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짜 곰이야 알이알이 명작그림책 2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글.그림, 서애경 옮김 / 현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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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4



풍선을 타고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곰 한 마리

― 나 진짜 곰이야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글·그림

 서애경 옮김

 현북스 펴냄, 2011.3.18. 10500원



  아이들은 곰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이제 한국에는 아무리 깊은 두멧자락이라 하더라도 범이나 여우나 이리나 늑대나 곰은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멧돼지나 노루나 고라니가 더러 있지만, 너구리나 족제비나 오소리나 고슴도치를 곧잘 찾아볼 수 있지만, 이만 한 숲짐승조차 머잖아 자취를 감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와 골프장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공장도 자꾸 늘어나기만 하며, 대형 발전소와 송전탑도 자꾸 늘어나기만 하거든요. 조용한 시골이나 숲은 자꾸자꾸 자취를 감춥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은 거의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문명과 물질이 발돋움한 오늘날이 아닌 옛날이라면 아이들은 곰을 어떻게 마주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숲에서 나무를 하고, 숲에서 나무를 얻으며, 언제나 숲에 둘러싸여 살던 옛날이라면, 아이들은 범이나 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곰을 무척 귀엽게 여기기도 하는데, 숲에서 곰이나 범을 코앞에서 맞닥뜨리는 지난날에도 아이들은 곰을 귀여운 숲짐승으로 여겼을까 궁금합니다.



곰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와아, 이상한 굴이다.’ 곰은 풍선 바구니를 보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낮잠 자긴 참 좋겠는걸.’ 곰은 바구니로 기어 들어갔어요. (5쪽)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님이 빚은 그림책 《나 진짜 곰이야》(현북스,2011)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미국을 무대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미국에서 깊은 숲에서 조용히 지내던 곰 한 마리가 어느 날 낮잠 잘 만한 곳을 찾다가 ‘풍선 바구니’를 보았어요. 처음 보는 낯선 것이지만, 곰은 풍선 바구니가 아늑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은 모두 치우고 풍선 바구니에 들어가서 꿈나라로 갑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타고 온 풍선 바구니는 곰을 태우고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희 풍선 바구니가 사라졌는데 깊은 숲에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튼, 이제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 말고 곰을 걱정할 일입니다. 곰은 오랫동안 낮잠을 잤고, 풍선 바구니는 오랫동안 하늘을 가르다가 ‘뉴욕’이라는 하늘까지 닿았다고 해요. 그리고, 뉴욕 하늘에 풍선 바구니는 풍선이 터져서 땅으로 천천히 내려갔답니다.



풍선이 내려온 곳은 가장행렬이 펼쳐지는 어느 도시였습니다. 막 행진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구경꾼 하나가 외쳤어요. “와아! 재미있게 하네요. 풍선을 타고 사람이 내려왔어요. 저 사람 꾸민 것 좀 봐요! 참말 곰 같아요.” (8쪽)



  곰은 낯설디낯설 뿐 아니라 곰 아닌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떨어지니 몹시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곰을 곰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곰을 곰 아닌 ‘곰처럼 꾸민 사람’으로 여깁니다. 더더구나 가장행렬을 하며 잔치를 벌이는 데에 떨어졌거든요.


  곰은 얼결에 가장행렬에 휩쓸립니다. 방송국 사람이 곰을 낚아채어(?) 방송국으로 데려가서 인터뷰를 합니다. 곰은 이리저리 휩쓸리고 휘둘리면서 배가 고픕니다. 담뱃대가 먹을 것인 줄 알고 집었다가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은 ‘곰처럼 꾸민 사람’이 마치 ‘곰처럼 연기도 잘 하네!’ 하면서 웃고 재미있어 합니다.


  곰은 이리저리 내뺍니다. 그러나 도시 한복판에서 곰이 갈 곳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때에 ‘마음 착한 도시 이웃’이 ‘곰’이 아닌 ‘곰처럼 꾸민 사람’을 도와주려고 나섭니다. 모두들 텔레비전에서 ‘곰이 아닌 곰처럼 꾸민 사람’을 보았기에 기쁘게 도와주려고 해요.



“빵!” 출발 신호가 울리자 선수들이 뜁니다. 총소리에 놀란 곰은 오토바이에서 펄쩍 뛰어내려 달립니다. 곰은 마치 치타처럼 뛰어나가 선수들을 앞질렀어요. 결승선도 넘었지요. 그러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5쪽)




  미국 뉴욕 사람들이 곰이 참말 곰인 줄 알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곰처럼 꾸민 사람이 아닌 참말 곰인 줄 알았어도 오토바이에 태우고 택시에 태우고 소방차에 태우면서 ‘도와주려’고 했을까요?


  이제 곰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곰이지만 ‘곰처럼 꾸민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듭니다. 모두들 ‘곰처럼 꾸민 사람’이 궁금합니다. 게다가 ‘곰처럼 연기를 잘 한다’고 여기기에, ‘곰 연기’를 보고 싶어서 우루루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립니다.


  이때에 ‘풍선 여행객’이 다시 나타납니다. 풍선 여행객은 저희 풍선 바구니를 곰이 타고 간 줄 모릅니다. 그저 ‘곰’이 아니라 ‘곰처럼 꾸민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고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말했어요. “저기 봐! 아까 텔레비전에서 봤던 사람이야. 저 아래 몰린 사람들 때문에 무서운가 봐. 우리가 도와주어야겠어.” 풍선이 사다리 꼭대기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남자는 곰이 바구니에 올라타도록 도와주었어요. (24쪽)



  따스하고 착한 손길로 마음을 읽는 이웃이 반갑습니다. 미국 뉴욕 사람들은 비록 ‘곰처럼 꾸민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저마다 ‘곰’을 따스하게 마주했고, 착한 손길로 도우려 했습니다. 다만, 곰인 줄 몰랐을 뿐입니다.


