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6
― 사진을 배우러 떠나다



 적잖은 분들이 사진을 배우러 길을 떠납니다. 어떤 이는 고등학교 적부터 사진을 배우다가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갑니다. 어떤 이는 미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이나 영국 같은 나라로 사진을 배우러 떠납니다. 사진을 배우러 떠나는 이들이 일본으로 가는 일은 꽤 드문데, 곰곰이 살피면 한국땅에 머물면서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은 훨씬 드뭅니다.

 사진이라는 갈래는 프랑스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사진 특허를 사들였을 때에 몇몇 사람이 홀로 차지하며 권리를 누리도록 하기보다는 누구나 마음껏 사진을 즐기면서 사진꽃이 피기를 바라며 ‘특허권을 없앴다’고 합니다. 참말 프랑스라는 나라는 사진뿐 아니라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남다른 나라요 남다른 빛깔과 숨결과 소리가 넘치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로 사진을 배우러 길을 떠나서 여러 해 프랑스 숨결을 들이마시는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사진꽃을 한결 흐드러지게 피우도록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사진을 배우러 간 이들이든, 독일이나 영국으로 사진을 배우러 간 이들이든, 일본으로 사진을 배우러 간 이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다 다른 길을 걸으며 저마다 다 다른 사진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 모두 훌륭하며 아리따운 사진밭을 일구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이 지구별에서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만 사진을 하거나 예술을 하기에는 무대가 참말 좁다 할 만합니다. 온누리에 선보이며 온누리에 이름을 떨칠 사진이나 예술을 한다면 더욱 빛난다 할 만합니다. 어차피 품는 꿈이라면 더욱 크며 더 예쁘게 보듬을 만하겠지요.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가든 경제학을 배우러 가든 철학을 배우러 가든 노래나 춤을 배우러 가든, 나라안에서는 내가 바라거나 뜻하는 대로 배우기 힘들기 때문에, 돈과 품과 겨를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길을 나섭니다. 낯설고 물선 나라에서 밑바닥부터 바둥거리든, 내 어버이한테 돈이 많아 돈 걱정 없이 복닥이든, 나라밖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사진이든 예술이든, 내가 걷는 사진길이나 예술길은 ‘남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걷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길을 걸어가면서 내 뜻과 꿈을 이룰 뿐 아니라, 내 밥벌이 또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밖으로 배움나들이를 가려 하는 까닭이란, 이 작은 나라에서는 ‘남이 걷지 못한 내 새 길을 찾기 힘들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눈을 트도록 도움을 받거나 깨우치거나 생각문을 열고자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가곤 합니다.

 그런데, 나라밖으로 애써 배움나들이를 떠났으나 막상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외려 외롭거나 힘들거나 지치면서 몸과 마음이 늙은 채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겉멋이 들거나 ‘한국이란 참 어설프고 못났지’ 하며 콧대가 높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진은 남한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삶은 남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문화이든 예술이든 남한테서 배워 내 문화나 내 예술을 꽃피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안에서 샘솟는 사진이고 삶이며 문화랑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내 몸을 내 마음에 따라 내 손발을 놀려 움직이는 동안 찬찬히 일구는 사진이거나 삶이거나 문화이거나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벽만 바라보고 가만히 앉아서 깨달음을 찾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 한 푼 없이 빈몸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이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깨달음을 얻으려 합니다. 어떤 이는 여러 날 밥굶기를 합니다. 어떤 이는 높은 산을 오릅니다.

