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부침개와 책읽기


 옆지기 귀빠진날을 맞이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어제부터 곰곰이 생각했다. 귀빠진날이 닥치고 나서 생각한대서야 무얼 달리 뾰족히 할 만할 수 없겠구나 싶은데, 요 몇 해 사이 무슨 일을 하든 하나하나 차근차근 내다보면서 헤아린 일이란 거의 없지 않느냐 떠올린다. 미리미리 살피거나 보듬지 못하기 일쑤라고 느낀다. 숱한 집일이 밀려드니까, 이 집일을 껴안기만 하더라도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수 없다. 새벽과 밤에 잠을 쪼개어 글조각을 붙잡는데, 졸립거나 고단한 몸을 버티며 글조각을 붙잡는 일이란 퍽 부질없거나 덧없는지 모른다.

 옆지기 귀빠진날인 오늘은 새벽 여섯 시 이십삼 분에 일어난다. 요즈음 새벽에 꽤 늦게 일어난다. 새벽 서너 시쯤에 일어나서 일손을 붙잡아야 그럭저럭 글조각 보듬기를 할 만한데, 새벽 여섯 시라면 너무 늦다. 이때에 일어나면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침 일곱 시부터는 아침밥을 차리느라 부산을 떨어야 하니까. 일곱 시 이십 분이나 삼십 분 즈음에 쌀을 씻어 불리고, 아침에 끓일 국을 무엇으로 할는지 생각한다. 미역국이나 다시마를 넣은 국이라면 미역이나 다시마를 미리 손으로 끊어서 불려야 한다. 다른 국 또한 이무렵부터 국거리를 손질한다.

 아이는 오늘 따라 아홉 시 반 즈음에 일어난다. 요 몇 달 사이, 다른 날에는 아침 일곱 시 반이나 여덟 시에 어김없이 일어났는데, 하도 신나게 뛰놀다 보니 오늘만큼은 꽤 많이 고단했나 보다. 열 시가 가까워 일어났는데에도 아침밥이자 낮밥을 먹을 무렵부터 눈가에 졸음이 꽤 쌓인 모습이다.

 느즈막하게 일어난 아이를 데리고 비탈논으로 간다. 우리가 짓는 비탈논은 아니고, 웃마을 이오덕학교에서 짓는 비탈논이다. 이 비탈논 둑자리를 따라 송송 돋는 쑥을 뜯는다. 아이는 처음에 몇 차례 아버지 흉내를 내어 쑥을 뜯어 보더니, 이내 논둑이며 논바닥이며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신나게 잘 논다.

 저녁밥을 차리려고 또 한 번 아이를 데리고 논둑으로 나온다. 아이는 아이대로 마음대로 노래하면서 뛰놀고, 아버지는 바지런히 쑥을 뜯는다.

 내가 옆지기한테 해 줄 만한 선물이란 무엇일까. 없는 돈으로 무엇을 해 줄 수는 없다. 무언가 먹고프다 한다면 자전거를 몰고 읍내로 달려가서 장만한 다음 낑낑대며 돌아올 수 있겠지. 지난 한 해 동안 튀김닭 한 번 피자 세 번 자전거배달을 했다. 이 멧골자락까지 날라다 주는 곳은 없으니까.

