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9
신동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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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6



“아빠, ○○○당이 왜 나빠?”

―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신동호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4.6.23. 8000원



  신동호 님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실천문학사,2014)를 읽습니다. 대뜸 묻는 냉면집 아저씨 이야기가 긍금합니다. 냉면집 아저씨가 어디로 갔기에 시인은 이렇게 물음표를 콕 찍을까요? 아무래도 냉면집 아저씨가 더는 냉면집을 지키거나 버티지 못하기에 어디론가 가셨겠지요. 냉면집 살림이 나빠졌을 수 있고, 냉면집 말고 다른 꿈을 찾아서 길을 나섰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흔한 재개발에 밀려서 떠나야 했을 수 있고, 고향이 그리워서 냉면집을 고이 접었을 수 있습니다.



종착역. 끝이 없는 여행은 없다. 없기에 슬프고, 없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혁명은 억지로 봄을 부르지만 겨울아, 왜 사랑은 눈꽃처럼 네 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냐.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는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겨울 경춘선 2)


광합성은 1차 산업이다. 지식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산나무 증후군)



  사월을 앞둔 시골은 부산하려는 움직임이 살랑거립니다. 아직 부산하지는 않습니다. 바야흐로 새벽이나 밤까지 따스한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부산할 테지요. 마늘밭에서 마늘을 뽑고, 마늘밭을 갈아엎은 뒤에, 이 자리에 새로운 남새를 심거나 모내기를 해야 하는 사오월이 그야말로 부산하지요.


  그래도 삼월 끝자락 새벽에 마을이 온통 연기투성이입니다. 집집마다 뭔가를 태우는 연기가 몽글몽글 솟습니다. 동틀 무렵부터 일어나서 하루를 연다는 뜻입니다. 나도 동틀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엽니다. 아이들이 아침까지 깊이 자도록 불은 안 켭니다. 초만 한 자루 조용히 켭니다. 마당하고 뒤꼍을 돌면서 나무한테 인사하고, 곧 옥수수를 자리를 가만히 살핍니다. 날이 더 따스하면 아이들하고 신나게 옥수수를 심을 생각입니다. 어제는 텃밭에 붉은콩을 쪼르륵 심고, 뒤꼍에 나무도 한 그루 새로 심었습니다.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며 늘 고민이다.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장벽이 없었음을 확인하던 금강산이 두려웠던 게다. 우리 모두. 장벽이 있어야 편안한 우리 모두. (미인송)



  꽃삽하고 호미를 쥐고 흙놀이를 신나게 하는 아이들입니다. 꽃삽하고 호미만 있으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동안 꽃삽하고 호미로도 배고픈 줄 잊고 놀아요. 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더 놀아야 한다면서 안 오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시 사회이기에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렇지만 딱 서른 해만 돌아보고 쉰 해를 거스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만졌어요. 백 해를 되새기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만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온누리 거의 모든 아이들한테 꽃삽하고 호미를 맡기면 무척 신나게 흙놀이를 하리라 생각해요. 도시 아이들도 바닷가에 놀러가면 모래밭에서 모래를 파며 신나게 모래투성이가 되지요.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를 읽으면 신동호 님네 막둥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얼핏설핏 흐릅니다. 그러면 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고 며칠쯤 아버지 일하는 곳에 함께 데리고 다녀도 재미있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굳이 학교에 ‘개근’해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하루나 며칠쯤 학교를 쉬도록 하고서는,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바깥나들이를 넉넉히 다녀 보아도 즐거워요.



과태료 고지서를 깜빡하고 평양까지 가지고 갔다 / 납기 후 금액에 안달하던 자본주의 버릇까지 가지고 갔다 (평양, 가방)


늦은 밤, / 온종일 수학 문제를 푼 열다섯 아들이 / 집으로 가는 길에서 물었다. /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 (사막촌 주막)



  시인 신동호 님이 과태료 고지서 말고 이녁 아들을 데리고 평양을 다녀오면 어떠한 살림을 지을 만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학교를 며칠 쉬도록 하고는, 이 아이들이 평양을 아버지하고 함께 밟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살짝이나마 겪어 보도록 하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시 시집을 덮고 부엌일을 합니다. 아침으로 지을 밥거리를 손질합니다.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는 아버지를 보는 우리 아이들은 저희도 칼질이나 도마질을 하고 싶습니다. 칼등으로 마늘을 빻으면 왜 칼등으로 마늘을 빻느냐고 물으면서 저희도 그처럼 하고 싶습니다. 절구로 마늘을 찧으면 저희가 절구질을 하겠다면서 손을 번쩍번쩍 듭니다.


  커다란 무도 썰어 보고 싶고, 길다란 당근도 썰어 보고 싶습니다. 매운 내가 퍼지는 양파도 썰어 보고 싶고, 말랑말랑 잘 삶은 달걀도 가만히 썰어 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지켜보면서 배우고, 어버이는 어깨너머로 지켜보도록 틈을 내어 주면서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살림을 바라보면서 배우고, 어버이는 아이들 둘레에서 살림을 새로 지으면서 가르칩니다.



