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문예중앙시선 46
박지웅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시를 노래하는 말 263



‘빈 손가락’ 가득 사랑을 주고받아요

―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박지웅 글

 문예중앙 펴냄, 2016.10.1. 9000원



  시를 쓰는 박지웅 님은 세 권째 시집인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문예중앙,2016)를 선보이면서 이녁 마음자리에 오랫동안 꾹꾹 눌러 두던 이야기를 하나 드러냅니다. 책이름에 나오기도 한데, “빈 손가락” 이야기를 시로 써요.


  “빈 손가락”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예요. “빈 손가락”이란 빈 손가락입니다. 빈 손가락이라면 주먹에 손가락이 비었다는 뜻일까요? 네, 시를 쓰는 박지웅 님은 어릴 적부터 한손은 손가락이 비었다고 해요.



눈밭에 찍힌 손바닥이 늑대 발자국이다 / 나는 발 빠르게 손을 감춘다 // 손가락이 없으면 주먹도 없다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이유가 없다 한 팔로 싸우고 한 팔로 울었다 한 팔로 사랑을 붙들었다 (늑대의 발을 가졌다)


엄마는 쥐구멍이었다 / 나 살다가 궁지에 몰리면 / 언제나 줄달음치는 곳 (우리 엄마)



  손가락이 빈 손으로 눈밭에 찍은 자국을 보고 누가 “늑대 발자국”이라 말했을까요? “늑대 발자국”이라는 소리를 들은 박지웅 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런 말을 읊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빈 손가락으로 찍든 “찬 손가락”으로 찍든 모두 “사람 자국”입니다. 한 손가락이든 다섯 손가락이든 모두 “사람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이 비어서 “주먹도 없다”고 하는 박지웅 님은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까닭이 없었다고 해요. 싸울 까닭도 싸울 수도 없는 셈입니다. 주먹을 쥐는 힘이 없으니 싸울 힘이 없고, 싸울 힘이 없으니 저절로 평화입니다. 빈 주먹은 남을 때리지도 않고, 나를 때리지도 않습니다. 빈 주먹은 아귀힘이 아닌 너른 팔로 이웃이나 동무를 따스히 껴안는 손길이 됩니다.



어디선가 벌써 망가져 온 청년이 잔을 깨뜨리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 / 우리 모두 매번 놓치지 않았는가, 사랑을 / 한때 내 눈동자의 상속녀가 되고 싶다던 여자 / 여자가 떠난 뒤, 나는 꺾인 신발처럼 누구의 발에도 쉽게 허락되었다 (꿈에 단골집 하나 있다)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에 실린 〈꿈에 단골집 하나 있다〉를 읽다가 문득 내 어린 날을 떠올립니다.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마디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면서 내 어린 날을 조용히 되새깁니다.


  나는 혀가 짧은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혀가 짧은 몸으로 태어났기에 어릴 적부터 뭔 말만 했다 하면 말소리가 새거나 겹쳤어요. 마치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말마디끼리 감기기 일쑤였어요. 때로는 어버버 하고 말을 더듬기도 했어요.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말’을 하려 하지만, 막상 내 입에서는 ‘저런 말’이 튀어나오거나 혀가 꼬여서 말을 더듬습니다.


  어린 날, 동무들하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서 동무들이 조잘조잘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나도 한마디를 보태고 싶어서 입을 열어 혀를 놀립니다. 그러나, 아차차! 나는 혀짤배기 소리를 내면서 말을 더듬었고, 문득 둘레가 조용합니다. 동무들은 내가 혀짤배기인 줄 뻔히 압니다. 아마 텔레비전 같은 곳에서 익살꾼이 나와서 일부러 말더듬이 흉내를 내어 웃기려 했으면 다들 웃었을 텐데, 저희하고 함께 노는 동무가 즐겁게 읊은 말이 그만 ‘텔레비전 익살꾼이 일부러 웃기려고 할 적에 나오는 듯한 말씨’가 되었어요. 웃길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닌데 말이에요.


  머릿속에서 굴리던 말하고 다른 말이 혀끝에서 터져나왔구나 하고 느끼면 언제나 얼굴이 붉어집니다. 더 말을 잇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참 바보 같네 하고 생각하는데, 동무들은 아무도 웃지 않아요. 이러다가 누군가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하고 받아 주어요. 혀짤배기가 말을 더듬어도 따스히 품어 주었어요.



