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이러한 ‘벌레동무’를 만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벌레는 바퀴벌레나 파리나 모기쯤입니다. 나비나 벌을 구경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테고, 나방조차 좀처럼 구경하지 못할 수 있어요. 도시 아이들은 두 가지 하루살이가 있는 줄 알지 못할 테지요.


  그런데, 요즈음 도시 아이뿐 아니라 요즈음 도시 어른도 벌레동무를 잘 모르기 일쑤입니다. 《갑자기 철든 날》을 쓴 이수경 님은 여러 벌레동무와 꽃동무와 나무동무 이야기를 동시로 빚습니다. 요즈음 도시 아이들한테서 멀어지거나 잊혀지는 살가운 동무를 동시에 곱게 담아서 보여줍니다.



중간고사 준비하는 동안 // 쑥부쟁이 지나갔습니다. / 꽃향유도 지나갔습니다. / 개여뀌도 지나갔습니다. (본 척도 못한 가을)


“얘들아, 눈 왔어.” / 그 소리에 // 큰형 / 벌떡 일어납니다. // 나도 / 발딱 일어납니다. (우리를 일으키는 말)



  눈이 왔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날 만한 아이들이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주차장 한쪽에서 눈뭉치를 겨우 굴리더라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눈이 올 적마다 길이 막힌다고 떠들더라도, 눈이 내리는 겨울을 기쁘게 맞이할 아이들이 도시에도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가 온다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날 만한 아이들이 아직 있으리라 생각해요. 비록 도시에서 빗물놀이를 하기는 어렵더라도, 도시에서 빗물놀이를 하다가 자동차에 치일까 걱정하는 어른이 많더라도, 웅덩이를 찰방찰방 밟으면서 옷을 다 적시고는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도시에도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놀면서 자라는 아이요, 놀면서 꿈을 키우는 아이입니다. 놀면서 서로 아끼는 마음을 가꾸는 아이요, 노는 동안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기쁨을 배우는 아이입니다.



외할아버지가 / 전화하시면 // 미역 딴 거 보냈다. / 끊자! / 뚝… // 물고기 몇 마리 보냈다. / 끊자! / 뚝… (이상한 전화)



  우리 어른은 모두 어른이면서 아이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라지 않고서는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마흔 살이건 여든 살이건 모두 아기와 아이 나이를 지나왔습니다. 마흔 살 어머니나 아버지라 하더라도 여든 살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는 그저 ‘아기’이거나 ‘아이’입니다.


  이리하여,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이녁 아이인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시골에서 거둔 여러 가지를 틈틈이 보냅니다. 도시에서 돈을 잘 벌는지 몰라도, 밥은 제대로 챙겨서 먹는지 걱정스러우니 ‘마흔 살 아이’한테 이것도 보내고 저것도 보냅니다.


  《갑자기 철든 날》에 나오는 〈이상한 전화〉 같은 동시를 아이들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 동시는 아이한테 재미나거나 사랑스러운 동시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아이보다는 어른한테 재미나거나 사랑스러운 동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소윤이 네 단점? // 신경질 잘 부리고 / 짜증 잘 내고 / 불뚝불뚝 화 잘 내고 / 투덜투덜거리고 / 잘 삐치는 것 빼곤 / 없을걸? // 나 꼬집는 거 말곤 / 없을걸? (좋아하게 되면)



  곰곰이 따지면, 동시는 어린이한테 읽히는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동시를 쓰는 어른이 저마다 이녁이 어릴 적에 무엇을 하면서 놀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은 노래가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이 저마다 ‘오늘날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이녁 옛이야기’를 동시라는 틀에 담아서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들한테 ‘앞으로 마음에 담아 고운 꿈을 키우는 길에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씨앗 한 톨을 이야기로 엮는 글을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기에 동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른인 내가 아이로 뛰놀던 나날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오늘 이곳에서 아이로 뛰노는 ‘이웃사람(몸이 작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걸어갈 길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동시를 씁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동시를 읽습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웃고 노래하기에 동시가 한 줄 태어납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다운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기에 동시가 새삼스레 두 줄 석 줄 넉 줄 자라납니다. 4348.6.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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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악수하는 법 삶의 시선 26
고선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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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9



풀 한 포기를 사랑하는 노래

― 꽃과 악수하는 법

 고선주 글

 삶이보이는창 펴냄, 2008.1.30.