메밀꽃처럼 눈이 내리는데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 바다가 물러난 사리 갯벌 어디에서 개불을 잡고 있을까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이제야 철조망이 보인다 / 나는, 내가 자유인인 줄 알았다 / 망명의 꿈도 꾸지 못하는 포로였음을 (포로수용소)



  메밀꽃처럼 눈이 내리고, 눈처럼 매화꽃이 날립니다. 매화꽃이 진 옆에서 모과꽃이 피고 앵두꽃이 핍니다. 모과꽃하고 앵두꽃이 지면 붓꽃하고 장미꽃이 펴요. 붓꽃하고 장미꽃이 질 즈음에는 초피꽃하고 후박꽃이 핍니다. 이 사이에서 찔레꽃이 가만히 피어나서 어느새 온통 하얀 꽃밭이 됩니다.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를 가만히 덮으며 생각을 기울입니다. 시인 신동호 님 아들은 아버지더러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 하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아들한테 ‘왜 나쁜’지 낱낱이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요? 아니면, 싯말에만 이렇게 적었을까요?


  우리 집 아이들이 아버지더러 “○○는 왜 나빠?” 하고 묻는다면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온누리에 나쁜 것(사람)은 없어.”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누리에 좋은 것(사람)도 없어.” 하고 덧붙여요. 나쁘다고 여긴 것(사람)이 어느새 좋다고 여길 만한 것(사람)으로 바뀌기도 하고, 좋다고 여긴 것(사람)이 어느새 나쁘다고 여길 만한 것(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좋고 나쁨에 앞서 그것(그 사람) 바탕에 어떤 숨결이 흐르는가를 읽고 싶어요. 좋은 나무도 나쁜 나무도 없이 모두 ‘나무’이고, 좋은 풀도 나쁜 풀도 없이 모두 ‘풀’이며,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이 모두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얘야, 네가 그릇을 떨어뜨려 깨뜨리면 네가 나쁜 아이일까?” “아니.” “아니지? 그냥 그릇을 떨어뜨려서 깨뜨렸을 뿐이야. 나쁜 사람은 따로 없어. 그저 그런 일을 했을 뿐이야. 나중에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왜 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면서 참말로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면 돼.”


  새 아침에 새 하루를 엽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아이들하고 나눕니다. 새로운 살림을 짓자고 새롭게 생각합니다. 냉면집 아저씨는 틀림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서 씩씩하게 새로운 마음을 품으리라 봅니다. 시인 아저씨도, 나도, 온누리 아이들도, 모두 마음자리에 새로운 꿈을 담아서 삶을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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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환 옮김 / 삼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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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6



달빛에 어린 매화꽃잎 같은 시를 읽다

―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

 에드거 앨런 포 글

 김정환 옮김

 삼인 펴냄, 2016.3.3. 12000원



  새벽에 일어나서 뒤꼍에 서는데 샛노란 달이 저쪽 하늘에 있습니다. 아주 동그란 보름달입니다. 구름이 제법 짙게 꼈으나 아주 동그란 보름달이 내뿜는 환한 빛이 몹시 짙습니다.


  달빛이 살며시 어리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뒤꼍에 서서 매화나무를 바라봅니다. 새봄에 잎보다 먼저 피어난 작고 어여쁜 꽃송이는 하나둘 떨어집니다. 마치 눈발처럼 날리는 꽃잎은 ‘꽃눈’이나 ‘눈꽃’이라고 할 만합니다. 꽃가루받이를 마친 꽃송이는 아쉬움 하나 남기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서 곱게 춤추면서 뒤꼍을 꽃잎밭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산 흙에서 내가 처음 들이쉬었다, 생명을: / 테를레이의 안개가, 흘렸다 / 밤마다 이슬을, 내 머리 위에. (타메를란)


네 영혼이 보니 그 자신 홀로일 게다 / 잿빛 묘석의 어두운 생각들 와중― / 어느 하나, 그 모든 무리 중, 엿보지 않는다 / 내 비밀의 시간을. (죽은 자 유령들)



  에드거 앨런 포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삼인,2016)을 읽으면서 삶이란 어떤 무늬나 결인가 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되짚습니다. 한국말로 옮기기 퍽 까다로웠겠구나 싶은 에드거 앨런 포 님 시를 읽으면서, ‘시 전집’이라고 하지만 모두 48꼭지에 140쪽 부피인 자그마한 시집을 읽으면서, 달빛이 어리면서 춤추듯이 떨어지는 매화꽃잎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시 한 자락은 달빛을 받으며 떨어지는 꽃잎과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 두 자락은 꽃잎이 가득 떨어진 밭자락을 꽃삽으로 파면서 노는 아이들 손놀림하고 같지 않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시 세 자락은 밥 한 그릇 맛나게 비우고는 새롭게 놀이를 찾아서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아이들 낯빛하고 같지 않을까 하고 되뇌어 봅니다.



