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시편 문학의전당 시인선 163
정경미 지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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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3



시와 새봄 (새봄이 되면 바람이 바뀐다)

― 거제도 시편

 정경미 글

 이원조·거제타임즈 사진

 문학의전당 펴냄, 2013.10.7. 1만 원



  날마다 새로운 아침이요, 새로운 저녁입니다. 아침볕은 어제하고 오늘이 달라요. 밤별도 어제하고 오늘이 다릅니다. 날짜가 다르기에 다른 어제하고 오늘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찾아오는 하루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달력으로 삼월이 되었기에 봄이지 않다고 느낍니다. 달력보다 바람이 바뀌었기에 봄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고작 이레 앞서까지만 해도 뭍바람이었는데, 이제는 바닷바람이 되었어요. 어느새 철바람이 바뀌었습니다. 철바람이 바뀌면서 볕이 한결 포근하고, 날씨도 한결 따스해요.



마른 땅이 꿈틀거리는 아침 / 거제도를 펼치자 / 붉은 소망 하나 솟아오른다 / 툰트라에서 몸부림치던 핏덩어리 / 요란한 어둠을 뚫는 동안 (거제도 해맞이)



  거제시 연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낸다고 하는 정경미 님이 빚은 시집 《거제도 시편》(문학의전당,2013)을 읽으면서 봄 날씨를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나는 바람을 읽으면서 날씨랑 철을 느껴요. 날씨를 살피면서 날씨하고 철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생각합니다. 날씨를 알리는 방송이 아니라 바람을 보고 듣고 맡으면서 날씨하고 철을 헤아립니다. 모르긴 몰라도 예전에는 누구나 바람결을 살피면서 하루 날씨를 읽고, 이레나 달포 날씨를 헤아렸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신문도 방송도 책도 없이 오직 우리 몸으로 날과 달과 철을 알아야 했거든요.


  시골마을 할매하고 할배는 흙을 읽습니다. 늘 흙을 만지고 살았으니 흙만 보면 어떤 씨앗을 심을 만한지 알 수 있습니다. 농협에서 심으라고 하기에 잘 되는 씨앗이 아니라, 마을마다 바람도 볕도 물도 다르니, 마을마다 살아온 결에 맞추어 흙을 살피면 어떤 씨앗이 잘 자랄 만한가를 저마다 알 수 있어요.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글을 읽으면서 글쓴이 마음을 읽기도 하듯이, 시골지기는 흙을 읽으면서 흙이 어떠한 결인가를 읽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들 몸짓과 눈빛과 말씨를 읽으면서 아이들이 어떠한 마음결인가를 읽어요.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하늘을 바라보면서 바람으로 날을 읽을 수 있다고 느껴요.



섬의 빗장을 열면 / 휴식하는 안개가 / 식물원 어깨 위로 긴 숨을 내뿜는다 (외도일지 2)


길섶 넘보는 해당화 이마에 / 아침이슬 털어내는 파도소리 / 고샅길 올라와 푸른 귀 세우는 동안 (산달도 여름)



  거제내기 교사인 정경미 님이 빚은 싯말마다 흐르는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이 싯말마다 흐르는 이야기란 바로 고향마을을 마음으로 읽는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지리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고향마을을 마주보고 바라보면서 느끼고 살핀 이야기를 싯말로 가만히 풀어놓았지 싶어요.


  해당화라는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아침이슬 털어내는 파도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푸른 귀”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요? 바로 마음으로 듣고 읽으려 하기에, 참말 마음으로 듣고 읽습니다.


  그러니까 “칠판에서 파도소리 철썩거린다” 같은 싯말처럼 언제 어디에서라도 마음으로 살며시 다가오는 고향마을 이야기를 찬찬히 갈무리할 만합니다. 물빛을 읽고 햇빛을 읽으며 흙빛을 읽습니다. 꽃빛을 읽고 풀빛을 읽으며 낯빛을 읽지요. 이러면서 웃음빛이랑 노래빛을 함께 읽어요.



바다가 앉아 있는 꼬막 교실 / 칠판에서 파도소리 철썩거린다 / 물빛에 씻긴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 오르간 건반 위로 뛰어다니고 / 해풍에 튀겨낸 오후 햇살은 / 스피커를 타고 온 동네 기어든다 (지심도 기억)


수월리 포로수용소 땅 그림자가 / 택지개발 플래카드 어깨를 몰아친다 / 성난 띠풀 더미에 분홍빛 날숨 내뱉는 들녘이 / 서러운 하늘을 지킨다 (개망초 풍문)



  새봄이 되어 새롭게 바뀌는 바람을 마시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읽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동무가 어떤 마음인지 읽고,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읽어요. 어버이가 어떤 마음인지 읽고, 이웃이 어떤 마음인지 읽습니다. 때로는 마음을 잘못 읽거나 엉터리로 읽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중에라도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기 마련이지요.


  서로 마음으로 사귀기에 동무가 되고 벗이 되어요. 서로 마음으로 아끼기에 이웃이 되며 두레를 하지요. 나이만 같기에 동무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에 동무입니다. 옆집에 사니까 이웃이 아닙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살뜰한 사이로 지내니까 이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저마다 여느 때에 마음으로 만나고 사귀며 아끼는 숨결을 고이 돌아본다면, 참말 누구나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살림을 지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내 마음을 너한테 띄우고, 네 마음을 고스란히 받습니다. 내 마음을 그대한테 보내고, 그대가 건네는 마음을 기쁘게 받습니다.



