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 창비시선 52
송수권 지음 / 창비 / 198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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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1



‘문학상’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

― 아도

 송수권 글

 창작과비평사, 1985.10.10. 8000원



  전남 고흥군에서는 2015년부터 ‘송수권 문학상’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여러 문학상을 보면 ‘작가가 죽은 뒤’에 작가 이름을 내거는 문학상을 마련한다고 하기에, ‘송수권 문학상’은 여러모로 파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송수권 문학상’은 송수권 시인이 마련한다거나 ‘송수권 문학관’에서 마련하는 문학상이 아닙니다. 지자체 군청에서 마련하는 문학상입니다. 이 대목도 파격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따로 문학관이 아직 없는데 문학상부터 생기는 셈입니다.


  전남 고흥군에서는 ‘송수권 문학상’에 상금으로 삼천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돈을 내거는 문학상인 셈입니다. 문학상을 마련한다면 한 번 주고 끝내는 일이 아닐 테니 앞으로도 이 문학상은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고흥군에서는 문학상과 얽힌 돈을 퍽 넉넉히 마련해야 하겠지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문학상을 마련할 만큼 돈이 있다면, 문학상과 함께 문학관도 발빠르게 세우도록 힘을 모아야지 싶어요. 송수권 시인 문학을 기리거나 돌아보거나 살펴보거나 누릴 만한 자리(문학관)는 없이 문학상만 있어서는 문학을 아끼는 사람한테도, 고흥 지역 청소년한테도 ‘송수권 문학’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고흥에는 아무런 문학관이 없습니다. ‘천경자 전시관’이 고흥에 문을 열기는 했지만, 작품 관리 소홀 때문에 천경자 님 그림은 모두 고흥을 떠났고 전시관마저 문을 닫았습니다. 지자체에 꼭 문학관이나 전시관이 있어야 하지는 않지만,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문학꽃을 피운 넋을 기리거나 이야기할 자리를 찬찬히 마련한다면 작은 시골마을 아이들 마음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자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낱말을 / 입안에서 요리조리 읽어보면 / 아, 구수한 흙냄새 / 초가집 감나무 고추잠자리…… / 어쩌면 저마다의 모습에 꼭두 알맞는 이름들일까요. (우리말)


여름날 아침은 달디단 이슬 한 모금에 / 우엉잎 속에 숨어 춤추는 달팽이 (가을바람 찬 바람)



  1985년에 나온 송수권 님 시집 《아도》를 읽습니다. 1985년이라면 고흥에서 다른 고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 아주 좁던 무렵입니다. 요즈음도 고흥은 한국에서 무척 외진 시골이지만, 1985년은 더욱 외진 시골이었고, 송수권 시인이 태어난 1940년 언저리는 그야말로 외진 시골입니다.


  고흥이 어느 만큼 외진 시골인가 하면, 고흥문화원에서 1983년에 ‘국민학교 부교재’로 엮은 《우리 고장 고흥》이라는 책을 보면,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흥에 한길이 나고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음.” 하는 연표가 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동방, 광주 교통 정류소가 생김.” 같은 연표에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녹동, 고흥, 벌교 간의 포장도로가 생김.” 같은 연표가 있어요.


  1920년대에 들어서도록 고흥이라는 고장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다닐 만한 ‘한길’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다 고갯길을 걷고 들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 ‘교통 정류소’가 생겼다니, 다른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주 멀었을 테지요. 어렵사리 벌교까지 걸어가야 다른 고장으로 갈 차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로 들어서니 비로소 ‘포장도로’가 고흥하고 벌교 사이에 났다고 해요.


  요즈음은 벌교에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4차선’ 길이 놓였고, 이 길이 고흥에서는 가장 넓고 깁니다. 그런데 이 길이 놓인 지 고작 열 몇 해가 되었어요. 열 몇 해 앞서까지는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은 ‘구불구불한 시골도로 2차선’이었습니다.



우리를 잘못 길들이고 잘못 가르친 역겨운 인물들, / 나는 오늘 이 무덤 앞을 지나가며 어려서 / 시골집 마당에 횟배를 앓으며 / 배고파 잦아진 목소리로 불러대던 / 우리 건국의 위인 제1호 리승만 대통령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 (그는 하와이로 쫓겨갔다가 거기서 죽고, 후에 다시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위인의 집)



  시집 《아도》에 나오는 ‘啞陶’는 ‘벙어리 +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벙어리 질그릇’이란 무엇일까요? 송수권 시인이 스스로 밝히기도 하지만, 1980년 전남 광주에서 이슬처럼 스러진 사람들 넋을 기리려는 마음을 ‘벙어리 질그릇’이란 말을 빌어서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아니,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사람들 입을 꿰매어 벙어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벙어리가 된 사람들은 언제나 흙을 빚으면서 삶을 지었습니다. 흙을 갈고 아끼고 보듬으면서 밥을 먹었지요. 그러니 ‘벙어리 질그릇’이에요.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밟는 이들은 흙을 안 만집니다.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이들은 총칼만을 만집니다. 군홧발을 휘두르는 이들 곁에서 펜이나 붓을 들고 아양을 떠는 사람도 있었고, 아양쟁이는 벙어리가 안 되었으나 ‘제 말’을 할 줄 모르는 쓸쓸한 넋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 듬뿍 떠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 들밥 속에 있고 /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길 잔등에 있다 /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 쩌렁쩌렁 울리는 땅 /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아그라 마을에 가서)


