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5.9 - Vol.22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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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15



우리가 사진을 ‘읽을’ 때는 언제일까

― 사진잡지 《포토닷》 22호

 포토닷 펴냄, 2015.9.1. 1만 원

 정기구독 문의 : 02-718-1133



  즐거울 때에 사진을 즐겁게 읽습니다. 즐거운 날에는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움이 새롭게 샘솟습니다.


  고단할 때에 사진을 고단하게 읽다가, 어느새 고단함을 가만히 씻습니다. 즐거운 날에는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서 더욱 즐거운 마음이 된다면, 고단한 날에는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느새 고단함을 녹입니다.


  옛말에 기쁨은 곱절로 북돋우고 슬픔은 반토막으로 나눈다고 했습니다. 살가운 곁님이나 동무나 이웃은 기쁨을 한결 따스하게 북돋웁니다. 이러면서 슬픔은 나누어 받으면서 너그러이 달래지요.


  마음이 아프다든지 일이 힘들다든지 살림이 팍팍할 적에는 언제나 아이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내가 찍은 우리 아이들 사진은 나한테 새롭게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사진에서 웃는 아이들은 늘 나더러 웃으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사진에서뿐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늘 웃습니다.



인천 이외의 지역도 찍었지만 개인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인천 만수동을 비롯한 주택지역은 예상치 못했던 장면들을 불쑥불쑥 마주하게 되면서 찾아내는 재미를 느꼈다. 또한 그 모습 자체도 제멋대로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서울 도심에서는 어느 정도 찍다 보니 질려 버렸다.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조경인데다 지속적인 관리를 받고 있어 몇 가지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32쪽/유리와)


작업 과정 자체가 퍼포먼스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으로 기록도 하고 싶었지만, 예산과 인력의 부족 문제로 실행하진 못했다. (43쪽/임형태)



  사진잡지 《포토닷》 22호(2015년 9월호)를 읽으며 우리가 사진을 읽을 때는 언제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그러니까 ‘사진찍기’ 말고 ‘사진읽기’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누구나 사진을 찍어요. 전문가나 작가뿐 아니라 ‘안 전문가’도 사진을 찍습니다. ‘취미’로도 사진을 찍고, 전문가도 아니요 취미도 아니라 하더라도 사진을 찍어요. 이를테면 시골 할매가 이녁 손자를 손전화로 찰칵 찍은 뒤 액정 화면으로 담습니다. 한 해에 두 차례 있는 큰 명절에만 손자를 만나더라도, 한 해에 두 차례 사진을 찍지요. 볼 때마다 새삼스레 크는 손자를 손전화로 찍는 시골 할매는 무척 많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시골 할매가 ‘도시에 사는 손자’를 그리면서 찍은 ‘손전화 사진’을 죽 그러모아도 무척 재미난 사진전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아무튼, 사진찍기는 오늘날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진을 안 찍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작가’나 ‘사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강국제사진제에서 ‘동강사진상’ 수상자를 기념하는 정주하 작가의 전시장에서는 관객들의 다양한 물음들이 제기됐다. ‘왜 찍었을까,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어떻게 봐야 할까…….’ 상동의 질문들은 현대미술을 다룬 전시장에서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질문들이다. (50쪽/최연하)


작가들은 관람객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볼멘소리를 하겠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어떠한 대상을 재현하더라도 그것에 ‘예술’이라는 이름표만 붙여 주면 된다는 이들의 안일한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 한마디로 사진은 마음만 먹으면 작가 행세를 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수단이 되어 버렸다. (109쪽/장정민)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을까요?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을 수 있을까요?


  쉬우면서도 어려운 물음이라 할 텐데,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문 사진가만 찍는 사진이 아니듯이, 전문 비평가만 읽는 사진이 아닙니다. 전문 사진가만 값비싼 장비를 써서 찍어야 하는 사진이 아니듯이, 전문 비평가만 서양 철학이나 사상을 끌어들여서 읽어야 하는 사진이 아닙니다.


  시골 할매가 이녁 손전화로 손자 사진을 찍듯이, 또 시골 할매가 손전화를 켤 적마다 이녁 손자를 손전화 화면에서 보듯이, 우리는 누구나 ‘사진찍기’하고 ‘사진읽기’를 늘 함께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새롭게 하나 물어 볼 노릇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22호에서 최연하 님이 쓴 사진비평에 나오는 말처럼, 전시장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왜 찍었을까,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어떻게 봐야 할까…….’ 하고 묻는다면, 전문 사진가와 전문 비평가는 ‘전문가 아닌 여느 사람’한테 사진읽기하고 사진찍기를 어떻게 이야기할 만할까요?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고 언제 사진을 읽을까요?



별천지다. 찍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았지만 원칙적으로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다. 걸리면 벌금을 내고 우리 같은 비정규직은 바로 해고다. 거대한 작업 현장에서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온몸에 연장을 차고 마스크를 쓴 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폐쇄된 군대나 교도소를 떠올리게 한다. 길게 줄을 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사진이 대표적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앞에 선 줄이다. 20분을 줄을 서서 기다려 15분간 밥을 먹고 다시 작업장으로 가는 데 20분이 걸린다. (75쪽/변해석)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습니다. 2015년 최민식 사진상 특별상을 받은 변해석 님이 ‘조선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동무를 사진으로 찍듯이, 참말 누구나 어디에서나 언제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헤아릴 노릇입니다. 조선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하고 정규직 노동자를 찍은 사진을 볼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변해석 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 ‘못 알아보’거나 ‘못 알아차리’거나, ‘왜 찍었을까?’ 하고 물을까요? 아니면, 사진을 보는 동안 ‘이래서 찍었겠네’ 하고 느끼거나 이 사진이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곧바로 고스란히 알아챌까요?




