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너를 꽃이라 부른다
고홍곤 지음 / 지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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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나온 이 사진책은 아쉽게도 책방에 배본이 안 되었군요.

출판사에 직접 연락해야 장만할 수 있을 듯합니다. (02-3272-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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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9



꽃다운 삶을 사진으로 노래하는 아침

― 꽃시계는 바람으로 돌고

 고홍곤 사진

 지누 펴냄, 2015.3.24. 20000원



  밤이 되면 달빛이 드리웁니다. 달빛은 마루를 지나 방으로도 부엌으로도 들어옵니다. 풀벌레가 고즈넉하게 노래하는 밤이면 언제나 달빛을 바라보면서 고요히 잠이 듭니다. 다만, 시골집에서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잠이 들지만, 도시에서라면 다르리라 느낍니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달빛이 아닌 전등불빛이 퍼질 테고, 수많은 자동차가 밤새도록 비추는 불빛이 넘칠 테지요. 저 먼 별에서 찾아오는 별빛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여러 전자제품이 내뿜는 불빛이 가득할 테고요.


  요즈음은 전등불빛 아닌 달빛이나 별빛을 마주하면서 한밤을 누리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한낮에도 햇빛이 아닌 전등불빛에 기대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한낮이든 한밤이든 사진을 찍을 적에 햇빛이나 햇살이나 달빛이나 별빛을 살피기보다는, 전등불빛을 살피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저는 늘 당신 안에서 돋습니다. 세찬 눈보라에도 당신이라면 맨발도 따뜻합니다. (10쪽)

솟구쳐 솟구쳐 촛불처럼 밝혀라. 환한 날들이 네 앞에 있음을. (12쪽)






  고홍곤 님이 2015년에 선보이는 ‘꽃 이야기’ 사진책 《꽃시계는 바람으로 돌고》(지누,2015)를 읽습니다. 고홍곤 님은 지난 2006년에 《꽃, 향기 그리고 미소》를 처음 선보였고, 《꽃심, 나를 흔들다》(2007)와 《희망, 꽃빛에 열리다》(2009)와 《세상, 너를 꽃이라 부른다》(2011)와 《굽이굽이 엄마는 꽃으로 피어나고》(2013)를 차곡차곡 선보였습니다. 2006년에 처음으로 ‘꽃 이야기’를 선보인 뒤, 홀수 해마다 사진전시와 사진책을 함께 내놓습니다. 앞으로 2017년에도, 2019년에도 새로운 꽃 이야기로 꽃내음을 들려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바람 속에도 우리는 웃어요. 웃어, 햇살 가득하지요. (22쪽)

당신의 음성은 사랑의 꽃별입니다. 별빛 달빛도 머물다 갑니다. (26쪽)





  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시골꽃이 핍니다. 바닷가에서는 바다꽃이 피고, 숲에서는 숲꽃이 피며, 멧골에서는 멧꽃이 피어요. 서울에서는 서울꽃이 필 테고, 부산에서는 부산꽃이 필 테지요.


  다만, 자동차와 사람이 빽빽하게 넘치는 곳에서는 꽃을 쳐다보기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시골에는 따로 꽃집이 없습니다만, 도시에는 따로 꽃집이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굳이 꽃집을 찾지 않아도 어디에서나 꽃잔치요 꽃내음이며 꽃누리인 터라, 모든 살림집이 ‘꽃집(꽃가게인 꽃집이 아닌, 꽃으로 이룬 집인 꽃집)’입니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바쁘고 자동차가 너무 싱싱 달리니 들꽃이나 길꽃이 제대로 자랄 겨를이 없습니다. 길가에서 하염없이 들꽃이나 길꽃을 들여다보면서 꽃내음을 맡을 틈이 없어요.


  그래도 도시에서 골목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꾸준히 늡니다.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갈라진 자리에서 돋는 조그마한 풀포기와 꽃송이를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이 천천히 늡니다. 골목마을 이웃이 작은 꽃그릇에 작게 심어서 가꾸는 골목꽃이 골목길을 환하게 밝히는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이 차츰 늡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중앙정부나 지역정부에서 목돈을 들여서 서양꽃을 잔뜩 심어야 아름다울까요? 백만 송이에 이르는 국화나 장미나 튤립을 한곳에 몰아서 심어야 아름다울까요? 한 가지 꽃만 백만 송이나 천만 송이나 십만 송이를 심을 적에는 ‘다른 모든 들꽃’은 ‘잡풀’로 여겨서 마구 뽑아냅니다. 장미꽃잔치나 튤립꽃잔치나 국화꽃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는 나팔꽃도 냉이꽃도 민들레꽃도 씀바귀꽃도 달맞이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쑥꽃이나 부추꽃이나 봄까지꽃이나 소리쟁이꽃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요.





햇살과 바람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는 (52쪽)

손 벌려 바람을 안고 가슴으로 하늘을 품으니, 늘 새로운 나날이여. (64쪽)



  사진책 《꽃시계는 바람으로 돌고》를 차근차근 읽습니다. 사진을 읽고, 글을 읽습니다. 고홍곤 님은 사진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붙입니다. 아니, 꽃을 찍은 사진마다 이야기가 한 타래씩 자랍니다. 꽃을 마주하는 동안에 사진을 한 장 얻고, 사진을 한 장 얻는 사이에 이야기를 한 꾸러미 얻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꽃한테 다가서는 동안 마음속으로 기쁜 숨결이 피어나고, 사진을 찍고 뒤돌아설 즈음 가슴속으로 기쁜 노래가 흐릅니다.


  사진책 《꽃시계는 바람으로 돌고》에 나오는 ‘사진말’을 꽃말이나 삶말로 여겨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는 말로 삼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고스란히 ‘사진말’로 느끼며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찍는 사진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찍기에 사진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사진을 찍을까요?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루를 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찍습니다.


