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오늘 걷는 길은 (2022.4.30.)

― 진주 〈동훈서점〉



  여태 한 곳에 깃들던 헌책집 〈동훈서점〉이 새터로 옮깁니다. 스무 해 남짓 한 곳에서 책집살림을 꾸릴 수 있던 나날이란 더없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새터로 떠나는 길은 애벌레가 날개돋이를 하고서 나비로 거듭나듯 찬찬히 피어나는 길이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포항으로 가는 길에 진주에 들릅니다. 아니, 바로 포항으로 날아가기보다는 진주를 거칩니다. 아니, 고흥에서 포항으로 바로가는 길이 없으니 하룻밤을 다른 고장에서 지내야 하는데, 진주책집을 들러서 가려고 합니다.


  시골이든 큰고장이든 가게하고 집이 줄잇습니다. 길에는 부릉부릉 넘실거리고, 걷는 사람은 적습니다. 갈수록 덜 걷거나 안 걸으면서 부릉부릉 달리기에 거님길은 밀려나고, 거님길에 부릉이(자동차)를 올리는 사람이 늘고, 하늘이 매캐합니다.


  저는 손잡이(운전대)가 아닌 붓이랑 낫이랑 아이 손이랑 자전거랑 빨래비누랑 책이랑 풀잎을 손에 쥡니다. 때로는 바람줄기나 빗방울을을 손에 얹습니다. 나비나 잠자리나 풀벌레를 손등에 앉히기도 합니다. 부릉이를 쥐는 손으로 바뀐다면 이 모두하고 멀어요. 혼자 살아갈 적에는 붓하고 책하고 바람을 쥐려고 걸어다녔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아이랑 손잡고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려고 걸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면, 나무는 늘 기꺼이 베풀어요. 나무한테 거름을 주거나 돈을 주어야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따사로이 바라보는 눈길이면 넉넉해요. 해바람비처럼 나무를 포근히 안으면, 나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삶이라면 곁에 늘 웃음꽃하고 눈물꽃이 나란히 있어요.


  새터 〈동훈서점〉 골마루를 거닐며 책을 쓰다듬고 책시렁을 돌아봅니다. 두 손에 쥐려는 책에는 앞사람 손자취하고 발걸음이 묻어납니다. 이 책을 짓고 엮은 사람 손길에, 이 책을 먼저 읽고 새긴 사람 눈길에, 이 책을 새로 읽고 배울 오늘 마음길이 만납니다.


  마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사랑으로 갈 테지요. 마음에 미움이라는 씨앗을 심기에 미움으로 갈 테고요. 제 마음에는 손잡고 거닐면서 노래하는 사랑이라는 하루를 심을 생각입니다. 잔뜩 장만하는 책으로 등짐이 묵직하다면 더 천천히 걸으면 되고, 더 자주 등짐을 길에 내려놓고서 바람맞이를 하고, 나무 곁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서 쉬면 됩니다.


  오늘날은 ‘살아남는 길’로 밀어붙이는구나 싶어요. 뭐, 살아남기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살아남자는 씨앗’ 아닌 ‘살림짓자는 꿈씨앗’을 심습니다.


ㅅㄴㄹ


《휠체어에 사랑을 싣고》(고명승, 고려원, 1990.1.15.첫/1990.1.25/3벌)

《百中經》(노익형, 박문서관, 1934.1.15.)

《學習便覽 理科辭典》(學習社 編輯所 엮음, 學習社, 1933.2.15.첫/1935.8.1.고침17벌)

《현대물리학과 한국철학》(김상일, 고려원, 1991.4.1.)

《에이브 현대위인 21 가가린》(W.G.바치에트/오정환 옮김, 학원출판공사, 1989.10.30,)

《술 취한 새들 사건》(도널드 소볼/이원하 옮김, 어린이왕국, 1989.11.30.)

《로버트와 로봇》(에바 슈밥/이명희 옮김, 금성출판사, 2002.8.10.)

《입문편 숙녀 바둑》(바둑연구원 엮음, 대현출판사, 1983.1.31.첫/1983.3.30.2벌)

《貊耳》(박문기, 정신세계사, 1987.5.15.)

