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시선 393
안희연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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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6



시와 버스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안희연 글

 창비 펴냄, 2015.9.30. 8000원



  아침에 군내버스를 타러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기 앞서 감을 여덟 알 씻어서 조각조각 썹니다. 다섯 알은 큰 접시에 얹고, 석 알은 작은 접시에 담습니다. 아이들이 아침에 배고프다고 느끼면 스스로 찾아서 먹을 수 있도록 부엌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습니다.


  혼자 바깥일을 보려고 마실을 나와야 하면 무엇보다도 아이들하고 곁님이 집에서 무엇을 먹으면서 즐거이 지낼까 하고 헤아립니다. 곁님이 슬기롭게 잘 할 테고, 아이들도 씩씩하게 잘 지낼 테니, 나는 살짝 거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가볍게 챙겨 놓습니다.


  두 아이가 배웅하는 웃음소리하고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어느덧 여덟 살하고 다섯 살인 두 아이는 아버지가 저희를 안 데리고 나가더라도 씩씩하게 웃고 노래를 해 줍니다. 나는 이 웃음이랑 노래를 가슴에 고이 담고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갑니다. 읍내에서는 서울로 달리는 시외버스로 갈아탑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백색 공간)


그가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 손목에서 손을 꺼내는 일이 /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이 /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액자의 주인)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를 달리면서 시를 읽습니다. 시집 한 권쯤 시외버스에서 가볍게 읽습니다. 도톰한 책을 한 권 꺼내어 또 읽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서울로 시외버스는 으레 다섯 시간 가까이 달립니다. 시집 한 권에 도톰한 책 두어 권쯤 넉넉히 읽을 만합니다. 책을 손에 쥐는 동안에는 바퀴 구르는 소리라든지 창문이 덜덜 떨리는 소리를 하나도 못 듣습니다. 오직 책에 깃든 이야기만 내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안희연 님이 빚은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2015)를 읽습니다. 나이가 퍽 젊다고 할 안희연 님은 “네 슬픔”이 아닌 “너의 슬픔”이라고 글을 씁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말은 “내 슬픔”이지만, “나의 슬픔”이라고 하는 일본 말투를 써야 말맛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막일’ 같은 한국말은 말맛이 안 나서 ‘노가다’라고 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퍽 많습니다. ‘농땡이’나 ‘땡땡이’ 같은 일본말을 써야 비로소 ‘노닥거린다’거나 ‘빼먹는다’거나 하는 몸짓을 더 살갗 깊이 느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꽤 많아요.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 /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물속 수도원)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입체 안경)



  요즈음 시외버스에는 창문이 있되 창문을 못 엽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시외버스도 고속버스도 공항버스도 온통 통유리 버스입니다.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일까요. 예전에는 시외버스도 통유리가 아니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시외버스였어요. 버스에서 멀미를 하는 사람이 많아 버스마다 비닐봉지가 대롱거렸어요. 우리 어머니는 나랑 형을 시외버스에 태울 때면 언제나 비닐봉지를 여럿 챙기셨고, 어머니도 멀미를 하고 나도 멀미를 했습니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을 여러 시간 달릴 때면 멀미를 여러 차례 하고는 해쓱해진 채 버스에서 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요새는 거의 모든 시외버스가 통유리일 뿐 아니라, 멀미를 하는 사람도 부쩍 줄었지 싶어요. 애써 비닐봉지를 챙겨서 속을 게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많이 어린 아이들이 버스에서 과자나 빵을 지나치게 먹다가 우웩하고 게우는 일만 더러 있을 뿐입니다.


  참말 사회도 문화도 문명도 시설도 아주 빠르게 바뀝니다. 이처럼 빠르게 바뀌는 흐름에 맞추어 사람들 몸하고 마음도 빠르게 바뀔 뿐 아니라, 말도 생각도 빠르게 바뀌는구나 싶어요.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과 /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 사이에서 / 그는 내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피아노의 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빚은 안희연 님한테는 어떤 슬픔이 끼어들었을까요. 시를 쓰는 안희연 님은 이녁 이웃이 느끼는 슬픔 가운데 어떤 슬픔을 맞아들일까요.


  슬픔이 끼어든다고 할 적에는, 또 네 슬픔이 끼어든다고 할 적에는, 내가 여러모로 슬프고 괴로운데 네 것까지 나한테 얹혀진다는 뜻입니다. 내 슬픔으로도 벅차거나 힘든 마당에, 네 슬픔이 끼어들어 곱절로 벅차거나 힘들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 다정히 춤을 추고 있다 // 물처럼 흔들리는 무릎과 / 호주머니 속의 못들 (포르말린)


날려 보내도 기어이 되돌아오고 / 더듬더듬 그 새를 살피고 / 이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 (호우)



  전라남도 바닷가를 낀 시골자락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서울까지 가는 길에 쉼터를 두 차례 들릅니다. 그나마 요새는 고속도로가 곳곳에 많이 뚫려서 두 차례를 쉰다고 할 만합니다. 예전에는 세 차례도 쉬고 네 차례도 쉬었을 테지요.


