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문학동네 동시집 7
김륭 지음, 홍성지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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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9



‘아름다운 사랑’을 아이들하고 나누려는 동시

―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김륭 글

 홍성지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9.7.24. 8500원



  언제부터인가 퍽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겨레나 이웃 겨레도 고양이를 퍽 사랑하기는 했으나, 오늘날처럼 ‘고양이 사랑’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고 느껴요. 그래서 예전에는 개는 그냥 ‘개’라 하고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라 했습니다. 다만, 집에서 밥을 주면서 키우는 짐승이라면 ‘집개·집고양이’라 했고, 사람이 밥을 따로 주지 않는 짐승이라면 ‘들개·들고양이’라 했어요.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썩 좋아하지 않으면 ‘도둑개·도둑고양이’ 같은 이름을 썼어요.



엄마 아빠 싸우는 날 / 화난 아빠 눈 속에 떠 있는 나는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고양이가 많이 늘었습니다. 고양이 모습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이지만 사람살이가 사뭇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골목고양이’라든지 ‘길고양이’가 있고, ‘마을고양이’도 있습니다. 아마 ‘아파트고양이’도 있을 테며 ‘동네고양이’라든지 ‘달동네고양이’ 같은 이름도 따로 붙일 만하리라 봅니다.


  김륭 님이 빚은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2009)를 읽습니다. 동시집에 붙은 이름이 ‘도둑고양이’입니다. 아이들이 읽을 동시를 쓴 어른 김륭 님은 왜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을 골랐을까요? 그냥 ‘고양이’라고만 해도 되었을 텐데요?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양이”라면 더더구나 ‘고양이’라고만 해야 알맞지 않을까요?


  아이는 어른하고 다릅니다. 아이는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풀이나 짐승을 바라볼 적에 ‘굳은 생각(편견)’을 ‘치우치게’ 품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죽은 고양이’가 지짐판(프라이팬)을 타고 먼먼 우주로 날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고양이, 구멍가게 꼬부랑 할머니랑 내가 헌 프라이팬에 담았어요 죽어서는 배고프지 말라고, 프라이팬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가라고 토닥토닥 이팝나무 밑에 묻어 주고 왔어요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내가 만일 과일이 된다면 / 수박이 될 거야 / 과일들 중에 대통령을 뽑는다면 / 덩치 크고 힘센 수박이 당선될 테니깐 (수박 대통령)



  아이들은 ‘대통령’을 알까요?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본다면 대통령을 알고,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둘레 어른들이 얘기하면 대통령을 압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안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으뜸’이라거나 ‘가장 크고 힘센 무엇’이라고 여긴다면 그야말로 대통령을 잘못 아는 셈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대통령은 으뜸이나 가장 크거나 힘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어떤 사람일까요? 네, 대통령은 ‘심부름꾼’이거나 ‘머슴’입니다. 대통령은 바지런히 일을 할 사람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꿈을 이루도록 도와야 하는 심부름꾼이지요.


  크고 센 힘으로 뭔가를 한다면, 이때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우두머리’라고 해서 힘으로 윽박지를 수 없습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며 훌륭할 때에 비로소 우두머리(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박 대통령〉 같은 동시는 어린이 마음을 잘못 짚는다거나 얄궂게 건드린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과일을 좋아할 뿐, 으뜸 과일이라든지 가장 크고 멋진 과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 새끼들 찾아간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나무들도 자전거가 있어요 / 쥐도 새도 모르게 자전거를 타고 놀아요 / 두 팔 쭉 뻗어 올려 훔친 해와 달을 바퀴로 굴려요 (자전거 타는 나무들)



  동시는 언제나 ‘생각하는 힘(상상력)’입니다. 생각을 마음껏 펼치기에 동시를 씁니다. 생각을 한껏 드날리기에 동시를 읽습니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라든지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처럼, 생각을 넓히고 펼칠 적에 비로소 동시가 태어납니다.


  다만,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을 보면 “훔친 해와 달”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에도 어딘가 아리송해요. 나무가 왜 해와 달을 훔칠까요? 참말 나무가 이러한 마음일까요? 그냥 골목고양이나 마을고양이를 ‘도둑고양이’로 굳이 쓰고야 마는 시인 마음이 ‘나무가 해와 달을 훔친다’고 하는 동시를 쓰도록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밥풀의 상상력)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무는 사람한테 무엇이든 다 내어줍니다. 나무는 그늘도 내어주고, 줄기도 내어주며 꽃과 열매도 내어줍니다. 가지도 내어주지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야말로 나무는 맨 나중에 그루터기까지 내어주지요.


