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752) 아메바적


 아메바적인 광고로 얼룩지다

→ 아메바 같은 광고로 얼룩지다

→ 바보 같은 광고로 얼룩지다

 아메바적인 사고만 하는 사람

→ 얕은 생각만 하는 사람

→ 어리석은 생각만 하는 사람

→ 생각이 짧은 사람


  ‘아메바(amoeba)’는 “아메바목의 단세포 원생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메바 + 적’으로 쓰는 말투는 ‘단세포(單細胞) + 적’으로 쓰는 말투하고 같다고 할 만합니다. ‘단세포’는 ‘홑세포’를 가리키기도 할 테지만, 사회에서는 “생각이 얕거나 한 가지만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생각이 얕은 사람을 빗대려 한다면 ‘바보’나 ‘멍청이’나 ‘얼간이’ 같은 한국말을 쓰면 됩니다. ‘어리석다’나 ‘어리숙하다’나 ‘멍청하다’나 ‘바보스럽다’나 ‘터무니없다’ 같은 말을 써도 잘 어울립니다. 말 그대로 “생각이 얕다”나 “생각이 짧다”처럼 써도 됩니다. 4348.10.6.불.ㅅㄴㄹ



아메바적인 너무나 아메바적인

→ 아메바 같은 너무나 아메바 같은

→ 멍청이처럼 너무나 멍청이처럼

→ 우스꽝스레 너무나 우스꽝스레

→ 바보스럽게 너무나 바보스럽게

《이현승-생활이라는 생각》(창비,2015) 78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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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55) -의 : 상인의 출현


최초의 진전은 상인의 출현에 의해서 시작된다

→  발걸음은 장사꾼이 나타나면서 비롯한다

→ 걸음은 장사꾼이 나타나면서 떼었다

→  단추는 장사꾼이 나타나면서 꿰었다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김대웅 옮김-독일 이데올로기》(두레,2015) 106쪽


  한국말로 ‘첫’을 쓰지 않고 ‘최초(最初)’를 넣으려고 하니 ‘최초 + 의’ 꼴이 됩니다. “최초의 진전(進展)”은 “첫 발걸음”이나 “첫걸음”이나 “첫 단추”로 손질합니다. “상인(商人)의 출현(出現)에 의(依)해서”는 “장사꾼이 나타나면서”로 손보고, ‘시작(始作)된다’는 ‘비롯한다’로 손봅니다.


부엌에서는 기요의 도마질 소리가 들려온다

→ 부엌에서는 기요가 도마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쓰메 소세키/송태욱 옮김-문》(현암사,2015) 30쪽


  임자자리토씨를 붙여야 하는 자리에 ‘-의’를 잘못 붙였습니다. “기요‘가’ 도마질하는 소리”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벽암집》이라는 어려운 이름의 책이었다

→ 《벽암집》이라는 어려운 이름인 책이었다

→ 《벽암집》이라는 이름으로 어려운 책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송태욱 옮김-문》(현암사,2015) 30쪽


  이 글월도 토씨를 엉뚱하게 붙였습니다. “어려운 이름‘인’ 책”처럼 토씨를 붙여야 올바릅니다.


그렇게 하면 대체로 계절마다의 재배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 그렇게 하면 철마다 어떻게 키우는가를 얼추 배울 수 있습니다

→ 그렇게 하면 철마다 어떻게 돌보는가를 여러모로 배울 수 있습니다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임경택 옮김》(눌민,2015) 73쪽


  ‘대체(大體)로’는 ‘이럭저럭’이나 ‘웬만큼’이나 ‘여러모로’나 ‘얼추’로 손봅니다. ‘계절(季節)’은 ‘철’로 손질하고, ‘재배(栽培)’는 ‘기르기’나 ‘키우기’나 ‘돌보기’로 손질합니다. ‘공부(工夫)할’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배울’이나 ‘익힐’이나 ‘알아차릴’이나 ‘알’로 다담으면 한결 낫습니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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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9