전세계 곳곳에서 초대받은 사진 관계자들은 아침마다 란린거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자유분방하게 서로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커다란 전시장을 하나 빌려놓고 공무원 중심의 개막식과 테이프 커팅 세레머니 이후에 뒷풀이를 하고 헤어지는 폐쇄적인 한국의 사진축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90쪽/강제욱)



  한국은 아직 ‘사진 후진국’입니다. 번쩍거리는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많은 한국이지만, 한국은 아직 사진 후진국입니다. 작가로 뛰는 사진가가 제법 많고, 사진전시가 전국 곳곳에서 다달이 꽤 많이 열리지만, 한국은 아직 사진 후진국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전시가 제법 많다고 하지만 막상 사진책은 한 달에 몇 권 못 나옵니다. 사진책이 어쩌다가 한 권 나와도 잘 안 팔립니다. 전문 사진가는 전문가답게 서양 철학과 이론에 맞추어 이녁 사진을 해석하거나 비평하는 길로 접어듭니다. 젊은 사진가는 젊은 사진가답게 미국이나 유럽에서 새롭게 떠도는 흐름에 발맞추어 ‘사진기라는 장비를 빌어서 펼치는 아티스트 활동’을 합니다. 여기에 사진 동호인은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하지만 장비만큼은 누구보다 전문가답게 잔뜩 갖추어 ‘하이 아마추어’가 됩니다.


  삶으로 사진을 기쁘게 즐기는 사람은 뜻밖에 퍽 적습니다. 사랑으로 사진을 기쁘게 누리는 사람은 뜻밖에 꽤 적습니다. 꿈을 이루거나 펼치는 길에서 사진을 기쁘게 가꾸는 사람은 뜻밖에 참 적습니다.



꽃을 사진으로 찍든, 예쁜 이웃을 사진으로 찍든, ‘남들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멋져 보이거나 훌륭해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든, 새롭거나 낯선 모습을 사진으로 찍든, ‘전문가나 프로 작가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진은 내가 나답게 살면서 찍습니다. 나는 나답게 내 둘레를 바라보면서 찍습니다. 내 사진은 오직 나다운 사진이지, 너다운 사진이 아닙니다. 내 사진은 ‘나다운 사진’일 때에 ‘내 이야기’가 서리면서 ‘내 꿈과 사랑’이 피어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내 사진은 ‘브레송다운 사진’이거나 ‘카파다운 사진’이거나 ‘이런저런 잘 알려진 작가다운 사진’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사진을 읽는 사람이 ‘아, 이 사진을 보니 아무개 작가 사진이 떠오르네’ 하고 말한다면, 내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127쪽/최종규)




  우리는 멋있어 보이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남을 만한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달라 보이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워 보이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충격과 공포’를 준다고 하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찍는 사진’으로 하루를 즐겁게 누리면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찍은 사진을 기쁘게 읽으’면서 하루를 아름답게 누리면 돼요.


  ‘전문가처럼 잘 찍는’ 사진은 그야말로 부질없습니다. 브레송을 흉내낸다든지 살가도 꽁무니를 쫓는 사진을 찍는 일은 덧없을 뿐입니다. 쿠델카나 아담스나 앗제나 카쉬 사진을 따라하는 듯한 사진을 왜 찍어야 할까요?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삶을 가만히 사진으로 찍고 차분히 마음으로 읽으면 넉넉합니다.



1982년 울산에서 카메라를 처음 쥔 필자가 맨 처음 한 일은 서점으로 가서 사진잡지를 산 것이었다. (100쪽/진동선)


우리가 어떻게 (사진을) 만들었는지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사진을 보는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방법을 썼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유명한 사진에서 액자를 걷어낸 것과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잠시 ‘뭐지’ 하고 고민한 뒤에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사진도 거짓, 조작은 아닐까 의심한다. 우리는 묻는다. 사진은 믿을 수 있을까? 더구나 지금과 같은 디지털 사진의 시대에 말이다. (121쪽/조야킴 코티스·아드리안 존데르거)



  글을 쓰는 사람은 소설가나 시인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쁘게 글을 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가나 예술가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쁘게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밥을 짓는 사람은 요리사나 쉐프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쁘게 밥을 지으면 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육아 전문가’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그저 ‘어버이’가 되면 돼요.


  이리하여, 우리가 사진을 읽을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사진찍기도 바로 오늘 하면 됩니다. 사진학교를 다니거나 사진강의를 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라밖에서 사진을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상업 스튜디오에서 견습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삶을 스스로 사랑하면서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으면 됩니다. 푼푼이 돈을 모아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진책을 꾸준히 장만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란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삶으로 가는 길이 기쁘면 사진으로 가는 길이 기쁩니다. 삶으로 가는 길을 꿈으로 여민다면 사진으로 가는 길도 꿈으로 여밀 수 있습니다. 나는 바로 내가 되어 내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너는 언제나 네가 되어 네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우리 스스로가 되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사진을 기쁘게 찍고 읽습니다. 4348.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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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류재화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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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6



‘전쟁 불구자’가 침대맡에서 길어올린 삶

― 달몰이

 조에 부스케 글

 류재화 옮김

 봄날의책 펴냄, 2015.9.1. 12000원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1916년에 스스로 군인이 되었다고 하는 조에 부스케 님은 1918년에 총알에 맞아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채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스무 살이었다고 해요. 전쟁통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프랑스 젊은이도 독일 젊은이도 영국 젊은이도 죽고 다쳤습니다. 미국 젊은이도 죽고 다쳤으며,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노예로 끌려간 뒤 어렵게 자유를 찾은 사람들 피를 물려받은 젊은이도 죽고 다쳤습니다.


  전쟁은 참으로 수많은 젊은이를 그예 죽음으로 내몹니다. 목숨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도 끔찍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마음을 다치기 마련입니다. 목숨은 잃지 않았어도 몸이 크게 다치고 말아 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기도 합니다. 아랫몸을 쓸 수 없어 늘 누워서 지내야 했다는 조에 부스케 님은 1950년까지 삶을 잇습니다. 서른두 해라는 삶을 침대에서 보냈습니다.



스무 살에, 나는 포탄을 맞았다. 내 몸은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는 우선은 내 몸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내 불구가 현실이 되면서, 나는 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상처받은 나는 이미 내 상처가 되어 있었다. (11쪽)



  산문책 《달몰이》(봄날의책,2015) 첫머리는 ‘포탄에 맞은’ 이야기로 엽니다. 스무 살에 받은 아픔과 슬픔을 첫머리로 꺼냅니다. 삶에서 떨어져 나간 몸을 이야기합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삶에 헤매던 나날을 이야기하고,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삶을 ‘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아프지 않고서 아픔을 알 수는 없습니다. 아픈 나날을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은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기쁘지 않고서 기쁨을 알 수는 없습니다. 기쁜 나날을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은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짓눌리거나 짓밟힌 나날을 보낸 적이 없으면 짓눌리거나 짓밟힌 삶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못살게 굴어 보지 않았으면, 남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못살게 구는 삶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어요.