  다만, 나무가 아무리 아낌없이 주는 숨결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시를 쓰면서 ‘창작’이나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와 달을 훔치는 나무” 이야기를 그려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동시도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 본다면, 나무한테 ‘얘, 나무야, 너 해와 달을 훔치고 싶니?’ 하고 물어 보고서 이러한 동시를 썼는지 궁금해요. 나무로서는 멀쩡히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인데, 동시를 쓰는 어른이 나무가 ‘도둑처럼 훔치려는 마음이나 몸짓’인 듯 엉뚱하게 그린 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 그네처럼 매달려 가던 동생이 / 장난감 가게 앞에서 앙앙 떼를 쓴다 (무당벌레)


뿌지직뿌지직 신기해 / 엄마, 똥꼬에서 새가 나오려나 봐 // 자꾸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려 / 콕콕 부리로 똥꼬를 찔러 (변기 위의 아기 펭귄)



  아이들은 어른이 쓴 동시를 고스란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여느 때에 읊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씁니다. 그래서, 어른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할 뿐 아니라, 어른이 ‘너 미워’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너 미워’ 하고 말하지요.


  동시는 재미나거나 남다른 이야기를 꾸미는 문학이 아닙니다. 동시는 어린이가 제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북돋우도록 돕는 이야기를 펼치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담는 동시이기 때문에, 어른끼리 읽고 나누는 ‘어른 시’하고 사뭇 다르게, 말 한 마디까지 더욱 꼼꼼히 살피고 더욱 낱낱이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한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인데, 재미난 이야기 못지않게 ‘아름다운 사랑’이 드리우는 말로도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은 재미만 읽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말도 읽고 사랑도 읽고 느낌도 모두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어른은 동시 한 줄을 쓸 적에 아주 깊고 너르면서 슬기로운 숨결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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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 문학과지성 시인선 462
정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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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2



시와 수수께끼

― 화류

 정영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12.31. 8000원



  손가락을 뻗어 콕 찌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들 배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까르르 웃음이 터집니다. 잘 익은 무화과알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몰랑몰랑한 열매가 터지려 합니다. 그저 손가락 놀림 하나이지만, 이 손가락질로 웃음꽃을 피울 수 있고, 열매가 어느 만큼 익었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손가락을 잘 놀려서 연필을 쥐면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로 새로운 이야기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 도시에선 모두가 전등 아래 모여 앉아 /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는 척하느라 고개 끄덕이기 바쁘고 / 우아하게 턱을 괴고 웃다가 집에 돌아와 / 사전을 만드느라 밤마다 두통에 시달리지 (가련한 사전)



  정영 님이 선보인 시집 《화류》(문학과지성사,2014)를 가만히 읽습니다. ‘화류’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시집을 읽고, 한국말사전을 더듬다가 다시 시집을 읽습니다.


  꽃과 버들이기에 화류일까요. 그러면 ‘꽃버들’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텐데, 왜 ‘화류’라는 이름이 되어야 했을까요. ‘꽃버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확 와닿을 텐데, 왜 화류 같은 이름을 써야 했을까요.


  이 도시에서는 모두 서로서로 겉으로만 알아듣는 척하느라 바쁘기에, 겉으로만 알아듣는 척하는 몸짓을 보여주려면 꽃버들 아닌 화류 같은 이름을 써야 할 수 있습니다. 예쁜 척하려면, 잘난 척하려면, 멋진 척하려면, 그러니까 ‘있는 척’하는 오늘날 이 땅에서는 꽃버들 아닌 ‘화류 같은 낱말’이어야 시가 되고 시로 읽어 주고 시로 비평하는 사회라고 할 만합니다.



나는 보았다 / 거리의 취한 사내들이 죽은 제 다리를 떼어내며 걸어가고 / 여인들은 침실에 앉아 그 다리를 주무르다 잠드는 것을 (집 밖의 삶)



  사회는 참으로 수수께끼입니다. 이를테면 원자력발전소 같은 시설이 수수께끼입니다. 방사능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원자력발전소는 깨끗한 전기라고 홍보하는 사회입니다. 두 가지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 ‘똑같은 입’으로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핵쓰레기를 수십만 해에 걸쳐서 안전하게 건사할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재주가 없어도 원자력발전소를 그냥 짓고 그냥 돌립니다. 방사능과 핵쓰레기 대책은 하나도 없는 채 원자력발전소부터 짓고 봅니다.


  입시지옥 같은 얼거리도 그야말로 수수께끼입니다. 입시지옥이 아이들 삶과 마음과 몸을 얼마나 갉아먹으면서 망가뜨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어른은 없는 줄 압니다. 그렇지만,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착한 입시정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한국 사회에 학력차별이 없다면 입시지옥이 불거질 까닭이 없어요. 어느 대학교를 나오든 어떤 자리에서나 평등하게 일할 수 있으면 입시지옥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대학교를 나오든 안 나오든, 학교를 다녔든 안 다녔든, 사회 문화 예술 정치 경제 어느 갈래에서도 평등한 사회라면, 참말 입시지옥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비밀이 생긴 건 / 말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이어서 // 피를 바꾸고 싶은 짐승들은 밤마다 / 사막에서 몸을 앓는다 (피에타)


제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 사십 년을 살고서야 이 게임의 룰을 몇 가지 알게 되었지요 (혈관에 꽂아 넣는 슬픔)



  시집 《화류》를 가만히 읽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이 게임의 룰”을 마흔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몇 가지 알아차렸다고 하는 시인 정영 님 이야기를 가만히 읽습니다.


