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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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2



성노동자 곁에서 아픔을 받아쓴 이야기

― 이연주 시전집 1953-1992

 이연주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11.2. 13500원



  1953년에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서, 1992년에 숨을 거둔 이연주 님이 있습니다. 이녁은 1985년부터 ‘풀밭’이라는 시 동인으로 뛰었고, 1989년에 《월간문학》에 신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1991년에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냈고, 1993년에 유고 시집 《속죄양, 유다》가 나왔다고 해요. 그리고 2016년에 《이연주 시전집 1953-1992》(최측의농간)이 나옵니다.


  《이연주 시전집》을 읽으면서 ‘아프니까 아프다고 쓴다’라는 글월이 문득 떠오릅니다. 누가 이런 글을 썼는지 떠오르지는 않으나, 이 시집은 참으로 이 말이 잘 맞아떨어진다고 느낍니다. 시를 쓴 이연주 님 스스로 더없이 마음이 아프기에 이 아픔을 시로 삭여내고, 이연주 님이 이녁 삶자리에서 마주하는 이웃들 살림이 그지없이 아프기에 이 아픔을 고스란히 시로 그려냅니다.



가보라 하더구만, 끊어진 길 어귀에서 / 그래, / 내 갔지. / 어허, 어둡고 / 천지사방 막혀 / 갈퀴진 길, 벌건 살 뻐드러진 험한 / 내 갔던 길. (길)


바느질감을 내려놓으시며 어머니, 긴 한숨이 차고 슬프다. / 나는 시계를 본다. / 왜 이렇게 어수선한지 모르겠군요, 날 좀 / 내버려둬요. / 가족을 버리겠다는 거냐? / 가족이 나를 필요로 하진 않아요, 벌써 오래된 일이잖아요. / 그건 네가 환상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야. / 이제라도 뜻을 바꾸면 행복해질 게다. / 행복? 그래요, 행복 …… (지리한 대화)



  맑게 웃으며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으레 ‘아이들한테서 맑고 즐거운 기운’을 받는다고 말해요. 맑은 웃음을 받고 즐거운 놀이를 저절로 물려받는다고 하지요. 아이는 어른한테서 배우지만, 이때에는 어른이 아이한테서 배운다고 할 만해요.


  아파서 앓고, 괴로워서 끙끙거리는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으레 ‘아픈 이웃한테서 아픔을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 아픔을 이어받으면서 ‘아픈 이웃이 홀로 짊어질 무게를 나누어’ 준다고 할까요.


  기쁨은 나누면 곱이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토막이 된다고 해요. 《이연주 시전집》에 깃든 싯말은 하나하나 ‘이웃 슬픔을 반토막을 내려는 노래’요, 때로는 ‘이웃 슬픔을 몽땅 도려내고 싶은 노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렇게 살 바엔, 너는 왜 사느냐고 물었던 / 사내도 있었다. / 이렇게 살 바엔― /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 쥐새끼들이 천장을 갉아댄다. (매음녀 1)


검진실, 이층 계단을 오르며 / 그녀의 마르고 주린 손가락들은 호주머니 속에서 /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아 꼬물거린다. / 한때는 검은 머리칼 찰지던 그녀, (매음녀 4)



  시를 쓴 이연주 님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기지촌 성노동자를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간호사 자리에서 바라본 성노동자 삶을 시로 옮기면서 이연주 님은 고스란히 ‘성노동자 눈길하고 마음’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웃 아픔을 시로 쓰며 내 아픔이 됩’니다. 마음이 아픈 채 시를 쓰다 보니 ‘아프니까 아프다고 쓴다’를 넘어섭니다. 이 아픔은 ‘시를 읽는 사람’한테도 시나브로 스며듭니다.



신문을 찢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다가 / 몇 군데 전화를 걸다가 / 건어포를 우물우물 깨물다가 / 생맥주 한 조끼를 클클클 마시다가 / 개 같은 날씨, 당한 거야, 그래 / 사는 게 음모라는 걸 몰랐으니 / 중얼거리다가 (그렇게, 그저 그렇게)


잠에서 깨어보니 내가 없다 / 위층집 하수구가 꾸르륵거렸다 / 음악을 크게 틀었다 / 꾸르륵 소리를 틀어막았다 / 음악소리로 꾸르륵 소리나 틀어막는 / 조연급으로 사는 게 나는 내 마음에 든다 / 잠에서 깨어보니, 그런데 / 사라진 나는 어디로 갔을까? (성자의 권리·8)