  “손을 벌려 바람을 안고 가슴으로 하늘을 품”을 때에 “늘 새로운 나날”인 줄 스스로 깨닫고, 이렇게 깨닫는 동안 꽃송이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문득 단추를 눌러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 한 장이 태어납니다. “처마 밑 비 오는 소리”를 듣다가 사진 한 장이 태어나고, “장독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진 한 장이 거듭 태어납니다.





처마 밑 비 오는 소리, 장독대 눈 내리는 소리. (88쪽)

손을 잡으면 따스합니다. 손이 또 손을 부릅니다. (113쪽)



  꽃다운 삶을 사진으로 노래하는 아침입니다. 아이다운 놀이를 사진으로 노래하는 한낮입니다. 하늘다운 꿈을 사진으로 노래하는 저녁입니다. 냇물다운 사랑을 사진으로 노래하는 한밤입니다.


  꽃을 사진으로 찍든, 예쁜 이웃을 사진으로 찍든, ‘남들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멋져 보이거나 훌륭해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든, 새롭거나 낯선 모습을 사진으로 찍든, ‘전문가나 프로 작가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진은 내가 나답게 살면서 찍습니다. 나는 나답게 내 둘레를 바라보면서 찍습니다. 내 사진은 오직 나다운 사진이지, 너다운 사진이 아닙니다. 내 사진은 ‘나다운 사진’일 때에 ‘내 이야기’가 서리면서 ‘내 꿈과 사랑’이 피어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내 사진은 ‘브레송다운 사진’이거나 ‘카파다운 사진’이거나 ‘이런저런 잘 알려진 작가다운 사진’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사진을 읽는 사람이 ‘아, 이 사진을 보니 아무개 작가 사진이 떠오르네’ 하고 말한다면, 내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함께하는 노래는 늘 가슴을 울립니다. (132쪽)

사랑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놓으면 삶은 감동입니다. (137쪽)



  시인은 시를 쓰고, 사진가는 사진을 찍습니다. 어버이는 밥을 짓고, 아이는 뛰놉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노래하고, 사진가는 사진을 찍으면서 노래합니다. 어버이는 밥을 지으면서 노래하고, 아이는 뛰놀면서 노래합니다.


  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꽃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노래’합니다.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골목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노래’할 테고, 숲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숲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노래’할 테지요.


  그러니, 사진기를 손에 쥔 우리는 사진을 찍을 적에 ‘내 노래’가 어떤 가락이거나 숨결인가를 헤아리면 됩니다. 사진책을 손에 쥔 우리는 사진을 읽을 적에 ‘내 이웃이 부르는 노래’에 어떤 이야기와 꿈이 서려서 사랑으로 피어나는가 하는 대목을 살피면 됩니다.


  아이도 꽃답고 어른도 꽃답습니다. 젊은 사람도 꽃답고 늙은 사람도 꽃답습니다. 스무 살 먹은 나무도 꽃을 피우고, 이백 살이나 이천 살을 먹은 나무도 꽃을 피웁니다. 작은 들풀도 꽃을 피우고, 무리지은 들풀도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꽃은 흙이 있어야 필 수 있습니다. 흙이 있는 곳에서 씨앗이 싹을 트고 뿌리를 내립니다. 흙이 있는 곳에서 씨앗이 싹을 트고 뿌리를 내리니,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아서 꽃이 피면서 열매를 맺어요. 다시 말하자면, 흙이 있어야 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는 밥이 나오지 않습니다. 꽃을 볼 줄 알아야 밥을 헤아릴 수 있고, 꽃을 가꿀 줄 알아야 밥을 지을 줄 알며, 꽃을 아낄 줄 알아야 밥을 함께 먹는 이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곱고, 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리땁습니다. 우리 마음밭에서 피어나는 꽃이 반갑고, 깊은 숲에서 피어나는 꽃이 고맙습니다. 봄에도 가을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꽃은 언제나 피고 집니다. 한국에서 겨울이 되어 꽃이 지면, 지구 맞은편에서는 여름이 되어 꽃이 핍니다. 이 땅에서 피어나는 꽃이 고운 꽃내음을 싣고 지구 맞은편으로 퍼지고, 지구 맞은편에서 피어나는 꽃이 고운 꽃냄새를 퍼뜨려 이 땅에 베풀어 줍니다. 우리는 사진 한 장으로 ‘사진꽃’을 피워서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4348.8.1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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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반역이다 - 물리학의 거장, 프리먼 다이슨이 제시하는 과학의 길
프리먼 다이슨 지음, 김학영 옮김 / 반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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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깊은 생각 없이 지원금만 받는다면

― 과학은 반역이다

 프리먼 다이슨 글

 김학영 옮김

 반니 펴냄, 2015.7.30. 19000원



  논둑길에서 커다란 물이끼덩이를 밟는 바람에 미끄러져서 그만 자전거가 엎어졌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달리던 아이들은 안 다쳤으나, 저는 크게 다쳤습니다. 나흘이 되도록 물도 밥도 몸에 넣지 못하면서 끙끙 앓기만 하는데, 이때 다친 오른무릎은 살짝 대기만 해도 몹시 아픕니다.


  오른무릎이 크게 다쳤으니 서거나 걷지 못합니다. 무릎에서 힘을 받지 못하기에 피가 쏠리기만 할 뿐 꼼짝을 못 합니다. 무릎을 못 쓰는 다리는 아무 힘을 줄 수 없이 달린 살덩이와 같습니다. 이를 새삼스레 느끼면서 오른무릎이 나아지도록 기운을 모으고 차근차근 다스립니다.