봄보다 먼저 담을 넘는 / 바다 꽃이 붉게 탄다 / 오송마을 물 숲에 / 흐드러진 꽃 타래 / 막 건져 올리면 / 벙글어진 봄소식 따라 / 살풋 얼린 숙성된 살점들 (바다목장 2, 멍게 비빔밥)



  거제내기 정경미 님은 이녁이 나고 자란 거제를 그리면서 《거제도 시편》을 씁니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가 태어난 마을을 가만히 그리면서 “우리 마을 노래”를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대단한 문학이나 예술이 되도록 노래를 써야 하지는 않습니다. 수수하고 투박한 숨결 그대로 고이 살릴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수수하게 노래하면 어느새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끼는 마음을 투박하게 노래하면 어느덧 시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좋아하며 그리는 마음을 가만히 노래하면 시나브로 시라는 옷을 새롭게 입을 수 있습니다. 새봄에 새로운 바람이 불며 온누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듯이, 마을마다 아기자기하면서 어여쁜 노래가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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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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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2



노래 한 가락에 이빨 넉 대 나간 시인은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송경동 글

 창비 펴냄, 2016.2.22. 8000원



  바야흐로 봄볕이 무르익습니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우리 집이 깃든 전남 고흥은 봄볕이 무척 따사롭기에 어른도 아이도 신나게 일하거나 놀 만합니다. 나는 뒤꼍에 어떤 씨앗이나 나무를 심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땅을 밟습니다. 아이들은 두껍고 긴 옷가지가 덥다면서 개구지게 뛰어놉니다. 어느덧 트랙터를 몰고 논을 갈아엎는 이웃 할배가 있습니다.


  봄은 달력이 아닌 햇볕으로 찾아듭니다. 봄은 날씨를 알려주는 방송이 아니라 바람으로 찾아듭니다. 봄은 숫자로 ‘3’월이 아니라 쏙쏙 돋는 쑥내음으로 찾아듭니다. 어제 처음으로 쑥국을 끓였더니 큰아이는 쑥부침개를 먹고 싶다고 밥상맡에서 노래합니다. “얘야, 쑥부침개를 먹으려면 쑥이 얼마나 자라야 할까?” “몰라.” “모르니? 그러면 뒤꼍에 가서 쑥이 얼마나 돋았는지 보렴. 쑥부침개를 먹으려면 소쿠리 가득 쑥을 뜯을 수 있어야 한단다.”



내가 죽어서라도 세상이 바뀌면 좋겠다며 / 내어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 노동자들이 목숨을 놓을 때마다 //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 보수언론들이 이야기한다 (고귀한 유산)


어디선가 빌려와 / 언젠간 돌려보내줘야 할 / 딴 나라 사람 같던 / 어머니 //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 / 소라와 조개가 많이 난다는 나라 / 어머니의 그 나라말을 / 우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나라말)



  노동자하고 벗님이 되는 시인 송경동 님이 새로 선보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창비,2016)를 읽습니다. 전남 벌교에서 나고 자란 송경동 님을 가리킬 적에는 ‘그냥 시인’이 아닌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쓰곤 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참말 송경동 님은 그냥 시만 쓰는 시인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으면 이녁 곁님 이야기가 살짝 나옵니다. 집안일하고 아이키우기는 곁님이 도맡는다고 해요. 집에서 곁님이 집살림하고 아이를 알뜰히 돌보는 힘을 바탕으로 송경동 님은 집 바깥에서 숱한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든든한 보금자리가 있기에 언제나 씩씩하게 기운을 내어 ‘여린 이웃’한테 손을 내밀 수 있고, ‘아픈 동무’하고 어깨를 겯을 수 있어요.



탈근대, 탈영토, 탈식민지, 탈구조화…… / 탈이라면 이런 것들만 생각해왔는데 / 오늘은 탈곡기로 콩 터는 일을 돕는다 (다른 서사)


비 피하러 들어간 자재창고 후미진 구석에 박혀 / 쓸쓸한 노래 한곡을 부르는데 / 창고장이 웬 청승이냐고 나가라 했다 / 너무 야박하지 않으냐고 돌아서는데 뒷골이 띵 / 쓰러졌다 일어나는데 다시 앞에서 풀스윙 / 코 옆에서 입술까지 너덜너덜 찢어지고 / 이빨 넉대가 산산조각이 났다 / 노래 한곡 값이었다 (그 노래들이 잊히지 않는다)



  ‘시인 송경동’이 아닌 ‘노동자 송경동’으로 살던 무렵, 송경동 님은 온몸으로 아프면서 고된 일을 으레 겪었다고 합니다. 비가 오는 날 노래 한 가락을 뽑았다가 드센 주먹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이빨 넉 대가 나갔다고 합니다. ‘노동자 송경동’에서 ‘시인 송경동’으로 거듭난 뒤에,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시인’으로 살아가니, 한꺼번에 여섯 가지 소환장이 집으로 날아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노동자 송경동은 노래 한 가락 뽑았다고 이빨이 넉 대가 나가야 했고, 시인 송경동은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살림을 지었다고 법원에서 벌금 삼백만 원을 내야 했다고 합니다. 〈시인과 죄수〉라는 시를 보면, 어느 날 서울중앙법원 재판정에 서야 했는데, 집시법이나 여러 법으로 얽혀 벌금 삼백만 원 선고를 받았고, 그날 낮에는 천상병시문학상을 받으면서 덤으로 상금을 오백만 원 받아서 겨우 벌금을 메우면서 살림에 보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시를 더 보면, 신동엽문학상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날 낮에는 체포영장이 나왔다는 “벅찬 소식”까지 함께 들었다고 합니다.