《天符經의 비밀과 백두산족 文化》(권태훈 이야기·정재승 엮음, 정신세계사, 1989.11.8.첫/1989.11.15.2벌)

《우리말의 상상력》(정호완, 정신세계사, 1991.4.13.)

《민족혼 제1집》(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바람과물결, 1987.10.3.첫/1989.6.30.2벌)

《나는 문이다》(문정희, 민음사, 2016.5.27.)

《英語原動力》(안현필, 정도출판사, 1979.11.1.)

《땅과 집 그리고 재벌》(한국노동교육협회, 돌베개, 1990.4.15.)

《삶은 가장 큰 웃음이다》(B.S.오쇼 라즈니쉬/김춘수 엮음, 백암, 1992.6.10.)

《方言硏究法》(藤原與一, 東京堂出版, 1964.12.20.)

《實用 麥作增收圖解》(竹上靜夫, 養賢堂, 1956.3.25.첫/1958.5.15.2벌)

《사람을 꿰뚫어보는 知慧》(門脇尙平/기준성 옮김, 행림출판사, 1977.10.1.첫/1978.11.30.2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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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헌책을 왜 사는가 (2022.4.18.)

― 서울 〈서울책보고〉



  부릉이(자가용)를 안 몰면서 들길을 걷고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면, 철마다 언제 어떻게 바람이 훅훅 바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으로 흙이며 바람이며 빗물을 만졌으니, 모든 사람이 스스로 철빛을 읽고 삶빛을 가꾸었어요. 오늘날에는 걷는 사람이 확 줄 뿐 아니라, 바깥바람을 하루 내내 쐬면서 지내는 일터는 드물다 보니, 그만 스스로 하늘빛을 잊습니다.


  전남 고흥뿐 아니라 나라 어느 곳이라도 사월볕도 꽤 셉니다. 삼월은 아슴프레 겨울빛이 저물면서 싱그럽다면, 사월은 조금씩 낮이 후끈하면서 풀빛이 짙어요. 오월은 거의 여름이라 할 만큼 볕살이 내리쬐지요.


  시골에서 살며 돌아보면, 오늘날 시골아이도 배움터만 오가느라 막상 아침하고 낮하고 저녁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 바람빛인가를 모르기 일쑤입니다. 시골에 살기에 구태여 ‘시골로 나들이’를 갈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배움틀은 서울바라기(in 서울)로 치달으니, 시골아이가 외려 들마실·바다마실·숲마실을 안 합니다. 서울아이가 되레 들마실·바다마실·숲마실을 자주 한달까요.


  요즈음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바다나 숲을 오가는 시골아이가 있을까요? 얄궂게도 시골아이가 서울아이보다 풀꽃나무 이름을 더 모르고 논밭살림을 등지는 얼거리로 흐르는 판입니다. 이처럼 뒤집힌 민낯을 읽는 고을지기(지자체장)는 없는 듯해요. 시골배움터 길잡이도 매한가지입니다.


  〈서울책보고〉로 찾아갑니다. ‘보이는 라디오’를 미리 담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헌책집 두 곳을 들려주는 몫입니다. 새책집이 아닌 헌책집을 굳이 마실하는 뜻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새책집하고 헌책집을 나란히 다니는 마음을 얘기합니다.


  요 몇 해 사이에는 혼책(독립출판물)이 부쩍 늘었다는데, 혼책은 진작부터 많았습니다. 모르는 사람만 몰랐을 뿐이에요. ‘지역문화·문학’은 언제나 혼책이었습니다. 1980∼90해무렵(년대)에 쏟아지던 ‘노동자·공부방·야학 글모음’은 모두 혼책이었어요. 예전에는 ‘혼책(독립출판물)’이라 안 하고 ‘비매품’이라 했을 뿐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2자락씩 띄우는 책이 아닌, 마을에서 오순도순 나누던 혼책(비매품)은 예전부터 새책집에는 안 들어갔고 헌책집에만 들어갔어요.


  여러 고장 ‘글모음’이나 ‘비매품’을 건사하자면 여러 고장 헌책집을 돌아다닙니다. 돈·이름·힘이 아닌 삶·살림·사랑으로 이야기를 여민 사람들 발자취를 찬찬히 짚는 이들은 늘 헌책집을 함께 다니면서 책빛을 일구었습니다. 책숲(도서관)조차 비매품은 안 건사했거든요. 헌책집이 있기에 마을빛(지역문화)을 지켰어요.