  신문을 찢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던 시인은 조용히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생맥주 한 조끼를 마시다가 날씨 탓을 하며 온누리는 온통 꿍꿍이라고 중얼거리던 시인은 말없이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위층집 하수구 소리를 틀어막으려고 노래를 크게 틀던 시인은 어느새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스물 몇 해 만에 새로운 시집으로 우리 곁에 다시 찾아온 시인은 아무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녁이 이웃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껴안던 아픔에 서린 목소리는 고스란히 들을 수 있습니다. 아픈 목소리로 가득한 시집을 읽자니 내 마음도 함께 아픕니다. 아프니까 아프다고 말할밖에 없는데, 이 아픔이 이제는 하나둘 녹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 괴로움이 앞으로는 찬찬히 스러질 수 있기를 빌어요.


  아픔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기를 빌어요. 슬픔이 웃음으로 바뀔 수 있기를 빌어요. 괴로움이 노래로 바뀔 수 있기를 빌어요. 이리하여 이 땅에서 삶을 가꾸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따사로운 나라를 새롭게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2016.11.2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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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내가 살게 삶창시선 46
김정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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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1



요로케 알기 옹삭한 것이 시다냐?

― 국수는 내가 살게

 김정원 글

 삶창 펴냄, 2016.9.5. 8000원



  교사로 일하는 김정원 님이 쓴 시집 《국수는 내가 살게》(삶창,2016)를 읽습니다. 교사로 일하기 때문에 대학교를 코앞에 놓고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앞날이 까마득하다고 여기는 아이들 마음을 달래야 하고, 아이들 마음을 달래다가 김정원 님 스스로 예전에 이녁이 아이로 살던 나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시 한 줄로 옮깁니다.



허기진 길손이라도 불쑥 찾아올까봐 / 저녁마다 초가 아랫목 솜이불 밑에 / 따뜻한 밥 한 그릇 묻어두시던 어머니 (까치밥)


우리 마을 / 큰 느티나무가 쓰러졌다 / 그 아래서 그의 이야기에 / 아이들이 당나귀, 노루귀 같은 / 귀를 쫑긋쫑긋 세우고 / 밤낮으로 푹 빠졌던 / 도서관이 불탔다 (정자나무)



  정자나무 한 그루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 난 뒤 시를 쓸 수 있던 모습을 되새깁니다. 시인 스스로 정자나무 한 그루를 ‘그냥 나무’가 아닌 ‘어릴 적 이야기가 깃든 터전’으로 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시로 옮길 수 있을 테지요. 정자나무 한 그루는 ‘그냥 나무’를 넘어서 ‘도서관’으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기에, 시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시를 쓸 수 있을 테지요.



9월 수능 모의고사가 끝나고 /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 진로 고민을 삼키지 못해 속 앓는 아이와 / 속 풀기 위해 영산강 상류 뚝방에 올라 / 담양 진우네 국숫집에서 / 얼얼한 비빔국수를 시켜 먹는다 (국수는 내가 살게)



  수많은 아이들이 대입을 앞둔 모의고사를 치르면서 “진로 고민을 삼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점수가 잘 나오면 잘 나오는 대로 걱정이요, 점수가 잘 안 나오면 잘 안 나오는 대로 근심이겠지요. 교사로서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는 말이란 ‘어느 대학교 어느 학과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찾아보자’는 대목을 넘어서기 어려우리라 느껴요.


  그래도 교사인 시인은 아이를 이끌고 국숫집에 갔다고 해요. 국수 한 그릇을 사 주면서 마음을 달래 주려 했다고 해요. 아마 ‘한 반에 100명이 웃돌던’ 예전이라면 이런 일은 꿈조차 못 꾸었으리라 느껴요. 한 반 100명이 아닌 50명이라 하더라도 교사 한 사람이 모든 아이들을 달래거나 다독이기 어렵겠지요.