  우리 사회는 온통 수수께끼투성이입니다. 부정부패도 수수께끼일 테지만, 4대강사업을 밀어붙인 공무원도 수수께끼요, 이제 와서 옛 대통령을 나무라는 주류 언론도 수수께끼이며, 4대강사업 못지않은 개발사업이 전국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데 이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모습도 언제나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더 아리송한 수수께끼라면, 평화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으며 자유롭지도 않은 사회에 아이들을 풀어놓는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그냥 밀어넣습니다. 메마르거나 거친 사회라면 아이들이 메마르거나 거친 사회에서 다치지 않도록 ‘사회에 등돌릴’ 만도 한데, 오히려 사회에 더 깊숙이 스며들 뿐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짓도록 힘쓰기보다는 메마르거나 거친 사회에서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다그치거나 닦달하는 어버이로 지내기 일쑤입니다.



별을 좋아하는 이유 / 파도가 치는 이유 // 바닷게들은 여전히 새집을 짓고 / 소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열매를 따고 // 집을 옮겨다니는 나는 / 그것이 내가 사라진 것인 줄 알고 / 슬며시 웃고 있다 (여행)



  우리는 모두 꽃이요 버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늘이며 바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이고 꿈입니다. 아름답지 않은 들꽃이 없듯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어느 곳에서 비록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더라도, 그이도 어느 어머니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입니다. 오늘 어느 한때 비록 멍청한 짓을 저질렀더라도, 그이도 어느 어머니가 사랑으로 돌본 아이입니다.


  사랑을 받아 태어난 줄 잊었기에 바보짓을 합니다. 사랑을 누리며 자란 줄 잊었으니 엉터리 같은 짓을 합니다.


  너도 꽃이고 나도 꽃입니다. 너도 버들이요 나도 버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났고, 아름다운 사랑을 누리며 이 땅에서 삶을 짓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을 노릇이고, 함께 어깨동무를 할 일입니다. 꽃내음 흐르는 꽃웃음을 지을 노릇이요, 버들잎처럼 촤르르 바람노래를 널리 흩뿌릴 일입니다.



비가 내렸고 / 비가 내렸고 / 진흙 구덩이에 처박혀 그것이 온전히 / 한 거죽의 골조일 뿐이란 걸 깨닫기까지 / 아픈 잠은 얼마나 계속되는 걸까 (오직 모를 뿐)



  까마중꽃이 피고 집니다. 하얀 까마중꽃이 지면 짙푸른 열매가 동글동글 맺습니다. 짙푸른 열매는 햇볕과 빗물과 바람을 먹으면서 차츰 까맣게 물듭니다. 아주 새까맣게 익은 열매는 아이도 어른도 신나게 훑어서 먹습니다.


  하얀 꽃이 똑같이 피지만, 고추만 빨간 열매를 답니다. 하얀 꽃이 똑같이 피는데, 매화는 노르스름한 열매를 맺습니다. 딸기와 앵두도 하얀 꽃이 똑같이 피되, 아주 빨간 열매를 매답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꽃일까요? 우리가 피운 꽃은 어떤 열매로 나아갈까요? 우리가 맺은 열매는 서로서로 어떤 마음밥이 되어 아름다운 사랑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즐겁고 기쁜 수수께끼로 어우러지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서로 아끼고 함께 사랑할 수 있는 고운 노래가 되기를 빕니다. 4348.9.1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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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 - 오늘의 이란 시와 시인들
에스마일 셔루디 외 지음, 최인화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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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4



두 다리로 처음 걷던 날을 떠올린다

―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

 이란 시인 일흔한 사람 (에스마일 셔루디)

 최인화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2015.8.25. 12000원



  오늘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가 보기 앞서 뒤꼍도 올라 봅니다. 환삼덩굴 하나가 유자나무 줄기를 감아서 오르는 모습이 보이지만, 아직 내 다리로는 유자나무한테까지 가서 환삼덩굴을 쳐 줄 엄두를 못 냅니다. 마당으로 내려설 뿐 아니라 뒤꼍을 오르고, 마을 어귀까지 걸을 수 있으니, 이만큼 걸을 수 있어도 고맙다고 느낍니다.


  지난 열흘 동안 거의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끙끙 앓았습니다. 오른무릎이 크게 다쳐서 오른무릎을 고치고 다스리느라 온 하루를 보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흐름은 지켜볼 수 있지만, 하늘에 구름이 얼마나 떴는가를 내다볼 수 없는 채 지냈습니다. 바람이 부는구나 하고 느끼지만, 맨몸으로 바람을 맞이할 수 없는 채 지냈어요. 열흘 만에 이 모두를 하고 보니 더없이 새롭습니다. 아기가 첫걸음을 뗀 듯이, 아이가 제 다리로 신나게 달릴 수 있듯이,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들도 모두 새롭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 보았습니다.