  고속도로가 늘어나서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만큼 시외버스는 창문을 꼭꼭 여밉니다. 통유리로 된 버스가 고속도로를 아주 빠르게 달리니, 예전에 예닐곱 시간이나 일고여덟 시간쯤 걸리던 길을 너덧 시간이면 가뿐히 달립니다. 예전에는 기나긴 길을 달리며 창문바람으로 멀미를 식히거나 가라앉혔다면, 이제는 멀미를 할 만큼 머나먼 길이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사회와 문화와 삶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사회와 문화와 삶에 맞추어 시도 소설도 문학도 모두 새로운 흐름이 불거진다고 할까요. 이제는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까,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늙고, 서울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까, 오늘날 사회에서는 ‘고향은 그냥 서울’인 흐름으로 뿌리를 내리지 싶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버이 고향도 서울이요 아이 고향도 서울인 흐름이 굳어지지 싶어요. 전라말이나 경상말은 한 번도 들을 수 없이, 그저 서울에서 살며 표준말만 듣고 교과서와 영화와 책과 연속극에 나오는 표준말로만 생각을 다스리는 흐름으로 뒤바뀌지 싶어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몹시 드문’ 아이들도 시골말이나 고장말은 거의 듣지 못하면서 서울 표준말로만 배우고 방송이나 영화를 보면서 자라지 싶어요.



저런 건 우리 집 마당에서 얼마든지 있잖아 멀리 오면 바람의 방향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돌덩이들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기차가 사라지고 있어 누군가 다급히 소리쳤고 (그럼 이건 누구의 이빨자국이지?)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 밤낮없이 바다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 아주 오래된 옛날에.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신이 떨군 커다란 눈물방울. 영원히 마르지 않는. (슬리핑백)



  고속도로를 새로 놓는 만큼 버스는 훨씬 빨리 달립니다. 얼마 앞서까지 시골하고 서울은 참으로 멀리 떨어졌다고 한다면, 이제 시골하고 서울은 무척 가깝다고 할 만합니다. 고속도로가 늘어나는 만큼 숲과 들은 깎이거나 무너졌고, 시골도 도시도 옛날보다는 덜 맑은 바람을 마십니다. 고속도로가 새로 생기는 만큼 하늘은 차츰 지저분해지고, 뭇별이나 미리내도 천천히 자취를 감춥니다.


  하늘에 뜬 별이 사라지면서 땅에 전깃불이 밝습니다. 지구를 둘러싼 너른 우주에 가득한 별을 늘 바라보던 삶이 저물면서, 지구 곳곳에 커다란 도시가 더욱 커지는 삶이 퍼집니다.


  도시 내음이 물씬 풍기는 현대 시문학 가운데 하나인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시골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마실을 하면서 읽습니다. 도시하고 가까울수록 나무가 줄어들고 풀하고 꽃도 자취를 감추는 이 고속도로에서 시집 한 권을 천천히 읽은 뒤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오늘 시외버스로 달리는 이 길이 서른 해쯤 앞서는 어떤 숲이었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삼백 해쯤 앞서는 이 자리에서 범이나 이리나 여우나 곰이나 늑대가 어슬렁거렸을 테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삼천 해쯤 앞서 이 자리는 어떠한 이야기가 벌어지는 곳이었을는지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서른 해 뒤에는, 삼백 해 뒤에는, 삼천 해 뒤에는, 이 자리가 어떻게 바뀔는지 어림해 봅니다. 한낮에는 아직 가을볕이 매우 뜨겁습니다. 4348.10.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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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마술사 문지아이들 111
정두리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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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1



‘아이를 구경하는 동시’는 좀 재미없다

― 신나는 마술사

 정두리 글

 노인경 그림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1.8.16. 9000원



  정두리 님이 빚은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문학과지성사,2011)를 가만히 읽어 봅니다. 정두리 님은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지켜본 눈길로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을 테고,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을 테지요.


  동시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쓰는 시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어른 눈길이 쉬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양이 잠〉이라든지 〈모란 장날〉 같은 동시는 ‘어른이기 때문에’ 쓰는 동시입니다. 어린이가 동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처럼 안 쓰리라 느껴요. 바라보는 자리와 눈길이 사뭇 다르니까요. 어린이가 장날에 장마당에 갈 적에 ‘장 구경’을 하지, 장마당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구경하지 않습니다. 시골 장마당에 사람이 적거나 없다는 얘기는 언제나 어른이 합니다.



