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 18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52



너는 왜 ‘무엇’이 되려고 하니?

― 강철의 연금술사 18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8.4.25.



  아침에 대문 앞과 마당 둘레 풀을 낫으로 베는데, 오른무릎이 꽤 욱씬거립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만큼 아프지는 않습니다. 천천히 낫질을 하고, 어느 만큼 풀을 베고서 큰아이를 불러 밥그릇 하나 가져 달라고 합니다. 잘 익은 까마중을 밥그릇에 훑습니다. 까마중풀을 남기고 웬만한 풀은 모두 벱니다. 이렇게 베어 주어도 풀은 잘 자랍니다. 그동안 이곳에 드리운 풀씨가 아주 많을 테니 곧 새로운 풀이 돋을 테지요. 까마중풀을 남기고 풀을 베니 아이들한테 까마중 열매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제 두 아이는 이십 분 남짓 까마중을 둘러싸고 새까만 열매를 훑느라 바쁩니다.



“너, 킴블리를 너무 믿지 마.” “어? 왜? 신사답고 좋은 사람이던데? 우리 아빠 엄마한테도 호의적이었고.” “신사답다니, 저 녀석이 이슈발에서 무슨 짓을…….” (12쪽)


“이해하고 떠받쳐 주는 사람이란 결국 함께 싸웠던 전우들 중에서 나오는 거구나.” (29쪽)



  아라카와 히로무 님 만화책 《강철의 연금술사》(학산문화사,2008) 열여덟째 권을 읽습니다. 권마다 새로운 삶과 시람이 나오고, 새롭게 부딪히는 일과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도 어른도 꾸준하게 자라고, 한결 튼튼하거나 씩씩한 마음이 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만 자라지 않습니다. 어른도 자랍니다. 왜 어른도 자라는가 하면, 어른도 아이와 똑같이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때문에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른도 더욱 날렵하고 다부진 몸짓이 되고, 아이도 더욱 기운차며 단단한 몸놀림이 됩니다.



“무의미한 협박은 삼가 주시요? 지금 여기서 나를 죽여 봤자 그쪽에는 아무 이점도 없을 텐데요?” “잘 알고 있군요. 이 일을 입밖에 내면 어떻게 될지 알죠? 당신 동료나 머스탱 대령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그림자로부터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53쪽)


“설마 사람을 죽일 각오도 없이 군의 개가 된 것은 아니겠죠?” “죽이지 않을 각오로 들어왔어!” (58쪽)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사람 아닌 ‘무엇’을 꿈꿀 때에 삶이 즐거울까요?


  죽지 않는 삶을 꿈꿀 만할까요? 나 혼자 안 죽고 다른 사람은 모두 죽어도 되는 삶을 꿈꿀 만할까요? 너와 내가 모두 아름답게 삶을 짓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미움도 슬픔도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누구하고든 넉넉히 어깨동무하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앙갚음이나 되갚음이 아니라 사랑을 가슴속에서 끌어내어 따사로이 손을 맞잡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윈리, 미안해. 우리 사정 때문에 돌아가신 아저씨, 아주머니를 이용하게 돼서.” “괜찮아. 지금은 살아 있는 너희들이 더 중요해.” (71쪽)


“착각하지 말아요. 옳지 않은 일을 용서하는 건 아니니까.” (126쪽)



  참다운 사랑일 때에 사랑입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려면 참다운 숨결이 흘러야 합니다. 참다운 삶일 때에 삶입니다. 삶을 삶이라고 하려면 참다운 넋으로 흘러야 합니다. 참다운 사람일 때에 사람입니다. 겉모습만 사람이 아니라 속마음으로 오롯이 너그럽고 따사로운 마음일 때에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모험과 전투 장면을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책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전쟁과 평화가 엇갈리는 사회를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책에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슬기롭게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하고 땀방울을 이 만화책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올려다보면 파란색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흑백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렇게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144쪽)


“그러고 보니, 현자의 돌에 대해 더 이상 나에게 안 물어 보던데, 그래도 되니?” “그건,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171쪽)



  사람으로 태어난 아이는 사람으로 자랄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람인 아기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를 사람으로 돌보며 키울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살인기계와 같은 군인으로 키워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살인기계하고 비슷한 입시지옥 병정으로 길들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는 아이다운 삶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이는 초등학생 때에만 또래동무를 사귄 뒤, 중학생 때부터는 온통 입시경쟁자한테 둘러싸인 입시지옥에서 허덕여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또래동무’라는 허울을 붙인 채 아이들이 서로서로 미워하거나 시샘하면서 다투기만 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을 모질게 괴롭히니까요. ‘현자의 돌’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 목숨을 빼앗아 제 배를 채우려고 하는 짓이랑, 입시지옥에서 ‘우리 아이만 서울권 일류대에 뽑히도록 닦달하는 짓’은 그저 똑같을 뿐입니다. 함께 사는 길을 생각하고 찾을 때에 비로소 함께 사는 길이 열립니다. 함께 사는 길을 생각하지 않고 찾지 않는다면, 함께 사는 길은 앞으로 조금도 열리지 않습니다. 4348.9.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와일드 보이 그림책 보물창고 9
모디캐이 저스타인 지음,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0



사랑받으며 놀고 싶은 ‘숲아이’

― 와일드 보이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펴냄, 2005.8.10. 9000원



  조금 높은 곳이 있으면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펄쩍 뛰어내리려 합니다. 조금 너른 곳이 있으면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싱싱 달리려 합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타고 뛰어내립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가르면서 달립니다. 뛰거나 달리는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립니다. 땀이 흐르면 바람이 말려 주고, 까르르 웃거나 노래하는 소리는 바람결에 실려 멀리멀리 퍼집니다.



