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사진기와 책읽기


 시골집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옆지기와 2007년 6월 5일부터 함께 살아온 지 네 해 만에 큰 살림이 하나 들어왔다. 새 피아노를 장만할 만큼 살림돈이 넉넉하지 않아 헌 피아노를 장만한다. 피아노를 장만한 돈은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식구한테 ‘딸아이를 생각해서 앞으로 잘 두라고 한 돈’을 깼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된다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장만하는 피아노가 아니라, 아이한테 퍽 좋은 놀잇감이 되는 피아노이기 때문에 우리 살림에 마지막 남은 목돈을 깼다.

 옆지기는 우리한테 무언가 목돈이 들어올 때에 ‘내가 바라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장만하라고 으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목돈을 벌었던 때에 이 목돈은 고스란히 살림살이를 장만하거나 아픈 집식구한테 들이는 돈으로 썼다. 내가 바라는 파노라마사진기는 몇 해 사이에 값이 껑충 올라, 이제는 삼백만 원쯤을 들여야 장만할 수 있는데, 이마저 물건이 없어서 살 수 없단다. 줄서서 기다리든 웃돈을 얹든 만지기 힘들단다.

 짐차에서 피아노를 내린다. 큰방 아이 놀잇감을 놓던 다용도장을 옆으로 밀고 피아노를 놓는다. 아직 피아노 자리를 잡지 않았으나, 아이는 걸상에 척 올라앉아 얼른 눌러 보고 싶다. 아이는 다른 곳에 마실을 갈 때에 피아노가 보이면 어김없이 피아노에 달라붙곤 한다. 우리가 아이한테 피아노를 딱히 가르치거나 보여준 적이 없는데, 용하게 피아노를 좋은 놀잇감으로 삼는다. 다른 어느 악기보다 피아노를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도 피아노를 좋아할까.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를 왜 좋아할까. 건반을 통통 누르면서 나는 다 다른 소리와 느낌을 얼마나 좋아할까.

 시골집으로 옮긴 지 한 해가 거의 다 된 오늘 들어온 피아노 앞에 앉아 본다. 건반을 몇 눌러 본다. 나도 일고여덟 살 때에 피아노학원에 다녔던 일을 아주 어렴풋하게 떠올린다. 아주 못 치지는 않았으나 또 잘 치지도 않았다. 집에서는 종이 건반을 바닥에 놓고 신나게 연습해서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칠 수 있게끔 애쓰곤 했다. 학원에 가서 건반을 눌러 볼 차례가 되던 때를 얼마나 기다렸으며, 내가 내 손가락을 놀려 건반을 퉁길 때에 나는 소리가 얼마나 좋고 부드러웠는지 모른다. 잘 쳐서가 아니라, 이런 피아노를 퉁길 수 있는 일이 기뻤다.

 지지난달부터 한 달 벌이가 겨우 백만 원이 되었다. 지지난달까지는 한 달 오십만 원 안팎 벌이로 어찌저찌 살림을 꾸렸다. 시골집에서는 달삯을 내지 않고, 얻은 집에서 살아가니까 밥값하고 보일러 기름값을 댈 수 있으면 살 만하다. 여기에 책을 사느라 들이는 값이 있다. 다달이 오십만 원으로는 퍽 빠듯하지만, 아주 못 살지는 않는다. 책을 내어 받는 글삯은 아직 없지만 올해에는 처음으로 글삯 벌이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꾼다. 이런 살림살이였기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한테 목돈을 얼마쯤 쥐어 주셨겠지.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이냥저냥 버틸 만한 살림이라면 따로 우리한테 도움돈을 줄 사람이 없으리라.

 한낮이 되어 옆지기가 피아노를 친다. 아이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춤을 추며 논다. 볕바라기를 하면서 맞은편 우리 도서관 유리문에 제 모습을 비추면서 논다. 옆지기가 피아노를 쉬면 피아노 쳐 달라고 마당에서 소리를 빽 지른다. 나는 고단한 몸을 쉬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사진기를 쥐고는 두 사람 모습을 이쪽에서 찍고 저쪽에서 찍는다.

