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 ‘함께살기’와 ‘쇠북꾼’



  나는 스무 살 언저리에 내 이름을 찾았습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이름은 ‘종규’인데, 내 어버이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키우면서 내 이름을 스스로 지었습니다. 그무렵, 그러니까 스무 살 언저리에 내가 스스로 지어서, 그때부터 스무 해 남짓 아끼면서 섬기는 내 이름은 ‘함께살기’입니다.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이름은 ‘종규’는 한자로 ‘鐘圭’로 적습니다. 어버이한테 이 이름이 무슨 뜻이냐 하고 여쭈었을 적에, 어버이는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말해 주지 못했습니다. 어버이는 이 이름을 ‘항렬 돌림자’로 붙였을 뿐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짓지 않았어요.


  한자로 내 이름을 살피면 ‘쇠북(鐘) + 홀(圭)’입니다. 그러니까, “쇠북을 홀로 치는 사람”인 셈이지요. 절집이라든지 서울 종로에 보면 ‘커다란 종’이 있습니다. ‘종’은 한자말이고, 한국말은 ‘쇠북’입니다. 쇳덩이로 지은 북이기에 ‘쇠북’이고 ‘종’입니다.


  어릴 적에는 “쇠북을 홀로 치는 사람”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몰랐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나 스스로 철이 들 무렵 찾아와서 내가 기쁘게 맞아들여서 나한테 붙인 이름 ‘함께살기’는 ‘쇠북꾼’하고는 아주 맞서는 낱말이라 할 만합니다. 하나는 하나요,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입니다. 하나(쇠북꾼)는 ‘1차 의식’이고, 다른 하나(함께살기)는 ‘2차 의식’입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1차 의식’에서 내가 작은 점을 찾아내어 ‘2차 의식’을 지은 뒤, 나로서는 내 나름대로 ‘엄청나고 새로운 경험’을 여태 스스로 지으며(창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쇠북꾼’과 ‘함께살기’는 다르면서 같은 말이고, 같으면서 다른 말입니다.


  ‘함께살기’는 겉으로 보자면, 겉뜻으로 보자면 “함께 살기”입니다. 속으로 보자면, 속뜻으로 보자면,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꾸고 함께 노래하여 함께 살다”입니다. ‘함께살기’라는 이름에는 일곱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일곱 빛깔 무지개이고, 일곱 가지 조각(씰)입니다. ‘보다’에서 ‘느낌’이 태어나고, ‘생각’이 다시 태어나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꿈’이 자라서 ‘노래’가 되고, 이윽고 시나브로 ‘삶’이 됩니다.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름은 모두 ‘밭’이요 ‘바탕’이면서 ‘뿌리’입니다. 이러한 밭과 바탕과 뿌리에 씨앗을 심지요. 이 씨앗을 심으면서 ‘내 이름을 내가 손수 새로 짓기’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내 손에 숨결을 담아서 ‘내 이름을 새롭게 처음 지으’면, 내 몸은 어느새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납니다.


  우리는 모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사람이고, 두 가지 이름은 함께 맞물리면서 흐릅니다. 함께 맞물리면서 흐르는 이름은 서로 아끼고 섬기는 넋이고, 서로 아끼고 섬기는 넋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징검다리를 기쁘게 밟고 노닐면서 자랍니다. 고맙습니다.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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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 ‘섬·서기·서다’와 ‘진화’



  한자말 ‘진화(進化)’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하여 감”으로 풀이합니다. 이 풀이말을 읽고서는 ‘진화’라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자를 낱으로 뜯어서 보면, ‘진화’는 “나아감 + 되다”입니다. 그러니까, “나아가게 되다”를 가리킨다고 할 만한 ‘진화’입니다.


  그러면, ‘영적 진화’라고 하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거나 가리킬까요? 참 알쏭달쏭하지요. 여러모로 꽉 막힌 말마디이지요. 아무래도 알아차리기 힘들고, 아무래도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이 사람은 이대로 말하고 저 사람은 저대로 말할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낱말 하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에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진화’나 ‘영적 진화’라는 말마디를 쓰고 싶다면, 이 말마디부터 제대로 바라보고서 알아챈 뒤에 써야 합니다. 이 말마디를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말마디를 제대로 읽고 알아서 내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나아가게 되다”란 무엇일까요?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나아가게 된다고 할 때에는, 이제 이곳에 있지 않고 저곳에 갈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진화’는 “머무르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진화’는 ‘감·가기·가다’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수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진화’이지만, 이 낱말은 한국말로는 ‘섬·서기·서다’입니다. 왜냐하면, ‘일어서다’와 ‘바로서다’를 가리키는 ‘서다’이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모습을 가리키는 ‘서다’가 아니라 “일어서다 + 바로서다”인 ‘서다’입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 사람들이 사회의식으로 ‘진화·영적 진화’라는 낱말을 쓰는 자리를 살피면, 다음처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깨어나기 . 새로 깨어나기