  흰줄갈풀이 있습니다. 이 들풀이 우리 집 뒤꼍에서 넓게 자랍니다. 이 들풀이 왜 이곳에서 자라는지 잘 모릅니다. 먼 곳에서 씨앗이 날아와서 이곳에 내려앉았을 수 있고, 새가 풀씨를 먹고는 이곳에 똥을 누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 뒤꼍은 무척 오래 빈터요 빈집이었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살던 사람이 심어서 길렀을 수 있습니다.


  흰줄갈풀은 곧고 길게 뻗는 잎에 흰줄이 생깁니다. 어릴 적부터 흰줄이 생기지는 않고, 차츰 키가 자라면서 흰줄이 하나둘 늘어납니다. 얼핏 보면 시드는 모습이지만, 가만히 보면 잎에 생기는 하얀 무늬입니다.


  그나저나 흰줄갈풀은 어디에 썼을까요? 댓잎으로 바구니를 짜듯이 흰줄갈풀로도 바구니를 짰을까요? 예부터 갈풀은 논을 갈 적에 뿌려서 땅힘을 북돋우는 거름으로 삼았다고 하니, 흰줄갈풀도 거름으로 삼는 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흰줄갈풀은 잎이 퍽 부드러우니, 집에서 소를 키우면서 소먹이로 쓸 수 있어요.



나무들이 생년월일, 연락처 없이도 / 어찌나 조화롭게 사계를 꾸려가는지, / 까마귀밥여름나무, 당단풍나무, 국수나무, 개암나무, / 굴참나무, 조릿대, 산철쭉, 소나무 / 모두 내게는 지인들이다 (나무들이 웃는다)



  먼 옛날부터 얼마 앞서까지 이 땅에서는 어떤 풀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잡초’라는 한자말을 한겨레가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지난날에는 ‘김’이나 ‘지심’이라는 낱말만 썼습니다. ‘김’이나 ‘지심’은 어떤 풀을 가리키는가 하면, 사람이 손수 심은 씨앗이 싹이 터서 자라는 풀(남새나 곡식)이 아닌 ‘저절로 싹이 터서 돋은 풀’을 가리킵니다. 김매기(지심매기)를 하는 까닭은 ‘남새나 곡식’을 더 알뜰히 돌보려는 뜻입니다. 뽑거나 베어서 없애려는 뜻으로 김매기를 하지 않습니다. 김매기를 해서 뽑거나 벤 풀은 언제나 짐승먹이로 삼았고, 잘 말려서 다시 흙한테 돌려 주어 땅힘을 북돋우는 데에 썼습니다. 김매기를 한 풀을 잘 말려서 흙바닥에 덮으면, 웬만해서는 다른 풀이 다시 돋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김매기를 해서 말린 풀을 고랑마다 깔면, 저절로 ‘풀막이’가 되는 셈입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 농약을 뿌리거나 비닐을 덮습니다. 이제 시골에서는 흔히 ‘잡초’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시골에서 소를 기르는 분도 논밭을 갈려고 소를 기르지 않을 뿐더러, 고기소로 길러서 팔더라도 풀이 아닌 사료를 먹입니다. 시골 어디에서나 저절로 돋는 너른 풀은 이제 ‘풀’도 ‘들풀’도 ‘나물’도 ‘약초’도 ‘김’도 ‘지심’도 아닌 ‘잡초’일 뿐입니다.



꽃은 봄에 피지 않는다 / 십구 개월 된 딸아이 입에서 먼저 발화한다 // 한창 말하는 재미에 푹 빠진 아이 / 꽃, 꽃, 꽃 했더니 껏, 껏, 껏 한다 (꽃)



  고선주 님 시집 《꽃과 악수하는 법》(삶이보이는창,2008)을 읽습니다. 고선주 님은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 시를 쓴다고 합니다. 신문사 기자하고 시인이라는 이름은 얼핏 동떨어진 자리일 수 있지만, 시를 쓰는 마음으로 기사를 쓰고, 삶과 사람과 사회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면, 이 숨결은 언제나 고운 노래로 흐를 만하리라 봅니다.