이 집에서 영원한 건 없다 / 사탄도 솔로몬 왕도 다 떠난다 / 지붕이든 천장이든 발코니든 / 금이 가고 부서지며 무너지니까 / 가난한 자의 집만 주저앉는 게 아니다 / 궁월 또한 마찬가지 (하빕 야그머이-영원한 건 없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젖 무는 법 알려 주셨다 // 밤이면 머리맡 / 뜬눈으로 날 잠재우시고 // 손잡고 한 발짝 두 발짝 / 걸음마 일러 주셨다 // 혀끝에 단어 한 마디, 한 마디 놓아 / 말 트이게 해 주셨고 (이라즈 미르저-어머니)



  이란 시인 일흔한 사람 노랫가락이 깃든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문학세계사,2015)를 읽었습니다. 오른무릎이 몹시 아프고 몸살이 돌 적에는 그저 땀만 뻘뻘 흘리면서 앓고, 아픔이 가신 뒤에 큰숨을 돌릴 만한 겨를이 나면 한동안 오른손을 오른무릎 둘레를 살며시 감싸고 나서 시집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이란에서는 시를 문학이 아닌 노래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저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요,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이며,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라고 해요. 이란말을 한국말로 옮긴 최인화 님은 ‘이란사람 삶노래·사랑노래’를 한국말로 옮기면서 이란말에 있는 남다른 가락을 살리지 못한 듯하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이란말로 옮길 적에도 이와 같아요. 먼먼 옛날부터 전라도 시골마을에서 이어온 들노래를 이란말로 어떻게 옮기겠어요? 경상도 바닷마을 뱃노래를 이란말로 어떻게 옮길까요? 비록 두 나라와 겨레가 달라서 결과 가락까지 옮기지 못한다고 하지만, 시라는 틀에 담은 이야기는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에 담은 삶과 노래와 꿈을 헤아립니다.



새장 속 앵무새가 건네는 신년 인사 / 현명한 자라면 단번에 안다 /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하단 것을 (파로히 아즈디-감옥에서 맞는 새해)


마음이 불탄 후에야 / 비로소 영혼을 울리는 말이 나온다 / 마음이 어떤지 궁금한가? / 말에 귀 기울여 보라 (네점 바퍼-사랑을 향하여)



  오른무릎이 웬만큼 나았으니 걸음을 뗄 만합니다. 집에서 방과 마루와 부엌 사이를 이럭저럭 걸어서 오갈 수 있다 싶으니 대문 밖으로 나와서 마을을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걷지는 못 합니다. 마을 어귀 빨래터 울타리에 앉아서 다리를 쉽니다. 큰아이는 아버지하고 함께 걸어 줍니다. 아버지가 빨래터 울타리에 앉아서 다리를 쉬는 동안, 큰아이는 배롱나무 밑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춤을 춥니다.


  아버지를 기다려 주는 여덟 살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아이를 처음 걸리려고 하던 일곱 해 앞서가 떠오릅니다. 높직한 계단도 씩씩하게 온몸을 써서 타고 내려오던 아이요, 누가 손을 잡아 주겠다면 싫다면서 뿌리치고 혼자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입니다. 집 바깥에서 처음으로 걷던 날도 어머니랑 아버지가 손을 잡지 말라며 뿌리쳤지만, 몇 걸음을 안 잡아 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씩씩하게 몇 걸음 걷도록 한 뒤 대견하다면서 품에 안았습니다. 이 예쁘고 튼튼한 다리에 조금씩 힘살을 붙여서 앞으로 더욱 멋지게 걷자고 속삭였습니다.


  이제 여덟 살 어린이는 마흔 살 넘은 아버지더러 “다 쉬었어? 이제 다시 걸어도 돼? 기운 내요, 아버지!” 하고 외쳐 줍니다.



강가 사람들은 물 소중한 줄 알아서 / 절대 물 흐리는 법이 없다 / 그러니 우리 또한 / 물 흐리지 말자 (소흐럽 세페흐리-물)


밤처럼 위대한 그대 / 달빛이 있든 없든 / 밤처럼 위대한 그대 (아흐마드 셤루-나는 나무, 그대는 비)



  이란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백 해에 이르는 시간이라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다’고 하는 시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천 개에 이르는 꽃송이라면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시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나무는 천 해뿐 아니라 오천 해나 만 해도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이 집을 짓는 나무로 삼는 나무는 ‘천 해쯤 산 나무’예요. 꽃송이를 천 번쯤 피우면서 삶을 누린 나무가 바로 집을 든든하게 버티면서 오래도록 아름다운 숨결을 이어 주는 바탕이 되어 줍니다.


