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동네서점의 유쾌한 반란
백창화.김병록 지음 / 남해의봄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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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3

 

 

기쁨 누리는 ‘책마실’로 마을 살리기

―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백창화·김병록 글·사진
 남해의봄날 펴냄, 2015.8.15. 16500원

 

  전남 순천에 〈형설서점〉이라는 헌책방이 있습니다.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오래된 책방입니다. 순천 버스역에서 걸어가면 7분쯤 걸리는 이곳을 틈틈이 찾아갑니다. 제가 사는 전남 고흥에서는 서울이나 광주나 부산이나 인천 가는 버스는 있으나 다른 고장으로 가는 버스는 없습니다. 그래서 대구나 진주를 간다든지, 또 장흥이나 음성이나 전주나 아무튼 다른 고장에 가야 한다면 으레 순천으로 가서 다른 시외버스로 갈아탑니다. 고흥에서 장흥으로 가자면 벌교만 거쳐서 가도 됩니다. 그렇지만 굳이 순천까지 조금 더 돌아서 갑니다. 왜냐하면 애써 마실을 하는 김에 순천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서 책마실도 함께 누리면 한결 즐겁거든요.

  헌책방이라고 하는 곳은 아주 뜻있고 재미있는 책터이면서, 책문화를 밝히는 잣대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헌책방이 있는 고장’은 ‘사람들이 책을 좀 사서 읽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새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있어야, 이 새책이 흘러서 헌책방으로 갈 수 있습니다. 새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드물거나 너무 적으면 새책방도 버티기 힘들 테지만, 헌책방은 아예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새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책을 널리 즐기는 사람’이 꽤 있어야 헌책방이 자리를 지킵니다.


  이리하여 ‘헌책방이 있는 고장’은 ‘책을 읽는 숨결이 그윽한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헌책방 한 곳이나 여러 곳이 문을 열 수 있을 만큼 책이 돌면서, 마을책방에서 새책을 꾸준히 사서 읽는 사람이 넉넉히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들은 일부러,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아온 것이다. ‘책’을 찾아. (18쪽)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방 대도시에서는 도서관 붐이라고 할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이어졌지만 지방 소도시, 특히 주민이 많지 않은 시골 마을에는 여전히 책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책 문화공간도 부족했다. (25쪽)

 


  백창화·김병록 두 분이 빚은 이야기책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2015)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백창화 님하고 김병록 님은 충청북도 괴산 시골집에 ‘숲속작은책방’에 열어서 ‘시골책방’이자 ‘마을책방’을 지킨다고 합니다. 시골로 삶터를 옮겨서 살기 앞서 경기도 일산에서 ‘도서관’을 열어서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분이 열어서 지킨 도서관은 국공립도서관은 아닙니다. 개인도서관입니다. 두 분이 아이하고 즐겁게 읽고 나누려고 하는 책을 다른 이웃한테도 널리 열어서 함께 즐기는 터전을 가꾸었다고 해요.


우리는 이곳 시골 마을 작은 책방에서 서점의 정의를 다시 내린다. 서점이란, 그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책을 한 권이라도 사들고 나와야 하는 곳 … 이 서점들이 있어 주어서 고마웠던 이들, 이왕이면 내 집 옆에 술집이 있기보다는 서점이 있었으면 하는 이들이라면 서점에서 지갑을 열어 달라는 뜻이다. (39쪽)

  시골에서 책방을 꾸리는 두 분이 쓴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한국에서는 도서관이 도서관답게 서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직 한국 도서관은 ‘어린이책 분류’가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어린이책을 따로 갈래를 나누어서 갈무리할 만한 틀이 제대로 서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린이책은 ‘어린이책 도서관’에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책’이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이건만,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는 도서관 정책이나 문화가 거의 없다고까지 할 만해요.

 

  전국에 있는 수많은 국공립도서관을 보면, 건물이 제법 번듯해도 ‘한 해 새책 구입 예산’이 대단히 적습니다. 새로 나오는 아름다운 책을 모두 장만해서 갖출 수 없을 만큼 적어요. 때로는 ‘도서관 도서구입비’가 ‘예산 삭감’으로 잘려 나가기까지 합니다.


  나라에서 꾸리는 국공립도서관마저 이러하다 보니, 나라에서는 마을책방(새책방하고 헌책방 모두)을 제대로 돕거나 북돋울 만한 정책이나 제도나 행정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마을책방을 지키는 분들이 늘 짊어지는 임대료 걱정을 풀어 주는 일이 없어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명성을 듣고 찾아오지만 그들이 머무는 30여 분, 서점 안은 카메라 찰칵이는 소리만 가득하고 독자를 그리워하는 책들의 기다림은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스마트한 소비자들에게 서점이란 책의 실체를 확인하는 곳일 뿐, 구매의 장은 온라인이기 때문이다. (65쪽)


  책방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책방은 책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면, 책을 만나서 어떻게 할까요? 책을 만나서 ‘사는’ 곳이지요. ‘사서 읽을 책’을 만나는 곳이 책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도 책을 만나는 곳인데, 도서관은 한 마을에서 함께 사는 여러 이웃이 ‘서로 돌려서 읽을 아름다운 책을 만나는 곳’이고, 책방은 ‘내 삶을 스스로 가꾸는 길동무가 되는 고마운 책을 만나서 장만하는 곳’입니다.

 


왜 서점이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서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가 서점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116쪽)

  책을 사는 까닭은 책을 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니 책을 삽니다. 책을 빌리는 까닭도 책을 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돈이 없거나 적거나 모자라다면 도서관에 가지요. 그리고 ‘굳이 우리 집에 갖추어 놓을 만하지는 않으나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 갑니다.


  책방에는 왜 갈까요? 두고두고 집에 갖추어 둘 만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고마운 책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수집품이나 장식품이 아니라, 아니 수집품이나 장식품으로 책을 사도 좋아요. 사치품을 가득 장만해서 집을 꾸미기보다는 아름답고 멋지며 훌륭한 책을 넉넉히 사서 집을 꾸며도 대단히 좋아요. 돈이 많은 이라면 집안을 책으로 꾸미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은 이들은 그 많은 돈으로 책을 왕창 사들여서 집안을 꾸미되, 석 달마다 책갈이를 해 주면 아주 좋지요. 똑같은 책으로 석 달 넘게 ‘장식하는’ 일은 그리 예쁘지 않아요. 돈이 많은 이들은 멋지고 훌륭한 책으로 집안을 장식하되, 석 달마다 이 책들을 모두 헌책방에 내놓아 줄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돈이 많으니까’ 새로운 책을 다시 왕창 사들여서 집안을 새롭게 꾸며 주어야지요. 그러면 돈이 적지만 책을 사서 읽고 싶은 수많은 이웃들은 즐겁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책은 스스로 읽으려고 장만합니다. 스스로 다시 읽고 되읽고 자꾸 읽으면서 ‘내 손때’를 묻히려고 책을 장만합니다.


