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창비시선 214
김용택 지음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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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9



시와 배롱나무

― 나무

 김용택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2.2.25.



  전라도라는 시골로 삶자리를 옮겨서 지내지 않았어도 배롱나무를 볼 일은 으레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 식구가 전라남도 고흥군으로 옮겨서 조그마한 마을에 조용히 깃들면서 늘 배롱나무를 만나면서 여러모로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도시에서나 다른 고장에서는 이 나무를 두고 ‘백일홍나무’라든지 ‘목백일홍’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마을이나 고장에서는 ‘백일홍’ 같은 이름을 안 씁니다. 도시에서 찾아온 손님이 ‘백일홍’ 꽃송이가 참 곱네요 하고 말을 여쭈면, 마을 분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듣기 일쑤입니다. 나이가 제법 있는 분들은 ‘배롱나무’라는 이름뿐 아니라 ‘간지럼나무’라는 이름도 즐겨씁니다.



봄꽃들이 지는 날, 너의 글을 읽는다. 땅위에 떨어져 있던 흰 꽃잎들이 다시 나무로 후루루 날아가 붙는다. (올페)



  김용택 님 시집 《나무》(창작과비평사,2002)를 읽으면서 나무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를 헤아리고, 우리 마을에서 자라는 나무를 헤아립니다. 이웃 여러 마을이나 우리 고장에서 자라는 나무도 곰곰이 헤아립니다.


  고흥 읍내로 가 보면 큰길에 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늘이 드리우는 나무조차 없습니다. 남녘은 여름에 불볕이요 봄가을에도 땡볕이 꽤 센데, 그늘을 드리울 만한 나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할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들에 나락을 심고 밭에 남새를 심으니 그늘을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마을 둘레에 있으면 나락이나 깨나 고추를 말리기 어렵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나락을 논에 볏가리를 쌓아서 말렸습니다. 더욱이 예전에는 나무를 땔감으로 삼았으니 나무를 함부로 다루는 일이 있을 수 없고, 마을 둘레에는 ‘숲정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을 만큼 고운 숲을 이루기 마련이었어요.



어머니는 동이 가득 남실거리는 물동이를 이고 서서 나를 불렀습니다 / 용태가아, 애기 배 고프겄다 / 용태가아, 밥 안 묵을래 / 저 건너 강기슭에 / 산그늘이 막 닿고 있었습니다 / 강 건너 밭을 다 갈아엎은 아버지는 그때쯤 / 쟁기 지고 큰 소를 앞세우고 강을 건너 돌아왔습니다 (이 소 받아라, 박수근)



  나무가 있는 마을하고 나무가 없는 마을은 사뭇 다릅니다. 나무가 있는 마을에는 마을사람뿐 아니라 길손이나 나그네도 다리쉼을 할 만한 곳이 있기 마련입니다. 나무가 없는 마을에는 마을사람도 길손도 나그네도 다리쉼을 할 만한 곳이 없기 마련입니다.


  높다란 건물만 빼곡하게 선 도시에서는 그야말로 쉴 곳이 없습니다. 돈을 치르고 들어가야 하는 찻집이나 밥집이 되어야 비로소 쉴 수 있으나, 돈이 없고서야 이러한 곳에 들어갈 수도 있고 느긋하게 있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가 잘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는 풀밭이나 평상이라면,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마음껏 뛰놀 수 있습니다. 나무가 없고 자동차와 건물만 빽빽한 도시에서는 어른도 느긋하게 쉴 자리가 없으며, 아이는 아무 데에서나 뛰거나 달리지 못합니다.



고향산천을 막무가내로 뜯어고치는 건설의 포크레인 소리, 여기저기 엄청나게 파뒤집어 쌓아놓은 흙더미. 아, 아, 하루라도 좋다 건설 없는 평화로움 속을 나는 거닐고 싶다. 정말 우린 왜 사는가? (세한도)



  시집 《나무》에는 삽차 이야기가 곧잘 나옵니다. 삽차가 고향마을 들과 내와 숲을 망가뜨리는 이야기가 곧잘 나옵니다.


  삽차를 모는 일꾼은 위에서 시키니까 삽차를 몰밖에 없습니다. 삽차를 몰도록 시키는 웃사람은 언제나 ‘개발·발전’을 외칩니다. 그런데, 웃사람이 외치는 개발이랑 발전은 늘 ‘시골이랑 숲을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려’서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새로운 도시를 일으키거나 공장을 늘리는’ 모습입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손을 뻗어 다른 나뭇잎을 건드리며 / 서로 신비로워서 깜짝깜짝 놀라는 저 몸짓들을 좀 보라지 / 어, 저 오리나무 아래 연보라색 아기붓꽃 보아 / 고사리도 손을 쪽 폈구나 두릅잎도 피고, 찔레순도 자랐네 / 너는 둥글레 싹이구나 캄캄한 땅 속에서 얼마나 천천히 솟았기에 (숲)



  무화과밭에 가 보면, 무화과나무 가지를 철사로 단단히 감아서 땅바닥에 붙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알을 따기 좋도록 한다고도 하고, 무화과나무는 가지를 삭둑 잘려야 더 굵은 알을 맺는다고도 합니다. 능금나무도 배나무도 모두 앉은뱅이나무이기 일쑤입니다. 포도나무는 열 해 즈음 포도를 맺으면 잘 맺는 셈이라고 합니다.


