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5.1.11.

 : 놀이터가 그리운 아이들



- 아이들이 놀이터를 그린다. 바람이 불건 비가 오건 놀이터에 가고 싶다 말한다. 그래, 우리 집 뒤꼍을 놀이터로 삼으면 뒤꼍에서 언제나 놀 수 있을 테지. 다만, 아직 뒤꼍을 놀이터로 꾸미지 못했으니,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 놀이터로 가야 한다. 한겨울이건 한여름이건 놀이터에는 즐겁게 가자. 씩씩하게 자전거를 달리자. 뜨거운 바람도 쐬고 차가운 바람도 맞자. 따사로운 바람도 먹고 시원한 바람도 마시자.


- 놀이터에서 실컷 논 작은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폭 잠든다. 큰아이는 샛자전거를 타고 돌아와야 하니 졸려도 잠들 수 없다. 씩씩하게 함께 달린다. 그런데 바람이 꽤 드세어 들길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세우기로 한다. 집까지 걸어가자. 걸어가면 바람을 덜 맞으니까. 큰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논둑길로 접어든다. 논둑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집으로 간다. 다음에는 바람이 잔잔한 날에 놀이터로 나들이를 가자.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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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 추억의 1970년대 눈빛포토에세이 3
박신흥 지음 / 눈빛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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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1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긴다

―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

 박신흥 사진

 눈빛 펴냄, 2015.1.5.



  2015년을 한복판에 놓고 살피면, 마흔 해 앞서는 1975년이고, 마흔 해 뒤는 2055년입니다. 오늘 2015년을 사는 사람한테 1975년은 어쩐지 퍽 까마득한 지난날이 될 만하고, 2055년도 무척 까마득한 앞날이 될 만합니다. 나이가 마흔 살이 넘는 사람이라면 1975년이 애틋하게 그리운 날이 될 테고, 아직 서른 살이 안 되었거나 이제 막 열 살을 넘었으면, 1975년을 떠올리기는 몹시 어려울 테지만 2055년을 기다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와 젊은이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넉넉하고, 아저씨(아줌마)와 어르신은 지나온 발자국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1975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오래도록 애틋한 그리움이 됩니다. 누군가 2015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이날부터 2055년까지 살가운 그리움이 됩니다. 햇수를 더 먹기에 애틋하거나 살갑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그리움을 사진에 싣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그리울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아무런 느낌이나 이야기를 사진에 얹지 않는다면, 백 해나 이백 해가 흐르더라도 아무런 느낌이나 이야기를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 1970년대 그무렵의 사람들은 토속적인 사람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듯 무심하면서도 정이 담겨 있었다. 그 시대의 이야기가 표정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  (10쪽)



  사진책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눈빛,2015)를 읽습니다. 《예스터데이》를 펴낸 박신흥 님은 1970년대에서 ‘추억’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박신흥 님 스스로 그무렵에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에 사진을 찍은 사람은 꽤 많습니다. 그러면 그무렵에 사진을 찍으면서 ‘1975년에 찍는 이 사진은 앞으로 추억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2015년 오늘 사진을 찍으면서 ‘2015년에 찍는 이 사진은 앞으로 추억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묵은 사진이기 때문에 ‘추억’이 되거나 ‘어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찰칵 소리를 내도록 단추를 누르는 사람이 스스로 마음밭에 추억이라는 씨앗을 심기에, 이 사진 한 장이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거나 노랫가락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습니다. 사진기는 지구별 곳곳에 널리 퍼졌습니다. 사진기는 수십만 대나 수백만 대가 팔렸고, 어쩌면 수천만 대나 수억만 대가 팔렸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많은 사진기로 저마다 어떤 사진을 찍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진기가 수백만 대가 팔렸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녁 삶을 사진으로 담는지요? 수백만에 이르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을 노래하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사진으로 얹어 ‘다 다른 사진책 수백만 권’을 지을 만한지요?





..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고, 아이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  (15쪽)



  어제 태어나서 어제 살던 사람한테 오늘은 새로운 하루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가꾸느라 바쁠 테니, 어제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기 일쑤입니다. 오늘 하루를 누리느라 기쁘거나 신나거든요.


  오늘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오늘 사진 한 장을 찍으면, 이 사진 한 장은 ‘바로 오늘 찍’기 때문에 ‘바로 오늘’ 기쁨이 솟습니다. 지나간 모습을 찍기 때문에 기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모습을 찍기에 벅차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함께 얼굴을 마주하면서 웃고 노래하는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를 찍는 사진이기에 기쁘면서 벅찹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늘’을 찍으면서 오늘 하루가 아름답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모레에 이르면, 어느새 오늘이 새로운 하루입니다. 오늘이었던 하루는 모레로 가면 어제가 됩니다. 이리하여, 새로운 모레인 새로운 하루에는 어제 찍은 사진을 ‘새롭게 잊’습니다. 어제 찍은 사진을 ‘새롭게 잊’기 때문에, 오늘 하루에도 ‘오늘을 새롭게 마주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바로 이곳에서 새삼스레 찍습니다.