  곰인 줄 알았으면 모두 놀라서 꽁무니를 뺐을 테지요. 그리고, 도시 사람들은 곰이 곰인 줄 몰랐기 때문에, 곰이 참말 무엇을 바라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말’만 하거나 들을 줄 알 뿐, ‘곰 말’은 하거나 들을 줄 몰라요. 곰이 아무리 ‘곰 말’로 도와주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어도, 사람들은 ‘사람 말’로만 생각하려 했습니다.


  곰은 한 번도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결에 다시 숲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곰은 언제나 곰이었으나 사람들은 곰을 처음부터 곰이 아닌 사람(연기자)으로만 여겼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곰을 볼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시 사회에서는 곰이나 범이나 온갖 숲짐승을 이웃처럼 곁에 두고 지내지 않으니까요. 여느 때에 본 적도 만난 적도 마주친 적도 없는 숲짐승이 도시 사람들한테 이웃이 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그림책 《나 진짜 곰이야》를 아이들하고 읽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어여쁜 빛깔이 눈부시게 흐르고, 재미난 이야기가 우스꽝스레 흐릅니다. 이 그림책은 멋진 빛깔잔치와 이야기잔치가 어우러지면서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넌지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지 싶어요.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읽으면서 곰을 곰으로서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대목을 짚거든요. 곰을 곰으로서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곰을 곰으로 맞아들이면서 도우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이녁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무튼, 곰을 곰으로 마주하든 ‘곰처럼 꾸민 사람’으로 마주하든, 우리가 스스로 따스하고 착한 손길로 마주한다면 아름답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 누구나 이웃을 바라보고, 이웃을 헤아리며, 이웃을 사랑하는 숨결로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2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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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1
오시마 슈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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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54



열네 살 푸름이는 왜 ‘버러지’가 되어야 했을까

― 악의 꽃 1

 오시미 수조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1.7.25. 4500원



  나는 내가 다닌 중학교라는 곳을 거의 떠올리지 않습니다. 1980년대가 저물면서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 한국 사회에서 중학교는 대단히 재미없는데다가 메말랐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닌 중학교만 참으로 재미없고 메말랐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닌 중학교는 제법 재미있었을 수 있고, 즐겁거나 아름다웠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다달이 치르는 시험에서 1점이 떨어질 때마다 몽둥이로 한 대씩 때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번 받은 점수에서 1점이라도 떨어지면 안 되었고, 98점에서 97점이 되든, 100점에서 99점이 되든 똑같이 몽둥이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보충수업은 모든 학생이 학교에 돈을 바치면서 들어야 했고, 자율학습은 조금도 자율이 아닌 채 밤 열 시까지 교실에 갇힌 채 꼼짝을 할 수 없는 고문하고 같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생각할 만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곳에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카무라, 꼴등! 0점이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너! 답란이 전부 빈칸이라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래서야 어디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 “시끄러워. 버러지 주제에.” “버, 감히 선생님에게 버러지라니, 너, 이 녀석!” (10∼11쪽)


“카스가는 늘 책을 읽고 있더라. 왜? 그것도 좀 이상한 책. 아무도 모르는 그런 거. 재미있어?” (38쪽)



  오시미 수조 님이 빚은 만화책 《악의 꽃》(학산문화사,2011) 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러 아이들은 저마다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고단한 하루를 보냅니다. 또는 저마다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새로운 하루를 보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 다니는 웬만한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학교에 보내니까 학교를 다닙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느덧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하고 말을 거의 안 섞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을 씁니다.


  무슨 재미일까요. 무엇에 재미를 붙여야 할까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줄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예비 사회인’으로서 뭔가를 배우는 셈일까요. 아이들은 숙제를 꼬박꼬박 하고 시험도 알뜰히 잘 치러야 할까요.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으면 모범생이고, 50점 안팎인 점수를 받으면 말썽꾸러기이며, 0점 언저리에 맴돌면 골칫거리인 셈일까요.



“망상만이라면 몰라도, 그걸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녀석은 위험하단 말이야. 범죄잖아, 완전히. 진짜 깬다니까.” (62쪽)


‘할 수 없어, 자수 따위. 보들레르, 악의 길은, 이렇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었구나. 하지만 자수하지 않으면, 나카무라가 떠들 테니, 훨씬 더 최악의 사태가! 아아아, 하하하하! 어째서 나만 이런 수난을, 하하하!’ (63쪽)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주인공 사내인 ‘카스가’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아무런 재미를 붙이지 못합니다. 카스가라는 아이는 보들레르 책을 늘 끼고 사는데, 보들레르 책뿐 아니라 ‘교과서 아닌 책’을 마을 헌책방에서 꾸준히 장만해서 ‘교과서보다 아끼면서 읽’습니다. 교과서나 진도나 시험에는 거의 마음을 안 쓰지만, 교과서 아닌 책에는 온통 마음을 쏟아서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카스가는 어느 날 어떤 일을 하나 벌입니다. 같은 반에 있는 예쁜 가시내 체육복을 몰래 훔치지요. 처음부터 체육복을 훔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문득 혼자 들어갔고, 교실 뒤쪽 바닥에 떨어진 체육복 주머니를 보았으며, 그 주머니가 카스가가 마음에 들어 하던 가시내 체육복인 줄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체육복을 만져 보기만 하려고 했으나, 카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도리 안쪽에 체육복을 집어넣고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제 넋을 차렸을 적에는 벌써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누가 이 모습을 보았을까요? 누가 카스가라는 아이 마음을 읽었을까요? 카스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까요? 카스가는 이제 이 일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카스가, 난 말이지, 훨씬 오래 전부터 근질근질 좀이 쑤셨어. 몸 속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이 세상 전부, 내 부글부글 속에서 버러지가 돼 버리면 좋겠어.” (104∼105쪽)