  백 해는 우습고 천 해는 가볍게 산다고 하는 나무인데,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발전과 개발을 외치는 흐름으로는 나무 한 그루가 백 해는커녕 쉰 해나 서른 해조차 못 삽니다. 천 해를 살면서 넉넉히 모든 사람과 짐승과 벌레한테 나누어 줄 열매인데, 사람들끼리 더 많이 거두어서 더 많이 팔고 더 많이 쓴다고 하는 발전논리와 개발논리에 휩쓸려서 나무를 괴롭힐 뿐입니다.



가을비 그친 강물이 곱다 / 잎이 다 진 강가 나무 아래로 다희가 책가방 메고 혼자 집에 가는데, 그 많은 서울 사람들을 다 지우고 문재는, 양말을 벗어 옆에다 두고 인수봉을 바라보며 혼자 술 먹는단다. (맨발)



  여름이 저무는 들녘이 곱습니다. 가을로 들어서는 하늘이 곱습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부는 바람이 곱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곱습니다. 소나무이든 방울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감나무이든, 어느 나무이든 모두 곱습니다.


  우리 마을 어귀를 밝히는 배롱나무도 곱고, 우리 집 마당에서 의젓하고 씩씩하게 크는 후박나무도 곱습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나무한테 인사하면서 내 마음도 곱게 거듭납니다. 나무하고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나무 같은 마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도 도시에도 싱그럽고 예쁘면서 멋진 나무가 가득하기를 빌어요. 사람들 가슴속에 고운 사랑이 피어날 수 있기를 꿈꾸어요. 4348.8.2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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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박일환 지음, 오윤화 그림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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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5



어머니도 아직 사랑을 잘 모르나 봐

―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박일환 글

 오윤화 그림

 창비 펴냄, 2013.12.16. 8500원



  아이가 늦도록 잠들려 하지 않으면 어버이는 고단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단할까요? 아이가 안 자서 어버이인 내가 못 자거나 다른 일을 못 하기에 고단할까요? 아이가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않으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더라도 몸이 찌뿌둥할까 싶어서 고단할까요?


  아이를 꾸짖는 어버이는 ‘아이 아닌 어버이 스스로’를 꾸짖는 셈입니다. 아이를 나무라는 어버이는 ‘아이 아닌 어버이 스스로’를 나무라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꾸짖거나 나무라는 어버이는 ‘아이가 시무룩해 하거나 울’면, 이런 모습을 보면거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이를 꾸짖거나 나무랄 일까지 아니었는데 괜한 짓을 한 줄 뒤늦게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한테 한 말은 모두 어버이가 저 스스로한테 한 말이라 가슴에 날카롭게 꽂히고 말지요.


  이와 달리, 아이를 따사롭게 보듬으면서 아끼는 말은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버이한테도 하는 말입니다. 아이한테 부드럽고 착하게 흐르는 말은 바로 어버이 스스로한테 부드럽고 착하게 흘러요. 따스하면서 살가이 부르는 자장노래는 아이한테도 곱게 스미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어버이 가슴에 한결 뚜렷하면서 곱게 감겨들기 마련입니다.



떨어진 손톱을 보며 / 빙긋 / 조각 웃음을 흘리는데 // 손톱 깎다 말고 뭐 해? / 엄마가 소리치는 바람에 / 얼른 손톱을 쓸어 모았다. (손톱)



  박일환 님이 빚은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창비,2013)을 읽습니다. 책이름부터 뭔가 ‘있어’ 보이는 동시집입니다.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았다니, 아팠을까요 서운했을까요 놀랐을까요 슬펐을까요 괴로웠을까요 미웠을까요, 아니면 사랑스러웠을까요. 아이 어머니는 왜 아이를 빗자루를 들어서 때렸을까요. 맞아서 아프라고 빗자루를 들었을까요, 아니면 맨손으로 손찌검을 하기 싫어서 빗자루를 들었을까요, 아니면 눈에 빗자루가 보여서 바로 집어서 성풀이를 하려 했을까요.


  어머니도 아직 사랑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어머니라고 해서 사랑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어머니가 되기 앞서’까지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입시에 빠져들어 헤매다가 대학교를 마쳤고, 대학교를 마친 뒤 몇 해쯤 회사 일을 하다가 아기를 배어 회사를 그만둔 뒤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많아요. 이렇게 살아온 어머니는 ‘사랑을 찬찬히 돌아볼 겨를’이 없기 마련입니다. 이는 아버지도 똑같아요. 참말 사랑을 잘 모르니 멋모르고 빗자루를 들어서 아이를 나무라거나 꾸짖고 맙니다.