 이제 옆지기는 마당으로 나가서 볕바라기를 함께 한다. 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오늘은 제법 발판을 구른다. 한두 번 앞으로 구르고, 한두 번 뒤로 구른다. 다리도 조금 길어졌고 다리힘도 조금 더 붙었는가 보다. 앞으로 하루하루 더 많이 구를 테고 더 많이 굴릴 수 있겠지. 볕바라기를 하는 옆지기하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다.

 나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써서 내가 좋아하는 헌책방이랑 인천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꿈을 꾸며 살았다. 이러한 꿈은 살림집을 시골로 옮기며 더는 못 품는다. 그저 내 손에 쥔 작고 가벼운 사진기로 내가 찍을 수 있는 모든 솜씨를 부려서 내 사랑을 담아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내 사진기가 훨씬 빼어나다 해서 우리 살붙이들 살아가는 모습을 더 사랑스럽게 찍을 수 있거나 더 즐겁게 찍을 수 있지는 않다. 시야율(화각 비율)이 떨어진들 어떠하고, 화소수가 낮으면 어떠한가. 대형사진기를 쓴대서 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얻지는 않는다.

 집식구들이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이 보금자리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며 아낄 사람이라고 느낀다. 서로서로 아끼면서 좋아하고 보듬으며 살아야 즐겁다고 느낀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고, 피아노를 배울 겨를이 없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이모저모 서툴게 살림을 꾸리면서 피아노까지 할 틈이 없다. 옆지기는 사진을 몇 장 찍을 수는 있으나 사진기를 옳게 다룰 줄은 모르며, 사진기를 배울 겨를이 없겠지. 아이는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무엇을 차근차근 배울까.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쌓을까.

 아이는 어린 나날부터 사진기를 놀잇감으로 삼으며 놀았는데, 이제부터는 피아노를 놀잇감으로 삼으며 놀겠지. (4344.4.2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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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살 아이 새벽맞이와 책읽기


 아버지는 네 시 반에 일어나서 글쓰기를 하려 한다. 네 살 아이는 다섯 시 반에 칭얼거리다가 일어난다. 아이가 엊저녁에 일찍 잤다면, 아주 일찍, 그러니까 다섯 시나 여섯 시나 일곱 시쯤 잠들어 밤새 고이 자다가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난다면 토닥토닥 달래며 함께 놀아야겠지 하고 느낀다. 그렇지만 어제 하루 졸리면서 낮잠을 꾸욱 참고 저녁까지 맞이하면서 저녁에도 일찍 잠들지 않고 겨우겨우 잠들다가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달라붙으면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만다.

 아이 어머니는 큰방으로 나와서 아이를 옆에 누우라 한다. 아이는 어머니 곁에 눕지 않는다. 큰방 바닥에 널브러진 그림책 하나를 펼친다. 어제 아이가 보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 놓은 그림책이다. 아직 어스름이 깔려 어두운데 저렇게 책을 보아도 되나 걱정스러워 불을 켜고 싶지만 불을 켜지 않는다. 조금 기다리면, 1분 2분 3분이 지나며 먼동이 트니까, 차츰 밝는 바깥 빛살을 받아들이도록 해 주자.

 아이는 그림책을 다 보고는 아버지 옆으로 와서 무릎에 머리를 받치고 누웠다가 방바닥에 모로 누웠다가 한다. 아이 어머니가 일어나 아이를 부른다. 둘이 옆방으로 들어간다. 아이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한참 듣는다.

 한숨을 돌리고 아이한테 간다. 아이는 눈을 뜬 채 누웠다. 일어나고는 싶은데 몸이 힘들고, 그렇지만 잠을 자기는 싫은가 보다. 아이 볼에 아버지 볼을 대고 살며시 말을 건다. 예쁜 돼지 조금 더 코 자고 이따가 쑥 뜯으러 가자고, 학교에 가서 언니 오빠 들하고 놀려면 조금 더 코 자야지, 안 그러면 몸이 힘들어서 잘 못 논다고, 아버지는 쌀 씻고 더 일을 할 테니까 벼리는 코 자고 이따가 놀자고, 소곤소곤 말을 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 되는 사람이 젊을 적, 밤 열두 시나 한 시에 잠들더라도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고, 늦게 자더라도 일찍 일어나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아이는 늦게 잠들었어도 금세 몸이 개운해지는지 모른다. 어버이로서 더 기운을 차리고 새삼 기지개를 켜면서 새벽 일찍 일어나려는 아이를 반가이 맞이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이는 아직 아이일 테니까, 새벽 일찍 일어났으면 낮잠을 자 주지 않겠나. 어쩌면 오늘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도 낮잠을 다시 거르며 저녁까지 칭얼댈는지 모르리라. 그래도 어버이라면 아이를 더 예쁘게 바라보며 더 고운 말씨로 따스히 토닥이며 얼싸안아야 하지 않겠나.