아이는 바람을 좋아했습니다. 아이는 눈을 좋아했습니다. 아이는 보름달을 좋아했습니다. (9∼10쪽)




  모디캐이 저스타인 님이 빚은 그림책 《와일드 보이》(보물창고,2005)를 읽습니다. 영어 ‘와일드(wild)’는 ‘들에서 사는’이나 ‘숲에서 사는’을 가리키기도 하고 ‘길들지 않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들이나 숲에서 사는 숨결 눈높이로 바라보자면 “들에서 사는 아이(들아이)”인 셈이고, “숲에서 사는 아이(숲아이)”입니다. 그리고 문명 사회나 도시 사회에서 바라보자면 “길들지 않은 아이”나 “사회를 모르는 아이”예요.



과학자들은 아이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아이는 마차에 실려 숲에서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파리로 갔습니다. 마차가 덜컥거리며 도시로 들어섰지만, 아이는 창 밖을 내다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 아이가 아는 것은 오직 숲뿐이었고, 도시엔 숲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쪽)



  도시에서 문명을 세워서 문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들아이’나 ‘숲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도시에 있는 어른들은 ‘들아이’나 ‘숲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아요.


  왜 그러할까요? 도시에 있는 과학자나 학자나 전문가나 교육자는 ‘들아이’나 ‘숲아이’가 ‘저희(도시사람)가 쓰는 말’을 모른다고 여깁니다. 거꾸로 바라볼 줄은 몰라요. 도시에 있는 과학자나 학자나 전문가나 교육자들이 ‘들아이가 쓰는 말’이나 ‘숲아이가 아는 말’을 하나도 모르는 줄 생각하지 못해요.


  숲에서 마음껏 잘 살던 아이를 사로잡은 사냥꾼과 과학자는 숲아이를 숲으로 돌려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도시에 있는 사냥꾼은 돈을 받습니다. 도시에 있는 과학자는 숲아이를 ‘실험실 연구 대상’으로 삼습니다.


  숲아이는 아주 외롭고 힘들며 슬픕니다. 제 고향과 보금자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숲아이가 좋아하던 바람도 눈도 보름달도 냇물도 골짜기도 숲도 모두 빼앗겼거든요.




이타르 박사는, 그 누구도 품에 안아 주거나 노래를 들려준 적이 없고 함께 놀아 준 적도 없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25쪽)



  외로운 숲아이를 돌보려고 하는 과학자나 전문가나 교육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숲아이한테 ‘도시 문명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동안 숲아이를 마주한 여느 과학자나 전문가하고 좀 다르다면, ‘이타르 박사’라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았고, 따스한 손길로 품으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타르 박사도 숲아이한테 ‘이타르 박사가 아는 말과 문명’만 가르치려고 했어요. 이타르 박사는 ‘숲아이한테서 삶을 배울 뜻’이 없었어요. 숲아이가 보름달을 쳐다보는 까닭을 알려 하지 않고, 숲아이가 왜 알몸으로 눈밭을 뒹굴며 놀고 싶은가를 알아차리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함께 놀지 못하지요. 이타르 박사는 숲아이를 돌보아 주기는 했으되, 이녁도 ‘새로운 눈길로 숲아이를 바라본 뒤 보고서를 써서 학계에 내놓아 인정받을’ 뿐이었습니다.


  숲아이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숲아이는 ‘옷을 입을’ 줄 알고, 맨발이나 알몸으로 돌아다니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끝내 ‘도시 문명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고 해요. 무엇보다도 몇 해 살지 못하고 죽었다지요.


  숲아이는 숲에서 그대로 살았으면 몇 해 못 살고 죽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숲아이는 숲에서 제 나이만큼 즐겁게 살았으리라 느껴요. 옷 한 벌 없어도 추위를 모르고, 포크나 칼이 없어도 밥을 찾아서 먹을 줄 알며, 맨손과 맨몸으로 나무를 잘 타고 바위도 잘 타며 어디로든 마음껏 뛰거나 달릴 수 있던 숲아이였어요.




맑고 차가운 물을 좋아하는 빅토르(숲아이)는 창 밖 하늘과 나무를 쳐다보며 천천히 물을 마시곤 했습니다. 바람이 살랑이는 소리와, 눈송이가 흩날리는 풍경과, 구름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부신 햇살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37쪽)



  교육은 교육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길들이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삶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손길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어떤 전문지식을 아이가 외우도록 시키는 얼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똑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은 뒤 똑같은 도시 사회에서 똑같은 도시 문명인으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만 산다면, 모든 사람은 굶어야 해요.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만 산다면, 모든 사람은 겨울에 추위에 떨어야 해요.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노동자로만 지낸다면, 모든 사람은 옷도 못 입고 아무것도 못 하지요.


  삶을 짓는 길을 아이한테 가르칠 수 있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삶을 가꾸는 사랑을 아이와 함께 새롭게 배울 줄 아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돈을 벌면 돈으로 척척 무엇이든 사들여서 쓸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돈이 아니라 삶을 가꾸어서 삶을 누리는 하루입니다.