《韓國 아름다운 미지의 나라》(비르질 게오르규/민희식 옮김, 평음사, 1987.12.15.)

《중국에서의 조선어 기초어법》(쉬앤 떠우/손정일 옮김, 서우얼출판사, 2006.4.25.)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백기완의 통일 이야기》(백기완, 청년사, 2003.1.6.첫/2003.2.14.2벌)

《せなかをとんとん》(最上一平 글·長谷川知子 그림, ポプラ社, 1996.12.첫/2005.12.8벌)

《복합오염》(아리요시 사와코/정성호 옮김, 장락, 1994.1.10.2벌)

《말뚝에게 절하고》(염재만, 세종출판공사, 1990.3.2.)

《여성문학 1》(김진홍 엮음, 전예원, 1984.1.30.2벌)

《왕조의 유산, 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이태진, 지식산업사, 1994.4.30.첫/1994.6.10.2벌)

《다섯살배기 딸이 된 엄마》(신희철, 창해, 2005.2.14.첫/2005.3.25.2벌)

《아주 오래된 사랑》(오철수, 연구사, 1993.12.20.)

《한겨레 평론 1》(한겨레사회연구소 엮음, 이론과실천, 1989.7.29.)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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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면 (2022.2.17.)

― 부산 〈파도책방〉



  아이하고 걸을 적에는 늘 아이 걸음에 맞춥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아주 어릴 적에는 두리번두리번하느라 으레 느릿느릿 걷다가 아예 멈추기 일쑤였습니다. 이럴 적에는 같이 멈추어 함께 두리번두리번했습니다. 아이들하고 다니면서 미리잡기(예약)를 아예 안 했습니다. 때에 맞추어 움직이자면 아이 걸음하고 어긋나요. 더구나 아이로서는 이 모습도 보고 저곳에서도 놀고 싶은걸요. 어버이로서 늘 한 가지만, 아이가 똥오줌이 마렵다고 할 적에 가까이에서 얼른 찾아갈 뒷간이 어디에 있으려나 하고 어림해 두었습니다.


  숲노래 씨는 혼자 살던 무렵 오직 책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둘레에 책집이 없으면 손에 책을 쥐었어요. 길을 걷건 버스·전철을 타건 늘 읽었습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가게를 쳐다볼 마음이 없고, 왁자지껄한 소리는 흘려보냅니다. 바야흐로 아이를 맞이하고서는 아이 손을 잡고 걸었는데, 아이들이 부쩍 자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거나 걸으면 가만히 바라보면서 느긋이 걷습니다. 두 아이한테 두 손을 다 주던 손은 어느새 빈손으로 돌아오고, 이 빈손에는 붓을 쥡니다. 아이들한테 건네고 이웃한테 드릴 노래꽃(동시)을 쓰지요. 걷거나 버스로 움직이는 길에.


  하루가 다르게 뚝딱질로 시끄러이 뒤바뀌는 보수동 책집골목을 바라봅니다. 부산 책집골목이 이제 토막났습니다. 부산시하고 부산 중구청이 책을 얼마나 미워하는가를 잘 엿볼 만합니다. 책을 끔찍히 싫어하기에 이곳 책집골목이 이토록 토막나고 시끄러운데 쳐다보지도 않는군요.


  책집골목을 살리는 길은 따로 안 찾아도 됩니다. 그저 길잡이(교사)하고 벼슬꾼(공무원)부터 이레마다 하루씩 책집마실을 하면서 책을 사도록 이끌면 돼요. 나라돈(세금)으로 일삯을 받는 이들은 ‘스스로 배움길’을 닦도록 ‘이레마다 책집마실을 해서 일삯 1/10을 책값으로 쓰게끔’ 매겨야지 싶습니다. 나라에서는 어린이·푸름이한테 ‘교재구입비’란 이름으로 돈을 주는데, 이 돈은 ‘학습지·교재’가 아닌 ‘책’을 사읽는 데에만 쓰게끔 살펴야지 싶어요.