 눈 뜨기 . 눈을 떠서 보기

 태어나기 .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거듭나기



  사회의식으로 ‘진화’라는 낱말을 쓰는 사람은 으레 ‘거듭나기’를 가리키는 자리에 씁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거듭나기’라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자꾸 ‘진화’라는 말마디를 엉뚱하게 쓰니까, ‘깨어나기’와 ‘눈 뜨기’와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도 그만 뜬금없이 ‘진화’나 ‘영적 진화’라는 말마디를 집어넣을 뿐 아니라 ‘내적 성장’ 같은 일본 한자말을 자꾸 끌어들입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바라보지 못하는 몸이니, 한국말을 잊을 뿐 아니라, 뜻도 모르는 채 이 말 저 말 주워섬기고 말아요.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우뚝 서야’ 이곳에서 저곳으로 한 발짝 내디딥니다.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슬기롭게 서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어디이든 홀가분하게 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아름답게 서야’ 새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면서 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화’라는 낱말을 쓰고 싶다면, 이 한자말이 ‘서다’를 가리키는 줄 바르게 바라보면서 느끼면 됩니다. 4348.1.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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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의 재발견
조지프 코캐너 지음, 구자옥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숲책 읽기 62



연필을 손에 쥐고 숲을 읽다

― 잡초의 재발견

 조지프 코캐너 글

 구자옥 옮김

 우물이있는집 펴냄, 2013.4.10.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쥡니다. 연필을 손에 쥐면, 나뭇결을 느낄 수 있고, 돌내음을 맡을 수 있습니다. 연필은 나무와 돌로 빚기 때문입니다. 연필이 되어 준 나무가 어떤 숨결인지 읽는 한편, 나무 사이에 깃들어 길다랗게 잠든 돌이 어떤 넋인지 읽습니다.


  연필을 손에 쥐고 놀리면 어느새 글이 태어납니다. 연필을 손에 쥐고 움직이면 어느새 그림이 나타납니다. 나무와 돌은 연필을 빌어 제 숨결과 넋을 들려줍니다. 나무와 돌은 연필을 거쳐 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연필을 쥔 사람은 누구나 ‘작가’이자 ‘화가’입니다. 작가이기에 글을 쓰지 않고, 화가이기에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연필을 손에 쥐기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립니다.



..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겠니? 저 뒤쪽의 잡초가 무성한 곳의 옥수수하고 여기 옥수수가 딴판이지. 같은 흙인데 말이야. 무언가가 저 옥수수에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지. 나는 그게 쇠비름인 것 같구나. 다른 조건은 똑같은데 쇠비름이 가장 잘 자라는 곳에서 가장 좋은 옥수수가 열렸어.” … 모든 경우에 잡초는 농작물에게 골칫덩이라기보다는 보호식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 “눈보라 치는 날 사슴을 잡으려면 얼마쯤은 떨어져 있는 잡초밭으로 몰아야 해. 잡초밭은 가장 추운 날에도 따뜻하거든. 사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어떠한 화학물질도 토양에서는 자연의 건설적인 섭리를 방해하여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  (16, 24, 29, 84쪽)



  연필을 손에 쥐고 숲을 읽습니다. 연필을 손에 쥐기에 숲을 읽습니다. 연필을 손에 쥐면서 살며시 눈을 감으니 숲을 읽습니다. 연필에 깃든 숲내음은 맑고, 연필에 서린 숲내음은 곱습니다.

  어쩜 이리 맑고 고울까요. 어쩜 이다지도 착하며 참다울까요.


  아이와 함께 연필을 손에 쥡니다. 아이는 연필을 손에 쥐면서 온누리를 손에 쥡니다. 어버이는 아이 곁에서 연필을 손에 쥡니다. 어버이는 연필을 손에 쥐면서 온누리를 지은 손길을 느낍니다.