  그런데, 어제를 잊지 못하는 사람은 어제 찍은 모습에 얽매인 나머지, ‘오늘 이곳에서 바로 내가’ 찍을 사진을 그만 놓칩니다.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지만, 어제 찍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든다면, 앞으로(모레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 요즘은 사람을 주제로 한 사진을 찍기가 참 어렵다. 일일이 양해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초상권 시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  (34쪽)



  사진책으로 엮는 사진은 모두 ‘어제’ 찍은 모습이라 할 텐데, 어제 찍은 모습만으로는 책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제이면서 바로 오늘이요, 오늘이면서 새롭게 모레로 나아가는 모습일 때에 사진책을 엮습니다. 우리가 엮어서 함께 누리는 사진책은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하나되는 숨결을 담은 사진’을 그러모읍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에는 틀림없이 1970년대 모습이 애틋하면서 아련하면서 사랑스럽게 흐릅니다. 그리고, 이 사진책에 깃든 모습을 2015년 바로 오늘 이곳에서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박신흥 님이 1970년대 느끼거나 누린 ‘사랑스럽고 살가운 사람한테서 피어나는 따사로운 눈망울’을 2015년 바로 오늘 이곳에서 느끼거나 깨닫거나 알아본다면,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는 사진은 앞으로 2055년으로 힘차게 달리는 ‘새롭게 사랑스럽고 새롭게 애틋하며 새롭게 살가운’ 사진이 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마흔 해쯤 뒤에 ‘짠!’ 하고 내놓아서 사진책으로 엮을 만한 사진을 오늘 찍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찍은 사진을 마흔 해쯤 묵힌 뒤에 선보이면 ‘이야 놀랍네!’ 하고 느낄 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 나눌 만한 사진이기에, 열 해 뒤나 스무 해 뒤나 마흔 해 뒤에도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도 나눌 만한 사진입니다.





.. 현재라는 시간성 속에 묻혀 있는 삶의 발자국에는 잃어버린 내 모습이 있다 ..  (70쪽)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모레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오늘은 곧바로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찍은 사진은 곧바로 어제가 되지만, 어제가 되는 오늘 찍은 사진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우리 가슴을 적시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한결로 흐릅니다. 어느 한 가지만 똑 떨어진다면, 이것은 ‘작품’은 될 터이나 사진은 못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두드러진다면, 이것은 ‘기록’은 될 테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생각해서 찍는다면, 이것은 ‘문화’나 ‘역사’는 될 테지만 사진은 될 수 없습니다.


  작품을 하려고 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기록을 남기려고 사진을 남기지 않습니다. 문화나 역사가 되려고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읽으려는 우리는 늘 ‘삶을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누리려는 사랑’을 가슴에 품습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가 반갑다면, 작품도 기록도 문화도 역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따사로운 사랑으로 내가 나를 마주하고, 이웃과 동무를 사귀며, 꿈을 작은 씨앗 한 톨로 심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깁니다. 어제 넘기는 첫째 쪽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첫째 쪽을 넘기고, 이튿날 둘째 쪽을 넘깁니다. 날마다 한 쪽씩 신나게 넘깁니다. 지난 마흔 해에 걸쳐 꾸준하게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삶이기에 어느덧 사진책 한 권이 태어날 만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꿈꾸고 사랑하는 하루이기에, 이러한 꿈과 사랑을 모아서 사진책 한 권으로 엮을 만합니다.


  아침에 동이 틉니다. 저녁에 노을이 지면서 해가 기웁니다. 달이 뜨고 별이 돋습니다. 다시 동이 트고, 또 해가 하늘에 걸리더니, 어느새 노을이 지면서 해가 이울다가, 새삼스레 달과 별이 찾아옵니다. 깊은 두멧시골에서는 미리내가 하늘을 밝힙니다. 아주 깨끗한 두멧자락에서는 온갖 빛깔로 눈부신 미리내가 하늘을 덮습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밤빛은 ‘까만 바탕에 박힌 하얀 점’이 아닙니다. 드넓은 알래스카나 시베리아나 몽골 같은 곳에서 바라보는 밤하늘빛은 무지개빛이라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만 하더라도 달빛조차 느끼기 어려워요. 그래서, ‘무지개처럼 빛나는 미리내’를 맨눈으로 본 사람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러면 밤무지개를 본 사람이 없으니 밤무지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테지요? 오늘 이곳에서 첫째 쪽을 넘기는 아름다운 사랑과 같은 사진을 찍은 사람한테는, 사랑은 손에 잡을 수 있고 마음밭에 씨앗으로 심을 수 있는 따사로운 숨결입니다. 우리 누구나 따순 바람이 되어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4348.1.3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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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7. ‘사람’과 ‘국민’과 ‘백성’