달이 나에게 / 고운 달빛과 긴 그림자를 / 선물로 주었다. (달밤)


콩알처럼 동글동글한 / 콩새는 / 콩을 좋아해. (콩새)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어버이는 사랑을 선물하려고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사랑을 선물하기에 아이도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하지 않아요. 그럼 왜 아이는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할까요?


  자,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돈을 선물할까요? 아니지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밥을 선물할까요? 아니지요. 옷이나 집을 선물할까요? 아니에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자동차나 자격증이나 성적표 따위를 선물하지 않아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케익이나 떡도 선물하지 않아요. 두 살 아기가 밥을 지을 수도 없지만, 뭘 돈으로 장만해서 선물할 수도 없습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어버이한테 오직 사랑을 선물합니다. 사랑받기에 사랑을 선물로 하지 않아요. 아이 숨결은 언제 어디에서나 모두 사랑뿐이라서, 늘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별만큼 작은 별꽃. / 별만큼 예쁜 별꽃. // 별은 밤하늘에 숨어서 빛나고 / 별꽃은 길섶에 숨어서 피지요. // 별은 고개를 들어야 보이고 / 별꽃은 고개를 숙여야 보이지요. (별꽃)



  사랑을 선물하면서 사랑을 받는 아이는 별꽃을 별처럼 알아봅니다. 학자가 별꽃이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별꽃’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이 스스로 길바닥을 쳐다보고 풀밭을 바라보다가 문득 ‘와, 여기에 하얀 별이 조그맣게 내렸네!’ 하고 놀라면서 ‘별꽃’이라는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아이는 별꽃이 별꽃나물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그저 하얀 별이 낮에도 방긋방긋 웃는구나 싶어서 반갑습니다. 개미를 보려다가, 사마귀나 메뚜기를 보려다가, 나비나 잠자리를 잡으려다가, 아이는 문득 별꽃을 보고는 별을 그리면서 온마음이 새롭게 푸근합니다.



엄마 차 타고 가는데 / 갑자기 / 택시가 옆에서 끼어들자 / 엄마가 욕을 했다. / 나도 옆에서 / 한마디 거들었더니 / 엄마 얼굴이 굳어졌다.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아빠 차 타고 가다 / 깜박 잠이 들었는데 // 어느새 시골에 다 왔다며 / 빨리 내리란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건?)



  아이는 별꽃을 바라보면서 나비하고 노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동차를 몹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동차를 모느라 아이를 쳐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몰면서 옆이나 뒤를 돌아볼 사람은 없어요. 말이 안 되지요. 자동차를 싱싱 몰다가 옆을 보면 어찌 되겠어요? 큰일이 나지요.


  그렇다고 자가용을 모는 일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가용을 모는 어버이는 그만큼 아이 얼굴을 또렷이 쳐다볼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가용을 모느라 다른 자동차와 길알림판과 찻길 따위를 살피느라, 막상 아이가 어떤 눈빛이요 몸짓이며 마음인가를 살필 틈이 없다는 뜻입니다.


  박일환 님은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라든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건?〉처럼 재미난 동시를 씁니다. 비록 자동차를 몰 적에 어버이는 아이하고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하지만, 이런 삶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아요. 어머니는 얼굴이 벌개지고, 아버지는 아이가 잘 자도록 하면서 시골집까지 잘 왔구나 싶어 마음을 놓는 이야기를 찬찬히 잘 들려줍니다.



모기가 / 팔뚝을 물었다. // 빨갛게 / 솟아오른 자리에 // 할머니가 / 침을 발라 주셨다. // 모기 주둥이처럼 / 내 입이 / 삐죽 튀어나왔다. (모기 주둥이)



  〈모기 주동이〉 같은 동시도 재미있지요. 할머니를 몹시 사랑하고 좋아해서 ‘할머니 침이 묻은 밥’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아이가 있을 테고, 모기 물린 자리에 할머니가 침을 바르면 징그럽거나 싫다고 여길 아이가 있을 테지요. 이래서 좋고 저래서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것을 보면서 자라기 때문에, 그저 다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다만, 이럴 때에, 그러니까 아이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만날 적에, 어머니나 아버지도 곁에 있기를 바라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슬기롭게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시겠지만, 어머니나 아버지도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새롭게 받아들이고, 또 아이한테 살가운 징검다리 구실을 할 수 있으면 한결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이러한 삶이 되면, 동시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만하겠지요.


  그나저나, “파란 고추는 익으면 / 빨간 고추가 되고 // 파란 사과도 익으면 / 빨간 사과가 되는데 // 파란 수박은 아무리 익어도 / 파란 수박인걸(엉큼한 수박).” 같은 이야기가 흐르는 동시는 좀 아쉽습니다. 풋고추나 풋능금은 ‘푸른 빛깔’입니다. 풀빛입니다. ‘파란 빛깔’이 아니지요. 더더구나 수박을 놓고 “파란 수박”이라고 하다니요.