  아무튼 대입을 앞둔 아이는 ‘선생님이 사 준 국수 한 그릇’에 천천히 마음을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시인인 교사도 덩달아 마음이 놓이고, 둘은 주거니받거니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해요. 국수 한 그릇 때문이라기보다, ‘나(아이)한테 마음을 기울이면서 시간을 써 주는 어른(교사)’이 있다는 대목 때문에 그 아이는 틀림없이 새롭게 기운을 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빠, 내가 왜 만화책 훔치던 버릇을 고친 줄 알아?” // 아버지는 조용히 그의 눈만 바라보았다 // “십계명 때문도, 벌칙 때문도 아니고, 뺨이 아파서도 아니야. 아빠의 눈물을 보고 마음먹은 거야.” (아빠의 눈물)



  스스로 마음을 열어 다가서기에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서로 마음을 주고받지 못합니다. 십계명도 벌칙도 뺨따귀도 아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대요. 그러나 아이는 제 아버지가 흘린 눈물을 보고는 마음을 움직였대요. 아버지는 스스로 못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아니 아버지는 뺨따귀를 때리고 나서야 아이가 마음을 움직였다고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아이는 “아버지가 흘린 눈물”을 보고서 마음을 움직였다고 털어놓았대요.



아버지가 펼쳐보시더니 / …당최 무신 말인지 모르것다야. 요로케 알기 옹삭한 것이 시다냐? / 하셨다 (받아쓰기)


당찬 할머니가 서슴없이 말했다. “기사 양반도 항꾼에 타고 왔응께 절반은 내야 경우에 맞지라우, 앙 그려?” 운전사는 언덕길을 올라 현관 안까지 함박보다 큰 누런 호박을 날라죽고서도 할머니의 큰딸에게 만 원을 더 달라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더치페이)



  시집 《국수는 내가 살게》는 대단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시인이자 교사인 김정원 님 스스로 ‘미처 마음을 열지 못했을 적’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샘솟지 못했구나 하고 느낀 삶이 고스란히 시 한 줄로 드러납니다. 이러다가 ‘아하 이렇게 마음을 열며 서로 만났네 하고 깨달을 적’에는 온갖 이야기가 샘솟았다고 알아차린 삶이 차근차근 시 두 줄로 나타납니다.


  시인을 낳아 돌본 아버지는 흙만 만지고 살았다는데, 시인이 어릴 적에 그 아버지한테 ‘시 자랑’을 하려고 보여준 글을 이녁 아버지가 읽고서 투박하게 대꾸해 주던 말마디를 어른이자 교사로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마음으로 또렷이 되새기면서 시 석 줄로 옮깁니다. “알기 옹삭한” 시가 아니라, 알기 좋고 재미나며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고 신나며 멋들어진 춤사위랑 노래가 흐르는 살림을 꿈꾸면서 시 넉 줄을 빚어요.


  참말로 그렇지라. 알기 옹삭하게 써서야 무슨 시가 되겠어라? 항꾼에 손 맞잡는 마음이 될 적에 비로소 시가 되지 않겠어라? 2016.11.2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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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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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0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니 사과꽃 핍니다

― 사월 바다

 도종환 글

 창비 펴냄, 2016.10.21. 8000원



  교사와 교수와 국회의원이라는 길을 걷는 동안 시인이라는 길을 놓지 않는 도종환 님이 《사월 바다》(창비,2016)라는 시집을 내놓습니다. 시집 《사월 바다》에는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아오는 동안 내내 아프고 고단한 나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적바림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너무 일찍 이 땅을 떠나고 만 형하고 누나를 그리는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흐르고, 사월에 바다에 깊이 빠져 다시 살아나오지 못한 아이들 넋을 달래고 싶은 이야기가 시 두 줄로 흐릅니다.


  시를 쓴 도종환 님은 아픈 이웃을 바라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아프다 보니 몸까지 덩달아 아픕니다. 몸이 덩달아 아프니 마음은 새삼스레 더 아프고, 이 아픈 마음으로 자꾸 몸이 아프고 또 아프면서 ‘아픈 이야기’를 시로 털어놓으려 합니다.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 사과꽃 피었습니다 /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 하얀 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사과꽃)


남쪽에선 태풍이 올라오는데 / 상사화 꽃대 하나가 쑥 올라왔다 / 자줏빛 꽃봉오리 두 개도 따라 올라왔다 / 겁도 없다 (상사화)



  왜 이렇게 아픈가 하고 생각하며 한숨을 짓는데, 아픈 이웃만 보이던 시인 눈에 ‘새로 돋는 꽃’이 하나둘 나타납니다. 추위에도 비바람에도 지지 않는 꽃을 하나둘 봅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이 씩씩하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자꾸자꾸 만납니다. 이러면서 아픔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돌아봅니다.