“○○씨랑은 어떤 관계죠?” /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 나의 청춘을 / 나의 거리를 / 나의 고뇌를 / 결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진술을 거부하겠습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이전하며 위장폐업한 / 기타 만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 복직을 요구하는 /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시인 송경동은 그악스럽거나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도 될까 궁금합니다. 왜 시인 한 사람은 재판정에 서서 선고를 받아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왜 시인 한 사람은 자꾸 경찰서로 불려 가서 진술서를 써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왜 시인 한 사람한테 자꾸 벌금을 물리고, 이녁을 감옥에 가두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금함은 아주 쉽게 풀 만하다고 느낍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요즈막 정부는 ‘테러방지법’을 세우겠다면서 온힘을 쏟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살림 걱정을 하지 않도록 북돋우는 정책이 아니라, 테러방지법 같은 정책에 온힘을 쏟겠다는 정부 권력이에요.


  시인 한 사람은, 노동자였던 시인 한 사람은,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시인 한 사람은, 곁님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시인 한 사람은, 시골바람을 마시면서 투박하게 자란 시인 한 사람은, 대단하거나 놀라운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고 작은 시인 한 사람은 오직 하나를 조그맣게 바랍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 저작권 관련 글을 한편 써달라는데 / 나는 누구의 삶을 팔아 얼마를 챙긴 것일까 /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온 / 아내의 저작권은 몇 퍼센트일까 (저작권)



  사랑이 흐를 수 있는 삶터가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이 흐를 수 있는 삶터일 때에 평화롭습니다. 사랑이 흘러서 평화로울 수 있는 삶터일 때에 평등합니다. 사랑이 흘러 평화롭고 평등한 삶터일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흘러 평화롭고 평등하여 아름다운 삶터일 수 있을 때에 서로 어깨동무하는 기쁜 살림을 지을 만합니다.


  논갈이를 하는 시골 할배나 아재는 방송이나 신문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봄볕을 읽고 봄바람을 읽을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고작 5퍼센트가 될랑 말랑 하는 시골지기는 서울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모르고, 알 길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지기는 이 새로운 봄에 새롭게 흙을 일구어 봄맞이를 합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흙을 만지면서 씨앗을 심습니다. 이 씨앗에 싹이 트고 줄기가 올라 꽃이 피면, 온누리에 아름다운 숨결이 퍼져요. 씨앗 한 톨에서 핀 꽃이 지고 열매가 익을 무렵이면, 온누리에 사랑스러운 바람이 불지요. 씨앗 한 톨에서 맺은 꽃이 지고 열매가 맺은 뒤에 갈무리를 할 즈음이면, 온누리에 넉넉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가을걷이는 고된 일이면서 기쁨이 가득한 노래이거든요.



국회에서 맺은 합의서도 종잇조각 / 천억대 회사를 육천만원짜리로 빼돌린 배임도 무혐의 / 노동자를 버리고 떠난 야반도주는 합법 / 백주대낮 회장 집 방문은 주거침입 (기륭과 보낸 십년)



  노래 한 가락에 이빨 넉 대 나간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려는 꿈으로 시를 짓습니다. 작은 시가 모여서 작은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태어납니다. 이 작은 시집에서 송경동 님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말을 자꾸 읊습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송경동 님 같은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다’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송경동 님이 벗님으로 삼는 노동자는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공무원까지, 이런 분들은 모두 ‘권력자’가 아니라 ‘심부름꾼’이어야 옳지 싶습니다. 정치와 행정을 맡는 분들은 ‘수수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북돋우고 돌보며 아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일을 하는 마음일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수수한 사람들한테 참다운 평화를 북돋우는 정책을 마련해서 이끌 적에 비로소 ‘정치 심부름꾼’이지 싶습니다. 집시법이 아니라 헌법을 헤아리면서 나라살림을 바라볼 적에 비로소 ‘행정 심부름꾼’이지 싶습니다.


  새봄에 서울 국회나 청와대 언저리에 계신 분들을 시골로 부르고 싶습니다. 바쁘고 어수선한 서울을 이 봄에 살짝 벗어나서 시골로 와 보셔요. 시골에는 군대도 탱크도 없어도 평화로워요. 시골에는 전쟁무기도 전투경찰도 그냥 경찰도 없어도 사건이나 사고가 없어요. 시골에는 이 봄에 흙을 만지면서 새하고 노래하고 쑥이랑 나물을 뜯는 기쁨을 누려요.