 오늘은 아침과 저녁으로 쑥부침개를 해 본다. 아침에 마련한 쑥부침개에는 밀가루가 좀 많이 들어간 듯해서 저녁에 하는 쑥부침개에는 밀가루보다 쑥을 훨씬 많이 넣는다. 아침보다 곱절을 더 뜯은 쑥으로 부침개를 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저녁에는 쑥부침개라기보다 쑥버무리튀김에 가깝다. 조금 더 바삭하게 되도록 해야 할 텐데, 아직 잘 안 된다. 불을 꽤 작게 해서 스텐팬으로 했는데, 불을 이보다 훨씬 작게 하고 기름을 더 적게 둘러서 해야 할까. 불크기는 알맞은데 기름을 살짝 더 둘러 볼까.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다가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옮긴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면 봄에는 봄내음이 물씬 나는 밥상을 차리는 데에 있지 않을까 살짝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직 나물을 잘 모른다. 하나씩 배워야 할 텐데, 책으로는 배울 수 없을 듯하다. 이 풀 저 풀 뜯어서 먹으며 몸으로 배워야 하겠지. 망초도 어찌저찌 먹어 보려 하다가, 텃밭을 고르며 하도 많이 나와서 망초를 데치거나 볶거나 어찌저찌 해서 먹어 보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사람들이 왜 망초를 잘 안 먹는지 알 만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질리게 금세 돋아나며 텃밭을 뒤덮으니까, 이 망초를 솎아내자고 얼마나 고달프겠나. 따지고 보면 쑥도 금세 퍼져서 돋곤 하는데, 쑥은 사람한테 향긋한 냄새이면서 봄맛을 돋우기 때문에 그닥 안 싫어할까. 그러나 텃밭 풀을 뽑고 흙을 갈아엎을 때에는 나 또한 쑥이고 뭐고 가리기 힘들더라. 꽃다지이건 뭐건 하나하나 따로 갈무리하기 벅차더라. 참말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갈면서.

 쑥부침개를 아침과 저녁으로 내리 하면서, 국에도 쑥을 꽤 넣어 본다. 국을 마시며 가만히 코를 킁킁거리면 쑥내가 난다. 이 쑥을 앞으로 며칠 더 즐길 수 있을는지, 또는 4월 내내 쑥을 즐길 만한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밥에도 쑥을 넣어 쑥밥을 해 볼 수 있을까. 옆지기한테 한 번 물어 보고 나서 쑥밥을 해 보고 싶다. 뜯을 사람도 적고 먹을 사람도 적으니, 온 논둑과 밭둑 쑥은 도맡아서 뜯고 도맡아서 밥거리로 마련한다. 쑥떡까지는 못할 듯싶지만, 쑥밥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쑥부침개는 옆지기한테 어줍잖게 내민 선물이라면, 쑥밥은 나한테 남우세스레 내미는 선물이 될까. 그러면 아이한테는 어떤 쑥을 내밀어 주면 좋으려나. (4344.4.13.물.ㅎㄲㅅㄱ)
 

 

아침이자 낮밥...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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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할머니, 그림 할머니


 그림 할머님을 네 식구가 찾아뵙는다. 옆지기와 첫째 아이와 옆지기 몸에서 자라는 둘째 아이까지 해서 네 식구가 찾아뵙는다. 그림 할머님으로 당신 고마운 삶을 일구는 박정희 님은 올해로 여든아홉 살이다. 우리 식구는 박정희 할머님이 여든다섯 나이일 때에 처음 뵈었고, 나는 일흔두 살 나이일 때부터 박정희 할머님을 알았다.

 여느 사람들은 그림 할머님인 박정희 님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아니, 안다기보다 이름을 들어 보기도 하고 이름을 못 들어 보기도 한다. 으레 독재자 박정희라는 사람을 떠올리지 그림 할머님을 떠올리지 못한다. 어떤 이는 미국사람 ‘모세 할머니(grandma Moses)’하고 박정희 할머님을 빗대기도 하지만, 박정희 할머님은 그대로 박정희 할머님이다.

 박정희 할머니를 낳아 기른 아버님은 박두성이라고 여쭌다. 박두성 님은 일제강점기에 ‘한글 점글’을 만들었다. 흔히 ‘루이 브라이’라 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박두성 님하고 견주기도 하지만, 박두성 님은 고스란히 박두성 님이다. 루이 브라이라는 사람이 ‘맨 먼저 점글을 만든’ 사람이지는 않다. 점글을 맨 먼저 만든 사람은 따로 있을 뿐 아니라, 루이 브라이 님은 장님이 더 손쉽게 쓸 뿐 아니라 널리 쓸 만한 ‘알파벳 점글’을 만든 사람이다. 박두성 님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장님이 손쉽게 널리 쓸 만한 ‘한글 점글’을 만든 사람이다.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리라. 그러나 한글 점글을 만든 사람을 아는 한국사람은 매우 적다. 더욱이 한글 손말을 빚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란 훨씬 힘들다. 나도 아직 ‘한글 손말’을 빚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누가 한글 점글을 만들었는지 이름을 알든 모르든 얼마나 대수로운가. 한글 점글을 찍을 줄 알거나 읽을 줄 알아야지, 한글 점글을 만든 사람 이름만 안대서 무엇이 대단한가.