 가정식백반


  ‘가정식 백반’이라는 한국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알쏭달쏭한 말이 널리 쓰입니다. 게다가 이 말이 아주 알맞거나 좋은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부쩍 늘어납니다. 먼저 ‘가정식’이라는 말은 한국말사전에 없는데, ‘가정(家庭) + 식(式)’이기 때문이고, 중국 한자말 짜임새입니다. ‘백반(白飯)’은 “흰밥”을 뜻하는 한자말이며, 중국에서 들어온 낱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흰밥’을 먹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흰밥은 궁중이나 부잣집에서 먹었고, 손수 흙을 가꾸어 나락을 일구던 시골사람은 ‘누런밥’을 먹었습니다. 시골사람은 쌀을 빚을 때가 아니면 겨를 함부로 벗기지 않습니다. 갓 거둔 햅쌀이라면 겨가 있는 채로 밥을 지어도 맛있습니다. 떡을 찌거나 쌀을 빚을 적에는 겉꺼풀뿐 아니라 속꺼풀도 많이 벗겨서 하얗게 되어야 다루기에 수월합니다. 이와 달리 밥을 먹을 적에는 겨만 살짝 벗길 적에 훨씬 고소하면서 맛이 나을 뿐 아니라 몸에도 도움이 되지요.


  떡을 찌거나 술을 빚는 나락은 ‘흰쌀’입니다. 밥을 끓이는 나락은 ‘누런쌀’입니다. 이때에도 ‘백미(白米)’나 ‘현미(玄米)’가 아닌 ‘흰쌀’이랑 ‘누런쌀’이에요. 그런데 ‘백미·현미’라든지 ‘백반’ 같은 낱말은 조선 양반 사회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지식인이나 관청에서 두루 썼지요. 그무렵에는 정치나 행정이나 문화나 사회 모두 ‘한자말만’ 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까지 그치지 않아서 ‘밥집’이 아닌 ‘백반집’ 같은 이름으로도 남고, 요즈음에는 ‘집밥’이 아닌 ‘가정식백반’이라는 이름으로까지 퍼집니다.


  집에서 짓는 밥은 ‘집밥’입니다. 밖에서 사먹는 밥은 ‘바깥밥’입니다. 가게에서 지어서 파는 밥은 ‘가게밥’입니다. 그런데 이런 밥을 놓고 ‘집밥·바깥밥·가게밥’ 같은 한국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은 드물고, ‘가정식백반·외식·식당밥’ 같은 말만 자꾸 퍼집니다. 4348.10.4.해.ㅅㄴㄹ



눈앞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라는 아, 이런 가정식백반 같은 충고들

→ 눈앞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라는 아, 이런 집밥 같은 도움말들

→ 눈앞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라는 아, 이런 집밥 같은 살가운 말들

→ 눈앞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라는 아, 이런 집밥 같은 포근한 말들

《이현승-생활이라는 생각》(창비,2015) 40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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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9 물구나무서기



  우리는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네 곳을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새녘이나 하늬녘이라 하든, 이곳은 다른 데에서 보면 마녘이나 높녘이 됩니다. 새녘이라 할 곳은 따로 없고, 높녘이라 할 곳도 따로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됩니다.


  한복판이란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여기’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리가 한복판입니다. 왜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되는가’ 하면, 참말 어느 곳이든 모두 한복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없습니다. 위와 아래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늘 ‘나’를 한복판에 놓고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서 새와 하늬가 갈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나눕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곳도 알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서는 북반구와 남반구를 말하는데, 북반구라고 해서 똑바로 서지 않고, 남반구라고 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북반구이든 남반구이든, 또 적도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똑바로 서’고 ‘한복판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섬이 마녘에 있는 데가 아닙니다. 제주섬으로 치면 제주섬이 한복판입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다른 시골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길에서는 언제나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가지 않는다면, 움직임이 생길 수 없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오롯한 하나’에서 ‘다른 오롯한 하나’로 갑니다.


  해에는 위나 아래가 있을까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별에 위나 아래가 있을까 헤아릴 노릇입니다. 해나 별이나 지구에서 위나 아래를 따지려 한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온누리에서 위아래를 따질 적에는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위’를 말하면 위는 언제나 곧바로 ‘아래’가 되고, ‘아래’를 말하면 아래는 늘 막바로 ‘위’가 됩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발은 하늘을 밟습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여느 때에는 땅을 두 발로 밟는 동안 두 손으로 하늘을 짚었구나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하늘을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사는 숨결입니다. 온별누리(은하계) 하늘을 늘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살아요.