  그림책 《와일드 보이》는 ‘숲아이’를 보여줍니다. 숲아이를 사로잡아서 돈을 벌거나 실험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던 어른들을 보여줍니다. 숲아이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숲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사랑받아야 하는데, 어떤 사랑을 받아야 하는가를 《와일드 아이》를 빌어서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그저 따뜻한 품으로만 안는 사랑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제 삶을 가꾸고 일구며 돌볼 수 있도록 이끄는 너그러운 사랑일 때에 비로소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아이가 바람을 알고, 비와 눈을 알며, 하늘과 땅을 알고, 숲과 들을 넉넉히 품도록 이끄는 사랑일 때에 비로소 삶을 짓는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4348.9.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부로 사는 즐거움 - 농부 폴 베델에게 행복한 삶을 묻다
폴 베델.카트린 에콜 브와벵 지음, 김영신 옮김 / 갈라파고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책 읽기 82



아이를 ‘숲사람’으로 키우는 기쁨

― 농부로 사는 즐거움

 폴 베델 이야기

 카트린 에콜 브와벵 정리

 김영신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14.9.11. 13500원



  구월이 깊으면서 시골 들녘은 한결 밝은 노란 빛깔로 물듭니다. 나락이 익기 때문입니다. 가을볕은 여름볕처럼 뜨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락은 구월 햇볕을 받으면서 알차게 익습니다. 새벽이슬을 마시고, 들바람을 들이켜며, 따사로운 햇볕을 듬뿍 받으면서 고개를 더욱 깊이 숙입니다.


  이즈음 시골에서는 농약을 치느라 부산합니다. ‘조금 젊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면 손수 줄을 이어 농약을 치고, ‘많이 늙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면 농협 헬리콥터를 빌려서 농약을 칩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들판을 지나가면서 바라본다면 가을들이 더없이 예쁘면서 사랑스러워 보일 텐데, 마을에서 살며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짙은 농약내음 때문에 창문조차 열 수 없습니다.



해시계를 보는 사람들은 계절의 리듬에 맞춰 살아갑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쁜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환상입니다 … 옛날에 하루는 그냥 하루였습니다 … 바쁜 사람들 때문에 닭과 소들은 원하는 시간에 먹이를 먹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동물들은 자연의 리듬에 맞춰 일상을 살았습니다. (34쪽)


나는 밭에 일하러 갈 때 며칠간 바람의 방향을 살핀 후 갈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44쪽)




  프랑스 시골 농부 폴 베델 님이 입으로 들려준 이야기를 갈무리한 《농부로 사는 즐거움》(갈라파고스,2014)이라는 책은 참으로 ‘시골에서 흙 만지며 사는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폴 베델 님은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편지는 즐겁게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책에 싣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언제나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흙이랑 살아온 이야기를 이웃한테 들려주고, 흙을 사랑하면서 삶을 사랑한 이야기를 온누리 이웃한테 두루 들려주려고 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다가 시골에서 ‘새로운 흙’으로 돌아갈 마음인 폴 베델 님은 이녁이 발을 디딘 땅에 농약을 한 방울조차 안 씁니다. 왜냐하면, 맨손으로 만지는 흙이요, 맨발로 밟는 흙이기 때문입니다. 읍내나 도시에 내다 팔아서 목돈을 쥐려고 하는 시골일이 아니라 이녁 삶을 가꾸려고 짓는 들일이기 때문에 흙을 망가뜨리거나 풀하고 나무하고 벌레하고 새를 모두 죽이는 농약을 칠 까닭이 없기도 합니다.



파도의 흐름은 바다뿐만 아니라 땅에도 영향을 주거든요. 젖소에서 갓 짜낸 우유 한 잔을 마시면 파도의 흐름이 땅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47쪽)


열 살이 될 때까지는 남자 어른들보다 여자 어른들과 생활하는 시간이 더 많거나 하루를 온전히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우유 짜는 법, 갈퀴질하는 법, 나무다발 묶는 법, 김매는 법 등을 모두 여자 어른들에게서 배웠죠. 청소년이 되면서 선생님의 자리는 고모에서 삼촌으로 옮겨갔습니다. (51쪽)



  프랑스 시골지기 폴 베델 님은 손목시계를 안 찹니다. 해를 보면 때를 안다고 합니다. 프랑스 시골지기 폴 베델 님은 텔레비전을 안 본다고 합니다. 바람을 읽으면 날씨를 안다고 합니다.


  《농부로 사는 즐거움》을 천천히 읽다가 천천히 덮습니다. 해를 읽거나 바람을 읽는 시골지기 삶은 ‘프랑스 시골지기’한테서만 엿볼 수 있지 않아요. ‘한겨레 시골지기’도 먼 옛날부터 누구나 하늘을 읽고 땅을 읽으며, 해와 별과 비와 바람을 모두 읽었어요.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흙을 손바닥에 얹고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보면서 흙기운이 어느 만큼 되는가를 헤아렸어요.