  드러눕기만 하지 말고 씩씩하게 일어서자고 다짐하면서 오른다리에 힘을 넣어 펴고 접기를 해 보는데, 몸이 안 아픈 사람한테는 아무렇지 않을 일이 몸이 아픈 사람한테는 더없이 큰 일입니다.


  이럴 때에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목발을 생각할까요, 아니면 바퀴를 붙여 끌고 다니는 걸상을 생각할까요. 자리에 드러누운 채로도 머릿속에 그리는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컴퓨터나 기계 장치를 생각할까요, 아니면 손가락을 놀리기만 해도 무엇이든 심부름을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생각할까요.



젊은 영혼들을 구속하는 모든 문화의 압제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동맹, 그것이 과학이다 … 아인슈타인도 나이가 들면서 장방정식의 형식적 특성에 점점 집착했다. 그럴수록 장방정식을 있게 해 준 광범위한 우주의 개념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갔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물리학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방정식을 찾는 일에만 매달려 무익하게 보냈다. (23, 30쪽)


과학이 최근 수십 년 간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게 된 까닭은 두 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인간의 현실적 요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현상이 한 이유요,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점점 더 즉각적인 이윤에 집착하고 있는 현상이 또 한 가지 이유다. (49쪽)



  프리먼 다이슨 님이 쓴 《과학은 반역이다》(반니,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프리먼 다이슨 님은 무척 오랫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교수로 지냈다고 하는데, 1947년에 리처드 파인만 님과 함께 ‘원자와 방사선 행동을 계산하는 간편한 방정식’을 개발했다고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민간 과학자로서 영국 공군에서 일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나이가 무척 많은 분입니다. ‘슈뢰딩거-다이슨 방정식’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니, 과학밭에서는 돋보이는 발자국을 남겼다고 할 만합니다.


  《과학은 반역이다》는 “the scientist as rebel”라는 이름으로 2006년에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영어로 나온 책에서는 ‘과학자·반역자’라고 나왔으나, 한국말로 옮긴 책에서는 ‘과학·반역’으로만 줄여서 나옵니다.


  아무튼, 한자말 ‘반역’은 “1. 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2. 통치자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 함”을 뜻합니다. ‘배반’이라는 한자말은 “저버림”이나 “돌아섬”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정부나 정치권력 뜻하고 어긋나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반역자’라고 할 만합니다. 중앙정부에서 핵발전소를 자꾸 지으면서 엄청난 송전탑을 박으려고 하는 정책을 반대하면서 싸우는 사람도 ‘반역자’입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 수렁에 집어넣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반역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화와 문명이 도시로 쏠리는 오늘날 흐름에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조용히 살림을 짓는 사람도 ‘반역자’예요.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의 대중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극도의 공포라고 전쟁을 회상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독일 시민들의 기억은 달랐다. 국내의 배신자들에게 허를 찔리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의 시험대였다. (99쪽)


군인 프로 정신의 본보기를 독일에서 찾은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국들 중에서 독일만큼 도덕적 딜레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요들과 발크는 모두 나쁜 대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전문적인 능력을 정복과 파괴에 썼다 … 그들은 이웃집을 탱크로 부수고 불태우면서도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했다. (119쪽)



  《과학은 반역이다》라는 책에서는 과학 지식이나 이론은 거의 안 다룹니다. 아무래도 과학 지식이나 이론은 ‘과학 논문’으로 쓸 만할 뿐이요, 여느 사람들한테는 ‘과학이 무엇’이고 ‘과학으로 무슨 일을 하’며 ‘과학자인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야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운가’ 같은 대목을 차근차근 들려줄 수 있어야 할 테지요.


  아흔 살을 훌쩍 넘기고도 바지런히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는 프리먼 다이슨 님은 과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전쟁을 퍽 자주 곁들여서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전쟁은 ‘첨단과학’이 이룬 ‘첨단무기’로 사람들을 더욱 손쉽게 더욱 많이 죽이는 짓에 이바지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수소폭탄이나 핵폭탄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전차나 미사일이나 기관총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기에 생화학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과학이기에 비행기에 폭탄을 더 많이 실어서 도시도 숲도 집도 깡그리 불태우는 짓에 이바지합니다.



진정성 없는 평화주의자들은 겁쟁이나 공범자 취급을 받았다. 유럽 평화주의의 참패는 적어도 한 가지 교훈은 남겼다. 간디처럼, 진정성과 용기를 겸비하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평화주의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58쪽)


주류와 멀리 떨어진 생물학의 드넓은 배후지에는 다윈의 전통을 따르면서 새로운 종의 들풀을 발견하거나 말 그대로 나비를 수집하는 아마추어들이 드넓게 포진해 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나비 수집가라면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꼽지만,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 뿐 새로운 종들을 발견한 아마추어 수집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226쪽)



  과학은 왜 전쟁무기가 첨단무기가 되는 길에 이토록 이바지했을까요? 과학자는 첨단무기가 이 지구별에 평화 아닌 전쟁만 일으키는 줄 몰랐을까요? 과학자는 과학 연구와 탐구만 하느라 ‘마음을 옳고 바르며 슬기롭게 갈고닦는 배움’은 아예 등을 돌렸을까요?