과자를 빼앗긴 아이가 울고 있다 그 옆에 술을 빼앗긴 어른이 울고 있다 그 옆에 장난감을 빼앗긴 막내가 울고 있다 그 옆에 한 달 만에 들어온 여자가 울고 있다 그 옆에 살이 숭숭 빠진 생선이 울고 있다 그 옆에 어떤 최후가 울고 있다 그 옆에 모든 옆이 와서 울고 있다 그 옆에 생글생글 눈 내리는 창가 그 옆에 밑 빠진 독처럼 앉은 하느님이 멀뚱멀뚱 하늘만 본다 (옆이 없다)



  “빈 손가락”으로 살아온 시인은 어떤 동무하고 이웃을 만났을까 하고 그려 봅니다. 손가락은 비록 ‘비었다’ 할지라도, 마음은 늘 넉넉하고 푸진 동무하고 이웃을 만나면서 오늘까지 살림을 지었으리라 하고 헤아려 봅니다.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에 흐르는 마음은 빈 손가락으로 꿈을 꾸고 사랑을 노래하며 삶을 어루만지고 싶은 숨결이지 싶어요. 눈밭에 사람 자국을 찍고, 마음밭에 사랑 자국을 찍으며, 온누리에 자그마한 이야기 자국을 찍고 싶은 몸짓이지 싶어요.



나는 갈대밭에 애인을 세우고 / 카메라에 흑백필름을 장전하고 있었다 // 찰칵, / 실패를 누를 때마다 애인의 입술은 뻣뻣하게 굳었다 / 미소를 지적하자 애인은 피곤한 듯 일어서고 / 돌탑에 올린 불안한 돌처럼 입술이 떨어졌다 / 급히 주워 올렸으나 이미 삐뚤어져 있었다 (물금역 필름)


오래도록 첫 줄을 쓰지 못했다 / 첫 줄을 쓰지 못해 날려버린 시들이 / 말하자면, 사월 철쭉만큼 흔하다 (습작)



  갈대밭에 선 사랑님은 사진기를 바라봅니다. “빈 손가락” 시인은 빈 손가락으로도 즐겁게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그런데 자꾸 ‘실패’를 합니다. 갈대밭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아무래도 추운 바람이 부는 철이었을 테지요. 찬바람을 흠씬 맞으면서 ‘예쁘게 찍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사랑님은 입술이 뻣뻣하게 굳었대요. 힘들기도 하고 춥기도 하겠지요.


  “빈 손가락” 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멋진 사진을 찍어서 두고두고 건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텐데, 시인하고 갈대밭 마실을 나온 사랑님은 다른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해요. 굳이 사진으로 안 찍어도 마음에 남는 삶이자 오늘이에요. 따로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오래오래 마음에 사랑이 흐를 수 있는 살림이자 오늘이에요.


  그날 그 갈대밭을 함께 거닐었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남아요. 그날 그 갈대밭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이야기는 오래오래 이어져요.



땅은 어둠이란 걸 몰랐다 / 원래 땅에는 오로지 땅뿐이었다 // 속을 파내자 땅에 눈이 생겼다 / 땅이 비로소 어둠을 본 것이다 (터널)



  빈 손가락 가득 사랑을 받습니다. 빈 손가락 가득 사랑을 줍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내려앉습니다. 빈 손가락에 바람이 내려앉습니다. 빈 손가락에 햇볕이 내려앉고, 달빛이 내려앉으며, 별빛도 꽃빛도 웃음빛도 노래빛도 내려앉아요. 모든 고운 숨결이 빈 손가락에 내려앉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이 빈 손가락을 거쳐 흐릅니다. 마음으로 보고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사랑이 빈 손가락에 사뿐히 내려앉다가 훨훨 하늘을 날아 온누리로 퍼집니다.


  눈을 감으면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모습은 손가락 갯수가 아닌 마음밭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따사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시 한 줄로 마음을 열고, 시 한 줄로 마음을 노래해요. 2016.11.3.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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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이 키우는 나무 시작시인선 87
김완하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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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58



바람 타고 놀아 보렴

― 허공이 키우는 나무

 김완하 글

 천년의시작 펴냄, 2007.9.5. 7000원



  꿈에서라면 얼마든지 바람을 타며 놀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자리에서마저 바람을 못 탈 수 있어요. 삶에서도 꿈에서도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생각은 엄두조차 못 낼 수 있어요. 그리고 삶에서나 꿈에서나 늘 바람을 타며 날아다니는 홀가분한 몸짓이 될 수 있어요.