  빌려서 읽는 책은 아주 깨끗하게 읽고서 돌려줍니다. 사서 읽는 책도 정갈하게 읽고 건사할 노릇인데, 사서 읽는 책에는 내 나름대로 생각한 이야기를 책 귀퉁이에 적어 넣기도 해요. 밑줄도 긋고 동그라미도 하면서 ‘온누리에 오직 하나 있는 내 책’으로 다스립니다.

시골로 이사하기 위해 도서관 문을 닫고 쉬면서 순전히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책 구입과 독서를 시작했다. 도서관 운영비 걱정을 할 일이 없으니 생활에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만큼 무지막지한 책 구매가 이어졌다. (94쪽)

 

이곳이 카페가 된다면 사람들이 오히려 책을 사 가지 않고 차 한 잔 마시면서 공짜로 책을 보는 곳이 될 것 같았다. 아끼는 책들을 커피 한 잔 가격에 마구 망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 (149쪽)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를 함께 쓴 두 분은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째, 두 사람이 도시를 기쁘게 떠나서 시골에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려 하면서 빚은 ‘시골책방’ 이야기입니다. 둘째, 두 사람이 시골에서 씩씩하게 지키는 ‘마을책방’처럼 한국에서도 마을에 뿌리를 내려서 씩씩하게 한길을 걷는 아름다운 이웃을 만나러 나들이를 다닌 이야기입니다.


  저는 ‘책마실’이나 ‘책방마실’ 같은 말을 지어서 씁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책마실을 다닙니다. 도서관에 간다든지 ‘책 많은 이웃집’에 가는 일은 책마실입니다. 책 한 권이랑 도시락을 자전거 바구니에 담고서, 나무그늘이 싱그러운 곳으로 마실을 다녀오는 일도 책마실입니다. 책방마실은 ‘책을 살 수 있는 곳(새책방과 헌책방 모두)’으로 가는 일입니다.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를 보면 서울과 부산에 있는 예쁘고 아기자기하며 뜻있는 책터를 두루 보여줍니다. 여기에 전국 여러 곳 책터를 살며시 곁들입니다. 다만, 아쉽게도 ‘전라남도 마을책방’ 이야기는 없더군요. 나중에 뒷이야기를 쓰실 수 있다면 그때에는 전라남도 마을책방도 두루 돌면서 쓰실 수 있겠지요. 백창화 님하고 김병록 님이 시골에서 마을책방을 하시는 만큼, 서울이나 부산에 있는 ‘꼭 소개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책터’보다는 시골이나 작은도시에서 씩씩하게 책삶을 짓는 이웃님들한테 조금 더 눈길을 쏟을 수 있었으면 이 책이 한결 야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서울 옆에 있는 인천이나 부천에 있는 다부지고 사랑스러운 책터 이야기도 이 책에는 빠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주에 반디앤루니스가 아니라, 영풍문고가 아니라, 진주문고가 있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다수 우리들은 지역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이름을 잃자 이야기도 잃었다. 이야기를 잃으면 삶은 껍데기만 남는다. (172쪽)

  경상남도 진주는 참 재미있는 고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청북도 청주와 전라북도 전주도 진주와 함께 아주 재미있는 고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와 청주와 전주에는 그 고장에서 무척 오랫동안 터를 닦은 멋진 ‘새책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주와 청주와 전주에는 작은도시이지만 ‘헌책방’이 꽤 많습니다.


  오랜 지역 책방이 새책방과 헌책방으로 여러 군데 함께 있는 세 고장(진주와 청주와 전주)은 작은도시 가운데 젊은이가 퍽 많은 고장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책을 읽는 숨결’이 흐르는 고장에서는 젊은이가 그 고장에서 즐겁게 뿌리를 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꼭 ‘책방이 있어야 젊은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책방조차 없는 고장’에서는 지역을 살리거나 살찌우려고 하는 숨결이나 기운이 여리기 마련이라고 느껴요. 지역 책방은 ‘책을 만나는 곳’일 뿐 아니라, ‘책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지역을 가꾸거나 살리려고 하는 사람들 몸짓’이 새롭고 새삼스레 모여서 ‘작아도 알차’고 ‘작지만 씩씩’한 지역문화를 북돋우는 일을 크고작게 벌입니다.

 


책이란 삶의 다른 말이다. 다른 이의 삶의 역사와 흔적 없이 오늘 우리들의 삶이란 없다. (275∼276쪽)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를 쓴 두 분은 괴산에서 ‘숲속작은책방’을 앞으로도 알차고 야무지게 가꾸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있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책방이웃’하고 ‘책이웃’을 두루 만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다음 이야기도 쓰실 수 있기를 빌어요. 전국에 있는 작은 책방이 “책 쫌 파는” 이야기를 넘어서 “삶 쫌 짓는” 이야기와 “사랑 쫌 나누는” 이야기도 새록새록 길어올릴 수 있기를 빌어요.


자연 속에서 책을 보자! 어쩌면 이 말은 그저 허울 좋은 구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시골 마을로 귀촌한 이후 우리가 발견한 최대의 수확은 바로 자연 속에서 책을 보는 경험이다. (190쪽)

  창문을 열고 가만히 들바람하고 숲바람을 마십니다. 수많은 풀벌레하고 멧새가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함께 듣습니다. 가을에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봄에는 봄 하늘을 올려다보지요. 아이들하고 마당이나 고샅을 씩씩하게 달리기도 하면서 놀다가, 조용히 책을 들여다보다가, 자전거를 함께 타고 들길을 누비기도 합니다.


  책은 종이책도 책이면서 삶도 삶책이라고 느끼기에 시골에서 아이들하고 여러 가지 책을 함께 누립니다. 자전거를 몰아 바닷가에 가면 ‘바다책’을 읽습니다. 자전거를 낑낑거리면서 고갯길을 달리면 골짜기에서 ‘골짝책’을 읽습니다. 마당에서 뛰놀면 ‘마당책’이고, 우리 집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톡톡 따서 먹으면 ‘나무책’입니다. 해바라기를 하면서 ‘해님책’이요 밤마다 쏟아지는 별을 올려다보면서, 별바라기를 하면서 ‘별님책’입니다.

 

  오늘 하루도 전국 곳곳에서 기쁘게 아침을 열고 즐겁게 저녁을 마무리지으면서 마을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아름다운 ‘책방이웃’을 헤아려 봅니다. 책방이 마을을 살리는 삶을 헤아리고, 마을이 책방을 살리는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4348.10.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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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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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3



시와 달밤

― 밤 미시령

 고형렬 글

 창비 펴냄, 2006.3.17. 7000원



  달빛이 내리는 밤에는 달빛을 듬뿍 받습니다. 달빛은 깜깜한 한밤을 고루 밝혀서 고샅길을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한가위나 설에는 더없이 밝은 달빛이 들판을 푸근하게 어루만집니다.