  전쟁무기를 첨단무기로 만드는 데에 쏟아부은 돈은 이루 헤아릴 수 없도록 엄청납니다. 그 돈을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이 감돌도록 하는 데에 쓴다면, 이 지구별에는 아프거나 슬퍼할 일이 없습니다. 전쟁무기에 이바지하는 과학이 아니라, 무한재생이 가능한 깨끗한 에너지를 살피는 과학이라든지, 석유나 가스나 석탄이 아닌 햇볕과 물과 바람을 살려서 얻는 깨끗한 에너지를 북돋우는 과학이라든지, 매연과 공해를 말끔히 걸러내는 길을 여는 과학이라든지, 석유에서 뽑아내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아니라 쉽게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깨끗한 소비재가 되도록 헤아리는 과학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과학자가 걷는 길이 ‘돈이 되는 길’을 찾는 과학 연구나 탐구가 아니기를, 과학자가 하는 연구나 탐구가 정부나 기업 지원금을 더 타내는 쪽으로 쏠리지 않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파인만이 특히 우려했던 부분은 매뉴얼에 의존한 교사들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학생들의 점수를 깎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수년 후 (파인만 딸) 미셸이 고등학생 때, 대수학 문제의 정답을 구했지만 기존의 풀이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였다. 파인만이 항의하러 학교를 찾아갔을 때, 교사는 오히려 그를 보고 수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미셸은 집에서 아버지에게 대수학을 배웠고 시험 때만 학교에 갔다. (333쪽)


러더퍼드는 원자핵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러더퍼드에게 연구의 원동력은 원자핵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이었다. (300쪽)



  리처드 파인만 님과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일하기도 한 프리먼 다이슨 님은 재미있는 ‘숨은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노벨상까지 받은 물리학자가 ‘수학을 모른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노릇입니다. 수학 교사인 분은 ‘교과서 수학’은 다른 누구보다 ‘수학 교사 스스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을까요? 교과서에서 내놓는 풀이법을 똑같이 따르지 않는다면 ‘점수가 깎여도 될’까요?


  수학이나 과학은 ‘정답찾기 놀이’가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뿐 아니라 문학이나 철학도 정답찾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학문에도 정답이란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 다 다르면서 새롭고 다 같이 즐겁게 누릴 삶을 생각하는 길찾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반역”이라고 하든 “과학자는 반역자”라고 하든, ‘반역·반역자’는 틀에 박힌 길을 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틀로 지은 대로 똑같이 따라하기를 거스르면서 늘 새로운 길을 찾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무엇이 나올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저 길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찾는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선입관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갇힌 채 쳇바퀴를 돌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홀가분하면서 사랑스레 피어나는 꽃이 되고자 합니다.



푸앵카레와 아인슈타인이 당대의 기술을 똑같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철학적 사유에 대한 두 사람의 애정도 같았다고 본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는 태도였다. (258쪽)


자연 상태의 숲에서 새들의 사체더미를 볼 수 없는 까닭은 자연의 청소부 덕이다. 인간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채굴과 청소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353쪽)



  숲에는 청소부가 있습니다. 숲 청소부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습니다. 숲 청소부는 온갖 주검이 정갈한 흙으로 돌아가도록 해 줍니다. 숲 청소부가 있기에 숲은 언제나 맑고 푸릅니다. 바다에도 바다 청소부가 있어서 바다가 언제나 맑고 새파랗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수기나 공기청정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어컨은 무엇을 할까요? 끝없는 소비문명은 어디로 가려고 할까요? 공사비도 어마어마하지만, 문을 닫을 적에도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야 하는 핵발전소에 왜 이렇게 과학기술이 많이 들어가야 하고, 정부 지원금을 받아서 ‘안전한 원자력’을 홍보하는 과학 전문가는 왜 이렇게 많을까요?


  옳지 않다고 느낄 줄 아는 가슴과, 옳지 않다고 느끼는 길을 거스를 줄 아는 당찬 마음과, 옳지 않다고 느끼는 길을 거스를 줄 아는 당찬 마음으로 아름답게 새 길을 여는 슬기로운 과학자가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과학자뿐 아니라 모든 전문가들이 반역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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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풀꽃 속의 일제 잔재
이윤옥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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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식물향명집>을 자꾸 왜곡하면 안 된다

'참고'를 '토대'로 바꾼 번역은 잘못이다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는 책을 쓴 이윤옥 님은 <조선식물향명집>이라는 책이 '조선총독부 사전'과 '일본 식물학자 도감' 두 가지를 "토대로 삼아서 쓴 책"이라는 주장을 그분 책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제가 쓴 글에 반박글을 붙이면서 다시금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윤옥 님은 크게 잘못 생각하십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적힌 "여기 기재된 것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하는 대목은 이 말 그대로입니다. "여기 기재된 것이 중요한 것이다"와 같이 머리말을 썼다고 해서, 이러한 말이 "이 책을 토대로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윤옥 님 스스로 쓴 반박글에도 나오듯이, <조선식물향명집>을 쓴 한국 식물학자는 '조선총독부 사전'과 '일본 식물학자 도감'만 "참고로 삼지" 않았습니다. 향약채집월령, 향약본초, 동의보감, 산림경제, 제중신평, 방약합편고적 같은 책도 "참고로 삼았"을 뿐 아니라, '정태현'이라는 한국 식물학자가 함께 엮은 조선삼림수목요감이라는 책도 함께 "참고로 삼았"습니다.




이윤옥 님께 여쭙겠습니다. 이윤옥 님 스스로 반박글에서도 밝히셨듯이, <조선식물향명집> 머리말에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로 했다"고 적었습니다. 이는 이윤옥 님도 스스로 쓰신 반박글에 또렷이 나옵니다. 게다가, 이윤옥 님이 쓰신 반박글에도 "3년간 100여 차례 만나서 수집한 방언을 토대로 하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네, 이것뿐입니다. 한국 식물학자는 1930년대라고 하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한국 시골에서 쓰던 풀이름"을 샅샅이 모으려고 땀을 흘렸고, 이 시골말(방언)을 바탕(토대)으로 삼아서 <조선식물향명집>을 엮었습니다. 그리고 "전기문헌을 참고로" 했지요.