 아이를 다시 들여다본다. 발로 바닥을 통통 차더니 이내 잦아든다. 눈을 살며시 감았다. 조용히 잠들어 주려나 보다. 고맙다, 예쁜 아이야. (4344.4.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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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살 아이 호미질과 책읽기


 씨감자를 몇 심는다. 오늘 일요일을 맞이해 음성 읍내에서 열리는 장마당에서 씨감자를 아직 판다면, 씨감자를 더 사서 텃밭 골을 더 만들어 감자를 심어야지. 골 하나라고 하기에도 멋쩍은 골을 하나 만들어서 얼렁뚱땅 감자를 심는데, 네 살 아이도 일을 거들겠다며 호미를 들고 나선다. 아직 풀캐기라든지 고랑 만들기를 할 줄은 모르지만, 호미를 마치 곡괭이처럼 들고 땅을 콕콕 찍는다. 그래,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이런 놀이나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지. 제아무리 아파트나 번쩍거리는 도심지가 아닌 고즈넉한 골목동네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골목이든 아파트이든 똑같이 도시가 아니겠니. 도시에서는 너한테 호미질을 일러 줄 수 없구나. 그림책으로만 보여주거나 사진 몇 점으로 보여줄 뿐이지.

 호미질을, 그러니까 그림책을 백 번 천 번 본다 한들 익힐 수 있는 호미질이겠니. 그림책 한 번 안 보았어도 호미 한 번 단단히 움켜쥐고 땅을 콕콕 파 보아야 비로소 무언가를 알 수 있지.

 네 아버지는 예쁜 그림책을 싫어하지 않는다. 네 아버지도 예쁘장한 그림책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예쁘기만 하고 알맹이는 없는 그림책은 반갑지 않다. 지식으로만 읽는 그림책은 내키지 않고, 재미난 웃음이 나오도록 이끌려 하는 그림책 또한 반갑지 않다. 땀흘리는 일은 땀흘리며 일하는 보람이 있기 마련인데, 요즈음 사람들이 스스로 땀흘리며 살아가려 하지 않는대서 땀흘리는 일을 억지로 그럴듯하게 껍데기를 씌우거나 재미난 놀잇거리라도 되는 듯이 꾸밀 수는 없어.

 빨래를 빨래놀이처럼 즐길 수 있겠지. 그러나 빨래는 빨래야. 걸레질은 걸레질이야. 걸레빨이는 걸레빨이야. 비질은 비질이지. 쌀을 씻어 티끌을 떨구는 일도 쌀씻기야. 나는 맛나구려 하고 보여주는 요리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맛나구려 하는 밥거리를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어 얻는가를 함께 밝히지 못한다면, 하나도 맛나구려 하는 밥거리라고 느끼지 못한다.

 네 어머니는 네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곧 네 할머니가 마련해 준 김치를 맛있게 잘 먹는다. 네 할머니가 밭에서 손수 길러 거둔 배추로 마련한 김치이든 저잣거리에서 사들인 배추로 마련한 김치이든, 네 할머니 김치를 네 어머니가 맛나게 먹는다. 김치맛도 김치맛일 테고, 할머니 김치에는 이 김치를 마련하는 손길이며 땀방울이며 깃들었으니까.