아! 무엇이 백일몽 아니겠는가, / 그, 두 눈이 자기 주변 사물을 / 바라보는 그 광선이 / 과거로 돌려져 있는 사람한테? (꿈 (2))


소리가 좋아한다 여름밤 한껏 즐기는 것을: / 들어보라구 속삭임, 잿빛 황혼의, / 살그머니 스며들던, 귀, 에이라코에서. (알 아라프)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을 읽으면서 ‘한국말로 옮긴 글’ 말고 ‘영어로 적힌 글’이 무척 궁금합니다. ‘시 전집’이기도 하고, 시 갯수가 그리 많지 않다면, 또 한국말로 옮기기 무척 까다롭다고 한다면, 영어로도 함께 실어 놓으면 이 까다롭다고 하는 영시를 조금 더 새로우면서 깊게 돌아볼 만할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국말에서는 ‘:’라든지 ‘―’ 같은 기호를 곳곳에 넣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거든요. 글로 적힌 말인 시이기도 하기에, 어떠한 숨결과 넋으로 이렇게 온갖 기호를 수없이 넣고 글꼴도 바꾸어 가면서 시를 썼는가 하는 대목을 민낯(영어 원문)으로도 나란히 놓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한국말하고 서양말은 말짜임이 달라요. 그래서 서양말로 나온 시를 서양말 짜임새대로 옮기면, 이 영시를 한국사람이 읽다가 숨이 턱 막히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소리가 좋아한다 + 여름밤 한껏 즐기는 것을”이라든지 “들어보라구 속삭임 + 잿빛 황혼의”처럼 쓸 테지만, 한국말은 이러한 짜임새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말을 영어로 옮기면 어떤 꼴이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아야지 싶어요. 한국시를 영시로 옮길 적에 ‘한국말 짜임새’대로 옮길까요, 아니면 ‘영어 짜임새’대로 옮길까요? 낱말만 영어로 적으면 되는 한국시일까요, 아니면 낱말도 말투도 말결도 영어대로 적으면 마음으로 느껴서 읽을 수 있는 한국시가 될까요.



꺼졌다―꺼졌다 빛들―꺼졌다 모두! / 그리고, 각각의 떨리는 형태 위로. (정복자 벌레)


내가 대답했다: “이건 꿈꾸는 것에 불과해. / 우리 계속하자구 이 떨리는 빛으로! / 우리 멱감자구 이 수정의 빛으로! (울랄루메―발라드 하나)



  에드거 앨런 포라는 분은 1809년에 태어나 1849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길다고 하면 길 테지만, 짧다고 하면 아스라이 짧다고 할 만한 발자국입니다. 스물일곱 살 나이에 열세 살 사촌 여동생하고 짝을 지어서 살았다 하고, 열세 살 사촌 여동생은 열여덟 살 즈음부터 결핵을 앓아 몸져누웠다 하며, 에드거 앨런 포 님은 퍽 어릴 적부터 술에 기대어 살았다고 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에 흐르는 이녁 싯말은 모두 이녁 스스로 걸어온 길에서 하나하나 적바림한 이녁 삶이지 싶습니다. 눈물도 담고 웃음도 담고 괴로움도 담고 술내음도 담는구나 싶습니다. 환한 웃음도 담고 시커먼 눈물도 담아요. 죽음보다 괴로운 삶도 담으며, 술방울로 이 삶을 잊으려고 하는 몸부림도 담고요.



“좀체 우리가 볼 수 없지.” 말씀하신다 솔로몬 저능아 씨가. / “되다 만 생각을 가장 심오한 소네트에서 / 엉성한 것들 전부를 한목에 꿰뚫어 우리가 보잖나 즉시 / 손쉽기 나폴리 보닛을 통해 보는 것과도 같이― (수수께끼)


내가 애석한 것은 쓸쓸한 자들이 / 나보다 더, 사랑아, 행복해서 아니고 / 네가 슬퍼해서다 나의 운명, / 지나가는 자인 나의 그것을. (―에게 (2))



  새벽은 곧 저뭅니다. 바야흐로 아침입니다. 해님은 온누리를 골고루 비추면서 따스한 기운까지 골고루 베풉니다. 아픈 이한테도 튼튼한 이한테도 모두 똑같은 해님입니다. 어린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모두 똑같은 해님이에요.


  바람도 골고루 붑니다. 바람은 시골에만 불지 않아요. 바람은 서울에도 부산에도 고흥에도 익산에도 불어요. 바람은 한국에도 일본에도 미국에도 불지요. 이 지구라는 별에 사는 누구나 똑같은 해랑 바람을 먹으면서 살아요. 그리고, 해님이 지는 밤이 되면 누구나 똑같은 별빛을 받으면서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고요.



흐릿한 계곡들―그리고 그늘진 큰물― / 그리고 구름처럼 보이는 숲, / 그런데 그 형태를 우리가 발견할 수 없다 / 눈물, 온통 뚝뚝 흘러내리는 그것 때문에: / 엄청난 달들이 거기서 차고 이지러진다― (요정의 나라)



  달빛이 어리는 꽃잎 같은 시를 읽습니다. 수수께끼가 가득한 시를 읽습니다. 실마리를 찾을 길이 없다고 여기면서 헤매는 듯한 몸부림을 느끼면서 시를 읽습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아침밥을 차리려 합니다. 쌀을 씻어서 불리고, 국거리를 손질합니다. 마당에서 뜯은 풀을 다듬고, 찬찬히 솟는 해를 바라보면서 하루 일을 헤아립니다. 텃밭에 콩을 심기 앞서 갓을 솎아서 갓김치를 담아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밥을 짓고 김치를 담는 동안 아이들은 오늘 하루 새로운 놀이를 찾아서 마당이며 뒤꼍이며 홀가분하게 뛰고 달리겠지요.