이윤옥 님 스스로 이러한 앞뒤 사정을 잘 알면서, 왜 '토대'와 '참고'를 무시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일제강점기 무렵 한국 식물학자는 한국 시골에서 쓰던 풀이름을 '토대'로 하면서 여러 책을 '참고로' 삼았는데, 왜 갑자기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는 책에서는 이 말을 바꾸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이윤옥 님이 쓰신 반박글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왜 이러한 주장을 자꾸 하셔야 할까요?


토대(土臺) : 어떤 사물이나 사업의 밑바탕이 되는 기초와 밑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참고(參考) : 살펴서 도움이 될 만한 재료로 삼음


일제강점기 한국 식물학자는 그야말로 힘들게 애써서 <조선식물향명집>을 엮었습니다. '국명'이 아닌 '향명'이라는 이름도 어렵게 붙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였기에 '國'이라는 말조차 못 쓰고 '鄕'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러니, 거의 독립운동을 하듯이 <조선식물향명집>을 엮은 한국 식물학자 땀방울을 깎아내리는 주장일 수밖에 없는 "조선총독부 사전과 일본 식물학자 도감 두 가지만 토대로 해서 조선식물향명집을 엮었다"고 주장하는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고 하는 책은 심각하게 한국 식물학자들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그무렵 조금 더 슬기롭게 한국 풀이름을 못 붙인 대목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있습니다. 이러한 풀이름은 오늘 우리가 슬기롭게 바로잡거나 가다듬으면 됩니다. 그러나, 한국(식민지에서는 조선) 식물학자는 피땀을 흘려서 '시골 풀이름'을 모았고, 이 시골 풀이름을 바탕(토대)으로 삼아서 멋진 책을 엮었습니다. 일본 학자나 총독부 입김이 아닌, 한국 식물학자 힘으로 엮었습니다.


이러한 대목을 자꾸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면서 <조선식물향명집>을 나쁘게 보려는 주장을 하신다면, 이는 한국 문화와 역사를 북돋우는 길에도 그리 도움이 되리라 못 느낍니다. 부디 조금 더 차분하게 <조선식물향명집>을 바라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풀이름을 '학문으로 붙이는 이름'으로뿐 아니라, 스스로 이 풀을 아름다운 나물과 고마운 풀숲을 이루는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이 되어 마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이윤옥 님은 책으로만 풀이름을 살펴보신 듯합니다. 풀이름을 책으로만 살피지 않고, 1930년대 한국 식물학자처럼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시골말(방언)’을 손수 모아 보셔요. 왜냐하면, “창씨개명되지 않은 우리 풀이름”은 먼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쓰던 풀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실린 풀이름이 ‘제대로 된 번역’인지 ‘엉뚱한 번역’인지 ‘고심한 흔적’인지 따지지 마시고, 손수 시골마을을 돌면서 풀이름을 모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윤옥 님은 ‘봄까지꽃’이나 ‘코딱지나물꽃’ 같은 이름을 들어 보셨는지요? 반박글을 읽어 보니, 아무래도 처음 들으신 듯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이런 이름을 흔히 씁니다. ‘쇠별꽃’을 두고도 식물도감에 나오는 이름보다 ‘콩버무리’ 같은 이름을 널리 씁니다. 부디 책에 너무 기대지 마십시오. 일제강점기에 <조선식물향명집>을 엮은 뜻있는 한국 식물학자는 저마다 시골마을을 골라서 찾아다닌 뒤 바지런히 풀이름을 그러모았습니다.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이 안 어울린다고 반박글에 쓰셨지요? 그러면 생각해 보셔요. 왜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이 퍼졌을까요? 이해인 수녀님은 왜 ‘봄까지꽃’을 ‘봄까치꽃’으로 잘못 적은 시를 쓰셨을까요?


까치가 놀러 나온 / 잔디밭 옆에서 // 가만히 나를 부르는 봄까치꽃 …… (이해인-봄까치꽃)


시골에서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을 쓰는 할매와 할배가 있기 때문에 이해인 수녀님은 이러한 풀이름을 들으셨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봄까지’를 ‘봄까치’로 잘못 듣거나 생각하셨으니 이렇게 시를 쓰셨으리라 느낍니다.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봄까치꽃’처럼 이 풀이름을 잘못 쓸 일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울릉도 호박엿”과 같은 꼴입니다.




울릉도에는 ‘호박엿’이 없었습니다. 요즈음은 “울릉도 호박엿”을 따로 곤다고도 하지만, 울릉도에서 ‘호박엿’을 곤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 남녘 바닷마을에서는 먼 옛날부터 ‘후박나무 껍질과 열매’를 얻어서 엿을 고았습니다. 뱃사람이 뱃멀미를 하지 않도록 ‘후박엿’을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섬과 바닷마을이 아닌 뭍(내륙)사람은 ‘후박나무’를 모르지요. 따뜻한 남녘 바닷마을에서만 자라는 나무인 후박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뭍사람이나 서울사람은 이를 ‘호박엿’으로 잘못 알아듣고는 이 잘못된 이름을 퍼뜨렸습니다. ‘봄까지꽃’이 ‘봄까치꽃’으로 잘못 퍼진 까닭도 이러한 얼거리하고 같습니다.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얼룩진 “창씨개명된 풀이름”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람 스스로 시골마을 풀과 나무를 제대로 몰라서 엉뚱하게 잘못 붙이는 풀이름”을 함께 살펴야 하지 않을는지요?


광대나물이 왜 광대나물인지 제대로 모르는 채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부처자리’로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윤옥 님입니다. 한국 식물학자가 멀쩡하게 잘 지은 풀이름을 왜 “창씨개명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시는지 아리송합니다. 한국 식물학자가 제 나름대로 잘 빚은 ‘광대나물’을 쓰거나, 시골마을에서 널리 쓰는 ‘코딱지나물’이라는 이름을 쓸 노릇이지요.