  철 따라 피는 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잘린 가지에서도 새 잎하고 꽃이 돋을 뿐 아니라, 모진 비바람이 찾아와도 아랑곳하지 않도 새로운 잎하고 꽃이 돋는 풀하고 나무를 찬찬히 바라봅니다.



둘째 형은 총에 맞아 사슴처럼 쓰러졌고 / 누나는 아이를 낳은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 허약하여 늘 뒤처지던 나를 살려낸 건 누구일까 / 누나는 털실로 스웨터를 짜는 일을 잘했는데 그래서 / 방 여기저기 색색의 털실 뭉치들이 굴러다녔는데 / 그 실보다 가늘고 긴 세월 동안 / 눈물의 끈으로 나를 묶어 끌고 다닌 이는 누구일까 (슬픔의 현)



  사월에 바닷물에 잠긴 아이들을 떠올리는 시인은 가슴이 촉촉히 젖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젖어드는 사람은 시인 한 사람뿐이 아닐 테지요. 수많은 사람들은 가슴이 촉촉히 젖어들었을 테며, 그저 눈물짓지만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쥡니다.


  물결은 찰랑찰랑 가볍게 일다가 어느새 너을처럼 크게 일어 ‘십일월 바다’를 이루어요. 푸른지붕을 이은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을 둘러싼 작은 촛불이 우렁찬 너울이 되어 한목소리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를 외칩니다.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 떨어져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아온 날은 /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다시 아침)


교황님과 독대할 순 없어도 / 하느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고요 덕이다 / 수입의 십분의 일을 꼬박꼬박 바치지는 못하지만 / 대신 내 생의 십일조를 바치고 싶다 (십일조)



  바람 한 줄기가 되려는 마음을 모아 시를 쓴다고 합니다. 햇볕 한 줌이 되려는 숨결을 모아 시를 쓴다고 해요. 비 한 방울이 되려는 뜻을 모아 시를 쓴다고 하며, “교황을 만날” 수는 없어도 “하느님을 만날” 수는 있구나 하고 날마다 느끼면서 시를 쓴다고 해요.


  시집 《사월 바다》를 읽는 사람도 바람 한 줄기를 함께 느낍니다. 햇볕 한 줌도, 비 한 방울도,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깃든 고요하고 아름다운 넋을 함께 느낍니다. 눈물이 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웃음을 새로 짓고 싶은 꿈을 키우면서 시 한 줄을 읽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 나무 의자에 / 군복을 입은 파르스름한 아들과 / 중년의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 함께 음악을 듣고 있다 / 버스가 오고 /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차에 오르고 나면 (귀대)



  시인 도종환 님은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빗자루로 방을 쓴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아온 날”은 집으로 돌아와 고요히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고 해요.


  나도 이 시집을 읽다가 “내 말소리”와 “둘레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모습”을 가만히 그리면서 아침에 비질을 해 봅니다. 오늘은 고구마를 잘 씻고 손질해서 감자랑 달걀을 함께 큰 냄비에 담아 삶아 봅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비질을 하고, 아이들하고 함께 고구마를 손질하며, 아이들하고 함께 냄비에 불을 올립니다. 곧 고구마도 감자도 달걀도 다 익을 테지요. 곧 아이들은 호호 불면서 뜨거운 김을 쐬며 고구마랑 감자를 누릴 테고요.


  번쩍거리는 겉치레가 아닌 수수한 삶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되기에 비로소 시를 한 줄 쓸 수 있다는 도종환 님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시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노래는 늘 우리 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부를 노래와 슬픔을 달래는 노래 모두 우리가 스스로 짓는다고 느낍니다.


  군대에서 휴가를 마치고 다시 군대로 돌아가야 하는 “파르스름한 아들”은 머잖아 그 군대를 마치고 어머니 품으로 따사로이 돌아가겠지요. 아들하고 어머니가 조용하면서 애틋하게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느긋하면서 아름답게 하루를 누릴 기쁜 모습을 살며시 그려 봅니다. 2016.11.13.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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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문신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2
박경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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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7



시골 할매 손길을 노래하는 시 한 줄

― 벚꽃 문신

 박경희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2.9.26. 8000원



  글을 쓸 적에는 ‘글쓰기’라고 합니다. 글쓰기를 한자말로 옮기면 ‘작문’쯤 됩니다. 시를 쓰면 ‘시쓰기’입니다. 시쓰기를 한자말로 옮기면 ‘시작’쯤 됩니다.