 어떻게 무엇을 어디에서 하든, 모두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결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배우든 철학을 배우든 정치를 배우든, 누구한테서 무엇을 배워야 깨닫거나 알아채는 사진이나 철학이나 정치가 아닙니다. 누구한테서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또 어떤 대단한 책이나 교재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내 가슴속에 고운 사랑씨나 삶씨나 사진씨나 배움씨가 있을 때에 나 스스로 내 사랑이나 삶이나 사진이나 배움이 일어선다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으레 나라밖으로 배움나들이를 떠나는 까닭은 내 가슴속에 깃든 사진씨를 나라안에서는 좀처럼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잠을 깨우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더 큰 자극’이나 ‘더 센 자극’이나 ‘더 남다른 자극’을 받아 내 넋이 알을 깨어 우뚝 일어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배우는 나들이를 생각하는 분이라면 이 대목을 먼저 짚어 주면 좋겠습니다. 알을 깨어 나올 병아리는 늘 제힘으로 알을 깨야 합니다. 어미가 부리로 알을 조금이라도 깨 주면 병아리는 얼마 못 살고 죽습니다. 병아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크고 단단한 알을 그 여린 주둥이로 깨고 나오겠습니까마는, 참말 그 여린 주둥이와 그 여린 힘으로도 크고 단단한 알을 스스로 깨고 일어서야 병아리는 제 목숨을 고맙게 선물받은 그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배움나들이를 떠날 생각이라면 그야말로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나라밖 배움나들이에 드는 돈과 품과 겨를이란 몹시 큽니다. 내 어버이한테 돈이 많아 돈 걱정이 없달지라도 내 어버이는 내가 배움나들이를 떠난다고 할 때에 배움삯을 대려고 허리가 휩니다. 나 때문에 허리가 휠 어버이를 떠올리면서 ‘큰짐을 짊어졌다는 무게’가 아닌 ‘이 고마운 선물을 흐뭇하며 신나게 누려서 내 삶을 알차게 일구어야겠다는 보람’ 으로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한 가지를 더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내 값싸며 자그마한 사진기로 노상 들여다보고 단추를 찰칵찰칵 누르면서 내 사진길을 나 스스로 배우며 살아왔다고 곰곰이 헤아립니다. 참말, 저는 따로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운 적이 없고, 사진학교나 사진강좌나 사진학과 같은 데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어떤 교재나 책을 읽어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사진길을 걸었고, 나중에 사진책을 이것저것 사서 읽으며 내 사진길 곁에서 또다른 사진길을 걷는 숱한 사진동무를 느꼈습니다. 나한테는 사진스승이란 없습니다. 오로지 사진동무만 있습니다. 브랏사이라 하든 브레송이라 하든 이해선이라 하든 임응식이라 하든 모두 내 사진동무일 뿐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손길로 사랑하며 사진을 붙잡은 어여쁜 사진동무일 뿐입니다.

 모두들 목돈을 모아 여섯 달이든 한 해이든 몇 해이든 사진 배움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애써 모은 목돈으로 나라밖 사진책 장만하는 데에 쓴다면, 그러니까 사진책 장만하는 데에 삼천만 원이든 오천만 원이든 쓰면서 나 스스로 사진책을 읽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길을 기르는 데에 여섯 달이든 한 해이든 여러 해이든 써 보는 사람이 다문 하나라도 있으면 어떠하랴 싶어요. 똑같은 배움길이 아니라 새로운 배움길을 찾으면서 즐거우리라 봅니다. 내 나름대로 스스로 할 만한 배움길을 찾아보아도 퍽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서 한 해 동안 자전거로 우리 나라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또다른 틀에서 사진 배움길을 거닐 수 있어요.

 좋은 책은 좋은 벗입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랑입니다. 좋은 삶은 좋은 꿈입니다. 목돈을 모아 나라밖 배움나들이를 다녀와도 즐겁고, 목돈으로 한국땅 곳곳을 오래오래 누비면서 내 겨레말을 함께 쓰는 사람들 삶과 하나로 녹아들면서 배움삶을 누려도 기쁩니다.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사진을 하기 때문에 꼭 한국땅 곳곳을 누비며 한겨레 이웃을 마주해야 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사진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일본에서건 미국에서건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도 됩니다. 내 넋이 참말 내 넋이면서 내 뜻이고 내 길이어야 합니다. 내 사진길은 내 사진길이지, 남한테 기대거나 남 뒤꽁무니를 좇는 사진길이 될 수 없습니다. (4344.3.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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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과 책읽기


 사진으로 보여주면 애써 글로 차근차근 풀어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이 없던 지난날에는 꿈조차 꿀 수 없던 모습이라 할 만하지만, 사진이 아주 널리 퍼지거나 자리잡은 오늘날에는 아주 마땅하다 싶은 모습입니다.