  꿈을 꾸듯이 하루가 찾아오고, 꿈을 꾸는 사이에 하루가 저물어요. 이 하루를, 이 삶을, 이 살림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에드거 앨런 포 님은 이녁 스스로 “지나가는 자”라고 여깁니다. 아마 나도 이 삶을 지나가는 숨결 가운데 하나일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이 삶을 어떻게 지나갈 적에 즐거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오늘 하루가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즐거운 꿈으로 아로새길 수 있도록, 오늘 하루에 즐거운 노래가 흐를 수 있도록, 새삼스레 몸짓을 가다듬어 봅니다. 2016.3.2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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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입이 크다 - 교사 시인 박일환의 청소년시, 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시선 2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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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0



똑같은 교복 입혀도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 학교는 입이 크다

 박일환 글

 한티재 펴냄, 2014.7.14. 8000원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닙니다. 학교를 안 다녀도 얼마든지 삶을 배우고 살림을 익힐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가르치고, 주어진 틀에 맞추어 가르칩니다. 학교에서는 또래를 만날 수 있고, 선배와 후배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마음껏 뛰거나 놀거나 달리거나 웃거나 노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수험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수업 시간에 수업을 받지 않고 다른 공부를 하거나 논다면 딴짓을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도 다른 교과서를 펼쳐야 하고, 한창 숫자와 글씨에 푹 빠지다가도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에 나가야 하며, 운동장에서 뛰놀며 흐른 땀이 식지 않았는데 다시 옷을 갈아입으면서 온몸이 다시 땀으로 푹 절면서 얌전히 칠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사람한테 그리 걸맞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아이들이 사회에 잘 길들도록 돕는 구실을 한다고 느낍니다. 다시 말해서 학교는 사회에서 시키는 일을 말없이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길어올려서 새로운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곳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학교라 할 만해요.



선생님! / 시험 문제가 왜 그래요? / 시험지를 막 씹어 먹고 싶었어요! (어린 염소의 등극)


예나는 예쁘다 / 생각만 했을 뿐인데 / 입이 벙싯거려지는 것도 / 조건반사 때문일까? (조건반사)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박일환 님이 쓴 ‘청소년시’를 모은 《학교는 입이 크다》(한티재,2014)를 읽습니다. 박일환 님은 ‘어른시’도 ‘어린이시’도 아닌 ‘청소년시’를 일부러 썼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중·고등학교 푸름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삶을 노래한 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문학인 어른시는 여러 출판사에서 수없이 나오고, 어린이문학인 어린이시(동시)도 제법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지만, 막상 ‘어린이에서 푸름이 자리에 들어선 숨결’ 눈높이를 살피는 ‘청소년문학·청소년시’는 매우 드물어요.



별이 안 보인다고 투덜대자 별이 조용히 속삭였다 / 눈을 감아봐, 그러면 내가 보일 거야 (별은 숨어 있는 게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 여자가 말했다. / 예쁜 것도 죄가 되나요? // 텔레비전에 나오지 못하는 / 여자 친구가 말했다 / 나도 예뻐지고 싶어! (괜찮은 인간)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 사이인 아이들한테 따로 ‘푸름이(청소년)’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오늘날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푸름이’나 ‘청소년’이라는 이름보다는 ‘학생’이나 ‘수험생’이나 ‘입시생’이라는 이름을 훨씬 자주 듣습니다. ‘중1’부터 ‘고3’에 이르는 이름을 더더욱 자주 듣고요.


  이리하여, 학생이요 입시생이자 중1이거나 고3인 푸름이는 ‘시’나 ‘문학’이나 ‘책’보다 자습서와 문제집과 교과서가 가깝습니다.


  책방을 한번 둘러보셔요. 책방마다 아주 넓게 자리를 차지한 ‘책’은 바로 자습서와 문제집과 참고서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인기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자습서랑 문제집이랑 참고서예요. 오늘날 한국 푸름이는 자습서랑 문제집이랑 참고서하고 씨름을 해야 해요. 이러다 보니 중학교 교사 박일환 님은 따로 청소년시를 써서 이 아이들 넋에 고운 바람 한 줄기를 베풀어 주고 싶습니다.



할머니만 무릎이 시린 게 아녜요 / 겨울에 교실에 앉아 있어 봐요 / 무릎이 얼마나 시리다고요 (무릎담요)


엄마는 늘 /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하라는데 / 쓸 데 있는 생각은 어ㄸ너 걸까? (어느 날의 일기)



  청소년시집 《학교는 입이 크다》는 책이름처럼 ‘입이 큰’ 학교를 다룹니다. 자, 입이 큰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입이 큰 개구리 같은 곳일까요? 아니면 입이 큰 괴물 같은 곳일까요? 입이 큰 감옥 같은 곳일까요? 입이 큰 신나는 놀이터 같은 곳일까요?