기웃거리는 사람보다 / 파는 사람이 많은 / 비 오는 장날 (모란 장날)


턱 받치고 / 오그리며 자다가 움찔, / 그러다 다시 잔다 // ―얘, 제대로 누워 자라 (고양이 잠)



  나비도 하늘을 날기에 날개가 있습니다. 다만 나비한테는 깃털은 없고 날개만 있어요. 통으로 된 날개이지요. 이와 달리 새한테는 깃털이 있습니다. 아니, 새는 깃털이 모여서 날개를 이루지요. 그래서 새는 ‘날개깃’이 있습니다만, 나비한테는 날개깃이 없어요. 〈빗방울〉이라는 동시에 나오는 ‘날개깃’이라는 낱말은 곰곰이 따져야 하리라 느낍니다.


  나비한테 깃털이 없다 하더라도 “나비도 날개깃을 오므렸다”처럼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른이 쓰고 읽는 시에서 말하는 ‘문학적 허용’을 어린이가 읽는 동시에까지 해야 할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린이는 동시를 문학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동시를 ‘문학’에 앞서 ‘이야기’로 읽고 ‘말’로 읽어요. 어린이는 동시나 동화를 읽으면서 이야기뿐 아니라 말을 배웁니다.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말마디라고 하더라도 어린이문학에서는 낱말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서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나 동화를 빚는 어른은 언제나 어린이한테 ‘말을 가꾸는 길’하고 ‘말을 살려서 이야기를 짓는 길’하고 ‘말을 사랑하여 삶을 함께 사랑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비 오는 날 / 호박꽃이 입을 꼬옥 다물었다 / 나비도 날개깃을 오므렸다 (빗방울)


비 오는 날 / 빨리 오는 어둠 / 자동차 불빛이 물에 젖어 / 찻길에 긴 줄로 떠다닌다 / 모두 젖어 눅눅하다 (장마 그친 날)



  〈장마 그친 날〉 같은 동시도 그야말로 어른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시는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모습을 어른이 바라보는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동시에도 어른 눈길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니,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한테 새로운 눈길과 생각을 드러내 보이면서 이야기를 베푸는 만큼, 언제나 어른 눈길과 생각이 나타날 테지요. 그런데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에 나오는 동시는 너무 어른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가을 햇살〉을 보면 “빨래를 걷어 / 옷으로 개키고”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즘 어린이 가운데 이러한 집일을 하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투실한 햇사과 / 소쿠리에 담고 일어서면” 같은 시골일을 거드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니면, 어른이 일하는 모습을 어린이가 옆에서 구경하거나 지켜본 이야기를 썼다고 여겨야 할까요.



빨래를 걷어 / 옷으로 개키고 / 투실한 햇사과 / 소쿠리에 담고 일어서면 // 어느새, / 해 그림자 접어지는 / 가을 저녁나절 (가을 햇살)



  문학에서는 흔히 ‘완상’이라는 어려운 말을 씁니다.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는 ‘어린이를 아끼는 어른으로서 풍경을 완상하는 작품’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면, 완상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에서 이 한자말을 찾아보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玩賞’이고, “즐겨 구경함”을 뜻합니다. 둘째, ‘傷’이며, “매우 슬퍼함. 또는 슬퍼서 마음이 상함”을 뜻합니다. 셋째, ‘頑喪’이고, “완고하고 거만한 상제”를 뜻합니다. 둘째와 셋째는 아닐 테고 첫째 ‘완상’이겠지요. 그리고 한국말사전에 둘째나 셋째 완상은 없어도 될 만하리라 봅니다. 더 생각해 보면, 첫째 완상도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즐겨 구경함”은 이 말대로 쓸 때에 뜻이 또렷하거든요. 그냥 “즐겨 구경함”이라 말하면 되지, 애써 한자를 빌어 ‘玩賞’ 같은 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는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즐겨 구경하는 눈길”이 짙게 나타납니다.



입안에 가득차는 / 삼키기 넉넉한 / 달큼한 수박 물 // 어느새 입술 위에 / 점으로 앉은 까아만 씨앗. (수박 이야기)


작아서 / 귀여운 건 / 꽃도 그렇지 // 작은 으아리꽃 (작은 으아리꽃)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쓰는 동시이기에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동시일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더 살펴본다면, 어린이는 ‘어린이를 어른이 지켜보면서 쓰는 글’을 재미있어 하거나 즐겁게 여길 만할까 같은 대목을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수박 이야기〉를 어른이 지켜본 모습으로만 쓰는 동시하고, 어린이가 수박을 먹는 기쁨이나 재미를 쓰는 동시가 있으면, 어린이는 어느 동시를 즐겁거나 재미있게 읽을까요? 〈작은 으아리꽃〉을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작아서 귀엽다고 노래하는 동시를 쓸 수도 있으나, 어린이 눈길로 으아리꽃을 본다면, 어린이는 이 꽃이 ‘작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크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작고 크다’가 아닌 ‘예쁜 꽃’이라고 느낄까요?