일본말에 얼룩진 자국을 지우는 일은 틀림없이 뜻이 있습니다만, <조선식물향명집>을 자꾸 깎아내리면서, 이 책에 나온 ‘참(사실)’을 비트는(왜곡) 일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식물학자를 깎아내리는 짓은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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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용 책
신해욱 지음 / 봄날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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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3



들꽃처럼 수수한 이야기가 바로 문학

― 일인용 책

 신해욱 글

 봄날의책 펴냄, 2015.2.23. 13500원



  어제 아침에 작은아이더러 물을 떠다 달라고 합니다. 작은아이는 그야말로 작은 물잔에 물을 찰랑찰랑 채워서 가지고 옵니다. 자전거가 논둑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무릎이 크게 다쳤고, 기지도 걷지도 못하다 보니 다섯 살 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오늘 아침에 큰아이한테 물을 떠다 달라고 합니다. 큰아이도 동생처럼 작은 물잔에 물을 가득 채워서 가지고 옵니다. 조금 더 큰 잔이면 좋으련만, 이만큼 마셔도 괜찮습니다.


  여러 날 끙끙 앓으며 물도 밥도 못 먹으며 드러누웠습니다. 밥도 못 짓고 빨래도 못 하고 청소도 못 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놀지도 못 하고, 말 한 마디를 입밖으로 내놓기에도 몸이 아프니 용을 써야 합니다.


  아픈 몸으로 하루 내내 드러누워서 생각에 잠깁니다. 안 아픈 모습을 꿈꾸고, 다 나아서 아이들하고 다시 뛰노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몸이 아파서 원고지 한 장을 쓰고는 삼십 분을 누워서 쉬고, 다시 원고지 한 장을 쓰고는 삼십 분을 누워서 쉬었다는 권정생 님은 어떤 마음이었을는지 돌아봅니다.



수능시험이 있었던 몇 주 전의 어느 날은 새벽까지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데면데면 마주칠 때는 어린 여학생인 줄 알았는데, 고3 수험생이었던가 보다. 시험을 얼마나 망쳤길래 세상이 무너지듯 몇 시간째 우는 걸까. (24쪽)


영화관에 간다는 건 단순히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을 함께 호흡할 때 진정한 영화적 체험이 완성된다는 것을 나는 광주극장에서 느낀다. (33쪽)



  “아버지, 아버지가 아플 때에는 왜 어머니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해?” 여덟 살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가 아프면 몸을 하나도 못 쓰니까 어머니가 도와주지.”


  아이들로서는 아픈 몸이 어떠한 몸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아이들로서는 아픈 몸이 어떠한 몸인지 굳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하게 뛰놀아야지요. 무엇이든 하면서 마음껏 놀아야지요.


  어떤 어버이라도 아이를 다치게 하려는 어버이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닥치면 어떤 어버이라도 아이를 감싸면서 제 몸을 던지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엊그제 자전거가 논둑길에서 미끄러질 적에 아이들이 조금도 안 다치기를 바라면서 내 몸을 던졌고, 내 몸을 던지면서 ‘내 몸도 다치지 말자’ 하고 생각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이들 생각만 했습니다.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소설을 펴 들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날 즈음, 옆에 앉은 여자도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92쪽)


적절한 비유라 생각하며 내 말에 스스로 취해 으쓱해진 나를 퍼뜩 깨워 준 건 뒤이은 질문이었다. “그런데요,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돌직구도 아름답지 않나요? 쉽지만 묵직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들이요.” (133쪽)



  시인 신해욱 님이 종이신문에 여러 해에 걸쳐서 짤막하게 썼던 글을 그러모은 산문책 《일인용 책》(봄날의책,2015)을 읽습니다. 신해욱 님이 쓴 책에는 시인으로서 바라본 사회, 집안 살림꾼으로서 바라본 삶, 여자로서 바라본 이웃, 여기에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 이야기가 흐릅니다.


  산문이란 그렇지요. 꾸며서 쓰는 글은 시도 산문도 아닙니다. 억지로 짓는 글은 문학도 글조차도 아닙니다. 살면서 저절로 녹아들어 흐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입니다. 이웃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삶을 글로 옮겨적기에 산문입니다.



사진의 피사체로서야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주름살은 얼굴의 골목인 것도 같고 삶의 미로인 것도 같고 시간의 형상인 것도 같다. (172쪽)


남자는 밖에서 무슨 재밌는 일을 겪었는지 활짝 웃으며 여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여자의 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랬다. 수화였다. 여자가 나를 향해 펼친 손가락을 잠시나마 오해한 게 무안했다. (195쪽)



  마당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갑니다. 아픈 무릎을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끙끙거리는데 나비 한 마리가 보입니다. 며칠째 집 바깥으로 한 걸음도 못 떼는데, 마당에서 노니는 나비가 한 마리 보입니다.

  부추꽃이 한창이고, 고들빼기꽃이 피려고 합니다. 모시꽃은 모시잎처럼 푸른 빛깔 꽃을 가득 피우고, 쇠무릎꽃도 쇠무릎잎처럼 푸른 빛깔로 길쭉하게 꽃을 내놓습니다.


  엊그제까지 이 모든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서지도 기지도 못하는 채 드러누워서 하루를 보내야 하니 이 모든 모습을 하나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예 생각조차 할 길이 없습니다. 마루문을 열고 몇 발짝만 내려가면 만나는 들꽃이지만, 이 들꽃이 이제 너무도 먼 나라입니다.