  학교도 학교 나름이기 때문에, 슬기로운 교사가 아름다운 아이를 가르치는 배움터가 있습니다. 슬기롭지 못한 교사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윽박지르거나 모질게 다루는 감옥 비슷한 곳도 있어요. 오직 입시에 치우친 채 아이들이 햇볕 한 줌 못 쬐면서 책상맡에서 온 하루를 고분고분 보내야 하는 곳이 있지요.


  초·중·고등학교 가운데 혁신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생긴다 하더라도, 대학교에는 ‘혁신 대학교’가 없습니다. 공공기관이나 회사나 공장에서도 ‘혁신 공공기관’이 없지요. 부속품이 아닌 오롯한 한 사람으로 서서 즐겁게 일하는 보람을 누리면서 살림을 기쁘게 짓도록 북돋우는 배움터나 일터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까요.



똑같은 교복을 입혀 놓아도 우린 결코 똑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 선생님들도 잘 아시잖아요 (찔리실 겁니다)


책은 안 보고 거울만 보는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 선생님도 거울을 들여다보세요 / 거기 선생님 얼굴 비치죠? / 그래서 보는 거예요 /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신 / 선생님 말씀처럼 / 소중한 내가 잘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에요 (책보다 거울)



  아이들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혀도 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똑같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꾸며야 해도 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교과서를 손에 쥐도록 해도 이 다 다른 아이들은 마음속에 다 다른 꿈을 키웁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예쁜 아이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 만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른들 스스로 예쁜 눈썰미와 눈매와 눈길이 될 때에 비로소 아이들하고도 예쁜 삶과 살림과 사랑을 가르치면서 배울 만하지 않으랴 하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잘 치르도록 채찍질해야 하는 학교가 아니라, 서로 돕고 아끼면서 고운 동무님이나 이웃님이 되도록 이끄는 배움자리요 살림자리요 사랑자리요 꿈자리가 될 학교여야 하지 않으랴 싶어요.



세월호가 가라앉던 날 / 7교시에 방과후수업에 야자까지 / 정해진 일과는 빈틈이 없었다 / 어른들이 제일 먼저 달아난 선장을 욕하고 / 어른들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며 탄식하고 / 어른들이 대한민국이 함께 침몰했다며 분노하는 동안 / 우리는 교실 안에 잘 갇혀 있었다 (열일곱 나의 친구에게)


미확인 비행물체가 떴다 // 남들은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 나는 분명히 보았다 (UFO)



  배 한 척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마다 교실마다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아이들은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책상맡에 붙들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똑같은 제복’을 벗어던질 틈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소리치고 노래하고 달리고 뒹굴고 웃고 떠들면서 놀이를 누릴 겨를이 없습니다.


  왜 열네 살이 중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열세 살에 낫질을 익힐 수 없을까요? 왜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열여섯 살에 등짐을 익힐 수 없을까요? 왜 열아홉 살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할까요? 왜 열여덟 살에 아기를 돌보며 아끼는 손길을 익힐 수 없을까요?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몸과 마음이요, 다 다른 꿈과 사랑입니다. 똑같은 나이에 똑같이 뭘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만 ‘입이 크지’ 않습니다. 나라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모두 ‘입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고 모든 가르침(교육)을 교사한테 맡기는 어버이(학부모)도 ‘입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꿈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온누리에 아름다움이 넉넉히 퍼지면서 사랑스러움이 따사로이 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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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창비시선 367
민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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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3



쑥 캐서 버무리 빚어 고향동무 만나고픈 할배

―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민영 글

 창비 펴냄, 2013.9.20. 8000원



  비가 그친 봄은 한결 맑습니다. 바람도 볕도 더욱 싱그럽습니다. 아침 빨래를 마치고 마당을 내다보니 참새 세 마리가 서까래하고 빨랫줄 사이를 오갑니다. 마루문을 여니 이 참새들은 마당 가장자리 초피나무로 옮겨 앉습니다. 요 며칠 사이 늘 보는 참새입니다. 어쩌면 이 참새는 몇 해 앞서부터 겨울마다 우리 집 서까래에 깃들어 지내던 이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서까래에서 참새가 흔히 겨울나기를 하고 새끼를 까거든요.