  폴 베델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여자 어른’한테서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손일을 배웁니다. 그리고 ‘남자 어른’한테서도 여러 가지 집일과 손일을 배워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거나 배울까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칠까요? 학교에 보내는 일 말고, 우리 어른들이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교과서와 학습지와 참고서를 아이한테 안기거나 사 주는 일 말고,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베푸는 가르침이나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언덕의 이야기는 물건들 속에 담겨 있지요. (84쪽)


사람을 보호하듯, 나는 야채와 과일도 소중하게 보관합니다. 하지만 절대 과대포장을 해서 보관하지는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나쁜 바람과 습기를 피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95쪽)


나에게 농부라는 직업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내가 원할 때 잠을 자고 내가 원할 때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죽을 겁니다 … 자연은 새로운 생명에게 영양을 주고 보금자리를 제공합니다. 자연은 그렇게 순환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팔십 평생 지켜본 바, 자연은 반복되지만 그 모습은 똑같지 않습니다. (104, 290쪽)




  흙에 뿌리를 내려서 자란 풀과 나무를 베어서 마련하는 살림살이는 쓰레기가 안 됩니다. 풀과 나무로 빚은 살림살이는 오래되어 더 쓸 수 없을 적에는 땔감이 되어 활활 타오른 뒤 조용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공장에서 석유를 써서 뽑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은 쓰레기가 됩니다. 조금 망가지거나 깨지거나 부서지면 곧바로 쓰레기가 됩니다. 플라스틱으로 찍은 것은 오래되지 않아도 쓰레기가 되고, 오래되어도 쓰레기가 됩니다. 수많은 비닐봉지는 언제나 쓰레기이고, 공장 물건을 감싸는 포장재도 모두 쓰레기가 되어요. 이른바 도시 문화와 문명은 온통 쓰레기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땅을 아끼면서 돌본다면, 풀과 나무를 모두 아끼면서 돌보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흙을 가꾸면서 보듬는다면, 집과 마을이 아름다운 삶터가 되도록 가꾸면서 보듬기 마련입니다.


  시골 농사꾼도 밥을 먹고 도시 대통령도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시골 농사꾼만 흙을 일구고, 도시 대통령은 흙을 하나도 모릅니다. 의사와 기자와 국회의원과 시장과 대학교수도도 흙을 하나도 모릅니다. 초등학교 교사와 유치원 교사도 흙을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공장 노동자와 버스 기사와 백화점 일꾼까지 흙을 하나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밥을 먹어요.



꽃들을 없애버리면 생물학적으로 땅이 죽어버립니다. 그 증거로 요즘 농지에는 야생화가 피질 않지요 … 지렁이나 두더지 같은 동물들은 땅을 갈아 숨을 쉬게 합니다. 3년 묵은 내 두엄처럼 야생화의 풀들은 나쁜 풀들을 덮어 말라죽게 합니다. 만약 야생화와 풀들을 없애버리면 땅은 죽을 겁니다.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하겠지요. 마구 다룬 땅은 단단해지고, 너무 많이 이어짓기를 하거나 땅을 너무 깊게 파면 땅이 오그라들어 더 이상 물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119쪽)


간혹 반듯반듯한 현대적인 농경지를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살충제 냄새가 코끝을 찌릅니다. 흙을 집어 코끝에 갖다 대면 흙에서 악취가 나죠 … 우리는 우리 땅과 마을에서 쓰던 사투리를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 땅과 우리 삶이 단절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투리를 되찾는 것은 ‘금문교’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126, 308쪽)




  풀밭이 없으면 들꽃이 피지 않습니다. 들꽃이 피지 않으면 벌이나 벌레나 나비가 살지 못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셔요. 들꽃이 없는데 벌은 어디에서 꽃가루를 모아서 ‘꿀’을 빚을 수 있을까요? 설탕을 먹여서 빚는 꿀이면 될까요? 벌이 들꽃에서 모은 꽃가루가 아니라, 설탕으로 쟁여서 만드는 꿀이 되어도, 이러한 꿀을 꿀이라고 할 만할까요?


  감자와 고구마조차 비닐집에서 키워서 때도 철도 없이 아무 때나 먹어도 될는지요? 한겨울에 비닐집에서 석유로 난로를 때서 키우는 딸기를 아직 봄도 안 된 철에 먹어야 맛있을는지요?


  우리는 무슨 짓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먹는 셈일까요?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포도를 먹는가요, 아니면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를 먹는가요? 햇볕과 비와 바람과 흙이 베푸는 기운으로 자란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포도가 아니라, 비료랑 농약이랑 항생제로 자란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포도를 먹으면 우리 몸에 무슨 이바지를 할까요?


  빗물이 아닌 수돗물을 마시며 자라는 벼를 쌀로 깎아서 지어 먹는 밥이 우리 몸을 살찌울 수 있을까요? 빗물도 못 마시고 햇볕도 못 쬐며 바람 한 줄기조차 모르는 채 비닐집에서 아무 때나 척척 나오는 애호박이나 상추나 오이나 가지나 토마토를 먹는 몸은 얼마나 튼튼하거나 씩씩할 수 있을까요?



농촌 사람들은 밭에서 일하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 요즘 젊은 농부들은 여유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온갖 서류와 장려금에 얽매여 있습니다. (155, 303쪽)


장담하건대 땅은, 대지는 어린이들에 의해 꾸준히 보전될 것입니다. (165쪽)



  아이들은 맨발로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흙을 밟으며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풀밭에서 뒹굴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나무를 타며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쇠붙이와 플라스틱과 합성수지를 써서 만든 놀이터에 아이들을 내몰기만 합니다. 어른들은 골목을 아이들한테 빼앗고는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 놀이시설’에 아이들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빽빽 소리만 지리도록 시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연날리기는 할 줄 모르지만 학원을 다닐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팽이를 깎을 줄 모르지만 학교를 다닐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빗물을 혀로 받아서 마실 줄 모르지만 손전화를 다룰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풀벌레 노랫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모르지만 대중노래와 광고노래를 똑같이 따라할 줄 압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구름을 올려다볼 줄 모르지만 찻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를 가려낼 줄 압니다.



