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고 미츠아키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님 고양이 사진은 한국에도 제법 알려졌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으로서는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사귀거나 마주하는 고양이를 담을 뿐인데,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담은 고양이 사진을 보는 사람 가운데 ‘고양이를 가장 잘 찍는’ 사진쟁이라는 이름이나 ‘골목고양이를 가장 잘 담는’ 사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고양이나 골목고양이만 사진으로 찍을 턱이 없습니다만, 널리 알려진 당신 사진은 고양이요, 이 가운데에서도 골목고양이입니다. 그런데 이와고 미츠아키 님 사진에 나오는 고양이들은 여느 길고양이나 골목고양이하고 사뭇 다르곤 합니다. 바닷가에 사는 바다고양이가 있고, 시골에 사는 시골고양이가 있어요. 다만, 들고양이는 없지 않느냐 싶은데, 한국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일본 사진책으로는 들고양이 사진 또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사진에 나오는 고양이 가운데에는 집고양이도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집고양이이든 길고양이이든 골목고양이이든 바다고양이이든 시골고양이이든 똑같이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삶을 고양이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고양이 사랑과 꿈을 사진이야기로 살포시 옮깁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동네사람이든 마을사람이든 시골사람이든 도시사람이든 찍는다면 여느 사람 눈길이나 손길하고 사뭇 다를 테지요. 당신은 당신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결이 다르니까요. 더 가까이 다가선다든지 조금 멀찍이 떨어진다는 대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하는 매무새일 뿐입니다. 고양이와 사람은 똑같은 목숨이고, 사람과 사람도 한결같은 목숨입니다. 가난하든 가멸차든 서로 마찬가지인 사람이며, 잘났든 못났든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고양이 삶자락을 빌어, 서로 사랑하며 어울리는 예쁘며 고마운 다 다른 이야기를 사진으로 그리는 사람이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라고 말해야,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344.3.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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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친일 작품 2 



 덴마크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님이 있습니다. 스웨덴에는 아스트리드 안나 에밀리아 린드그렌 님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이원수 님이 있습니다. 이원수 님은 1911년 11월 17일에 태어나서 1981년 1월 24일에 숨을 거둡니다. 숨을 거두기로는 1981년이지만 1970년대 끝무렵부터 몸져누워 손을 쓸 수 없었고, 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더는 동화이든 동시이든 쓰지 못했습니다. 곁에서 보살펴 주는 당신 딸아이한테 겨우겨우 더듬더듬 하는 말소리를 귀를 대고 읊으면서 몇 자락 옮겨 적도록 해 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입으로 쓴’ 마지막 시(동시)가 〈겨울 물오리〉입니다. 아마, 어른 가운데에는 동시나 동화이기 때문에 이원수 님 문학을 가까이하지 않는 터라 〈겨울 물오리〉이든 〈염소〉이든 욀 줄 아는 분이 없겠지요.


.. 엄매애 / 엄매애 / 염소가 웁니다. // 울 밖을 내다보고 / 염소가 웁니다. // “이 문 좀 열어 줘. / 이 문 좀 열어 줘.” // 발돋움질해 봐도 아니 되어 / 뿔로 탁탁 받아 봐도 아니 되어 / 울 안에서 염소는 / 파래진 언덕 보고 / 매애 웁니다. / 잔디밭에 가고 싶어 매애 웁니다. // 민들레도 피었네. / 오랑캐꽃도 피었네. / 보리밭 언덕 너머엔 / 살구꽃도 피었네. // 염소는 애가 타서 / 발돋움질 또 하네. // “염소야, / 염소야. / 봄이 와도 너는 / 놀러도 못 가니?” ..  (1940년, 염소)

.. 얼음 어는 강물이 / 춥지도 않니? / 동동동 떠다니는 / 물오리들아 / 얼음장 위에서도 / 맨발로 노는 / 아장아장 물오리 / 귀여운 새야 / 나도 이젠 찬바람 / 무섭지 않다 / 오리들아, 이 강에서 / 같이 살자 ..  (1980년, 겨울 물오리)



 안데르센 님이나 린드그렌 님이나 이원수 님이나 문학하는 마음은 처음과 끝이 같습니다. 처음과 끝이 다른 문학을 했다면 이분들이 사랑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도록 어린이사랑과 사람사랑과 삶사랑을 이었기에, 이분들은 두루 사랑받을 만합니다.