― 누가 ‘이곳’에서 쓰는 말인가



  요즈음은 정부에서 ‘국민(國民)’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백성(百姓)’이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요즈음 생각 있다는 사람은 ‘시민(市民)’이나 ‘서민(庶民)’라는 낱말을 쓰는데, 한동안 ‘민중(民衆)’이나 ‘민초(民草)’ 같은 낱말이 두루 나돌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권력과 동떨어진 채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모저모 살피면, 정부에서 쓰는 말이나 지식인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이뿐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을 좀처럼 안 쓰고, 여느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흔히 쓰는 ‘이웃’이라는 말도 어지간해서는 안 씁니다.


  ‘국민’은 일제강점기에 천황을 섬기던 이웃나라에서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퍼뜨린 한자말입니다. 이리하여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었어요. 그렇지만 ‘국민투표’라든지 ‘국민의 소리’라느니 하면서, 이 낱말을 제대로 씻거나 떨치려는 사람은 거의 안 보입니다. 지난날 조선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가른 탓에, 사람을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고, ‘이웃’이란 시골자락에서 수수하게 흙을 짓던 사람들이 마을을 조촐히 이루어 서로 주고받는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지난날 조선에서는 임금과 백성이 이웃 사이가 아니었으며, 양반과 농사꾼도 서로 이웃 아이가 아니었어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쓰던 말이 ‘백성’이요, 이런 낱말에는 예전 사회와 정치 얼거리가 고스란히 깃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우리는 국민도 백성도 아니지만, 시민이나 서민도 아닙니다. 낱말로만 보아도 ‘시민’은 “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군이나 읍이나 면에서 사는 사람은 군민이나 읍민이나 면민이에요. 오늘날은 도시사람이 92%가 넘는다지만, 여느 사람을 함부로 ‘시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벼슬이나 특권이 없는 사람을 ‘서민’이라 한다는데, 이 또한 사람을 계급과 신분으로 가르는 이름입니다. 지식인은 ‘민중·민초’ 같은 이름을 한자말로 짓지만, 정작 민중이나 민초라 할 사람은 한자 권력이나 지식하고는 등진 채 살았습니다. 지식인이 “여느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쓰려 했다면, 여느 사람 살림과 터전을 헤아려 ‘시골사람’이나 ‘들사람’ 같은 이름을 써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와 나 사이에 울타리를 걷어내어 오롯이 ‘사람’이라고만 써야지요.


  지난날 ‘훈민정음’은 한자를 중국말대로 읽도록 적으려고 쓴 소릿값(발음기호) 구실을 하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라는 그릇은 권력자와 지식인만 살짝 썼을 뿐, 여느 자리에서 살던 사람(백성)은 이러한 그릇을 알지도 배우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입으로 말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한국말을 담는 그릇입니다.그런데 오늘날 한글이라는 그릇에는 한국사람이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담기기보다는, 온갖 한자말과 영어가 어수선하게 섞일 뿐 아니라,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가 두루 파고들어 짬뽕이 됩니다.


  짬뽕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짬뽕이 되면서 한국말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으면서 어떤 생각을 말이나 글로 담으려 했는지 잊습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잃거나 팽개치면서 어떤 넋을 말이나 글에 실어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가까지 잃거나 팽개칩니다.


  ‘사람’과 ‘人間’은 다릅니다. ‘사람’과 ‘human’은 다릅니다. 이러한 말이 태어난 곳도 다르고, 이러한 말을 쓴 발자취와 나날도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나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북돋우기보다는, 학교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두어 입시지옥으로 내몰아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다가, 대학교를 마치면 다시 취업지옥으로 몰아세워서 도시에서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도록 들볶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사람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새로 아이를 낳을 적에도 사람다운 숨결을 쉬지 못합니다. 말이 말다웁기 앞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이 없습니다. 말이 말답게 서기 앞서 사람이 사람답게 설 수 있는 터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백성도 국민도 시민도 서민도 민중도 민초도 대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입니다. 모두 똑같이 사람으로 이 땅에 서서 다 함께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사람으로서 쓸 말을 생각할 노릇이고, 이웃끼리 주고받을 말을 헤아릴 노릇이며, 동무끼리 나눌 말을 살필 노릇입니다.