  노동자와 벗님하는 시인 한 사람이 이녁 고향인 벌교 시골마을에서 탈곡기로 콩을 탈탈 털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아늑하게 지을 수 있는 꿈을 부디 기쁘게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고요히 덮습니다. 모든 사랑스러운 꿈은 머잖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운 꿈이기에 이룰 수 있어요. 2016.2.2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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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산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9
박철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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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1



네 작은 손에 온누리가 있네

― 작은 산

 박철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3.4.29. 8000원



  작은아이가 파란 빛깔을 좋아합니다. 분홍도 좋아하고 노랑도 좋아하며 풀빛도 좋아하는데, 문득 파랑을 퍽 좋아하는 마음으로 흐릅니다. 큰아이는 집에서 어머니하고 놀도록 한 뒤에 작은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오는 길에 작은아이한테 물어봅니다. “우리 곁에 파랑이 어디에 있을까?” “음, 몰라.” “잘 생각해 봐. 하늘은 무슨 빛깔일까?” “하늘? 오늘 구름 많이 껴서 하얀데.” “그래, 이 구름이 걷히면 하늘은 파랗지.”


  작은아이하고 이야기를 잇습니다. “바다는 어떤 빛깔일까?” “파랑.” “바다는 왜 파랑일까?” “몰라.” “바다는 하늘이 파라면 파래. 해가 질 적에 하늘이 붉으면 바다도 붉어.” “누나하고 바다에 가고 싶다.” “바람이 가라앉고 볕이 좋으면 바다에 가자. 하늘이 파랑이면 바람은 무슨 빛깔일까?” “몰라.” “바람은 어디에 있지?” “하늘에?” “그래. 바람이 하늘에 있으면 바람은 무슨 빛깔이지?” “몰라.” “생각해 봐. 하늘이 파랑이고, 바람으로 하늘이 이루어졌으면 바람은 무슨 빛깔일까?”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개화산에서)



  여섯 살이라는 나이를 지나가는 작은아이하고 파랑과 하늘과 바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들이를 합니다. 둘이서 오붓하게 읍내마실을 마치고 시골버스에 오릅니다. 마을에서 읍내로 갈 적에는 큰 버스였는데, 읍내에서 마을로 올 적에는 작은 버스입니다. 작은 시골버스에 타고서 가방에서 시집을 한 권 꺼냅니다. 시인 박철 님이 빚은 《작은 산》(실천문학사,2013)입니다. 버스에서 살짝 읽어 보려고 챙겼습니다.


  시를 한 줄 읽다가 다시 파랑 이야기를 묻습니다. 시를 두 줄 읽고서 파란 하늘과 파란 바람 이야기를 잇습니다. 우리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하늘빛을 파랑으로 느끼면서 바라보지만, 정작 바람한테는 아무 빛깔이 없는듯이 여긴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숨을 쉴 적에는 바로 이 바람을 마시고, 우리가 마시는 바람이 바로 하늘을 이루니, 우리는 늘 하늘을 마시는 셈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파란 숨결을 맞아들여서 몸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노릇이라고 알려줍니다.



요즘 나는 늙으신 부모에게 / 이별에 대해 가르치는 중이다 / 불쑥 들어설 것 같아 하루 종일 / 마당가에 앉아 있다는 어머니 / 참기름처럼 고소한 상추 잎들이 / 아들이 보고 싶은 어머니 손에서 시들어간다 (작은 산)


요즘은 또랑 보기가 참 어렵구나 / 중요하지도 않은 작은 시냇물을 떠올리다가 / 우물도 볼 수가 없지 겨울이면 얼음 더께가 두둑한 / 우물가로 가던 여인네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 근데 왜 그 추위에 우물가에선 웃음이 넘쳐났을까 (또랑)



  작은아이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큰아이가 마당에서 반깁니다. 한 시간 반 남짓 동생하고 떨어진 큰아이는 이때부터 저녁을 먹을 때까지 둘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함께 놉니다. 저녁을 먹다가 졸음이 쏟아져서 작은아이가 곯아떨어지고, 그 뒤 큰아이는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나도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었을 적에 동생처럼 밥을 먹다가 잠들었어?” 고작 너덧 해 앞서 일이지만 큰아이는 예전 일을 못 떠올리는가 봅니다. 그렇지만 나는 잊지 않아요. “그럼, 너도 자주 그랬어.”


  낮에 작은아이한테 들려준 파랑이랑 하늘이랑 바람 이야기를 큰아이한테도 들려줍니다. 큰아이는 이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 주기는 하지만 아직 다 알아듣지는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파랑하고 하늘하고 바람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가 하는 대목을 깊이 헤아린 지 얼마 안 됩니다. 어릴 적에는 이 대목을 무척 궁금하게 여겼어요. 하늘이란 바로 바람일 텐데, 하늘을 보면 파랑이지만 왜 바람은 빛깔이 없는 듯할까 하고 궁금했거든요.



할머니의 오랜 동무가 발밑에 사는 것을 / 그래서 아이는 지구가 할머니의 놀이터고 / 지구 너머 우주의 꽃들도 물처럼 흐르는 은하수도, / 모든 것이 아이의 작은 손과 이어져 있음을 (노인과 아이)


우리는 제각기 서서 / 한 그루 나무로 /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해빙 12, 나무)



  부엌을 치우고 나서 시집을 마저 읽습니다. 큰아이가 혼자 놀다가 그림책을 보는 동안 시집을 더 읽습니다. 큰아이한테 찢어진 책을 어떻게 손질하는가를 보여주고는, 잠자리에 들 적에 즐겁게 꿈을 꾸면서 포근히 쉬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았는가를 큰아이 스스로 일기로 쓰도록 돕습니다. 이제 불을 다 끄고 잠자리에 들려 하는데 작은아이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아무 말을 않고 마당으로 나가서 쉬를 합니다. 쉬가 마려워서 스스로 깼군요.