자동덧문을 산다고 해서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요? 편리함은 보장할 수 있겠지만 행복까지 보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182쪽)


풀도 꽃도 먹지 않는 가축이 싸는 똥과 오줌에서는 더 이상 자연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197쪽)


시골에 살면 알러지라는 것은 전혀 생기질 않아. 오히려 각종 면역력이 생기지. (206쪽)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쁠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삶이 즐거운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을 ‘학습지 인생’과 ‘학원 인생’으로 길들여서 ‘대입수험생 인생’으로 내모는 어른들은 아이를 낳아 돌보는 보람을 얼마나 누릴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내 집 장만’이 아니라 ‘마당하고 텃밭이 있는 우리 집 장만’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차 장만’이 아니라 ‘아이도 어른도 맨발로 마음껏 뛰고 달리면서 놀거나 일할 수 있는 숲 장만’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파트가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밭이 없으면 죽기 마련이고, 숲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논밭이 있더라도 숲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숲이 있어야 나무를 얻고, 나무를 얻어야 집을 짓고 땔감을 얻으며, 숲에서 나무가 자라야 비로소 한 해 내내 싱그러운 바람을 마실 수 있습니다.



공장이 들어선 곳은 앞으로 사람이 먹는 음식을 경작할 수 없는 땅이 될 것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 이 세상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땅에 관심을 가져 주세요.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방사능을 비롯한 각종 오염 없는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세요. (234, 236쪽)


가치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습니다. 장소가 그 가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은 닿을 수 없이 높고 푸르렀으며, 우리 아름다운 자연은 전쟁의 아픔도, 상처도 잊게 할 만큼 아주 아름다웠던 게지요. (255, 270쪽)



  아이는 ‘숲사람’으로 자라야 아름답습니다. 어른은 ‘숲사람’으로 슬기롭게 살림을 가꾸어야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는 어버이와 어른한테서 숲사람 슬기를 사랑으로 물려받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아이한테 숲사람다운 살림살이를 곱게 물려줄 수 있을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먼 옛날부터 어버이는 아이한테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물려주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아이는 어버이가 물려준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물려받으면서 한결 기름지고 푸르게 돌보았습니다.


  어버이와 아이가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물려주고 물려받던 수십만 해에 이르는 사람 역사에서는 전쟁이나 싸움은 끼어들지 않았어요. 권력자가 나타나고 정치기가 불거지며 문화와 전문가와 사회와 경제 따위가 생기면서 ‘숲을 이룬 집과 논밭’을 망가뜨리거나 흔드는 무리가 커졌고 전쟁과 싸움도 터집니다.


  프랑스 시골지기 폴 베델 님은 《농부로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면서 프랑스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꿈과 사랑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이 나라 시골지기는 이 나라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만할까요. 이 나라 지식인과 전문가는 이 나라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생각일까요. 이 나라 모든 어른과 어버이는 이 나라 어린이하고 젊은이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4348.9.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 있었니, 사진아
테일러 존스 지음, 최지현 옮김 / 혜화동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213



이 수수한 사진이 모두 사랑이었네

― 잘 있었니, 사진아

 테일러 존스 엮음

 최지현 옮김

 혜화동 펴냄, 2013.1.30. 13000원



  우리 집 작은아이는 큰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 으레 고개를 빼꼼 내밉니다. 이러면서 “왜 나는 안 찍어? 나도 찍어 줘요.” 하고 묻습니다. 이 작은아이는 이른새벽에 조용히 일어나서 노는데, 늦게 자고도 일찍 일어나서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며시 사진기를 들어 찰칵 한 번 찍으면 어느새 눈치를 채고는 방실방실 웃으며 “또 찍어요. 더 찍어요.” 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언제 저희를 사진으로 찍는지 압니다. 아버지가 빙글빙글 웃고 노래하는 때에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즐거울 적에 사진을 찍으니, 아이들로서도 ‘아하, 우리 아버지가 즐거운가 보네. 그러면 사진 얼마든지 찍어야지.’ 하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자동차에 태우고 끌기. 이제는 가는 곳마다 할아버지를 태우고 다닐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느낀 그 기쁨은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Sandy/23쪽)


우리를 돌봐 주던 할아버지가 계시던 때가 그리워요. 하지만 부디 걱정 마세요. 제가 여전히 여기서 할아버지의 꽃들에 물을 주고 있으니까요. (Marisa/36쪽)



  테일러 존스 님이 엮은 사진책 《잘 있었니, 사진아》(혜화동,2013)를 찬찬히 읽습니다. 테일러 존스 님은 어느 날 문득 알아챘다고 합니다.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제나 이녁 곁에서 이녁을 사랑하면서 살림을 꾸렸구나 하고 알아챘다고 해요. 그래서 옛날 사진을 한 장 꺼내어 ‘오늘 이곳’에서 맞대면서 ‘우와, 지난날에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해요. 이리하여, ‘겹쳐서 찍는 사진 이야기’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아빠 엄마,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어요. (Ronnie/43쪽)