  시쓰기를 쉽지 않다고 여긴다면, 시를 쓰는 분들이 ‘글쓰기’처럼 ‘시쓰기’라고 하는 쉬운 말을 좀처럼 안 쓰고 ‘시작’이라는 한자말을 무척 널리 쓰는 탓도 제법 있지 싶습니다. ‘글’이라고 해도 여느 사람들은 쉬 다가서지 못하곤 하는데 ‘문학’이라고 하면 여느 사람은 넘보기 어려운 울타리라고 여겨요. 게다가 ‘문학비평’에서 흐르는 말은 몹시 어렵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간밤 꿈이 하도 뒤숭숭하여 길가 돌멩이 채이듯 가로거치는 / 새끼들한테 전화 돌리고 찬물에 밥 말아 싱건지 올려 / 바들거리며 뜬 밥 한술 / 괜스레 장독대에 엎어놓은 시루도 뒤집어보고 / 아귀 맞지 않은 부엌문 툭툭, 차본다 (꿈)


밭 가생이만 살살 긁다가 / 화장실 간다고 들어가면 깜깜무소식 / 삼십 분 일하고 두 시간 쉬고 / 전화 오면 삼십 분 수다 / …… / 주둥이는 신작로 버스 댕기는 곳까지 / 길게 나와 있어 무슨 말을 해도 / 쇠 귓구멍에 경 읽기 / 이래도 흥! 저래도 흥! / 그게 누구냐고 물으니, // 너야! 너! (건달 농부)



  충청도 보령에서 살며 시를 쓰고 시골 아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하는 박경희 님이 선보인 시집 《벚꽃 문신》(실천문학사,2012)을 읽으면서 시쓰기란 얼마나 쉽거나 어려운가 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 ‘늙은 아버지하고 어머니 꾸지람’은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하는 ‘시집 안 가는 가시내’ 모습을 푸근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밭 한 자락을 내주었더니 일다운 일은 안 하고 맨 놀기만 하고 이러면서도 “주둥이는 신작로 버스 댕기는 곳까지 길게” 나왔다고 하는 박경희 님이라고 한답니다. 이 말은 이녁 아버지가 이녁한테 들려준 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시골에서 늙은 두 어버이하고 살면서 늙은 두 어버이가 박경희 님한테 들려주는 말을 고스란히 옮겨서 ‘시쓰기’를 한 셈입니다. 머릿속에서 굴린 시가 아니라, 몸뚱이에서 태어난 시입니다. 머리로 뚝딱거리듯이 꿰어맞춘 시가 아니라, 삶이 뚝뚝 묻어나는 시예요.



마흔이 다 된 게 / 밥물도 맞출 줄 모르느냐고 / 고두밥도 모자라 쌀이 씹힌다고 / 국수는 오래 삶아야 속까지 익지 / 예산 국수 공장에서 금방 뽑아 왔느냐고 / 시금치나물은 살짝 익혀야지 / 흐물흐물해서 어디 씹히기나 하겠느냐고 (퉁박꽃)



  시집 《벚꽃 문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골사람 말씨랑 이야기가 흐릅니다. 시골 할배 이야기가 흐르고, 시골 할매 이야기가 흐릅니다. 시쓰기를 한 분은 박경희 님이지만, 곰곰이 따지면 ‘시골 할배’하고 ‘시골 할매’가 ‘입으로 쓴 시’를 박경희 님이 ‘손으로 옮겨적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시골 할배하고 할매는 대수롭지 않게 ‘입으로 노래를 하듯이 시를 쓰신’ 셈이요, 박경희 님은 이런 ‘시골노래’를 귀여겨듣고 좋아하고 사랑해 주면서 새로운 시를 일군 셈이에요.



엄니가 그냥 두란다 / 일 년 곡식 잘도 갉아먹어 / 그리 속을 썩이더니 / 비누까지 갉아먹던 주둥이 붉은 / 고얀 놈인지 년인지 / 하여튼 맞다고 건져내지 말라고 / 재차 말에 탑을 쌓는다 / 찍찍, 비누 거품으로 올라오는 소리 /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잠시 광에 다녀오던 중 / 뜰채로 쥐를 건져 멀리 가 놓아준 엄니 / 툭툭, 묻은 물기를 털며 / 늘어진 젖퉁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 너도 시집가 애새끼 나보면 / 알 거라고, 해 가는 곳으로 / 고개를 개우뚱 돌리는 (해바라기)



  어쩌다가 쥐 한 마리가 어느 구멍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대요. 늘 곡식을 갉아먹었으니 잘된 셈이라고 늙은 어머니가 한 말씀 하셨답니다. 그런데 늙은 어머니는 이 쥐를 조용히 건져서 살려 주었대요. 가만히 쥐를 들여다보니 ‘새끼를 밴 어미 쥐’였기에, 이 ‘새끼 밴 어미 쥐’가 그냥 죽는 꼴을 볼 수 없었대요.