 딸 넷 아들 하나한테 육아일기를 만들어 선물로 베푼 그림 할머님인 박정희 님을 떠올리거나 기리거나 모시는 일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만 안다 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며, 놀랍거나 대단하다고 말해 보아야 무슨 뜻이 있는가. 나는 나대로 내 아이를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일굴 수 있으면 된다. 할머님은 할머님대로 할머님 삶을 사랑하고 고맙게 여기면서 할머님 삶을 일구었다. 할머님을 낳아 기른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넋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사랑이 있기에 일제강점기라는 무시무시한 때에 한글 점글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이 있기에 다섯 아이에다가 여러 식구를 거느리면서도 그림그리기를 놓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이 있기에 여든아홉 나이에도 수채그림 교실을 마련해 당신 밥벌이로 삼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사람을 읽어야 한다. 사람을 읽는 사람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사랑을 읽는 사람은 삶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든 그림을 읽든, 또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매한가지이다. 글쓰기란 사람쓰기요 사랑쓰기이며 삶쓰기이다. 그림그리기란 사람그리기요 사랑그리기이며 삶그리기이다.

 내가 박정희 할머님을 좋아하면서 할머님 매무새를 사진으로 담아 보기도 하는 까닭을 든다면, 할머님 스스로 할머님 삶을 사랑하면서 이웃사람과 예쁜 이야기꽃을 피우기 때문이랄 수 있다. 나는 나대로 우리 시골집에서 네 식구 올망졸망 복닥이면서 더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찾고 싶다. 그러나 어제 하루도 나는 우리 아이한테 골을 많이 부렸다. 이쁘다 이쁘다 하고 말해야 하지만, 어쩌면 나는 나한테부터 이쁘다 이쁘다 하고 말을 못하니까 내 아이한테든 옆지기한테든 이쁘다 이쁘다 소리를 좀처럼 못하는 삶에 허덕이는지 모른다. 할머님 말마디를 띄엄띄엄 수첩에 옮겨적었다.