  졸음이 가득하지만 쉬를 잘 가린 작은아이가 대견해서 이 아이를 안다시피 이끌어서 양말을 벗기고 발을 씻긴 뒤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고 이를 닦아 줍니다. 아이가 혼자 할 일이지만, 졸음돌이가 폭 잠들기를 바라며 하나하나 재빨리 챙겨 주고 자리에 누입니다. 자리에 누운 작은아이는 이내 다시 꿈나라로 갑니다.


  초를 켜서 시집 《작은 산》을 마저 읽습니다. 고요한 밤바람을 살며시 느끼면서 마지막 줄을 읽습니다. 기지개를 켜면서 싯말을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라고 노래하는 싯말을 되새기고, 작은 산에서 바라보는 먼 곳을 헤아리는 싯말을 되새깁니다. 이러면서 ‘작은아이’를 일컬을 적에 쓰는 ‘작은’이라는 말마디를 곱씹습니다.



어제 못다 내린 눈이 마저 내리러 왔네 / 어제 못다 걸은 길이 마중을 나왔네 (흰 눈)



  나한테는 형이 있기에 나는 어릴 적부터 ‘작은아이’로 컸습니다. 어버이 자리에 선 나로서는 두 아이가 모두 “(몸이) 작은” 아이입니다. 두 “작은 아이” 가운데 동생은 ‘작은아이(둘째)’이지요. 작디작은 아이가 바로 둘째요 동생입니다.


  이 작은아이는 버스를 타고 나들이를 갈라치면, 신나게 노래를 부릅니다. 얼마나 노래를 신나게 하는가 하고 물끄러미 지켜보면, 고흥에서 서울까지 가는 다섯 시간 가까운 버스길에서 내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시외버스에서 내처 노래를 부르면 다른 손님이 잠을 못 주무시니 부디 목소리를 낮추어 달라고 해요.


  노래돌이인 작은아이는 버스를 타니 신나지만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없어서 힘들어합니다. 도시로 나와서 버스나 전철이나 택시를 탈 적에도 늘 노래를 부르는데, 집에서처럼 목청껏 불러요. 어쩜 이렇게 아무 눈치를 안 보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가 싶어서 놀라지요. 이때에도 노래는 부르되 목소리는 낮추어 주렴 하고 속삭이면 싱긋 웃으면서 목소리를 줄이는 듯하다가 다시 키웁니다. 이러다가 한마디를 해요. “아버지, 얼른 집에 가자. 노래하고 싶어.”



헌법 제1조 1항은 / 대한민국은 어린이를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이다로 바꿔야 합니다 (이상한 시)



  시집 《작은 산》은 거의 ‘짧은 시(작은 시)’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꼭 하나 〈이상한 시〉만 깁니다. 그리고 이 긴 시인 〈이상한 시〉에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헌법 제1조 1항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가 흘러요.


  두 아이를 재우고 나서 촛불에 기대어 이 시를 읽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아이들이 깰까 싶어 목소리를 죽이면서 노래해 보았습니다. 어쩜 이렇게 예쁜 말이 다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참말 그렇지요. 우리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만 나오는데, 이 헌법이 ‘그냥 민주공화국’이 아닌 ‘어린이를 가장 높이 사랑하는 민주공화국’으로 바뀔 수 있으면, 아니 거듭날 수 있으면, 아니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린이를 ‘최우선’으로 삼는 민주공화국이라면 전쟁무기가 아닌 평화로 돌아서겠지요. 어린이를 ‘가장 높이 아끼는’ 민주공화국이라면 입시지옥도 학벌도 모든 신분이나 계급도 걷어치우겠지요. 어린이를 ‘가장 거룩히 사랑하는’ 민주공화국이라면 불평등이나 반민주가 그야말로 발을 디딜 수 없으리라 생각해요.



일면식이 없는 /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 서명을 한 뒤 잠시 바라보다 /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버리긴 아깝고)



  자는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면서 가만히 한마디를 읊습니다. “네 작은 손에 온누리가 있네.” 자그마한 시집을 가만히 덮으면서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이 작은 이야기에 온사랑이 있네.” 작은 목소리로 작은 꿈을 노래하는 사람들한테서 사랑스러운 숨결이 흘러나옵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살림을 가꾸는 사람들한테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대’통령이 아니라 ‘작은’ 어른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면 아름다우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큰’ 것을 챙기거나 찾는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정치가 아니라, 다 같이 ‘작은’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정치라면 더없이 사랑스러우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작은 아이가 큰 마음이고, 작은 사랑이 큰 꿈이요, 작은 숨결이 큰 살림이지 싶습니다. 2016.2.26.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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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문예중앙시선 7
이경림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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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8



할머니는 먼지가 되어 난다

―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이경림 글

 중앙북스 펴냄, 2011.6.30. 8000원



  아이하고 살면서 늘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이는 어른과 다르기 때문에 어른처럼 생각하지 않고 어른처럼 바라보지 않아요. 그래서 어른인 나는 어른다운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놓고는 아이다운 눈길이 되어서 삶과 살림과 사랑을 새롭게 바라보곤 합니다. ‘ㅅ’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를 늘 새삼스레 돌아본다고 할까요. 삶도 살림도 사랑도, 또 사람도 시골도 숲도 모두 ‘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이를테면, “달은 왜 떠?”라든지 “아침은 왜 와?”라든지 “겨울인데 왜 더워?”라든지 “여름인데 왜 추워?”라든지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라든지 “별은 왜 안 뜨거워?”라든지 “밥은 왜 먹어?”처럼 끝없이 묻고 가없이 물으며 그지없이 묻는 말마다 ‘이제껏 딱딱하게 굳은 머리통’을 마치 수박을 쪼개듯이 쩍 갈라서 생각을 열어 놓습니다.