  잔잔히 흐르는 삶이 차분하게 새로운 이야기 한 자락으로 깨어납니다. 조용히 이어지는 살림이 어느새 올망졸망 아기자기한 새로운 노래 한 마디로 태어납니다. 고즈넉하게 짓는 사랑이 하나둘 어여쁜 가락을 입고서 즐거운 시 한 줄로 거듭납니다.



머위를 잘라 / 바구니에 담자 // 세 살 된 조카 서현이가 다가와 / 양손에 하나씩 쥔다 // ‘나비야, 나비야’ // 머위 잎이 팔랑거리며 / 꽃잔디에 앉는다 (나비)



  시쓰기는 안 어렵다고 느낍니다. 박경희 님이 보령 시골마을에서 길어올리는 시골노래를 읽다 보면, 그러니까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맛깔스러운 ‘시읽기’를 가만가만 누리다 보면, 시읽기도 시쓰기도 참으로 수수하고 투박하네 하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참 맛깔스러운 이야기나 노래가 바로 시 한 줄이겠네 하고 느낍니다.


  세 살 조카가 머위 잎사귀로 나비 놀이를 하듯이, 마흔 살 넘은 ‘시골 가시내’ 박경희 님은 시골스러운 이야기밭을 일구고, 이야기놀이를 하며, 이야기꿈을 짓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시를 들려줍니다. 우리 삶이 바로 시 한 줄이라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우리가 스스로 짓는 사랑이 언제나 곱게 시로 피어날 수 있다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2016.11.11.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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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고혜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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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5



추위에 지지 않는 민들레 같은 중남미 역사

― 모두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글

 고혜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6.8.5. 22000원



  민들레가 꽃을 피우는 자리를 가만히 살펴봅니다. 겨울 추위가 닥칠 무렵부터 민들레는 아주 조그맣게 잎을 내밉니다. 한겨울에도 어느새 잎을 제법 넓게 내놓아요. 이러다가 겨우내 눈을 맞고 추위에 떨기도 하지만, 일월하고 이월이 지나면 외려 더 푸르게 빛나고, 삼월 즈음부터 꽃대를 올려 사월에도 오월에도 유월까지도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곤 합니다.


  십일월로 접어든 이즈음 우리 집 뒤꼍 한쪽에서 잎을 제법 넓게 벌린 흰민들레를 바라보면서 《모두의 노래》(문학과지성사,2016)라는 시집을 생각합니다. 파블로 네루다 님이 빚은 이 시집은 칠레라는 나라뿐 아니라, 중남미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기나긴 삶과 발자국과 사람 이야기를 다룹니다. 시 한 줄로 중남미 역사를 아로새겨요.



비오비오 강아 내게 말하려무나. / 내 입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은 / 바로 너의 말들이다. 너는 내게 / 말을 주었고, 비와 나뭇잎이 / 엉켜진 밤의 노래를 주었다 (35쪽)



  민들레는 뿌리가 깊기로 이름이 높습니다. 민들레 줄기를 꺾어도, 누군가 군홧발로 민들레잎을 짓이겨도, 깊이 박은 뿌리는 씩씩하게 다시 줄기를 올리고 잎을 내놓아요. 밟히고 또 밟혀도 민들레는 사그라들지 않아요.


  어쩌면 밟히면 밟힐수록 더욱 기운을 내는 민들레일 수 있어요. 이처럼 중남미 사람들 발자국도 ‘서양 제국주의 군대’ 군홧발에 짓밟히고 짓이기면서도 꺾이거나 시들거나 주눅들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할 만해요. 총칼에 아파하고, 총칼에 스러지기도 하며, 총칼에 눈물젖기도 하지만, 모진 추위를 이기고 하얗게 꽃을 피우는 민들레마냥 다시 웃음꽃으로 일어서는 사람이 바로 ‘민중’이라고 할까요.