우리들 각자는 자기 개성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각자 삶에 대한 개념이 있지만 정작 없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시각이다. (14쪽)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표명된 모든 시를 지니고 있다 … 시간이 생을 품으면 바로 우리 자신이 감미로운 곳이 되는 것이다. (22, 23쪽)


전에는 한 번도 탐험된 적 없는 어둠이 그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너를 당겼으며, 네 고유의 시선에 둘러싸여 네가 나타난다. (26쪽)



  산문책 《달몰이》는 서른 해 남짓 침대살이로 삶을 보내야 했던 사람이 남긴 이야기 꾸러미입니다. 창밖을 보기 싫어서 창문을 늘 가린 채 살았다는 젊은이가 겪은 삶을 적은 이야기 꾸러미입니다.


  걸을 수 없고, 밖에 나갈 수 없는 몸이라면, 창밖을 보기 싫을 수 있습니다. 만질 수 없는 창밖을 쳐다볼 마음이 조금도 안 들 수 있습니다.


  걸을 수 없고 밖에 나갈 수 없는 몸이기에, 오히려 창문을 크게 내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어요. 언젠가 어떻게든 이 창밖으로 나가서 걷든 기든 바깥바람을 온몸으로 쐬어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가리든 열든, 삶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삶은 늘 같아요. 이리하여 조에 부스케 님은 생각에 잠깁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는 나날이 참말 삶다운가를 생각하고,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끔찍함과 미움과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되풀이되는 하루일 수 있는데, 이런 하루라면 이 모든 끔찍함과 미움과 슬픔과 아픔을 더욱 낱낱이 파고들면서 생각합니다.



신이 자기 안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서 사랑을 느끼는 것도 끔찍하다 … 우리 내면은 한계가 없으며, 명명하는 것을 해방시킨다. 우리 언어는 결코 단 한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내 안에 두 존재가 있다고 내가 말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나’라고 말할 줄 모른다. 우리 의식은 말을 하면서 우리를 생존하게 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30쪽)


그 이튿날 나는 깊이 생각하며 전율했다. 내 몸과 나는 한갓 흙 부스러기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은혜로운 것이라는데, 내 부서진 몸 앞에서 삶은 벽에 불과하다 … 네 말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을 줄 모르면 신에게 말을 걸지 마라. (80쪽)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거의 생각을 안 하면서 삽니다.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몸이 성해서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이곳저곳 마음대로 가지 않’고 쳇바퀴처럼 ‘늘 가는 곳만 가면’서 살기 일쑤입니다. 출퇴근만 하느라 똑같은 길을 똑같은 때에 오가는 사람이 대단히 많아요. 출퇴근을 하면서 제 삶을 가만히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몸은 틀림없이 성하지만, 마음은 아주 좁은 데에 갇혀서, 아무런 생각이 피어나지 않는 사람이 몹시 많아요.


  서른 해 남짓 침대에서만 지낸 조에 부스케 님은 생각으로 삶을 꽃피웁니다. 생각으로 지을 수 있는 삶을 스스로 가장 높고 깊은 데까지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한쪽에 ‘몸은 홀가분하지만 마음은 막힌’ 사람이 있고, 지구별 다른 한쪽에 ‘몸은 갇혔지만 마음은 활짝 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느 쪽에 서는 삶일까요?



전쟁의 출구가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전쟁에 나갈 것을 강요받은 자들이 전쟁의 근원을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전쟁의 근원은 전쟁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불행인 전쟁 세대인가? (88쪽)


우스운 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너. 누군가를 생각해라. 삶이라는 게 네 관대함 안에만 있으면, 네 사랑 안에만 있으면 그 누군가는 위대하다. (104쪽)




  나는 요 스무 날 가까이 거의 못 걸으면서 지냅니다. 구월 첫머리에 논둑길에서 자전거가 미끄러지면서 오른무릎을 크게 다쳤고, 오른무릎을 다친 뒤 사흘 동안 몸져누워 끙끙 앓기만 했으며, 그 뒤 닷새 즈음 일어서지도 못하며 기어다니기만 했습니다. 겨우 일어서서 걸음을 뗄 수 있어도 몇 걸음 옮기지 못해 주저앉아야 하고, 무릎을 다친 지 스무 날이 지난 요즈음은 마을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아다닐 수는 있으나 걸을 때마다 무릎이 쑤시고, 이렇게 걸은 뒤에 한참 드러누워서 쉬어야 합니다.


  《달몰이》를 쓴 조에 부스케 님처럼 서른 해 남짓 침대에 드러누워 사는 몸은 아니지만, 요 스무 날 남짓 나한테 찾아온 자전거 사고와 생채기와 몸져눕기와 기어다니기와 새롭게 걸음마 떼기를 겪으며 가만히 돌아봅니다. 무릎에 고인 피고름을 짜며 온몸이 찌릿찌릿 아플 때마다 이 아픔은 뭔가 하고 조용히 되새깁니다. 무엇보다 한 가지를 또렷하게 느낍니다. 아파서 드러눕지 않고서야 아픈 채 드러누워 지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을 수 없습니다. 아파서 드러누운 동안 ‘내가 언제 튼튼한 몸으로 씩씩하게 걷거나 달리거나 자전거를 탔는가?’ 하고 까마득하게 생각했습니다. 걸을 수만 있어도 삶이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가를 새롭게 느낍니다. 그저 걸음마를 새롭게 떼려고 용을 쓰는 동안 ‘삶에서 가장 대수롭게 살필 대목은 무엇인가?’ 하고 온몸으로 아로새깁니다.