 이야기를 글로 들려줄 때에, 그러니까 그림이나 사진 없이 글로만 이루어진 책일 때에는 따분하거나 재미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 입으로 조잘조잘 떠들며 나누는 이야기란 그림이나 사진을 보여주지 않고 말(글)로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셈인데, 혼자 스스로 조용히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글책 읽기는 자꾸 주눅들거나 시듭니다.

 이야기는 차분히 들어야 합니다. 서둘러 죽죽 읽어치우려 하면 제아무리 짧은 글이라 하더라도 옳게 헤아리지 못합니다. 글로 이루어진 책을 찬찬히 읽어내어 헤아리지 못할 사람이라면, 그림이나 사진이 가득 깃든 책일지라도 이 그림이나 사진이 무슨 이야기를 담는지를 똑똑히 읽어내어 헤아리지 못합니다. 글읽기가 되는 사람이어야 말듣기를 제대로 하고, 글읽기와 말듣기를 참다이 할 때라야 그림읽기나 사진읽기 또한 참다이 합니다.

 그림읽기와 사진읽기가 한결 수월할 수 없습니다. 글읽기를 하면서 내 마음속으로 생각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림읽기이건 사진읽기이건 젬병이거나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사진 많이 깃든 책을 바란다거나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잔치에 자주 놀러다닌다 하더라도 사진읽기를 슬기롭게 해낼 수 없습니다. 사진읽기에 앞서 글읽기를 할 줄 알아야 하며, 글읽기를 하면서 사람읽기와 삶읽기를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읽기와 삶읽기를 하는 동안 사람마다 제 삶을 어떻게 사랑하여 글을 이루었는가를 읽어야 합니다. 곧, 사랑읽기를 하며 글읽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책 하나 읽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 여길 수 있습니다. 참말 책 하나 읽는 일이란 그다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뜨개질로 옷 하나 짓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 여길 수 있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 한 그릇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 여길 수 있습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 하나 일구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 여길 수 있습니다. 자가용하고 안 사귀며 두 다리나 자전거로 살아가는 나날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 여길 수 있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보내고 집에서 함께 놀며 키우는 나날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 여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도 안 대단합니다. 마땅한 우리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아끼며 사랑할 내 삶이기 때문에 따로 대단하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대단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뽑기가 대단할 수 없습니다. 4대강사업 가로막기가 대단할 수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이나 언론자유가 대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누리에 대단한 일이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삶이 있을 뿐이요, 우리 삶은 대단하다거나 대단하지 않다거나 금을 긋듯 가를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 번 선물받은 삶이며 목숨일 뿐이고, 누구나 한 번 선물받아 일구는 삶이자 목숨일 뿐입니다. 1975년 12월 7일도 하루 한 번뿐이요, 20110년 3월 28일도 하루 한 번뿐입니다. 두 번이나 세 번 맞이할 수 없는 하루 한때입니다.

 삶을 읽는 눈일 때에 사람을 읽고, 사람을 읽는 마음일 때에 사랑을 읽으며, 사랑을 읽는 가슴으로 책에 담기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읽습니다. (4344.3.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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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예술



 사진이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사진이 처음 태어나던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사진이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하고 이야기할 사람이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날까지 사진이 예술이니 아니니 하고 따지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바보라 할 만합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사진이 그대로 사진인가, 또는 사진이 그대로 예술인가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진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사진기라는 장비’와 ‘사진이라는 틀’을 빌어 예술을 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닌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사진작가’라 내세우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붓을 써서 무엇인가를 그린다 하더라도 모두 ‘그림작가’이지는 않습니다. 붓으로 무엇인가를 그리지만 그림작가 아닌 ‘예술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붓이나 연필을 빌어 필름에 무엇인가를 아로새길 때에도 얼마든지 ‘사진작가’로서 사진을 하는 일이 됩니다. 영어로 ‘비디오아티스트’라 했던 백남준 님 같은 분은 텔레비전이라는 연장을 써서 예술을 했습니다. 백남준 님은 예술을 하고자 텔레비전이라든지 비디오라든지 사진이라든지 여러 가지 갈래를 당신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다루면서 당신 예술을 꽃피웠습니다. 영어로 ‘비디오아티스트’이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말로 하자면 예술가, 또는 예술쟁이입니다.

