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6 무엇



  이름을 모르기에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니, 무엇을 알려고 마음을 기울여 바라봅니다. 그런데,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무엇을 바라보는지조차 모릅니다. 무엇인지 모르기에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마저 모릅니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무엇을 찾고자 만나고자 알고자 이루고자 마음을 기울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가 모르기에 볼 수조차 없던 무엇을 처음으로 봅니다. 처음으로 보면서 이 새로움에 놀라 그만 아무 말이 안 나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가만히 ‘새로운 무엇’을 바라보다가 첫 마디가 터져나옵니다. 이 첫 마디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새로운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온누리 모든 말은 이렇게 태어납니다. 처음 만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 무엇이 참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한 끝에 비로소 무엇인지 마음으로 느끼고는, 이 무엇한테 ‘첫 이름’을 ‘첫 말’로 붙여서 부릅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에 아직 모릅니다. ‘무엇’이라는 말로밖에는 나타낼 길이 없으니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직 모르기에 앞으로 알려고 합니다. 아직 모르기에 이 새로운 것을 알아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아직 알지 못하고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는 것에 내가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 내 기운을 실으려 합니다. 내 손길을 타고 내 기운이 실린 ‘무엇’은 비로소 내 둘레를 이루는 수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되고, 꽃이며 풀이며 나무이며 흙이며 해이며 별이며 바람이며 사람이며 사랑이며, 맨 처음(꽃등)에는 ‘무엇’이었을 뿐이지만 ‘사람이 붙인 이름’을 얻으면서 바야흐로 아름다운 숨결로 다시 태어납니다.


  ‘무엇이라는 것’이 ‘무엇’으로만 있을 적에는 아무 뜻이 없고 넋도 숨도 없지만, 이 ‘무엇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남지 않고 ‘내가 붙인 이름’으로 새롭게 부를 수 있을 때부터, 새로운 뜻과 넋과 숨이 흐릅니다.


  내가 바라보며 알아채고 마주하면서 손을 뻗어 만질 때에 꽃입니다. 내가 들여다보며 알아내고 맞이하면서 온몸으로 껴안을 때에 나무입니다. 내가 찾아보며 알아보고 받아들이면서 온마음으로 사랑할 때에 사람입니다.


  무엇 하나 없던 고요누리에, 무엇이든 새롭게 깃듭니다. 무엇 하나 없던 ‘하얀밤’에, 무엇이든 처음으로 흐릅니다. 무엇보다, 삶은 재미있고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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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742) 전적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 책임은 모두 나한테 있다

→ 책임은 바로 나한테 있다

 전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다

→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그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 그 뜻에 모두 다 동의했다


  ‘전적(全的)’은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다인”을 뜻한다고 합니다. ‘전(全)’이라고 하는 한자는 “(한자어 명사 앞에 쓰여) ‘모든’, ‘전체’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해요. “전 국민”이나 “전 세계”나 “전 20권”처럼 쓴다는데, 한국말로 손질해서 “온 국민”, “모든 사람”이나 “온 세계”, “온 누리”나 “모두 20권”으로 쓸 수 있습니다.


  ‘전적’이 쓰이는 자리를 살피면, 말뜻 그대로 ‘모두’나 ‘남김없이’를 넣으면 되고, ‘다’나 ‘빠짐없이’나 ‘모두 다’나 ‘몽땅’이나 ‘모조리’를 넣을 수 있습니다. 때와 곳을 살펴서 ‘바로’나 ‘그저’나 ‘무엇보다’를 넣을 수 있고, 어느 때에는 ‘힘껏’이나 ‘알뜰히’나 ‘샅샅이’나 ‘빈틈없이’나 ‘꼼꼼히’를 넣을 만합니다. 4348.9.19.흙.ㅅㄴㄹ



나는 그 탓을 전적으로 내 이름에 돌리고 있었다

→ 나는 그 탓을 모두 내 이름 탓으로 돌렸다

→ 나는 그 탓을 몽땅 내 이름 탓으로 돌렸다

→ 나는 그 탓을 바로 내 이름 탓으로 돌렸다

《강은교-그물 사이로》(지식산업사,1975) 216쪽


전적으로 여론의 힘뿐이었다

→ 오로지 여론 힘뿐이었다

→ 오직 여론 힘뿐이었다

→ 오롯이 여론 힘뿐이었다

→ 바로 여론뿐이었다

→ 그저 여론뿐이었다

→ 무엇보다 여론뿐이었다

《정구도-노근리는 살아 있다》(백산서당,2003) 73쪽


내 숙제는 물론 도덕과 일기까지 전적으로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모두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다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빠짐없이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힘껏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잘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기꺼이 돌봐 주었다

→ 내 숙제를 비롯해 도덕과 일기까지 알뜰히 돌봐 주었다

《윤정모-누나의 오월》(산하,2005) 57쪽


엄마와 아빠는 아기를 전적으로 페카에게 맡길 수 있었다

→ 엄마와 아빠는 아기 돌보기를 모두 페카한테 맡길 수 있었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기를 오롯이 페카한테 맡길 수 있었다

《마르야레나 렘브케/김영진 옮김-돌이 아직 새였을 때》(시공사,2006) 113쪽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에 달린 문제

→ 모두 그 사람 성격에 달린 문제

→ 오로지 그 사람 마음에 달린 일

 하나부터 열까지 그 사람 마음에 달린 일

《나쓰메 소세키/송태욱 옮김-문》(현암사,2015) 251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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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57) 인내의


 인내의 세월을 보내다

→ 힘겨운 나날을 참으며 보내다

→ 고된 나날을 견디며 보내다

→ 괴로운 나날을 참고 또 참다

→ 참고 또 참으며 살다

→ 견디고 또 견디며 살다


  ‘인내(忍耐)’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을 뜻합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보면 “고통을 인내하다” 같은 보기글이 나옵니다. ‘고통(苦痛)’ 말풀이를 살피면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을 인내하다”라 적으면 “괴로움을 괴로움을 참고 견디다” 꼴이 됩니다.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그냥 ‘인내하다’라 적든지 “고통을 참다”처럼 뒷말은 한국말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제대로 살려서 쓰자면 “괴로움을 참다”처럼 적어 주고요.