  불빛이 가득한 밤에는 불빛이 눈부셔서 잠들기 어렵습니다. 불빛이 밝은 도시에서는 깊은 밤에도 오가는 자동차가 많고, 자동차가 내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도 그치지 않습니다.



사다리 같은 긴 목을 펼쳤다. 하늘가지에 노는 아기잎을 따 먹으려고, 앞발은 풀을 피해 가슴 밑 흙바닥에 사뿐히 눌러놓았다. 나뭇잎만 한 얼굴을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의 입은, 내 주먹만 하다. (동물원 플라타너스)



  고형렬 님이 빚은 시집 《밤 미시령》(창비,2006)을 읽습니다. 밤에 미시령을 넘는 이야기일 수 있고, 밤이 깊은 미시령을 바라보는 이야기일 수 있으며, 밤과 미시령을 함께 생각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또는 밤이나 미시령하고는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어요. 그러면, 시인한테 밤과 미시령은 무엇이 될까요. 시인은 어인 일로 밤에 미시령을 생각할까요.



사람만이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 가족과 함께 도처를 떠돌아다닌 프라이드는 / 제 최종 폐차통지서를 보내고 / 내 마음속에서 한 시절처럼 사라졌다 / 거대한 폐차장에서 / 그는 북한산 흰 구름처럼 북으로 사라졌다 (폐차통지서를 받고, 서울45라4706)



  옛날이라면 미시령을 자동차로 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자가용이 매우 흔하기 때문에 시인도 자가용을 몰며 미시령을 밤에 넘습니다. 밤이 아니어도 언제나 넘을 수 있는 미시령이요, 언덕길이며, 고갯길입니다. 숲길이나 멧길이 아니어도 어디이든 자가용으로 달릴 만하고, 이 나라에서 자동차로 못 가는 곳은 없다시피 합니다.


  문득 돌아봅니다. 참말 한국에는 자동차가 많습니다. 자동차가 많아도 아주 많아서, 뭍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도 흔합니다. 뭍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건너려고 놓는 다리가 아니라, 자동차가 뭍과 섬 사이를 싱싱 빠르게 달리도록 하려는 다리입니다.


  이리하여, 시인은 자가용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시인은 폐차로 떠나 보내는 자가용 이야기를 시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맞아들이는 자가용 이야기를 시로 그릴 수 있어요.



남들 다 보고 온 백두산 보러 2000년 / 옌뻰 가, 모자같이 생긴 산을 지나 // 윤동주 집으로 가다가 새빨간 깨꽃밭을 보았다 (모자산 꽃을 지나며)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누구나 시외버스를 타고 이 고장 저 고장을 찾아다녔습니다. 더 예전에는 누구나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서 이 고을 저 고을로 나들이를 다녔습니다. 하루아침에 서울하고 부산을 오가는 오늘날에는 이 빠른 찻길을 내달리면서 태어날 만한 시가 드물 텐데, 스무 날이나 달포나 여러 달에 걸쳐서 천천히 두 다리로 이 땅을 밟으며 나들이를 다니던 꽤 아스라한 지난날에는 바로 이 마실길에서 수많은 시와 노래와 이야기가 태어났습니다.


  꼭 자가용 때문은 아닙니다만, 자가용이 늘고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늘면서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이 부쩍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자가용을 몰거나 자가용에 함께 탄 사람은 깊은 밤에 달빛을 느끼지 못해요. 자가용에서는 오직 앞만 바라보아야 하며, 앞 자동차 불빛을 살펴야 하고, 때때로 뒷 자동차 불빛까지 헤아려야 합니다. 한낮이라 하더라도 햇빛을 느낄 만큼 느긋한 운전수는 없습니다. 신호등을 살피고 다른 자동차를 헤아려야 합니다.



산돌을 밟으며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화산이었다는 것을 / 이 돌들이 심장을 단숨에 연소시킨 불이었다는 것을 / 나무들은 그럼 어디서 왔는가 나는 모르지 / 그것이 설악의 화두다 알 길 없는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돌)



  《밤 미시령》을 쓴 고형렬 시인은 하늘에 뜬 돌을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산을 오르면서 산돌을 밟기에 하늘에 뜬 돌을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아서 산돌을 밟지 못했다면, 자동차에서 내릴 엄두나 생각이나 마음이 없이 산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두 다리로 이 땅을 밟는 삶을 누리지 않았다면, 아마 시는 흐르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두 손으로 가꾸는 삶이 있기에 시를 씁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두 발로 걸어가는 삶이 있기에 시를 노래합니다.



풀잠을 자고 싶은 게지. / 나 지금 하고 싶은데. / 지금 할까? / 참았다가 모레 합시다. / 싫은데……. (벌레)



  시를 읽는 사람은 시외버스에서도 읽고, 전철에서도 읽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베개맡에 시집을 눕혀 놓고도 읽고, 밥을 먹다가도 읽으며, 마당에 가만히 서서 가을볕을 쬐면서도 읽습니다.


  셈틀을 끄기에 시를 읽습니다. 신문을 덮기에 시를 읽습니다. 텔레비전을 집안에서 치우기에 시를 읽습니다. 두 다리로 걸으면서 지구라는 별을 느끼기에 시를 읽습니다. 훅 불어서 나뭇가지를 살살 건드리는 바람을 쐬기에 시를 읽습니다.



나도 그래 / 내 등뒤에 서울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 없어. 뻬이징 밖에는 농민이 살고 풀들이 살아 / 토오꾜오 밖에는 토오꾜오 만이 있고 파도가 있고 / 서울 뒤에는 북한산이 있다는 것이지. (버티컬 블라인드가 열릴 때)



  때때로 자동차를 멈출 수 있으면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자동차를 멈추어 시동을 끄고 창문을 내려서 가을바람을 한껏 들이마신다면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귀여겨듣는다면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를 읽을 적에 새로운 시가 마음속에서 샘솟습니다. 시를 읽고 시를 쓸 수 있으면 삶을 노래로 지으면서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한테 따스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 꾸러미를 풀어놓을 만합니다.