  연필을 쥐기에 가슴이 뜁니다. 연필을 쥐기에 가슴이 벅찹니다. 연필을 쥐기에 모든 것을 이룹니다. 연필을 쥐면서 빙그레 웃기에 노래가 태어나고, 삶이 춤추며, 사랑이 꽃으로 거듭납니다.



.. 잡초는 토양의 충실한 파수꾼이 된다. 농부가 잡초를 지혜롭게 이용할 때 결과적으로 잡초는 농부의 친구가 된다 … 미국의 식량생산 토지가 나빠진 주요 원인은 지연적인 토양개량 식물인 야생초를 제멋대로 파괴한 데 있다 … 거의 가려 보기가 힘든 작은 것부터 커다란 곤충과 벌레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크기의 토양생물들이 흙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 골짜기의 흙을 두 손에 집었을 때, 나는 흙 자체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 수확을 한 후 농부들이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잡초들, 즉 돼지풀·고들빼기·엉겅퀴·해바라기·까마중 등은 뿌리 작업을 다음 번 농작물을 위한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에 존재하는 토양 건설자들이 토양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견고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  (30, 38, 39, 55, 62쪽)



  저 너른 들판에서 자라는 모든 풀은 연필로 짓습니다. 저 드넓은 바다에서 사는 모든 목숨은 연필로 짓습니다. 저 가없는 하늘을 가르며 나는 모든 새는 연필로 짓습니다.


  아니, 어떻게 연필로 지을까요? 연필이란, 꿈꾸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연필이란,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연필이란, 씨앗을 심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연필과 숨결이 비슷한 호미를 손에 쥡니다. 호미를 손에 쥐고 땅을 갈아 밭을 가꿉니다. 밭을 가꾸는 내 손길은 투박합니다. 투박한 손길로 호미를 손에 쥐어 밭에 이야기를 짓습니다. 무를 짓고 배추를 지으면서 이야기가 한 타래 두 타래 자랍니다. 오이를 짓고 토마토를 지으면서 이야기가 석 타래 넉 타래 자랍니다.


  때로는 연필과 숨결이 비슷한 도마를 손에 쥡니다. 도마를 부엌 한쪽에 정갈하게 놓고 부엌칼도 손에 쥡낟. 아아, 나는 밥을 짓습니다. 통통통 도마질 소리가 부엌에서 태어나면,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지요. 이야아, 맛난 밥이 태어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군침을 흘립니다. 아이들은 더욱 신나게 뛰놀면서 밥내음을 기다립니다.



.. 그 지점을 조사하던 나는 우물 파는 짓을 중지시켰다. 그때 그 발견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친구들은 금이라도 찾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 깊은 곳까지 내려 뻗은 잡초의 뿌리였다. 나의 과학지식은 보잘것없었지만, 친구들에게 그 잡초 뿌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땅이 경작된 뒤를 따라서 그곳에 뿌리를 내린 잡초로 인하여 땅속에는 새로운 경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 잡초들이 그토록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했던 일들이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삶터인 망가진 표토를 재생시키기 위해서였다 … 농작물이 자라는 밭이나 생산성 향상이 절실한 농장에서는 우선적으로 잡초를 잘 자라게 하는 방법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  (40, 42, 63쪽)



  조지프 코캐너 님이 쓴 《잡초의 재발견》(우물이있는집,2013)을 읽습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은 시골사람으로 태어났고, 대학교에서 풀을 살피는 학자로 삽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은 시골에서 태어나 흙을 만지면서 풀을 동무로 삼았고, 풀과 동무가 되어 놀았기에, 오랫동안 풀을 아끼고 섬기면서 함께 삽니다.


  《잡초의 재발견》은 어떤 책일까요? 풀을 사랑하는 넋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풀을 먹고 사는 우리가 어떤 숨결이 되는가를 밝히는 책입니다. 풀 한 포기에 어떤 숨결이 깃드는지 들려주고, 풀에 깃든 숨결을 먹는 사람은 몸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 하층에서 표층으로 퍼 올리는 풍부한 영양물질들이 토양을 강하게 할 뿐 아니라 토양을 개선시켜 경종작물의 양분 흡수지층까지도 확장시키는 야생식물의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잡초 뿌리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수분 약탈자가 아니라는 걸 농부들이나 정원사들에게 인식시키기는 쉬운 노릇이 아니다 … 잡초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잡초가 희박하거나 전혀 없는 땅에서 자란 농작물보다 훨씬 수분 부족을 덜 겪을 것이다 … 한 종의 식물이 어느 지역을 독차지하는 곳에서는 그 식물 역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 여러 나무가 혼재하는 숲은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숲들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여러 나무가 혼재하는 숲은 구조적으로 함께 더불어 작용할 수 있었던 다양한 뿌리 체계 때문에 생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  (74, 78, 80, 81쪽)