조용한 오후 / 설핏 들었던 낮잠 깨면 / 더위를 가르는 매미 소리 (혼자 있는 날)



  아이들하고 함께 놀면 어른도 즐겁거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꾸미거나 짓는 놀이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이 스스로 꾸미거나 짓는 놀이를 어른이 아이들 사이에 섞여 들면서 놀면 한결 즐겁거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보기에 말도 안 된다고 여길 만한 규칙으로 논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말이 되게 놀’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놀고 그냥 웃고 그냥 노래하면 돼요.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일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어린이가 노는 모습만으로도 그야말로 재미있지요. 어린이는 잠을 자든 밥을 먹든 놀이를 하든 모든 몸짓이 사랑스럽고 귀엽지요.


  이리하여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동시를 쓰는 어른은 으레 ‘완상’이라든지 ‘동심 천사주의’에 쉽게 빠지고 맙니다. 지켜보거나 구경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함께 지내는 어른으로서 스스럼없이 아이들하고 섞여서 논다면, 이때에는 ‘완상’이나 ‘동심 천사주의’ 같은 동시를 못 씁니다. 아이들하고 웃고 떠들면서 노는 재미와 즐거움을 온몸으로 누리기 때문에, 어린이 눈길과 눈높이에서 ‘놀고 웃고 노래하고 뛰고 달리는 기쁨’을 동시로 풀어낼 테지요.


  어린이도 마냥 놀기만 하지 않고 때때로 차분히 앉아서 구름바라기나 해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한테 ‘사물을 차분히 지켜보거나 구경한 뒤에 이 느낌을 글로 써 보도록 이끄는 일’도 뜻있습니다. 다만, 동시집 한 권이 너무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이야기’로만 가득하다면, 여러모로 기운이 빠집니다. 동시를 쓰는 어른이 할머니나 할아버지 나이라 하더라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이녁 손자 손녀하고 즐겁게 손을 잡고 놀듯이, 동시에서도 어린이 놀이와 웃음과 노래가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마술사나 마법사 이야기도 재미있을 테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이름 없는’ 마술사요 마법사입니다. 4348.10.1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비평/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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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문학동네 동시집 17
정완영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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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0



스무 해쯤 지난 뒤에도 동시가 있을까

―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정완영 글

 김세현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1.4.10. 8500원



  도시에서 사는 이웃은 ‘시골에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줄면서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는가’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인구 감소’를 말할는지 몰라도, 도시에서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다닐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학교’가 해마다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앞으로 열 해쯤 지나면 면소재지 초등학교는 거의 다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면 읍내 초등학교조차 아이 숫자가 부쩍 줄면서 아슬아슬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 있는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옛날하고 달라서 ‘시골 놀이’를 누리거나 즐기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 시골은 어디에서나 농약을 엄청나게 뿌릴 뿐 아니라, 기계와 자동차도 흔하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고샅놀이’도 ‘도랑놀이’도 없습니다. 아이들끼리 짝을 지어 골짜기를 타거나 바다로 놀러다니는 일도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에서도 도시하고 똑같이 스마트폰으로 놀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게임을 할 뿐입니다.



다섯 살 우리 아기 앞니 빠져 내리듯이 /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쏙쏙 빠져 내립니다 / 사비약 사비약 하며 사비약눈 내립니다.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별들은 등불을 끄고 하늘 속에 꼭꼭 숨고 / 눈은 등불을 켜 들고 밤새도록 내리는데 / 우리는 한 이불 속에서 호끈호끈 잠이 듭니다. (눈 내리는 밤)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쓴 동시조를 그러모은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문학동네,2011)을 읽습니다.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동시조’라기보다는 ‘어른이 읽을 시조’를 쓰는 분이었고, 이 동시조집에도 ‘어른이 읽을 시조’가 많이 나옵니다.



차창에 어둠을 싣고 시골 버스가 달려갑니다 / 호박꽃 초롱만 한 등불 싣고 달려갑니다 / 또 하나 그리운 등불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시골 버스)


새벽부터 매미가 운다 자지러지게 운다 /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 엄마 품을 뒤흔들듯 / 축 처진 나뭇가지들 들어 올리며 운다. (매미)



  〈시골 버스〉 같은 시조는 아련하도록 고운 노래라고 느낍니다. 다만, 어린이한테 걸맞을 만한 노래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 어른이 되어요. 이런 도시 아이들한테 〈시골 버스〉는 ‘고향’을 그리는 이야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시조 작품으로는 고운 노래일 수 있어도 동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매미〉도 그렇지요.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 엄마 품” 같은 말마디는 어린이가 읊지 않습니다. ‘아기’나 ‘아기 엄마’ 같은 말마디를 넣는다고 해서 동시조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고, 어린이 꿈을 노래할 때에 비로소 동시요 동시조라고 느낍니다.