  환한 달빛은 구름까지 속살을 훤히 보여줍니다. 눈부신 달빛은 별더러 오늘은 고이 잠들라고 속삭입니다. 맑은 달빛은 시골집 처마를 지나 대청마루에까지 스며듭니다. 깊어 가는 가을에 무르익는 나락이 달빛을 받으며 더욱 노란 빛이 됩니다. 4348.9.3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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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곤충의 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생태놀이터 3
곤도 구미코 글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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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6



풀벌레는 사람한테 이웃이자 동무

― 찾았다! 곤충의 집

 곤도 구미코 글·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한울림어린이 펴냄, 2008.1.7. 1만 원



  마루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빗자루를 들고 가랑잎을 씁니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가랑잎을 쓰느라 바쁩니다. 네 철 푸른 나무는 네 철 푸른 만큼 꾸준하게 가랑잎을 내놓고, 겨울에 앙상한 가지로 쉬는 나무는 가을마다 가랑잎을 잔뜩 내놓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가랑잎을 쓸어도 마당에는 가랑잎이 소복합니다. 그렇다고 하루라도 미루면 더 많이 쌓여서 구릅니다.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으나, 가랑잎을 고이 쓸어서 풀밭으로 옮깁니다. 마당에서 바스라져서 흙이 되기보다는 풀밭이나 나무 둘레에서 천천히 삭아서 흙이 될 때에 한결 싱그러울 테니까요.


  마당을 쓰는 김에 누렇게 시든 풀을 베거나 뽑습니다. 줄기마다 새 뿌리가 생기면서 뻗는 여뀌를 걷다가 뿌리가 토톡 소리를 내며 뽑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개미가 함께 튀어나옵니다. 아차, 너희가 여뀌 뿌리 언저리에서 집을 짓고 살았구나. 이것 참 미안한 노릇이네. 그래도 너희는 집을 대단히 잘 지으니까 다시 손질해서 잘 가꾸렴.


  씨앗을 심으려고 호미로 땅을 쪼면 으레 개미집이 나옵니다. 또는 벌레집이나 애벌레가 나오기도 합니다. 굼벵이도 나오지요. 이럴 때마다 풀벌레한테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아이들한테 속삭입니다. 괜찮아, 씨앗만 심고 갈 테니까. 씨앗을 마저 심을 때까지 기다려 주렴. 씨앗을 다 심으면 그 뒤로 이 땅은 도로 너희 보금자리가 되겠지. 땅속을 알뜰살뜰 잘 보듬어 주렴.


  잘 자란 쑥대라든지 모시풀이라든지 젓가락나물이라든지 고들빼기를 베어서 마당 한쪽에 쌓았습니다. 달포 즈음 그대로 두어 바싹 말렸는데, 이 풀짚을 풀밭으로 옮기면서 보니, 아래쪽에도 온갖 벌레가 바글거립니다. 지렁이도 이곳에서 기어다니고, 쥐며느리와 집게벌레와 여러 벌레가 북새통을 이룹니다. 그런데 풀짚 밑바닥은 어느새 까무잡잡한 흙밭입니다. 고작 달포를 그대로 두었을 뿐이지만, 밑바닥에 있던 풀은 잘게 바스라졌을 뿐 아니라 동글동글 이쁘장하면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 까무잡잡한 멋진 흙으로 바뀌었어요.


  풀벌레와 지렁이는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지구별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풀벌레가 지렁이가 꾸준히 새로운 흙을 일구어 주면서 사람한테 아름다운 이웃이자 동무가 되는구나 싶습니다. 마른 풀이나 말라죽은 풀을 흙으로 바꾸어 주는 풀벌레와 지렁이입니다. 밥찌꺼기도 어느새 흙으로 바꾸어 주는 풀벌레와 지렁이입니다. 게다가 개미는 풀벌레 주검을 흙으로 바꾸어 주지요.



생각 없이 보아 넘긴 풍경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었어요. 나뭇잎을 잘라 돌돌 말거나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리거나 나무줄기 속에나 땅속에 굴을 파거나, 저마다 보금자리를 마련하려고 갖가지 슬기를 짜내어 살아가요. (25쪽)





  곤도 구미코 님이 빚은 그림책 《찾았다! 곤충의 집》(한울림어린이,2008)을 읽으며 흙과 풀과 시골과 땅을 함께 헤아려 봅니다. 곤도 구미코 님 그림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생태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네 권이 한국말로 나왔습니다. 《톡! 씨앗이 터졌다》, 《와글와글 떠들썩한 생태일기》, 《꼬물꼬물 곤충이 자란다》와 함께 《찾았다! 곤충의 집》은 네 권으로 네 철 이야기를 골고루 들려줍니다.


  이 가운데 《찾았다! 곤충의 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로 ‘이야기 말(설명 글)’이 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맨눈으로 볼 수 있을 만한 땅거죽이나 물위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다음 쪽에서는 ‘사람이 맨눈으로 볼 수 없을’ 만한 땅속이나 물속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주 조그마한 풀벌레와 날벌레와 물벌레가 저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삶을 짓는가 하는 이야기를 꼬물꼬물 조그맣고 앙증맞으며 재미난 그림으로 보여주어요.


  처음에는 ‘응? 무슨 그림일까?’ 하고 궁금하도록 이끌고, 한쪽을 넘기면 앞쪽하고 바탕은 같되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수많은 벌레가 저마다 얼크러지고 어우러지는 얼거리’를 한자리에 그러모아서 보여주지요.


  그런데, 그림책 《찾았다! 곤충의 집》을 보면, 온갖 벌레가 서로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모습이 곳곳에 나옵니다. 어느 벌레는 잡아먹히면서 눈물을 흘리고, 어느 벌레는 잡아먹으면서 빙긋 웃습니다. 그럴밖에 없어요. 참말 풀밭 먹이사슬에서는 목숨앗이가 뚜렷하게 갈려서 서로 먹이가 되고 삶이 되며 삶터를 이룹니다.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꾸밈없이 들여다봅니다.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으로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이 벌레는 이러한 삶이로구나 하고 깨닫고, 저 벌레는 저러한 삶이네 하면서 깨닫습니다. 수많은 벌레가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이루는 새로운 삶을 마주합니다.



벌레 똥은 벌레 집. 혹잎벌레 집은 벌레 똥이거든.

나는 노랑쐐기나방. 내 고치는 길쭉동글한 초코볼처럼 생겼어.

난 팽나무혹파리. 나뭇잎 벌레혹 속에 살지.

나는 물속 청소부, 물방개.

나는 빨간 바탕에 까만 점이 콕콕 박힌 무당벌레. 나무껍질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 다 함께 겨울을 나. (그림책 면지에 있는 그림)





  가을볕이 뜨겁다면서 마루에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마당으로 부릅니다. “얘들아, 우리 집 빨랫줄을 보렴. 잠자리가 네 마리나 나란히 앉았는걸.” 아이들은 “어디? 어디?” 하면서 내다봅니다. 마당으로 맨발로 내려서서 두리번거리다가 찾아냅니다. “아, 저기 있구나!”