  천 해를 묵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으면, 이 나무가 자라던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네, 다시 나무를 심어요. 그리고, 천 해 동안 이 나무가 잘 자라도록 건사합니다. 오늘 ‘천 해 묵은 나무’로 집을 지은 뒤, 앞으로 천 해 동안 이 집을 알뜰살뜰 건사하도록 모두 힘을 쏟고, 앞으로 새로운 천 해 동안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나면, 천 해 뒤에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뒷사람은 ‘새롭게 천 해 묵은 나무’를 베어서 ‘새롭게 천 해를 이을 집’을 짓고는, 다시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새로운 천 해가 흘러서 새로운 뒷사람이 기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을 가꿉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 / 어서 길을 나서야 한다 / 꽃과 나무에게 / 일일이 인사를 건네야 한다 / 세상 모든 샘물 가에 /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앉아 / 그 맑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 얼굴을 단장해야 한다 (알리 무사비 가르머루디-시간이 많지 않다)


어머니는 죽었으나 여전히 우리를 보살핀다 / 우리 생활 곳곳 어머니의 흔적이 꿈틀댄다 / 집 안 구석구석 어머니의 이야기가 묻어 있다 / 당신 추도식에서조차 일을 하느랴 여념이 없다 (샤흐리여르-어머니, 내 어머니)



  시 한 줄이라면 모름지기 ‘백 해를 사는 사람’이 이녁 온 삶을 바쳐서 얻은 슬기를 그러모아서 ‘천 해를 잇는 살림’에 걸쳐서 흐를 만한 시 한 줄이어야지 싶습니다. 천 해 동안 부를 만한 노래이기에 노래인 셈입니다. 천 해에 이르는 삶이 녹아든 노래요, 천 해에 이를 삶을 북돋울 노래예요.


  들일을 하며 부르던 들노래도, 숲에서 삶을 지으며 부르던 숲노래도, 마당에서 잔치도 벌이고 일도 하며 부르던 마당노래도, 집집마다 오순도순 아이를 돌보며 나누던 집노래도, 참말 모두 아름다운 사랑이 깃드는 노래입니다. 천 해뿐 아니라 만 해나 백만 해를 넉넉히 잇는 노래예요.



사랑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 매 순간 죽는다는 것, 참 어렵지 않을까? // 사랑 없는 삶은 웃음 잃은 입술이다 / 웃음 잃은 입술은 웃는 대신 울어야 한다 // 사랑 없는 삶은 끝없는 추락이다 / 사랑하지 않는 자에겐 사방이 지옥이다 (게이사르 아민푸르-수수께끼)


나 어렸을 적엔 / 물, 땅, 공기가 더 많았어 / 귀뚜라미는 / 밤마다 / 달빛의 음악에 맞춰 깊은 어두움 속에서 / 노래 부르곤 했지 (에스머일 호이-나 어렸을 적엔)



  이란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처럼 한국에서도 천 해를 흐를 만한 이야기를 담는 시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지난 천 해 동안 어떤 슬기를 그러모은 노래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새로 짓는 노래는 앞으로 천 해에 걸쳐 우리 뒷사람한테 어떤 슬기를 물려주려고 짓는 노래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인기가요가 되어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인기차트에 올라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앨범이 불티나게 팔려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방송에 자주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누구나 부르면서 웃을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를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에서 어깨동무하며 부를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없이, 계급이나 신분에 따라 푸대접하는 일이 없이, 성차별이나 지역차별이나 온갖 차별 따위는 하나도 없이, 말 그대로 사랑하는 삶을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인파 속에서 고아 하나가 물었다 / 저기 임금님 머리에 반짝이는 게 뭐예요? // 누군가 대답했다 : 저게 뭔지 우린들 어찌 알겠니 / 다만 값비싼 물건인 건 분명하구나 // 꼬부랑 노파가 가까이 가 보더니 말했다 / 이건 내 눈물이자 자네들이 흘린 핏방울이야 (파르빈 에테서미-고아의 눈물)


내 작은 나무야, 너는 봄을 사랑하여라 / 샘물의 친구가 되고 개울물의 고통도 나누어라 / 네 그림자는 길지 않으나 / 산 높이 걸린 태양의 당당함을 가져라 / 푸르고 생생한 이파리들은 너만의 낱말 / 그 낱말들로 세월 높이만큼 우뚝 선 시가 되어라 (바흐만 설레히-내 작은 나무)



  두 다리로 처음 걷던 날을 떠올립니다.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아장걸음을 떼던 날을 떠올립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 또렷이 알지 못합니다만, 내 몸은 이를 또렷이 알리라 느껴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두 다리로 처음 걷고, 처음 뛰며, 처음 달리던 날을 떠올립니다. 걷거나 뛰거나 달리다가 넘어져서 울던 날을, 넘어졌어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던 날을, 차근차근 떠올립니다. 여기에다가 내가 다리를 다쳐서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날마다 깊은 늪에 빠지듯이 끙끙 앓으면서 괴로웠던 아흐레를 떠올립니다. 다시 일어서서 새롭게 걸음을 옮긴 오늘을 떠올립니다.