  아픈 삶을 붙잡아야 하는 이웃들도, 고단한 삶을 날마다 되풀이해야 하는 이웃들도, 힘들고 지친 삶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웃들도, 이녁 둘레에서 피고 지는 작은 들꽃을 쳐다볼 겨를이 없을 테지요.



놀랍다.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많은 여자들이 손수 옷 만드는 기술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다니. 물끄러미 내 손을 들여다본다. 직접 옷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손이다. 사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212∼213쪽)


‘남의 나라’에서 ‘자기 말’의 데시벨을 낮추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걸까 무례한 걸까.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고. (256쪽)



  신해욱 님 산문책에서 신해욱 님이 스스로 놀랍게 여기듯이,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이 나라 거의 모든 가시내는 옷을 손수 지었고, 이불도 손수 마련했습니다. 옷이나 이불을 돈 주고 사서 쓴다는 생각을 안 했지요.


  집은 어떠할까요?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참말 집도 누구나 손수 지었습니다. 밥도 손수 지어서 먹었지요. 냄비에 올리면 되는 밥이 아니라, 논밭을 일군 뒤 나무를 해서 불을 지피고는 솥을 써서 밥을 지었어요. 이 모든 삶이, 그러니까 ‘자급자족’을 하던 삶은 고작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돈을 모아서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옷집을 찾아가서 돈으로 옷을 사거, 맛집을 살피면서 맛난 밥을 사 먹습니다. 뜨개질을 익히거나 텃밭을 일구려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뜨개질이나 텃밭 일구기를 배우지 못합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매한가지입니다.



집에 돌아와 단원미술관이 어디에 있나 검색해 보았다. 안산이었다. 김홍도는 안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역시 몰랐던 사실이다. 안산의 단원이라. 그렇다면 세월호에 탑승했던 학생들이 다닌 단원고등학교의 ‘단원’도, 김홍도의 그 ‘단원’이란 말인가. (300쪽)



  《일인용 책》은 신해욱 님 한 사람 삶을 드러내 보이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한 사람 책”입니다. 한 사람 이야기가 흐르고, 한 사람 넋이 빛나며, 한 사람 숨결이 바람처럼 감겨듭니다.


  문학은 뭇사람한테 널리 읽히면서 사랑과 꿈을 퍼뜨립니다. 그런데 뭇사람한테 사랑과 꿈을 퍼뜨리는 모든 문학은 언제나 “작고 수수한 한 사람 삶”에서 비롯합니다. 대단하게 살았어야 쓰는 대단한 문학이 아니고, 훌륭하게 살았어야 쓰는 훌륭한 문학이 아닙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꽃처럼 수수한 들꽃 같은 이야기가 바로 뭇사람 가슴을 적실 수 있습니다. 4348.9.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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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9-0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출판사 이름까지 무척 마음에 듭니다. 봄날의 책 예뻐라. 예전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왔던 민중자서전(?)이 참좋았는데 이책도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숲노래 2015-09-04 15:13   좋아요 0 | URL
씩씩한 1인출판사예요.
책을 많이 펴내지는 않지만
알찬 책을 잘 골라서
앞으로도 멋진 출판사로 널리 이야기꽃을 나누어 주리라 생각해요 ^^
 
사진의 맛 - 느낌 있는 사진을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사진 강의
우종철 지음 / 이상미디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214



사진 한 장으로 노래하는 맛

― 사진의 맛

 우종철 글·사진

 이상미디어 펴냄, 2015.8.10. 25000원



  사진 한 장은 아무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됩니다. 사진 한 장은 그저 한 장일 뿐이지만, 두고두고 바라보면서 어느 한때를 되새기는 밑바탕이 됩니다.


  아이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놀다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데, 어느새 아이들이 내 뒤에 달라붙어서 “뭐야? 뭐야!” 하면서 쳐다봅니다. 두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저희가 예전에 어떤 모습으로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한테 안기며 놀았는지 되새깁니다. 아이들은 그저 노는 몸짓이었을 텐데, 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자리에서는 ‘아이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드러납니다.


  아이들은 사진찍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가 하면, 사진에 찍힌 모습을 들여다보면 ‘몸에 있는 눈’으로 볼 때하고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모습과 ‘다른 사람 눈으로 보는 모습’은 그야말로 달라요. 그러니, 아이들은 사진찍기가 재미난 사진놀이입니다.



대략 100년에서 150년 전에 나타난 이러한 경향(회화 모방)은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다수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찍고 답습하는 사진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16쪽)


쿠델카는 자신의 사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떠나고, 사랑하고, 웃고, 우는 세상의 모든 모습들은 결국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32쪽)



  우종철 님이 빚은 《사진의 맛》(이상미디어,2015)을 읽습니다. 《사진의 맛》은 사진길에 접어들려고 하는 이웃님한테 베푸는 선물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직 사진을 모르지만, 사진기를 손에 쥐고 신나게 사진놀이를 하고픈 이웃님이 사진을 노래하는 삶이 되도록 북돋우려고 하는 길잡이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이 책에 적힌 말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이키 톤·미들 톤·로우키 톤’ 같은 말을 그냥 씁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런 영어는 오늘날 영어라기보다 한국사람 누구나 흔히 쓰는 ‘여느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톤’이든 ‘콘트라스트’이든 그냥그냥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의 맛》이라고 하는 책이 사진길로 가려는 이웃님한테 ‘사진을 즐겁게 찍자’고 노래하는 길잡이책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쉬우면서 부드러운 말씨로 풀어낸다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어 아닌 한국말로도 얼마든지 사진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어른 아닌 어린이한테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가르칠 적에 어떤 말을 써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초보 사진가들에게 있어 사진 기술을 습득한다는 것은 바로 사진기가 가지고 있는 시각적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이용해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느낌에 가장 가깝게 표현하고자 애쓰는 행위일 것입니다. 이 과정도 간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과정이 지나면, ‘사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찍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찍는 것’이란 점을 이해하고 그러한 세계에 좀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45쪽)