 너는 세 살 아이일 때부터 호미질을 했다. 네 동생은 돌쟁이 무렵부터 호미질을 하겠지. 너는 네 아버지가 쓰는 삽이나 괭이를 들어 보겠다며 낑낑거린다. 네 동생은 돌쟁이 무렵부터 삽이나 괭이를 만지작거리겠지. 너는 요 조그마한 텃밭에서 노닥거릴 때이건 숲속을 거닐 때이건 신에 흘러든 모래알을 느낀다. 1분을 채 걷지 않았어도 시골 흙길에서는 신에 모래일이 깃든다. 도시에서는 여러 시간을 걸어도 신에 모래알이 깃들 까닭이 없다. 그저 먼지로 까맣게 될 뿐이다.

 모든 사람 삶은 흙에서 비롯한다. 어마어마하게 높이 세우는 건물이나 아파트이건, 사람들이 읽는 책이건,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이건, 어느 하나 흙에서 안 비롯할 수 없다. 사람들이 날마다 먹는 밥이건 빵이건 케익이건 과자이건 무엇이건 흙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내기들은 흙을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거나 아낄 줄을 모른다. 우리 살림집이 도시에 깃들 때에는 우리 살림집 또한 흙을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기 힘들다. 흙을 밟고 들어서는 도시이니까. 흙을 울궈먹으며 뱃살이 디룩디룩해지는 도시이니까. 흙을 멀리해야 깨끗해지는 도시이니까.

 모든 책은 흙에서 비롯한다. 모든 책은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서 비롯한다. 모든 책은 흙에서 먹을거리를 얻어 목숨을 잇는 사람들이 종이에 글을 써서 비롯한다. 어제와 그제는 모처럼 네 살 너한테 그림책을 몇 권 읽어 주었으나, 요사이는 네 아버지가 참 고단해서 다른 날에는 그림책을 거의 못 읽어 주었다. 그래도 어제 낮에는 텃밭에서 호미질 놀이를 했으니, 우리는 어제 하루 흙책을 읽은 셈이다. 모레와 글피에도 흙책을 읽도록 오늘 장마당에서 씨감자랑 푸성귀 씨앗을 실컷 장만하자. (4344.4.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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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하나씩 살피며 산다


 한국땅 어버이들은 언제부터 어린이책을 전집으로 왜 사는가 궁금합니다. 한국땅 출판사들은 언제부터 어린이책을 전집으로 만들어 버릇하며 파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나라만 전집책이 이토록 많은지 궁금합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전집’이라는 이름이라든지 ‘전집’과 같은 책꼴은 이웃한 일본에서 태어났겠지요. 일본에서 일본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만든 전집을 몰래 베끼거나 훔쳐서 한국 어린이한테 팔던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는지 모릅니다.

 ‘세계명작’이라든지 ‘세계문학전집(또는 세계문학선집)’이라든지 ‘어린이명작동화’ 같은 이름은 죄다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저학년문고’나 ‘고학년문고’라는 이름 또한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사람은 어린이책을 전집으로 얼렁뚱땅 묶어 얼렁뚱땅 팔아치우지는 않습니다. 일본에도 퍽 덜 떨어진 전집책이 있을 테지만, 한국에서 옮긴 일본 전집책은 매우 훌륭합니다. 오랫동안 많은 돈과 많은 품을 들여 찬찬히 일군 아름다운 일본 전집책이기 일쑤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본 전집책을 요리조리 가위질하거나 베껴서 수십 해 동안 팔아먹었습니다.

 요즈음은 도둑질을 섣불리 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작권 계약을 해서 일본 전집을 번역해서 내곤 합니다. 드문드문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 전집책을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느 전집책이든, 나라밖에서는 ‘이 전집책만 보면 다른 책은 애써 안 보아도 된다’고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드는 전집책’이란, ‘낱권 하나만 보아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깊이 살필 수 없다’고 느껴서 만드는 책입니다. 과학동화이든 수학그림책이든, 낱권 하나가 아니라 열 권이나 스무 권이나 서른 권이나 마흔 권으로 잘게 나누어 묶으면서, 아이들이 차근차근 실타래와 고리를 잇는 동안 시나브로 과학이나 수학 밑바탕을 깨닫거나 들여다보도록 이끌려고 합니다.

 곧, ‘나라밖 전집책’은 ‘낱권책이 하나하나 모여 열 권이나 서른 권이나 쉰 권으로 이루어진 책뭉치’라 할 수 있어요. 아주 두툼하다 싶도록 커다란 ‘낱권책 하나’라 할 만합니다.