 그림과 같은 효과를 노리며 사진을 할 수 있습니다. 사진과 같은 효과를 노리며 그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보면서 느낌을 얻어 ‘그림 같은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진을 보면서 생각을 빌어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바야흐로 예술이라는 큰 바다 테두리에서 사진과 그림 사이에 무언가 허물어질 만하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이란 무엇이 그림이고, 사진이란 무엇이 사진이며, 예술이란 무엇이 예술이 될 만할까 궁금합니다. 한때 마침표와 쉼표와 말줄임표와 느낌표와 물음표를 뒤섞으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한다던 바람이 불다가 지나간 적 있습니다. 글자만 가득 담긴 글로는 글이 밋밋하거나 따분하다고 여기면서 ‘글을 새로운 예술이나 표현매체’로 삼으려던 흐름이 한동안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손으로 쓰는 글을 놓고 영어로 ‘캘리그래피’라는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남다른 글과 글멋과 글예술을 하고프다는 목소리라고 여깁니다.

 틀림없이 글자만 갖고도 예술이 됩니다. 글예술이라 하면 될까요? 그러나, 글이 글이 되자면 글자가 섞인 모양새로 글이 되지 않습니다. 글에는 이야기가 깃듭니다. 손으로 쓰는 글이든 타자기나 컴퓨터로 찍은 글이든, 이 글에 이야기가 깃들 때에 비로소 글이라 합니다. 이야기가 없는 글이란 글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글이 아니라’ 할 때에는 이른바 ‘문학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사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종이에 무언가 빛그림을 남겨야 사진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필름에 빛그림을 앉히든 메모리카드에 빛그림을 남기든 한다고 사진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바늘구멍을 낸 상자로 빛그림을 남기든 어떤 장비를 써서 어떤 빛그림을 남기든, 또는 인화지에 몸을 뒹굴든 복사기에 내 몸을 올려놓고 빛그림을 찍든, 사진이 사진이 된다 할 때에는 이 사진에 내 이야기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만으로는 글이 되지 않고 그림이 되지 않으며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물이나 대상하고 똑같이 보이도록 나타낸다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물이나 대상하고 똑같이 보이도록 나타낼 때에는 ‘베끼기(복제)’라고만 합니다.

 예부터 사진을 ‘복제술’이라고 일컬으며 살짝 비아냥거린 까닭이란, 사진이라는 빛그림에 ‘사진을 찍는 사람 이야기’를 제대로 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림도 마찬가지라서, ‘실물과 참말 똑같이 그린 그림’이기에 더 놀라운 그림이 되지 않을 뿐더러, 아예 그림이 안 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그림이라 할 때에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 넋이 스미어 그림을 그린 사람 이야기가 담기는 한편, 이 넋과 이야기를 그림 하나로 마주할 우리 가슴에 무럭무럭 샘솟아 피어나는 애틋한 눈물과 웃음이 있을 때에 그림이라 합니다. 우리가 사진이라 할 때에도, 이 사진을 찍은 사람 얼이 깃들며 사진을 찍은 사람 이야기가 들어서는 한편, 이 얼과 이야기를 사진 하나로 마주할 우리 마음밭에 몽글몽글 용솟음치며 태어날 아름다운 눈물과 웃음이 있을 때에 사진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사진 그대로 사진이면서, 사진은 또다른 예술 갈래 하나였습니다. 사진을 가리켜 예술이니 예술이 아니니 하고 따지던 사람들은 사진도 예술도 보지 못한 셈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사진을 사진으로 여기지 못하거나 ‘사진과 사진기를 써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서 예술을 마치 사진이라도 되는 듯 껍데기를 씌우는 사람들 또한 사진이든 예술이든 참답게 마주하지 않는 셈입니다.

 사진은 사진이고 예술은 예술입니다. 사진은 사진인 한편 예술이고, 예술은 예술인 가운데 사진으로 녹아듭니다.