나란히 선 두 그루 은행나무 / 서로 닿으려 팔을 뻗고 뻗어도 / 닿지 못하던 거리. / 비로소 하나 되어 누웠네 / 그늘 속에서 몸을 섞었네 (한쪽 어깨를 밀어 주네)


잠시 멈추었던 / 풀벌레들 다시 목청을 세워 / 숲 속을 한껏 돋운다 / 그때 수세미는 주렁주렁 / 수직으로 제 그리움을 매단다 / 박주가리 열매 속에는 / 가을볕이 꽉꽉 쟁여 있다 (가을 수목원)



  김완하 님이 빚은 시집 《허공이 키우는 나무》(천년의시작,2007)를 들여다봅니다. 삶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야기가 흐르는 시집입니다. 나무를 바라보고 숲을 바라봅니다. 도시를 바라보고 자동차를 바라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자전거를 바라보다가는, 아이를 바라보고 멧새 노랫소리를 바라봅니다.


  바라보려 한다면 하늘빛도 바람결도 바라볼 수 있어요. 바라보려 하지 않으면 하늘빛은커녕 바람결조차 못 느끼고 못 보고 말아요. 바라보려 하기에 사랑스러운 이웃하고 동무를 살가이 느끼며 마주해요. 바라보려 하지 않기에 우리 둘레에 이웃하고 동무가 살가이 있는 줄 못 알아채기 마련이에요.



아버지의 삼천리표 자전거, 장에서 돌아오며 짐받이는 항상 고등어자반 뻥튀기 호미 낫 농기구로 가득했다 어느 날 내 흰 고무신 사오기로 하고 아버지 밤늦도록 오지 않았다 아침에 깨보니 고무신 내 가슴에 안겨 온기로 따뜻해져 있었다 (미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기에 나무가 자랍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기에 아이들이 뛰놀면서 자랍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니 풀도 숲도 싱그럽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니 마을마다 고운 숨결이 퍼집니다.


  늦도록 저자마실을 하던 아버지가 새 고무신을 장만해 줍니다. 이 따스한 사랑을 받은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이녁 아이를 새롭게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넌지시 흐르는 사랑이고, 가만히 지켜보는 사랑입니다. 도시에서 부는 바람하고 시골에서 부는 바람이 언제나 똑같은 줄 느끼는 눈길이라면,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살림을 정갈하게 짓는 손길을 그릴 만합니다.



놀이터 미끄럼틀 옆 / 아이가 세워놓은 세발자전거 / 작은 바퀴 달리던 길 잠시 쉬는 사이 / 세상은 통째로 자전거 앞에 놓여 있다 (바퀴 앞에서)


뻐꾹새 소리 따라 걷는다 / 산 속 들어도 / 뻐꾹새 보이지 않고 / 소리만 환하게 산을 울린다 (산길)



  밤이 깊어 별이 밝습니다. 밤이 깊어도 전깃불이 환하면 별이 어둡습니다. 해가 높이 뜨며 풀잎하고 꽃잎이 기지개를 켜요. 해가 뜨고 지면서, 별이 돋고 저물면서, 하루가 흐르고 삶이 흐릅니다. 아이도 어른도 꽃도 나무도 모두 바람을 타면서 차츰차츰 자랍니다. 이 바람을 보기에, 이 바람을 사랑하기에, 이 바람을 온몸으로 마시기에,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같은 아름다운 넋으로 이 땅에서 이웃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2016.11.2.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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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꽃이 불편하다 창비시선 221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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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2



대궁밥 먹고 자라며 꽃이 된 시인

― 저 꽃이 불편하다

 박영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2.11.15.



  낫을 쥐어 억새를 끊습니다. 큰아이 손에 억새를 한 다발 안깁니다. 나도 억새를 한 다발 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서 억새는 눈부시도록 하얀 꽃씨를 터뜨립니다. 바람 따라 한들거리는 억새는 부드러우면서 해맑은 빛깔로 고개를 까딱여요.