  그나저나, 《잡초의 재발견》이라는 책은, 책이름이 왜 ‘잡초의 재발견’일까요? 이 책은 ‘잡초’가 아닌 ‘풀’을 다룹니다. 그리고, 풀을 ‘재발견’하지 않고, ‘언제나 풀을 보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니, ‘풀을 보다’를 외친 책이 《잡초의 재발견》입니다. 글쓴이 조지프 코캐너 님은 ‘잡초’를 말하지 않고 ‘풀’을 말해요. 풀을 바라보면서 ‘풀바라기’가 되고, 풀바라기를 하면서 삶을 푸르게 가꾸도록 이끄는 숨결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풀 한 포기에서 태어난 바람이 불어, 이 바람은 온누리를 푸르게 적습니다. 풀 한 포기에서 깨어난 씨앗이 바람을 타고, 이 씨앗은 온누리를 푸르게 돌봅니다.


  풀내음이 맑습니다. 풀빛이 밝습니다. 풀을 이야기하고, 풀을 사랑하며, 풀을 노래하는 책은 더없이 따사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풀씨 하나에서 태어난 몸이니까요. 우리 마음은 가없는 사랑에서 태어났고, 우리 몸은 끝없으면서 아주 작은 풀씨 한 톨에서 태어났습니다.



.. 그는 모든 야생 식물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왜냐하면 야생 생물은 모두 유익하고 인디언의 생활과 행복을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 “인디언은 잡초들을 먹기 때문에 밭에서 잡초들이 자라도록 그냥 둡니다.” … “인디언들은 옥수수 호박을 먹는 것처럼, 싱싱한 야생초들을 많이 먹습니다.” … 멕시코 인디언은 농작물과 함께 잡초를 기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잡초들 사이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게 했던 것이었다 … 잡초가 없다면 많은 영양물질은 토양계로부터 씻겨 내려가거나 떨어져나가서 어찌 됐든 없어질 것이다 … 내가 어릴 때 아주 존경할 만한 남자가 이웃에 이사 왔던 적이 있다. 그는 아주 황폐한 농장을 사서 야생동물의 안식처로 바꿈으로써 농장을 개선시켰던 사람이다 ..  (92, 93, 94, 96, 101, 172쪽)



  연필을 손에 쥐고 그림을 그립니다. 연필을 손에 쥐기에 글을 씁니다. 연필을 쥔 사람은 마음이 착합니다. 연필을 손에 잡은 사람은 마음이 넓습니다.


  무엇이든 짓기에 마음이 넉넉하지요. 무엇이든 이루기에 마음이 너그럽지요. 무엇이든 다 하면서 다 되기에 마음이 널따랗지요.



.. 잡초를 심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잡초는 대체로 필요한 곳에서 스스로 자라고, 그것은 잡초가 건설적인 역할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현대의 파괴적인 경작관행으로부터 잡초가 토양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것과 같이, 작은 키 목초식물이 자랐던 평원에서 잡초들은 모래 강풍을 극복하면서 토양을 보호하고 있다 … 자연은 지구의 녹색 융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잡초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던 것이다 … 채소 재배 농부라면 가로수에서 떨어진 잎들을 모아 태우면 안 된다. 낙엽은 퇴비 원료로 가장 좋은 것이다 … 새들이 업다면 살충제나 벌레 퇴치제를 써도 곤충들이 창궐하여 지구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  (121, 130, 133, 146, 169쪽)



  자, 여기에 풀이 한 포기 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셔요. 바람이 풀잎을 어떻게 간질이는지 가만히 지켜보셔요. 바람이 풀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셔요. 바람이 풀을 어떻게 깨우는지 살뜰히 지켜보셔요. 풀은 바람과 함께 삽니다. 풀은 바람을 마시면서 바람이 되고, 풀은 바람과 벗이 되면서 바람을 부릅니다.


  자, 여기에 풀씨가 한 톨 있습니다. 예쁘게 지켜보셔요. 바람이 풀씨를 어떻게 땅에 떨구어 뿌리가 내리도록 돕는지 예쁘게 지켜보셔요. 나 스스로 풀씨가 되어 바람을 느껴 보셔요. 내가 바로 풀씨가 되어 이 땅에 뿌리를 내려 보셔요. 내가 언제나 풀씨로 살면서 온누리에 푸른 숨결을 뿌려 보셔요.