  깨끗하다는 토박이말을 살린다거나, 지식을 키우려고 한자말이나 영어를 섞어 써야 한다거나, 죽은 옛말을 살린다거나, 사자성어를 부려 써야 한다거나, 시사상식을 키워야 한다거나, 이런 허울이나 저런 틀에 갇히지 말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쓸 말을 찾고, 이웃과 이웃이 아낄 말을 깨달으며, 동무와 동무가 어깨를 겯을 말을 지어서 가꿀 노릇입니다.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어떤 말’로 ‘국무회의’ 같은 자리를 마련했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한국말’을 썼을까요, 아니면 중국말을 썼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뿐 아니라 양반은, 그무렵 이 나라에서 99%를 웃돌던 여느 시골자락 흙지기가 수수하게 쓰던 ‘한국말’로 정치나 정책을 펼쳤을까요, 아니면 중국말로 말과 글을 썼을까요?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통령과 공무원과 지식인과 학자와 교사는 어떤 말을 쓰는가요? 교과서에 얽매인 말을 쓰는가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는가요? 높고 낮은 신분이나 계급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말’을 여느 사람 눈높이로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쓰는가요?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잘 캐내든 말든 놀랍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이웃과 동무를 아끼는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날마다 새롭게 배워서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4347.12.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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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1-31 01:57   좋아요 0 | URL
사람다운 말, 맞습니다. 함께 사는 아름다운 말. 또 배우고 갑니다.

파란놀 2015-01-31 09:58   좋아요 1 | URL
사랑스러우면서 평화로운 말이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람이 되는 말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민들레처럼 2015-01-31 11:23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상관이 없는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아내를 부르는 말이 무엇인가요? 주로 저희 집사람은 여보, 저는 당신 이렇게 부르는데. 부부 사이는 평등하다고 해서 임자, 가시버시..이런 말들이 있던데 어떻게 부르는게 제일 좋을까요?

파란놀 2015-01-31 11:41   좋아요 1 | URL
http://blog.aladin.co.kr/hbooks/7343434

이 주소에 쓴 글이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쓰든 `말하는 사람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져요.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을 쓰더라도
말하는 사람 마음이 곱지 않으면
고운 말은 태어나지 못해요.

예부터 시골에서는 `이녁`이나 `임자` 같은 말을 썼어요.
어느 한쪽 성별을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에 없어요.
둘을 아우르는 이름만 있답니다~

`여보`는 ˝여 보시오˝ 하고 부르는 말일 뿐이랍니다~
 

시골버스를 함께 타고 다니기



  아이들과 시골버스를 탄다. 왜냐하면,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사니까. 시골버스는 시골길을 가르면서 달린다. 시골버스는 이쪽 시골에서 저쪽 시골로 간다. 시골에서도 모든 버스는 읍내로 간다. 시골에서는 모든 시외버스가 도시로 가고, 고장마다 있는 도시는 죄다 서울로 가듯이, 모든 길은 ‘도시’로 뻗는다. 길은 왜 도시로 뻗을까? 도시로 가라는 뜻일 테지. 그러면 왜 도시로 가라는 뜻일까? 도시에 사람들이 모여야 돈이 된다고 여기니까.


  우리 아이들은 그냥저냥 버스를 타고 놀면서 즐겁다. 버스놀이를 한다. 버스놀이를 하니까 버스를 탈 적마다 즐겁고, 즐거운 버스마실은 아이들한테 즐거운 숨결이 된다. 4348.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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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느라 전화 못 받는 아버지



  오늘은 큰가방을 빨 생각이었다. 큰가방에다가 곁님 옷가지랑 이럭저럭 꾸려서 빨래기계를 쓰려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거린다. 이런 날에는 가방을 빨지 못한다. 가방이 잘 마르려면 해가 나야 하니까. 하는 수 없이 빨래를 하루 미룰까 하다가, 자잘한 옷가지 몇은 손으로 빨까 싶어서 조물조물 주무른다. 아마 이동안에 전화가 온 듯하다. 그렇지만, 빨래에 마음을 듬뿍 쏟느라 전화기 울리는 소리를 못 듣는다. 빨래를 하면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가 하는 일이 어떠한 숨결인지 헤아린다. 빨래를 마치고 기쁘게 넌다. 방바닥에 큰아이가 바이올린을 펼쳐 놓았기에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큰아이를 불러서 나즈막하게 타이른다. 얘 얘, 이렇게 바닥에 널브러뜨리면 밟을 수 있잖니, 얼른 상자에 담으렴. 척척 빨래를 너는 동안 쪽글이 온다. 빨래를 널 적에는 비빔질도 헹굼질도 안 하니 쪽글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빨래를 모두 널고 나서 홀가분하게 쪽글에 답글을 보낸다. 4348.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빨래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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