어떤 이는 바람 소리라 하고 / 어떤 이는 풀벌레 뒤척이는 소리라 / 또 어떤 이는 지구 돌아가는 소리라 / 신음 소리라 / 뉘 우는 소리라 / 하는 그 소리, 밤새 들으며 (우리가 한 바퀴 온전히 어두워지려면)


설렁탕과 곰탕 사이에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 어떤 생의 무릎과 혓바닥 사이에는 / 어떤 생의 머리뼈와 어떤 생의 허벅지 살 사이에는 / 형언할 수 없이 슬픈 눈과 사나운 관능을 가진 /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푸른 호랑이)



  이경림 님이 빚은 시집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중앙북스,2011)를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틈틈이 이 시집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먹을 밥을 차리다가 한두 쪽씩 찬찬히 이 시집을 읽습니다. 밥때랑 밥때 사이에 샛밥을 챙긴다든지 주전부리를 내밀면서 이 시집을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어느새 ‘할머니 시인’인 이경림 님은 할머니다운 숨결로 할머니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다만, 할머니이기 앞서 시인입니다. 그리고 시인이면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이기 앞서 어머니요, 어머니이기 앞서 딸입니다. 어머니이기 앞서 시인이고, 또 딸이기 앞서 시인입니다. 여러 모습이 한몸에 어우러진 삶이요 살림이고 사랑인 이경림 님입니다.



아버지, 살구씨 하나를 뜰에 심었는데 왜 /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장의 떡잎이 나오나요 (살구마누 장롱)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은 건 육만 년 전 / 내가 우리 딸을 낳은 건 삼만 오천 년 전 / 우리 딸은 지금 제 배 속에다 팔천 년째 아기를 키우고 있네 (늪)



  우리 어머니는 나를 언제 낳았을까요? 거의 안 떠오릅니다. 마흔 몇 해 앞서 나를 낳았을까요, 아니면 마흔하고도 사만 몇 해 앞서 나를 낳았을까요? 내가 우리 아이들을 낳은 때는 언제일까요? 열 해쯤 앞서일까요, 아니면 십만 해나 백만 해 앞서일까요?


  오늘 나는 이곳에서 살지만, 백 해나 이백 해나 삼백 해 앞서는 어떤 몸뚱이를 타고 이 땅에서 삶을 지었을까요? 아이들하고 ‘선문답’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는 틈틈이 시집 한 권을 읽으면서 머리통을 자꾸 쪼개고 다시 가르며 새롭게 쩍쩍 잘라 봅니다. 굳은 머리가 되지 말고, 열린 머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수수께끼를 헤아립니다.


  왜 지구는 늘 빙글빙글 도는데 우리는 안 어지럽다고 느낄까요? 어쩌면 우리는 늘 어지러운데 어지러운 줄 잊지는 않을까요? 왜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을까요? 왜 애벌레는 제 몸을 녹여서 나비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왜 잎사귀는 애벌레가 갉아먹힌 뒤에도 새로 돋을 수 있을까요? 왜 나무는 가지가 잘린 뒤에도 새로 날 수 있을까요? 왜 모든 주검, 사람 주검이든 벌레 주검이든 곧 흙으로 바뀔까요?


  아이가 아버지한테 이것저것 온갖 수수께끼를 물을 적에 나도 이 아이한테 갖은 수수께끼를 내놓아 봅니다. 우리는 서로 수수께끼 놀이를 합니다. 아이는 아이한테 궁금한 대목을 묻습니다. 나는 나한테 궁금한 대목을 묻습니다. 얘야, 먼지란 뭘까? 얘야, 참말 밥이란 뭘까? 얘야, 왜 떡이나 빵은 달고 자꾸 손이 갈까? 얘야, 이는 왜 닦아야 할까? 얘야, 이 지구별 한복판에는 뭐가 있을까? 얘야, 왜 사람은 날지 않을까? 얘야, 왜 사람은 우주에서 살 생각을 안 할까?



할머니가 컸을 때 그림자도 있어? / 음― 할머니는 이제 크지 않아 / 왜? / 너무 오래 컸으니까 / 너무 오래 크면 그림자가 이 방에 누울 수가 없으니까? / 응, / 그럼 할머니는 어떻게 돼? / 조금씩 작아지지 / 계속 작아지면 어떻게 돼? / 먼지가 되지 / 먼지가 되면 어떻게 돼? / 먼지는 너무 가벼워 소파 뒤로 장롱 위로 날아다니지…… / 먼지도 그림자가 있어? / 먼지 그림자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을걸 (하룻밤, 푸른 호랑이 11)



  시집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는 마치 수수께끼 꾸러미 같습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꾸러미는 퍽 즐겁습니다. 할머니 시인이, 아니 그냥 할머니가 아이하고 주고받는 이야기가 시 하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흐름을 살피면서, 나는 오늘 우리 살림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하고 되새겨 봅니다.