  카스가는 체육복을 돌려주려고 하지만 끝내 돌려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체육복을 훔치는 모습을 다른 아이가 보았습니다. 카스가가 교실에서 앉는 자리에서 바로 뒤에 앉는 나카무라라는 아이가 보았습니다. 나카무라는 학교에서 아무 재미를 못 붙이는 아이 가운데 하나인데, 카스가가 저지른 짓을 문득 본 뒤에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일어나는 것이 있었다고 해요. ‘너도 나도 다 같이 버러지가 되어’ 그야말로 실컷 썩어문드러지는 길로 굴러떨어지자고 카스가한테 말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나이라면 이제 열너덧 살입니다.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너도 나도 버러지’라고 하는 생각을 마음에 품어야 했을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같은 반 동무 체육복을 몰래 훔치면서 스스로 부들부들 떠는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보내야 했을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마음이 괴로운 동무를 더 괴롭게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도 더 괴로운 삶이 되려고 할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스스로 끌어들인 이 소용돌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다 벗겨버리겠어. 네가 쓰고 있는 거죽을 내가 몽땅 벗겨버릴 거야. 알았으면 어서 입어. 네가 훔친 사에키 체육복.” (198∼199쪽)



  나비가 되려면 허물을 수없이 벗는 애벌레를 거쳐서 번데기가 되어야 합니다. 번데기로 무척 오랫동안 고요히 잠을 자면서 온몸을 녹여야 합니다. 애벌레였던 몸을 몽땅 녹이지 않으면 나비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번데기에서 고요히 잠들어 오랫동안 온몸을 모조리 녹인 애벌레일 때에 비로소 나비라는 새 몸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카스가나 나카무라 같은 아이들은 아직 ‘애벌레’입니다. 말 그대로 ‘버러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벌레이든 버러지이든 ‘아기 벌레’예요. 아직 철이 들지 않았고, 철을 모르며, 철부지로 이것저것 부딪히는 아이들입니다.


  두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도 아직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지 못했고, 마음을 깨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런 잘못이나 저런 말썽이라고 할 만한 짓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아직 어느 것도 제대로 모르니까요.


  두 아이는 저마다 거죽을 벗어야 합니다. 남이 벗겨 주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벗어야 합니다. ‘바보스레 저지른 짓을 자수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죽도 벗고 허물도 벗어야 해요. 학교에 얽매이지 말고, 굴레나 사회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하고픈 일을 찾고, 스스로 나아가려는 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두 아이 카스가와 나카무라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썩어문드러지는 길’로 굴러떨어지려고만 합니다.


  쓸쓸하며 안타까운 노릇일 수 있지만, 오늘 이 아이들은 이 길에 서면서 한 걸음을 내딛겠지요. 괴롭고 힘들지만 한 걸음을 내딛겠지요. 바보스러운 어른이 아닌 새로운 어른이 되기를 바랄 테니까요. 굴레에 가두는 사회가 아닌, 굴레를 떨치는 삶을 바랄 테니까요. 4348.9.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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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다 오감 톡톡! 인성 그림책 1
후쿠다 이와오 그림, 다니카와 슌타로 글, 김숙 옮김 / 북뱅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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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2



우리 ‘무엇 하며’ 놀면 재미있을까?

― 만들다

 다니카와 슌타로 글

 후쿠다 이와오 그림

 김숙 옮김

 북뱅크 펴냄, 2015.9.25. 12000원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뭔가를 ‘하’면서 놉니다. 소꿉놀이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뒹굴기도 합니다.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어깨동무도 합니다. 아이들 삶은 온통 놀이인데, 놀이는 늘 ‘놀이하다’입니다. 아이를 지켜보는 어른이라면 언제나 일을 할 테고, 일은 늘 ‘일하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놀이를 하며 삶을 짓기에 재미있고, 일을 하면서 살림을 지으니 즐겁습니다.



흙으로 무엇 만들지? 흙으로 뱀 만들지.

뱀으로 무엇 만들지? 뱀으로 항아리 만들지.

→ 흙으로 무엇 하지? 흙으로 뱀 빚지.

→ 뱀으로 무엇 하지? 뱀으로 항아리 빚지.


항아리로 무엇 만들지? 항아리로 술 만들지.

술은 무엇 만들지? 술은 친구 만들지.

→ 항아리로 무엇 하지? 항아리로 술 담그지.

→ 술은 무엇 하지? 술은 친구 사귀지.



  일본 그림책 《つくる(作る)》를 한국말로 옮긴 《만들다》(북뱅크,2015)를 읽습니다. 일본말 ‘つくる(作る)’를 ‘만들다’로 옮겼는데, 일본말 ‘츠쿠루(つくる)’하고 한국말 ‘만들다’는 쓰임새가 아주 다릅니다. 게다가 일본말 ‘츠쿠루’는 한자로 ‘作る’처럼 적습니다. ‘作’이라는 한자를 새길 적에 한국에서는 “지을 작”이라 합니다. 일본말에서는 ‘츠쿠루’라면 한국말에서는 ‘짓다’인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짓다’하고 ‘만들다’는 사뭇 달라요. ‘짓다’는 집이나 옷이나 밥을 마련하는 일을 가리키며 씁니다. 이때에는 ‘만들다’라 하지 않아요. “밥을 만들다”나 “옷을 만들다”처럼 쓰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척척 찍어서 내놓는다면, 이때에는 “밥을 만들다(즉석요리 밥을 만들다)”처럼 쓸 수 있겠지요. “집을 짓는다”는 살아갈 터를 마련한다는 뜻이고, “집을 만들다”는 “물건을 새로 내놓는다”는 뜻으로 씁니다. ‘짓다’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새롭게 나타나도록 한다는 뜻을 바탕으로 쓰임새를 넓힙니다. “이름을 짓는다”거나 “생각을 짓는다”거나 “사랑을 짓는다”나 “꿈을 짓는다”처럼 씁니다. ‘만들다’는 “힘을 쓰거나 연장을 다루어, 갖거나 얻고 싶은 것을 이룬다”는 뜻을 바탕으로 쓰임새를 넓힙니다. 힘이나 연장으로 어떤 것을 마련할 적에 ‘만들다’를 쓰는데, 이때에는 어느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도록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을 찬찬히 살핀다면, 그림책 《つくる(作る)》는 “만들다”가 아니라 “짓다”로 옮겨야 옳습니다. 그런데, 일본말 ‘츠쿠루’를 더 살피면, 이 일본 그림책은 “짓다”로 옮겨도 그리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본말 ‘츠쿠루’는 “어떤 재료를 써서 무엇을 만들다. 모임이나 회사를 세우다. 마련하다. 줄을 짓다. 새로 사귀다. 처음 선보이다. 논밭을 가꾸다. 버릇을 들이다. 글을 쓰다. 맞수를 두다. 돈이나 재산을 이루다. 밥을 하다. 아이를 낳다. 꾸미다. 거짓으로 보여주다. 한 집안을 이루다” 같은 자리에 두루 쓰는 낱말이기 때문입니다.



