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2018.3.15.


《어쨌든 노르웨이로 가자》

카트리나 데이비스 글, 필로소픽, 2015.8.7.



  부산마실을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 오르려고 보수동에서 택시를 잡는다. 새벽부터 퍼붓는 비는 낮에도 잦아들지 않는다. 우산은 ‘산복도로북살롱’에 놓고 나왔다. 택시에 타려고 우산을 접었는데, 접은 채로 책집에 놓았네. 어쩜 이리 알뜰한가. 택시를 모는 일꾼은 할아버지. 가시아버지처럼 차를 매우 잘 모신다. 오랜 나날 손잡이를 돌린 숨결을 느낀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느끼며 시외버스에 오르고, 《어쨌든 노르웨이로 가자》를 편다.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찬찬히 읽는데, 글쓴이가 어릴 적부터 얼마나 쓸쓸하면서 따분한 나날을 보내다가 홀로 첼로를 짊어지고 머나먼 마실길을 떠났는가를 느낀다. 그런데 그 외롭고 어둡던 가시밭길을 걸었기에 첼로를 곁에 둘 수 있었고, 어설픈 가락을 타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며, 이 눈물을 보며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는 이웃이 있었기에 노르웨이 끝자락 북극에서 저녁해를 볼 수 있었겠지. 삶은 때로는 어둡고 불가마 같으나, 이 삶은 때때로 환하며 춤마당 같다. 아슬아슬하기에 외려 기운을 낼 만하고, 지쳐서 쓰러지고 싶기에 다시 어깨에 짐을 얹고서 한 걸음을 뚜벅뚜벅 내딛는다. 어쨌든 나는 고흥 보금자리로 간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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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파워를 깨워라
도린 버츄.찰스 버츄 지음, 여연 옮김 / 샨티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202



아이들 맑은 목소리에 어른들이 마음 열기를

― 인디고 파워를 깨워라

 도린 버츄·찰스 버츄/여연 옮김

 샨티, 2018.3.5.



그들은 온몸으로 부정직한 것에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인디고 아이들이 과도하게 활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 어떤 인디고 아이는 사기꾼 예술가를 즉시 가려낼 수 있다. 설령 어른들이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려 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 사람의 에너지는 인디고 아이를 물리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아이는 고통의 원인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12, 13쪽)


때로 우리의 에고는 뭔가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내려면 나이를 더 먹거나 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줄리아는 나이나 학력과 상관없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아주 멋진 본보기이다. (27쪽)



  ‘인디고(indigo)’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쪽빛’을 뜻한다지만, 쪽빛으로만 쓰지 않습니다. “인디고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도 씁니다. 여느 아이들하고는 사뭇 다른 숨결로 태어난 아이한테 “인디고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요.


  인디고 아이 이야기를 담은 《인디고 아이들》이라는 책이 지난 2003년에 한국말로 나온 적 있습니다. 《인디고 파워를 깨워라》(도린 버츄·찰스 버츄/여연 옮김, 샨티, 2018)는 어느새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란’ 그 인디고 아이들이 삶을 어떻게 마주하면서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차분히 짚는 책입니다.



어떤 나이든 상관없이 인디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인디고들이 1970년대 중반 이후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시대였다 … 1970년대에 태어난 인디고들이나 그 뒤에 태어난 인디고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자신이 가진 직감을 신뢰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나침반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 (38, 39쪽)


인디고들은 솔직하지 않거나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 인디고들은 자신의 느낌과 반대되는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벌을 받는 편을 택한다. (76쪽)



  옳지 않은 일을 앞두고 “옳지 않아!”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많지 않으나 씩씩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한국말로 ‘씩씩하다’가 있군요. 숱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더라도 나설 줄 아는 사람은 ‘씩씩하다’고 하지요. 몸이 여리거나 몸집이 작아도 드세거나 우람한 몸집인 어른 앞에서 제 할 말을 할 줄 아는 아이란 더할 나위 없이 씩씩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고 싶어요. 우리 어른들은 얼마나 씩씩할까요? 우리 어른들은 씩씩한 아이를 볼 적에 어떻게 하나요? 아이가 씩씩하기에 대견스레 바라보는지요, 아니면 어리거나 여린 녀석이 당돌하다면서 눈을 감거나 윽박질러서 물리치나요?


  “나도 말할래!”라고 하면서 ‘미투’ 바람이 붑니다. 그동안 입을 다물던 목소리가 하나둘 터져나옵니다. 아니 그동안 입을 열었어도 우리 어른들이 거의 안 듣던 목소리가 이제 하나둘 곳곳에 흐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무척 많은 어른들은 “인디고 아이들”을 비롯한 씩씩한 사람들 목소리를 귀여겨듣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얕보거나 깔아뭉개기 일쑤였습니다. 귄위하고 권력, 여기에 신분하고 계급, 여기에 나이하고 학력, 여기에 남성이라는 가부장제, 이밖에 여러 가지를 내세워서 작고 낮지만 씩씩한 목소리를 걸어잠근 얼거리였다고 느낍니다. 씩씩한 아이가 설 만한 터가 거의 없었다고 느껴요.