코르테스에게는 고향이 없다. 차가운 번개. / 갑옷 속에 죽은 심장을 가진 사내. / “폐하, 옥토와 / 금 박힌 신전이 / 인디오의 손에 있나이다.” (80쪽)


그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칭했다. / 클럽에서는 서로 훈장을 수여하고 / 역사책을 써 나갔다. / 의회는 칭찬 일색이었고, / 그 후에는 땅, 법 / 가장 좋은 길, 공기, / 대학, 구두를 / 나눠 가졌다. (289쪽)



  시집 《모두의 노래》는 책이름처럼 “모든 이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누구나 부르는 노래”입니다. 너랑 내가 서로 이웃이자 동무가 되어 부르는 노래입니다. 꺾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꺾지도 않는 따사로운 손길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살가이 어깨를 겯으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작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땅에 뿌리박은 민들레 꽃송이처럼, 이 땅에 뿌리박은 사람들이 곱고 정갈하게 가꾸는 보금자리에서 피어나는 노래입니다.



형편없이 살았습니다. 쓰러져가는 집에 / 또다시 찾아온 배고픈 시절, 선생님. / 우리가 월급 1패소만 올려달라고 / 모이면, 선생님. / 경찰은 몽둥이, 불, 붉은 바람에, / 구타까지 했지요 / 그래서 저는 직장에서 / 해고되었습니다. (437쪽)


“어머니, 그분은 우리와 / 같은 가난한 분이에요. 그분은 우리의 / 헐벗은 삶을 조롱하지도, 비웃지도 않아요. / 그분은 그런 생활을 치켜세우고, 보호하세요.” /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그렇다면 / 오늘부터 이 집은 그분의 집이다.” (492쪽)



  외교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삶을 지은 파블로 네루다 님은 ‘이웃’을 바로 곁에 둡니다. 저기 권력자나 벼슬아치 곁에 이웃을 두지 않아요. 흙을 두 손으로 만지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어요. 기름밥을 먹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어요. 지붕이 낮은 집에서 옹기종기 살림을 가꾸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어요.


  이리하여 시집 《모두의 노래》는 중남미 사람들이 서로서로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평화를 바라는 노래요, 민주와 평등을 바라는 노래입니다. 기쁨과 웃음을 바라는 노래요, 사랑과 아름다움을 바라는 노래예요.



영원한 젊은이, 시골 사람, / 밀과 봄의 씨앗이 넘치는 사람, / 순수한 광물처럼 주름지고 어두운 존재, / 너의 갑옷을 올려줄 시간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 (556쪽)


내 노래의 영역은 인간의 / 공통 책, 열린 빵이다. / 어떤 때 그 불을 모아 / 대지의 배에 다시 한 번 / 그 불꽃을, 그 잎을 심으리라. // 다시 이 말이 태어날 것이다. / 어쩌면 다른 시절에는 고통이 없이, / 내 노래에 검은 식물을 붙이는 / 불순한 실도 없이, / 다시 한 번 저 높은 곳에서 내 마음은 / 불타며 별에 부딪치며 타오를 것이다. (696쪽)



  권력자는 두 손에 권력을 거머쥐려 하면서, 이 권력으로 더 센 권력을 드높이려 합니다. 더 센 권력으로는 더 많은 돈을 가로채려 합니다. 더 많은 돈을 가로챈 뒤에는 더 으리으리한 이름을 드날리려 합니다.


  칠레뿐 아니라 중남미에 한때 들어섰던 ‘독재 권력자’는 ‘독재를 찬미하는 교과서’를 써서 그 나라 아이들한테 억지로 가르치려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뜬금없는 국정 역사교과서’로 말썽이 생겨요.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교과서를 쓸 수 있어요. 국정교과서가 나쁠 까닭은 없어요. 그렇지만 ‘흙을 만지는 수수하고 작은 사람들 눈길에서 평화롭게 사랑을 가꾸려는 살림을 노래하려는 이야기’를 담는 교과서가 아니라면, 그만 독재 권력에 기울어지고 말기 일쑤예요.


  바람을 먹고 한결 새하얀 민들레꽃처럼 겨울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더욱 씩씩한 사람들 이야기가 《모두의 노래》에 흐릅니다. 겨울에도 햇볕 한 줌을 받으며 푸르게 잎을 내놓는 민들레처럼 이 겨울에 포근히 어깨동무를 하는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들 이야기가 마치 꽃처럼 흰꽃처럼 들꽃처럼 도란도란 피어나는 《모두의 노래》입니다. 2016.11.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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