염소로 무엇 만들지? 염소로 가죽 만들지.

가죽으로 무엇 만들지? 가죽으로 북 만들지.

→ 염소로 무엇 하지? 염소로 가죽 뭇지.

→ 가죽으로 무엇 하지? 가죽으로 북 만들지.


북으로 무엇 만들지? 북으로 리듬 만들지.

리듬은 무엇 만들지? 리듬은 축제 만들지.

→ 북으로 무엇 하지? 북으로 노래(가락) 짓지.

→ 노래(가락)는 무엇 하지? 노래는 잔치 되지.




  일본에서는 일본말로 일본 어린이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림책 《つくる(作る)》는 일본말 ‘츠쿠루’를 잘 살린 멋지고 재미난 이야기 꾸러미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말에 맞게 새롭게 바라보고 제대로 한국말을 살펴서 한국 어린이가 한국말을 슬기롭게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 《つくる(作る)》를 살피면, 두 쪽으로 펼친 자리에서 두 가지로 수수께끼를 한 가지 물으면서 실마리를 하나씩 내놓습니다. 처음 묻는 수수께끼 말을 ‘한국 번역판’에서는 모두 ‘만들다’를 쓰지만, 한국말 쓰임새를 살핀다면, ‘만들다’가 아니라 ‘하다’를 넣어야 알맞습니다. “이것으로 무엇 하지?”처럼 물어야 올발라요. 이렇게 ‘하다’로 물은 뒤, 한국말 결을 살펴서 ‘하다’를 다 다른 쓰임새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흙으로 무엇을 할까요? 흙으로 뱀처럼 길게 빚습니다. 뱀처럼 길게 빚은 흙으로 무엇을 할까요? 항아리를 빚지요. 항아리로 무엇을 할까요? 항아리에 술을 담그지요. 술로 무엇을 할까요? 술로 동무를 사귀지요.


  ‘만들다’만 쓰면 이야기가 매우 아리송하기까지 합니다. “염소로 무엇 만들지?” 같은 말은 너무 아리송합니다. 산 짐승을 놓고 ‘만들다’라는 낱말을 쓰니 그야말로 얄궂습니다. “염소로 무엇 하지?”처럼 써야지요. 그리고 가죽은 한국말로 ‘뭇다’를 빌어서 나타냅니다. ‘만들다’는 “북을 만들다” 같은 자리에 비로소 쓸 수 있습니다.



솜으로 무엇 만들지? 솜으로 실 만들지.

실로 무엇 만들지? 실로 천 만들지

→ 솜으로 무엇 하지? 솜으로 실 꾸리지.

→ 실로 무엇 하지? 실로 천 짜지.


천으로 무엇 만들지? 천으로 옷 만들지.

옷으로 무엇 만들지? 옷으로 허수아비 만들지.

→ 천으로 무엇 하지? 천으로 옷 짓지.

→ 옷으로 무엇 하지? 옷으로 허수아비 만들지.



  솜만 얻으려고 한다면 “솜을 틀다”라 합니다. 이 그림책에서는 “솜으로 무엇 하지?” 하고 물은 뒤에 “실 꾸리지”로 대꾸한 뒤, 실로는 “천 짜지”처럼 대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옷은 ‘만들다’가 아닌 ‘짓다’로 나타냅니다. 허수아비를 세운다고 할 적에 비로소 “허수아비 만들지”처럼 쓸 수 있어요.




바위로 무엇 만들지? 바위로 쇠 만들지.

쇠로 무엇 만들지? 쇠로 가위 만들지.

→ 바위로 무엇 하지? 바위로 쇠 녹이지.

→ 쇠로 무엇 하지? 쇠로 가위 두들기지.


가위로 무엇 만들지? 가위로 종이 사자 만들지.

종이 사자로 무엇 만들지? 종이 사자로 그림책 만들지.

→ 가위로 무엇 하지? 가위로 종이 사자 오리지.

→ 종이 사자로 무엇 하지? 종이 사자로 그림책 엮지.



  죽 이어지는 다른 자리에서도 “물은 무엇 만들지? 물은 강 만들지.”는 “물은 무엇 하지? 물은 냇물 이루지.”로 손질할 만하고, “강으로 무엇 만들지? 강으로 댐 만들지.”는 “냇물로 무엇 하지? 냇물로 댐 세우지.”로 손질할 만합니다.


  “해님은 무엇 만들지? 해님은 채소 만들지.”라든지 “채소로 무엇 만들지? 채소로 샐러드 만들지.”도 영 안 어울립니다. 한국말로는 이렇게 ‘만들다’를 아무 데나 넣지 않습니다. 이 그림책은 한국 어린이한테 한국말을 영 엉터리로 보여줄까 걱정스럽습니다. “해님은 무엇 하지? 해님은 남새 키우지. 남새로 무엇 하지? 남새로 샐러드 버무리지.”처럼 손질해야지 싶습니다.



샐러드는 무엇 만들지? 샐러드는 몸 만들지.

몸으로 무엇 만들지? 몸으로 기록 만들지.

→ 샐러드는 무엇 하지? 샐로드는 몸 가꾸지.

→ 몸으로 무엇 하지? 몸으로 기록 세우지.



  이야기가 더 흘러 “모닥불로 무엇 만들지? 모닥불로 군고구마 만들지.”가 나오는데, 이 대목도 “모닥불로 무엇 하지? 모닥불로 군고구마 굽지.”로 손질해야 하고, 뒤따르는 “군고구마는 무엇 만들지? 군고구마는 방귀 만들지.”는 “군고구마는 무엇 하지? 군고구마는 방귀 뀌지.”로 손질해야 합니다.