 “그렇게 굶어죽는 집에 시집을 가서 물지게도 못하고 밥도 못해요. ‘너는 그 상태로 시집 올 생각을 했니?’ 했는데, 나는 물지게하고 시집이 관계가 있는 줄 몰랐어. 딸 딸 딸 딸 낳으면서도 너무나 기뻐서, 너무나 예쁘고 말 잘 듣는다 말하면서 …… 나는 내가 하느님께 충성하는 만큼 이 아이들을 길렀는데, 적중했어요 …… 암만 생각해도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에요. 말을 안 들으면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인 거를 봐요 …… 우리 남편은 상상도 못할 철부지 남편이었어. 나 없으면 밥도 안 먹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래도, 부모님 모시고 나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끝났어요 …… 이거 어떡하다가, 밥을, 그림 가르치며 먹는 셈이잖아 …… 그림을 그리며 보내잖아, 벅찬 거야, 이 희열의 순간들. 그림 그리는 시간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 많은 하나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모자란데,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뭘 그리 감격해 해요?’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는 시간들이 소중하다고 …… 여기(화평동) 재개발 들어간다잖아. 문짝 팔아 먹고살 수는 없고, 남편이 병원 문 닫은 다음에 유치원을 할까 하다가,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어 힘이 없으니 아이를 들지를 못해 …… 내일 막내딸이 며느리를 얻어, 결혼식이야 …… 자기(막내딸)와 같이 예배 드리던 사람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 울어야지, 감사해서 ……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돼 … 요즘 사람들은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다들 미쳤어 …… 어느 분이 시험에 붙었어. 그래서 나한테 전화를 하지. 내가 아주 좋아할 줄 알고 …… 그림은 하나님의 솜씨를 그리워하면서 하는 수작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 어떤 이가 밤 아홉 시까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더니, ‘안 돼요, 할머니 노동 착취 하면 안 돼요.’ 하고 다 보내요. 그러니, 그림을 그리던 분이 다 깔깔대요 …… 할머니가 좋아해서 미쳐서 그림을 그리니까, 이분들(나한테 그림을 배우는 분들)도 다 미쳐서 그리는데,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식구들도 다 좋아한대요. 화백이라고 불러 줘서 좋고, 집에서도 그림을 좋다 해서 좋고 …… 새로 목사님이 오셨는데 젊은 분이야, 목사님이 내 손주뻘 나이네. 아이고 예쁘다 그림 그리고 싶네요 하니까, ‘할머니 그림 그리세요?’ 해서, 네 그림 그립니다 하고는, 처음에 한 시간, 그리고 일 주일 뒤에 한 시간 더 그리면 액자 끼워서 드릴게요 했어 …… 그런데, 한 시간 그림을 그린 뒤에 목사님이 보고 이 그림 나 달라고 그래. 그래서 일 주일 뒤에 다시 와서 더 그려야 한다고 하는데 ‘더 그릴 게 뭐 있어요?’, 화가가 더 그릴 게 있다면 그런 거지요. 그러고 일 주일 뒤에 다시 와서 한 시간 더 그리니까 또 달라고 그래. 그래, 내가 처음에 한 시간 일 주일 뒤에 한 시간 그러고 나서 액자 끼워서 준다고 했지요 …… 그기(그 그림이) 하나님 작품이니까 좋지, 내 작품이니까 좋지는 않거든. 사람이건 자연이건 풍경이건 꽃이건, 내가 아이들을 기를 때에 늘 그렇게 길렀어요. 한 번도 ‘너 때문에 내가 할 일을 못했다’라거나 하지 않았어요 …… 맨날 애들보고 이쁘다 이쁘다만 했어요 …… 난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 돈은 못 벌고 사랑만 벌어 온 거 같아 …… 겉으로 미사여구를 잔뜩 늘어놓아도 뱃속으로 아시는 사랑이 하나님이다.” (4344.4.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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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사람과 책읽기


 시골에 살면서 도시마실을 할 일이란 드물다. 도시로 볼일을 보러 갈 일이란 딱히 없다. 우리 식구가 도시로 마실을 간다면, 책방에 가거나 출판사에 가거나 무슨 강의에 가거나 아는 분을 만나러 간다. 롯데월드라든지 큰공원이라든지 육삼빌딩이라든지 운동경기장이라든지 갈 일이란 없다. 아이 어머니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꽉 막힌 도시에 한 시간 아닌 십 분만 있어도 숨이 막힌다고 느끼지만, 아이 아버지 또한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 있는 일이 즐겁거나 기쁘지 않다. 돌이켜보면, 도시에서 살아갈 때에는 술이라도 마셔서 머리가 해롱거리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싶다.

 시골에 살며 가끔 도시로 마실을 가기 때문에, 도시사람이 책을 얼마나 읽는지 살필 겨를이 없다. 어쩌다 한 번 도시로 마실을 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탄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도시사람’이 이곳에서 책을 얼마나 읽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드문드문 마주하는 모습이기는 하더라도, 나날이 ‘전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 모습’은 사라지거나 자취를 감추는구나 싶다. 어쩌다가 한두 사람 책을 손에 쥐는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참고서나 자기계발서나 토익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겉으로는 책읽기로 보이지만, 책이 아닌 교재를 외우는 사람이다.

 아이와 함께 도시마실을 하며 책을 펼치다가 생각에 잠긴다. 억지로 책을 조금 펼쳐 몇 쪽을 넘기고는 덮어 가방에 도로 넣는데,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책을 펼칠 겨를을 내기란 몹시 힘들다. 아이와 함께 움직이는 어버이는 책읽기하고는 아주 멀어지고야 만다. 아이 어버이는 책읽기에서 아이읽기로 새 삶을 보낸다.