  저녁에 잠자리를 깔고 함께 눕습니다. 큰아이가 문득 묻습니다. “아버지, 거미들은 왜 태풍이 오면 안 날아가?” “거미는 태풍이 올 적에 안 날아간다기보다 태풍이 오면 미리 알아채고 줄을 다 걷고서 숨지. 그래야 태풍에 날아가지 않으니까. 태풍이 오면 거미줄로 잡을 벌레도 없으니 줄을 걷어야지.” 엊그제 두 아이는 마당에서 애벌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맨발로 마당에서 놀다가 애벌레를 보았다더군요. “저기, 저 나무에서 이리로 떨어졌어. 다시 나무로 올려주려고 나뭇잎을 대는데 얘가 나뭇잎으로 안 올라오고 혀만 빨갛게 낼름낼름 내밀어.” “나뭇잎으로 안 올라오면 다른 나뭇잎을 써서 뒤에서 밀어 주면 되지.” “얘는 범나비 애벌레일까, 아니면 파란띠제비나비 애벌레일까?” “글쎄, 파란띠제비나비 애벌레 같기는 한데, 혀 내미는 빛깔하고 다리 옆으로 난 하얀 띠를 보니까 범나비 애벌레 같아.”


  나는 풀벌레나 애벌레를 잘 몰랐고, 아직 얼마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수많은 풀벌레하고 애벌레를 늘 아이들하고 지켜보면서 새롭게 배웁니다. 여기에다가 멋진 그림책을 아이들하고 함께 읽으면서 즐겁게 배웁니다.


  벌레를 다루는 그림책은 아이들이 대단히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공룡 그림책 못지않게 벌레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벌레가 사람하고 아주 가까운 이웃이자 동무인 줄 마음으로 아는 셈일까요? 벌레가 이 지구별에 있기에 모든 주검과 쓰레기를 삭혀서 아름다운 흙으로 바꾸어 주는 줄 마음으로 알까요?


  벌레 그림책을 읽으면서 벌레를 더 재미있고 살가이 배웁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사랑스러운 벌레 그림책을 읽으면서 ‘인문 지식’이 아닌 ‘우리 곁 예쁜 숨결’이라는 테두리에서 벌레 한살이와 이야기를 새삼스레 배웁니다. 4348.9.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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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 동경대 가다! 19 (신장판) - KBS 드라마 '공부의 신' 원작
미타 노리후사 지음, 김완 옮김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56



‘시험공부’만 하느냐 ‘삶을 배우려’ 하느냐

― 꼴찌, 동경대 가다! 19

 미타 노리후사 글·그림

 김완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2010.1.4. 4500원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는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고 돌아보면 이것저것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리 기쁘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일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같은 자리만 맴돌아야 했던 나날이었네 하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런 중·고등학교 여섯 해였어도, 기찻길을 밟고 두어 시간 거닐던 일은 자주 떠오릅니다. 이제 옛날 그 기찻길은 몽땅 사라졌지만 하루에 한두 대 지나가는 오래된 기찻길이 있었고, 자율학습 따위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으레 그 기찻길을 따라서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천 걸음 떼기나 만 걸음 떼기를 하며 혼자 놀았습니다. 이렇게 한참 기찻길을 밟고 걸으면 어느새 무거운 짐이 훌훌 사라지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시험공부를, 대학 입시 공부를 붙잡습니다.



“내 콤플렉스는 내 자신에 대한 거야. 난 고등학교를 중퇴했잖아? 난 곤란하면 금방 도망쳐 버리는 약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서 자기혐오에 빠지는 거야. 하지만, 입시에서든 뭐든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 강해질 수 있고, 더 유리하댔어.” (18∼19쪽)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그게 문제야. 시간은 남아돌고,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으려나. 하지만 참 신기해. 작년 이맘때는 할 게 없어도 아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니.” (40쪽)



  미타 노리후사 님이 빚은 만화책 《꼴지, 동경대 가다!》(랜덤하우스코리아,2010) 열아홉째 권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이 만화책은 모두 스물한 권이고, 책이름에서 말하듯이 ‘학교 꼴찌’인 아이가 일본에서 동경대에 붙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학교 꼴찌’를 하던 아이라 하더라도 동경대학교에 붙도록 시험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러면, 어떤 이는 이 만화책을 참고서 삼아서 ‘나도 서울대에 한번?’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서울대학교라고 해서 아무나 못 가는 곳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일 테니까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공부가 무한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시험공부는 유한하구나. 그걸 알고 나니 얼마나 공부하면 좋을지 점점 보이게 되고, 약점을 극복하는 게 재미있어졌어. 마치 공부란, 정해진 크기의 판 위에서 하는 오셀로 게임 같아. 아직 칸을 전부 채우진 못했지만, 이기는 법을 알게 돼 돌을 놓을 때마다 게임판의 색이 순식간에 바뀌는, 그런 느낌이 너무 좋아.’ (46∼47쪽)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붙은 뒤 ‘대학교는 중·고등학교하고 다르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다른 모습’은 대학교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오직 시험공부만 해야 하던 학교 얼거리인데, 대학교에서도 똑같이 시험공부만 해야 하는 얼거리입니다.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바라보는 시험공부요,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바라보는 시험공부인데, 대학교는 회사와 공공기관을 바라보는 시험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학교는 놀고 먹는 시험공부입니다. 한쪽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술잔치이고, 한쪽에서는 도서관에만 처박히는 시험공부입니다. 대학교조차 도서관이 ‘책 읽는 곳’이 아니라 ‘시험공부에 사로잡히는 곳’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시험공부만 시키는 나라에서 대학교가 제대로 설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내가 바보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이 나라 교육이 제대로 섰다면, 중·고등학교 푸름이한테 시험공부만 우악스럽게 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한창 마음이 자라야 할 푸름이한테 삶을 가르쳐야 마땅한 중학교요 고등학교입니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따위로 아이들을 길들이거나 괴롭히려는 중·고등학교가 아닌, 삶과 사랑과 사람을 슬기롭게 보여주면서 가르칠 줄 알아야 하는 중·고등학교여야 하지요.


  고등학교를 마치는, 또는 대입 시험을 치른, 앳된 젊은이는 손쉽게 술하고 담배를 손에 쥡니다. 술하고 담배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술하고 담배일 뿐입니다. 다만, 고등학교까지 학교나 사회나 마을이나 집에서 아이들한테 술하고 담배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어른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대학교는 어떠할까요? 대학교 교수나 선배라는 사람은 술이나 담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거나 가르칠 수 있을까요?



