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크리스트 폰 베델,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사상, 정미현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4(5).

 

1527, 에라스무스는 교부 크리소스토모스의 짧은 글 몇 편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겨 유대인에 대한 여덟 편의 설교(Acht Reden gegen die Juden)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220)

 

1527, 에라스무스는 교부 크리소스토모스의 짧은 글, 유대인을 논박하는 여덟 편의 설교(Acht Reden gegen die Juden) 가운데 다섯 편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겨 출판했다.

 

독일어 원문: 1527 übersetzte Erasmus für ein breiteres Publikum kleinere Schriften des Kirchenvaters Chrysostomos vom Griechischen ins Lateinische, darunter fünf von dessen Acht Reden gegen die Juden.

 

번역을 바로잡았다.

 

아래, 222쪽의 번역을 볼 것:

 

에라스무스는 특히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수사로 가득했던 첫 세 편의 설교를 제외했지만, 나머지 다섯 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일어 원문: Obwohl Erasmus die drei ersten, besonders judenfeindlichen Reden nicht übersetzte, finden sich immer noch zu viele verletzende Beleidigunen in den fünf anderen Reden.

 

 

참고 자료:

 

https://www.deutschlandfunk.de/wortgewaltiger-prediger-mit-einer-dunklen-seite-1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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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크리스트 폰 베델,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사상, 정미현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4(5).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구 미사 형식을 재도입하도록 취리히를 움직이라고 시의회에 권고했다. 그러면서도 동맹 도시와의 전쟁을 불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152519일에 열린 회의에서 바젤시의회가 대표들에게 부여한 지침은 이를 따르고 있다.(210)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구 미사 형식을 재도입하도록 취리히를 움직이라고 시의회에 권고했다. 그러면서도 동맹 도시와의 전쟁을 불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152519일에 열린 스위스 의회에 참석한, 바젤시가 자기 대표들에게 부여한 지침은 이를 따르고 있다.

 

독일어 원문: Erasmus schlug den Ratsherren vor, Zürich zu bewegen, die alte Messform wieder einzuführen, es aber nicht mit der verbündeten Stadt auf einen Krieg ankommen zu lassen. Das entsprach den Instruktionen, die Basel seinen Abgeordneten an die Tagsatzung vom 9. Januar 1525 mitgab.

 

한편 15243월에 제국 의회는 금식 규정을 어길 시 투옥과 벌금으로 다스리기로 결의했다.(217)

 

한편 15243월에 스위스 의회는 금식 규정을 어길 시 투옥과 벌금으로 다스리기로 결의했다.

 

독일어 원문: Die Tagsatzung hatte im März 1524 beschlossen, Fastenbruch mit Gefängnis und Geldbuße zu ahnden.

 

번역을 바로잡았다.

 

 

Tagsatzung = 스위스 의회

 

https://www.dwds.de/wb/Tagsatzung#d-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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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가톨릭출판사, 2023(초판 4).

 

1939년 그[본회퍼]는 미국에서 일련의 강좌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하선하기 전에 독일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독일로 돌아왔다.(715)

 

1939년 그[본회퍼]는 미국에서 일련의 강좌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전쟁의 위협과 독일에 대한 우려 때문에 미국에서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 귀국 몇 주 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오류를 바로잡았다.

 

아래, 본회퍼 연표를 볼 것:

 

크리스티아네 티츠,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의 신학자, 김성호 옮김, 동연, 2022, 225.

 

Christiane Tietz, Dietrich Bonhoeffer: Theologe im Widerstand, München 2013,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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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가톨릭출판사, 2023(초판 4).

 

1935년 그는 바르트의 초대로 []켄발데 신학교에서 지도하기 위해 독일에 재입국했다. 본회퍼는 신학생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약 2년간 헌신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937히믈러의 명으로 []켄발데 신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715)

 

1935년 그는 고백교회의 요청으로 []켄발데 신학교에서 지도하기 위해 독일에 재입국했다. 본회퍼는 신학생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약 2년간 헌신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937 힘러의 명으로 []켄발데 신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오류와 인명을 바로잡았다.

 

국립국어원의 로마자 인명 표기 자료를 볼 것:

 

https://www.korean.go.kr/front/etcData/etcDataView.do?mn_id=208&etc_seq=368

 

 

아래, 책의 글을 볼 것:

 

이러한 신념들을 지닌 채, 본회퍼는 19354월에 독일로 돌아와 고백교회 형제회의 요청에 따라 고백교회의 새로 설립된 설교학 세미나(역자 주: 신학원)들 중 한 곳의 책임자가 되었다.(김성호 옮김)

 

Christiane Tietz, Dietrich Bonhoeffer: Theologe im Widerstand, München 2013,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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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현,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가톨릭출판사, 2023(초판 4).

 

필립 스페너(595, 596)

 

필립 슈페너

 

요아킴 펠러(595)

 

요아힘 펠러

 

인명을 바로잡았다.

 

Philipp Spener = 필립 슈페너

 

Joachim Feller = 요아힘 펠러

 

https://de.wikipedia.org/wiki/Pietismus

 

https://de.wikipedia.org/wiki/Philipp_Jacob_Spener

 

https://de.wikipedia.org/wiki/Joachim_F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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