  쑥이 돋고 매화꽃이 피며 동백꽃이 터지는 새로운 봄날입니다. 참새들은 서까래를 자꾸 드나드는데 어쩌면 또 알을 낳았을 수 있어요. 그리고 머잖아 제비가 이 땅에 돌아오면 처마 밑 둥지에 깃들 테지요. 올해에도 참새하고 제비가 우리 집 처마 밑이나 서까래 언저리에서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기다립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날아가는가? / 바람은 저 남쪽 쪽빛 바다에서 불어왔다가 / 아스라이 눈 덮인 저 북쪽 높은 산으로 날아가고, / 다시 발길을 돌려 남쪽에 있는 섬나라로 돌아온다. (바람의 길)



  1934년에 철원에서 태어난 뒤 네 살 무렵에 만주 간도성 화룡현으로 가서 살다가 1946년에 두만강을 건넌 뒤 남녘에 깃들어 여든 나이를 훌쩍 넘었다고 하는 시인 민영 님이 선보인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창비,2013)를 조용히 읽습니다. 쑥내음이 물씬 피어나는 곁으로 매화꽃내음도 어우러지는 봄날에 이 작은 시집을 고즈넉하게 읽습니다. 새벽부터 새소리를 반가이 들으면서 시집을 가만히 읽습니다. 오늘은 볕도 바람도 좋아서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시집을 즐거이 읽습니다.



땅에서 뽑아든 흙 묻은 손을 / 하늘 높이 들어 보이는 / 농부들의 기쁨을 아시는가? (격양가)


찬바람이 불어도 아이들은 / 강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 (겨울 강에서)



  여든 살이 넘은 할아버지 시인도 노래하지만, 아이들은 찬바람이 불어도 얼마든지 씩씩하게 놉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 살림이 가난해도 씩씩하게 놉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가 가멸찬 살림이어도 씩씩하게 놉니다. 어떤 자리 어떤 살림 어떤 나날이어도 아이들한테는 놀이가 있어서 하루를 새롭게 엽니다.


  그리고 시골지기는 새봄에 새롭게 흙을 만지면서 한 해를 열어요. 나라에서 농업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더라도 그예 살가이 흙을 만집니다. 해마다 시골에서 어린이하고 젊은이가 빠르게 도시로 떠나서 너무 고요하다 싶은 마을이 되어도 꿋꿋하게 흙을 만집니다. 따스한 볕에 싱그러운 바람이 흐르는 이 땅에서 알뜰살뜰 흙을 만집니다.



하모니카가 지나간다. / 야심한 시간 11시 35분 / 손님이라곤 없는 전동차 안에서 / 잘 있거나 나는 간다 / 이별의 말도 없이…… / 하모니카 소리가 지나간다. (소야곡)


여기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 육십년 전에 떠나온 / 고향 마을이 보인다. // 불에 타 허물어진 돌담 곁에 / 접시꽃 한 송이가 / 빨갛게 피어 잇다. // 얘들아, 다 어디 있니, / 밥은 먹었니, / 아프지는 않니? // 보고 싶구나! (비무장지대에서)



  할아버지 시인은 쑥을 캡니다. 할아버지 시인이 쑥을 캐면 이녁 곁님이 쑥버무리를 합니다. 봄날에 쑥을 캐는 할아버지 시인은 남북으로 갈리면서 다시 찾아갈 수 없도록 길이 막힌 옛 마을을 그립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쑥을 캐는데, 오늘 저곳에서도 쑥을 캘까 하고 헤아립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하는데, 오늘 저곳에서도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할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눈앞에서 마주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는 늘 도사리는 고향 마을입니다. 두 발로 찾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자리에는 늘 맴도는 고향 마을입니다.


  쑥도 접시꽃도 울타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더라도 꽃씨는 바람을 타고 가뿐히 울타리를 넘습니다. 아무리 두껍게 시멘트담을 세우더라도 풀씨는 바람에 얹히 사뿐히 시멘트담을 넘어요. 아무리 무시무시하게 쇠가시로 된 울타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총을 든 군인이 지켜서더라도 꽃씨랑 풀씨랑 나무씨는 모두 사뿐사뿐 이곳저곳 드나듭니다.



지난 4월의 어느 날 / 매지리로 간다니까 아내는 / 쑥을 캐 가져오라고 말했다. / 맷돌에 갈아서 체로 친 미분에 / 물에 씻은 봄쑥을 넣어 / 쑥버무리를 만들면 예전에 떠나온 / 고향 생각이 날 거라고 하면서. (매지리에서 쑥을 캐며)


이 양반아, / 나는 새벽에 나오면 밤늦게까지 / 이 쓸쓸한 간이역을 지키고 있다오. / 설마 당신이 나보다 더 / 힘들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기차를 잘못 내리고)



  쑥부침개를 먹고 싶다는 큰아이하고 쑥을 뜯으러 뒤꼍에 서는데, 마을 할매 한 분이 우리 집 뒤꼍에서 벌써 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쑥을 캐셨습니다. 할머니, 우리 집 뒤꼍 쑥은 우리가 뜯어서 먹으려고 그동안 고이 모셨는걸요? 말 없이 들어오셔서 이 쑥을 그렇게 샅샅이 캐시면 어쩌시나요.