흰 블라우스 초록 치마를 받쳐 입고 / 물찬 제비처럼 오월의 라일락 숲속에서 / 노래하는 남도의 계집들아 / 늬네들 모습 너무 이쁘고 환장해서 / 눈물이 날 것 같구나 (井邑詞)



  팔월 여름에 콩꽃이 피고 집니다. 밭 가장자리나 길가마다 콩이 자랍니다. 그리고, 고흥에서는 돌콩이 어느새 꼬투리를 매답니다. 돌콩은 사람이 심거나 뿌리지 않은 콩입니다. 돌콩은 스스로 꼬투리를 맺고는 스스로 퍼집니다. 바지런한 흙사람은 돌콩이 꼬투리를 맺을 무렵 돌콩을 그러모으는데, 미처 그러모으지 못하면 이듬해에 다시 그 자리에서 새롭게 퍼집니다.


  손수 심은 콩을 거두고, 스스로 퍼진 콩을 거둡니다. 콩알을 훑고 콩밥을 짓습니다. 콩밥을 함께 먹고, 콩알이 자란 흙을 새삼스레 어루만집니다. 바로 이 흙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젖줄이요 숨통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흙에 계시고, 나무에 계시며, 바람과 구름과 제비 날갯짓에 계십니다. 그러니, 흙을 빚어 삶을 짓는 사람들 가슴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시지요.


  오동나무 잎사귀에도, 후박나무 잎사귀에도, 들밥에도, 샛밥에도, 찬물 한 그릇에도, 샘터에서 긷는 물 한 바가지에도,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봄날에 날풀들 돋아오니 눈물 난다 /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의각시풀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



  풀이 돋습니다. 풀은 풀바람을 일으킵니다. 풀이 죽습니다. 농약을 맞아서 죽고, 시멘트에 파묻혀 죽습니다. 예부터 시골지기는 풀 한 포기를 함부로 뽑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군홧발과 함께 일어난 새마을운동은 시골지기한테 농약사랑을 심어 주었습니다. 밭둑도 논둑도 소나 염소나 토끼가 먹을 풀이었지만, 이제 시골에서 소나 염소나 토끼를 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공장 같은 짐승우리(공장형 축사)’에서 ‘항생제가 가득 깃든 사료(공장형 사료)’를 먹는 소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시골사람 스스로 쇠무릎도 모시풀도 쑥도 골풀도 건사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짚으로 이을 일조차 없으니 볏짚을 살뜰히 그러모으지 않습니다. 짚으로 신을 삼지 않으니, 농협에서 내주는 ‘유전자 건드린(개량형) 난쟁이 볍씨’를 기계로 심어서 기계로 거둘 뿐입니다. 농협에서 심으라고 하는 요즈음 볍씨는 낫으로 베기 매우 어렵습니다. 나락알은 많이 맺힌다고 해도 볏포기가 매우 짧기에 기계가 아니고는 못 벨 만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 만수무연 풍년 새야 / 가마솥에 누룬밥 / 아닥딱딱 긁어서 / 너 먹자고 농사 지었니? / 우리 먹자고 농사 지었지. (달노래)



  아주까리꽃이 암꽃과 수꽃이 사이좋게 피는 팔월 여름에 고들빼기잎을 뜯습니다. 시집 《아도》에 흐르는 풀이름을 하나하나 읊어 봅니다. 모두 고운 풀이요, 먼먼 옛날부터 시골지기 누구나 아끼던 풀이며, 아이들은 이 풀을 먹고 뜯으면서 자랐습니다. 풀각시를 지어서 놀고, 풀노래를 부르며 놀며, 풀밭에서 뒹굴며 놀았어요.


  풀밭에서 맨발로 놀던 아이는 자라서 논밭에서 맨발로 일하는 기운찬 어른이 되었지요. 풀밭에서 풀노래를 부르며 놀던 아이는 자리서 논밭에서 들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멋진 어른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 시골마을에서 씩씩하고 튼튼하며 멋진 젊은 어른이 드뭅니다. 들밥과 막걸리를 나누는 두레나 품앗이는 자취를 감춥니다. 들노래 가락이 시골지기 가슴으로 스며서 《아도》라고 하는 시집이 태어났는데, 이제 시골마을에서 들노래 가락을 가슴으로 담아서 새로운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어린이나 푸름이는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누가 왜 퍼뜨렸을까요? 사람은 저마다 제 고장에서 아름다운 마을지기로 살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하는데, 왜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서울이나 큰도시 언저리로만 가도록 내몰까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싱그러운 흙지기가 되는 젊은이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요?