세계는 세계 속에서보다 내 속에서 더 크다. 그러나 나는 내 가슴속에서 펼쳐지는 현실로부터 몰려나왔다. (164쪽)


널 보지 않는다 해도, 신은 이미 네 안에 들어 있다. (181쪽)


인간은 이미지일 뿐 표현된 게 아니다. (189쪽)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야 즐겁습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 지은 꿈을 이루며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속 꿈길로 달릴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쳇바퀴를 돌거나 톱니바퀴가 되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을 제대로 읽고, 내 마음에 깃든 고운 님을 읽으며, 내 마음에 고운 님이 눈부시게 피어나도록 사랑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달몰이》를 쓴 조에 부스케 님은 “신은 이미 네 안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신’이란 ‘하느님’일 테고, 하느님이란 바로 내 숨결이자 넋일 테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꿈을 품을 수 있고, 이 꿈을 제대로 바라보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미처 꿈을 못 품기 마련입니다. 마음에 꿈을 품지 못했기에 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아니, 꿈으로 나아가는 길이 없지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꿈을 배우지 못합니다. 오직 시험공부만 배웁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꿈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오로지 직업만 가르칩니다.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시험공부만 하다가 이런 직업이나 저런 일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속에 꿈을 심거나 품는 아이들은 매우 드뭅니다. 스스로 어떤 사람이요 숨결이며 넋인가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매 순간 성 안으로, 네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관여하는 행위가 허깨비 같은 행위에 불과해도 해라. 네 영혼 안에서 본질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해라. 비밀 속에서 작용하는 것만이 실제이다. 네가 하는 것은 그 이미지에 불과하다. (138쪽)


인간은 모두 나처럼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 상처 덕분이었다. (172쪽)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채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던 젊은이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나날을 끔찍하게 괴로워 합니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꿉니다. 침대맡을 떠날 수 없다면 침대맡에서 살기로 합니다. 침대맡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면 침대맡에서 살고 살다가 죽기로 합니다. 이리하여, 침대맡에서만 지내야 하는 ‘전쟁 불구자 젊은이’는 온 기운을 ‘생각짓기’에 쏟고, 생각으로 지은 삶과 사랑과 꿈을 ‘글’로 옮기기로 합니다. 침대맡에서 쓴 글은 책이 되어 새롭게 태어나고, 때로는 잡지가 되어 새로운 숨결이 됩니다. 침대맡에서 빚은 생각은 날개를 펼쳐 온누리 곳곳으로 훨훨 날아갑니다. 글을 빚는 ‘전쟁 불구자 젊은이’는 이녁 몸을 어디로도 보낼 수 없지만, 이녁 마음을 글이라고 하는 그릇에 생각을 심으면서 어디로든 훨훨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달을 몰고 갑니다. 달을 몰려고 갑니다. 달을 몰면서 스스로 달이 되고, 달을 몰다가 스스로 달님이 됩니다. 달빛이 어리는 이야기가 글 한 줄로 태어나고, 달무리가 지는 이야기가 책 한 권으로 거듭납니다.


  삶을 이루는 고운 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불러서 깨워 주기를, 일으켜 세워 주기를, 걸음마를 뗄 수 있게 해 주기를, 어깨에 날개를 달아서 훨훨 날도록 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4348.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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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지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9.7.24. 8500원



  언제부터인가 퍽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겨레나 이웃 겨레도 고양이를 퍽 사랑하기는 했으나, 오늘날처럼 ‘고양이 사랑’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고 느껴요. 그래서 예전에는 개는 그냥 ‘개’라 하고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라 했습니다. 다만, 집에서 밥을 주면서 키우는 짐승이라면 ‘집개·집고양이’라 했고, 사람이 밥을 따로 주지 않는 짐승이라면 ‘들개·들고양이’라 했어요.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썩 좋아하지 않으면 ‘도둑개·도둑고양이’ 같은 이름을 썼어요.



엄마 아빠 싸우는 날 / 화난 아빠 눈 속에 떠 있는 나는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고양이가 많이 늘었습니다. 고양이 모습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이지만 사람살이가 사뭇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골목고양이’라든지 ‘길고양이’가 있고, ‘마을고양이’도 있습니다. 아마 ‘아파트고양이’도 있을 테며 ‘동네고양이’라든지 ‘달동네고양이’ 같은 이름도 따로 붙일 만하리라 봅니다.


  김륭 님이 빚은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2009)를 읽습니다. 동시집에 붙은 이름이 ‘도둑고양이’입니다. 아이들이 읽을 동시를 쓴 어른 김륭 님은 왜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을 골랐을까요? 그냥 ‘고양이’라고만 해도 되었을 텐데요?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양이”라면 더더구나 ‘고양이’라고만 해야 알맞지 않을까요?


  아이는 어른하고 다릅니다. 아이는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풀이나 짐승을 바라볼 적에 ‘굳은 생각(편견)’을 ‘치우치게’ 품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죽은 고양이’가 지짐판(프라이팬)을 타고 먼먼 우주로 날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고양이, 구멍가게 꼬부랑 할머니랑 내가 헌 프라이팬에 담았어요 죽어서는 배고프지 말라고, 프라이팬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가라고 토닥토닥 이팝나무 밑에 묻어 주고 왔어요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내가 만일 과일이 된다면 / 수박이 될 거야 / 과일들 중에 대통령을 뽑는다면 / 덩치 크고 힘센 수박이 당선될 테니깐 (수박 대통령)



  아이들은 ‘대통령’을 알까요?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본다면 대통령을 알고,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둘레 어른들이 얘기하면 대통령을 압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안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으뜸’이라거나 ‘가장 크고 힘센 무엇’이라고 여긴다면 그야말로 대통령을 잘못 아는 셈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대통령은 으뜸이나 가장 크거나 힘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어떤 사람일까요? 네, 대통령은 ‘심부름꾼’이거나 ‘머슴’입니다. 대통령은 바지런히 일을 할 사람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꿈을 이루도록 도와야 하는 심부름꾼이지요.


  크고 센 힘으로 뭔가를 한다면, 이때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우두머리’라고 해서 힘으로 윽박지를 수 없습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며 훌륭할 때에 비로소 우두머리(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박 대통령〉 같은 동시는 어린이 마음을 잘못 짚는다거나 얄궂게 건드린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과일을 좋아할 뿐, 으뜸 과일이라든지 가장 크고 멋진 과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 새끼들 찾아간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나무들도 자전거가 있어요 / 쥐도 새도 모르게 자전거를 타고 놀아요 / 두 팔 쭉 뻗어 올려 훔친 해와 달을 바퀴로 굴려요 (자전거 타는 나무들)



  동시는 언제나 ‘생각하는 힘(상상력)’입니다. 생각을 마음껏 펼치기에 동시를 씁니다. 생각을 한껏 드날리기에 동시를 읽습니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라든지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처럼, 생각을 넓히고 펼칠 적에 비로소 동시가 태어납니다.