인디고들은 언제나 자신의 진실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어줄까? 아니면 인디고들의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에 소통의 문을 닫아버릴까? 그렇지만 인디고들이 단호하면서도 배려 있는 태도로 말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83쪽)



  《인디고 파워를 깨워라》라고 하는 책은 인디고 아이들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겪은 삶을 들려주기도 하지만, 인디고 아이들 스스로 조금 더 삶을 배우고 한결 부드러우면서 차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싶은 이야기를 함께 들려줍니다. “옳지 않아!” 하는 목소리를 우리 어른들이 조금 더 귀여겨듣도록 하자면, 인디고 아이들도 애써야 한다는 대목을 조용히 짚어요.


  그런데 이런 줄거리를 읽다가 살짝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아니, 이런 매무새는 인디고 아이들한테만 바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하고요. 이웃을 더 살피거나 헤아리는 말씨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매무새란, 모든 어른이 갖출 매무새가 아닐까요? 우리는 저마다 곱고 상냥하며 즐겁게 삶을 가꾸면서 마을을 돌볼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참말로 누구나 고우며 상냥한 말씨로 이웃을 더 넉넉히 헤아려야 슬기로운 어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까요?



비유해서 말하면 인디고 아이들은 바위를 들어 올려서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커튼을 걷어서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려고 온 거예요. 빛의 일꾼들이 이 세상에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141쪽)


모든 사람이 자기 몸에 무엇을 집어넣고 있는지 알아야 하겠지만, 특히 인디고들은 더 그렇습니다. 인디고들은 아주 예민하고, 뭐든 해로운 것에 아주 격렬히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인디고들에게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음식이 무엇이든 그것이 가장 높은 진동을 가진 음식임을 확인하고 먹게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224쪽)



  《인디고 파워를 깨워라》를 읽는 동안, 어쩌면 저도 인디고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는지 모르겠다고 느낍니다. 1975년에 태어나 자라는 동안 숨통이 꽉 막힌 집안이며 마을이며 학교이며 사회를 느꼈습니다. 숨통이 꽉 막힌 모든 곳에서 “그건 옳지 않은걸요?” 하고 한마디를 하면 언제나 꿀밤을 맞았고, 군대에서는 숱하게 발길질을 받았으며, 술 먹이는 웃사람한테 술 그만 먹이라 하니 갖은 거친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궂은 짓을 하는 어른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아요?” 하고 따질 적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같은 대꾸를 들어야 했어요.


  느끼는 그대로 옳지 않다고 말할 적에 이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른을 거의 못 보며 살았습니다. 어딘가 틀리거나 어긋난 모습을 보았기에 그 대목을 좀 고치자고 말할 적에 이를 그때그때 받아들이는 어른을 좀처럼 못 보며 살았습니다. 어쩌면 무척 많은 ‘여리거나 어린 이웃’들이 이러한 길을 걸었겠구나 싶습니다.


  참을 참이라고 말할 줄 아는 매무새는, 인디고 아이들한테서만 엿볼 모습이 아니라 우리 누구나 건사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을 보면 거짓이라고 말하는 매무새도, 인디고 아이들한테서 흔히 엿보는 모습으로 그칠 노릇이 아니라 우리 누구나 갖출 매무새여야지 싶어요.린 이웃’들이 이러한 길을 걸었겠구나 싶습니다.



낮은 에너지에 중독된 이 세상은 높은 진동수를 지닌 존재를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 자신이 됨으로써, 물어야 할 것을 물음으로써, 어떤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뭔가를 믿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248쪽)



  꽃처럼 맑은 아이들이 언제나 꽃처럼 맑은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디고 아이들도 여느 아이들도, 인디고 어른들도 수수한 어른들도 모두 상냥하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 땅과 나라와 마을을 사랑으로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힘을 즐겁고 슬기롭게 쓰기를 바라요. 어른들은 더욱 따사로운 눈길하고 손길이 되고,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넉넉하고 환한 이야기꽃을 물려받을 수 있기를 바라요. 2018.3.15.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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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3.14.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태준 글, 문학동네, 2018.2.10.