어디서 왔는지 / 우리들의 도시 한복판에 / 오늘도 / 최루탄 개스가 왔다. (망월동 가는 길 2)



  문학상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기념비가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문학관이나 전시관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교과서나 대학교가 없어도 시인은 언제나 시인으로서 삶을 노래합니다.


  흙이 있기에 질그릇을 빚고, 흙이 있기에 씨앗을 심어서 밥을 얻으며, 흙이 있기에 이곳에 집을 지어 살림을 가꿉니다. 흙을 믿고 아끼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먼먼 옛날부터 일군 이야기가 흘러서 오늘날 문학이라고 하는 꽃으로 피어납니다.


  이제 최루탄 가스가 아닌 싱그러운 시골바람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농약 냄새가 아닌 푸른 숲바람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묻히는 들꽃이 아닌,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눌리는 나무뿌리가 아닌, 오순도순 서로 사랑하는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도 나비 애벌레는 바지런히 잎을 갉아먹습니다. 여름 막바지에 새로 깨어나는 나비를 만날 수 있겠지요. 4348.8.1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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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놈 -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동시집 27
김개미 지음, 오정택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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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3



재미난 문학을 읽어도 삶이 따분하다면

― 어이없는 놈

 김개미 글

 오정택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3.8.12. 9500원



  수저질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한참 동안 밥알을 흘리고 국을 쏟습니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을 먹도록 아이는 도무지 수저질을 익숙하게 못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말 그대로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른 해나 쉰 해 동안 수저질을 한 어른도 곧잘 흘립니다. 마흔 해나 예순 해 동안 설거지를 한 어른도 가끔 그릇이나 접시를 깹니다. 아이들이 수저질이 익숙하지 못하거나 그릇을 깨는 일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제 막 삶을 배우고, 바야흐로 삶을 누리며, 차근차근 삶을 즐기는 아이들은 밥알을 흘리면서 신나게 밥을 먹습니다.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해 줬더니 / 자기는 많이 크지 않았다는 거야 / 자기는 원래부터 컸다는 거야 (어이없는 놈)



  김개미 님이 빚은 동시를 그러모은 《어이없는 놈》(문학동네,2013)을 읽습니다. 김개미 님은 아이들이 학교와 집 사이에서 겪는 일을 재미나게 바라보면서 재미나게 풀어냅니다. 아이도 어른하고 똑같은 목숨이라는 대목을 살며시 드러내기도 하고, 아이 사이에서도 언니랑 동생이 모두 사랑스러운 숨결이라는 대목을 넌지시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나이가 많거나 몸이 크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하나입니다. 세 살 아이와 여섯 살 아이도 목숨은 하나예요. 할머니도 어머니도 목숨은 하나예요. 목숨이 둘인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 있는 목숨을 아름답고 즐겁게 누릴 때에 살가이 웃습니다.



앨범을 뒤적거리다 / 배꼽이 빠질 뻔했다 / 기저귀 하나 달랑 찬 / 못생기고 우락부락한 아기가 / 양손에 과자를 든 채 /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 우렁차게 울어 젖혔다 (옛날 사진)




  아이가 잘못을 하는 까닭은 아직 익숙하지 않거나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잘못이 없습니다. 아니, 아이가 한 일은 ‘잘못’이나 ‘잘’로 따질 수 없습니다.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기에 서툴기 마련이고, 아이는 아직 잘 모르니 ‘모르는 대로 스스럼없이’ 할 뿐입니다. 아이는 그저 온갖 일을 겪어 보고 싶습니다. 


  국 그릇에 담긴 국을 숟가락으로 톡톡 쳐 보고 싶습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길목에 큰 돌을 놓아 보고 싶습니다. 나비 애벌레를 살며시 건드려 보고 싶습니다. 잠자리가 손가락에 내려앉으면 잡아 보고 싶습니다. 하늘로 훌쩍 뛰어올라 바람을 타 보고 싶습니다. 도서관이나 전철 같은 데에서도 신나게 달리거나 춤을 추어 보고 싶습니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가 / 화단 앞에서 뭔가를 주워 / 편지 봉투에 넣어 줬어요 / 내년 봄에 심으면 / 분꽃이 필 거라나 (이게 뭐야)



  스스로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아이한테는 하루가 즐겁고 재미납니다. 스스로 놀고 싶은 대로 놀지 못하는 아이한테는 하루가 따분하거나 괴롭습니다.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아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억지스레 쥐어짭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동시를 들려줄 만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받아들일 만한 동시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삶을 물려줄 만할까요? 아이들이 기쁘게 맞아들일 만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마을과 보금자리와 배움터를 베풀 만할까요? 아이들이 사랑스러 껴안을 만한 마을과 보금자리와 배움터는 어떤 모습일까요?