  삶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삶이 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이 깨어나고, 사랑을 깨우면서 삶을 노래합니다. 처음 걸음을 떼던 기쁨처럼, 새롭게 걸음을 뗄 수 있어서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즐거움처럼, 스스로 짓고 스스로 씩씩하며 스스로 아름답게 나아갈 이 길에서 부를 노래를 마음으로 고요히 그립니다. 4348.9.1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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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털실뭉치 문지아이들 120
권영상 지음, 김중석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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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7



아이들은 달팽이처럼 씩씩하게 나아간다

― 엄마와 털실 뭉치

 권영상 글

 김중석 그림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2.5.31. 9000원



  실뭉치가 있으면 아이들은 꼭 실뭉치를 노립니다. 왜 노리는가 하면, 실뭉치를 굴리면서 놀고 싶기 때문이에요. 두 아이가 있으면 한 아이가 끝을 잡고 다른 한 아이가 길게 이으려 합니다. 처음에는 커다란 공이던 실뭉치가 차츰 작아지면서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지는구나 하고 느끼기 때문에 재미있어서 이 놀이를 멈추지 않습니다.


  노는 아이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차근차근 타이릅니다. 얘야, 이 실뭉치로 어머니가 무엇을 하든? 뜨개를 해요. 어떤 뜨개를 하든? 음, 나하고 동생이 입을 옷이랑 양말을 떠요. 그러면 이 실뭉치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막 굴리거나 풀지 말아야 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먼저 떨어진 가랑잎이 / 나중 떨어진 / 가랑잎 곁에 / 다가가 묻는다. (가랑잎들)


우리 집보다 / 더 큰 느티나무가 / 참새네 집이다. (참새네)



  권영상 님이 빚은 동시집 《엄마와 털실 뭉치》(문학과지성사,2012)를 가만히 읽습니다. 국어교사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권영상 님입니다. 아이들한테 말과 삶을 가르치듯이 동시도 또박또박 이야기가 흐릅니다. 똑 소리가 날 만한 동시요, 말 한 마디마다 얽힌 삶을 찬찬히 읽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살구나무에서 / 뛰어내릴 때 / 나는 들었다. // 쿵, 하고 / 땅이 울리던 소리. (내 무게)



  예부터 이 나라 모든 어머니는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리고 젖떼기밥을 끓이면서 말을 가르쳤습니다. 이 나라 모든 아기는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 젖을 물고 젖떼기밥을 거쳐서 이가 튼튼히 나며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아기는 어머니한테서 새로운 말을 듣습니다. 어머니는 아기한테 모든 말을 노래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들려줍니다. 어머니는 책이나 교재가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아이는 책이나 교재가 없어도 온갖 말을 사랑으로 배우니까, 제 마음을 실컷 드러낼 수 있는 넉넉하고 깊은 마음자리를 가꾸면서 자랍니다.


  어머니는 밥을 짓고 옷을 짓습니다. 아버지는 밥을 함께 지으면서 집을 짓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곁에서 삶을 짓는 길을 곰곰이 지켜봅니다. 밥짓기를 보고, 옷짓기를 보며, 집짓기를 봅니다. 살림살이가 하나씩 태어나는 결을 마주합니다. 두 어버이 손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멋진 이야기를 하나하나 눈부시게 만납니다.



하늘은 / 목욕하기 좋도록 / 버려진 꼬막 껍질에 / 빗방울을 채워 놓는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은 놀 적마다 놀이노래를 불러요. 이런 노래는 어디에서 배울까요? 바로 어버이 곁에서 배웁니다. 어버이가 일하면서 흥얼거리는 기쁜 사랑이 서린 가락을 배우기에 놀이노래를 새롭게 부르지요. 아이 스스로 호미를 쥐면서 놀이노래가 새로 나오고, 아이 스스로 등짐을 지면서 놀이노래가 새삼스레 나옵니다. 아이 스스로 저보다 어린 동생을 보살피면서 놀이노래가 새롭게 깨어나고, 아이 스스로 집일을 거드는 심부름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놀이노래가 아름답게 터져나옵니다.



콩나물을 고르던 / 엄마가 / 왠지 조용하다. // 콩나물 잡은 손을 / 힘없이 무릎 위에 떨군 채 / 고주박잠을 잔다. (고주박잠)



  동시집 《엄마와 털실 뭉치》가 보여주는 삶을 읽습니다. 버려진 꼬막 껍질을 바라보는 삶을 읽고, 고주박잠을 자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삶을 읽습니다. 씨감자를 심거나 감자알을 캐는 삶을 몸소 겪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리고, 동시를 읽을 만한 나이인 어린이라면, 어떤 집일을 거들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이가 손수 콩나물을 골라 보았다면, 아이가 손수 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날마다 훔쳐 보았다면, 아이가 손수 밥을 지어서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차려 주었다면, 도시락을 아이가 손수 싸 보았다면, 보채는 어린 동생을 달래면서 자장노래를 불러 주었다면, 이때에 아이 눈높이에서 피어날 동시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빠와 같이 / 감자를 캐는데 / 호미 끝에 큼직한 녀석이 걸렸다. / 당겨 보니 이게 또 뭔가? / 주먹만 한 돌멩이다. (감자를 캐며)



  한국 동시문학은 퍽 오랫동안 ‘동심 천사주의’라고 하는 이름처럼 아기를 귀염둥이로만 바라보는 이야기를 운율에 맞게 틀에 넣는 동시로 흘렀습니다. 삶을 담아서 아이 스스로도 삶을 느끼도록 돕는 동시가 나오기는 했으나 ‘어떤 삶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대목을 깊이 헤아리는 동시는 아직 많이 드뭅니다. 여기에, ‘가벼운 말놀이’로 ‘가벼운 재주’를 부려서 ‘가벼운 재미’를 퍼뜨리려는 동시가 부쩍 크게 일어나서 요즈음 ‘주류 동시’가 되었습니다.