대상을 보고 사진을 찍는 순간, 사진가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이게 하는 톤을 미리 결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76쪽)



  사진찍기는 사진을 찍는 일입니다. 사진찍기는 ‘사진기를 다루는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연필을 다루는 일’이나 ‘자판을 다루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진찍기를 할 적에는 ‘사진기를 알맞게 다루기’는 해야 하지만, 굳이 사진기를 남달리 다루기까지는 안 해도 됩니다. 북을 치는 이가 북채를 하늘로 던졌다가 받아서 북을 칠 수 있듯이, 글을 쓰는 이가 연필을 하늘로 던졌다가 받아서 글을 쓸 수 있어요. 다만, 이런 재주는 잔재주라고 합니다. 잔재주는 잔재주로 다른 사람 눈길을 끌 터이나, 이러한 잔재주는 사진이나 글이 나아가는 밑바탕이나 기쁨은 아니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사진을 배우려고 한다면 사진을 배우면 됩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면 사진을 찍으면 돼요.


  ‘잘 찍은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남한테 자랑할 만한 ‘멋진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스스로 즐겁게 사진을 찍으면서 놀 수 있으면 되어요.



주 피사체에 항상 초점이 맞아야 한다는 정해진 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03쪽)


순수하게 사물을 보는 연습의 전 단계로 우선 사진을 찍기 위해 대상을 찾거나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뭔가 동요하는 자신의 느낌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136쪽)



  《사진의 맛》이라는 책에서도 다루는데, 틀에 박힌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주 피사체’이든 ‘찍히는 어떤 것’이든 꼭 초점이 맞아야 하지 않습니다. 황금률 구도를 맞추어야 할 까닭이 없고, 뛰어난 구도를 살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는 사진을 찍는 일일 뿐, 멋지거나 빈틈이 없는 구도를 찾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흔들려도 괜찮고, 많이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빛을 예쁘게 맞추지 않아도 괜찮으며, 어둡거나 밝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흐른다면 다 괜찮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하고 사진을 읽는 너하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웃음꽃을 피울 만한 이야기가 흐른다면 모두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랑 사진을 읽는 너랑 어깨동무를 하면서 슬픔이나 아픔을 달랠 만한 이야기가 서린다면 더없이 사랑스러운 사진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사진으로, 그림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157쪽)


사진 찍기에 좋은 대상은 결국 내 주변 가까이에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180쪽)


사진의 출발은 잘 아는 것, 익숙한 것,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보고 찍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187쪽)




  사진을 찍는 맛이란, 삶을 짓는 맛입니다. 사진을 찍는 맛이란, 이야기를 빚는 맛입니다. 사진을 찍는 맛이란, 사랑을 노래하는 맛입니다. 사진을 찍는 맛이란, 꿈을 꾸는 맛입니다.


  이리하여, 사진기 한 대를 손에 쥐면서 무엇이든 사진 한 장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못 찍을 사진이란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사진이 되고, 어떤 삶이든 사진이 됩니다. 부자인 삶도 가난한 삶도 모두 사진이 되어요. 이름난 예술가도 이름이 안 난 시골 할매도 모두 사진이 되지요. 갓난쟁이도 어린이도 어른도 사진이 됩니다. 몽골이나 티벳도 사진이 되고, 일본이나 중국도 사진이 되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진에는 ‘흔한 소재’나 ‘아무것 아닌 주제’가 없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찍는 이야깃감이어도 재미난 사진이면서 놀라운 사진이 됩니다. 아무도 안 찍는다고 하는 소재나 주제도 얼마든지 사랑스러우면서 멋진 사진이 되지요.



흔히 사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상상력 없이 육체적 시각에 의존해 사진을 찍는 것은 매우 초보적이고 제한적인 사진 행위입니다. (249쪽)


어떤 경우 작품을 보고 작가의 지인들이 “너답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합니다. ‘나답다.’라는 것은 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솔직했다는 반증입니다. (327쪽)



  나는 사진 한 장으로 노래합니다. 두 장도 백 장도 아닌 사진 한 장으로 노래합니다. 공모전에 뽑힌다거나 어떤 상을 받은 사진이 아닙니다만, 우리 아이들이 바람 따라 물결치는 논둑에 서서 바람노래와 풀노래를 한껏 마시는 모습을 찍은 한 장으로 삶을 노래합니다.


  오늘을 노래하기에 오늘 이곳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오늘을 노래하기에 ‘오늘 찍은 사진’은 어느덧 ‘어제 찍은 사진’이 되면서 우리 삶을 새삼스레 되짚는 이야기밭이 됩니다. 오늘을 노래하기에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날’에도 기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은 어제로 흐르고, 오늘은 다시 앞날로 흐르며, 오늘과 어제와 앞날은 사이좋게 만납니다. 사진 한 장이 있어서 언제나 젊으면서 기쁩니다. 사진 한 장이 있어서 언제나 춤추면서 꿈꿉니다.


  사진은 어떤 맛일까요? 사진은 내가 바라는 맛입니다. 슬픈 날에는 슬픈 맛이 나는 사진이고, 기쁜 날에는 기쁜 맛이 나는 사진이에요. 맑은 날에는 맑은 맛이 나는 사진이다가, 흐린 날에는 흐린 맛이 나는 사진이지요.


  늘 달라지면서 늘 새롭게 거듭나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 하나를 마주하면서 고요히 생각에 젖습니다. 참으로 사진 한 장이 고맙습니다. 《사진의 맛》을 읽는 ‘사진이웃님’ 누구나 마음에 담을 이야기꽃을 곱게 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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