  바람은 내 동무가 되어 함께 삽니다. 바람은 내 이웃이 되어 함께 웃습니다. 바람은 내 님이 되어 함께 노래합니다.



.. 청년 시절 인디언 지방에 있었을 때, 인디언들은 백인보다 훨씬 오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잡초들이 장수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 어미새들이 어디서 그런 벌레들을 충당했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 마리 굴뚝새가 그 여름 정원에서 질 좋은 양배추가 자랄 수 있도록 벌레를 잡아 도와준 점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 세상을 사랑하려면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소년소녀은 들판과 산림 그리고 잡초덤불에 나가서 야생생물의 생활에 대해 배워야 한다 … 경사지에 도달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적은 양의 물만이 잡초덤불을 통하여 시내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잡초들은 이미 빗물을 저장하기에 충분한 스펀지 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  (162, 180, 192쪽)



  조지프 코캐너 님은 “자연은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완전한 책이었다(41쪽).” 하고 말합니다. 네, 숲은 너그러운 책입니다. 숲은 넉넉한 책입니다. 숲은 넓은 책입니다.


  숲이라는 책에는 온갖 이야기가 깃듭니다. 숲이라는 책에는 모든 노래가 살아서 숨쉽니다. 숲이라는 책에는 우리가 사랑하고 꿈꾸는 하루가 고스란히 깃듭니다.


  숲을 읽는 사람이 삶을 읽습니다. 숲을 읽어서 삶을 짓는 길을 헤아리는 사람이 삶을 노래합니다. 숲을 읽어서 삶을 사랑하는 하루를 꿈꾸는 사람이 삶에 웃음꽃을 피웁니다.



.. 옛날에 비옥했던 많은 농지들은 너무 황폐해져서 잡초조차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꼴이었다 … 농업생산의 기계화는 좋은 일이지만, 자연과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기계라면 곤란을 겪을 것이다 … 동물계가 병들게 되는 것은 토양계의 상생 법칙이 깨지기 때문이다 … 잡초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같이 그 버려진 들판을 걸어 본다면 야비한 잡초에게라도 약간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212, 220, 221, 225쪽)



  《잡초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덮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책을 덮습니다. 책을 덮고 ‘번역’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야비한 잡초’ 같은 말마디를 가만히 생각합니다. 풀은 그저 풀인데, 풀한테 무엇이 ‘야비’할까요?


  찬찬히 헤아리면, 아무래도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시골에서 손수 흙을 가꾸면서 숲을 이루는 삶을 누리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시골에 살아도 풀과 이웃이 되지 못한 채 번역을 했고, 도시에 살아도 풀을 동무로 삼아 언제나 함께 노래하는 삶이 못 된 채 번역을 했구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번역이 ‘옥구슬에 묻은 티’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책을 장만해서 읽을 많은 사람들도 풀을 모르고 숲을 모를 테니까요. 풀과 숲을 모르는 채 책만 읽을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숲을 읽으면 ‘종이책’은 안 읽어도 됩니다. 숲을 읽을 줄 아는 눈이라면 ‘종이책’뿐 아니라 ‘전자책’도 딱히 안 읽어도 됩니다. 숲을 읽기에 ‘종이책’이 어떠한 숨결인지 환하게 읽습니다. 《잡초의 재발견》을 한국말로 옮긴 멋진 분을 비롯해서, 이 책을 즐겁게 장만해서 읽을 모든 분들이 두 발로 땅을 씩씩하게 밟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 두 손으로 땅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숲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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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멍청이 책읽기



  말을 배우는 사람은 바보가 됩니다. 말을 안 배우는 사람은 멍청이가 됩니다. 언뜻 보자면, 말을 배우는데 왜 바보가 되느냐 싶지만, 말을 배우기에 바보가 됩니다. 말을 배우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깨닫기에 바보가 됩니다.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는 바보는 이제부터 하나씩 배워서 받아들입니다. 바보가 되는 사람은 스스로 깨어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멍청이가 되는 사람은 무엇일까요. 말을 안 배우기에 멍청이가 되는데, 말을 안 배운다고 할 적에는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안 깨닫습니다. 그러니 멍청이입니다. 멍청이는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 안 깨닫기에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그저 멍하니 있을 뿐입니다. 배움이 없기에 슬기롭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하니 철들지 않습니다. 멍청이는 늘 철부지입니다.