  권영상 님 동시는 동심 천사주의로 흐르지 않고, 가벼운 말놀이 재미로 흐르지 않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부대끼면서 삶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동시라고 할 만한 결을 보여줍니다. 다만, ‘어떤 삶’을 그리느냐 하는 대목에서 ‘학교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집에서도 ‘어머니가 하는 집안일 구경’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나서는 몸짓이 드러나지 못합니다. 학교 바깥에서 마을이나 숲을 마주하는 푸른 가슴을 동시로 담는 손길은 살짝 모자라지 싶습니다.


  〈달팽이는 다르다〉처럼 아이가 제 삶을 스스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돕는 동시를 더 즐겁게 쓰실 수 있다면 권영상 님 동시는 한결 눈부시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마을을 가꿀 아이들 슬기를 동시로 드러내고, 앞으로 이 삶터를 북돋울 아이들 꿈을 동시로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요.



그러나 달팽이는 다르다 / 천둥 치는 들판으로 / 홀로 나간다. (달팽이는 다르다)



  아이들은 달팽이처럼 씩씩하게 나아갑니다. 겉보기로는 다리가 느린 듯하지만, 운동선수처럼 잰 몸놀림도 아닐 뿐더러, 여느 어른보다 힘이 많이 여리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달팽이처럼 다부지게 나아갑니다. 비바람이 불건 천둥이 치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놀고, 눈을 반기면서 놀아요. 몸이 젖으면서 놀고, 몸이 꽁꽁 얼면서 놀아요.


  이 나라 모든 씩씩한 아이들한테 선물로 건넬 사랑스러운 동시를 기다립니다. 우리 둘레 모든 곱고 슬기로운 아이들한테 선물로 나누어 줄 짙푸른 나무 같은 동시를 기다립니다. 4348.9.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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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이는 신났다 섬집문고 10
윤이현 지음, 안예리 그림 / 섬아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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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5



할아버지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는 노래

― 야옹이는 신났다

 윤이현 글

 안예리 그림

 섬아이 펴냄, 2010.4.25. 8000원



  마을고양이 한 마리가 섬돌에 앉아서 잡니다. 이 아이는 그리 잰 몸놀림이 아니라서, 마루문을 열고 슥 내려서다가 밟힐 적이 있습니다. 아마 깊이 잠든 탓일 테지요. 우리 집 섬돌이 그냥 돌바닥이면 여기에서 안 잘 테지만, 맨발로 돌바닥을 밟으면 차가울 테니 깔개가 있습니다. 마을고양이는 바로 이 깔개에 앉아서 잡니다. 이 깔개에 앉으면 차츰 몸이 따뜻해질 테니까요.


  아이들이 마루에서 놀 적에도 마을고양이가 슬금슬금 나타나서 섬돌에 앉습니다. 아이들은 고양이가 섬돌에 앉은 줄 쳐다보지 않고 놀다가, 어느 때에 문득 고양이를 알아봅니다. “어, 고양이다, 까맣고 하얀 고양이가 왔어!” 하고 외칩니다. 이제 고양이는 이 외침말에 놀라서 어기적거리며 일어납니다. 놀라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옆으로 가는데, 마을고양이가 옆으로 가는 자리는 자전거 밑입니다.



예쁜 아가 / 선잠 깰깨 봐 / 조심조심하는 엄마 손길처럼 / 봄비는 / 파릇파릇 새싹 위에 / 소리도 없이 내립니다. (봄비는 지금)



  윤이현 님 동시집 《야옹이는 신났다》(섬아이,2010)를 읽습니다. 어머니가 아이한테 속삭이듯이 차분하고, 할아버지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빙긋빙긋 웃듯이 조용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들뜨지 않는 동시이고, 놀래키지 않는 동시입니다. 요즈음 숱한 동시가 들뜨거나 놀래키려는 이야기를 억지로 짓는 모습인데, 요즈음 동시 흐름하고는 사뭇 다르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숱한 동시는 ‘아이가 재미있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이면서 학원이나 학교를 살짝 비판하면서 치맛바람 어머니도 살그마니 비판하는 얼거리이기 일쑤입니다. 요즈음 떠도는 숱한 동시에서 ‘아이한테 삶을 차분하게 들려주려는 목소리’를 읽기는 어렵습니다. ‘생활동시’라고 하면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며 입시공부 때문에 고단한 모습을 그려야만 하는 줄 여기기 일쑤입니다. 아이하고 삶을 나누거나 물려주려는 이야기를 담는 생활동시는 드물고, ‘학교생활 동시’만 떠돈다고 할까요.