  억새꽃씨를 쓰다듬고, 억새줄기를 만집니다. 끊은 억새를 들고 논둑길을 걷습니다. 밭자락 한쪽 흙으로 된 거님길에 억새를 곱게 깔아 놓습니다. 요새는 시골에서도 흙길이나 논둑길에 으레 시멘트를 덮지만, 나는 우리 보금자리에 시멘트를 덮고 싶지 않습니다. 애써 낫으로 억새를 끊어서 흙바닥에 깔아 놓습니다. 시멘트를 덮은 길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 넘어지면 무릎이나 낯이나 팔꿈치가 쉬 까지는데, 짚을 깔아 놓은 흙바닥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 넘어져서 살짝 긁히거나 까질 뿐, 또는 멀쩡하지요.


  가을 억새를 끊어 흙바닥을 덮고서 시집 한 권을 손에 쥡니다. 이제 이 땅에 없고 저 흙에 몸을 맡긴 옛 시인 한 사람을 그려 봅니다. 어느새 흙으로 돌아가서 온누리를 홀가분하게 지켜볼, 또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풀씨가 되어 온누리를 나긋나긋 바라볼 숨결을 헤아려 봅니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길)


이제 고개를 숙인다 온통 쇼핑몰이 되어 흘러가는 길 / 인파와 소란 속 / 무스탕을 걸치고 웃고 있는 네거리 현대백화점 / 마네킹 앞에서 // 맨주먹의 이력서를 쓰는 마음으로 / 그러나 몇번이고 고쳐써도 지워낼 것은 / 나밖에 없다는 듯이 /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인다)



  1958년에 태어난 박영근 님은 1984년에 첫 시집을 선보였고, 2002년에 다섯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를 선보입니다. 이녁은 2006년에 흙으로 돌아갔고, 2007년에 유고시집이 나옵니다. 첫 시집부터 다섯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또 유고시집에서도, 박영근 님이 노래하는 이야기에는 ‘취업공고판’하고 ‘공장’이라는 말마디가 곧잘 흐릅니다. 그리고 ‘꽃’이라는 말마디가 ‘어머니’하고 ‘나’ 사이에서 가만히 어우러져요.


  전북 부안이라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뒤, 인천이나 서울 같은 도시에서 공장 어귀에서 땀을 흘린 한 사람은 기름때와 땀과 일옷 사이에서 꽃을 그립니다. 어릴 적부터 늘 곁에 있던 꽃을 되새깁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기름밥을 먹던 나날에는 도무지 만날 길이 없던 꽃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꽃을 문득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서 어쩐지 “저 꽃이 불편하다”고 한 마디 내뱉습니다.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 길에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흰 빛)



  날마다 먹는 밥 한 그릇에 담긴 쌀알은 나락이 맺은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꽃이 핍니다. 그냥 손쉽게 사다 먹는 쌀이 아니라, 이 땅 저 너른 들에서 자란 나락을 시골지기가 손으로든 기계로든 벤 뒤에 햇볕이나 건조기에 말리기에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쌀입니다. 꽃이 지고서 맺는 열매인 쌀이요, 그러니까 열매를 먹는다고 할 적에는 꽃을 먹는다는 소리도 되고, 꽃으로 피어나는 씨앗을 먹는다는 소리도 되어요.


  시인 박영근 님은 흙을 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기름밥을 먹는 어른으로 살림을 지었습니다. 이른바 ‘노동자 시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녁은 노동자 시인이면서도 이녁이 어릴 적에 언제나 곁에서 누리던 시골집을, 논밭을, 들을, 바다를 멧자락을 되새깁니다. 공장 담벼락만 바라보지 않고, 공장 담벼락 한쪽 귀퉁이에서 조그맣게 고개를 내미는 들꽃을 함께 바라봅니다. 골목에서도, 아파트 꽃밭에서도,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아무리 도시가 커지고 높은 건물이 올라서더라도 어디에선가 반드시 고개를 내미는 들꽃을 으레 바라봅니다.