라면 한 그릇 먹으러 그곳에 갈 때마다 / 할머니의 위태로운 날들과 대면한다 / 칠순이 되고도 식당일과 손자 육아까지 / 덤으로 얹어진 날들 / 식탁 하나 의제 네 개가 전부인 식당에는 / 할머니의 손때 묻은 것들 / 할머니와 같이 늙어 있다 (할머니 분식집)



  유월을 맞이한 시골은 밤꽃내음이 흐릅니다. 들과 숲을 밝히던 온갖 풀꽃과 나무꽃은 거의 저물면서 풀잎과 나뭇잎은 한껏 짙푸르게 물듭니다. 오월까지만 해도 노란 기운이 감돌던 감잎은 어느새 푸른 빛깔만 가득합니다. 뽕나무에서 오디가 익고, 벚나무에서 버찌가 익습니다. 유월에 피는 나무꽃은 유월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유월에 익는 나무알(나무 열매)은 유월에 싱그러운 숨결을 퍼뜨립니다.


  유월바람을 느끼면서 《꽃과 악수하는 법》을 새롭게 읽어 봅니다. 꽃하고 손을 맞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꽃하고 이웃이나 동무가 되면 손을 맞잡을 만하겠지요. 꽃하고 이웃이나 동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꽃을 살뜰히 아끼고 너그러이 사랑할 줄 알아야겠지요. 꽃을 살뜰히 아끼거나 너그러이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커다란 꽃송이뿐 아니라 작은 들꽃도 곱게 바라보면서 돌보는 마음이 되어야겠지요.



2년이 흐른 지금, 학교는 그 어느 것도 되지 못한 채 버려졌다 학생들 웃음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은 교정에는 염치없는 잡풀들만 높이뛰기 시합을 하고 그간 마을의 오랜 전통처럼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교실바닥을 굴러다녔다 (폐교 가다)



  꽃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무하고도 손을 맞잡을 수 있습니다. 나무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은 숲에서 부는 바람하고도 손을 맞잡을 수 있습니다. 꽃하고 손을 맞잡으니 꽃이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듣습니다. 나무랑 바람하고 손을 맞잡으면 나무랑 바람이 우리한테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들어요.


  그리고, 꽃하고 손을 맞잡듯이 이웃사람하고 손을 맞잡습니다. 꽃이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듣듯이 이웃사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듣습니다. 꽃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듯이 이웃사람한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기쁘게 돕고, 이웃사람한테 즐거운 일이 찾아오면 함께 웃습니다.


  꽃을 노래하면서 사람을 노래하고, 사람을 노래하면서 꽃을 노래합니다. 꽃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꽃을 사랑합니다.



나는 집 한 채 없다 / 살기는 살 뿐이지 / 어디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남의 집, 남의 회사, 남의 학교 다니는 / 나는 내 것이라곤 없지 / 딸과 아내와 살 집 한 칸 없다니 / 한참 잘못된 자본주의 아닌가  (두껍아, 새 집 줄게)



  2008년에 《꽃과 악수하는 법》을 선보인 고선주 님은 이무렵 아직 ‘내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2015년에는 ‘내 집’을 장만하셨을까요? 곁님하고 아이랑 함께 즐겁게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이루셨을까요?


  풀 한 포기를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시 한 줄을 쓰는 마음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곁님하고 아이랑 기쁘게 삶을 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 ‘내 집’을 장만할 수 있을는지 까마득하더라도, 들꽃이 들과 숲뿐 아니라 도시 한복판 골목길에서도 곱게 피어나서 맑게 웃듯이 아름다운 하루를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이 흐르는 마음으로 삶을 노래하는 사람한테는 지구별 어느 곳이나 ‘내 보금자리’요 ‘내 쉼터’이며 ‘내 삶자리’입니다. 사랑이 흐르지 않는 마음이 되면 삶을 노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집을 거느린다고 하더라도 노래 한 가락조차 못 부르는 가난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시를 써서 노래하는 사람은 ‘내 집이라고 하는 재산이 번듯하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구별을 온통 내 집으로 삼는 사랑으로 꿈꾸는’ 사람이지 싶습니다. 4348.6.1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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