 우리 삶 모든 이야기는 삶이면서 예술입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차리는 손길 또한 예술입니다. 밥그릇과 수저를 부시는 설거지도 예술입니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는 손길 또한 예술입니다. 논밭에서 일하며 땀방울 똑똑 흘리는 삶자락 또한 예술입니다. 볍씨 하나가 예술이고, 풀씨 하나가 예술입니다. 볍씨 하나는 볍씨 하나대로 예술이면서 볍씨 그대로 볍씨입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 손길이 예술이고, 아이 스스로 땅을 박차며 내딛는 걸음걸이와 웃음꽃이 예술입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사진은 그야말로 사진이면서 사진은 언제나 예술이기도 하다는 넋을 잘 추슬러 주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일 때에 참말 사진이면서 참으로 예술입니다. 사진은 사진이 아니면서 사진이라는 옷만 걸치려 할 때에는 사진도 예술도 되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값과 사진빛과 사진밭과 사진꿈 그대로 사진사랑으로 무르익으면서 사진 갈래를 빛내며 예술 누리를 북돋웁니다. (4344.3.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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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밖 나들이와 책읽기


 사람들은 나들이를 떠납니다. 어떤 이는 작은 수레를 끌고 골목골목 빈병이랑 헌 종이를 주으러 나들이를 떠납니다. 어떤 이는 장마당 나들이를 하려고 닷새나 열흘이나 한 달에 한 번쯤 읍내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어떤 이는 자가용을 몰고 언제나 나들이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로 나들이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시외버스를 타고 나라안 곳곳 나들이를 다니고, 어떤 이는 기차를 타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씽씽 오가는 나들이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대학바라기 문제집 풀이에 얽매여 나들이를 꿈꾸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대학바라기 문제집 풀이에 얽매이지만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을 나들이길이라 여깁니다. 어떤 이는 집일과 집살림을 하느라 오로지 집에서만 지냅니다. 어떤 이는 집안 이곳저곳 손질하고 돌보면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나들이를 합니다.

 어떤 이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 보꾹만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나들이를 합니다. 어떤 이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 때때로 창밖을 내다보며 눈길로 나들이를 합니다. 어떤 이는 조용히 숨을 거두면서 이제 또다른 누리로 나들이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갈래에 따라 수많은 곳을 찾아 수많은 숫자만큼 다 다르게 나들이를 합니다. 누군가는 내 보금자리에서도 빛을 보고, 누군가는 내 자그마한 마을에서도 빛을 보며, 누군가는 요 조그마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빛을 봅니다. 누군가는 티벳이나 인도나 네팔쯤은 돌아다녀 보아야 빛을 보고, 누군가는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쯤 밟아 보아야 빛을 보며, 누군가는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쯤 둘러볼 때에 빛을 봅니다.

 어디에서든 빛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프랑스에 찾아가 빛을 볼 수 있고, 프랑스사람으로서 프랑스에서 빛을 볼 수 있으나, 프랑스사람이기에 한국 같은 나라까지 찾아가서 빛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사람은 한국사람이 프랑스까지 찾아와서 빛을 보려 할 때에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요. 일본사람은 한국사람이 일본까지 찾아와서 빛을 본다고 할 때에 무슨 느낌이거나 생각일까요. 노르웨이사람은 노르웨이까지 찾아올 드문 한국사람을 마주한다면 이들 한국사람이 어떠한 빛을 찾아 예까지 찾아왔을까 하고 생각할까요.

 한국은 참 작고 좁은 나라입니다. 한국에서만 지내면 우물 안 개구리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참말 작고 좁은 나라 한국땅을 다 돌아보거나 모두 밟은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자동차를 몰아 한 번 슥 지나갔대서 돌아보았다 할 만할까요. 두 다리로 찻길을 따라 한 바퀴 빙 걸어다니기를 했대서 모두 밟았다 할 만한가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끼지 않고서, 비와 눈과 바람과 구름과 햇볕과 물과 흙과 풀과 나무과 벌레와 짐승을 고루 느끼지 않으면서, 사람과 삶터와 마을을 어깨동무하거나 두레라든지 울력을 하지 않았으면서, 우리는 무슨 나들이를 했다고 말할 만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좁디좁은 한국에서 나들이를 하든, 넓디넓은 지구별 곳곳에서 나들이를 하든, 나들이는 내 마음을 살며시 열며 나하고 마주하는 사람 마음으로 살며시 깃드는 나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먼길 나들이는 먼길 나들이대로 즐거우며 뜻있습니다. 가까운 나들이는 가까운 나들이대로 기쁘며 값있습니다. 내 보금자리 돌보며 보살피는 살림마실은 내 보금자리 살림마실대로 어여쁘며 알뜰합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인도에서 지냈지 버마나 네팔이나 티벳에서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림쟁이 밀레 님은 프랑스에서 살았지 아프리카나 칠레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이오덕 님은 멧골자락 작은 학교 아이들하고 노래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미리내 빛깔을 느꼈습니다. (4344.3.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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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하늘 별빛과 책읽기