 좋은 전집책이든 좋은 낱권책이든, 이러한 책을 내놓은 출판사 이름으로 책을 살피거나 살 수는 없습니다. 퍽 드물지만, 아주 훌륭한 책길을 꿋꿋하고 씩씩하게 걷는 곳이 있습니다만, 모든 출판사가 모든 책을 알알이 여민다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내 아이이든 이웃집 아이이든 모든 책을 똑같이 좋아하거나 즐기지는 않아요. 더 좋아하는 책이 있고, 덜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 출판사를 아주 단단히 믿더라도, 한 출판사 책에 매이지 말고, 아이 눈길이 닿으며 사랑스러운 마음밥을 얻을 책을 골라야 합니다.

 이렇게 책을 고르자면, 아이한테 좋을 책을 살핀다는 생각보다는, 먼저 어른인 나부터 내가 어린이라면 어떠한 책을 즐겁게 100번이나 1000번쯤 되읽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른인 내 눈썰미로 살피는 책이 아니라, 어른인 내가 어린이라고 여기면서 나 스스로 이 책을 몇 번이나 되읽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장만할 만한 좋은 어린이책은 책방(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에 선 채로 다 읽고 나서 장만할 만한 책이어야 합니다. 책방에 선 채로 다 읽었으니 안 사도 된다 여기면, 이러한 책은 굳이 살 까닭이 없습니다. 책방에 선 채로 다 읽었기에 사야겠다고 느낄 만한 책을 사야 합니다.

 어른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책도 열 번 스무 번 되읽을 만하다 싶은 책을 찾아서 장만해야 아름답습니다. 되읽을 값어치가 없다고 느끼면, 나로서는 그닥 아름다울 책이 못 됩니다. 되읽을 값어치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우리 집에 오래도록 꽂아 둘 책으로 무엇이 좋을까 하고 곱씹어야 합니다.

 어떠한 책이든 ‘출판사나 이름값이나 베스트셀러이냐 아니냐’를 살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책이든 ‘우리 집 책시렁에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쯤 넉넉히 꽂힐’ 책이라고 생각하며 살펴야 합니다. 우리 집을 자주 옮긴다고 한다면, 이삿짐을 싸고 묶고 하면서 하나도 짐덩어리로 느끼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고 바라보는 책을 장만해야 합니다.

 아이도 어버이도 ‘아주 좋은 전집책이나 낱권책’이 아니라, ‘참으로 아름답고 좋구나 하고 느낄 책’ 하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어야지 싶습니다. 좋은 책을 하나하나 찾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냄비 하나 아무렇게나 장만하지 않습니다. 냄비 하나를 한두 해만 쓰고 버리겠습니까. 열 해뿐 아니라 스무 해나 서른 해를 즐겁게 쓸 좋은 냄비를 장만해야지요. 자전거 한 대를 서너 해쯤 타다가 내다 버릴 자전거로 장만하겠습니까. 자전거 한 대는 내 아이가 즐겁게 탔다가 동생이나 이웃한테 예쁘게 물려줄 만큼 튼튼하고 좋은 녀석으로 장만해야지요. 책상도 밥상도 걸상도 매한가지예요. 두고두고 쓸 물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책꽂이 또한 쉰 해나 백 해를 버틸 튼튼하며 좋은 책꽂이로 갖추어야 합니다.

 나는 내 아이를 한두 해만 사랑하고 떠나보낼 마음이 아닙니다. 나는 내 아이를 예순 해 여든 해 고이 지켜보면서 늙고 싶습니다. 예순 해 여든 해를 고이 지켜보다가 아이보다 일찍 눈을 감고 싶기에, 내 아이가 마주할 책 하나란 오래오래 아이 마음밭에서 싱그러이 꽃을 피우는 어여쁜 책이 될 수 있게끔 찬찬히 살펴서 고릅니다. (4344.4.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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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서너 살 아이와 영어 그림책 읽기


 오늘날 숱한 두서너 살 아이들이 일찍부터 영어 그림책을 읽으며 영어를 배운다는 이야기를 얼핏설핏 들으면서 우리 집 아이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

 우리 집 아이는 돌이 되기 앞서부터 영어 그림책을 보았다. 영어로 된 그림책뿐 아니라 일본말로 된 그림책을 보았다. 일본말로 된 그림책에다가 독일말이나 프랑스말로 된 그림책을 함께 보았다. 때로는 러시아말이나 스페인말로 된 그림책을 나란히 보았다.