때로 어떤 시간은 아무것도 떠나보내지 않는다 / 그곳을 떠나서도 내 안에서 / 봄이면 어김없이 판자울타리 개굴창에 개나리꽃들 피어올랐고, / 먼 데서 샛강물이 밤새 흘려보내던 뜨개기 같은 소식들 (문장수업)



  흙으로 돌아간 시인 한 분은 왜 “저 꽃이 불편하다”고 노래해야 했을까요. 그냥 저 꽃하고 함께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굳이 도시에 남아서 도시 노동자로 있기보다는, 이녁이 나고 자란 어린 날 너르고 따사로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서 흙을 사랑하고 “저 꽃이 사랑스럽다”고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 (꽃들)



  참으로 많은 시골사람이 도시로 와서 도시사람으로 바뀝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90퍼센트가 훨씬 웃도는 숫자가 도시에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 도시사람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만 거슬러 올라가도, 또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모두 ‘시골사람’ 뿌리이기 마련입니다. 몸은 도시에 있되 마음은 아직 시골하고 이어진 삶이라고 할까요. 몸은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 있어도, 마음은 꽃이나 풀이나 나무 곁에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시인 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 시인 한 사람은, 꽃을 바라보면서 마냥 꽃내음을 누리거나 즐기지 못합니다. 자꾸만 “저 꽃이 불편하다”는 마음이고 맙니다. 이녁 뿌리인 흙을 밟거나 만지지 못하는 삶으로 공장 담벼락에 서서, 이녁 몸통이던 흙을 가꾸거나 일구지 못하는 살림으로 아파트 꽃밭 앞에 서서, “저 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는지 망설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돌아보면 / 옛집 마당가엔 지금인 듯 싸락눈이 붐벼 / 개오동나무는 하얗게 머리를 풀고, / 애비의 대궁밥을 기다리던 소년이 / 애써 고개를 들어 / 아잇적 어머니 얼굴을 더듬는다 // 문득 세월이 잿더미 속에 묻어둔 불씨를 찾아 / 엄동에 샙겨밥을 짓고, / 집강아지 한 마리 / 정짓간 환한 아궁이 불 곁에서 / 잠이 든다 (문득 세월이 잿더미 속에서)



  애비가 물려줄 ‘대궁밥’을 기다리던 앳되고 가녀린 아이를 그려 봅니다. 노동자 시인으로 숨을 거둔 어른이 아닌, 아버지 대궁밥을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없이 가디리던 그 앳되고 가녀린 아이를 그려 봅니다.


  그 아이네 그 시골 아버지는 이녁 아이가 ‘대궁밥을 기다리는’ 줄, ‘침을 삼키면서 바라는’ 줄 뻔히 알았을 테지요. 그 시골 아버지는 이녁 배가 차지 못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일부러 ‘밥맛 없다’면서 밥그릇을 물리며 대궁밥을 잔뜩 남겼을 테지요.


  대궁밥을 먹고 자란 가녀린 아이가 이웃을 따사로이 품는 마음을 시 한 줄로 노래하는 씩씩한 일꾼으로 살아냈습니다. 대궁밥을 기다리던 작은 아이가 이웃을 넉넉히 보듬으려는 사랑을 시 한 줄로 빚어내는 고운 숨결로 살아냈습니다.


  입으로는, 글로는 “저 꽃이 불편하다”고 읊었을지라도, 속으로는, 마음으로는, 또 깊게 우러나는 사랑으로는 “저 꽃이 곱다”고 웃음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꽃이 어머니 같다”라고 웃기도 하고, “저 꽃이 누이 같다”라며 웃기도 하고, “저 꽃이 울 아버지 같다”라며 웃기도 했겠지요. 2016.10.2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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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들다 애지시선 22
박두규 지음 / 애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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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59



도시에서 살더라도 시골내음을 먹는다

― 숲에 들다

 박두규 글

 애지 펴냄, 2008.9.19. 8000원



  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노래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거나 부를 노래를 쓴다기보다는, 마음으로 우러나서 사랑해 줄 노래를 쓰는 일이라고 할까요. 오늘 하루를 살아내면서 이 삶에서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끄는 노래를 쓰는 일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시를 읽는다고 할 적에는 노래를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은 노래를 읽는구나 싶어요. 오직 내 마음을 헤아리면서, 나 스스로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마음을 달래고 보듬고 사랑할 수 있는 기쁨을 되새기도록 북돋우는 노래를 읽는 일이지 싶습니다.