  이밖에 다리는 ‘놓는다’고 하고, 통나무는 ‘깎는다’고 합니다. 길은 ‘낸다’고 하고, 닭은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닭은 무엇 만들지? 닭은 달걀 만들지.” 같은 이야기는 아주 엉터리입니다. 닭은 달걀을 ‘만들지’ 않아요. “닭은 무엇 하지? 닭은 달걀 낳지.”처럼 써야 올바릅니다. 일본말에서 ‘츠쿠루’가 “아이 낳다”를 뜻하기도 한다기에 일본 그림책에서는 ‘츠쿠루’를 빌어 “알 낳기”를 나타냈지만, 한국말 ‘만들다’는 아기나 알을 낳는 일을 안 가리킵니다.


  그런데, 꼭 한 가지 ‘만들다’가 어울리는 이야기가 그림책 끝자락에서 흐릅니다.




사람으로 무엇 만들지? 사람으로 군인 만들지.

군인으로 무엇 만들지? 군인으로 군대 만들지.

군대는 무엇 만들지? 군대는 전쟁 만들지.

전쟁은 무엇 만들지? …….

→ 사람으로 무엇 하지? 사람으로 군인 만들지.

→ 군인으로 무엇 하지? 군인으로 군대 만들지.

→ 군대는 무엇 하지? 군대는 전쟁 일으키지.

→ 전쟁은 무엇 하지? …….



  군대는 ‘만들다’보다 ‘세우다’ 같은 낱말이 잘 어울릴 만하지만, 이 그림책에서 이야기하려는 ‘군인·군대·전쟁’은 “억지로 만들어 낸 슬픔과 아픔”을 넌지시 빗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만큼은 ‘만들다’가 어울립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군대를 ‘만드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바로 이 지구별에 “아픔을 만드는 바보”이거든요.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권력자와 정치인은 “삶을 짓”거나 “사랑을 짓”거나 “꿈을 짓”는 길하고 동떨어집니다.


  우리는 참말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전쟁은 무엇을 할까요? 전쟁무기로는 무엇을 할까요? 군대로 무엇을 할까요? 군인은 무엇을 할까요? 왜 제주섬 같은 곳에까지 해군기지를 세워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남녘과 북녘 젊은이가 비무장지대에 ‘잔뜩 무장한 몸’으로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 손가락질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을 막으려면 군대와 전쟁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핑계는 이제 몽땅 내려놓고, 평화를 이루려면 오직 평화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대목을 제대로 깨닫고 평화로운 길로 삶을 ‘새로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 그림책 《つくる(作る)》는 ‘평화 짓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츠쿠루(作る)’라는 낱말을 일부러 썼구나 싶습니다. 이러한 뜻하고 얼거리를 생각한다면, 이 일본 그림책을 한국말로 옮길 적에 《만들다》가 아닌 《한다》나 《짓는다》나 《무엇을 하며 지을까》로 새로 옮겨서, ‘평화를 사랑한다’나 ‘평화를 짓는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하고 함께 나아갈 길은 오직 ‘사랑하기’하고 ‘평화짓기’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를 함께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4348.9.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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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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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5



‘문’을 열고 한 발짝 새롭게 길을 나선다

―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 문

 나쓰메 소세키 글

 송태욱 옮김

 현암사 펴냄, 2015.8.28. 13000원



  문틈으로 모기가 들어옵니다. 아주 조그마한 틈이 있는데 아주 조그마한 모기가 바로 요 틈으로 들어옵니다. 가을이 깊은데에도 아직 살아남은 모기는 아주 조그맣지만 아주 매섭게 뭅니다. 모기한테 물린 자리가 붓고, 부은 자리를 잊으니 이내 가라앉으며, 낮고 빠르게 나는 작은 모기를 찰싹 때려서 잡다가 속삭입니다. 얘들아, 너희도 이제 잠들어야 하지 않니? 너희를 더 때려잡고 싶지는 않구나.


  가을이 깊어지는 시골집은 저녁이 되면 썰렁합니다. 낮에는 가을볕이 뜨겁지만 해가 하늘에 없는 저녁과 새벽에는 스산해요. 아침에 느즈막하게 마루문을 열고, 저녁에 해가 질 무렵이면 마루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마루문이나 방문을 꼭꼭 닫아도 바깥에서 울리는 소리는 집안으로 고이 스밉니다. 어떤 소리가 스미는가 하면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가 스밉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마당과 텃밭과 풀밭에서 사는 수많은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는 하루 내내 온 집안으로 퍼집니다.



“이봐, 작은집이 나카로쿠반초 몇 번지더라?” 하고 미닫이문 너머에 있는 아내에게 묻는다. “25번지 아니에요?” 하고 아내가 대답했는데 소스케가 수신인 주소를 다 쓸 때쯤에는, “편지로는 안 돼요. 가서 잘 말씀드리고 와야죠.” 하고 덧붙였다. (19쪽)


“오요네, 오요네.” 하고 소스케는 부엌에 있는 아내를 부르고는, “고로쿠가 왔으니까 맛있는 거라도 좀 만들어 봐.” 하고 말했다. 아내는 바쁜 듯이 부엌의 장지문을 열어 둔 채 나와 객실 입구에 서 있다가 그 뻔한 주문을 듣자마자, “네,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하고 대답하고는 바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 대신 도련님, 미안하지만 객실 문을 닫고 남포등에 불 좀 켜 주시겠어요? 지금 저도 기요도 손을 뗄 수가 없거든요.” 하고 부탁했다. (30쪽)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가운데 아홉째 권으로 나온 《문》(현암사,2015)을 읽습니다. 이 작품은 1910년에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1910년은 한국으로서는 크게 아픈 해였지요. 이무렵 일본은 어떤 나날이었을까요. 이웃한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크게 힘을 뻗던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일구었을까요.