  다만,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을 보면 “훔친 해와 달”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에도 어딘가 아리송해요. 나무가 왜 해와 달을 훔칠까요? 참말 나무가 이러한 마음일까요? 그냥 골목고양이나 마을고양이를 ‘도둑고양이’로 굳이 쓰고야 마는 시인 마음이 ‘나무가 해와 달을 훔친다’고 하는 동시를 쓰도록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밥풀의 상상력)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무는 사람한테 무엇이든 다 내어줍니다. 나무는 그늘도 내어주고, 줄기도 내어주며 꽃과 열매도 내어줍니다. 가지도 내어주지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야말로 나무는 맨 나중에 그루터기까지 내어주지요.


  다만, 나무가 아무리 아낌없이 주는 숨결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시를 쓰면서 ‘창작’이나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와 달을 훔치는 나무” 이야기를 그려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동시도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 본다면, 나무한테 ‘얘, 나무야, 너 해와 달을 훔치고 싶니?’ 하고 물어 보고서 이러한 동시를 썼는지 궁금해요. 나무로서는 멀쩡히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인데, 동시를 쓰는 어른이 나무가 ‘도둑처럼 훔치려는 마음이나 몸짓’인 듯 엉뚱하게 그린 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 그네처럼 매달려 가던 동생이 / 장난감 가게 앞에서 앙앙 떼를 쓴다 (무당벌레)


뿌지직뿌지직 신기해 / 엄마, 똥꼬에서 새가 나오려나 봐 // 자꾸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려 / 콕콕 부리로 똥꼬를 찔러 (변기 위의 아기 펭귄)



  아이들은 어른이 쓴 동시를 고스란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여느 때에 읊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씁니다. 그래서, 어른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할 뿐 아니라, 어른이 ‘너 미워’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너 미워’ 하고 말하지요.


  동시는 재미나거나 남다른 이야기를 꾸미는 문학이 아닙니다. 동시는 어린이가 제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북돋우도록 돕는 이야기를 펼치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담는 동시이기 때문에, 어른끼리 읽고 나누는 ‘어른 시’하고 사뭇 다르게, 말 한 마디까지 더욱 꼼꼼히 살피고 더욱 낱낱이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한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인데, 재미난 이야기 못지않게 ‘아름다운 사랑’이 드리우는 말로도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은 재미만 읽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말도 읽고 사랑도 읽고 느낌도 모두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어른은 동시 한 줄을 쓸 적에 아주 깊고 너르면서 슬기로운 숨결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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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코와 반제티 - 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
브루스 왓슨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0



자유·정의·평화를 마녀재판으로 죽인 미국

― 사코와 반제티

 브루스 왓슨 글

 이수영 옮김

 삼천리 펴냄, 2009.9.23. 26000원



  브루스 왓슨 님이 쓴 《사코와 반제티》(삼천리)를 읽습니다.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을 다루는 책입니다. 2009년에 한국말로 나온 《사코와 반제티》는 592쪽에 이릅니다.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노동자’이고, 두 이주노동자는 미국에서 ‘아름다운 꿈’이 아닌 ‘슬픈 모습’만 지켜보면서 이 끔찍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거나 마주해야 하는가를 걱정하거나 아파합니다.


  그런데 두 이탈리아 이주노동자는 어느 날 갑자기 경찰한테 붙잡힙니다. 이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이 두 이주노동자는 정부 조직이 ‘가난한 노동자’한테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없다고 느껴서, ‘무정부주의’를 생각하고 ‘징집기피’를 합니다. 바보스러운 정부는 없어져야 한다고 여긴 두 이주노동자요, 바보스러운 정부가 벌이는 바보스러운 전쟁에 끌려가서 ‘착한 이웃’을 총으로 쏴죽이는 그야말로 바보스러운 짓은 할 수 없다고 여겨서 ‘징집기피’를 합니다. 두 이주노동자는 미국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며 두 가지 길을 걷는데, 다른 범죄 사건에 휘말리면서 미국 경찰에 붙잡혔고, 이 두 사람은 미국 정치와 사회에 ‘희생양’으로 다루어지고 맙니다.



1908년 6월 19일,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재판 사건의 주인공이 될 감상적이고도 지적인 이탈리아인(반제티)이 맨해튼의 거리에 섰다. 그는 여행가방을 든 채 새로운 나라를 살펴보았다. 미국은 그가 기대했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본 광경은 놀랍고도 역겨웠다. 사람들은 골목길에서 잠을 잤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썩은 상추와 상한 과일을 주워먹었다. 맨해튼은 깡패, 창녀, 그밖에 미국의 거침없는 산업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들로 넘쳐났다. 거물 기업인들은 격식 있는 예복 차림으로 대로를 누비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뉴포트 메인 버크셔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헝겊 모자를 쓰고, 집에서 만든 보잘것없는 음식을 싸 가지고 가서, 무더운 여름날 오후를 코니아일랜드에서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9쪽)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다수의 무정부주의 문헌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았다. (48쪽)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이 ‘돈을 훔쳤다’거나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두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뒤집어썼고, 무척 오래 옥살이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두 사람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뒤집어쓰고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 앉혀졌으며, 그대로 목숨을 빼앗깁니다.


  미국 정치와 사회는 왜 두 이주노동자를 죽여야 했을까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와 ‘정의’를 한쪽에서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자유와 정의를 끔찍하게 짓밟은 셈인데, 어떻게 이 두 가지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을까요?


  가만히 보면, 한국 정치와 사회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밝힙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정의를 외치거나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무척 많이 짓밟혔고 괴로웠으며 죽음으로 내몰리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은 틀림없이 민주 사회라고 하지만, 민주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무척 많습니다.


  한국에 있는 숱한 미군기지는 자유도 정의도 아닙니다. 세월호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송전탑과 대형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제주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어느 한 가지도 자유나 정의라고 할 수 없으며, 민주나 평화도 평등하고도 동떨어집니다.