수문 닫아 걸었는가, 수문 열고 서 있는가 / 밀물처럼 오던 아이들 썰물처럼 다 나가고 / 햇살이 혼자서 찾아와 유리창을 닦고 있다. (폐교에 서서)



  〈폐교에 서서〉 같은 동시조도 오직 어른 눈길로 써서 오직 어른이 누릴 만한 시조일 뿐,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동시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골 아이라면 ‘폐교’를 알 수 있을는지 모르나, 학교버스를 타고 마을과 학교 사이만 오가는 요즈음 시골에서도 폐교를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도시 아이한테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폐교 이야기를 동시조로 그리려 한다면, 아흔 살 웃도는 할아버지가 먼 옛날에 학교 다니던 이야기를 그릴 때에 한결 구수하면서 구성진 노래가 될 만하리라 느낍니다. 정완영 님 스스로 어떤 놀이를 했는지, 동시조 할아버지 스스로 어떤 웃음꽃을 피우면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아스라한 옛날에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를 지냈는가 같은 이야기를 그릴 때에 비로소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동시조가 되리라 느낍니다.



한평생 흙만 주물며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 땅을 깔고 눕고, 하늘을 덮고 누워야 / 이승도 저승도 모르고 더렁더렁 코를 곤단다. (할아버지의 잠)



  〈할아버지의 잠〉 같은 동시조도 아이들한테는 어렵거나 아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서 죽을 때까지 늘 흙만 주무르던 할아버지 삶을 고이 그린 동시조이기 때문에, 이 같은 동시조는 아이들한테 ‘아흔 넘은 할아버지’가 어떤 꿈을 가슴에 품으며 살았는가 하는 대목을 엿보도록 이끌 만하리라 느낍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기에, 〈할아버지의 잠〉은 어여쁜 동시조라고 봅니다.



우리 마을 앞 냇물을 건너가는 징검다리 / 돌팍 밑에 숨어 사는 버들붕어 두 마리는 / 돌팍이 저이들 집이래 여울목이 놀이터래. (버들붕어 두 마리는)



  요새는 시골에서도 버들붕어를 찾기 어렵습니다. 도랑도 냇물도 온통 농약냄새라서 물고기가 살기 어렵습니다. 도랑에서 가재를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입니다. 요새는 시골 아이도 개똥벌레 구경을 거의 못 합니다. 그러나, 동시조 할아버지가 버들붕어 이야기를 노래한다면, 도시 아이도 시골 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 할 테지요. ‘징검다리’는 뭔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테지요. ‘돌팍’은 또 뭔 소리인가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울 테지요. ‘여물목’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어른들한테 여쭙겠지요.



참새는 참새끼리 오고 가는 길이 있다 / 잠 깊은 봄 하늘에 여울지는 길을 내며 / 아랫말 윗말 오가듯 오고 가는 길이 있다. (참새 길)



  스무 해쯤 뒤에도 이 땅에 동시가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스무 해쯤 지난 이 나라 시골자락에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읍내에 한 곳쯤 가까스로 남을 만한 모습이 된다면, 또는 읍내에조차 학교가 모조리 문을 닫는다면, 그야말로 이 나라 거의 모든 아이들이 좁은 도시에 몰려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때에도 동시가 있을 만한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동시를 써서 아이들한테 읽힐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삶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 어른들은 어떤 노래를 불러서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을까요?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은 ‘사비약눈’을 노래하지만, 도시에 사는 어른들은 눈이 오면 길이 막히고 자동차가 못 다닌다면서 투덜댑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 목소리’를 으레 듣습니다. 눈이 오는 날 ‘눈이 오니 너희는 즐겁겠네. 우리도 함께 눈놀이를 할까’ 하면서 빙그레 웃는 목소리를 낼 만한 어른은 앞으로 스무 해쯤 뒤에 몇이나 남을까 궁금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모든 수업을 덮고는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함께 눈사람을 굴리자고 외칠 만한 교사나 교장선생님이 앞으로 몇이나 있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4348.10.5.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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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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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4



시와 회사원

―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글

 창비 펴냄, 2015.9.25. 8000원



  한창 아플 때에는 아무것도 못 먹기 일쑤입니다. 끙끙 앓느라 바쁘기에 밥도 물도 몸에서 안 받을 뿐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몸이 아프면 소화기관은 모두 스르르 멈춘다고 할까요. 몇 끼를 굶거나 며칠을 굶어도 소화기관은 밥 달라는 소리를 않습니다.


  넋을 잃도록 아프던 나날이 지나고 조금 넋을 차리면 아주 조금 물을 마시거나 밥술을 뜹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이 먹지도 않습니다. 제법 아픔을 털고 일어날 만한 때가 되면 조금 더 먹지만,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찬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조금만 먹어서 배가 차면 이내 졸음이 쏟아지면서 하염없이 꿈나라를 헤맵니다.