  일본에서도 살림이 넉넉할 뿐 아니라 흥청망청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살림이 가난할 뿐 아니라 하루 벌어먹기조차 고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군국주의와 전쟁을 두 팔 벌려 반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군국주의도 전쟁도 온몸으로 거스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요.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 정권에 빌붙어서 떡고물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고, 나라를 되찾으려고 온몸으로 애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 갈래로 나뉩니다. 삶을 짓는 사람하고 삶을 짓지 않는 사람으로 갈립니다. 삶을 짓는 사람은 내 삶처럼 네 삶이 아름답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다치거나 억눌리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합니다. 삶을 짓지 않는 사람은 제 삶만 바라보기 때문에 둘레에서 아무리 다치거나 억눌리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고로쿠는 자신이 학교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형에게 일요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엿새 동안의 어두운 정신 활동을 이날 단 하루에 따뜻하게 회복하기 위해 형은 많은 희망을 24시간 안에 투입하고 있다. (33쪽)


이튿날 아침이 되고 관청의 일이 시작되자 소스케는 이미 고로쿠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느긋하게 있을 때도 그 문제를 눈앞에 똑똑히 떠올리고 확실히 생각해 보는 것을 꺼렸다. 머리카락 안에 싸여 있는 그의 두뇌는 그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69쪽)




  소설책 《문》에 나오는 ‘고로쿠’는 ‘소스케’라는 사람한테 동생입니다. 두 형제는 살림이 무척 넉넉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로 집살림이 크게 기울었습니다. 형 소스케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불타는 사랑’에 뛰어들면서 학교와 마을에서 쫓겨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다가 도쿄에 어렵게 자리를 잡아서 두 부부끼리만 오붓하고 조용하게 삽니다. 동생 고로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작은집에 기대어 지내다가 더는 작은집에 기댈 수 없어서 형네 집으로 얹혀 들어가서 지냅니다. 형 소스케는 밝고 싹싹한 마음결로 삶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지낸 사람이지만, 불타는 사랑으로 짝을 맺은 뒤로는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사귀는 일은 거의 안 하면서 일터와 집 사이만 오가는 나날을 보냅니다. 동생 고로쿠는 어려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채 학교만 다니다가 돈 때문에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몸이 된 줄 깨닫고는 공부에는 재미를 안 붙이고 날마다 어디에선가 돈을 얻어서 술만 마시며 노닥거립니다.


  1800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서던 일본 사회를 가만히 그려 봅니다. 한 사람은 ‘자유연애’라고 하는 문턱을 넘은 뒤 학교와 마을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쫓겨난 뒤 ‘마음이라고 하는 문’을 굳게 닫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앞날을 생각하는 일’이 없이 그냥 학교만 다니다가 제 앞길이 더는 느긋하거나 탄탄하지 않은 줄 알아차리고는 ‘앞날을 생각하는 일’은 굳이 더 하지 않고 그저 노닥거리기만 하면서 어떠한 문턱도 스스로 넘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무렵 일본 정치와 사회는 전쟁이라고 하는 문턱을 넘습니다.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문턱을 뛰어넘습니다. 평화와 평등이라는 문턱은 아예 짓밟습니다. 군국주의 일본 사회에서 학교는 어린이와 젊은이한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평화와 평등은 깡그리 짓밟는 정치와 사회에서 일본 어린이와 젊은이는 무엇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논어》를 읽었어.” 하고 말했다. “《논어》에 뭔가 있어요?” 하고 오요네가 되묻자 소스케는, “아니, 아무것도 없어.” 하고 대답했다. (82쪽)


아침나절에는 관청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를 봤지만 이따금 어젯밤의 광경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오요네의 병이 마음에 걸려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때로는 이상한 실수까지 저질렀다. 소스케는 점심시간을 기다려 과감히 집으로 달려갔다. (145쪽)



  한쪽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전쟁통에서도 아이는 태어납니다. 한쪽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도, 이 북새통 틈바구니에서도 아기는 어머니한테 매달려 젖을 물어야 합니다.


  삶은 어디에서나 흐릅니다. 다들 배고프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날마다 잔칫상 같은 밥을 게걸스레 먹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두 끼니를 차려서 먹기도 벅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써 땅을 부쳐서 곡식을 거두어도 땅임자가 거의 다 차지하고, 얼마 남지 않은 곡식마저 식민지 총독부에서 빼앗기 일쑤입니다. 쌀죽은커녕 피죽조차 먹기 어려운 나날이 이어지는 소작농이 매우 많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살 길이 까마득하기에 만주로 떠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더라도 스스로 입에 풀을 바르려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을 지나야 할까요. 배부른 사람들은 날마다 어떤 문을 드나들까요. 배고픈 사람들은 어떤 문을 바라보면서 고향을 뒤로할까요.



그녀는 그때 보통의 산모처럼 삼칠일을 잠자리에서 보냈다. 몸이라는 면에서 보면 극히 안정된 3주일이었다. 동시에 마음이라면 면에서 보면 놀랄 만큼 인내한 삼칠일이었다. 소스케는 죽은 아이를 위해 작은 관을 마련하여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장례를 치렀다. (163쪽)


부부는 해 앞에서 웃고 달 앞에서 생각하며 조용히 해를 보내고 또 맞았다. 올해도 이제 다 저물어 가고 있었다. (191쪽)



  나쓰메 소세키 님이 빚은 문학 《문》은 ‘잘나지도 않으나 못나지도 않은’, 그렇다고 ‘잘살지도 않으나 못살지도 않은’ 사람들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스스로 새로운 문턱을 한 발짝 넘어섰으나 더 새로운 문턱으로까지는 차마 넘어서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뒤로 물러나지도 못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두려워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길을 걱정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하루하루 흐릅니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안 하다 보니 마음에 응어리만 쌓입니다.