아기도 꽃밭에선 / 꽃이 됩니다. (아기와 꽃)



  어느 모로 본다면, 봄비를 노래하고 아기를 노래하며 꽃을 노래하는 동시는 요즈음 흐름하고 너무 달라서 ‘낡았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기는 봄비가 새롭습니다. 아기는 꽃밭이 즐겁습니다. 아기는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언제나 처음인 듯 새롭게 맞이합니다. 아기한테는 꽃도 나무도 풀도 벌레도 모두 반가운 동무입니다.


  학교생활과 입시공부를 가볍게 나무라는 동시는 ‘언제까지 새로운’ 동시가 될까요? 지옥 같은 대학입시 얼거리를 그대로 둔 채 아이들이 모두 이 수렁에 빠지도록 내몰면서 학교생활과 입시공부를 가볍게 나무라기만 한대서 무엇이 바뀌거나 나아질 수 있을까요?


  아이는 학교에 다니기에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롯이 아이이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아이가 책가방을 맨 모습이 대견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씩씩하게 놀다가 넘어져도 울지 않고 일어나서 새롭게 놀기에 대견합니다.



살짝꿍 뒤로 와서 / 누구게? // 으음, 이슬이. / 맞지? (내 짝이니까)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는 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아이한테 삶을 가르치는 어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어버이하고 함께 놀면서 웃는 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놀면서 기쁘게 일하는 어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어른인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아이를 기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 웃고 놀며 이야기를 나눌 적에 아이들이 기쁩니다.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아이는 어머니하고 아버지랑 더 오래 살을 맞대면서 오순도순 지낼 적에 기쁩니다. 더 많은 학원에 다니거나 학교에 더 오래 붙들려야 기쁘지 않습니다.



오늘 / 방긋 웃고 있는 / 네 사진을 찾아 / 책상 앞에 붙였다. (네 사진)



  아이들한테 동무라면 ‘놀이동무’입니다. 아이들은 더 많은 학교동무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맞는 놀이동무가 있으면 됩니다. 놀이동무가 다문 하나라 하더라도, 두 아이는 서로 사이좋은 짝꿍이 되어 지냅니다.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똑같아요. 아이들은 더 많은 동무를 사귀기에 즐겁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맞는 동무가 한 아이라도 있을 때에 비로소 즐겁습니다.


  그러니 어른이라면 이 같은 삶자락을 가만히 읽어야 합니다. 아이가 마음껏 뛰놀면서 자랄 만한 터전을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가 기쁘게 뛰놀며 씩씩하게 자랄 보금자리를 살펴야 합니다. 아이가 웃고 노래하면서 튼튼하게 지낼 마을살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누가 / 바람을 보았니? (바람)



  동시집 《야옹이는 신났다》에 흐르는 차분한 이야기를 하나씩 읽습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바람을 보고, 들길을 걸으면서 바람을 봅니다. 바닷가에 서서 바람을 읽고, 숲길에 접어들어 바람을 읽습니다. 너와 내가 같은 바람을 쐽니다. 너도 나도 이 바람을 함께 마주합니다.


  나비가 춤추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다가 나비춤을 따라합니다. 벌이 윙윙거리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벌처럼 날면서 와락 덮칩니다. 개미 한 마리가 기는 모습을 살펴보다가 다른 개미를 보고, 또 다른 개미를 보며, 이윽고 수많은 개미떼를 보면서 하루가 흐르는 줄 까맣게 잊습니다.



할아버진 / 당신 잡수시던 과일을 / 손자들 입에 먼저 넣어 주신다. (병실에서)



  〈병실에서〉라는 동시는 윤이현 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일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모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아이를 바라보면서 배고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며 배부르고, 아이가 노래하는 몸짓을 보며 넉넉합니다.


  다만, 〈병실에서〉라는 동시에서 “할아버진 / 당신 잡수시던 과일을”보다는 “할아버진 / 할아버지가 잡수시던 과일을”처럼 열고 “손자들 입에 먼저 넣어 주신다”보다는 “우리 입에 먼저 넣어 주신다”처럼 닫는다면 한결 동시다우리라 생각합니다.



하늘이 참 곱습니다. // 볼볼볼볼 개미 한 마리 / 풀씨 하나까지 톡톡 여물도록 (저녁노을)



  바람이 고요히 붑니다. 올여름에는 큰바람 없이 아주 조용합니다. 여름이 저물고 가을로 접어드는 새벽에 우리 집 작은아이는 조용히 일어나서 마루에 앉습니다.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아직 바깥이 깜깜하지만 잠이 달아났으니 일어납니다. 방에 초 한 자루를 켭니다. 네 누나는 새근새근 깊이 자니 불을 켤 수 없지. 이 촛불에 기대어 고즈넉한 새벽바람을 쐬렴. 오늘도 새로운 마음으로 놀면서 하늘숨을 마시자. 4348.9.1.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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