 여느 도시사람이라면 책읽기로 마음읽기를 하기보다는 손전화로 놀이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즐길 때에 좋아하겠지. 자가용을 몰며 어디를 놀러다닌다든지, 맛집이나 찻집을 마실하는 삶이 즐겁겠지.

 요 며칠 손바닥 텃밭에서 풀을 뽑으며 놀았다. 일이라기보다 놀이라 할 만하다. 여느 농사꾼이 보자면 이 손바닥 텃밭으로 뭘 깨작거리느냐 싶을 만하니, 우리로서는 그냥 흙놀이일 뿐이다. 백 평 천 평은커녕 열 평조차 안 되는 손바닥 텃밭을 깨작거리니까 텃밭농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부끄럽다. 다만, 우리 식구한테는 이 조그마한 텃밭에서 거둘 푸성귀로도 즐거우니까 깨작질이기는 하나 텃밭놀이를 한다. 아버지가 텃밭놀이를 하는 동안 딸아이는 아주 스스럼없이 흙밭으로 따라와서 호미라든지 쟁기라든지 삽이라든지 쥐겠다며 알짱거린다. 삽이나 쟁기는 무거워서 못 들지만, 아버지가 드니까 저도 들고 싶어 한다. 아이한테는 호미가 삽과 같은데, 호미로는 성이 안 차는 듯하다. 아이한테도 일이라기보다는 놀이일 테니까.

 도시에서 도시사람으로 지내는 동안, 나와 옆지기는 아이한테 ‘책 읽히기’를 넘어 무언가 해 줄 만한 일거리나 놀이거리가 그리 마땅하지 않았다. 늘 하는 집일은 이렁저렁 보여주거나 시킬 만했다. 빨래라든지 걸레질이라든지 밥상차림이라든지, 이런 집일을 아이도 거뜬히 거든다. 그렇지만 집살림이 무엇이고 사람살림이 어떠한가를 느끼도록 돕기가 몹시 어렵다.

 흙일꾼으로 태어나거나 자라지 못한 어버이로서 흙일꾼다운 매무새를 아이한테 보여주거나 물려주기란 힘들다. 어버이부터 흙놀이를 천천히 받아들이면서, 바쁜 걸음이나 재촉하는 뜀박질이 아닌, 철을 몸으로 맞아들이는 걸음에 맞추어 흙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차근차근, 열 해나 스무 해를 두고 느긋하게 흙살림을 살펴 내 집살림을 아이가 알뜰살뜰 받아먹게끔 손길을 내밀어야지 싶다.

 흙놀이를 하고 나면, 손바닥 텃밭 깨작질이더라도 등허리가 쑤셔 아이한테 ‘책 읽히기’를 못하기 일쑤이다. 참 미안하다. 그러나, 아이한테 읽히는 책에 깃든 이야기란, 흙놀이를 하는 삶이니까. 봄꽃과 봄나무를 그려 넣은 책을 읽히지 않더라도, 아이 눈으로 봄꽃과 봄나무를 보도록 하면 되니까. 멧새와 파란하늘 나온 그림책을 굳이 읽히기보다, 멧새 소리를 텃밭에 맨발로 서서 듣고, 파란하늘을 호미질을 멈추고 허리를 두들기며 가만히 올려다보며 느끼면 되니까.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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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겹살과 책읽기