  겨우내 기다리던 쑥이 얼마 안 남습니다. 그러나 남은 쑥은 새로 돋을 테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씨앗도 곧 새로 깨어나겠지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른 봄풀을 뜯기로 합니다. 갈퀴덩굴하고 살갈퀴하고 봄까지꽃하고 코딱지나물을 훑어서 풀부침개를 하자고 생각합니다. 쑥만 부침개로 맛나지 않으니까요. 쑥도 숱한 봄풀도 모두 반가우면서 맛난 봄밥이요 봄맛입니다. 삼월로 접어들었어도 북쪽은 많이 추워서 쑥이 안 돋았을는지 모르는데, 곧 북쪽 이웃들도 쑥내음을 맡고 손가락마다 쑥물이 들면서 맑고 환하면서 고운 봄바람을 마실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저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요?” / 하고 물었더니, / 싸리비로 마당을 쓸던 노스님이 / “목백일홍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목백일홍)


벌써 저 / 시끄럽게 떠드는 바깥세상에 / 나가지 않은 지도 석달이 지났다. (겨울 들판에서)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를 선보인 민영 님은 앞으로 새로운 시집을 더 선보이실 수 있을까요? 그리운 곳을 그리는 이야기도, 그리운 곳을 가지 못하는 채 일흔 해 가까이 살아온 이야기도, 이곳에서 새롭게 짓고 가꾼 살림하고 얽힌 이야기도, 여든 나이에 나무 이름을 새로 배우는 이야기도, 시끄러운 바깥세상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하루 이야기도, 모두 고즈넉하게 시 한 줄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얼어붙은 두 나라 사이에 모든 앙금이 풀리기를 빕니다. 차가운 마음이 부딪히면서 갈래갈래 찢긴 이곳과 저곳 사이에 고운 봄바람이 불면서 다 같이 봄잔치를 벌이고, 봄쑥노래를 부르며, 봄맞이 쑥버무리를 두레상에 올려서 막걸리 한 잔을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는 기쁜 삶을 할아버지 시인이 더없이 환한 웃음으로 지켜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시 한 줄이 예쁜 노래로 흐르는 시집을 더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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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이 쑤신다 책 읽는 어린이 연두잎 6
이상교 지음, 홍성지 그림 / 해와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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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9



아이처럼 신나게 뛰노는 어른이 되기를 빈다

― 좀이 쑤신다

 이상교 글

 홍성지 그림

 해와나무 펴냄, 2011.3.30. 8500원



  집 안팎을 드나들며 노는 우리 집 아이들은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오네. 밖에서 못 놀겠네.” 하고 한 마디를 합니다. 이러면서 집 안쪽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그림놀이를 하며 뛰기놀이와 잡기놀이와 숨바꼭질을 다 합니다. 옷장에도 숨고, 이불에도 숨어요. 이러다가 슬금슬금 집 바깥으로 나갑니다. 어느새 비옷을 챙겨 입고는 “비 맞으며 놀아야지.” 합니다. 얼마쯤 지난 뒤, 비옷을 벗어서 옷걸이에 꿰어 말리고는 헛간에서 우산을 꺼내어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놉니다. 바야흐로 빗물놀이입니다.


  아직 이른봄이라 날이 많이 따뜻하지는 않기에 ‘비 맞으며 놀기’까지는 하지 않는데,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노는 날씨가 되면 ‘비 오는 날에는 비 맞으며 놀기’로 바뀌어요. 세찬 비가 쏟아지면 세찬 비대로 맞으면서 놀고, 가랑비가 노래처럼 내리면 가랑비대로 맞으면서 입을 헤 벌리면서 빗물을 받아서 먹습니다.



툭, 투둑! // 빗방울은 씨앗이다. // 뭐든 / 돋아 낸다. (빗방울)


어린 뿌리 / 어린 줄기 / 어린 잎 / 어린 꽃망울 / 어린 열매…… / 어린 것은 다 예쁘다. (어린 것)



  이상교 님이 글을 쓰고, 홍성지 님이 그림을 그린 동시집 《좀이 쑤신다》(해와나무,2011)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 이름이기도 한 〈좀이 쑤신다〉를 보면 ‘밖에서 놀고 싶은 아이’ 마음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이 동시를 쓴 어른부터 도시에서 살고, 이 동시를 읽을 아이도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밖에서 놀지 못해 좀이 쑤신 삶’을 그리는구나 싶어요. 오늘날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지 못하거든요.


  첫째, 도시에 자동차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골목에서도 자동차 때문에 제대로 뛰놀지 못하고, 아파트에서도 손바닥만 한 놀이터를 빼고는 온통 자동차가 드나드는 길이에요. 둘째, 학원에 얽매이느라 힘겹습니다. 학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은 놀 겨를이 없고, 놀 동무를 만나기 어렵지요. 셋째, 놀이터도 마땅하지 않고 놀이동무하고 밖에서 뛰놀지 못하다 보니, 인터넷게임에 푹 빠집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흔히 인터넷게임에 사로잡혀서 못 헤어나온다고들 말하지만, 집 바깥에서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고단한 마음을 인터넷게임으로 풀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좀, 좀, 좀 / 좀이 쑤신다. // 밖으로 뛰어나가 / 놀고 싶어 / 좀이 쑤신다. (좀이 쑤신다)



  봄비가 내리는 봄날 저녁에 부엌에서 김치를 담급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마당하고 뒤꼍에서 갓을 솎았고, 갓을 함께 헹구었습니다. 소금물에 갓을 담가 놓은 뒤 양념을 마련했고, 이때에 큰아이는 마늘하고 생강을 찧는 일을 거들었어요. 아홉 살 큰아이가 마늘찧기랑 생강찧기를 거뜬히 도와주었기에 한결 수월하게 갓김치를 담글 수 있어요.