  우주선을 타면 알 테지만, 우주선에서는 위나 아래가 없습니다. 거꾸로 나는 우주선은 없습니다. 늘 날아야 할 자리로 날 뿐입니다. 사람 몸에는 손과 발이 있는데, 왜 손과 발이 있느냐 하면, 손은 언제나 하늘을 짚어야 하고, 발은 언제나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 몸에 깃든 넋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없겠지요. 넋이 생각을 지어서 심는 마음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마음에 왼쪽이나 오른쪽이 있을까요? 사랑이나 꿈에 위아래가 있을까요? 넋이나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을 크기로 따질 수 있을까요? 큰 마음이나 작은 마음이 있을까요?


  별에는 ‘별힘(당김힘, 중력)’이 있습니다. 별힘은 무엇인가 하면, 별이 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어느 별에서든 몸이 살려면 발이 있어서 땅을 밟아야 합니다. 어느 별에서든 ‘한복판’이 있기 마련이고, 한복판이 한 곳 따로 있기에, 이곳을 바탕으로 위아래나 옆이나 새·하늬·마·높 같은 자리를 따집니다.


  온별누리에는 ‘온별누리힘’, 다시 말하자면 ‘온힘’이나 ‘누리힘’이 있습니다. 온힘이나 누리힘에는 위아래나 크고작음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언제나 모든 자리에서 새로운 기운이 됩니다. 온별누리에서는 한복판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한복판입니다. 그러니 ‘별힘(당김힘, 중력)’이 없어서 우리를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모든 곳(온 곳)이 ‘모든 것(온 것)’이 됩니다.


  별을 바라볼 적에 삶을 배우고, 별누리를 살필 적에 넋을 살피며, 온별누리를 헤아릴 적에 사랑을 헤아립니다. 삶에는 바탕이 되는 한복판이 있습니다. 넋에는 위아래나 크기가 없습니다. 사랑은 가없이 넉넉하면서 끝없이 포근합니다. 별(지구별)에서는 따로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하지만, 이 별에서 몸이라는 옷을 살며시 벗고 온별누리로 나아가는 숨결이 되면, 늘 홀가분하게 ‘고요춤’을 추는 새로운 밤무지개빛이 됩니다. 4348.3.22.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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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8

 

 한자말을 쓰지 말자?

 

  나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나는 언제나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말로 녹아든 ‘한자로 지은 낱말’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낱말’이나 ‘영어에서 온 낱말’이라면, 모두 똑같이 한국말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국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게 씁니다. 다만, ‘한자로 지은 티’가 풀풀 나는 한자말은 굳이 안 씁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내 온 사랑을 듬뿍 담아서 즐겁게 쓰면서 기쁘게 삶을 노래하도록 생각을 북돋우는 한국말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낱말을 골라서 쓰든, 우리는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으면 돼요. 우리는 서로 마음이랑 마음으로 아끼고 보듬으며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돼요.


  눈을 감고 바라보셔요. 무엇이 보일까요? 눈을 감은 눈으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두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본다면, 네 얼굴이나 키나 몸짓은 하나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두 눈을 감고 서로 마주한다면, 네가 아무리 부자이거나 가난뱅이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대목도 처음부터 아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을 나눌 적에도 언제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자말을 덕지덕지 넣는 말투’인가 ‘토박이말이라고 하는 말로 꾸민 말투’인가를 살필 일은 없습니다. 어떤 낱말을 골라서 쓰든 낱말 하나는 그 사람 삶이고 몸짓입니다. 그 사람 스스로 삶하고 몸짓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서야 그 사람 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자말을 쓰지 않는 일을 하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찾아서 즐겁고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아이들하고 아름답게 나눌 말을 즐겁게 헤아려 보셔요. 시골 할매랑 할배하고 사랑스레 주고받을 말을 기쁘게 헤아려 보셔요. 우리 이웃하고 나눌 말을 가만히 살펴요. 내 마음이 네 마음에 닿고, 네 마음이 내 마음에 닿을, 마음꽃을 피울 말을 생각해서 써요. 그러면 됩니다. 4348.10.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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