40년 전, 갓 결혼한 부모님은 사랑이라는 재산을 일구기 위해 저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 아버지가 지은 이 집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으로 채워졌지. 그 행복한 시간들은 영원히 우리 거야. (Fermec, 87쪽)



  겹쳐서 찍는 사진이란, 말 그대로 겹쳐서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이곳은 액자처럼 바깥을 감싸는 틀입니다. 한복판에는 내가 예전에 찍힌 사진입니다. 또는 우리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예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찍은 때’는 달라도 ‘찍은 곳’이 같은 사진을 살며시 겹치는 셈입니다. 아스라하다 싶은 시간이 흘렀어도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흐르는 한 가지를 만나려고 하는 사진놀이인 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한결같이 흐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다만 한 가지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더 없어요. 서로 아끼고 돌보는 따사로운 마음인 사랑이 흐를 뿐입니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사랑이 흘러요. 사랑 아닌 다른 것이 흐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옆에 계실 때는 햇볕이 훨씬 더 환하게 비췄어요. 작별 인사는 할 수 없었지만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 천국으로 가실 때 할머니의 따사로운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보고 싶어요, 할머니. (Ivan, 122쪽)


23년 전엔 이렇게 꼭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 보기도 힘드네요. 언니랑 오빠가 보고 싶네요. (Danae, 150쪽)




  사진책 《잘 있었니, 사진아》는 참말 사진한테 절을 해요. 꾸벅 허리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면서 불러요. “잘 있었니? 나도 잘 있었어.” 마흔 해 묵은 사진이 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스무 해 지난 사진이 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한 번 찍고 파묻는 사진이 아니에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틈틈이 지난날을 돌이키면서 오늘을 되새기고 앞날을 그리려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이곳에 선 꿈을 찍고, 앞으로 이룰 꿈을 찍지요.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사랑을 찍고, 앞으로 이곳에서 가꿀 사랑을 찍습니다.



가끔은 자기 집 뒷마당에 앉아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들을 마냥 즐길 필요도 있다. 내 아이도 그렇게 살기를. (Amy, 201쪽)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흔 해 남짓 앞서 찍은 사진을 오늘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로 달리던 두 젊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한집을 이루기로 했을까요. 마흔 살이 넘은 ‘아이’는 ‘앳된’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 집 여덟 살 어린이와 다섯 살 어린이는 저희가 찍힌 두어 살 적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다고 여깁니다. 저희가 어릴 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를 사진에 비추어 새롭게 바라봅니다. 며칠 앞서 신나게 놀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오늘 바라보면서 며칠 앞서 그야말로 어떤 기쁨으로 신나게 놀았는가를 새록새록 아로새깁니다.


  노래가 흘러 사진이 됩니다. 노래가 빛나면서 사진이 됩니다. 노래가 어느덧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노래 한 마디가 사진 한 장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네 삶도 내 삶도 모두 노래입니다. 네 이야기도 내 이야기도 언제나 노래입니다. 그러니, 우리 어버이가 우리 모습을 수수하게 찍은 사진은 모두 노래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를 수수하게 찍은 사진도 한결같이 노래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4348.9.1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15-09-1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겹쳐찍은 사진을 보니 이런 방법도 있구나!눈이 번쩍 하다가 사진을 찍은 당사자를 생각하니 뭉클하네요
제친구중 하나는 어릴적 부모님과 나들이때 가족과 찍은 그장소를 기억하여 자신의 아들,딸이 어린 자신의 나이와 얼추 비슷하겠다 싶어 그장소를 찾아가 가족사진을 찍어 옛사진과 현재의 사진을 대조하여 블러그에 올렸던데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많은 시간들이 지났다는 것을 체감하며 카메라를 누를때의 심정은 어떠할까?
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뭉클뭉클하네요!!

숲노래 2015-09-13 08:14   좋아요 0 | URL
자리는 같고
시간은 다르나
서로 아끼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구나 하고 깨우쳐 주는
멋진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보슬비 2015-09-12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런 스타일의 사진을 본적 있었던것 같아요. 참 재미있는 스타일이구나..생각했는데, 이렇게 겹쳐찍기를 해서 가족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니 무척 궁금해지는 책이네요. 보관함에 담아두고 천천히 도서관에 있나 살펴봐야할것 같아요. ^^

숲노래 2015-09-13 08:13   좋아요 0 | URL
아마 도서관에 있으리라 생각해요.
애틋한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이 참으로 많아요.
아름다운 책입니다.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 - 오늘의 이란 시와 시인들
에스마일 셔루디 외 지음, 최인화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노래하는 시 104



두 다리로 처음 걷던 날을 떠올린다

―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

 이란 시인 일흔한 사람 (에스마일 셔루디)

 최인화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2015.8.25. 12000원



  오늘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가 보기 앞서 뒤꼍도 올라 봅니다. 환삼덩굴 하나가 유자나무 줄기를 감아서 오르는 모습이 보이지만, 아직 내 다리로는 유자나무한테까지 가서 환삼덩굴을 쳐 줄 엄두를 못 냅니다. 마당으로 내려설 뿐 아니라 뒤꼍을 오르고, 마을 어귀까지 걸을 수 있으니, 이만큼 걸을 수 있어도 고맙다고 느낍니다.