  바보는 철이 듭니다. 철이 드는 바보는 어느새 무르익습니다. 무르익은 바보는 곧 슬기로움을 알아채고, 슬기로움을 다시금 녹여서 사랑으로 피어나게 합니다. 온누리에 있는 모든 ‘깨달은 사람’은 바보입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내 숨결을 깨달은 사람’이기에 바보요,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으며, 무엇이든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배워서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이제껏 하나도 모른 줄 바르게 바라보고 바르게 배워서 바르게 거듭나야 합니다. 말을 배워야지요. 말을 배워서 바보가 되어야지요. 말을 배워 바보가 된 뒤, 차근차근 거듭나서 오롯이 서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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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 홀가분하다, 낱사람 (자유, 개인)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자유’라는 낱말울 씁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쓰지만, 어린이도 쓰고,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두루 쓰며, 초등학교나 유치원에서도 흔히 씁니다. ‘개인’이라는 낱말도 곳곳에서 널리 씁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거나 뜻하는지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自由’를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풀이하고, ‘個人’을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한자말은 한국사람이 지은 낱말이 아니고, 일본사람이 서양 문화와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에서 지은 낱말입니다. 일본사람은 이러한 낱말을 지으려고 퍽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서 생각을 기울였고, 한국사람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이 낱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사람이 이 낱말을 그대로 따랐다기보다, 일본 정치권력한테 짓눌리는 식민지 종살이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한 낱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일본 정치권력 종살이를 하지 않았으면, 영어로 ‘free’나 ‘personal·individual’을 그대로 썼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에는 그냥 영어를 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한자말이 익숙하지 않으면서, 어릴 때에 일찍 영어를 만났으면 영어로 내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환경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green’이라는 영어를 쓰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중국 한자말 ‘초록’이나 일본 한자말 ‘녹색’이 익숙하면, 이러한 낱말을 쓰고, 영어가 익숙하면 ‘그린’을 쓰지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이 익숙한 환경운동 사람은 거의 없어서 ‘풀빛·푸름’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러면, ‘자유’나 ‘프리’란 무엇일까요. 이런 낱말을 사회에서 받아들여 쓰기 앞서, 지난날에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떤 낱말로 이러한 기운이나 흐름을 나타내려 했을까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습”일까요? 그러면 “내 마음대로”는 무엇일까요?

  예부터 이 땅에서는 ‘홀가분하다’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홀가분하다’는 “홀로 가볍다”입니다. ‘홀’은 ‘홀짝’을 이루기도 하고, ‘하나(1)’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홀짝’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고 가르는 자리일 테고, ‘하나(1)’를 가리킨다면 그저 하나만 있는 모습입니다.

  그저 하나만 있기에 남을 휘두르지 않고, 내가 남한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가 있기에 다른 것을 건드리거나 흔들지 않으며, 그저 하나이기에 너와 내가 갈리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홀(홀로)’은 오직 하나가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이기에 따로 무게가 없다고 여길 만하고, 이러한 느낌에 ‘가분하다(가볍다)’가 붙습니다. “홀로 가볍게 움직이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생각하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하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있다”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낱말로 가리키려는 뜻이란, 한국말 ‘홀가분하다’로, 이 두 낱말은 “내가 오직 나로 서기에 내가 가볍게 움직이면서 모든 것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이라는 낱말은 “낱 + 사람”입니다. 한국말사전에서도 이 대목을 다룹니다. 그러나, 앞에 엉뚱한 꾸밈말을 붙이지요. ‘낱 + 사람’인 ‘낱사람’은 나라나 사회 따위를 이루는 ‘낱’이 아닙니다. “덩어리에서 떼어낸 하나”가 ‘낱’이고 “하나가 덩어리에서 떨어지면”서 ‘낱’입니다.

  ‘개인주의’라고 할 적에는 나라·사회·모임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나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모습이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낱사람’은 덩어리에서 떨어지는 사람인 한편, 덩어리에서 나를 떨어뜨린 사람입니다. 한덩어리로 있던 곳에서 한 사람을 떨어뜨려서 ‘낱’이 된 사람이고, 한덩어리로 있던 곳에서 나를 녹여서 없애려 하기에 녹아서 없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스스로 떨어져 ‘낱’이 된 사람입니다. 4348.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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