 이원수 님을 놓고 지난 2002년 즈음부터 ‘친일시 발굴’이라고 하면서 퍽 떠들썩하게 이야기할 뿐 아니라, 이원수 님이 태어난 지 100돌을 맞이한 올해에도 이원수 님을 기리는 잔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관청에서는 이원수 님이 훌륭한 길을 걸었든 가난한 길을 걸었든 여태제껏 제대로 돕거나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관청(창원시)에서 어설피 이원수 님을 기리려 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기리려 했으면 1981년에 숨을 거둘 때부터, 아니 숨을 거두기 앞서부터 기려야 했겠지요. 서른 해나 지나고서야 기린다고 법석을 떤다면 조금도 좋은 모양새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원수 님이 멍에처럼 짊어지며 살았던 생채기와 아픔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으면서 기리기만 할 때에는 몹시 슬픕니다. 그리고, 이원수 님 이름 앞에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 사람들도 참 안타깝습니다.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한 사람이지 ‘친일 아동문학가’가 아닙니다. 이원수 어린이문학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사랑받았는가를 느끼거나 헤아리지 못하니까 그저 이런 딱지붙이기를 하고 마는구나 싶습니다.


.. 깎아지른 돌산 / 삐죽삐죽 내민 바윗돌 모서리 / 반이나 떨어져 나가 / 허연 뼈 살이 바람에 시린 // ― 돌산. / 그 위에 / 오밀조밀 판자집 동네. / 동네 아이들 노는 곳에 / 바로 낭떠러지, / 아, 무서운 벼랑. // 아래에선 오늘도 / 우르릉 광…… / 우르릉 우르릉 …… / 다이너마이트가 산을 깬다. // 화려한 동네를 눈 아래 두고 /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 / 돌산 동네의 아이들은 // 폭음을 배 속에 들이마시며 / 벼랑 위에 자라는 독수리들이다. / 날개가 어려서 아직은 / 부리로 논다 ..  (1967년, 산동네 아이들)

.. 해가 지면 성둑에 / 부르는 소리. / 놀러 나간 아이들 / 부르는 소리. // 해가 지면 들판에 / 부르는 소리. // 들에 나간 송아지 / 부르는 소리. // 박꽃 핀 돌담 밑에 / 아기를 업고 / 고향 생각, 집 생각 / 어머니 생각―. // 부르는 소리마다 / 그립습니다. / 귀에 재앵 들리는 / 어머니 소리 ..  (1946년, 부르는 소리)



 이원수 님이 1961년에 쓴 동화 〈앵문조〉를 읽으면, “어머니, 자유는 귀중한 거라고 우리 선생님도 그러셨는데, 식민지에서 남의 나라 지배만 받고 사는 민족은 참 불쌍하지 않아요? 왜 그런 지배를 받고 견디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원수 님도 친일시를 썼습니다. 기록으로 남았고, 2002년에 앞서 벌써 알려진 일입니다. 그러나 2002년 앞서에는 이원수 님이 쓴 친일시를 놓고 죽은 이 무덤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원수 님이 이룬 어린이문학이란 ‘바로 이 친일시 때문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쓴 뒤로 해방 뒤부터 독재정권을 거쳐 민주운동 불길이 치솟을 때까지도 권력 그늘에서 맴돌았습니다. 아니, 친일시를 쓴 이들치고 해방을 거쳐 독재정권을 지나 민주운동을 하는 흐름에 걸쳐 참다운 독립과 자주와 평화와 민주를 바라는 일을 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은 친일시를 썼으나, 일제강점기에 펼친 어린이문학을 비롯해 해방 뒤부터 독재정권으로 어둡던 때까지 늘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다운 어린이랑 가난한 사람 자리에 서서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이원수 님이 스스로 ‘내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이렇게 말한 적이 없으니 이원수 님은 그야말로 잘못했다고.