  지난 열흘 동안 거의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끙끙 앓았습니다. 오른무릎이 크게 다쳐서 오른무릎을 고치고 다스리느라 온 하루를 보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흐름은 지켜볼 수 있지만, 하늘에 구름이 얼마나 떴는가를 내다볼 수 없는 채 지냈습니다. 바람이 부는구나 하고 느끼지만, 맨몸으로 바람을 맞이할 수 없는 채 지냈어요. 열흘 만에 이 모두를 하고 보니 더없이 새롭습니다. 아기가 첫걸음을 뗀 듯이, 아이가 제 다리로 신나게 달릴 수 있듯이,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들도 모두 새롭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 보았습니다.



이 집에서 영원한 건 없다 / 사탄도 솔로몬 왕도 다 떠난다 / 지붕이든 천장이든 발코니든 / 금이 가고 부서지며 무너지니까 / 가난한 자의 집만 주저앉는 게 아니다 / 궁월 또한 마찬가지 (하빕 야그머이-영원한 건 없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젖 무는 법 알려 주셨다 // 밤이면 머리맡 / 뜬눈으로 날 잠재우시고 // 손잡고 한 발짝 두 발짝 / 걸음마 일러 주셨다 // 혀끝에 단어 한 마디, 한 마디 놓아 / 말 트이게 해 주셨고 (이라즈 미르저-어머니)



  이란 시인 일흔한 사람 노랫가락이 깃든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문학세계사,2015)를 읽었습니다. 오른무릎이 몹시 아프고 몸살이 돌 적에는 그저 땀만 뻘뻘 흘리면서 앓고, 아픔이 가신 뒤에 큰숨을 돌릴 만한 겨를이 나면 한동안 오른손을 오른무릎 둘레를 살며시 감싸고 나서 시집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이란에서는 시를 문학이 아닌 노래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저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요,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이며,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라고 해요. 이란말을 한국말로 옮긴 최인화 님은 ‘이란사람 삶노래·사랑노래’를 한국말로 옮기면서 이란말에 있는 남다른 가락을 살리지 못한 듯하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이란말로 옮길 적에도 이와 같아요. 먼먼 옛날부터 전라도 시골마을에서 이어온 들노래를 이란말로 어떻게 옮기겠어요? 경상도 바닷마을 뱃노래를 이란말로 어떻게 옮길까요? 비록 두 나라와 겨레가 달라서 결과 가락까지 옮기지 못한다고 하지만, 시라는 틀에 담은 이야기는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에 담은 삶과 노래와 꿈을 헤아립니다.



새장 속 앵무새가 건네는 신년 인사 / 현명한 자라면 단번에 안다 /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하단 것을 (파로히 아즈디-감옥에서 맞는 새해)


마음이 불탄 후에야 / 비로소 영혼을 울리는 말이 나온다 / 마음이 어떤지 궁금한가? / 말에 귀 기울여 보라 (네점 바퍼-사랑을 향하여)



  오른무릎이 웬만큼 나았으니 걸음을 뗄 만합니다. 집에서 방과 마루와 부엌 사이를 이럭저럭 걸어서 오갈 수 있다 싶으니 대문 밖으로 나와서 마을을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걷지는 못 합니다. 마을 어귀 빨래터 울타리에 앉아서 다리를 쉽니다. 큰아이는 아버지하고 함께 걸어 줍니다. 아버지가 빨래터 울타리에 앉아서 다리를 쉬는 동안, 큰아이는 배롱나무 밑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춤을 춥니다.


  아버지를 기다려 주는 여덟 살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아이를 처음 걸리려고 하던 일곱 해 앞서가 떠오릅니다. 높직한 계단도 씩씩하게 온몸을 써서 타고 내려오던 아이요, 누가 손을 잡아 주겠다면 싫다면서 뿌리치고 혼자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입니다. 집 바깥에서 처음으로 걷던 날도 어머니랑 아버지가 손을 잡지 말라며 뿌리쳤지만, 몇 걸음을 안 잡아 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씩씩하게 몇 걸음 걷도록 한 뒤 대견하다면서 품에 안았습니다. 이 예쁘고 튼튼한 다리에 조금씩 힘살을 붙여서 앞으로 더욱 멋지게 걷자고 속삭였습니다.


  이제 여덟 살 어린이는 마흔 살 넘은 아버지더러 “다 쉬었어? 이제 다시 걸어도 돼? 기운 내요, 아버지!” 하고 외쳐 줍니다.



강가 사람들은 물 소중한 줄 알아서 / 절대 물 흐리는 법이 없다 / 그러니 우리 또한 / 물 흐리지 말자 (소흐럽 세페흐리-물)


밤처럼 위대한 그대 / 달빛이 있든 없든 / 밤처럼 위대한 그대 (아흐마드 셤루-나는 나무, 그대는 비)



  이란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백 해에 이르는 시간이라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다’고 하는 시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천 개에 이르는 꽃송이라면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시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나무는 천 해뿐 아니라 오천 해나 만 해도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이 집을 짓는 나무로 삼는 나무는 ‘천 해쯤 산 나무’예요. 꽃송이를 천 번쯤 피우면서 삶을 누린 나무가 바로 집을 든든하게 버티면서 오래도록 아름다운 숨결을 이어 주는 바탕이 되어 줍니다.