  “새파란 보리싹”처럼 쓰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아이들은 시골에서 거의 안 살 뿐 아니라, 시골일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먼 옛날에 누구나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시골일을 하던 때라면 “새파란 보리싹”이라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만, 요즈음 도시 아이들을 헤아린다면, 또 도시에서 가게에서나 고추랑 능금이랑 수박을 볼 아이들을 헤아린다면, 고추도 능금도 수박도 ‘푸른’이라는 말을 붙여서 나타내야 올바릅니다. 4348.8.2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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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91
전성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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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1



시와 저녁놀

―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전성호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1.3.31. 8000원



  저녁이 되어 어스름이 깔립니다. 큰아이는 “아버지, 이제 저녁이야?” 하고 묻습니다. 나는 “그래, 이제 저녁이야.” 하고 말합니다. 여덟 살 큰아이는 ‘아침’인지 ‘낮’인지 ‘저녁’인지 으레 묻습니다. 이제 궁금해 할 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물을 수 있지만, 저녁이 되어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는 말을 늘 했기에 저녁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저녁이나 밤이나 새벽이나 아침을 가리지 않습니다. 안 졸리면 놀고, 졸리면 졸음을 참다가 곯아떨어집니다. 잠에서 깨면 일어나고, 일어나면 놉니다.



재봉틀의 페달을 밟다 보면 / 나는 까맣게 사라진다 (재봉공)



  전성호 님 시집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실천문학사,2011)를 읽습니다. 오늘도 저녁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저녁놀이 진 깜깜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봅니다. 모기가 사라질 듯하면서 사라지지 않아, 모기에 물리면서 밤바람을 쐽니다. 잠든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가슴을 토닥이다가 이불깃을 여밉니다. 시집에서 흐르는 이야기도 있지만, 참말 저녁놀이 말을 건네시고 아침놀이 말을 건네십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눈빛으로 말을 건네시고, 아이들이 밥을 먹다가 웃음짓는 눈빛으로 말을 건네십니다.



처맛기슭은 언제나 시끄럽다 / 노란 주둥이 뾰족뾰족 들어 올리던 지푸라기 섞인 흙집 / 새끼들 날개 달아 띄울 때까지 / 밀, 보리, 감자, 강냉이 밭일에 파묻혀 / 손톱 밑이 까매지셨다 (제비집)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다 보면 드문드문 제비를 봅니다. 이제 늦여름이요, 가을 문턱이니 제비를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집 처마에서 자라던 새끼 제비는 모두 날갯짓을 익혀서 둥지를 떠났습니다. 늦깎이로 태어난 제비인 탓인지, 올해 새끼 제비는 한 번 둥지를 떠난 뒤로 다시 우리 집 처마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난해까지는 날갯짓을 처음 익힌 뒤로도 밤에 돌아오고 새벽에 다시 나가기를 한 달 남짓 했으나, 올해에는 이렇게 드나들지 않아요.


  아무튼, 자전거를 타고 논둑길을 달리면서 여러 마을이 둘러싼 들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에 내려앉은 제비를 세면 꼭 열아홉 마리입니다. 요 며칠 여러 날 세어 보는데 이 숫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어미 제비 두 마리 있었고 새끼를 여섯 마리 깠으니 ‘올해 우리 집 제비는 여덟 마리’입니다. 그러니까, 열아홉 마리 가운데 여덟 마리는 우리 집 제비인 셈이고, 다른 열한 마리는 다른 집 제비인 셈입니다.



앉은뱅이 대나무 의자 / 드러누운 개 발등에 얹혀 / 반쯤 잘려나간 오후 / 커피 잔에 자꾸 날아와 붙는 (무풍지대―따옹지)



  나락꽃이 살그마니 피려고 하는 이즈음 제비는 몸을 넉넉히 살찌운 뒤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부디 농약바람이 좀 잦아들면서 제비가 더는 다치지 말고 살을 찌워서 씩씩하게 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기를 빕니다. 이리하여, 따순 고장에서 겨울을 난 뒤, 이듬해 새봄에 새로운 날갯짓으로 이 마을과 우리 집으로 기쁘게 날아올 수 있기를 빌어요.



들녘이 젖고, 공사장이 젖고 / 빈랑나무 잎이 젖고, 서름한 되모시 머리가 젖고 / 빈민굴 띤양공이 젖고 기어코 내 뒷덜미가 젖는다 (雨)



  바람이 조용합니다. 올여름은 참으로 바람이 조용합니다. 지난해에는 무더위가 이어졌어도 곧잘 드센 바람이 불면서 더위를 식혀 주곤 했으나, 올해에는 센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바람조차 없는 무더위가 이레나 열흘씩 흐르기 일쑤입니다. 바람이 안 부니 빨랫줄을 받친 바지랑대가 넘어질 일이 없지만, 바람이 참말 안 부니 자전거를 몰면서 맞바람 때문에 애먹을 일이 없지만, 여름마다 으레 만나던 뭉게구름과 소낙비와 바람과 무지개 가운데 네 가지 모두 찾아보기 어려운 나날이 이어지니 여러모로 쓸쓸합니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던 어릴 적 여름날에 뭉게구름도 소낙비도 바람도 무지개도 흔히 보며 자랐는데,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우리 집 어린 아이들은 시골에서마저 뭉게구름도 소낙비도 바람도 무지개도 자꾸 못 봅니다.


