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9 물구나무서기



  우리는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네 곳을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새녘이나 하늬녘이라 하든, 이곳은 다른 데에서 보면 마녘이나 높녘이 됩니다. 새녘이라 할 곳은 따로 없고, 높녘이라 할 곳도 따로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됩니다.


  한복판이란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여기’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리가 한복판입니다. 왜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되는가’ 하면, 참말 어느 곳이든 모두 한복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없습니다. 위와 아래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늘 ‘나’를 한복판에 놓고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서 새와 하늬가 갈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나눕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곳도 알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서는 북반구와 남반구를 말하는데, 북반구라고 해서 똑바로 서지 않고, 남반구라고 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북반구이든 남반구이든, 또 적도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똑바로 서’고 ‘한복판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섬이 마녘에 있는 데가 아닙니다. 제주섬으로 치면 제주섬이 한복판입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다른 시골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길에서는 언제나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가지 않는다면, 움직임이 생길 수 없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오롯한 하나’에서 ‘다른 오롯한 하나’로 갑니다.


  해에는 위나 아래가 있을까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별에 위나 아래가 있을까 헤아릴 노릇입니다. 해나 별이나 지구에서 위나 아래를 따지려 한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온누리에서 위아래를 따질 적에는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위’를 말하면 위는 언제나 곧바로 ‘아래’가 되고, ‘아래’를 말하면 아래는 늘 막바로 ‘위’가 됩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발은 하늘을 밟습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여느 때에는 땅을 두 발로 밟는 동안 두 손으로 하늘을 짚었구나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하늘을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사는 숨결입니다. 온별누리(은하계) 하늘을 늘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살아요.


  우주선을 타면 알 테지만, 우주선에서는 위나 아래가 없습니다. 거꾸로 나는 우주선은 없습니다. 늘 날아야 할 자리로 날 뿐입니다. 사람 몸에는 손과 발이 있는데, 왜 손과 발이 있느냐 하면, 손은 언제나 하늘을 짚어야 하고, 발은 언제나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 몸에 깃든 넋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없겠지요. 넋이 생각을 지어서 심는 마음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마음에 왼쪽이나 오른쪽이 있을까요? 사랑이나 꿈에 위아래가 있을까요? 넋이나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을 크기로 따질 수 있을까요? 큰 마음이나 작은 마음이 있을까요?


  별에는 ‘별힘(당김힘, 중력)’이 있습니다. 별힘은 무엇인가 하면, 별이 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어느 별에서든 몸이 살려면 발이 있어서 땅을 밟아야 합니다. 어느 별에서든 ‘한복판’이 있기 마련이고, 한복판이 한 곳 따로 있기에, 이곳을 바탕으로 위아래나 옆이나 새·하늬·마·높 같은 자리를 따집니다.


  온별누리에는 ‘온별누리힘’, 다시 말하자면 ‘온힘’이나 ‘누리힘’이 있습니다. 온힘이나 누리힘에는 위아래나 크고작음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언제나 모든 자리에서 새로운 기운이 됩니다. 온별누리에서는 한복판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한복판입니다. 그러니 ‘별힘(당김힘, 중력)’이 없어서 우리를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모든 곳(온 곳)이 ‘모든 것(온 것)’이 됩니다.


  별을 바라볼 적에 삶을 배우고, 별누리를 살필 적에 넋을 살피며, 온별누리를 헤아릴 적에 사랑을 헤아립니다. 삶에는 바탕이 되는 한복판이 있습니다. 넋에는 위아래나 크기가 없습니다. 사랑은 가없이 넉넉하면서 끝없이 포근합니다. 별(지구별)에서는 따로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하지만, 이 별에서 몸이라는 옷을 살며시 벗고 온별누리로 나아가는 숨결이 되면, 늘 홀가분하게 ‘고요춤’을 추는 새로운 밤무지개빛이 됩니다. 4348.3.22.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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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8

 

 한자말을 쓰지 말자?

 

  나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나는 언제나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말로 녹아든 ‘한자로 지은 낱말’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낱말’이나 ‘영어에서 온 낱말’이라면, 모두 똑같이 한국말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국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게 씁니다. 다만, ‘한자로 지은 티’가 풀풀 나는 한자말은 굳이 안 씁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내 온 사랑을 듬뿍 담아서 즐겁게 쓰면서 기쁘게 삶을 노래하도록 생각을 북돋우는 한국말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낱말을 골라서 쓰든, 우리는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으면 돼요. 우리는 서로 마음이랑 마음으로 아끼고 보듬으며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돼요.