“큰맘 먹고 뒤로 물러나라. 거시적인 시점에서 수험에 임하기 위해 보다 높이, 위에서 보는 거야. 점점 높이, 기왕 하는 김에, 일본 상공에서, 지구 밖에서, 그리고 우주에서.” (69∼71쪽)


“그래서 어쨌는데 하는 얘기일 뿐이지.” “그래서 어쨌는데?” “설령 실전에 약한 타입이래도,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말이야. 그렇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실전에 강해지도록 트레이닝해서 자기개혁을 하면 되는 것뿐이거든.” (119쪽)



  만화책 《꼴지, 동경대 가다!》는 훌륭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으며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있습니다. 꼴찌이든 아니든 누구나 동경대에 가려고 하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꼴찌이든 일등이든 동경대에 못 들어가는 까닭은 ‘동경대’라고 하는 곳을 제대로 알거나 살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동경대에 왜 들어가려고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나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려고 애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화책에서도 흐르는 이야기입니다만, 동경대에 가든 안 가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동경대에 가야 한다면 가야 할 뿐입니다. 들어가면 되지요. 한국에서 서울대에 굳이 가야 할까요? 한국에서 대학교에 굳이 가야 할까요? 더 생각해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꼭 마쳐야 할까요? 중학교나 초등학교를 구태여 다녀서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할까요? 대학교 졸업장뿐 아니라 초등학교 졸업장이 반드시 있어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만할까요?



“넌 슛을 열 개 다 넣으려 했기 때문이야.” “슛 열 개를 다.” “반대로 난 어떻게 이겼을까? 그건 처음부터 대략 여섯 개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대략 여섯 개.” “일곱 개 넣으면 승리는 거의 확실하고, 다섯 개로도 어떻게든 비길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어. 그래서 처음 두 번은 빗나가도 당황하지 않았지. 반대로 넌 아무 대책도 없이 시합을 시작했을걸? 어때?” (154∼155쪽)



  삶은 졸업장으로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삶은 은행계좌나 아파트 크기로 잴 수 없습니다. 삶은 얼굴 생김새나 몸매 따위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삶은 밥그릇이나 나이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삶은 오로지 삶으로 마주하면서 바라봅니다. 삶은 오직 사랑으로 가꿉니다. 삶은 오직 스스로 아름답게 일어서는 웃음꽃으로 기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시험공부를 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에 꼭 붙어서 어떤 일을 하겠노라 하는 꿈이 있으면 시험공부를 신나게 하고 기쁘게 하며 재미나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시험을 마쳤으면 새로운 마음과 몸이 되어서 ‘삶 배우기’로 나아가면 돼요.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저마다 다른 기쁨을 누리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다 다르면서 모두 뜻있고 값있으면서 아름다운 삶을 지으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삶을 가르치고 배울 때에 즐겁습니다.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운 너와 내가 만나서 어깨동무를 하면 아름답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고 두 걸음을 뻗습니다. 세 걸음을 디디고 네 걸음을 폴짝 뛰어오릅니다. 배우는 길은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지만, 시험공부에 얽매이는 길은 괴롭고 따분하며 힘듭니다. 우리는 어느 길을 걸어야 할까요? 4348.9.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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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좌파 음식우파 - 음식으로 엿본 현대인의 정치 성향
하야미즈 켄로 지음, 이수형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2



‘바른 밥’을 먹기에 ‘좌파’ 아닌 ‘착한 넋’

― 음식 좌파 음식 우파

 하야미즈 켄로 글

 이수형 옮김

 오월의봄 펴냄, 2015.9.15. 13000원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이면 다 맛있고 좋았습니다. 다만,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한 가지는 알았습니다. 정부미는 맛없고 일반미는 맛있었어요. 정부미에는 늘 바구미가 끓었고 일반미에는 바구미가 드물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못 먹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냉면이나 치즈나 요플레나 김치나 삭힌 것은 도무지 안 받았습니다. 달걀도 한 달쯤 안 먹다가 먹으면 어김없이 배앓이를 했고, 우유도 똑같았습니다. 이제 치즈나 요플레나 김치를 먹을 수 있는 몸이 되었으나 냉면은 아직 몸에서 안 받습니다.


  내 어린 날, 깨끗한 밥이나 제대로 된 좋은 밥을 생각하는 어른은 드물었다고 느낍니다. 그무렵에는 ‘깨끗한 밥’은 아주 마땅한 노릇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인공감미료가 방송과 신문 광고로 엄청나게 퍼지기도 했어요. 어느 한쪽으로는 누구나 제대로 된 밥을 스스로 지어서 먹었습니다만, 끓는 국을 플라스틱 국자로 떠서 플라스틱 그릇에 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원전 사고 이후 음식의 안전성을 둘러싼 갈등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고 이후 아이들에게 주는 음식의 안전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엄마와 무관심한 아빠 사이의 갈등이 결국 이혼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방사능 이혼’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14쪽)


육류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곡물은 8킬로그램이다 … 육류 생산은 곡물 자체에 비해 훨씬 더 비효율적이다. (31쪽)


런던에서 가장 반정부적인 존재는 정부나 여왕을 비판한 펑크록 밴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가닉 야채를 파는 이들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48쪽)



  먹을거리를 놓고 ‘좌파’하고 ‘우파’를 갈라서 바라보는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은 ‘일본 남성’입니다. 글쓴이 하야미즈 켄로 님은 여러모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밥이 태어나는 자리’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서 이론으로 섣불리 들이미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이를테면, 유기농 푸성귀가 ‘상위 2퍼센트’가 바라는 먹을거리라고 되풀이하는 대목을 들 만한데,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로구나 싶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이 아이를 낳아서 손수 길렀으면 이런 말을 안 하겠지요. 왜냐하면, ‘좌파’도 ‘음식 좌파’도 ‘우파’도 ‘음식 우파’도 아닌 무척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찾습니다. 적어도 ‘친환경’을 찾으려 하고, ‘무농약’이라는 말이 눈에 뜨이면 덥석 집지요.