무당벌레를 한참 바라보다가 / 눈을 꼭 감으면 / 무당벌레가 눈 속으로 쳐들어온다 (무당벌레)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씨앗이랑 단추랑 돌이랑 돈을 제대로 못 가린다고도 합니다. 참말 그러할까 싶지만, 참말 그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풀씨가 어떤 풀씨인지 낱낱이 알려주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참말 그러하겠구나 싶습니다. 시골에 살더라도 밭일이나 논일을 거들지 않으면 모르고, 논일이나 밭일을 거들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거들지 않으면 몰라요. 도시에서 집하고 학교하고 학원 사이만 오가는 아이라면 그야말로 풀씨를 제대로 알기 어려워요. 아마 도시에서는 어른들도 풀씨를 모르겠지요. 민들레라면 꽃대에 달린 씨앗을 보고 알는지 몰라도, 꽃대에서 뗀 뒤 솜털을 떼어내면 어떤 씨앗인지 모르리라 느껴요. 가을을 앞두고 길가에 잔뜩 피는 코스모스도 늦가을에 맺는 씨앗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무당벌레는 우리 눈으로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무당벌레는 우리 가슴으로 ‘살살 기어올’ 수 있습니다. 무당벌레는 우리 마음으로 ‘조용히 날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몸짓인가에 따라서 무당벌레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하루를 보내는가에 따라서 무당벌레를 다르게 맞이합니다.


  즐겁게 놀고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누린 아이라면, 어떤 동시를 읽더라도 즐겁거나 기쁩니다. 즐겁게 놀지도 못하고 기쁘게 노래하지도 못하는 하루를 보내면서 학원과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해야 하는 아이라면, 어떤 동시를 읽더라도 독후감 숙제로 여길 뿐입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아이들한테 이 동시집은 어떻게 스며들 만할까 궁금합니다. 재미나게 놀면서 ‘재미난 동시’를 읽을 수 있을까요? 잔뜩 짓눌린 채 시험공부만 하다가 독후감 숙제를 하느라 ‘재미난 동시’를 글로만 읽어야 할까요?




토란잎이 / 빗방울을 가지고 노네 / 투명한 구슬을 / 요리조리 굴리네 / 똥그란 구슬을 / 더 똥그랗게 만드네 (비 오는 날)



  나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으레 높임말을 씁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다른 집 아이들한테도 높임말을 써요. 그러나 높임말만 쓰지 않습니다. 높임말을 쓰다가 여느 말을 섞습니다. 여느 말을 쓰다가도 높임말을 섞어요. 어떤 말투로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아이들 마음에서 흐르는 생각을 나누어 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스스럼없이 말하고 허물없이 듣습니다. 즐겁게 말하고 기쁘게 듣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무렵 어떤 넋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넋으로 자랄까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마다 어떤 바람결이 묻어나는가를 살핍니다.


  내가 웃으면 아이들이 웃습니다. 내가 찡그려도 아이들이 웃습니다. 아이들이 웃으면 나도 웃습니다. 아이들이 찡그려도 나는 웃습니다.


  그러고 보면, 웃고 싶은 사람이 웃고, 찡그리고 싶은 사람이 찡그려요. 아이들은 놀고 싶은 마음이니 언제나 즐겁게 놀고, 어른들은 씩씩하게 일하고 싶은 마음이니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길을 생각하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꾸립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을 읽어 보면, 여러모로 재미난 말놀이가 흐릅니다. 다만, 재미난 말놀이가 흐르다가 그칠 뿐, 다른 이야기로 뻗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를 시인 한 사람이 바꿀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삶을 배우는 길이 아니라, 대학교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학교교육을 시인 한 사람이 고칠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어린이문학은 사회도 학교도 마을도 보금자리도 얼마든지 바꾸거나 고칠 수 있습니다. 글 한 줄에 담는 이야기로 아름다운 나라와 마을과 보금자리를 얼마든지 신나게 그릴 수 있습니다. 말놀이만 할 수 있는 동시가 아니라, 삶놀이를 할 수 있는 동시요, ‘말놀이 하는 재미’뿐 아니라 ‘삶놀이 나누는 기쁨’을 펼칠 수 있는 동시입니다. 꿈을 그리고 노래하면서 아이들한테 꿈과 노래를 알려줄 수 있는 동시예요.


  말놀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말놀이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꿈을 담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말놀이를 재미나게 펼쳐 보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어린이문학이요 동시라고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4348.8.9.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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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향고래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70
정영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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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8



시와 풀내음

― 말향고래

 정영주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7.7.16. 7000원



  한여름으로 접어든 시골은 조용합니다. 여름철 무더위를 잊으려고 시골로 찾아온 손님이 북적이는 시골이라면 한동안 왁자지껄할 수 있고, 자동차 뜸하던 찻길에도 자동차가 제법 지나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시골은 더없이 조용합니다.


  농약 뿌리려고 경운기를 몰고 나오는 할매와 할배가 있으면, 농약이 논밭으로 퍼지는 소리가 울립니다. 농협에서 띄우는 농약살포 헬리콥터가 돌아다니면 꽤 먼 데까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퍼집니다.

  시골은 도시처럼 매미 우는 소리가 우렁차지 않습니다. 시골은 멧새 노랫소리하고 풀벌레 노랫소리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때때로 한낮에도 개구리가 노래합니다.