비로소 어머니가 입혀주신 배냇저고리를 벗고 싶었다 / 그대는 이렇게 늘 일상으로 건너오건만 / 나도 그렇게 그대의 일상으로 건너가고 있는지 /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놓치지는 않는지 / 내가 놓친 물고기 한 마리는 / 푸른 하늘을 헤엄쳐 그대에게 이를 수 있는지 (어디에서 왔나, 이 향기)



  박두규 님이 빚은 시집 《숲에 들다》(애지,2008)를 읽습니다. 시집 이름처럼 숲에 드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르는 시집입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시골이나 숲에서 살지 않으나, 늘 숲을 그리면서 숲마실을 다니거나 멧길을 오르면서 이녁 마음으로 젖어드는 숲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는 시집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며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서 사다 먹습니다. 곡식이나 열매도, 고기도 양념도, 국수나 빵도 무척 손쉽게 널리 온갖 것을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도시를 보면 수많은 가게가 줄을 짓는데, 막상 그 가게에서 손수 키우거나 심어서 얻은 곡식이나 열매나 고기나 양념이나 국수나 빵을 팔지는 못합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나요. 한국 시골이든 다른 나라 시골이든, 시골에서 땅을 갈고 흙을 만지며 숲바람을 쐬는 곳에서 태어나는 먹을거리예요.



그렇게 허물을 벗고 / 단 한 번의 해가 오로지 나에게로 올 것을 믿는다 / 나는 달이 뜨는 그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에 들다)


어느 바람 부는 날, 때죽나무 하얀 꽃그늘에 앉아 / 내 안에 가두었던 사람들도 훨훨 날려 보내고 / 그렇게 그리움의 허물도 벗고 / 숲의 적막을 나는 흰점나비 한 마리 따라가며 / 두려움도 없이 길을 잃어야 한다 (늘 숲을 걷고 있어야 한다)



  시인 박두규 님은 숲이나 시골에서 살지 않으나 으레 숲이나 시골을 거니는 마음이 되어 시를 씁니다. 왜 굳이 도시에서 살며 숲을 노래하는 시를 쓰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이러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시에서 산다 하더라도, 높직한 아파트에서 산다 하더라도,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밥은 숲이나 시골에서 태어나요. 도시에 살더라도 누구나 ‘숲을 먹’고 ‘시골을 먹’어요.


  게다가 물 한 모금도 숲이나 시골에서 비롯하지요. 상수도를 놓고 수돗물을 튼다고 하더라도 숲이나 시골에서 흐르는 물을 댐에 가두어서 마셔요. 페트병에 담긴 샘물은 깊은 두메나 바다에서 길어올린 맑은 물이에요. 도시 한복판에 돼지우리나 소우리가 있지 않아요. 모두 시골에 있는 돼지우리나 소우리예요.


  이러다 보니, 우리는 시골에서 살아도 시골내음을 먹고 도시에서 살아도 시골내음을 먹어요. 저절로 숲이나 시골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고, 저절로 숲이나 시골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겠구나 싶어요.



가을을 맞이하는 이파리들 / 그 마음들은 어떨까 / 어떤 색으로든 / 자신의 색깔을 결정지어야 하고 /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을 (이 가을에)


하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 우리도 이젠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되어 / 새벽안개에 젖은 시인의 취한 목소리도 /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잠자리에 들어와 눕는다 (시인의 전화)



  가을에 나락이 노랗게 익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누렇게 물듭니다. 가을 열매가 빨갛게 익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빨갛게 물듭니다. 노랗게도 빨갛게도 익는 숨결이고, 노랗게도 빨갛게도 물드는 숲입니다. 봄이랑 여름에 받은 햇볕은 풀잎과 나뭇잎을 짙푸르게 물들이더니, 가을에 이르면 햇볕은 풀잎과 나뭇잎이 노랗거나 붉게 물들도록 바꾸어 주어요.


  사람도 가을에는 노란 마음이나 붉은 마음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사람도 가을에는 노란 열매나 붉은 열매처럼 마음 가득 넉넉하거나 사랑스러운 꿈을 채울 수 있을까요?


  《숲에 들다》를 빚은 박두규 님은 ‘이제 이 가을에 저마다 내 빛깔을 골라서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이제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된 이녁 모습을 되새기면서 이녁 스스로뿐 아니라 이웃도 한결 따사롭고 너그러이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 만하다고 노래해요.