  아이들은 구름을 타고 놀아야 푸른 마음이 될 텐데요. 아이들은 소낙비를 맞으며 놀아야 무럭무럭 자랄 텐데요. 아이들은 바람을 먹으며 웃어야 사랑스러운 마음이 싹틀 텐데요. 아이들은 무지개와 동무하며 달려야 싱그러운 꿈을 키울 텐데요.



식탁 위의 청어 눈알 / 반짝이는 비늘 / 나는 동문서답 / 뼈를 가진 것들의 비밀을 말한다 (빛 속의 뼈)


비가 오면 / 나무들은 물고기가 된다 (비)



  시집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를 살몃살몃 읽습니다. 천천히 읽고 천천히 덮습니다. 저녁 풍경이 건네시는 말을 귀여겨들으며 삶노래를 부른 전성호 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귀여겨듣는 ‘저녁 말’이랑 ‘아침 말’은 무엇인지 되돌아봅니다. 내가 스스로 즐기는 삶노래는 무엇인지 되새기고, 내가 아이들한테 물려줄 삶노래에는 어떤 사랑이 어떤 꿈으로 흐르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성호 왔나 / 네 어머님 (빈방)



  벽에 찰싹 붙어서 자는 큰아이를 벽에서 떨어뜨립니다. 머리카락을 쓸면서 “벽에 너무 딱 붙지 말고 좀 떨어져야지.” 하고 말을 겁니다. 아이는 잠결에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못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 마음속에 이야기를 건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뭉게구름은 없어도 온갖 무늬와 빛깔로 고운 수많은 구름이 하늘 넓게 있습니다. 소낙비는 없어도 요새 여우비를 곧잘 만났습니다.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는 날씨이지만, 나는 아이들한테 신나게 부채질을 해 주고, 올해에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선풍기 놀이를 누립니다. 무지개는 찾아볼 수 없더라도 밤마다 미리내는 얼마든지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손수 딴 호박으로 호박국을 끓여서 아침저녁으로 먹습니다. 우리 집 풀밭에서 함께 사는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하루 내내 실컷 듣습니다. 우리 집 울타리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 열매가 거의 익어서 곧 따먹을 수 있습니다.


  깊은 밤으로 흐르는 저녁 끝자락에 찬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물려줄 수 있는 사랑을 스스로 누릴 때에 즐겁습니다. 저녁놀이 들려주는 말을 듣고, 애벌레와 나비가 들려주는 말을 들으며, 쇠무릎 잎사귀가 들려주는 말을 들으며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제나 노래입니다. 4348.8.2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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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자 삶창시선 43
김해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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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3



우리 집에 와서 한솥밥을 즐겁게 먹으렴

― 집에 가자

 김해자 글

 삶창 펴냄, 2015.7.15. 8000원



  아침에 노래를 틀고 아이들하고 춤을 춥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학교나 유치원을 안 가니 하루 내내 집에서 노는데, 비가 쏟아지는 오늘은 방과 마루 사이에서 노래하면서 춤을 추고 놉니다. 아직 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늦여름인 만큼, 아침부터 노래하고 춤추면서 노는 아이들은 땀투성이가 됩니다. 자, 이제 실컷 땀을 흘렸으니 물놀이를 해 볼까? 씻는방으로 아이들을 몰아넣습니다. 두 아이 손에 수세미를 하나씩 쥐어 주고 욕조 벽이랑 바닥을 비비도록 시킵니다. 어제까지 물놀이를 하며 고인 물로 욕조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따순 물을 틉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니가 좋으면)



  아이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웃고 춤추면서 노래합니다. 아이들만 춤을 추라 할 수 없고, 아이들끼리만 노래하라 할 수 없습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하고 함께 놀고 함께 일하며 함께 밥을 먹습니다. 함께 호미질을 하고 함께 씨앗을 심으며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밥을 끓이고 달걀을 삶습니다. 내가 짓는 밥은 내 손길이 깃드는 밥입니다. 내 손길은 따스할 수 있고, 그야말로 따스할 수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웃는 소리를 내 가슴속에 알뜰히 담은 뒤, 이 기쁜 웃음을 씨앗으로 삼아서 새롭게 따스한 손길로 가다듬어 밥을 지을 수 있어요.