산업은 메사추세츠의 돈줄이었고 산업에 돈을 댄 이들이 주 정부에 권력을 행사했다. (68쪽)


법원에서는 예심이 끝나고 기소가 한 주 연기되었다. 기소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사코와 반제티를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어난 브리지워터 강도 사건과 연계시키고, ‘마이크 보다’를 추적하고, 이탈리아에 타전하여 코아치의 수하물에서 도난당한 급료를 회수할 시간이 필요했다. (99쪽)


무정부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히고 나서 사코는 평생 일해 온 과정을 들려주었고, 자신의 손은 테두리 절단사의 손이지 살인자의 손이 아니라고 했다. “돈을 훔치고, 돈 때문에 불쌍한 사람을 죽이다니! 이건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나는 결백해요! 나 이런 짓 안 합니다! 곧 태어날 아기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요.”라고 그는 항변했다. (127쪽)



  20세기 미국에서는 마녀재판으로 두 이주노동자를 오랫동안 감옥에 가둔 뒤 전기의자로 괴롭히며 죽였습니다. 21세기 미국은 어떤 일을 할까요? 미국은 20세기나 21세기나 수없이 많은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이 전쟁무기를 지구별 여러 나라에 팝니다. 한국은 미국 전쟁무기를 무척 많이 사들입니다. 미국은 엄청나게 많이 쌓은 전쟁무기를 이끌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미국 군부대는 한국을 비롯해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고, 미국에서 만드는 전쟁무기는 앞으로도 엄청날 테지요.


  곰곰이 헤아릴 노릇입니다. 전쟁무기와 자유는 한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민주는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평화나 평등이나 정의는 나란히 있을 수 있을까요?


  전쟁무기를 잔뜩 쌓은 나라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스페인도 모두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전쟁을 일으켜서 지구별 숱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괴롭혔습니다. 한국하고 이웃한 일본도 전쟁무기를 잔뜩 쌓은 뒤 한국으로 쳐들어와서 퍽 오랫동안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전쟁무기로는 언제나 전쟁을 합니다. 전쟁무기이니까요. 전쟁무기를 많이 갖춘 나라는 ‘겉으로 민주’를 말해도 민주를 지키거나 가꾸지 않기 마련입니다. 전쟁무기를 내세우는 나라는 ‘겉으로 자유와 평화’를 말해도 막상 자유와 평화를 잔뜩 억누를 뿐 아니라, 권력자와 부자한테만 도움이 될 자유와 평화로 나아갑니다.




반제티의 감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129쪽)


다섯 주 동안 사코와 반제티는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려 왔다. 두 사람이 화를 냈을 때 빼고, 배심원들은 그때까지 두 사람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211쪽)


카츠만은 진술 대목마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속으로는 행운이 찾아온 걸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2만 6천 명의 미국인이 사망한 사실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1919년의 폭탄 테러들은 무정부주의의 악의에 찬 활동이라고 인식되었다. 이런 마당에 두 피고인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무정부주의자이자 징집기피자로 낙인찍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검사가 이보다 더 좋은 과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216쪽)



  이주노동자는 고향나라에서 살 길이 까마득하다고 느끼기에 고향나라를 등집니다. 한국도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사람이 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이 땅에서 살 길이 아득해서 만주로도 떠나고 일본으로도 떠났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주노동자가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로서는 제 고향나라 정치와 사회가 아름다웠다면 고향나라를 떠나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향나라도 안 아름다웠는데, 새로 뿌리내려서 살려고 하는 먼먼 나라도 안 아름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찾아오는 수십만에 이르는 이주노동자는 한국에서 ‘노동자 대접’을 제대로 받을까요?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는 ‘사람 대접’을 어느 만큼 받을까요?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땀흘려야 했던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한국으로 찾아오는 이웃나라 이주노동자도 노동자 대접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모두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별 모든 정부 조직은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가꾸고 살찌우는 데에 돈을 쓰고 마음을 쓰며 슬기를 그러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상이란 누구에게나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기회를 줍니다. 최고의 사상이 아니고, 특정한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의 스페인과는 다릅니다. 출판, 교육, 저술, 자유언론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미국을 보니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 한 주에 21달러에서 30달러를 버는 이들에게는 하버드 대학에 갈 기회가 없습니다. 한 주에 80달러를 번다 해도 아이들 다섯 명을 기른다면 먹고살면서 아이들을 하버드 대학에 보낼 수 없습니다.” (228쪽)


미국인들은 1920년대 이전에도 향락을 즐겼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렇게 공공연하게 땡땡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금전등록기에 들어가는 그 많은 돈을 쓰며 즐긴 적은 없었다. 20세기를 지배하게 되는 거의 모든 오락(라디오, TV, 스포츠, 통속심리학, 가전제품, 청년문화, 유행의 광풍, 유성영화, 매디슨 애비뉴, 미키 마우스)이 이 광란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도 일부 여흥은 부자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문득 ‘모든 사람’이 몰고 다니는 포드 자동차처럼, 야구 경기나 무도 음악을 ‘모든’ 집의 거실로 들어온 RCA처럼, 술과 섹스에 대한 솔직한 토로처럼, 오락은 모두의 것이 되었다. (282쪽)



  인문책 《사코와 반제티》는 사코와 반제티를 둘러싼 1920년대 미국 사회가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1920년에 감옥에 갇힌 뒤 1927년에 목숨을 빼앗겨야 한 이탈리아 이주노동자 두 사람이 미국에서 보낸 1920년대는 ‘모든 사람이 모든 향락을 누리던 때’라고 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한국 사회도 1920년대 미국 사회와 엇비슷합니다. 2010년대 한국 사회를 보면, 한쪽에서는 차별과 푸대접과 따돌림이 판을 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스포츠와 영화와 섹스와 연속극과 유행과 상업문화가 판을 칩니다. 한쪽에서는 가난해서 굶는 사람이 있는 한국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매우 값비싼 사치품이 엄청나게 팔리는 한국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세값을 낼 돈이 없어서 달삯으로 살지만, 어떤 사람은 아파트 전세값을 1억 원이나 2억 원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파트 전세값을 1억 원이나 2억 원을 내는 사람이 ‘부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전세 보증금 천만 원이 없는 사람보다 전세 보증금 1억 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돈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더라도, 이쪽도 저쪽도 부자가 아닙니다. 이쪽도 저쪽도 삶이 아슬아슬하기는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와 정치와 사회인 한국에서 미국 스포츠와 유럽 스포츠 이야기는 실시간으로 퍼지고, 월세살이인 사람도 전세살이인 사람도 똑같이 스마트폰으로 이웃나라 스포츠 이야기에 푹 빠져듭니다.