  풀을 베다가 여러 소리를 듣습니다. 땀을 훔치면서 마루에 앉아서 쉬다가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밥을 지어 아이들을 먹인 뒤 한 차례 멱을 감고 평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신화가 된 고래의 늑골 하나 빼내어 / 내 빈 곳 채울 수 있다면 / 스스로 말향고래가 되어 심해까지 / 내려가 심장과 내장 뼈 마디마디 / 썩지 않을 기름으로 채울 수 있다면 (말향고래)



  정영주 님 시집 《말향고래》(실천문학사,2007)를 읽습니다. 고래 이야기라면 이제 철지난 옛이야기로 여길 만합니다. 고래잡이배는 뜨기 어렵고, 고래를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요즈음입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다큐영화 같은 데에서는 고래를 볼 테지만, 어른도 아이도 맨눈으로 고래를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피노키오나 모비딕을 말할 적에 으레 고래를 떠올린다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고래를 얼마나 잘 이야기할 만할까요.



금목서가 왜 쓰러졌는지 모른다 / 쓰러지면서 진저리치며 터지는 / 꽃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 문득, 그제야 내가 오랫동안 / 뜨락에 나간 적이 없음을 알았다 (금목서)



  시골에서 풀내음을 맡습니다. 시골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풀내음을 맡을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시골에서 풀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풀노래를 부를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풀내음을 맡고 싶어서 시골에서 산다고 할 만합니다. 풀빛을 마주하면서 푸른 마음이 되고 싶기에 시골에서 사는구나 하고 곧잘 깨닫습니다. 풀숨을 마시고 풀열매를 먹으며, 풀잎을 훑어서 즐기려는 뜻에서 시골에서 사는구나 하고 으레 느낍니다.


  그러면 풀내음이란 무엇일까요? 풀이 베푸는 내음입니다. 도시사람은 나무밭(수목원) 같은 데에 가서 일부러 ‘나무내음’을 쐬려고 합니다. 나무내음을 맡으면 여느 때에 배기가스나 온갖 지저분한 바람을 마시느라 고단한 허파가 싱그러이 살아난다고 하거든요.


  사람들이 맡으려고 하는 나무내음은 어떤 내음일까요? 나뭇줄기나 나무뿌리 내음일까요? 아마 이런 내음도 있을 테지만, 사람들한테 짙고 깊게 스며드는 나무내음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나뭇잎이 베푸는 내음’입니다.



집에 오니 / 옷자락에 쐐기풀이 잔뜩 박혀 있다 / 숲 속 몇 마장 들다 나왔는데 (흔적)



  시집 《말향고래》는 예부터 사람들이 제 삶터에서 맡던 온갖 내음을 가만히 이야기합니다. 쐐기풀에 깃든 내음을, 숲에 서리는 내음을, 햇볕에 배는 내음을, 창문에 번지는 내음을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흙길을 걷는 사람과 아스팔트길을 걷는 사람은 서로 다른 냄새를 맡습니다. 풀밭길을 걷는 사람과 시멘트길을 걷는 사람은 서로 다른 냄새를 맞이합니다. 숲길을 걷는 사람과 골목길이나 시내 한복판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냄새를 들이켭니다.



잘 달궈진 햇볕이 / 벽돌담을 넘어와 / 창문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뉘 고르는 여자)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시골에 젊은이도 어린이도 많았습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늙은 사람만 많습니다. 시골에서 젊은이와 어린이가 자취를 감추면서 집짐승을 키우는 집이 사라지고, ‘풀을 먹고 사는 집짐승’을 키우는 집이 사라지면서, 밭둑이나 논둑에서 잘 자라던 풀을 성가셔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납니다. 여기에다가 1970년대부터 밀어닥친 새마을운동은 ‘풀을 뜯어서 먹지 말’고 ‘풀에 농약을 뿌려서 죽이라’는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한의사와 제약회사는 정갈하고 고즈넉한 시골이나 숲에서 자라는 풀을 얻어서 약으로 삼습니다. 시골사람은 이제 고들빼기나 소리쟁이나 부들이나 모시나 까마중이나 쇠무릎이나 질경이를 약으로 삼을 줄 모릅니다. 약으로 쓰던 슬기를 모두 잊었습니다. 망감도 하늘타리도 귀찮을 뿐이고, 댓잎이나 갈잎으로 바구니를 엮던 손길은 아주 끊어집니다.



찢어진 돌을 보았다 / 그 속으로 보타진 강이 흐르다 / 멈춘 것을 보았다 / 미처 이사 가지 못한 고라니와 / 바람에 넘어지는 숲과 / 돌아서 뒤채는 물 속에 / 머리카락 죄다 풀어헤치는 / 줄풀들의 울음소리가 / 갈라진 돌 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돌 속에 누워)



  시를 한 줄 읽으면서 풀내음을 떠올립니다. 시를 두 줄 읽으면서 풀내음을 그립니다. 시를 석 줄 읽으면서 아련하게 스미는 풀내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집을 덮은 뒤 우리 집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 베푸는 온갖 내음을 마십니다.


