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77] 큰술·작은술



  어릴 적에 곧잘 부엌일을 거들었습니다. 내가 사내 아닌 가시내로 태어났으면 어머니는 한결 홀가분하게 부엌일을 시키셨을 텐데, 사내로 태어난 터라 부엌일을 덜 시켰으리라 느낍니다. 무엇 좀 도울 일이 없느냐고 여쭈면 으레 “없어.” 하시지만, 도무지 손을 쓰실 수 없을 적에 “도와줘.” 하고 부르시면서 “저기 숟가락으로 소금 큰술로 하나 넣어 줘.” 하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입으로 아이한테 무언가 시킬 적에 ‘큰술’과 ‘작은술’로 부피를 가누셨어요. “두 큰술”이라든지 “작은술 반”이라 말씀하셨지요. ‘큰술’은 밥을 먹는 숟가락입니다. ‘작은술’은 찻숟가락입니다. 어릴 적부터 요리책을 가끔 들추었는데, 요리책에도 으레 ‘큰술·작은술’로 양념이나 간을 맞추도록 이끕니다. 그렇지요. 부엌에서 쓰는 ‘부엌말’입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이 낱말이 안 실립니다. 4347.10.1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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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76] 꽃내음



  어느덧 서른 해 즈음 묵은 만화영화 〈꼬마 자동차 붕붕〉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러한 만화영화가 거의 다 일본에서 들어왔기에 어른들이 아주 싫어했는데, 일본에서 빚은 만화영화라고는 하나 붓으로 물빛그림을 그려서 빚은 작품이기에 느낌이나 결이나 무늬가 아주 곱습니다. 노래도 꽤 재미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 만화영화에 흐르는 노래를 아이한테 고스란히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꽃향기(-香氣)를 맡으면”은 “꽃내음을 맡으면”으로 고치고, “어렵고 험(險)한 길”은 “어렵고 거친 길”로 고칩니다. 글을 읽고 말을 들을 줄 아는 우리 집 일곱 살 아이는 만화영화에 흐르는 말이 ‘꽃향기’와 ‘험한’인 줄 알지만, 아버지가 고친 말대로 고맙게 노래를 부릅니다. 가만히 보면 그렇거든요. 꽃에서 나는 내음이라 ‘꽃내음’이고, 거친 길이라 ‘거칠다’고 합니다. 만화영화에 한자말로 나왔다고 해서 그대로 알려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한국말사전에는 한국말 ‘꽃내음·꽃냄새’를 안 싣기까지 해요. 한자말 ‘향기’는 ‘내음·냄새’를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인 줄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잘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바람내음·풀내음·밥내음·빵내음·물내음·살내음·사랑내음·딸기내음’입니다. 이런 말마디를 ‘향기’로 바꾸지 못하고, ‘풀향기’나 ‘밥향기’ 같은 말을 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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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75] 벼슬아치



  나는 어릴 적에 ‘벼슬아치’와 ‘벼슬’이라는 낱말을 둘레에서 익히 들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은 으레 ‘벼슬아치’와 ‘벼슬’을 말했어요. 요즈음 이 낱말은 거의 못 듣습니다. 아마 ‘벼슬아치’와 ‘벼슬’ 같은 낱말을 떠올리면서 이야기할 만한 어른이 거의 돌아가셨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러면 요즈음 듣는 낱말은 무엇인가 하면 ‘공무원(公務員)’과 ‘공직(公職)’입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어른끼리 이야기를 하거나 아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으레 ‘공무원’이나 ‘공직’을 말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둘레 어른들이 흔히 읊는 낱말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테지요. 그러니까,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듣고 배우며 받아들이는 말이 달라집니다. 어른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알맞게 말을 한다면, 아이들은 저절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알맞다 싶은 말을 익힙니다. 어른들이 거칠거나 우악스럽거나 어리석게 말을 한다면, 아이들도 저절로 거칠거나 우악스럽거나 어리석다 싶은 말을 익혀요.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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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74] NAVER와 한글박물관



  예수님 나신 날이 다가오면 도시 곳곳에 알록달록 나무를 세웁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우면 절집 둘레에 알록달록 등불을 겁니다. 예수님 나신 날을 기리는 나무와 부처님 오신 날을 섬기는 등불은 꽤 오래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 한글날을 맞이해서 한글을 기린다고 하는 이들은 시월 구일 하루만 반짝거리다가 사그라듭니다. 이를테면 한 해 내내 영어사랑으로 치닫던 누리그물인 ‘NAVER’나 ‘DAUM’ 같은 곳은 시월 구일 하루만 ‘네이버’와 ‘다음’처럼 무늬만 한글로 바꿉니다. 시월 시일이 되면 도로 ‘NAVER’나 ‘DAUM’으로 돌아가요. 마치 해마다 하루만 반짝 놀다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깊이 나아가거나 널리 헤아리지 않아요. 해마다 새롭게 거듭나거나 자라는 모습이 없어요. 해마다 판박이 같은 시늉을 하면서 한글사랑을 자랑합니다. 나라에서도 엇비슷합니다. 2014년에 한글박물관이라는 커다란 집을 지어서 문을 열기는 합니다만, 다른 한쪽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집어넣겠다고 또 설레발을 칩니다. 한국말을 알뜰히 가다듬는 일조차 안 하면서, 막상 한글마저 짓밟는 셈입니다. 이럴 바에는 뭣 하러 한글박물관을 큰돈 들여 지을까요. 나라에서 스스로 한글이든 한국말이든 제대로 가꾸거나 아름답게 지키려는 생각이 없다면.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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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73] 일없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우리 사회에서 ‘일없다’는 북녘말이고 ‘괜찮다’는 남녘말이라고 똑 잘라서 가르곤 합니다. 책이나 방송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껏 그런가 보다 하고 지냈어요. 이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뒤적여 살필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며칠 앞서 이웃마을로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갔는데, 이웃마을에서 만난 할매가 “일없어. 더 안 줘도 돼.” 하고 손사래를 치는 모습을 봅니다. 어라, ‘일없다’라니, 이 말은 전라말이기도 한가? 아니, ‘일없다’는 북녘말이 아닌 우리 모두 쓰는 말, 그러니까 서울말이 아닐 뿐인가? 자전거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한국말사전을 뒤적입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일없다’를 북녘말로 따로 가르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거나 마음을 쓸 일이 없다는 뜻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일없다’를 말한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누가 왜 ‘일없다’를 북녘말이라고 했을까요? 북녘사람뿐 아니라 시골사람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 몇몇 지식인이나 기자가 어설피 퍼뜨린 이야기가 잘못 뿌리내리는 모습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제발 한국말사전 좀 살짝이라도 뒤적이면서 말을 할 노릇입니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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