  곁님이 나무란다. 우리가 이 터에서 스스로 지을 일이 수두룩한데 자꾸 바깥일에 눈을 돌린다고. 꾸중을 듣고서 하루 내내 생각한다. 밤 열두 시에 일어나 부산마실을 헤아리며 짐을 꾸렸고, 부엌일을 마무리해 놓았고, 빨래까지 마치고, 쌀은 새벽 세 시 무렵에 씻어서 불린다. 삼월로 접어든 뒤로는 읍내마실을 할 적에도 반바지차림이라 안개가 뿌연 오늘도 반바지로 나서려 하다가 긴바지 한 벌을 마저 챙긴다. 마루문을 열 즈음 두 아이가 잠에서 깬다. 너희는 아버지 배웅하는구나. 큰아이더러 빨래틀에서 옷가지를 꺼낼 만큼 꺼내서 널어 보라고 이르고는, 파란물병을 햇볕에 잘 내놓으라고 덧붙인다. 즐겁게 놀며 새 하루를 배우렴. 마을 할매는 이제 3월 14일이나 맨발에 반바지로 다니는 나를 흘깃거리시면서도 군말이 없으시다. 벌써 여덟 해나 보셨으니.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며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를 읽는다. 문태준 님은 시에 영어를 안 섞으나 한자를 섞는다. 나이든 시인하고 젊은 시인은 이 대목이 다르다고 느끼다가 마지막 시까지 다 읽는데, 밑줄을 그은 시가 고작 셋. 어라, 이렇게 밋밋하게 끝까지 넘기다니. 다시 처음부터 훑지만, 시가 퍽 얇다. 이야기를 좀 읽나 싶더니 허전하게 끝난다. 어라라.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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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3.13.


《드래곤볼 슈퍼 4》

토리야마 아키라 글·토요타로 그림/유유리 옮김, 서울문화사, 2018.3.15.



  오늘은 마을 빨래터에 낀 물이끼를 걷으러 가야겠다고 아침에 생각하다가, 우리 집안부터 치우고 가야 할 노릇이라고 느낀다. 고운 봄볕을 누리도록 잠자리 나무깔개하고 이불을 마당에 내놓는다. 피아노방 나무깔개도 걷어서 내놓고 쓸고 닦는다. 두 아이 모두 야무진 살림이가 되어 준다. 쓸고 닦다가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 아이들은 어버이가 바라는 대로 얼마든지 눈부시게 거듭난다. 그리고 어버이인 나도 스스로 꿈꾸는 대로 얼마든지 새롭게 피어난다. “자, 자, 내가 얼마나 쓸고 닦기를 잘하는지 보라구” 하는 마음이 된다. 이 마음대로 “자, 자, 내가 얼마나 밥을 잘 짓는지 보라구” 하는 마음이 되는데, 머잖아 “자, 자, 내가 얼마나 집을 잘 짓는지 보라구”로 거듭나고 싶다. 집안이며 빨래터를 다 치우고, 아이들하고 놀고, 무청시래기나물하고 무말랭이나물을 마친다. 아침부터 기나긴 하루를 마무르며 비로소 《드래곤볼 슈퍼》 넷째 권을 손에 쥔다. 저녁밥상을 물리고서야 홀가분히 만화책을 두 번쯤 읽는다. 한 번 읽고 아쉬워 처음부터 다시 보는데, 한 번 더, 그러니까 앉은자리서 세 번 읽는다. 우주를 우주스럽게 그리는 이 만화에 깃든 뜻을 우리 아이들한테 어떻게 걸러서 들려주면 좋을까 하고 생각에 잠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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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3.12.


《인디고 파워를 깨워라》

도린 버츄·찰스 버츄 글/여연 옮김, 샨티, 2018.3.5.



  곁님이 집피자를 굽는다. 집피자 굽기를 곁님한테서 배웠지만 오랫동안 안 하다 보니 어느새 까맣게 잊었다. 새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 배우더라도 또 오랫동안 안 하면 다시 잊고 말 테지. 야무진 손놀림으로 반죽을 해서 피자를 굽는, 스탠판으로 고소한 냄새를 퍼뜨리는, 이 즐거운 부엌에서 저녁을 누리고서 《인디고 파워를 깨워라》를 읽는다. 지난날 《인디고 아이들》을 읽던 무렵을 떠올린다. 어느새 2003년이었네. 열다섯 해가 흐른 오늘날 돌아보자면 “인디고 아이들”이 아닌 “인디고 어른들”이다. 1970년대에 태어나 자란 나도 이 “인디고 아이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뭔가 말로 밝힐 수는 없으나 소름이 돋으면서 되게 싫은 적이 흔했고, 내가 소름이 돋도록 싫다고 할 적에 둘레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다가 몇 해나 열스무 해쯤 지나서야 ‘예전에 네가 소름돋도록 싫어한 일이 떠올랐어’ 하고 알려주는 이웃님이 제법 있다. 우리는 어떤 삶길을 걷는 하루일까. 즐겁게 기운을 북돋아 아름답게 꿈을 짓는가? 아니면 꿈하고 동떨어진 채 자잘한 지식이며 정보를 머리에 가득채우는가? 새 아침을 바라면서 깊은 밤에 차분히 눈을 감고 저 먼 별나라를 마음에 고이 그려 본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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