  천 해를 묵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으면, 이 나무가 자라던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네, 다시 나무를 심어요. 그리고, 천 해 동안 이 나무가 잘 자라도록 건사합니다. 오늘 ‘천 해 묵은 나무’로 집을 지은 뒤, 앞으로 천 해 동안 이 집을 알뜰살뜰 건사하도록 모두 힘을 쏟고, 앞으로 새로운 천 해 동안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나면, 천 해 뒤에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뒷사람은 ‘새롭게 천 해 묵은 나무’를 베어서 ‘새롭게 천 해를 이을 집’을 짓고는, 다시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새로운 천 해가 흘러서 새로운 뒷사람이 기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을 가꿉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 / 어서 길을 나서야 한다 / 꽃과 나무에게 / 일일이 인사를 건네야 한다 / 세상 모든 샘물 가에 /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앉아 / 그 맑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 얼굴을 단장해야 한다 (알리 무사비 가르머루디-시간이 많지 않다)


어머니는 죽었으나 여전히 우리를 보살핀다 / 우리 생활 곳곳 어머니의 흔적이 꿈틀댄다 / 집 안 구석구석 어머니의 이야기가 묻어 있다 / 당신 추도식에서조차 일을 하느랴 여념이 없다 (샤흐리여르-어머니, 내 어머니)



  시 한 줄이라면 모름지기 ‘백 해를 사는 사람’이 이녁 온 삶을 바쳐서 얻은 슬기를 그러모아서 ‘천 해를 잇는 살림’에 걸쳐서 흐를 만한 시 한 줄이어야지 싶습니다. 천 해 동안 부를 만한 노래이기에 노래인 셈입니다. 천 해에 이르는 삶이 녹아든 노래요, 천 해에 이를 삶을 북돋울 노래예요.


  들일을 하며 부르던 들노래도, 숲에서 삶을 지으며 부르던 숲노래도, 마당에서 잔치도 벌이고 일도 하며 부르던 마당노래도, 집집마다 오순도순 아이를 돌보며 나누던 집노래도, 참말 모두 아름다운 사랑이 깃드는 노래입니다. 천 해뿐 아니라 만 해나 백만 해를 넉넉히 잇는 노래예요.



사랑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 매 순간 죽는다는 것, 참 어렵지 않을까? // 사랑 없는 삶은 웃음 잃은 입술이다 / 웃음 잃은 입술은 웃는 대신 울어야 한다 // 사랑 없는 삶은 끝없는 추락이다 / 사랑하지 않는 자에겐 사방이 지옥이다 (게이사르 아민푸르-수수께끼)


나 어렸을 적엔 / 물, 땅, 공기가 더 많았어 / 귀뚜라미는 / 밤마다 / 달빛의 음악에 맞춰 깊은 어두움 속에서 / 노래 부르곤 했지 (에스머일 호이-나 어렸을 적엔)



  이란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처럼 한국에서도 천 해를 흐를 만한 이야기를 담는 시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지난 천 해 동안 어떤 슬기를 그러모은 노래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새로 짓는 노래는 앞으로 천 해에 걸쳐 우리 뒷사람한테 어떤 슬기를 물려주려고 짓는 노래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인기가요가 되어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인기차트에 올라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앨범이 불티나게 팔려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방송에 자주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누구나 부르면서 웃을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를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에서 어깨동무하며 부를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없이, 계급이나 신분에 따라 푸대접하는 일이 없이, 성차별이나 지역차별이나 온갖 차별 따위는 하나도 없이, 말 그대로 사랑하는 삶을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인파 속에서 고아 하나가 물었다 / 저기 임금님 머리에 반짝이는 게 뭐예요? // 누군가 대답했다 : 저게 뭔지 우린들 어찌 알겠니 / 다만 값비싼 물건인 건 분명하구나 // 꼬부랑 노파가 가까이 가 보더니 말했다 / 이건 내 눈물이자 자네들이 흘린 핏방울이야 (파르빈 에테서미-고아의 눈물)


내 작은 나무야, 너는 봄을 사랑하여라 / 샘물의 친구가 되고 개울물의 고통도 나누어라 / 네 그림자는 길지 않으나 / 산 높이 걸린 태양의 당당함을 가져라 / 푸르고 생생한 이파리들은 너만의 낱말 / 그 낱말들로 세월 높이만큼 우뚝 선 시가 되어라 (바흐만 설레히-내 작은 나무)



  두 다리로 처음 걷던 날을 떠올립니다.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아장걸음을 떼던 날을 떠올립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 또렷이 알지 못합니다만, 내 몸은 이를 또렷이 알리라 느껴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두 다리로 처음 걷고, 처음 뛰며, 처음 달리던 날을 떠올립니다. 걷거나 뛰거나 달리다가 넘어져서 울던 날을, 넘어졌어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던 날을, 차근차근 떠올립니다. 여기에다가 내가 다리를 다쳐서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날마다 깊은 늪에 빠지듯이 끙끙 앓으면서 괴로웠던 아흐레를 떠올립니다. 다시 일어서서 새롭게 걸음을 옮긴 오늘을 떠올립니다.


  삶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삶이 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이 깨어나고, 사랑을 깨우면서 삶을 노래합니다. 처음 걸음을 떼던 기쁨처럼, 새롭게 걸음을 뗄 수 있어서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즐거움처럼, 스스로 짓고 스스로 씩씩하며 스스로 아름답게 나아갈 이 길에서 부를 노래를 마음으로 고요히 그립니다. 4348.9.1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