 그래요,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이원수 님은 당신 입을 빌어 ‘나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 일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뉘우칩니다.’ 하고 밝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이원수 님이 잘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글로 밝혀야 한달 수 있겠지요.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글로 밝히는 뉘우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원수 님은 사상가나 이론가나 혁명가나 철학가나 교육가나 기자나 지식인이 아닙니다.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린이한테 언제나 뉘우쳤습니다. 당신이 몹시 가난하고 힘들게 어렵사리 살림을 꾸리던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당신 집식구를 먹여살리면서 친일시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친일시를 쓴다 해서 당신 살림이 나아졌다거나 당신 이름이 드높아졌다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친일시를 쓰라고 떠밀려서 친일시를 썼지만, 막상 밥그릇이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 쓴 시가 더 부끄러워질 노릇이지요. 당신 몸을 팔아 쌀자루나마 얻으려 했는데, 몸만 팔고 쌀자루는 얻지 못했으니까요. 몸 팔린 채 버려지고 말았으니까요.

 아마 이원수 님이 병으로 1981년에 숨을 거두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아남아 1990년대를 살거나 2000년대까지 살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바라는 뉘우침글’이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해방 뒤에도 늘 빠듯한 살림으로 살아가며 어린이문학을 하던 사람한테 ‘다른 글’을 바랄 수 없습니다. 아니, 다른 글을 바라기 앞서 이원수 님이 쓴 글이 어떤 글인가를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어린이들한테 씩씩하고 꿋꿋하며 참답고 착하게 살아가라고 북돋우는 글을 어떻게 썼는지 읽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아무리 가난하거나 힘들거나 슬프더라도 기운을 잃지 말라며 쓴 문학에 어떠한 눈물이 깃들었는지 읽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머지, 굶는 아이들을 소리없이 울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나머지, 집안을 이끌 아버지로서 어찌할 바 모르며 헤매던 나머지, 글을 팔고야 마는데, 글을 팔고 난 뒤에도 똑같이 힘겨운 살림이었기에 생채기와 아픔을 더 속으로 파묻을 수밖에 없이 외로이 살면서 어느 권력하고도 가까이하지 않고, 어느 명예하고도 사귀지 않으면서 견딘 가녀린 목숨줄을 읽어야 합니다.

 이원수 님은 숨을 거두기 앞서 비로소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찬바람이 무섭지 않다고 겨우 한 마디를 뱉고 나서는 더는 아무런 말마디를 뱉을 수 없었습니다. 뱉고 싶어도 몸이 따라 주지 못했으니까요.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고 한 마디를 겨우 이었습니다. “얼음 어는 강물”에서 “춥지도 않”은지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을 떠올리면서,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를 생각하면서, 아 그렇구나 그래 참 그렇지, 나는 밥굶기가 무서워 친일시를 쓰고 말았지만 내 삶에 이렇게 슬픈 얼룩이 지고 말았지만, 나처럼 또는 나보다 더 굶주리던 사람들은 이 춥고 매서운 날에도 얼음과 찬바람에 지지 않고 씩씩하면서 예쁘게 살았구나 하고 느끼며 “귀여운 새야” 하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는 ‘참회록’을 쓰겠지요. 어떤 이는 ‘반성문’을 쓰겠지요. 그리고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겨울 물오리’를 노래했습니다. 다른 사상가나 철학가나 교육가나 혁명가나 운동가나 기자나 지식인들은 ‘참회록’이나 ‘반성문’ 같은 틀(형식)을 바라겠으나, 이원수 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늘 어린이 자리에서 어린이 꿈과 삶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어린이 목소리와 노래 결에 따라 ‘겨울 물오리’를 노래했습니다. 어린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깨끗한 말글로 가장 쉬우면서 맑은 동시와 동화와 수필을 써서 아이들한테 남겼습니다.

 나는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읽을 때마다 가슴으로뿐 아니라 볼따구니를 타고도 눈물이 흐릅니다. 이원수 님이 쓴 모든 글마다 당신 지난날을 가슴아프게 뉘우치는 말마디가 깊디깊이 아로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이렇게 꾸준하게, 이렇게 거듭거듭 뉘우치면서 슬퍼한 사람은 이 나라 한국에 아무도 없습니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서른다섯 해, 1946년부터 1981년까지 서른여섯 해를 산 이원수 님은, 당신 앞삶 반토막을 되씹으며 당신 뒷삶 반토막을 한길로 걸었습니다.