  아픔을 이럭저럭 털어내어 제법 움직일 수 있을 만하면, 몸에서 이것저것 많이 바랍니다. 그렇다고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골고루 몸에 넣어 달라고 바라요. 그동안 그리 내켜 하지 않던 것까지 몸속에서 넣어 달라고 바라기에, 나는 내 몸이 씩씩하게 나아서 튼튼하게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이것저것 신나게 먹습니다.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 호되게 아파본 사람이다. /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오줌의 색)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이현승 님이 빚은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창비,2015)을 읽습니다. 1973년에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 짤막하게 책날개에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어떤 하루를 누리는지 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를 읽으며 집안에 아이들도 있구나 하고 느끼고, 여느 살림집하고 비슷하게 집일이나 아이키우기는 거의 곁님이 도맡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에서 사는지 꼭 알아야 하지는 않으나, 시를 읽다 보면 이래저래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이웃인지, 도시에서 사는 이웃인지 궁금하다고 할까요. 그래도 시를 읽으면 이 시가 시골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도시에서 태어났는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시를 읽으면 이 시를 쓴 분이 어떤 눈길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일을 하는가 같은 대목도 넌지시 드러납니다.



죽은 사람의 눈을 감기듯 / 이불을 덮어주고 간 아내의 손끝이 한없이 부드러워 / 잠 깨어 다시 일어난다. (잠 깨우는 사람)


숨이 막힌다. / 가지런히 잘려나간 잔디에서 풀 냄새가 난다. / 씀바귀꽃이 개선 환영 인파처럼 늘어선 길을 걸으며 / 박수 받아야 할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 채 / 암담은 화창과 마주하고 있다. (블랙아웃)



  시인 이현승 님은 책끝에 붙인 말에 “사람의 말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담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사람 안으로 담기고, 그 사람의 모든 것에는 그 사람이 담긴다(134∼13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해적이 같은 말이 없어도 시만 읽더라도 시인이 걸어온 길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굳이 해적이를 달지 않더라도 시인이 품은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애써 온갖 이론과 지식을 곁들이는 시평(해설)을 책끝에 문학평론가 이름으로 달아 놓지 않더라도 시집 한 권이 우리한테 나누어 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초등학교 놀이터에 와서는, 놀이터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다 읽고서 생각해 봅니다. 아직 덜 나은 오른무릎을 살살 움직여서 자전거를 달려 놀이터에 와서는, 고작 오 킬로미터쯤 달리고도 무릎이 시큰거려서 아이들하고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그저 놀이터 둘레에 퍼질러 앉아서 시집 한 권 들춰야 하는 몸으로 천천히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 사람이 담기는데, 나는 이 시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이녁한테서 어떤 몸짓을 이웃한테 보여주려는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한테서 어떤 몸짓을 바라보려는 마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손은 두 개뿐인데 /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다. /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저글링)



  아이들은 마음껏 뛰놉니다. 땀으로 옷을 적시든 모래로 옷을 더럽히든 그야말로 마음껏 뛰놉니다. 손발이 지저분해지면 아버지가 씻겨 주는 줄 잘 압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아버지가 갈아입혀 주는 줄 잘 압니다. 신나게 놀아서 배가 고프면 아버지가 밥을 차려 주는 줄 잘 압니다. 개구지게 놀아서 졸음이 쏟아지면 아버지가 토닥토닥 어루만지면서 잠자리에 누여 주고 재워 주고 노래를 불러 주는 줄 잘 압니다.


  나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음껏 일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기쁘면서 신나는 일을 할 적에 웃는 낯이 됩니다. 어버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일을 할 적에 노래하는 몸짓이 됩니다. 웃으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노래하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춤도 추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다만, 달포가 되도록 아직 무릎이 말끔히 낫지 않아서 춤은 못 춥니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봉급생활자)


미자에게 맞은 딱지는 언제라도 뼈아플 뿐이고 / 순자가 미자보다 예쁘다는 말처럼 멍청한 말은 없다. (허수아비 디자이너)



  여기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갑니다. 시골에 있고 싶은 사람은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시골에서 살고,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시골로 와서 삽니다. 도시에 있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도시에서 살고,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도시로 가서 삽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싶으니까 자전거를 탑니다. 자전거를 몰다가 논둑길에서 물이끼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크게 엎어져서 무릎도 크게 깨져서 여러 날 몸져누워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갔지만, 무릎이 웬만큼 나아서 걸을 수 있은 뒤에 살살 자전거를 다시 달립니다. 자전거를 다시 달리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서 홀가분하게 놀도록 하자면 자전거를 달려야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느라 밤잠을 거의 못 이루다시피 하는 나날을 어느덧 여덟 해를 보낸 삶도, 나 스스로 이러한 삶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이웃이 참 많은데,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갓난쟁이일 무렵에 날마다 천기저귀를 마흔 장이나 쉰 장쯤 손빨래하는 일이 힘든 적은 없었습니다. 몸이 찌뿌둥하게 결리기는 했어도 신나게 빨고, 신나게 다리고, 신나게 개어서, 신나게 갈았어요. 눈을 감고도 기저귀를 채울 수 있고, 눈을 감고도 똥을 치울 수 있어요.