  소설 《문》에 나오는 사내인 소스케는 그야말로 안절부절한 마음에 그만 허둥거리다가 관청 일을 열흘씩 쉬면서 숲속 절집으로 꽁무니를 뺍니다. 소설 《문》에 나오는 가시내인 오요네는 아픔하고 슬픔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스스로 웃음을 잃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뒤로 빼거나 꽁무니를 빼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녁 삶을 코앞에서 맞닥뜨리고 마주하며 부딪힙니다. 다만, 이러한 오요네라고 하더라도 더 너른 문턱을 넘어서지는 않습니다. 문지방 건너편에서 조용히 사내(남편인 소스케)를 지켜보면서 기다립니다. 마음속으로는 새로운 삶을 꿈꿀는지 모르나, 이러한 뜻을 선뜻 내비치지 않으면서 그저 사내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삶을 보냅니다.




소스케는 언뜻 보기에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듯한 그 사람들의 나날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지금의 생활을 비교하고 그 현격한 차이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속 편한 신분이라 좌선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좌선을 한 결과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228쪽)



  삶은 언제나 흐릅니다. 하루하루 고달프거나 괴롭다고 여기면서 등을 돌린다든지 고개를 돌릴 수야 있습니다만, 내가 등을 돌리더라도 삶은 늘 흐릅니다. 내가 아무리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아침이 흐르고 낮이 흐르며 저녁이 흘러요. 나는 언제까지나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숨을 수 없습니다. 일터에 낼 수 있는 말미는 길지 않습니다. 열흘쯤 말미를 냈어도 열흘은 훌쩍 지나갑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뒤로 돌아갈 노릇이고, 뒤로 돌아갈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안 간다면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셈인데, 제자리걸음으로는 삶을 짓지 못합니다.


  뒤로 가는 길은 나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뒤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봉우리에 오른다고 해서 그저 올라가기만 하지 않습니다. 봉우리에 올라섰으면 이제 내려와야지요. 봉우리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봉우리에 집을 지을 수도 없고, 봉우리에서 땅을 부쳐 열매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봉우리에 올라섰으면 적어도 집으로는 돌아가서 밥을 지어 먹어야지요.


  소설 《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수수합니다. 아무래도 수수한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실마리를 풀 수 없던 사회였을 테고, 바로 수수한 이야기이기에 이처럼 소설로 빚어서 삶을 새롭게 돌아보는 길을 찾아볼 만하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문턱을 넘어서는 일은 아주 쉽기 때문입니다. 어렵다고 여기니 어려울 뿐인데, 그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한 걸음 내딛으면 됩니다. 문을 여는 일도 아주 쉽습니다. 그저 손을 들어서 문짝을 잡고는 스르륵 밀거나 당기면 됩니다.



소스케는 집으로 돌아와 오요네에게 이 휘파람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요네는 장지문 유리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정말 다행이에요. 드디어 봄이 돼서.” 하며 눈썹을 환하게 폈다. 소스케는 툇마루로 나가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면서, “응, 하지만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 (264쪽)



  밥을 먹는 사람도 나요, 길을 나서는 사람도 나입니다. 새로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나이며, 새로운 꿈을 키우는 사람도 나입니다. 소설 《문》에 나오는 소스케와 오요네는 ‘새로운 사랑과 꿈과 삶’을 생각하면서 ‘불타는 사랑’을 나누어서 새로운 살림을 지었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앞으로 가야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든 없든,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기대며 보살피는 따스한 손길로 새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니까요. ‘문’을 열고 한 발짝 새롭게 길을 나서야 합니다. 4348.9.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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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시대 1 - 나쓰메 소세키 편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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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40



너울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지식인’

― ‘도련님’의 시대 1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2.10.26. 11000원



  세키가와 나쓰오 님이 글을 쓰고, 다니구치 지로 님이 그림을 그린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는 일본 정치와 사회와 문화에서 크게 너울을 치던 무렵을 그립니다. 다만, 이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일본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크게 너울치던 때에 ‘글 쓰는 사람’으로 살던 여러 사람 이야기를 빌어서 ‘일본에 어떤 너울이 쳤는가’ 하는 실마리를 풉니다. ‘메이지’라고 하는 물결이 잠들면서 서양 문화와 문명으로 일본이 크게 달라지는 모습을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나 이시카와 다쿠보쿠 같은 사람을 빌어서 그립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한국 사회 개화기’를 그무렵 ‘글 쓰는 사람’을 빌어서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 개화기에는 어떤 ‘글 쓰는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수 있을까요? 최남선이나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만할까요? 심훈이나 윤동주나 김유정 같은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만할까요? 주시경이나 김두봉은? 이효석이나 김동인은? 모윤숙이나 나혜석은? 홍명희나 김교신은?



“무턱대고 서양 흉내를 내려고 해도 그게 그리 쉬운가. 흉내를 낸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13쪽)


‘일본인은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을 좋아한다. 그 전통은 메이지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21쪽)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를 이끄는 일본 작가는 아무래도 ‘나쓰메 소세키’입니다. 〈도련님〉이라는 작품을 빚은 사람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이고, 이 만화책을 이끄는 이름도 ‘도련님’입니다. 이제껏 일본은 도련님(메이지 시대) 같은 나라요 사회요 문화였으면, 앞으로는 도련님은 저만치 뒤로 물러서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으로는 샌님 같은 도련님이 아닌, 씩씩하고 밝으며 다부진 새로운 젊은이가 일어선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일본 사회에서 ‘저무는 메이지 시대’를 마지막으로 기리면서 고이 떠나 보내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면서도 떠나 보내야 하는 옛 시대를 아쉽게 그리워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메이지’나 ‘근대’나 ‘개화’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라든지 조선 시대라고도 어느 한때를 나누곤 합니다만, 이렇게 ‘시대를 가르는 잣대’는 어떤 사람 눈길일는지 생각해 봅니다.


  집에 ‘하인’을 두면서 지내는 사람들로서는 ‘천황’이 바뀌거나 정치·사회 얼거리가 바뀔 적마다 여러모로 소용돌이를 겪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인 자리에서 사는 사람’은 천황이 바뀌든 서양 군인이 들어오든 식민지 사회가 되든 언제나 똑같이 ‘하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소작농은 조선 사회에서도 소작농이었고, 개화기에도 소작농이었으며, 식민지 사회에서도 소작농이었어요.