 시골마을 멧골집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비록 예전과 견주면 그닥 안 맑은 하늘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제법 파란 빛깔 고운 낮하늘입니다. 아마 지난날하고 견준다면 참 어설프다 할 수 있겠지만, 제법 까만 빛깔이면서 알알이 별빛이 박힌 예쁜 밤하늘입니다.

 도시 한켠 골목집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를 떠올립니다. 기찻길 옆 골목집에서는 기차 소리로 시끄러웠으나 하늘을 마음껏 올려다보며 탁 트인 마음이 될 수 있었기에 좋았습니다. 3층 벽돌집 2층에서 살아갈 때에는 하늘 한 조각만 바라볼 수 있어서 서운했으나, 저녁에 보리술을 사러 아이를 데리고 동네 가게에 다녀올 때에는 조용한 밤길에 조용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내가 밟아야 할 흙을 흙답게 밟을 수 있어야 하는 한편, 내가 등으로 짊어지며 올려다보아야 할 하늘을 하늘다이 올려다보며 고개숙일 수 있어야 비로소 삶이 아닐까 하고 느낍니다.

 흙을 느끼고 하늘을 느끼는 나날이기에, 흙하고 하늘한테 고맙다 말할 수 있습니다. 흙을 보며 하늘을 보는 하루이기에, 흙이랑 하늘한테 눈길을 보내며 말을 걸 수 있습니다. 흙을 만지거나 하늘을 휘젓는 삶이기에, 흙과 하늘한테서 새 목숨을 선물받는다고 느낍니다.

 깊어 가는 봄날 흐드러지게 내린 눈꽃은 밤새 눈얼음으로 바뀝니다. 눈이 부시게 하얗게 깔린 눈떡 같은 눈밭을 땀흘려 쓸고 치웁니다. 겨울날 눈은 그냥 쌓이기만 하지만, 봄날 눈은 땅바닥에 얼어붙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라면 밤에도 얼어붙을 걱정이 없으나, 시골자락, 게다가 멧골자락 눈은 밤새 얼어붙습니다. 겨울눈은 겨울눈대로 한 번 얼어붙으면 고약하지만, 봄눈은 봄눈대로 한 번 얼면 퍽 고달픕니다.

 눈을 눈으로 맞아들이면서 이 눈더미를 텃밭에 뿌립니다. 우리 조그마한 텃밭이 눈물을 머금으며 더욱 싱그러울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어느새 한낮이 지나고 저녁이 찾아들며, 다시금 별빛 깜깜한 밤입니다. 등불 하나 없는 멧자락 밤은 참 깜깜합니다. 이 깜깜한 밤마을 어디쯤에선가 올빼미가 울고, 나로서는 이름을 잘 모르는 멧새와 멧짐승이 웁니다. 엊그제까지 울던 멧개구리 소리는 모두 잦아들었습니다. 설마 갑작스레 추워져서 얼어죽었나? 겨울잠에서 깨어 서로 사랑놀이를 나눈 다음 알을 낳고 한꺼번에 숨을 거두었나?

 도시에서 살아가면 도시내기 삶이면서 도시내기 삶을 글로 적바림하면서 도시내기끼리 나눌 책을 빚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면 시골뜨기 삶이면서 시골뜨기 삶을 글로 옮기면서 시골뜨기끼리 주고받을 책을 일굽니다. 이제 도시내기만 많고 시골뜨기는 드물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 글은 읽어 줄 사람이 드물 테지만, 어쩐지 별빛과 밤하늘 느끼는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몇 줄 끄적입니다. (4344.3.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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