우주에 관해 내가 무얼 알겠는가? / 나는 그가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자 나도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 사실 계속 걸어서 우리는 배가 조금 고팠다. / 우주를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다. (먼지는 외롭다)



  우주를 알고 싶은 사람은 우주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를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하기와 뺄셈을 알고 싶은 아이는 더하기와 뺄셈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하기와 뺄셈을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어렵고 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주나 더하기나 똑같습니다. 이리하여, 누군가는 밥짓기가 너무 어려워서 밥을 못 짓는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기저귀 채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기저귀를 못 채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아기 똥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서 아기 똥을 못 치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못 탄다고 하고, 누군가는 시골에서 못 산다고 하며,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합니다.


  중력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양자물리학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지구별 밖에 있는 수많은 별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수수께끼를 품기에 수수께끼를 풉니다. 사랑을 꿈꾸기에 사랑을 이룹니다. 삶을 노래하기에 삶이 즐겁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시라고 하는 수수께끼’를 가슴에 품는 사람이 씁니다.



아빠 구름은 어떻게 울어? / 나는 구름처럼 우르릉, 우르릉 꽝! 얼굴을 붉히며, // 오리는? / 나는 오리처럼 꽥꽥, 냄새나고, // 돼지는? / 나는 돼지처럼 꿀꿀, 배가 고파. (구름의 산책)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회사원’ 모습이 떠오릅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더라도 얼마든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시를 못 쓴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은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이녁 삶을 시로 씁니다. 어느 한 사람은 회사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시로 못 씁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숲이나 나무나 바람이나 하늘이나 논밭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고요하거나 착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든, 또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든, 또 도시에서 딱히 일자리 없이 집에서 지내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가정주부’이든 ‘살림꾼’이든 대수롭지 않아요. 공돌이나 공순이라 하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라 하든, 참말 대수롭지 않습니다.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 시를 쓰고, 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시를 읽습니다. “삶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시를 쓰고, 시를 읽습니다. 삶을 생각하기에 시를 생각하면서 노래합니다. 삶을 생각하는 마음이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산 사람’이 살아서 시를 씁니다. 삶을 노래하는 마음이어야 시인이 되지 않고, 그저 살면 되고, 그예 하루하루 즐겁게 맞이하면서 밥 한 그릇 맛나게 차려서 먹으면 어느새 시 한 줄이 노래가 되어 조용히 태어납니다. 손에 연필을 쥘 수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씩씩하게 연필을 쥐어 보셔요. 우리는 누구나 시를 노래하는 ‘글님’이 될 수 있습니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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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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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3



시와 달밤

― 밤 미시령

 고형렬 글

 창비 펴냄, 2006.3.17. 7000원



  달빛이 내리는 밤에는 달빛을 듬뿍 받습니다. 달빛은 깜깜한 한밤을 고루 밝혀서 고샅길을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한가위나 설에는 더없이 밝은 달빛이 들판을 푸근하게 어루만집니다.


  불빛이 가득한 밤에는 불빛이 눈부셔서 잠들기 어렵습니다. 불빛이 밝은 도시에서는 깊은 밤에도 오가는 자동차가 많고, 자동차가 내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도 그치지 않습니다.



사다리 같은 긴 목을 펼쳤다. 하늘가지에 노는 아기잎을 따 먹으려고, 앞발은 풀을 피해 가슴 밑 흙바닥에 사뿐히 눌러놓았다. 나뭇잎만 한 얼굴을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의 입은, 내 주먹만 하다. (동물원 플라타너스)



  고형렬 님이 빚은 시집 《밤 미시령》(창비,2006)을 읽습니다. 밤에 미시령을 넘는 이야기일 수 있고, 밤이 깊은 미시령을 바라보는 이야기일 수 있으며, 밤과 미시령을 함께 생각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또는 밤이나 미시령하고는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어요. 그러면, 시인한테 밤과 미시령은 무엇이 될까요. 시인은 어인 일로 밤에 미시령을 생각할까요.



사람만이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 가족과 함께 도처를 떠돌아다닌 프라이드는 / 제 최종 폐차통지서를 보내고 / 내 마음속에서 한 시절처럼 사라졌다 / 거대한 폐차장에서 / 그는 북한산 흰 구름처럼 북으로 사라졌다 (폐차통지서를 받고, 서울45라4706)



  옛날이라면 미시령을 자동차로 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자가용이 매우 흔하기 때문에 시인도 자가용을 몰며 미시령을 밤에 넘습니다. 밤이 아니어도 언제나 넘을 수 있는 미시령이요, 언덕길이며, 고갯길입니다. 숲길이나 멧길이 아니어도 어디이든 자가용으로 달릴 만하고, 이 나라에서 자동차로 못 가는 곳은 없다시피 합니다.