 딱히 고기를 즐겨먹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굳이 고기를 찾아서 먹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풀을 더 좋아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푸성귀만 먹어도 배부르기 때문은 아닙니다. 고기를 길러서 잡아 먹는 일이 어떠한가를 알기 때문은 아닙니다. 펄떡펄떡 숨쉬던 짐승을 잡아 죽인 다음 차려서 먹는 고기가 끔찍하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발굽병이 터지기에 고기를 멀리할 까닭은 없습니다. 발굽병이 어느새 수그러들었다기에 고기를 찾아서 먹어야 할 까닭 또한 없습니다. 늘 살아가는 터전에 걸맞게 늘 먹는 밥을 살핍니다. 늘 지내는 곳에서 어깨동무하는 이웃하고 늘 살가이 어우러지는 길을 헤아리면서 즐길 밥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고기를 먹기 쉽고, 풀을 먹기도 쉽습니다. 오늘날 도시에는 짐승을 가두어 살을 찌우는 짐승우리가 없으며, 푸성귀를 기르는 밭이 없습니다. 아니, 도시에는 사람들이 날마다 먹어야 하는 밥을 얻는 논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먹을거리는 도시로 들어가서 도시에서 사고팔려 도시에서 쓰입니다. 쌀이든 밀이든 물고기이든 뭍고기이든 푸성귀이든, 도시에서 스스로 길러서 즐기는 먹을거리란 한 가지도 없으나, 도시에서는 모든 먹을거리가 아주 값싸면서 흔합니다.

 도시에는 책방이 많습니다. 작은 책방이 수없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책 하나 사들이는 일이 아주 쉽습니다. 좋다 여기는 책이든 훌륭하다 섬기는 책이든, 도시에서는 아주 손쉽게 장만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도시사람은 책 좀 읽어 볼까 생각하며 얼마든지 책 하나 손쉽게 얻어서 읽습니다. 도시사람은 영화 좀 볼까 생각하며 언제라도 영화관에 홀가분하게 찾아가서 가볍게 봅니다. 피자 한 판을 사서 먹든, 짜장면을 시켜서 먹든, 세겹살을 구워서 먹든, 무엇이거나 언제라도 아무렇지 않게 즐기거나 누립니다.

 글은 쉽게 쓰기 마련이고, 그림은 쉽게 그리기 마련이며, 사진은 쉽게 찍기 마련입니다. 골머리를 썩히면서 쓰는 글이나 그리는 그림이나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삶을 그대로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며 사진으로 찍기 때문에,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와 사진찍기가 쉬울 뿐입니다. 꾸미거나 덧바를 수 없는 글쓰기요 그림그리기요 사진찍기일 뿐입니다.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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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책읽기


 돈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아이키우기가 되든 배움이 되든 책읽기가 되든 사랑이 되든, 돈을 갖고 움직일 때에는 어느 한 가지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기에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지는 않습니다. 돈이 있으니 책을 읽을 겨를이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기에 책을 못 사거나 못 빌리거나 못 읽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으니 책을 읽을 겨를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서 마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참으로 즐겁다 싶은 나날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서 마음이 나란히 없을 때에는 더없이 괴롭다 싶은 나날에 허덕일는지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나 마음이 있을 때에는, 책을 살 수 없다지만 빌리거나 얻어서 책을 읽습니다. 때로는 종이책 아닌 사람책을 읽고 자연책을 읽으며 삶책을 읽습니다. 사랑책을 펼치고 믿음책을 나누면서 일책과 놀이책을 어깨동무합니다.

 돈이 있으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책을 사더라도 책알맹이를 꾸밈없이 받아안거나 받아먹지 못합니다. 책은 돈으로 읽지 않을 뿐더러, 이름값이나 권력으로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지식으로도 읽지 못합니다. 책은 계급이나 신분으로도 읽지 못합니다. 책은 오로지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매무새 하나로 읽을 뿐입니다.

 마음이 있을 때에 읽는 책이 됩니다. 마음이 없을 때에는 그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책이 됩니다.

 물건으로서 책을 손에 쥘 수야 있겠지요. 노리개처럼 사람을 돈으로 부릴 수야 있겠지요. 돈이 많으니 넓디넓은 땅을 홀로 차지할 수 있겠지요. 돈이 많으니 아무 집안일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집이 으리으리하겠지요.

 내 마음은 나 스스로 일굽니다. 내 생각은 나 스스로 가다듬습니다. 내 말은 나 스스로 돌봅니다. 내 사랑은 나 스스로 가꿉니다. 내 믿음은 나 스스로 보듬습니다. 내 책은 나 스스로 읽을 뿐 아니라 내 책은 나 스스로 쓰고 엮습니다. (4344.4.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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