  눈을 감고 바라보셔요. 무엇이 보일까요? 눈을 감은 눈으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두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본다면, 네 얼굴이나 키나 몸짓은 하나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두 눈을 감고 서로 마주한다면, 네가 아무리 부자이거나 가난뱅이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대목도 처음부터 아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을 나눌 적에도 언제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자말을 덕지덕지 넣는 말투’인가 ‘토박이말이라고 하는 말로 꾸민 말투’인가를 살필 일은 없습니다. 어떤 낱말을 골라서 쓰든 낱말 하나는 그 사람 삶이고 몸짓입니다. 그 사람 스스로 삶하고 몸짓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서야 그 사람 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자말을 쓰지 않는 일을 하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찾아서 즐겁고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아이들하고 아름답게 나눌 말을 즐겁게 헤아려 보셔요. 시골 할매랑 할배하고 사랑스레 주고받을 말을 기쁘게 헤아려 보셔요. 우리 이웃하고 나눌 말을 가만히 살펴요. 내 마음이 네 마음에 닿고, 네 마음이 내 마음에 닿을, 마음꽃을 피울 말을 생각해서 써요. 그러면 됩니다. 4348.10.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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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48] 배롱꽃빛 옷

 

  곁님이 배움마실을 다녀오면서 내 옷을 한 벌 선물해 줍니다. 반소매 웃옷입니다. 여덟 살 큰아이가 이 옷을 보더니 “아버지, 이 옷 분홍이야?” 하고 묻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니.” 하고 말합니다. “그럼?” 하고 다시 묻는 아이한테 “배롱꽃빛이야.”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아, 우리 마을에 있는 배롱나무 꽃!” 하고, 이내 “나도 알아 배롱꽃빛! 배롱꽃빛 좋아. 그렇구나. 분홍은 배롱꽃빛이로구나.” 하고 덧붙입니다. 그래서 “아니야. 배롱꽃빛을 분홍이라고도 하지.” 하고 말을 바로잡아 줍니다. 선물받은 새 반소매옷을 입고 장흥으로 바깥일을 보러 나옵니다. 장흥고등학교 푸름이하고 장흥 이웃님이 쉰 분쯤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옵니다. 이곳에 저처럼 ‘배롱꽃빛’이 나는 웃옷을 입은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새삼스레 웃으면서 “저기, 배롱꽃빛 옷을 입으신 분?” 하고 살며시 말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못 알아들으십니다. 다시 “저기 분홍 옷 입으신 분이요.” 하고 말하니 곧 알아차리십니다. 장흥이나 고흥에서는 흔히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는 배롱나무인데, ‘배롱꽃 + 빛’인 ‘배롱꽃빛’이라는 빛깔말이 아직 낯설 만하겠지요. 진달래꽃빛하고 배롱꽃빛이라는 말마디를, ‘꽃말’을, 시골말을, 숲말을 고요히 읊습니다. 4348.10.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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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750) 역설적


 역설적 표현 → 역설 표현 / 뒤집기 / 뒤집는 말

 역설적으로 우리말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든다

→ 거꾸로 우리말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든다

→ 외려 우리말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든다


  ‘역설적(逆說的)’은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을 뜻하고, ‘역설(逆說)’은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을 뜻한다고 합니다. “반대되는 말”이기에 ‘역설’인데, 한자를 새기면 “거스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은 “역설적인 발상”이라든지 “역설적 관점”이라든지 “역설적인 관계”이라든지 “역설적인 논리”처럼 쓰곤 합니다. ‘-的’을 넣어서 앞뒤에 한자말이 오지요. 흔한 일본 말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일본 말투를 가만히 살피면 ‘역발상·역관점·역관계·역논리’처럼 쓸 수도 있고, 더러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 ‘역설적’에서 ‘說’이나 ‘的’이 없이도 얼마든지 뜻을 펼칩니다.


  역발상이나 역논리란 무엇일까요? 바로 “발상을 뒤집는다”거나 “논리를 뒤집는다”는 소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말로는 ‘뒤집기’인 셈이지요.