세이어의 기각이 두 사람의 희망을 갉아먹고 있을 때, 판사는 자신의 공정성을 영원히 훼손하게 되는 말을 내뱉었다. 기각 결정을 내린 직후, 세이어는 다트머스 풋볼 경기에서 전직 매사추세츠 변호사인 교수 한 명을 우연히 만났다. 곧장 사코와 반제티 얘기를 꺼낸 세이어가 공격적으로 말했다. “내가 저번에 그 무정부주의 놈들한테 무슨 일을 했는지 모았는가? 아마 당분간 꼼짝 못할걸! 이제 그들을 대법원으로 보낼 테니 거기서 어떻게 되는지 보게!” (356쪽)


“내가 오늘 여기 이 판사석 앞에 서 있는 이유는 내가 억압받는 계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압제자지요. 세이어 판사, 당신은 그걸 알 겁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압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압니다. 당신은 나와 가엾은 내 아내를 일곱 해나 박해하고서 오늘도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겠지요!” (406쪽)



  누군가 권력을 쥐면 누군가 억눌립니다. 누군가 돈을 거머쥐거나 혼자 차지하려고 들면 누군가 빈털털이가 됩니다. 누군가 권력을 휘두르면 누군가 짓밟히면서 괴롭습니다. 누군가 돈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누군가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합니다.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이주노동자였기 때문에, 고향나라에서 아무런 꿈을 키울 수 없어서 고향을 등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미국에서도 푸른 꿈을 볼 수 없이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리하여 정부를 못 믿고 정부란 아무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고 느낀 사람이었기 때문에, 1927년 봄날, 그만 이슬처럼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이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지 않고 제 고향나라에서 꿈을 키울 수 있었으면,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죽을 일이 없습니다. 사코와 반제티가 두 사람이 제 고향나라인 이탈리아에서 ‘믿을 만하고 아름다운 정부’가 보여주는 멋진 정책을 지켜보면서 삶을 가꾸고 살림을 지을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사뭇 달랐으리라 느낍니다.




“판사님은 내가 판사님 앞에서 떨지 않는다는 걸 보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수치스러워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 나는 판사님을 똑바로 보고 있습니다.” (407쪽)


저녁 9시에 사코와 반제티는 사형 집행인이 옆방에서 전기의자를 실험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은 옥에서 불려 나왔다. 머리를 박박 깎고, 전극 집게를 연결할 수 있도록 바지에 긴 틈을 냈다. (463쪽)



  사코와 반제티는 왜 무정부주의를 밝혔을까요? 정부가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코와 반제트는 왜 군대에 가지 않으려 했을까요? 제구실을 못하는 정부가 일으키는 전쟁은 ‘가난한 노동자 이웃’ 모두를 더욱 괴롭히는 끔찍한 짓인 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무정부주의와 징집기피를 밝힌 두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못 미더운 정부’가 ‘미더운 정부’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군대가 갈 만한 곳’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정부가 할 일은 두 이주노동자한테 ‘사형선고 하기’가 아니라 ‘이주노동자도 제 나라 노동자도 걱정없이 삶을 가꿀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선보이는 일입니다. 1920년대 미국 정부뿐 아니라 2010년대 한국 정부도 슬기롭고 올바른 정책을 선보여서 ‘미더운 정부’로 거듭나야 하고, 전쟁무기로 이루는 ‘거짓 평화’가 아닌 전쟁무기와 군부대를 모두 내려놓고, 이 돈과 품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는 참다운 길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반제티는 의자에 앉았다. 끈으로 조여지고 전극이 연결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죄라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끔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겠지만 나는 결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베풀어 준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 범죄뿐 아니라 어떤 범죄도 말입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교도관들이 일을 마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내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머리에 복면이 씌워졌다. 몇 분 뒤, 그는 방에서 실려 나갔다. (483쪽)



  바보스러운 먼 나라 정부가 목숨을 빼앗는 자리에서 반제티는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일곱 해 남짓 옥살이를 하면서 햇볕 한 줌 쬐기 힘들었던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이탈리아도 미국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죽음길로 갑니다. 사형선고 판결을 내린 사람도, 전기의자에 전기를 넣은 사람도, 두 사람 머리에 복면을 씌운 사람도, 모두 너그러이 보아줍니다.


  무정부주의는 무장폭동을 일으키려는 사상이 아닙니다. 삶을 바로세우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사상이기에 ‘바보스러운 정부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밝히는 무정부주의입니다. 징집기피나 병역기피는 의무를 안 지려고 하는 몸짓이 아닙니다. 전쟁이 꾀하는 일이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고 깨달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과 사회와 평화를 바라면서 보여주는 몸짓입니다.


  오직 평화가 평화를 이루고, 오직 민주가 민주를 이루며, 오직 정의가 정의를 이룹니다. 슬기로운 자유가 슬기로운 자유가 되고, 아름다운 평등이 아름다운 평등이 되며, 사랑스러운 꿈이 사랑스러운 꿈이 됩니다. 2010년대 한국 정부가 아름다운 평화와 슬기로운 정의와 사랑스러운 민주와 자유와 평등이 흘러넘치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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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진짜 곰이야 알이알이 명작그림책 2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글.그림, 서애경 옮김 / 현북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4



풍선을 타고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곰 한 마리

― 나 진짜 곰이야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글·그림

 서애경 옮김

 현북스 펴냄, 2011.3.18. 10500원



  아이들은 곰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이제 한국에는 아무리 깊은 두멧자락이라 하더라도 범이나 여우나 이리나 늑대나 곰은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멧돼지나 노루나 고라니가 더러 있지만, 너구리나 족제비나 오소리나 고슴도치를 곧잘 찾아볼 수 있지만, 이만 한 숲짐승조차 머잖아 자취를 감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와 골프장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공장도 자꾸 늘어나기만 하며, 대형 발전소와 송전탑도 자꾸 늘어나기만 하거든요. 조용한 시골이나 숲은 자꾸자꾸 자취를 감춥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은 거의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문명과 물질이 발돋움한 오늘날이 아닌 옛날이라면 아이들은 곰을 어떻게 마주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숲에서 나무를 하고, 숲에서 나무를 얻으며, 언제나 숲에 둘러싸여 살던 옛날이라면, 아이들은 범이나 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곰을 무척 귀엽게 여기기도 하는데, 숲에서 곰이나 범을 코앞에서 맞닥뜨리는 지난날에도 아이들은 곰을 귀여운 숲짐승으로 여겼을까 궁금합니다.