  아직 봄이 아니어 퍽 쌀쌀한 날씨이지만, 신도 안 신고 맨손으로 흙놀이를 하는 두 아이가 자꾸 아버지를 부릅니다. 왜 부르니? 아버지는 오늘 깍두기를 담느라 바쁘거든? 아이들이 부르는 데로 쭐래쭐래 가 보면 흙으로 빚은 떡이며 빵이며 밥이며 국이 있습니다. 뒤꼍에 저희 흙놀이터를 마련해 주었더니 날마다 틈틈이 소꿉밥을 지어서 아버지를 불러요.


  그래, 그렇구나. 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너희들을 부르니, 너희도 너희 사랑스러운 손길을 담은 꿈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밥을 지어 너희 어버이를 부르는구나. 아버지는 너희 몸을 살찌우는 밥을 주고, 너희는 아버지한테 마음을 살찌우는 밥을 주네.



넋 놓고 가다가 문득 돌아보면 /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 낯모르는 바람이 툭 어깨를 치고 간다 (사람아, 사람아)


나, 한때 벚꽃나무 아래 집을 지었지 / 벚꽃 아래서 밥 먹고 벚꽃 아래서 책 보고 / 벚꽃 아래서 연애하고 벚꽃 아래서 널 낳고 / 하늘만 한 벚꽃 모자를 쓴 채 죽었지 (벚꽃들, 푸른 호랑이 25)



  시집을 읽으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하는구나 하고 문득 느낍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시 한 줄을 설명문처럼 읽을 수 없습니다. 시 두 줄을 신문 사설처럼 읽을 수 없습니다. 시 석 줄을 아홉 시 새소식처럼 읽을 수 없습니다. 시 넉 줄을 사건 보도처럼 읽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시 다섯 줄을 문학비평으로 읽을 수 없어요.


  모든 시는 언제나 내 삶에서 내 사랑을 열어서 내 살림을 내 손으로 기쁨으로 가꾸는 소담스러운 숨결로 읽을 수 있을 뿐이지 싶습니다. 아이들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듯이, 온갖 ‘ㅅ’을 잇는 손짓으로 읽는 시이지 싶어요.


  살구꽃도, 살내음도, 산들바람도, 사과나무도, 사진 한 장도, 수수팥떡도, 소꿉놀이도, 술래잡기도, 싱그러운 햇살도, 수수한 밥 한 그릇도,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ㅅ’을 살몃살몃 끄집어 내어 누리는 살림집에서 생생하게 살피는 싯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신들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 ―이거 더 싸게 안 돼요? / 주인이 앙칼지게 신들을 뺏어 제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 ―여긴 도매상이에요 (神들의 도매상, 가방 도매상에서)



  시를 쓰는 할머니는 먼지가 되어 납니다. 먼지에도 그림자가 있을 테지만, 이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여느 때에 먼지를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지요.


  내 눈앞에 먼지가 가만히 날아갑니다. 먼지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마음껏 춤을 추면서 날아갑니다. 이 먼지 한 톨은 시인 할머니가 바뀐 몸일까요? 어쩌면 시인 할아버지가 바뀐 몸일는지 몰라요. 아니면, 시골지기 할매랑 할배가 바뀐 몸일 수 있고, 무시무시한 임금님이 바뀐 몸일 수 있어요. 착한 아이들이 바뀐 몸일 수 있고, 상냥한 이웃님이 바뀐 몸일 수 있어요.


  깔깔거리며 마당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시집을 조용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시집을 마저 읽을 틈을 기꺼이 내줍니다. 고마워, 아이들아. 이 시집을 다 읽고서 다시 깍두기를 버무려야겠구나. 소금이 잘 밴 무토막에 양념을 고루 섞어서 맛난 깍두기를 담글게. 2016.2.2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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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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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4



시와 빈자리 (빈자리 든자리 난자리 보금자리)

― 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글

 문학동네 펴냄, 2010.6.28. 7500원



  “든 자리 난 자리”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 말을 흔히 들으면서도 그냥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 어릴 적에도 어머니가 하루쯤 집을 비우면, 어머니 한 분이 안 계신 집이 얼마나 쓸쓸한가 하고 깊이 느꼈어요. 마치 집안이 멈춘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릴 적에 학교에서도 동무 하나가 하루를 거르면, 한 반에 쉰 남짓 바글거리더라도 꼭 그 “난 자리”가 허전했습니다. 한 자리라도 비면 어쩐지 제대로 차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어떤 시인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하고 / 어떤 화가는 평면을 보면 모두 일으켜세워 / 그 속을 걸어다니고 싶다고 한다 / 나는 쓸데없이 널려 있는 낡은 널빤지를 보면 / 모두 일으켜세워 이리저리 얽어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님이 빚은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문학동네,2010)를 읽습니다. 1925년에 태어나고 2015년 가을에 숨을 거둔 홍윤숙 님은 2010년에 이 시집을 선보이면서 ‘마지막 시집’이 될 듯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집을 선보이고 나서 2012년하고 2013년에 새로운 책을 한 권씩 더 내셨어요. 마지막 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더 새롭게 시를 엮어서 선보일 수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떠나셨으니까요.