그동안 10원이라도 더 싼 주유소 찾아다니느라 고생했다 / 대여섯 장의 카드에 포인트 적립하느라 수고했다 / 여기저기 눈치 보며 발맞추어 사느라 애썼다 / 하지만 사월도 비 개인 눈부신 날에 / 더는 견딜 수 없어 그대를 떠난다 (도시 하야식)



  비바람에 풀이 눕습니다. 삽차가 밟아 풀이 죽습니다. 그러나 풀씨는 이 땅에 고요히 깃들어 새롭게 깨어날 때를 기다립니다. 어느 한때 비바람은 풀을 눕혀서 풀잎은 땅바닥을 기듯이 겨우 목숨을 잇다가 숨을 거두기도 하지만, 또 삽차가 밟고 뒤엎어서 풀은 뿌리가 뽑혀 죽기도 하지만, 풀포기가 내놓은 아주 자그마한 풀씨는 땅속에 깃든 채 오래도록 잠을 자요. 다시 깨어나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햇볕을 먹을 나날을 꿈꾸어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시골내음을 먹기에 언제나 시골내음 같은 마음을 일으킬 수 있지 싶습니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숲에서 비롯한 물과 바람을 마시기에 늘 숲내음 같은 넋으로 기운을 낼 만하지 싶습니다.


  몸이 비록 숲에 들지 않더라도 마음은 늘 숲에 들 수 있습니다. 몸은 비록 갇힌 자리에 있더라도 마음은 늘 홀가분한 숨결로 춤출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스스로 즐겁게 지으려는 마음으로 시 한 줄을 쓰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스스로 기쁘게 가꾸려는 마음으로 시 한 줄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가을에 가을내음을 머금으면서 맺은 씨앗은 겨울을 나고 다시 봄이 찾아오면 기지개를 활짝 켜고 일어날 수 있겠지요. 잘 여문 씨앗 하나를 가슴에 품으며 시집 한 권 읽습니다. 2016.10.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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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의 나날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2
이승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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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50



벽을 헐어 다리를 놓고 싶어 노래해요

― 감시와 처벌의 나날

 이승하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6.5.16. 8000원



  시집 《감시와 처벌의 나날》(실천문학사,2016)을 읽습니다. 2016년에 나온 시집은 이름부터 “감시와 처벌” 이야기를 드러냅니다. 2010년대에서 2020년대로 흐르는 오늘날은 1960∼70년대처럼, 또는 1980∼90년대처럼 사람들을 무시무시하게 짓누르거나 다그치지는 않는다고 할 만합니다. 언뜻 보면 평화로우면서 민주가 흐르고 자유롭기도 한 사회라고 여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물대포에 맞아서 죽는 사람이 있으며, 삶터를 빼앗기면서 죽는 사람이 있고, 고단한 삶을 이기지 못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벽 저쪽에 있는 자들의 울음을 / 벽 이쪽에 있는 우리는 / 들을 수 없다 (벽)


닭들이 철망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 세상 궁금하다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다 / 층층이 실려 있는 수많은 닭 / 죽으러 가는 중인지도 모른 채 / 하늘 올려다보는 닭 땅 내려다보는 닭 / 옆 차선 내 얼굴도 보고 / 도리도리 까닥까닥 고갯짓이 재미있다 (아우슈비츠 행 열차)



  시집 《감시와 처벌의 나날》을 쓴 이승하 님은 벽 저쪽하고 이쪽 이야기를 적습니다. 벽 저쪽에서 우는 이들이 있는데, 벽 이쪽에 있는 이들은 그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가 될 텐데, 벽 이쪽에 있는 이들이 하는 말을 벽 저쪽에 있는 이들은 못 듣겠지요. 벽 저쪽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벽 이쪽에 있는 사람은 도무지 모를 테고요. 거꾸로 벽 이쪽에 사는 사람들이 짓는 살림을 벽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도 모를 만해요.


  죽음으로 가는 줄 모르는 채 철망이 가득한 짐차에 실리면서 고개를 내밀며 바깥을 구경하는 닭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철망이 가득한 짐차조차 타 보지 못한 채, 햇볕도 햇빛도 햇살도 한 번 누려 보지 못한 채 알만 낳다가 죽는 닭도 있어요. 알에서 깨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되지만 곧장 죽음으로 날아가서 사람들 밥상에 오르는 닭도 있지요.