  다만, 풀내음을 맡더라도 틈틈이 낫질을 합니다. 걸어서 지나다닐 길은 있어야 하니까요. 모기가 너무 끓지 않도록 풀밭을 건사해야 하기도 하고요. 아이들 키보다 웃자란 쑥을 베거나 뽑아서 한쪽에 쌓으면, 쑥대가 땡볕에 잘 마르면서 고운 ‘짚내음’을 베풉니다.


  참말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소와 염소가 이 너른 풀을 신나게 먹었을 테고, 사람들은 소한테서는 소젖을 얻고 염소한테서는 염소젖을 얻었을 테지요. 풀을 먹는 짐승이 풀노래를 부르듯이, 풀을 아끼고 돌보던 시골사람은 풀바람을 쐬면서 풀밥을 먹고 풀잔치를 누렸을 테지요. 잠자리가 달맞이꽃에 가만히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4348.8.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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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물어본다 레디앙 시선 - 일하며 부르는 노래 1
곽장영 지음 / 레디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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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0



시와 땀방울

― 가끔은 물어본다

 곽장영 글

 레디앙 펴냄, 2015.6.25. 1만 원



  여름에 한손에 낫을 쥐고 풀을 베다 보면 어느새 땀이 줄줄 흐릅니다. 이러면서 두 손은 흙물하고 풀물이 듭니다. 땀방울은 물로 씻으면 털어낼 만한데, 손에 배기는 흙물하고 풀물은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습니다.


  여름에 부엌에서 밥을 짓다 보면 어느새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온몸에는 밥내음하고 국내음이 퍼집니다. 여름에는 밥상을 차리고 나서 아이들더러 먼저 먹으라 이르고는, 찬물로 한 차례 씻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밥상맡에 앉을 만합니다.



평생을 가려온 / 나무 그늘을 벗어나고파 / 파란 하늘에 안기고 싶었던 (상사화)


한 달을 다 비워갈 때면 / 어김없이 / 찾아오는 편지가 있다 / 이번 달에 떼어 갈 돈을 / 자세히도 적어서 (빚쟁이의 행복)



  곽장영 님이 빚은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레디앙,2015)를 읽습니다. 노동조합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하는 곽장영 님은 ‘일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진보정당’ 이야기를 싯말로 삭이고, 틈틈이 멧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마주한 숲바람 이야기를 싯말로 다스립니다. 술 한잔을 부딪히면서 돌아보는 오늘날 한국 사회 이야기도 찬찬히 싯말로 녹입니다. 때로는 이녁 아이하고 벌이는 실랑이가 싯말로 태어납니다.



텔레비전 못 보게 한다고 / 아홉 살 난 / 아들놈이 애비를 / ‘나쁜 놈’이란다 // 어르고 달래고 / 한 대 쥐어박으며 / ‘그건 잘못했다’고 인정하래도 / 그럴 수 없단다 (전세 역전)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 텔레비전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고 싶다든지 저것을 보겠노라느니 하면서 다툴 까닭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전기삯을 낼 적에 시청료를 안 냅니다. 있지도 않은 텔레비전 때문에 시청료를 물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바꾸라’면서 찾아오는 영업 일꾼이 있으나, 텔레비전을 아예 안 들인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영업을 할 길이란 없습니다.


  곽장영 님이 텔레비전을 놓고 아들내미하고 실랑이를 벌인 시를 읽다가 피식 웃으면서 생각에 젖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치운다면, 아들내미하고 함께 시를 쓰면서 논다면, 집에서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글놀이랑 그림놀이를 즐기다가, 함께 집 바깥으로 나간다면, 싱그러운 멧봉우리 나들이를 아이하고 함께 누린다면, 이때에는 어떤 시가 태어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자다가 / 배고 고파 깨어서 / 김치 풀어 / 갱죽을 끓인다 (마늘)



  얼추 열흘 남짓 우리 시골마을은 농약바람이 불었습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도, 비가 멎는다 싶으면 농약 헬리콥터가 떠서 항공방제를 합니다. 날이 맑다 싶으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약 헬리콥터가 시끄럽습니다. 비가 그쳐서 이불도 널고 빨래도 널려고 마음을 먹으나, 농약바람이 촤르르 부니까, 이불이나 빨래를 섣불리 마당에 널지 못합니다.


  농약 헬리콥터가 일을 마쳤는지 바깥이 조용하면, 아이들은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뛰놉니다. 마당에서 놀던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잠자리 한 마리를 주워서 나한테 보여줍니다. “아버지, 여기 잠자리!” 그러네, 그런데 잠자리가 죽었구나. “그래, 잘 했어. 저기 꽃밭 흙에다 놓아 주렴.”


  아이들도 알리라 느낍니다. 나비하고 잠자리가 왜 죽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떴다 하면, 날마다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들던 새들이 왜 안 찾아오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농약을 뿌리는 동안 개구리가 왜 노래하지 않는지를.



이대로 가면 / 비가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구름이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안개가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미끄러운 바위가 될 수도 있겠다 (안개비, 운악산에서)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운 숨결이 될 수 있고, 스스로 슬픈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구름도 되고 안개도 되며 바람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웃음이 되거나 노래가 되거나 눈물이 되거나 춤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묻는 씨앗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심은 씨앗대로 천천히 자라서 피어납니다.