  작은아이랑 보수동을 걷습니다. 〈파도책방〉에 깃듭니다. “보라 씨는 아기일 적에 이곳에 와서 생각이 안 날 수 있지만, 보라 씨 마음에는 이곳에 와서 놀던 하루가 있어요.” “그래요? 생각 안 나는데요?” “그래,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를 떠올리기보다는, 놀며 어떤 마음이었나를 그려 보셔요.”


  어제까지 몰랐으면 오늘부터 배우면서 누리면 즐겁습니다. 오늘까지 몰랐다면 이제부터 빙그레 웃으며 받아들이면 아름답습니다. 모든 하루는 오롯이 노래입니다.


ㅅㄴㄹ


《조지와 마사》(제임스 마셜/윤여림 옮김, 논장, 2003.12.20.)

《거인의 정원》(최정인, 브와포레, 2021.12.30.)

《우리들의 아침》(김석주, 시로, 1987.12.7.)

《묘(猫)한 고양이 쿠로 1》(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3.6.25.)

《묘(猫)한 고양이 쿠로 2》(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3.7.17.)

《묘(猫)한 고양이 쿠로 3》(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3.8.23.)

《묘(猫)한 고양이 쿠로 4》(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3.11.24.)

《묘(猫)한 고양이 쿠로 5》(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3.12.6.)

《묘(猫)한 고양이 쿠로 6》(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4.2.23.)

《묘(猫)한 고양이 쿠로 7》(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6.2.28.)

《묘(猫)한 고양이 쿠로 8》(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6.3.30.)

《묘(猫)한 고양이 쿠로 9》(스기사쿠/최윤희 옮김, 시공사, 2006.5.30.)

《보수동, 그 거리》(혜광고등학교 외, 효민디엔피, 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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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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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람 (2022.4.6.)

― 김포 〈책방 노랑〉



  일산에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작은아이랑 묵은 길손집은 큰길가입니다. 해는 잘 들어오되 미닫이를 열면 새벽부터 부릉소리가 시끄럽습니다. 논밭을 까뒤집어 잿빛더미로 바꾸던 첫모습을 보았기에 이 언저리로 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지난 스물 몇 해 사이에 나무가 우거진 모습 하나는 제법 볼만합니다. 앞으로 스물∼서른 해쯤 지나면 이 고장 잿빛더미를 다 허물고 새로 올려야 한다고 하려나요? 그때에 우람나무는 어떻게 하려나요?


  사람들이 잿빛으로 덮은 높다란 집은 모조리 쓰레기일 테지만, 사람 곁에서 죽죽 뻗은 나무는 이 고을을 푸르게 감싸는 숲빛입니다. 새로 삽질을 해야 하더라도 나무를 안 건드리는 길을 살펴야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살리라 생각합니다. 버스를 갈아타며 김포로 건너가는 길에 미닫이를 여니 시원합니다. 들바람이 숨결을 살립니다. 숲바람이며 바닷바람이 모든 목숨붙이를 헤아립니다.


  예전에 길을 헤매 보았기에 오늘은 〈책방 노랑〉을 찾아가는 길을 안 헤맵니다. 김포에 있는 〈코뿔소책방〉이며 〈책방 짙은〉도 마실하고 싶으나 아침 일찍 열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다음에 깃들 수 있겠지요.


  봄볕이 따사롭습니다. 하늘이 눈부십니다. 그러나 이 따사롭고 눈부신 바람빛을 듬뿍 누리려고 해바라기를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골목마을이라면 한켠에 걸상이나 바깥마루를 놓고 해바라기를 할 테지만, 잿빛집이 높다란 곳에서는 모두 안으로 꽁꽁 숨거나 부릉이(자동차)로 움직입니다. 해가 나도 해를 마주하지 않는다면, 해바람비를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은 책은 얼마나 읽히려나요.


  나라지기(대통령)를 맡는 분들은 으레 ‘자주국방’을 말합니다만, 1997년 12월 31일에 강원도 동면 원당리 깊은 멧골에서 싸움터(군대)를 마친 저로서는 ‘개뿔’이라고 으레 읊습니다. 총칼(전쟁무기)을 거머쥐어야 나라를 지키지 않아요. 마침종이(졸업장)를 움켜쥐어야 삶을 읽지 않아요. 어깨동무하는 마음이기에 어깨동무(평화)를 이루고, 사랑을 속삭이는 마음이기에 사랑을 짓습니다.