아무도 구경 오지 않는 썰렁한 시화전 / 작품들 강당 한 구석에 어색하게 서 있다 / 어디로 갈까 어디에 처박혀 있다 어떻게 버려질까 // 그래도 꿈이 있구나 바리스타가 되고 쉐프가 되고 / 그래,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구나 (소년원에 가서 시화전을 보다)



  닭장에 갇힌 채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닭하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우리들 삶은 얼마나 다르거나 같다고 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2020년대를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 사회는 참말로 ‘감시’가 없으며 ‘처벌’이 없다고 할 만한가 하고 돌아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가 물결이 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여길 만할까 궁금합니다.


  시인은 묻고 또 묻습니다. 이러다가 시인은 그예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벽 저쪽하고 벽 이쪽이 서로 막혔기 때문이에요. 저쪽하고 이쪽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저쪽도 이쪽도 없이 서로 마음껏 오가거나 넘나들면서 어깨동무하는 다리가 놓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듯이 시인 한 사람이 시를 적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아이들 꿈을 옮겨서 적습니다. 요리사도 되고 커피도 내려 보고 싶은 아이들 꿈을 듣고서 가만히 시 한 줄로 옮겨서 적습니다. 그리고 시인네 누이 이야기를 조용히 적습니다.



내 사랑 내 자랑아 돌아가보렴 / 어린 시절 우리는 만화가였다 / 재미있는 것뿐인 세상 / 구름을 보고 있으면 구름으로 변하는 세상/ 달을 보고 있으면 달을 따라 흘러가는 세상 / 세상은 그때, / 눈물 속에서도 아름다웠다 (누이의 초상 2)



  벽을 헐어 다리를 놓고 싶은 시인은 중앙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일한다고 합니다. 이녁이 2016년에 선보인 시집은 2016년 가을에 천상병귀천문학대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눈물 속에서도 아름다웠다는 누이를 그리는 시 한 줄은 벽이 아닌 다리를 꿈꿉니다. 그지없이 착한 눈망울로 오늘도 밥 한 그릇을 고이 받는 누이를 바라보는 시 두 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숨결로 거듭날 수 있는 꿈길을 노래하려고 합니다.



때 되어 밥 주면 밥을 먹고 / 때 되어 약 주면 약을 먹고 / 한없이 선량해진 누이 /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으니 /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니 / 네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병동은 천국인가 (별유천지비인간)



  벽을 높이 올린들 느긋하지 않습니다. 벽을 높이 올린 다음에 병조각을 촘촘히 박는들 걱정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병조각 벽으로도 모자라 경호원을 두거나 보안시설을 놓는다 해서 근심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총을 갖추고 탱크를 두며 미사일을 거머쥔다고 해서 평화로울 수 없어요.


  들에서 일하는 시골지기는 맨몸에 맨발이기 일쑤입니다. 들에서 일하는 시골지기는 낫을 쥐어 풀을 벨지언정 총을 들어 누구를 쏠 일이 없습니다. 이 가을에 들에서 나락을 베는 시골지기는 아무런 무기가 없이, 아니 오로지 넉넉한 마음으로 즐거운 가을걷이를 꿈꾸면서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쐽니다.


  시골에는 군대가 덧없어요. 논이나 밭을 지키는 군대란 없어요. 서울이나 부산을 지킨다는 군대이고, 청와대나 핵발전소를 지킨다는 군대이지요. 시골 논밭에 보안시설을 세우는 시골사람은 없어요. 햇볕이 드나들고 바람이 드나들며 풀벌레하고 멧새가 홀가분하게 드나드는 들이요 시골이요 마을입니다. 이곳은 전쟁무기 없이 언제나 너그러우면서 평화롭습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지금, 차단되어 있다 / 세상의 구둣발 소리는 모두 / 미행하는 이의 구둣발 소리 같다고 // 지금, 세상의 하고많은 눈이 / 그대 그림자를 뒤쫓고 있다 (탈옥수의 하루)



  작은 시인 한 사람이 노래하는 ‘다리 놓기’는 바로 시골사람다운 시골스러운 꿈이리라 생각해요. 감시와 처벌로 그악스럽게 억누르는 거짓스러운 평화가 아니라, 사랑과 웃음으로 어깨동무하면서 노래할 수 있는 참다운 평화를 바라는 꿈이 시 한 줄로 태어나지 싶어요.


  슬프게 죽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기에 시를 씁니다. 기쁘게 노래하는 이웃하고 손을 잡고 싶어서 시를 읽습니다. 안타깝게 죽는 사람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시를 씁니다.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신나는 나라를 꿈꾸면서 시를 읽습니다. 2016.10.4.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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