  떠나고 없는 자리를 고요히 돌아보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방에서 시끌벅적하게 뛰면서 노는 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싯말을 하나하나 새겨 봅니다. 겨울이 저물고 봄이 다가오는 하루를 새삼스레 느끼면서 시집에 깃든 노래를 헤아립니다. 늦겨울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싯말마다 흐르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카랑카랑 마른 내 뼛속에는 / 고장난 바이올린이 숨어 있나보다 / 작은 바람에도 큰 소리 울리며 / 반음쯤 틀리는 소리를 낸다 (반음半音)


명아주 까마중 괭이풀 토끼풀 / 고만고만한 풀들이 서로 기대고 비비며 / 한 세상 모여 사는 마을에 들어서면 / 문득 어린 시절 잃어버린 꽃반지 하나 (풀밭에서)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는 홍윤숙 님이 아픈 몸으로 적바림한 노래라고 합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에 느낀 쓸쓸함이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시란 바로 쓸쓸함과 싸우면서 쓰는 글’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엮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여든을 지나 아흔으로 나아가면서 어릴 적 꽃반지를 떠올립니다. 망가진 몸에서 나는 소리는 망가진 바이올린에서 나는 소리 같다고 합니다. 반음쯤 틀리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반음쯤 틀리더라도 이 소리는 ‘악기가 내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노랫소리예요.


  낡은 널빤지를 세워서 집을 지으며 살고 싶다는 마음처럼, 아이들은 뭔가 있으면 하나하나 갈무리해서 새롭게 지으면서 놉니다. 아이도 어른도, 어린이도 할머니도, 참말로 누구나 새로 지으려는 몸짓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집을 짓든 장난감을 짓든, 살림을 짓든 밥을 짓든, 시를 짓든 꿈을 짓든,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 품은 생각대로 하루를 지으면서 이 길을 걷는구나 싶습니다.



눈을 감으면 떠돌던 내가 / 내 안으로 돌아오고 / 온 세상 소요도 잠잠히 잦아들고 / 내 안의 물결치던 크고 작은 이랑들이 / 하나로 모여 허공을 만들고 (눈을 감고)


다복솔보다 키가 큰 그는 / 바다를 가리키며 / 언젠가는 바다로 가겠노라고 이야기했다 / 그리고 문고판 작은 헤세 시집 한 권을 주었다 (헤세의 시집)



  낮볕이 덥다던 아이들은 “아버지, 오늘 봄이야? 겨울 맞아?” 하고 묻습니다. 밤바람이 차다는 아이들은 “아버지, 아직 겨울이야? 봄인데 왜 이리 추워?” 하고 묻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을 뿐 딱히 아무 말을 안 합니다. 조금 뒤 “네가 스스로 생각해 봐.” 하고 말합니다. 달력에 적힌 숫자 말고 우리 몸으로 느끼는 날씨하고 철을 생각해 보면 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날씨를 알려주는 방송으로는 봄인지 겨울인지 알 길이 없어도, 우리가 스스로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결을 느낄 수 있으면 오늘 이곳이 어떤 날이며 철인지 알 테니까요.


  눈을 감고서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눈을 감고서 내 모습을 바라봅니다. 둘레에서 퍼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번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할머니 시인이 스스로 이녁 마음속 목소리를 들으려 하듯이, 나도 아이들하고 우리 시골집에서 마주하는 바깥소리 말고 우리 마음속 노랫소리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자, 자, 이제 손발낯 씻고 자리에 누워야지?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신나게 꿈나라를 날아야지?


  이부자리를 반반히 깝니다. 아이들을 눕힙니다. 이불깃을 턱 밑까지 여밉니다. 토닥토닥 달래니 어느새 두 아이 모두 곯아떨어집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볼에 뽀뽀를 합니다.



거울 속의 내가 / 거울 밖의 나를 / 탄식하며 고개 돌린다 / 거울 밖의 나는 / 거울 속의 나를 / 무섭고 낯설어 / 고개 돌린다 (거울 앞에서 1)


낙서로 가득한 / 빈 공책이다 // 문 앞에서 맴돌다 / 놓쳐버린 막차 (일생 2)



  밤이 지나고 아침이 다가올 무렵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엽니다. 아이들이 언제 일어나든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늘 내가 일어나야 할 때에 일어나서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다시마도 알맞게 끊어서 불려 놓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이 일어나서 재잘거리며 놀다가 배가 고플 즈음 되면 찬찬히 밥을 지어야지요.


  내가 짓는 하루는 내가 새롭게 쓰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 시인이 아흔 해를 걸어오며 적바림한 공책은 “낙서로 가득한 / 빈 공책”이라 하지만, 그 ‘낙서’란 바로 ‘숱한 이야기’이리라 느낍니다. 그때그때 휘갈긴 글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때그때 새삼스럽고 기쁜 숨결로 맞이한 하루를 가만히 적바림한 글이라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삶자리를 가꾸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이 꿈을 키우면서 보금자리를 일구자고 다짐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언제나 이 자리에서, 웃음이 퍼지는 웃음자리를 누리고, 노래가 흐르는 노래자리를 누리며, 사랑으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랑자리를 누리자고 생각을 다스립니다. 내 “든 자리”를 고이 돌보는 마음이 된다면, 나는 오늘 이 시골집에서 아이들하고 재미나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 봅니다. 2016.2.15.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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