  왜 그러할까요? 아직 일본이나 한국도 남녀 성평등하고 동떨어진 채 ‘여성이 집안일을 도맡기 일쑤’입니다. 아기를 낳은 여성(어머니)은 아기가 먹을 밥을 챙기면서 오늘날 모든 아기한테 생기는 아토피 때문에 그야말로 죽을맛입니다. 아기는 가렵다고 자꾸 긁으면서 살갗은 피가 철철 흐르지만 긁기를 멈추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그저 옆에서 눈물을 흘릴 뿐 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토피에 바르는 연고는 아토피를 뽑아내거나 없애지 못하고 ‘살갗에 피가 더 흐르지 않고 아물도’록 할 뿐입니다. 좌파도 음식 좌파도 아닌 ‘아토피 아이를 둘 수밖에 없는 오늘날 모든 어머니’는 누구라도 ‘유기농·자연농·무농약·친환경’에 눈길을 두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약도 병원도 아토피를 고칠 수 없는 줄 온몸으로 느끼고 날마다 아기를 쳐다보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유기농이나 자연농에 눈길을 두지만, 이내 ‘플라스틱 조리기구와 그릇과 물잔’마저 몸에 나쁜 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집안 살림을 싹 바꾸지요. 그리고, 아기한테뿐 아니라 ‘아무것이나 아무렇게나 먹는 어른(거의 남성, 아버지)’도 아기한테 생기는 아토피를 부채질하는 줄 깨닫습니다. 어른(남성, 아버지)이 아무것이나 먹으니 아기도 아무것이나 따라서 먹고 싶어 해요. 그래서 여성(어머니)은 집식구 모두 ‘밥을 바꾸어야 할’ 뿐 아니라 살림과 삶도 바꾸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유기농 생산비율을 높이면 건강하고 맛있는 야채를 원하는 상위 2퍼센트의 소비 만족도는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 세계 식량 사정 자체를 개선시켜 주진 않는다. 오히려 이 같은 생산 방식이 나머지 98퍼센트 사람들의 식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160쪽)



  이 책을 쓴 일본 남성은 이런 대목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사능 이혼’이 ‘일본 여성(어머니)’으로서 얼마나 뼈맺히고 사무쳐서 나오는 힘든 결정인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방사능 이혼’을 다짐하는 일본 여성은 좌파도 음식 좌파도 아니에요. 아기를 사랑하는 여성(어머니)일 뿐입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살림을 꾸리면서 아기 어머니는 어느새 유기농을 공부합니다. 스스로 공부하여 ‘유기농 제품’을 사려고 찾다가 어느새 손수 텃밭을 지으려 합니다. ‘음식 좌파’로는 정의내리거나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유기농은 ‘나머지 98퍼센트하고 동떨어진’ 농사법이 아닙니다. 100퍼센트 모든 사람을 생각하려는 농사법이고, 유기농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자연농’이 차츰 퍼지지요.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음식 좌파뿐 아니라 음식 우파도, 늘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바람이 ‘깨끗하고 좋은’ 데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도시 문명을 차마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밥과 물과 바람이 깨끗하거나 좋은 데로 못 가기 마련입니다.



유전자조작작물은 우리가 이미 10년 이상 소비해 왔다. 그리고 의료 분야에서는 유전자조작으로 만든 인슐린을 이용해 몇 백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조작 인슐린이나 작물이 환경, 혹은 사람 건강에 유해한 부작용을 끼쳤다’는 사례 보고는 아직 한 건도 없다. (167쪽)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쓴 일본 남성은 ‘유전자조작’ 인슐린과 작물이 어떤 사람한테도 나쁜 영향이나 부작용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음식 좌파도 음식 우파도 아닌 ‘여느 어머니’ 가운데 이렇게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느낍니다. 왜 그러할까요? 아무런 나쁜 영향이나 부작용을 끼치지 않았는데 왜 오늘날 모든 아기는 아토피를 달고 태어날까요? 99.9퍼센트도 아닌 100퍼센트 모든 아기가 아토피를 달고 태어납니다. 주의력결핍장애라고 하는 이름이 붙는 아기는 왜 해마다 더욱 많이 늘어날까요?


  왜 오늘날에는 아이들한테 예방주사를 그렇게 많이 엄청나게 자꾸 자주 맞히려고 할까요? 그렇게까지 예방주사를 맞히지 않고서는 아이들 몸이 버틸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화학약품으로 지은 관행농 농사로 거둔 먹을거리를 먹기 때문에 화학약품으로 늘 처방을 해야 할 수밖에 없고, 다시 화학처리를 한 것들로 살림집을 뒤덮어야 하는 얼거리가 아닐는지요?


  한국이나 일본 모두 예방주사를 안 맞히려는 어머니가 무척 많이 늘어납니다. 예방주사를 안 맞히면서 아무 병에 안 걸리고 아토피를 씻어내는 슬기로운 길을 찾는 어머니가 매우 많이 늘어납니다. 이들 ‘어머니’는 음식 좌파일까요, 아니면 음식 우파일까요. 또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어머니’일까요.


  음식을 놓고 좌파와 우파를 갈라서 인문 지식을 펼치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다만, 밥은 삶하고 곧바로 이어집니다.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지식과 철학과 이론으로만 밥을 다루려고 하면 그만 삶하고 동떨어집니다. 오늘날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어머니’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기농을 찾고 손수 텃밭을 지으려고 소매를 걷어붙일 뿐 아니라 생협 회원이 되고, 아예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기려고 하는 까닭을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쓴 일본 남성은 하나도 못 헤아립니다.



음식 좌파가 가진 반과학주의는 세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난 가능성에 매우 냉담하다. 유기농법의 보급이 세계 기아에 치명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 그리고 음식 좌파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지키는 게 세계 빈곤층에게 위협이 된다는 음식 좌파의 딜레마에 대해 앞서 5장에서 다뤘다. (207쪽)



  ‘유기농이 세계 인구 증가를 위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습니다. 세계 인구와 식량에 위협이 되는 것은 유기농이 아니라 군부대와 전쟁무기입니다. 군부대와 전쟁무기는 얼마나 많은가요? 지구별 모든 정부는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도시나 시골을 깨끗하게 가꾸는 데에는 거의 돈을 한푼도 안 쓴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군사강대국은 끝없이 핵무기 실험을 합니다. 전쟁무기 실험을 하면서 방사능이 끝없이 지구별을 떠돕니다.


  게다가 대형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야말로 땅을 더럽히면서 ‘유기농이든 관행농이든’ 모두 위험한 먹을거리가 되도록 합니다. 몇 해 앞서 일본에서 터진 끔찍한 일 뒤로, 일본에서는 ‘일본에서 난 것’이 방사능에 얼마나 찌들었을까를 걱정하는 사람이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퍼졌어요. 바로 이런 방사능 피해, 원자력 발전소와 대형 발전소, 군부대와 전쟁무기, 끝없는 막개발, 농약을 퍼붓는 골프장, 조용한 숲을 갈아엎는 대형 관광단지, 대형 발전소에서 이어지는 엄청난 송전탑, …… 이러한 것들 때문에 ‘깨끗한 바람이 태어나는 숲’이 망가지고 ‘깨끗한 먹을거리를 낳는 논밭’이 무너집니다.


  세계 빈곤층한테 위협이 되는 것은 유기농이 아니라 ‘철없이 멈출 줄 모르는 첨단과학 도시문명’과 ‘군부대와 전쟁무기’입니다.