 아이가 어릴 적부터 글을 깨우치도록 무언가 가르칠 생각에서 여러 가지 그림책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직 우리 말로 옮겨지지 못한 좋은 나라밖 그림책이라면 헌책방에서 마주할 때에 즐겁게 장만해서 보여주었다.

 때로는 한국에 옮겨진 그림책을 굳이 나라밖 책으로 보여주곤 한다. 한국말로 옮겨진 그림책은 빛느낌이 너무 안 좋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바빠빠》를 들 수 있다. 한국에는 1994년에 처음으로 옮겨졌고, 우리 집에는 2007년 29쇄가 있다. 그런데 한국판 《바바빠빠》는 빛느낌이 끔찍하도록 엉터리이다. 우리 집에는 일본에서 나온 《ベ-ベペペ》도 있는데, 일본판은 1972년에 처음 나왔고 2003년에 자그마치 203쇄를 찍는데, 바바빠빠 빛느낌이 잘 살았다. 한국판 바바빠빠는 시뻘건 빛깔인데, 바바빠빠는 빨갱이가 아니다. 분홍이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책만 빨강이일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바바빠빠 빛깔이 바뀌는지 모른다. 어느 때에는 붉음이인 바바빠빠요 어느 때에는 짙은 분홍이인 바바빠빠인 듯하다. 어쩜 이렇게 책마다 바바빠빠 빛깔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한국 그림책을 그닥 믿지 못한다. 2007년에 옮겨진 《짝꿍 바꿔 주세요》는 일본에서 1991년에 나왔던 책을 옮겼는데, 우리 집에는 일본판을 퍽 일찍부터 헌책방에서 만나서 즐겁게 보다가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아이한테 자주 읽어 주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말을 잘 하기에 일본말을 번역하며 읽어 주지는 못한다. 그림을 보면서 이 대목에서는 무슨 이야기일까 헤아리면서 읽어 주었다.

 한국판 《짝꿍 바꿔 주세요》 또한 한국판 《바바빠빠》와 매한가지로 빛느낌이 썩 나쁘다. 일본 그림책 빛느낌은 매우 보드라우면서 밝다. 한국 그림책 빛느낌은 퍽 어두우면서 거칠다. 왜 이렇게 될까. 왜 이토록 달라질까.

 예전에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일하며 이태수 님 그림책을 일본말로 옮겨서 내던 일을 떠올려 본다. 나는 영업부 직원이니 편집일에 끼어들거나 어찌저찌 하지 않는다. 책이 나오면 신나게 책방마실 하면서 책팔이를 할 뿐이다. 일본에서 내놓은 《우리 순이 어디 가니》와 《심심해서 그랬어》를 보는데, 한국에서 나온 그림책보다 빛느낌이 훨씬 보드라우면서 해맑았을 뿐 아니라, 구석구석 더욱 또렷했다. 《심심해서 그랬어》는 주인공 모습이 책 가운데에 씹히지 않도록 0.5센티미터를 옆으로 살짝 옮겨 놓기까지 했다. 제본 또한 일본책이 훨씬 훌륭했고.

 나는 우리 아이한테 나라밖 그림책을 애써 읽힐 마음이 없다. 우리 아이가 어린 나이부터 영어 그림책을 읽으며 영어를 배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그림책다운 그림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아이는 책다운 책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은 책이 좋은 제본과 땀방울에 따라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 스스로 나중에 영어를 배우고 싶으면 언제라도 배우라지. 우리 집에는 수많은 한국말사전과 영어사전과 영어책이 골고루 있으니까. 아버지로서 아이한테 따로 영어를 가르칠 마음이 없다. 영어이든 뭐든 스스로 배우고 싶다고 느껴 스스로 찾아나서야 배울 수 있다. (4344.4.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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