  “뒤집어서 말하자면”이라든지 “뒤집어서 보자면”이라든지 “뒤집어서 살피자면”처럼 쓸 만합니다. “뒤집힌 관계”라든지 “뒤집은 사이”처럼 쓸 수 있고, “뒤집어 본 눈길”이나 “뒤집어 본 생각”처럼 쓸 만합니다.


  글 첫머리에서는 ‘거꾸로’나 ‘이와 달리’를 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외려·오히려·되레·도리어’를 넣을 수 있지요. 4348.9.29.불.ㅅㄴㄹ



역설적으로 왜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그것이 천하고 추하다는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 거꾸로 왜 우리가 어떤 노래를 듣고 그 노래가 덜떨어지고 못나다며 못마땅해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도 재미있다

→ 뒤집어서 ……

→ 이와 달리 ……

《서우석-현대음악의 이해를 위하여》(문장사,1980) 36쪽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 비평은 우리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한다

→ 거꾸로 말해서 그 비평은 우리가 실패하였음을 뜻한다

→ 뒤집어 말해서 ……

 달리 말해서 ……

→ 그러니까 / 곧 ……

→ 오히려 / 외려 ……

《H.웨이신저·N.롭센즈/임한성 옮김-불완전한 인간》(청하,1986) 24쪽


역설적이긴 하지만 책을 거의 읽지 않는 까닭에

 역설이긴 하지만 책을 거의 읽지 않는 까닭에

 놀라운 말이지만 ……

→ 놀랍게도 ……

→ 우스운 말이지만 ……

→ 우습게도 ……

→ 어이없게도 ……

 오히려 ……

《베네트 서프/정혜진 옮김-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씨앗을뿌리는사람,2004) 56쪽


역설적이게도 서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가 서점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 거꾸로 서점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가 서점을 해야겠다고 크게 다짐을 한 까닭이 되었다

→ 도리어 / 되레 ……

→ 오히려 / 외려 ……

→ 그러니까 / 곧 ……

《백창화·김병록-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2015) 11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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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61) -의 : 주관성의 반대말


객관성은 주관성의 반대말이야

→ 객관성은 주관성 반대말이야

→ 객관성은 주관성하고 반대인 말이야

→ 객관성은 주관성하고 맞서는 말이야

《장마르크 레비르블롱/문박엘리 옮김-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휴머니스트,2015) 83쪽


  ‘반대(反對)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 반의어”로 풀이합니다. ‘반의어(反義語)’는 “서로 정반대되는 관계에 있는 말”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맞서’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애써 ‘반의어’로 쓰기보다는 “맞서는 말”로 쓰거나 ‘맞섬말’로 줄여서 쓸 수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서 숙박 문의가 들어왔다

→ 낯선 사람들에게서 숙박 문의가 들어왔다

→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잘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백창화·김병록-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2015) 31쪽


  ‘생면부지(生面不知)’는 “만난 적 없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한자말을 쓸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는 “생면부지‘인’ 사람들”처럼 ‘-인’을 붙입니다. 구태여 이 한자말을 안 쓰려 한다면 “낯선 사람들”이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씁니다. “숙박(宿泊) 문의(問議)가 들어왔다”는 “잘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나 “하룻밤 머물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로 손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된 일이 이용자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이니

→ 우리가 하는 일이 이용자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이니

→ 우리는 손님들한테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을 하니

 우리는 사람들한테 좋은 책을 알리는 일을 하니

《백창화·김병록-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2015) 35쪽


  “우리의 주(主)된 일”은 글 얼개가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주된 일”처럼 적어야 글 얼개가 바를 테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만 적어도 ‘주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용자(利用者)’는 ‘손님’이나 ‘사람’으로 손보고, “소개(紹介)하는 것이니”는 “알리는 일이니”로 손볼 만합니다.


책이란 삶의 다른 말이다

→ 책이란 삶을 달리 일컫는 말이다

→ 책이란 삶하고 같은 말이다

→ 책을 달리 말하면 삶이다

→ 책이란 삶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백창화·김병록-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2015) 275쪽


  ‘-의’를 넣으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삶의 다른 말”이 아니라 “삶을 달리 일컫는 말”이나 “삶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책과 삶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또렷하게 밝혀서 적어야지요. 글 얼개를 손질해서 “책을 달리 말하면 삶이다”라든지 “책이란 삶하고 같은 말이다”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4348.9.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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