  이대로 가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미움이 될 수 있으나, 이대로 가면서 평화와 민주가 될 수 있습니다.



아파트 뒤 베란다 열고 /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더니 / 개구리들 합창을 하는구나 (오만 1)


개나리 진달래만 꽃인 줄 알았다 / 철쭉과 아카시아만 꽃인 줄 알았다 (함박꽃)



  개나리도 꽃이고 진달래도 꽃입니다. 달걀꽃도 꽃이고, 괭이밥 노란 봉오리도 꽃입니다. 한국사람이 먹는 쌀밥도 ‘나락꽃(벼꽃)’이 지면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제 지구별 누구나 즐겨먹는 빵도 ‘밀꽃’이 지면서 맺는 밀알을 빻아서 얻는 먹을거리입니다.


  서로 꽃 같은 목숨입니다. 서로 꽃다운 넋입니다. 내가 너를 아끼고, 네가 나를 돌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믿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서로 꽃 같은 목숨인 줄 깨닫는 자리에서 씁니다. 시 두 줄은 언제나 서로 꽃다운 넋인 줄 알아치리면서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써요.



한강은 밤이 없다 / 내게도 밤이 없다 (한강의 밤)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를 쓴 곽장영 님은 가끔은 누구한테 물어 볼까요? 아마 곽장영 님 마음속에 깃든 님한테 묻겠지요. 나도 으레 내 마음속에 대고 묻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얼마나 너른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고 옷을 빨아 주며 놀이를 함께 누리는 어버이로서 나는 얼마나 착한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고요히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하루를 지어서 즐거운 삶이 되도록 나아가려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잠들면서 새삼스레 물어요. 오늘 하루는 어떤 이야기를 지으면서 즐거이 노래하는 삶이 되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묻습니다. 물으면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묻고 또 묻습니다. 묻고 또 물으면서 두 걸음을 내딛습니다. 다시 묻고 새로 물으면서 세 걸음을 뻗고 네 걸음으로 이으려 합니다. 천천히 한 발짝씩 떼면서 시가 자라고, 찬찬히 두 발짝 세 발짝 잇는 동안 아름드리 숲이 깨어납니다. 4348.7.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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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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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0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꿈은 ‘사랑’

― 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글

 나라말 펴냄, 2015.5.1. 1만 원



  거미 한 마리가 내 앞으로 줄을 드리우면서 내려옵니다. 거미를 바라보며 빙긋 웃은 뒤 마음속으로 말을 겁니다. 얘야, 네가 이리 내려오면 나는 이 집에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손가락을 살그마니 뻗습니다. 거미가 줄을 드리우며 내려오다가 내 손가락에 톡 내려앉더니 깜짝 놀란 듯이 다시 줄을 당겨서 허둥지둥 위로 올라갑니다. 이 아이는 우리 집 한쪽에 거미줄을 치려고 한 듯합니다.


  거미를 눈여겨봅니다. 거미는 조금 뒤 다시 줄을 드리우고 내려오려 하지만, 나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거미가 내려오는 자리에서 기다립니다. 거미는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거미가 집을 지을 만한 자리로 옮겨 줍니다. 집 안쪽에 줄을 치지 말고, 집 바깥쪽에 줄을 치기를 바라면서 거미를 더 지켜봅니다. 아무래도 이 둘레에는 줄을 치지 못하겠구나 싶은지, 거미는 다른 곳으로 사라집니다.



땅에 무릎을 / 수백 번 꿇지 않고서야 / 어찌 밥상 차릴 수 있으랴 (먹고사는 일)


이른 아침부터 감나무 가지에 / 온 동네 새들이 야단법석이다 /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 아이구우, 이게 무슨! / 텃밭에 개미가 하도 많아 / 아내가 놓아둔 끈끈이에 / 개미는 안 붙고 / 참새 새끼 한 마리 붙어 파닥거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정홍 님이 일군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나라말,2015)를 읽습니다. 경남 합천 황매산 언저리 멧골자락에서 흙을 일군다고 하는 서정홍 님은 ‘농사꾼 시인’입니다. 또는 ‘시인 농사꾼’입니다. 서정홍 님한테서는 ‘농사꾼’이나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공장 일꾼으로 지낼 적에는 ‘노동자’하고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어서 ‘노동자 시인’이나 ‘시인 노동자’였고, ‘아버지 시인’하고 ‘시인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지내다가, 이제는 호젓하게 ‘농사꾼 시인’하고 ‘시인 농사꾼’으로 숲바람을 마시면서 지냅니다.