  한국말로 ‘참다’나 ‘견디다’가 있는 만큼 “인내로 역경을 극복하다”는 “참으며 어려움을 이겨 내다”로 손질하고, “각박한 현실을 이겨 낼 만한 인내가 없다”는 “메마른 현실을 이겨 낼 만큼 견디지 못하다”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4348.9.19.흙.ㅅㄴㄹ



군인이 되어 인내의 시간을 보내며

→ 군인이 되어 기나긴 나날을 견디면서

→ 군인이 되어 힘든 나날을 견디면서

→ 군인이 되어 외로운 나날을 참으면서

→ 군인이 되어 괴로운 나날을 참으면서

《유동훈-어떤 동네》(낮은산,2010) 24쪽


편안히 누워 지낸 시간은 정말 비할 데 없는 인내의 3주일이었다

→ 느긋이 누워 지낸 나날은 참말 견줄 데 없이 괴로움을 참은 석 주였다

→ 가만히 누워 지낸 나날은 참말 더없이 괴로움을 견딘 석 주였다

《나쓰메 소세키/송태욱 옮김-문》(현암사,2015) 164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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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56) 일군의


 일군을 이루다 → 한 무리를 이루다

 관광객 일군이 몰려오다 → 관광객 한 무리가 몰려온다

 일군의 건물들 → 무리 지은 건물들 / 줄지은 건물들


  ‘일군(一群)’은 “한 무리. 또는 한 패”를 뜻한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한 무리”로 쓰면 되고, “한 패”나 “한 떼”로 쓸 수 있으며 ‘떼’나 ‘무리’라고만 써도 됩니다. 이를테면 “관광객 한 무리”나 “관광객 무리”로 쓸 만하고 “관광객 한 떼”나 “관광객 떼”처럼 써도 됩니다. “일군의 건물들”이라면 “무리 지은 건물들”로 손볼 만한데, 건물을 가리킨다면 “줄지은 건물들”이나 “여러 건물들”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4348.9.19.흙.ㅅㄴㄹ



좌파 문화운동에 종사하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대중문화 영역으로

→ 좌파 문화운동에 힘쓰던 여러 지식인들이 대중문화 쪽으로

→ 문화운동을 하던 몇몇 지식인들이 대중문화 쪽으로

《김규항-B급 좌파》(야간비행,2001) 213쪽


일군의 청년 독일파 대중작가들, 돌팔이들

→ 한 무리를 이룬 젊은 독일파 대중작가들, 돌팔이들

→ 여러 젊은 독일파 대중작가들, 돌팔이들

→ 젊은 독일파 대중작가들, 돌팔이들 한 무리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김대웅 옮김-독일 이데올로기》(두레,2015) 197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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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6


 며느리배꼽·며느리밑씻개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잘못 옮긴 이름이 퍼지는 바람에 아직 제대로 바로잡히지 못한 풀이름으로 ‘며느리배꼽’하고 ‘며느리밑씻개’가 있습니다. 나라와 겨레마다 숱한 이야기가 있기에 일본에서는 ‘의붓자식의 밑씻개(ママコノシリヌグイ)’ 같은 이름을 쓸는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이를 굳이 ‘며느리밑씻개’로 쓸 까닭이 없고, 이 풀과 비슷하면서 다른 풀을 놓고 ‘며느리배꼽’으로 쓸 일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 나라에 없던 일본 풀이름인 만큼 억지스레 ‘며느리가 밑을 씻는 이야기’라든지 ‘며느리 배꼽하고 얽힌 이야기’를 지어야 하지도 않습니다.


  한겨레는 한겨레대로 오랜 나날 이 땅에서 흙을 일구고 살면서 수많은 풀에 다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풀이름을 따서 ‘며느리배꼽’처럼 쓸 까닭이 없이 ‘사광이풀’이나 ‘참가시덩굴여뀌’ 같은 이름을 고이 물려받아서 쓰면 됩니다. ‘며느리밑씻개’ 같은 이름을 우악스레 쓸 일이 없이 ‘사광이아재비’나 ‘가시덩굴여뀌’ 같은 이름을 살뜰히 이어받아서 쓰면 돼요.


  어른이 보는 식물도감이든 아이가 보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이나 동시집이든, 제 이름을 제대로 적어 넣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이들이 읽을 글을 쓰는 어른은 생각을 슬기롭게 키우고 살찌우도록 말밑과 말결을 잘 살펴야 합니다. 4348.9.18.쇠.ㅅㄴㄹ



말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며느리배꼽이나 노루귀 같은 예쁜 말만 키워 / 입 밖으로 내보낼래요

→ 말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사광이풀이나 노루귀 같은 예쁜 말만 키워 / 입 밖으로 내보낼래요

→ 말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참가시덩굴여뀌나 노루귀 같은 예쁜 말만 키워 / 입 밖으로 내보낼래요

《김륭-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2009) 42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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