 이원수 님은 기념관이라든지 문학관 따위에 당신 글과 넋과 꿈이 깃들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글과 넋과 꿈은 오로지 어린이 가슴에 살포시 깃들 수 있으면 고맙겠다고 여겼습니다. 막상 이원수 님이 바라거나 꿈꾸지도 않은 기념관을 놓고 툭탁툭탁 싸우는 어른들이 슬픕니다.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딱지붙이기하고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허울좋은 껍데기를 집어치우고,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으며 어린이마음을 예쁘게 보살피면 좋겠습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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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


 백기완 님이 어느 땅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 막상 떠올려 보자니 잘 생각나지 않는다. 황해도였던가 평안도였던가. 황해도가 아니었나 싶은데, 함경도이든 전라도이든 크게 보자면 한겨레 삶터에서 태어난 사람이요, 좁게 보자면 여느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백기완 님이 내놓은 책을 모두 읽었다. 예전 책부터 요즈음 책까지 모두 읽었다. 백기완 님이 쓴 시집 《젊은 날》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가지로 나왔던 판에 따라 다 있다. 예부터 백기완 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고 생각했다. 백기완 님은 ‘당신 고향마을을 몹시 아끼며 사랑하는’ 분이다.

 백기완 님을 일컬어 ‘우리 말을 잘 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왜 사람들이 백기완 님을 일컬으며 이런 이름표를 붙이는지 알쏭달쏭하다. 백기완 님 책을 제대로 안 읽었기 때문일까. 엉터리로 읽었기 때문일까. 읽다가 덮었기 때문일까. 백기완 님 삶과 넋을 읽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 말을 잘 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는 백기완 님한테 걸맞지 않다고 느낀다. 백기완 님은 ‘우리 말을 잘 살리는’ 사람이 아니다. 백기완 님은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마을 사람들이 쓰던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마을, 곧 당신 고향마을 사람들 말마디 가운데 ‘한겨레 삶터’ 곳곳에서 함께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말을 즐겁게 나누는 사람이다. 전라도말을 전라도사람만 쓰거나 경상도말을 경상도사람만 쓰기보다, 서로서로 예쁘게 잘 쓰는 말을 다 함께 쓰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생각하며, 몸소 이러한 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백기완 님은 서울말을 표준말로 삼는 흐름을 달가이 여기지 않는다. 서울사람이 예부터 서울에서 살아오며 쓰던 말이 오늘날 서울말이 아니기도 할 뿐더러, 지식인들이 표준말이건 서울말이건 한국말이건 너무 좁다랗게 옭아매는 모습을 몹시 안타까이 바라본다.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 겨레가 저마다 뿌리내린 고향마을에서 살가이 주고받는 말을 한껏 북돋우면서 나누는 말이어야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 백기완 님이라고 느낀다.

 백기완 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 말을 잘 살려서 쓴다고 뽐내지 않는다. 백기완 님은 당신이야말로 우리 말을 알뜰히 사랑한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당신 고향마을 사람들 구성지며 착한 말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온몸으로 아낀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인천사람으로서 인천말을 한다. 인천말은 부천말이나 수원말하고 다르다. 인천말은 서울말이나 경기말하고 다르다. 수원사람이 쓰는 수원말은 수원말대로 곱다. 내가 쓰는 인천말은 내 인천말대로 곱다. 더 곱거나 덜 고운 말이란 없다고 느낀다. 서로서로 똑같이 고울 뿐 아니라, 서로서로 나란히 예쁘다. 고운 사람으로서 고운 넋에 걸맞게 고운 말을 쓴다. 예쁜 삶을 사랑하면서 예쁜 꿈을 품고 예쁜 글을 쓴다. 백기완 님은 당신 고향을 예쁘게 사랑하며 곱게 아끼는 푸근한 할아버지이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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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과 진중권


 김규항 님은 진중권 님을 놓고 “‘진보 행세하는 개혁’을 저리 옹호하는 풍경은 참으로 난감하다”고 이야기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말이 옳다. 진보를 내세우는 ‘진보 아닌 사람’ 쪽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를 말하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하는 일은 잘못이다. 더군다나,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를 이루려고 애쓰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한다면 더 크게 잘못이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기보다 머리와 말로 ‘나는 진보요!’ 하고 외치기만 한다면 끔찍하게 잘못이다.