을지로 지하도에 집을 짓자 박스 위에 지붕을 세우고 구멍 뚫어 창도 만들자 창문에 모기장도 붙이자 박스 옆에 기역 자로 튀어나온 별채도 이어야지 비닐을 붙이면 빨래가 휘날리는 집 페트병에 더운 물 담아 애인처럼 안고 자자 (이승)



  김해자 님 시집 《집에 가자》(삶창,2015)를 읽습니다. 시집 이름이 “집에 가자”라니, 이 얼마나 구수하면서 맛깔스럽고 사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더러, “자, 우리 집에 가자.” 하고 건네는 말은 얼마나 따스하면서 기쁘고 고마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갈 곳을 몰라 떠도는 사람더러, “자, 이제 집에 가요.” 하고 들려주는 말은 얼마나 상냥하면서 착하고 고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젠 돌아가고 말아야지, / 치렁처렁 목걸이와 제복과 억지웃음 벗어던지고 / 날카로운 하이힐 대신 청동거울을! / 계산기 대신 둥둥 북소리 같은 심장을! / 문서 대신 비와 구름이 머무는 밭을! (웅녀의 시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아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시험성적에 목이 매이다가 참말로 목이 매여서 목숨을 빼앗긴 아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애써서 대학교에도 갔지만, 힘써서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되었지만, 도무지 앞날이 환하게 보이지 않아서 눈물에 젖다가 밑바닥으로 고꾸라진 젊은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핵발전소와 송전탑에 고향마을을 빼앗긴 할매와 할배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큰도시에 수돗물을 댄다며 댐을 지어야 해서 고향마을을 떠나라고 하니 앞으로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시골 할매와 할배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일요일 없이 밤새 일하고도 라면 한 그릇 겨우 끓여먹는 공순이와 공돌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따뜻한 어버이 품에 안기고 싶고, 포근한 이부자리에 눕고 싶고, 맑은 새소리와 싱그러운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제는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랑을 꿈꾸면서 살고 싶습니다.



시멘트처럼 단단한 흙을 닮아 뿌리는 이미 돌이 되어 가고 있더군요 어느 날 가지 끝마다 그렁그렁 붉은 눈들이 보이는 듯했어요 저도 몰래 소리를 질러 딸아일 불렀죠 잎 좀 봐, 이거 잎 맞지? 잎이 핀 것 같지? 얼버무리는 아이에게 잎이 아니어도 할 수 없지, 살아 있다 믿고 물을 주는 한 살아 있는겨,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죽은 나무에 물 주기)



  ‘죽은 나무’에 물을 주려고 딸아이를 부른다는 김해자 님은 참말 ‘죽은 나무’에 물을 주었을까요? 얼핏 보자면, 나무는 말라서 죽은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죽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깊디깊은 곳에서 고요히 잠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고,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며, 사랑 품은 마음길로 물을 주면, 앞으로는 ‘산 나무’가 될 테고 ‘웃는 나무’가 될 테지요.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 (어진내에 두고 온 나)


딱새 한 마리 마당 빨랫줄에 앉아 있다 / 내가 지나가려 하자 부리를 새우고 날개 퍼득였다 (날선 울음-새를 듣는 몇 가지 시선 5)



  시집 《집에 가자》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에 젖습니다. 이 시집은 ‘우리 집에 와서 한솥밥을 즐겁게 먹으렴’ 하고 부르는 노랫가락 같습니다. 크지도 넓지도 않지만, 두어 사람 누우면 꽉 들어차는 조그마한 한칸방인 집이라 하더라도 ‘우리 집에 와서 한솥밥을 즐겁게 먹으렴’ 하고 부르는 노랫소리 같습니다.


  김치 한 접시에 간장 한 종지를 올린 밥상을 함께 나누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을 올린 단출한 밥상을 함께 나누자고 손짓하는 노래입니다.


  시란 늘 그렇겠지요. 사랑하는 마음을 시로 그립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꿈을 시로 그립니다. 사랑을 가슴에 살포시 담는 이야기를 시로 그립니다.



억수로 높대이 저마 지 혼자 툭 불거져서 머 우짤 끼라고 흙 다 뭉개고 산목심 다 주째삐고 조래 빳빳이 고개 쳐들고 나라님 같은 고압 자세로 와 자꼬 올라가쌓노 내가 나라한티 밥을 주라 카나 돈을 주라 카나 이래 농사짓고 살겠다는데 언제까지 없는 넘들만 개 잡드끼 잡들라 카노 (밀양아리랑)


사랑 시 한번 써보고 싶다 어둠 속에서 사이좋은 땅콩 두 알처럼 하나였을 때 꿈꾸며 서성이던 햇살 고운 아침, 전화가 왔다 (사랑 시는 못 쓰고)



  사랑은 연속극에 없습니다. 사랑은 영화에 없습니다. 사랑은 책에 없습니다. 사랑은 인터넷에 없습니다. 사랑은 신문에 없습니다. 사랑은 대중가요에 없습니다. 사랑은 학교에 없습니다. 사랑은 군대에 없습니다. 사랑은 늘 네 가슴하고 내 가슴에 있습니다. 네 가슴에서 샘솟는 사랑이 나한테 옵니다. 내 가슴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너한테 갑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만나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맺어서 사랑을 꿈꿉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손을 잡고서 사랑으로 삶을 짓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마주보면서 사랑으로 아기를 새롭게 낳습니다.