  문득 돌아봅니다. 참말 한국에는 자동차가 많습니다. 자동차가 많아도 아주 많아서, 뭍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도 흔합니다. 뭍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건너려고 놓는 다리가 아니라, 자동차가 뭍과 섬 사이를 싱싱 빠르게 달리도록 하려는 다리입니다.


  이리하여, 시인은 자가용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시인은 폐차로 떠나 보내는 자가용 이야기를 시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맞아들이는 자가용 이야기를 시로 그릴 수 있어요.



남들 다 보고 온 백두산 보러 2000년 / 옌뻰 가, 모자같이 생긴 산을 지나 // 윤동주 집으로 가다가 새빨간 깨꽃밭을 보았다 (모자산 꽃을 지나며)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누구나 시외버스를 타고 이 고장 저 고장을 찾아다녔습니다. 더 예전에는 누구나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서 이 고을 저 고을로 나들이를 다녔습니다. 하루아침에 서울하고 부산을 오가는 오늘날에는 이 빠른 찻길을 내달리면서 태어날 만한 시가 드물 텐데, 스무 날이나 달포나 여러 달에 걸쳐서 천천히 두 다리로 이 땅을 밟으며 나들이를 다니던 꽤 아스라한 지난날에는 바로 이 마실길에서 수많은 시와 노래와 이야기가 태어났습니다.


  꼭 자가용 때문은 아닙니다만, 자가용이 늘고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늘면서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이 부쩍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자가용을 몰거나 자가용에 함께 탄 사람은 깊은 밤에 달빛을 느끼지 못해요. 자가용에서는 오직 앞만 바라보아야 하며, 앞 자동차 불빛을 살펴야 하고, 때때로 뒷 자동차 불빛까지 헤아려야 합니다. 한낮이라 하더라도 햇빛을 느낄 만큼 느긋한 운전수는 없습니다. 신호등을 살피고 다른 자동차를 헤아려야 합니다.



산돌을 밟으며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화산이었다는 것을 / 이 돌들이 심장을 단숨에 연소시킨 불이었다는 것을 / 나무들은 그럼 어디서 왔는가 나는 모르지 / 그것이 설악의 화두다 알 길 없는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돌)



  《밤 미시령》을 쓴 고형렬 시인은 하늘에 뜬 돌을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산을 오르면서 산돌을 밟기에 하늘에 뜬 돌을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아서 산돌을 밟지 못했다면, 자동차에서 내릴 엄두나 생각이나 마음이 없이 산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두 다리로 이 땅을 밟는 삶을 누리지 않았다면, 아마 시는 흐르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두 손으로 가꾸는 삶이 있기에 시를 씁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두 발로 걸어가는 삶이 있기에 시를 노래합니다.



풀잠을 자고 싶은 게지. / 나 지금 하고 싶은데. / 지금 할까? / 참았다가 모레 합시다. / 싫은데……. (벌레)



  시를 읽는 사람은 시외버스에서도 읽고, 전철에서도 읽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베개맡에 시집을 눕혀 놓고도 읽고, 밥을 먹다가도 읽으며, 마당에 가만히 서서 가을볕을 쬐면서도 읽습니다.


  셈틀을 끄기에 시를 읽습니다. 신문을 덮기에 시를 읽습니다. 텔레비전을 집안에서 치우기에 시를 읽습니다. 두 다리로 걸으면서 지구라는 별을 느끼기에 시를 읽습니다. 훅 불어서 나뭇가지를 살살 건드리는 바람을 쐬기에 시를 읽습니다.



나도 그래 / 내 등뒤에 서울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 없어. 뻬이징 밖에는 농민이 살고 풀들이 살아 / 토오꾜오 밖에는 토오꾜오 만이 있고 파도가 있고 / 서울 뒤에는 북한산이 있다는 것이지. (버티컬 블라인드가 열릴 때)



  때때로 자동차를 멈출 수 있으면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자동차를 멈추어 시동을 끄고 창문을 내려서 가을바람을 한껏 들이마신다면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귀여겨듣는다면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를 읽을 적에 새로운 시가 마음속에서 샘솟습니다. 시를 읽고 시를 쓸 수 있으면 삶을 노래로 지으면서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한테 따스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 꾸러미를 풀어놓을 만합니다.


  환한 달빛은 구름까지 속살을 훤히 보여줍니다. 눈부신 달빛은 별더러 오늘은 고이 잠들라고 속삭입니다. 맑은 달빛은 시골집 처마를 지나 대청마루에까지 스며듭니다. 깊어 가는 가을에 무르익는 나락이 달빛을 받으며 더욱 노란 빛이 됩니다. 4348.9.3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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