 나는 진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수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보이거나 수구이거나 대수롭지 않다. 사람다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좋다. 누군가는 개혁이나 진보를 좋아할 수 있고, 누군가는 보수나 수구를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옳고 바르게 즐겨야 한다. 나쁘거나 짓궂게 즐길 노릇이 아니라, 옳고 바르며 착하게 즐겨야 한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낚싯대로 고기를 잡든 그물로 고기를 잡든 누군가 고기잡이를 해 주어야, 등푸른고기이든 속살하얀고기이든 장만해서 먹을 수 있다. 내가 먹는 물고기를 잡아서 팔아 주는 사람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개혁인지 보수인지 알 길이 없다. 물고기를 팔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물고기를 돈 몇 푼으로 사서 먹을 뿐이다. 그저 물고기 한 마리를 사더라도 되도록 생협을 거친 물고기를 사려고 한다. 멸치이든 오징어이든 삼치이든 동태이든, 생협을 거친 물고기를 살 수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나는 짐승을 키우지 않는다. 우리 집은 소이든 돼지이든 닭이든 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소고기이든 돼지고기이든 닭고기이든 먹곤 한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고기를 먹을 일은 참말 한 차례도 없으나,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언제나 고기를 먹어야 한다. 내가 먹는 소나 돼지나 닭을 키우는 사람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개혁인지 보수인지 알 길이 없다. 고기집 일꾼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알 노릇이 없다. 그저 고맙게 먹는다.

 내가 읍내나 면내에 마실을 가려고 타는 시골버스를 모는 일꾼이 진보인지 개혁인지 수구인지 보수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하루에 여섯 대 오가는 시골버스를 때 맞춰 타면서 고맙다고 인사할 뿐이다.

 진중권 님은 “물론 A급 좌파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궁금하다. 사람을 이렇게 등급으로 나눈다고 할 때에 ‘등급으로 나누었’는데에도 스스로 나눈 등급에 드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 님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일까. 진중권 님과 가까이에 있는 동무나 이웃은 누구일까. 진중권 님이 설날이나 한가위 때에 마주하는 살붙이는 어떤 사람들일까. 진중권 님을 낳아 키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진중권 님이 날마다 먹는 밥은 누가 흙을 일구어 마련했을까. 참말로 이 나라에, 또 이 지구별에 ‘A급 좌파’는 없을까.

 두 사람, 김규항 님과 진중권 님이 불태우는 말나눔은 참으로 부질없다고 느낀다. 아니, 덧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토록 부질없고 덧없는 말나눔이 아니고서는 생각을 나눌 수 없는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말나눔으로 서로서로 생각을 펼치거나 생각을 깨우칠밖에 없다고 느낀다.

 나는 딱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삼월 삼일, 곧 삼짓날인 오늘 자가용 아닌 시외버스를 타고 가까운 시골 아무 데로나 가서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논둑길에 돋는 새봄 새 풀싹을 들여다보셔요. 이 풀싹 아무 풀이나 톡 뜯어서 옷섶으로 흙을 슥슥 닦은 다음에 입에 넣어 살살 씹어 보셔요. 풀싹이 겨울을 이겨내어 봄맞이 햇살을 받으며 잎을 틔운 맛과 내음을 맞아들여 보셔요. 진보는 바로 논둑길과 들판과 숲속 봄싹에 있습니다.’ 하고.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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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즈키 시게루


 한국에 ‘미즈키 시게루’라는 이름이 제대로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 들어온 일본만화치고 제대로 만화쟁이 이름이 알려진 작품이 몇이나 되었던가. 웬만한 일본만화는 ‘한국 삶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땅이름·사람이름·물건이름·가게이름을 모조리 바꾸어 내놓았으니까. 더구나, 마치 한국사람이 그린 만화라도 되는 듯 일본 만화쟁이 이름을 가리거나 숨겼으며, 어느 때에는 아예 한국 만화쟁이 이름을 집어넣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만화책을 낸 출판사는 일본만화를 몰래 펴내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아꼈’을까. 아니,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까.