여덟 아이가 지하에서 석탄을 캐고 / 아홉 아이가 굴 깊숙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다 / 갱도에서 기어 나오며 아이들이 달리기를 한다 (거북손)


강은 어머니 실핏줄이오 나무는 팔다리라 생각하는 책 어머니 다칠세라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책 물의 파동 읽으며 조용조용 거북 껍데기 두드려 천지간에 감사드리는 책 약초를 캐거나 일용할 양식 구할 때 대지와 풀 나무에게 허락을 구하는 책 (영혼의 집)



  시집 《집에 가자》를 읽으면, ‘집에 못 가는 아이’ 이야기가 자꾸 흐릅니다. 한국에서, 이웃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지구별 곳곳에서, 그만 집에 못 가고 고꾸라진 아이들 이야기가 자꾸 흐릅니다.


  한국은 선진국일까요? 한국은 민주 나라일까요? 한국은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일까요? 그러면,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는 왜 이렇게 많을까요? 한국에서 애꿎게 목숨을 빼앗기는 아이는 왜 이다지도 많을까요?


  대학입시는 누구 때문에 있을까요? 대학교는 왜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공무원은 왜 있을까요? 군인이나 의사는 왜 있을까요? 돈은 왜 돈이 많은 데로만 몰리고, 돈이 없는 데로는 골고루 흘러가지 않을까요?



배가 잠기고 있어, / 내가 잠기고 있어, / 마침표 같은 건 찍지 마, 돌아오고 말 테니, / 꺾어도 가만있는 꽃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 증언도 못하는 새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니고, / 반드시 사람으로, 난, 다, 시, 와, 야, 겠, 어, (김동협-2014년 4월 10일 09:10)



  오늘도 우리 시골집에서 두 아이는 하루 내내 뛰놀면서 땀을 흘립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나서 물놀이를 합니다. 물놀이를 마친 뒤 알몸으로 마루와 마당을 가로지릅니다. 배가 고프면 부엌으로 와서 수저를 듭니다. 배가 부르면 뒹굴거리면서 놀다가 콜콜 낮잠에 빠져듭니다. 낮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놀고, 다시 배가 고프면 “밥 주셔요.” 하고 부릅니다. 밥을 배불리 먹으면 새롭게 기운이 났으니 별이 뜨고 달이 돋는 밤까지 하하하 노래하면서 놉니다.


  오늘 이곳에서 한솥밥을 먹습니다. 이 땅에서 아름답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아이를 생각하면서 한솥밥을 먹습니다. 이 땅에서 아직까지 슬프고 고달프며 힘든 모든 아이를 그리면서 한솥밥을 먹습니다.


  김해자 님이 참말 ‘사랑 시’를 쓸 수 있는 이 나라가 되기를, 이 지구별이 되기를, 그야말로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가 흐르는 아름다운 한국과 지구별로 거듭나는 삶이 태어나기를 빕니다. 4348.8.2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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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어린 새
김명수 지음, 신민재 그림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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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4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

― 산속 어린 새

 김명수 글

 신민재 그림

 창비 펴냄, 2005.12.26. 8000원



  늦여름이 무르익는 새벽입니다. 새벽바람은 제법 서늘합니다. 아이들은 새근새근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나는 이불을 주섬주섬 챙겨서 여미어 줍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자니까 아이들이 언제 이불을 걷어차는지 알고, 언제 이불을 여미어 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자는 아이들이 이를 갈면 얼른 손을 뻗어 볼을 톡톡 치고는 살살 어루만집니다. 예쁜 이는 예쁘게 두고 즐겁게 꿈꾸라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갈기를 멈추며 길게 하품을 하고는 냠냠 입맛을 다시면서 조용히 꿈나라로 다시 빠져듭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침에 끓일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다시마를 한 조각 뜯어서 불립니다. 집식구 모두 꿈나라에서 노니는 동안 느긋하게 부엌일을 살피고는 내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꽃 보고는 몰라요 / 사과꽃은 하얘도 / 빠알간 사과 열리고 / 감꽃은 뽀얘도 / 붉은 감이 달리고 (꽃 보고는 몰라요)



  김명수 님 동시집 《산속 어린 새》(창비,2005)를 읽습니다. 아이들을 곱게 바라보는 마음이 동시 한 줄로 흐르고, 글쓴이 어린 날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동시 두 줄로 흐르며, 이 땅 아이들이 먼먼 옛날부터 가슴에 품은 숨결이 동시 석 줄로 흐르다가는, 오늘날 아이들한테 글쓴이가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동시 넉 줄로 흐릅니다.



민들레는 그럼 왜 민들레가 되었을까 / 진달래는 그럼 왜 진달래가 되었을까 // 불러 주고 불러서 / 민들레가 되었지. / 너와 내가 예뻐해서 / 진달래가 되었지 (누가 누가 지었을까)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알려면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표준말로는 ‘민들레’이지만 고장마다 가리키는 이름이 다 다릅니다. 수백 가지도 아닌 수천 가지 ‘이름’이 있는 민들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수천 가지 이름’이 어슷비슷하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꼭 하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다 다른 고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다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가리키는 이름은, 다 다른 삶터에 맞게 태어난 말로 다 같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민들레를 아끼지 않는다면 민들레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진달래를 아끼지 않는다면 진달래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아요.