내가 음식 우파에서 음식 좌파로 전향한 이유는 ‘맛과 재미’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건강에 대한 바람 때문도 아니고, 독을 몸에서 배출하고 싶다는 해독 작용과도 무관하다. 하지만 한번 신선한 유기농 식재와 자연식 레스토랑에 익숙해지면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는 데 일정 부분 혐오감이 생긴다. (212쪽)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쓴 일본 남성은 ‘음식 우파’에서 ‘음식 좌파’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음식 좌파’란 누구인가를 이 책에서 길게 펼쳐서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글쓴이는 ‘맛과 재미’ 때문에 음식 좌파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로 밥을 차려서 먹는 사람은 패스트푸드(음식 우파)와 공장 제품(음식 우파)으로 밥을 차려서 먹는 사람하고 사뭇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먹는 사람은 ‘과식’을 안 합니다. 많이 안 먹습니다. 아니,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먹는 사람은 으레 ‘소식’을 합니다. 일부러 적게 먹지 않습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은 ‘무게나 부피로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은 ‘값싸고 양 많이’를 내세웁니다. 음식 우파라고 하는 밥차림은 더 적은 돈으로 더 많이 먹는 길을 간다고 하는데,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은 더 먹고 또 먹어도 배가 제대로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으레 과식을 하지요. 게다가 값이 싸다는 것 때문에 자꾸 과식을 합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은 한결 더 맛있다고 할 테지만, 이보다는 ‘적은 부피와 무게’에도 영양소와 칼로리가 제대로 알차게 깃들기 때문에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찬다고 느낍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는 ‘값이 비싸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막상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는 으레 ‘소식’을 하면서도 배가 부르면서 즐겁기 때문에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을 값싸게 많이 사서 먹을 때’보다 돈이 적게 들기까지 합니다.


  더군다나,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밥을 차려서 먹으면, 소식뿐 아니라 때때로 금식이나 절식을 합니다. 어느 때에는 단식을 하지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밥을 차려서 먹으면 ‘몸과 마음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에요. 몸이 바라는 대로 ‘적게 먹’고 ‘알맞게 먹’으며 ‘즐겁게 먹’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뱃속을 가볍게 비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밥을 한두 끼니쯤 건너뛰고, 하루나 며칠쯤 가볍게 밥굶기(단식)를 하면서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사람은 사는 장소가 도시인지, 교외인지, 농촌인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다니는 학교나 사는 동네에 따라서도 크게 다르다. (213쪽)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를 ‘관행농 먹을거리’하고 똑같은 부피와 무게로 먹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은 그야말로 이론입니다. 삶으로 살림을 짓고 아이를 돌보며 살다 보면, 이론과 삶은 너무 동떨어지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 이른바 치킨이나 과자나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을 밥상에 올리면 많이 먹었는데에도 손이 그치지 않아요. 자꾸 더 먹으려고 해요. 이와 달리 유기농이나 자연농 ‘식재료’로 지은 밥이나 주전부리를 주면,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다고 남기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몸이 움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살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집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몸을 떠나서, 아이하고 어떻게 하루를 짓느냐 하는 몸짓에 따라 그야말로 모든 삶과 살림과 사랑과 꿈이 달라지지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음식의 양극화는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건 ‘공업 제품이 된 음식’이다. (64쪽)


유기농업이 지역 내 농가 한 곳만 나서선 큰 효과를 얻기 어렵다. 헬리콥터로 일제히 농약을 살포하는 과정 자체도, 규모 이점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93쪽)


그들이 야사토에 정착해 농업 설비를 갖추고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 농업’이었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대량으로 살포해 효율을 중시하고, 규모를 확대하는 논리로 수확량을 늘리는 공업화된 농업’이 바로 근대 농업이다. (95쪽)



  좌파도 우파도 아닌 ‘수수한 여느 어머니’는 비료나 농약을 쓴 곡식이나 열매나 푸성귀를 아이한테 안 먹이려고 합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며 이 모습을 아주 재미있게 지켜봅니다.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지내며 가만히 둘러보면,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사는 분들은 하나같이 ‘아이 아토피’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농약과 비료로 지은 곡식이나 푸성귀’를 반기지 않아요. 도시에서 사는 ‘시골 출신’으로서 어떻게 짓는지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생협 매장을 따로 찾아가서 농약과 비료를 안 친 먹을거리를 아이들한테 먹이려고 애씁니다. 이러면서 시골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해요. 시골에 있는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녁 손자를 생각해서 ‘농약과 비료와 비닐을 버리는 농사법’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냥 관행농으로 익숙한 대로 농약을 치고 비료를 듬뿍 뿌리고 언제나 비닐로 온 땅을 뒤덮습니다.


  도시에 있는 ‘시골 출신’은 ‘어머니 손맛’을 생각해서 먹을 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머니 손맛’만으로 이녁 아이한테 밥을 챙겨 줄 수 없는 줄 알기에, ‘시골 출신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생협 매장을 찾고 ‘깨끗한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찾습니다.



오가닉 가게는 도심에서만 가능하고 인구가 적은 지방에서는 성립되기 어렵다 …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는 다양성이 보장되고 그에 따른 선택지도 많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인구 직접도가 낮기 때문에 선택지는 최저한의 획일적인 것만 제시되기 쉽다. (123, 125쪽)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 농법’이 나타나기 앞서, 한국도 일본도 지구별 어느 나라도 모두 ‘자연농’이거나 ‘유기농’이었습니다. 요즈음 갑자기 생긴 자연농이나 유기농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새마을운동 앞서까지, 햇수로 치면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지은 모든 농사는 자연농이자 유기농이었어요. 아무도 농약이나 비료나 비닐을 안 썼어요. 그리고, 그무렵에는 ‘흙 파서 먹는 아이’가 많았고, 온갖 풀을 골고루 잘 먹었습니다. 이무렵에는 기생충은 몸에 있더라도 아토피는 아무한테도 없었습니다. 기생충은 약이나 약초로 다스릴 수 있었고, 아토피란 아무한테도 없으니 가끔 과자나 공업 제품을 먹어도 큰 탈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밥만 먹는 사람은 ‘공업 우유’조차 꺼리거나 몸에서 안 받았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연농이자 유기농으로 땅을 일구던 지난날에는 모든 사람이 ‘음식 좌파’였을까요? 《음식 좌파 음식 우파》는 이러한 대목을 조금 더 깊고 넓게 차근차근 짚을 수 있어야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을 놓고 섣불리 좌파와 우파로 가르기 앞서, ‘바른 밥’과 ‘맛난 밥’과 ‘즐거운 밥’과 ‘사랑스러운 밥’과 ‘아름다운 밥’이 무엇인가를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맛과 재미” 때문에 음식 좌파가 되었다고 하는 글쓴이라면, 바로 이 대목을 더 제대로 짚거나 살폈어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지구별 빈곤과 기아를 낳는 것은 ‘유기농’이 아닌 ‘군부대와 전쟁무기와 막개발’ 따위 때문이라는 대목을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8.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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