 요사이 ‘미즈키 시게루’ 님 만화책과 만화영화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1980년대에 그토록 자주 보며 좋아하던 요괴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 님 만화였는 줄 안 지는 이태쯤 되었다. 예전에는 누구 만화인지 몰랐고, 그저 어느 한국 만화쟁이가 그렸겠거니 여겼다. 《드래곤볼》이라든지 《슬램덩크》 같은 만화는 해적판이 나돌았을지라도 만화쟁이 이름을 밝혔고, 1960년대부터 번안만화로 들어온 아톰 만화 또한 만화쟁이 이름을 밝혔지만, 미즈키 시게루 님 요괴 만화만큼은 한국 출판사에서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지난 2009년 《게게게의 기타로》 일곱 권이 우리 말로 처음 나오면서 ‘미즈키 시게루’ 님 이름이 제대로 붙는다. 2010년에는 《농농 할멈과 나》라는 만화책이 나온다. 그렇지만 이 만화책들은 그다지 널리 읽히거나 팔리지는 못하는 듯하다. 문득 궁금해서 일본 만화영화가 있나 살펴보았더니, 자그마치 100편이나 되는 동영상이 뜬다. 네 살 아이랑 집에서 하나씩 보는데, 아이는 하나도 안 무서운지 눈알 한 번 꿈쩍꿈쩍 하지 않으면서 빠져든다. 100편째 만화영화를 보면 “게게게 기타로 40돌”을 기리는 글월이 큼직하게 뜬다. 마흔 돌? 만화책 《게게게의 기타로》를 펼친다. 미즈키 시게루 님은 당신 요괴 만화를 1965년부터 그렸다고 한다. 아, 어느새 마흔여섯 돌이구나. 네 해만 있으면 벌써 쉰 돌이 되네.

 《농농 할멈과 나》는 미즈키 시게루 님 어린 나날을 들려주면서, 당신이 요괴 만화를 그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농농 할멈’과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니까, 미즈키 시게루 님은 농농 할멈한테서 요괴 이야기를 들었고, 농농 할멈은 또 어린 날 당신 어머니와 할머니한테서 요괴 이야기를 들었겠지.

 미즈키 시게루 님은 농농 할멈 마음에 아로새기진 책을 하나하나 받아먹으면서 자랐고, 나중에 만화쟁이가 되어 만화책을 낳았으며, 농농 할멈은 글을 쓰거나 책을 낸 적은 없으나 이야기와 삶과 웃음과 눈물로 책삶을 일군 셈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둘레에 농농 할멈 같은 분이 매우 많다. 어쩌면, 이 나라 이 땅 모든 할머니는 농농 할멈과 같은 분이 아닐까. 모두들 가슴속에 깊디깊은 이야기를 꼬옥 품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할머니한테서 당신 살아온 이야기하고 옛이야기를 즐겁거나 기쁘게 들으며 받아먹는 아이는 없거나 드물지 않나.

 미즈키 시게루 님이 일본뿐 아니라 나라밖으로도 손꼽히면서 이름을 날릴 만큼 사랑받은 만화쟁이가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당신이 어린 날부터 아끼고 좋아하며 모시고 섬긴 농농 할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알고 보면, 미즈키 시게루 님 게게게 이야기는 농농 이야기이고, 농농 이야기는 모조리 게게게 이야기이다. (4344.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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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3-02 00:42   좋아요 0 | URL
재미있겠어요. 전 미즈키 시게루도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도 기억에 없는데, 저 그림체만은 기억이 나네요. 오랜만에 보관함에 담아봅니다.

숲노래 2011-03-02 07:03   좋아요 0 | URL
요괴 만화는 으레 이분 만화를 몰래 훔쳐서 쓴 우리 나라 예전 만화잡지와 학생잡지였기에, 이분 이름이 낯익은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러나 어른들도 이분 만화를 보여 드리면 '어디에선가 본 듯하다'는 말을 으레 하더군요.

한번 읽어 보시면 1960년대부터 이런 만화를 그린 만화가가 참 놀라우며, 이분을 키운 농농 할멈이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대단했던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답니다~