산골 마을에 남의 논밭 얻어 농사지으며 산 지 서너 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몸이 지쳐 밥 씹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달콤한 보약)


경운기를 몰고 / 산밭 아래 / 작은 샘을 지날 때마다 / 잠시 물 한잔하신다 // ―어이쿠우, 시원타! /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 //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신다 (산내 할아버지)



  시를 쓰는 서정홍 님은 시를 쓰려고 이 땅에 태어났을는지 모릅니다.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지만, 서정홍 님이 마주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시’라는 이야기로 새로 태어납니다. 공장에서 붙잡은 기계도 시로 바라보고, 시골에서 맞잡은 연장도 시로 바라봅니다. 아이를 낳아서 곁님하고 함께 돌보는 동안 곁님하고 아이를 시로 바라볼 뿐 아니라, 들에서도 길에서도 집에서도 꿈에서도 언제나 시를 그립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 다섯 살 개구쟁이 다울이가 / 살며시 다가와 묻습니다 // ―시인 아저씨, 상추는 물을 주면서 / 강아지풀은 왜 물을 안 줘요? / 상추 옆에 같이 살고 있는데 (상추와 강아지풀)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 도시에서 살다가 / 십 년 전에 산골에 들어와 / 농사지으며 살고 있으니 / 농사 나이로 열 살입니다 (산골 아이 구륜이 3)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예부터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살았습니다. 지구별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은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노래를 짓고 부르며 나누었습니다. 가수라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삶을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부르고, 바닷일을 하며 바다노래를 불러요. 나물을 캐며 나물노래를 부르고, 길쌈을 하며 길쌈노래를 불러요.


  서정홍 님이 빚은 시집에서 흐르는 시는 모두 서정홍 님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인이기에 쓰는 시가 아니라, 삶을 짓기에 쓰는 시입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밥을 먹기에 쓰는 시입니다. 바람을 마시고 숲을 바라보면서 쓰는 시입니다. 햇볕을 쬐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쓰는 시입니다.


  시골에서는 시골을 노래하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를 꿈꾸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이든, 도시에서 꿈꾸는 삶이든, 저마다 제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시를 씁니다.



이른 아침부터 지게를 지고 / 이웃집 다랑논에 모판을 나르고 // 으스름히 해 질 무렵에 /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었습니다 (유월)


산밭에서 처음 딴 오이라며 / 아내가 내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 내게 준 오이를 / 다시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여름날)



  한여름으로 접어들면, 시골에서는 낮에 땡볕을 쬐며 일하기 힘듭니다. 가만히 서거나 앉아도 땀이 흐르거든요. 한여름에는 새벽 서너 시부터 일손을 놀려 아침에 쉽니다. 낮에 고즈넉하게 한숨을 돌리고, 햇볕이 누그러지는구나 싶을 때에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이 많거나 바쁘면 땡볕에 흙빛으로 까무잡잡하게 온몸이 타면서 일하지요.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를 이루는 시에는 땀내가 흐릅니다. 땀을 식히는 바람결이 감돕니다. 바람결에 싱그러운 숨결이 깃들도록 북돋우는 꽃빛하고 풀빛이 함께 섞입니다.


  오이를 따며 오이를 생각하는 노래를 부르고, 고추꽃을 보며 고추를 그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나락을 심으며 나락꽃이 피고 지며 나락알이 굵어지는 꿈을 꾸고, 나락을 베면서 나락알을 갈무리하여 겨우내 즐겁게 먹는 꿈을 꿉니다.


  노래는 고스란히 시가 됩니다. 꿈은 모두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노래는 어버이 입을 거쳐서 아이들 몸으로 스밉니다. 꿈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야기에 살을 입히면서 새삼스럽게 피어나고,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새롭게 꿈씨를 심으면서 신나게 뛰놉니다.



지난 십 년, 내 가난한 삶과 함께 / 녹두밭으로 콩밭으로 수수밭으로 / 양파밭으로 마늘밭으로 생강밭으로 /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다닌 / 괭이가 비를 맞고 있다니! (괭이)



  마당에 천막을 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천막에서 놀고 싶다 하기에 천막을 칩니다. 천막을 치기 앞서 마당을 씁니다. 빗자루로 석석 쓰니, 여덟 살 큰아이가 “나도 거들어야지.” 하면서 빗자루를 가져옵니다. 다섯 살 작은아이는 “나도 도와야지.” 하면서 광에서 깔개를 꺼냅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하고 누나가 비질을 마칠 때까지 평상에 앉아서 놉니다.


  우리 아이들 멋지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비질을 마무리짓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밀린 일을 조금 합니다. 이제 자전거를 손질해서 골짝마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해가 하늘 높이 걸린 낮에 골짝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골짝노래를 부르자고 꿈꿉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마친 뒤 갈아입을 옷을 챙깁니다. 멧새는 후박알을 따먹으려고 마당으로 찾아들고, 제비는 오늘도 바지런히 먹이를 잡아서 처마 밑으로 나릅니다.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삶은 언제나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황매산에서 부는 고요한 바람이 짙푸르게 골골샅샅을 보듬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부는 바람도 싱그럽게 이웃마을로 날아가고, 다른 고장에서 부는 상큼한 바람도 우리 마을로 반갑게 찾아옵니다. 4348.7.1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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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7-17 08:17   좋아요 0 | URL
이 책, 지금 막 구입했습니다.

숲노래 2015-07-17 09:58   좋아요 0 | URL
풀내음에 땀내음이 섞인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곧 누리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