  옛날부터 시골지기는 모든 이웃한테 저마다 다른 이름을 알뜰살뜰 붙여 주었어요. 거머리한테도 거머리라는 이름을 주고, 장구애비 물방개 소금쟁이 게아재비 미꾸라지 다슬기 개똥벌레 가재 같은 이름이 골고루 있습니다. 파리 모기를 비롯해서 벌이랑 나비라는 이름도 있는데, 벌하고 나비는 또 수많은 이름이 갈래갈래 있습니다.



조개는 / 제 껍질에 / 노을을 새긴다 (조개의 무늬)



  마음을 기울여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도시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길에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든지 발을 밟고 지나간다든지 밀치고 지나가는 ‘여러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 보셔요. 아주 고단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도시에서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못 느끼기 마련이라, 우리 곁을 스치거나 밀치며 지나가는 ‘이웃이어야 할 사람’한테 아무 이름을 못 붙입니다.


  이는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들나물이나 들풀을 아끼는 손길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냥 농약을 뿌려대어 죽이니까요. 논이고 밭이고 온통 농약투성이가 되면서, 논에서 살던 수많은 이웃도 거의 다 죽어서 사라집니다. 논개구리 참개구리 무당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같은 이름은 아예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방아깨비 풀무치 여치 베짱이 같은 이름은 아예 들여다볼 틈도 없습니다. 이른봄에는 쑥이나 냉이를 조금 들여다볼 뿐, 여름쑥이나 가을쑥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쟁이 미나리 질경이 민들레 토끼풀 모두 숱한 ‘잡풀’로 여겨 농약으로 죽이려 할 뿐입니다.



동생과 내가 잠도 깨기 전 / 아버지는 제일 먼저 일어나셔서 / 쇠죽솥에 물을 붓고 / 불을 지피고 / 작두로 썰어 놓은 볏짚을 넣고 / 콩깍지를 한 삼태기 / 헛간에서 퍼 와 / 외양간 소를 위해 쇠죽 끓이시고 (겨울 아침 우리 집)


울바자에 내린 눈은 울바자 덮고 / 대숲에 내린 눈은 대숲을 덮고 (겨울날)



  동시집 《산속 어린 새》에서 흐르는 겨울날 모습은 아련한 옛모습이로구나 싶습니다. 쇠죽을 끓이는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쇠죽을 끓일 볏짚을 건사한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요즈음 벼는 하나같이 유전자를 건드려서 짜리몽땅하기에 짚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벼는 짜리몽땅할 뿐 아니라 짚이 아주 가늘고 힘조차 없어요. 무엇보다도 일소를 부리는 시골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울바자가 남은 시골집이 있기는 있을 테지요. 그러나 요즈음 시골마을은 어디를 가든 시멘트로 쌓은 블록담입니다. 수수깡 울타리라든지 탱자나무나 찔레나무 울타리는 찾아볼 길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도 이런 아련한 모습이 동시집 한켠에 살며시 깃듭니다. 이 동시집을 읽을 요즈음 어린이는 ‘울바자’가 무엇인지 모를 테고, ‘작두’나 ‘삼태기’를 구경할 일도 없다고 할 터이니, 뭔 얘기를 읊는 동시인지 하나도 모를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가 깃들기에, 아이들은 이 노래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는 누구나 겪고 살며 누리던 이야기이나, 이제는 ‘동시 한켠에만 유물처럼 남은’ 노래를 마음으로 그리도록 이끄는 조그마한 씨앗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달맞이꽃 핀 마을에 어둠 내리면 / 모깃불 피어나는 마당 너머로 / 반딧불이 깜박이며 숨바꼭질하고 (박꽃 핀 마을에)



  도시에는 모깃불도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는 마당도 없고 밭뙈기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달맞이꽃을 심어서 돌보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요즈음 시골에서도 달맞이꽃을 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달맞이꽃도 숱한 ‘잡풀’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 농약으로 태워 죽이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 태어나자 / 우리 할머니 / 시골에서 / 서둘러 올라오셨다. // 할머니가 / 내 동생을 가슴에 안고 / 함박웃음 지으며 / 노래하신다. (할머니의 노래)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즐겁습니다.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기에 웃음꽃이 핍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노래를 가슴으로 새기면서 기쁘게 뛰어놉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면서 씩씩하게 일하고, 아이는 어버이가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냅니다.


  새끼 새도 어미 새도 숲이 있을 때에 둥지를 틀어 삶을 누립니다. 모든 새는 숲에 깃들어 숲노래를 부를 적에 싱그러운 숨결이 됩니다. 사람도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살림을 가꿀 적에 싱그러운 넋이 됩니다. 아이들이 숲을 책으로만 만나지 않기를, 아이들이 반딧불이나 무지개를 동영상으로만 들여다보지 않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이웃과 동무로 마주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도 곁에서 늘 숲을 사랑하고 흙과 바람과 빗물을 고마이 여길 줄 아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1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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