곰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와아, 이상한 굴이다.’ 곰은 풍선 바구니를 보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낮잠 자긴 참 좋겠는걸.’ 곰은 바구니로 기어 들어갔어요. (5쪽)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님이 빚은 그림책 《나 진짜 곰이야》(현북스,2011)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미국을 무대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미국에서 깊은 숲에서 조용히 지내던 곰 한 마리가 어느 날 낮잠 잘 만한 곳을 찾다가 ‘풍선 바구니’를 보았어요. 처음 보는 낯선 것이지만, 곰은 풍선 바구니가 아늑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은 모두 치우고 풍선 바구니에 들어가서 꿈나라로 갑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타고 온 풍선 바구니는 곰을 태우고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희 풍선 바구니가 사라졌는데 깊은 숲에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튼, 이제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 말고 곰을 걱정할 일입니다. 곰은 오랫동안 낮잠을 잤고, 풍선 바구니는 오랫동안 하늘을 가르다가 ‘뉴욕’이라는 하늘까지 닿았다고 해요. 그리고, 뉴욕 하늘에 풍선 바구니는 풍선이 터져서 땅으로 천천히 내려갔답니다.



풍선이 내려온 곳은 가장행렬이 펼쳐지는 어느 도시였습니다. 막 행진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구경꾼 하나가 외쳤어요. “와아! 재미있게 하네요. 풍선을 타고 사람이 내려왔어요. 저 사람 꾸민 것 좀 봐요! 참말 곰 같아요.” (8쪽)



  곰은 낯설디낯설 뿐 아니라 곰 아닌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떨어지니 몹시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곰을 곰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곰을 곰 아닌 ‘곰처럼 꾸민 사람’으로 여깁니다. 더더구나 가장행렬을 하며 잔치를 벌이는 데에 떨어졌거든요.


  곰은 얼결에 가장행렬에 휩쓸립니다. 방송국 사람이 곰을 낚아채어(?) 방송국으로 데려가서 인터뷰를 합니다. 곰은 이리저리 휩쓸리고 휘둘리면서 배가 고픕니다. 담뱃대가 먹을 것인 줄 알고 집었다가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은 ‘곰처럼 꾸민 사람’이 마치 ‘곰처럼 연기도 잘 하네!’ 하면서 웃고 재미있어 합니다.


  곰은 이리저리 내뺍니다. 그러나 도시 한복판에서 곰이 갈 곳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때에 ‘마음 착한 도시 이웃’이 ‘곰’이 아닌 ‘곰처럼 꾸민 사람’을 도와주려고 나섭니다. 모두들 텔레비전에서 ‘곰이 아닌 곰처럼 꾸민 사람’을 보았기에 기쁘게 도와주려고 해요.



“빵!” 출발 신호가 울리자 선수들이 뜁니다. 총소리에 놀란 곰은 오토바이에서 펄쩍 뛰어내려 달립니다. 곰은 마치 치타처럼 뛰어나가 선수들을 앞질렀어요. 결승선도 넘었지요. 그러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5쪽)




  미국 뉴욕 사람들이 곰이 참말 곰인 줄 알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곰처럼 꾸민 사람이 아닌 참말 곰인 줄 알았어도 오토바이에 태우고 택시에 태우고 소방차에 태우면서 ‘도와주려’고 했을까요?


  이제 곰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곰이지만 ‘곰처럼 꾸민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듭니다. 모두들 ‘곰처럼 꾸민 사람’이 궁금합니다. 게다가 ‘곰처럼 연기를 잘 한다’고 여기기에, ‘곰 연기’를 보고 싶어서 우루루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립니다.


  이때에 ‘풍선 여행객’이 다시 나타납니다. 풍선 여행객은 저희 풍선 바구니를 곰이 타고 간 줄 모릅니다. 그저 ‘곰’이 아니라 ‘곰처럼 꾸민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고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말했어요. “저기 봐! 아까 텔레비전에서 봤던 사람이야. 저 아래 몰린 사람들 때문에 무서운가 봐. 우리가 도와주어야겠어.” 풍선이 사다리 꼭대기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남자는 곰이 바구니에 올라타도록 도와주었어요. (24쪽)



  따스하고 착한 손길로 마음을 읽는 이웃이 반갑습니다. 미국 뉴욕 사람들은 비록 ‘곰처럼 꾸민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저마다 ‘곰’을 따스하게 마주했고, 착한 손길로 도우려 했습니다. 다만, 곰인 줄 몰랐을 뿐입니다.


  곰인 줄 알았으면 모두 놀라서 꽁무니를 뺐을 테지요. 그리고, 도시 사람들은 곰이 곰인 줄 몰랐기 때문에, 곰이 참말 무엇을 바라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말’만 하거나 들을 줄 알 뿐, ‘곰 말’은 하거나 들을 줄 몰라요. 곰이 아무리 ‘곰 말’로 도와주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어도, 사람들은 ‘사람 말’로만 생각하려 했습니다.


  곰은 한 번도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결에 다시 숲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곰은 언제나 곰이었으나 사람들은 곰을 처음부터 곰이 아닌 사람(연기자)으로만 여겼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곰을 볼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시 사회에서는 곰이나 범이나 온갖 숲짐승을 이웃처럼 곁에 두고 지내지 않으니까요. 여느 때에 본 적도 만난 적도 마주친 적도 없는 숲짐승이 도시 사람들한테 이웃이 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그림책 《나 진짜 곰이야》를 아이들하고 읽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어여쁜 빛깔이 눈부시게 흐르고, 재미난 이야기가 우스꽝스레 흐릅니다. 이 그림책은 멋진 빛깔잔치와 이야기잔치가 어우러지면서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넌지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지 싶어요.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읽으면서 곰을 곰으로서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대목을 짚거든요. 곰을 곰으로서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곰을 곰으로 맞아들이면서 도우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이녁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무튼, 곰을 곰으로 마주하든 ‘곰처럼 꾸민 사람’으로 마주하든, 우리가 스스로 따스하고 착한 손길로 마주한다면 아름답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 누구나 이웃을 바라보고, 이웃을 헤아리며, 이웃을 사랑하는 숨결로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2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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