  숱한 어른은 섣불리 아이를 가르치려 들어요. 아이한테서 먼저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구나. 넌 그렇게 하네? 난 이렇게 한단다. 이렇게 해보는데 즐거워.” 하면서 부드러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 이따금 있으나, 이처럼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어른이 수두룩합니다. 작은아이가 〈책방 노랑〉 지기님한테서 ‘체스’를 배웁니다. 책집을 나서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이야기합니다. 곁님은 종이접기로 ‘체스 말’ 접는 길을 찾아내고, 큰아이가 종이로 체스 말을 접었습니다.


ㅅㄴㄹ


《언어의 탄생》(빌 브라이슨 글/박중서 옮김, 다산북스, 2021.6.30.)

《우리 그림책 이야기》(정병규 글, 행복한아침독서, 2011.11.20.)

《식물학자의 노트》(신혜우 글·그림, 김영사, 2021.4.27.)

《지금 시간이 떠나요》(베티나 오브레히트 글·율리 푈크 그림/이보현 옮김, 다산기획, 2022.1.30.)

《일요일, 어느 멋진 날》(플뢰르 우리 글·그림/김하연 옮김, 키위북스, 2021.7.1.)

《SPOROID 2호》(성게 글, 타이그레스 온 페이퍼, 20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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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집 하고 잿빛집 사이 (2022.6.21.)

― 인천 〈나비날다〉



  ‘골목집’은 골목사람 스스로 골목을 돌보고 가꾸는 삶터입니다. ‘잿빛집(아파트)’은 그냥 목돈을 모아서 사들이는 돈붙이(재산)입니다. 나라에서 자꾸 골목집을 허물어 잿빛집으로 갈아치우려고 할 적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집(보금자리)·마을을 가꾸고 일구고 돌보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는다고 할 만합니다. 골목사람으로 지낼 적에는 저마다 스스로 골목을 쓸고 정갈히 다스리면서, 나무도 심고 꽃밭에 텃밭을 품지요. 이 골목은 어른으로서는 만남터·쉼터·일터요, 아이로서는 놀이터입니다.


  골목을 잃은 아이들은 놀이터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봐요. 노는 아이를 이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서울(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노는 아이가 없어요. 빈터가 없거든요. 골목마다 부릉이(자동차)가 끔찍하게 들어찼고, 시골 풀밭이나 빈터에는 농약병이 뒹굴거나 잿더미(시멘트)가 뒤덮어요.


  골목마을을 밀어붙이는 나라(정부)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살림짓고 스스로 사랑하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꺼린다고 하겠습니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숨죽이거나 고개숙이면서 따라오라는 뜻으로 골목마을을 밀어붙여서 없애려는 삽날질을 끝없이 일삼아요.


  잿빛집(아파트)에서 마음껏 노는 어린이가 있나요?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짓나요? 노는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노래를 부르나요? 예부터 골목마을에서는 ‘깍두기’가 있습니다. 힘이 적거나 몸이 여린 아이는 ‘깍두기’란 이름으로 모든 자리에 살며시 받아들여서 마음껏 놀거나 쉬엄쉬엄 어울리도록 마음을 기울였어요.


  오늘날 잿빛마을(아파트 신도시)은 울타리로 둘러싸고 모래밭조차 없는 플라스틱판입니다. 게다가 이런 조그만 ‘울타리 놀이터(놀이기구 몇 있는 곳)’에조차 느긋이 머물 수 있는 아이는 없다시피 해요.


  온나라 아이들은 어린배움터(초등학교)를 다닐 적부터 배움수렁(대학입시지옥)에 빠집니다. 놀면 안 되는 아이가 되고 말아요. 놀지 못하니 동무를 못 사귀고, 동무를 못 사귀니 어깨동무를 모르고, 어깨동무를 모르면서 책만 달달 외우니 ‘지식·이론’은 가득하지만, 정작 사랑스러운 손길은 하나도 모른 채, 나이만 스물 서른 마흔이라는 큰몸뚱이로 자라기만 합니다. 오늘날 적잖은 이들이 응큼질(성추행)이나 막질(폭력)을 하는 바탕에는, 골목을 짓밟아 놀이를 빼앗은 ‘서울나라(도시문명사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거나 쓰는 책에는 이런 얘기를 얼마나 담나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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