  소금물로 절인 갓잎에 양념을 고루 묻히면서 포개는 일은 제가 혼자서 합니다. 저녁밥을 다 차려서 먹인 뒤에 씩씩하게 갓김치를 담그는데, 이동안 두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글놀이도 하고 그림놀이도 합니다. 이러다가 노래도 부르지요.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는 사이 등허리 결린 줄 잊습니다. 나도 아이들 곁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양념 버무리기를 마무리짓습니다.



가을 해님이 / 샛노란 볕을 / 몇 가마니나 /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 놀란 나머지 / 은행나무 / 통째로 / 샛노랗게 물들었다. (샛노랗다)


베어진 나무가 / 흙바닥에 엎드려 / 잔다. // 흙의 가슴에 / 아기처럼 엎드려 / 잔다. (베어진 나무)



  동시집 《좀이 쑤신다》를 읽으면서 자꾸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좀처럼 놀지 못하는 고단한 이야기가 이 동시집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시집을 보아도 요즈음 아이들 모습은 엇비슷해요. ‘신나게 뛰노는 아이’ 삶을 그리는 동시를 요즈음 찾아 읽기는 퍽 어렵습니다. ‘거의 못 뛰노는 아이’가 얼마나 고단한가 하는 대목을 그리는 동시가 많아요. 놀이동무뿐 아니라 말동무조차 만나지 못하는 힘겨운 나날을 그리는 동시가 많아요. 학원과 입시와 학교와 시험과 숙제에 얽매인 아이들이 슬프고 아픈 모습을 그리는 동시가 많아요.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이러한 모습이라 할 테니, 동시를 쓰는 어른도 우리 사회 모습을 고스란히 그릴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신나게 뛰노는 아이’를 만나기가 어려우니, 어쩌면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만하니, ‘노는 웃음’을 그리는 동시는 좀처럼 태어나기 어렵다고 할 만하구나 싶어요.



학원을 새로 옮겨 / 아는 애 없어 속상했다. / 산더미 숙제에 쫓겨 / 이래저래 속상했다. / 짝과 말다툼으로 / 며칠 내리 속상했다. (손톱이 자랐다)



  나는 우리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놉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아주 조금도 안 쉬고 그야말로 개구지게 뛰어놉니다. 지치지도 않더군요. 이부자리에서까지 발을 구르면서 깔깔대며 놀아요. 놀이순이랑 놀이돌이를 재우자면 어버이인 나까지 아이들하고 지칠 대로 지쳐서 다 같이 곯아떨어지는 몸이 되도록 뛰놀고 일해야 하지요.


  봄비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들었다고 문득 눈을 뜹니다. 두 아이가 이불깃을 잘 여미었는가 살핍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녁에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부엌일을 마저 합니다. 설거지를 하고, 밥상을 훔칩니다. 양념으로 버무린 갓김치를 살피고, 새로운 아침에 어떤 밥을 지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 한 모금 마신 뒤 마당을 내다봅니다. 마을고양이가 야옹거리면서 우리 자전거 밑에 옹크린 모습을 바라봅니다. 비가 오니 처마 밑에 놓은 자전거 밑에 깃들어 비를 긋는 고양이들입니다. 자전거 밑에 두 마리, 헛간에 네 마리, 집 옆으로 두 마리, 연장 상자에 한 마리, 이밖에 나무 밑에도 보일러실 앞에도 수많은 고양이가 우리 집을 둘러쌉니다. 고양이가 잔뜩 모인 시골집이 되다 보니, 우리 집만큼은 쥐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둘레에서 개구리 소리가 잘 안 나던데 마을고양이가 개구리까지 잡아먹어서 씨가 마를 수 있겠군요. 며칠 앞서부터 마을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머잖아 밤마다 개구리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퍼지는 하루를 누리겠다고 느낍니다. 논마다 물이 가득 고여야 비로소 밤노래잔치가 펼쳐지겠지요.



우리 아파트 동네에 내린 / 눈은 / 얼마 가지 않아 / 질척질척 다 녹는데, // 시골 외가 마당에 내린 / 눈은 / 한참까지도 푸근푸근 / 녹지 않는다. (외갓집 눈)



  좀처럼 놀지 못해서 좀이 쑤시고 마는 도시 아이들 마음을 달래려는 동시집 《좀이 쑤시다》를 아이하고 함께 읽는 어른들이 ‘놀이하는 어른’ 마음으로 달라질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놀이하는 아이’를 사랑해 주면서, ‘놀이하는 어버이’가 되어 보기를, 이리하여 서로 즐겁게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살림을 지어 보기를 빌어 봅니다. 놀지 못해서 좀이 쑤시는 아이들은 사라지고, 신나게 놀아서 까무룩 곯아떨어지면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아이들이 새롭게 나타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아야 마을이 살고, 마을이 살 때에 온누리가 아름답게 살아나리라 생각해요. 2016.3.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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