  바깥에서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너울을 친다지만, 막상 ‘나라를 버티거나 받치는 바탕’이 되는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는 어떠한 너울도 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도련님’이 흔들거리는 모습을 살며시 보여준다고 할 텐데, 이와 달리 《오싱》 같은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깊은 멧골에서 살다가 읍내로 식모살이를 나온 ‘오싱’한테는 ‘너울치는 사회’는 아무것도 아니며 느낄 수조차 없는 대목입니다.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기저귀를 빨아야 하는 어린 오싱한테 근대나 개화란 무엇일까요?



“소설은 말이야. 체념했던 일에 거창하게 미련을 부리거나, 머리로 뀌는 방귀 같은 거야.” “머리로 뀌는 방귀. 음,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피가 끓는 성격이라곤 하지만 교사니까 다소 지식은 갖추고 있고, 결말에선 악당을 던져버려야 속이 후련하겠지.” (46쪽)


‘소세키의 병은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자아에 눈뜨게 된 일본인의 고민, 또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를 배워야 했던 일본 지식인의 딜레마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52쪽)




  너울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지식인’을 재미나게 보여준다고 할 만한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입니다. ‘도련님(지식인)’ 눈높이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도련님 자리에서 사회를 맞이하며, 도련님 걸음걸이로 새로운 사회로 접어듭니다.


  이리하여, 도련님은 늘 도련님으로 있습니다. 도련님은 하인이 어떤 삶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인력거꾼이 어떤 살림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소작농이나 시골 농사꾼이 어떤 마을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에서 ‘소세키 마음’을 들어서 말하는 대목처럼, 너울치는 사회에서 일본 지식인은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자아에 눈뜨게 된 일본인의 고민, 또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를 배워야 했던 일본 지식인의 딜레마(52쪽)”를 품습니다. 너울치는 사회에 발맞추어 제자리(지식인 자리, 또는 도련님 자리)를 지키는 데에는 마음을 쓸 줄 알지만, 이웃이나 둘레를 살피는 눈길은 매우 얕습니다.



“보기 드문 권총을 소지하고 계신데 그 총은 매우 부정확한 물건입니다.” “네?” “회전식으로 하시죠. 아이버 존슨 사의 총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표적도 잘 골라야죠.” “뭐가요?” “작년에 조선국을 보호화, 대놓고 말해 속국화하려고 애쓴 건, 야마가타 님이 아니라 이토 님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174쪽)



  《‘도련님’의 시대》를 보면 ‘안중근’이라는 사람이 살몃살몃 나옵니다. 일본사람은 안중근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한국에서 바라보는 안중근 ‘의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암살자’나 ‘살인자’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일본 사회에서 수많은 지식인은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군국주의로 뻗는 일을 기뻐했을 수 있고, 전쟁으로 얻어들인 재산(그러니까 이웃나라한테서 빼앗은 재산)으로 일본 사회를 북돋운다면서 반길 수 있습니다.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듯이 여러 목소리를 골고루 들려주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웃(남)’ 일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스스로(도련님 스스로) 살아남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몸짓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끙끙 앓을 뿐입니다.



‘소세키뿐만 아니라 메이지의 지식인들에게 아시아는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구를 규범으로 삼은 근대화의 파란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요동치는 자아의 확보에 매달렸다.’ (176쪽)




  도련님은 못 이깁니다. 도련님은 시대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지식인은 아무것도 못 이기고 아무것도 못 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저 너울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안 넘어지려고 용을 쓸 뿐입니다.


  그러면, 도련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너울치는 사회에서 어떻게 안 넘어질 수 있을까요? 바로 도련님 둘레에서 도련님을 지켜 주는 수많은 하인과 소작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로 치자면 수많은 노동자가 사회와 나라와 정치와 경제를 떠받칩니다. 수많은 비정규직이 이 나라를 지켜 줍니다.


  커다란 기업이나 재벌이 이 나라를 버티거나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와 농사꾼’이 이 나라를 버티거나 먹여살리지요. 다국적기업이 한국에서 잇속만 챙기고 빠져나간들, 몇몇 재벌기업이 수출을 못한들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회와 공장과 회사와 식량을 버티도록 밑바탕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다만, ‘밑바탕 사람들 목소리’를 귀여겨듣거나 눈여겨보는 도련님(지식인)이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을 뿐입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도련님은 흔들리지만, 밑바탕 사람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제몫을 씩씩하게 합니다. 전쟁이 터지든 식민지가 되든 농사꾼은 봄이면 씨앗을 심습니다. 농사꾼이 씨앗을 심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굶어서 죽어요. 전쟁이 터지든 식민지가 되든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어머니가 아기한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새로운 어린이가 자라지 못하고, 새로운 어린이가 자라지 못하면 한 나라나 사회는 곧바로 무너져서 사라지겠지요.



“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시대라는 것에 질 수밖에.” (224쪽)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지식인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서 ‘밑바탕’을 볼 줄 알았다면, 또 이녁 스스로 밑바탕이 되는 삶을 조금이라도 가꾸어 보았다면, 그리고 이녁 스스로 손에 호미나 낫이나 기저귀를 쥐고서 ‘살림 가꾸기’를 해 보았다면, 사회가 아무리 너울치더라도 스스로 튼튼하게 서거나 씩씩하게 살아가는 길을 한결 슬기로이 헤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넘쳐나는 새 지식을 마주하면서 넘쳐나는 새 지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놓고 망설이기만 하니까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넘쳐나는 새 문명을 맞닥뜨리면서 옛 문명을 차마 놓기 어려우니까 몸이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아기는 늘 아기이니, 어머니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기를 살뜰히 보살핍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바뀌어도 농사꾼은 늘 봄에 씨앗을 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둡니다. 고이 흐르는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고이 흐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 ‘도련님(지식인)’ 자리에만 머문다면 언제나 흔들리면서 휩쓸리는 가랑잎 같은 모습이 됩니다. 4348.9.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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